교수체제개발 I nstructional S ystems D evelopment 1목 차 교수체제개발의 개념 및 특징 여러 가지 교수체제개발 모형 비교 (ADDIE 모형 , 딕 케리 모형 ) 교수목표의 진술 ( 메이거 , 가네 , 메릴 ) 과제 분석의 주요 기법 2교수체제개발의 개념 교수체제개발 ( I nstructional S ystems D evelopment) 이란 ? 교수를 일종의 체제로 보고 교수체제를 개발하는 것 1) 체제 및 체제적 접근 ①체제 (system) 공통의 목적을 위해 여러요소 들이 체계적으로 구성된 조직체 ( 호반 Hoban, 1960) 정해진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협력하는 상호관련된 구성요소들의 집합체 ( 딕과 케리 Dick Carey,1996) 최소한 둘 이상의 구성요소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특정한 구성 단위 ( 스타이너 Steiner,1988) 3교수체제개발 의 특징 1) 체제의 특징 임의성 체제의 범위와 구성요소를 결정할 때 관점이나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의미 총체적 관계 총체 내의 구성요소들이 맺고 있는 여러 유형의 유기체적인 관계 4교수체제개발의 특징 2) 교수에 대한 체제적 접근 교수와 관련된 문제의 정의 문제의 분석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의 설계 및 개발 해결방안의 실행 평가와 교정의 다섯 가지 활동 5교수체제개발의 특징 3) 교수체제개발의 특징 ① 문제해결 지향적 교수와 관련된 여러 문제를 포착하고 해결이 목적 ② 총체적 접근 교수와 관련된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방안 고안 - 여러 구성요소 포괄적 관심 ③ 맥락 중시 체제를 둘러싼 외부 환경과의 지속적인 상호 작용 속에서 역동적 변화 - 문제의 분석 및 해결 전반에 걸쳐 반영 ④ 가치지향적 그 과정과 결과에 개발자 혹은 관련 이해집안의 가치판단 개입 6교수체제 개발의 영역 분석 및 설계 교육에 필요한 영역 선정 학습자와 교수조건 , 가용한 자원 분석 프로젝트 일정 수립 개발 구체적인 교육 목표 , 내용 추출 최적의 교수 - 학습 방법 , 매체 선정 학습자료개발 평가 개발된 프로그램의 적절성 평가 딕과 케리 (1996) 형성평가 , 총괄평가 7교수체제개발 모형 1) ADDIE 모형 참고 :http://cafe.naver.com/eduistclass/42교수체제개발 모형 2) 딕 케리 모형 ( Dick carey ) 체제접근에 입각하여 교수 설계 , 교수 개발 , 교수 실행 , 교수 평가의 고정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모형 분석 설계 개발 평가 9 참고 : http://blog.naver.com/khs89821?Redirect=Log logNo=130030729458교수체제개발 모형 - 딕 케리 모형 분석 ① 교수목표 학습자가 학습을 마친 후에 무엇을 할 수 있게 되는가를 결정하는 것 . ② 교수분석 교수목표가 설정된 뒤에 그 목표가 어떤 학습 유형 ( 지적기능 , 심체적기능 , 언어적기능 , 태도 ) 에 속하는가를 결정 . 유형이 확인되면 , 목표달성을 위해 하위기능을 분석하고 , 어떤절차로 학습되어야 하는가를 밝히는 것 . ③ 학습자 및 환경분석 학습자들이 사전에 획득하고 있어야 하는 기능을 분석 . 고려할 필요가 있는 학습자의 특성을 살 펴보아야 함 . 10교수체제개발 모형 - 딕 케리 모형 설계 개발 ④성취목표진술 학습 종결 후에 학습자에게 기대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진술하는 것 . ⑤평가도구 개발 가르치고자 했던 기능을 학습자가 성취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검사문항을 개발하는 것 . 문항에서 측정하는 것과 목표에서의 성취행동이 반드시 일치해야 함 . ⑥ 수업전략수립 교수 프로그램의 최종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이용하고자 하는 전략 ( 교수 전 활동 , 정보제시 , 연습 및 피드백 등 ) 을 설정하는 것 . ⑦ 수업자료개발 교수전략에 따라 교수프로그램 ( 학습자용 활용지침서 , 교수자료 , 교사용 지침서 등 ) 을 만드는 것 . 11평가 ⑦ 형성평가 설계 및 실행 교수 프로그램의 초안이 완성되면 , 프로그램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평가를 의미 .( 일대일 평가 , 소집단 평가 교수프로그램의 수정 형성평가의 결과를 바탕으로 교수 프로그램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수정 보안 . 교수분석의 타당성 , 학습자의 출발점 행동 및 특성분석의 정확성 , 성취목표 진술의 적절성 , 검사 ㅡ 문항의 타당성 등을 검토하여 수정 . ⑨ 총괄평가 설계 및 실행 교수 프로그램의 절대적 혹은 상대적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것으로 충분한 수정이 이루어진 후에 실시 . 12 교수체제개발 모형 - 딕 케리 모형교수목표 설정 1) 교수목표 설정 이유 - 수업 과정과 활동에 대한 의사소통의 객관성을 유지하고 , 수업 후에 학습의 결과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 -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 어떤 전략과 기법을 활용해서 가르쳐야 하며 , 가르치고 난 후에 평가할 능력 , 지식 , 기능 등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준거가 됨 - 수업 시간을 적절하게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근거도 제공 2) 교수목표 선정 - 목표 목록 , 특정 교육과정의 요구분석 결과 , 문제의 관찰 , 전문가의 성취행동 분석 결과 ,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요구 사항들을 참조해서 이루어짐 - 교수설계자는 교수목표에 대한 합의를 해당조직과 학습자들로부터 도출할 수 있어야 함 13교수 목표의 진술 1) 메이거의 교수 목표 진술 학습자가 수행하게 될 행동 (Behavior), 학습행위가 일어나게 되는 조건 ( Cindition ) 그리고 학업의 달성 수준을 판정할 수 있는 준거 (Criterion) 의 세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짐 행동 준거 조건 학습이 끝난 후 학습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를 나타낸 것 학습하는 상화에서 학습자가 처하게 될 한계 혹은 제약 조건 수락 될 수 있는 수행 수준 지도를 보고 우리나라 도시 이름은 10 개 이상 말할 수 있다 . 14 참고 : http://cafe.naver.com/et0634/4422) 가네의 교수 목표 진술 성취 상황 학습된 능력 성취 내용 성취 행동 성취 도구 , 제한점 , 조건 예 ) 긴 문장을 제시했을 때 , 전기 타자기를 이용 타자함으로써 한 카피의 복사본 를 만들 수 있다 . 성취행동 대상 학습된 능력 15 교수 목표의 진술행동적 교수 목표 진술의 장 , 단점 1) 장점 교육 내용 선정 , 교육방법 , 평가 등 학습 활동의 직접적 안내 교육목표로부터 평가로의 일관성 유지 2) 문제점 행동 목표로 표현할 수 없는 교육 목표 간과 전체적인 수준에서 교육 방향 제시의 어려움 16 참고 : 일반사회교육론 강의자료학습과제 분석 1) 과제 분석의 개념 교수 내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 위해서 가르쳐야 할 모든 종류의 지식이나 기능을 분석하는 과정 ( Reigeluth , 1983) 2) 과제분석이 교수설계에 주는 이점 ( 박성익 1997; Gibbons 1980) ①교육을 통하여 성취시키고자 하는 지식이나 기능의 모든 성취목표를 확인 ②교육요소나 목표들 중에서 불필요한 것은 제거 효과 ③논리적으로 계열화되어 있고 조직화되어 있는 수업에 의하여 학습과 파지의 효율성을 증가 ④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전문가들이나 연구원들 간에 의사소통을 개선 효과 ⑤교육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부적절한 수행 개선 효과 17학습목표의 분류 블룸 (Bloom) 의 분류 인지적 영역 정의적 영역 심동적 영역 지식 주의 반사동작 이해 반응 기본 동작 적용 가치화 지각 능력 종합 조직화 신체 평가 인격화 숙련 동작 동작적 의사소통 182) 가네의 분류 ① 언어 정보 (verbal information) 주로 기억에 의존하는 단편적인 사실이나 사건 ②지적 기능 (intellectual skills) 상징적 부호를 사용해서 인간이 환경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습득되는 대부분의 학습기능 분류 개념 원리 문제해결 19 학습목표의 분류학습목표의 분류 - 가네 ③인지 전략 (cognitive strategies) 학생이 기억하고 , 사고하며 , 학습하는 방법이나 기법에 관한 기능 ( 예 : 태정태세문단세 ~) ④태도 (attitude) 어떤 대상에 대해 학생이 지니는 마음 상태 , 무엇을 선택하는 경향성 ⑤ 운동기능 (motor s동을 수반하는 근육 운동에 관련된 학습 영역 20학습목표의 분류 3) 메릴의 분류 메릴 (Merrill) 은 가네의 지적능력 영역의 분류를 기초로 내용차원과 수행차원으로 이원화하여 행렬식으로 제시 메릴의 내용요소제시이론 (Component Disply Theory : CDT) 에 의하면 , 학습과제에 대한 이원분류표는 수업설계 , 특히 수업의 효과적인 처치를 위한 기초가 된다 . 21학습목표의 분류 - 메릴 내용 - 요소 메트릭스 수행수준 내용차원 사실 개념 절차 원리 발견 ( 개념 x 발견 ) ( 절차 x 확인 ) ( 원리 x 발견 ) 활용 ( 개념 x 활용 ) ( 절차 x 활용 ) ( 원리 x 활용 ) 기억 ( 사실 x 기억 ) ( 개념 x 기억 ) ( 절차기억 ) ( 원리 x 기억 ) 각 각은 ( 내용 x 수행 ) 의 조합을 이룬다 내용요소 제시이론에서 학습과제를 내용차원과 수행차원의 구분한 후 , 적절한 교수방법을 제시 낱개의 아이디어를 가르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는 의미에서 미시적 교수설계이론으로 분류 22 참고 : http://blog.naver.com/minikiwasue/50016937732과제 분석의 주요 기법 1) 위기 분석 분석된 과제의 학습 유형이 지적 기능이나 운동 기능일 경우에 주로 사용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기능들을 상위기능과 하위기능으로 분석 하위 기능은 상위 기능을 학습하기 위해서 반드시 숙달해야 하는 선행학습 2) 군집 분석 언어정보의 학습과제를 분석할 때 주로 사용 언어정보는 위계적 관계가 없으므로 , 주요정보를 효과적으로 묶는 방법을 분석하는 것이 적절 233) 통합 분석 위계분석과 군집분석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 주로 태도학습 목표를 분석하는데 사용 태도학습은 선행하는 어떤 하위 기능을 이해하거나 수행할 수 있어야만 학습이 가능 태도학습을 위한 통합분석은 태도에 수반되는 기능과 정보를 하나씩 분석함으로써 위계분석과 군집분석을 망라하여 이루어짐 24 과제 분석의 주요 기법25 THANK YOU !!{nameOfAppow}
종로와 그 일대에 담긴 문화사- 서울의 시작을 걷다- 목 차 -Ⅰ. 여행의 목적Ⅱ. 여행 시작1. 서울을 가르는 물길을 걷다- 청계천2. 세상으로 향하는 골목길- 북촌한옥마을3. 전통과 현대의 사이길마을-인사동4. 근대문화의 보고- 정동Ⅲ. 여행의 마치며Ⅳ. 참고문헌 및 출처Ⅰ. 여행의 목적흔히 역사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것이 현재를 이루는 바탕이 되고 미래를 예측하는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것이 살아 온 시간과 이야기를 땅에 남긴다. 때문에 우리는 땅에 남아 있는 시간의 흔적을 보고, 그를 통해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 시간에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사람들은 추억, 이야기, 역사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은 장소와 더불어 회상되고 조작된 기억으로 남는다. 어떤 곳에 가면 누구랑 왔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나는 것처럼 장소는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통로가 된다. 즉, 장소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이다.장소에는 시간도 담겨 있다. 서울을 예로 들어 보자. 북촌의 옛길에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청계천, 근대의 역사를 아우르는 정동길 등. 이들은 각자 다른 시대에 만들어졌지만 현재의 서울에 포함돼 있는 것들이다.시간의 창을 구분해보면 도시는 시기별로 다른 옷을 입는다. 고려시대의 서울, 조선시대의 서울, 개항기의 서울, 일제 강점기의 서울, 해방 이후의 서울은 서로 다른 도시다. 즉, 시기별로 서울의 풍경이나 문화는 달라지는 것이다. 도시는 시대를 담는 그릇이 되고, 유적지와 문화재의 경관은 그 시대의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그래서 도시사가 곧 문화사이다.그 중 우리는 서울의 문화사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조선시대부터 중앙천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청계천과 그 일대가 어떤 변화를 통해 발전해 왔는지,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이 모여 살았던 북촌의 옛길이 어떠했는지, 옛 사람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인사동 거리가 어떻게 살아남아왔는지, 조선시대 마지막 이야기와 선 임진(1592년)·병자(1636년) 두 차례의 전란을 겪는 이후 많은 유민(流民)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했다.17·8세기에는 때 아닌 이상기온현상으로 대풍, 폭우, 우박, 서리, 눈 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추위를 이기기 위해, 사람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했다. 이로 인하여 도성 주변에 있는 산들은 거의 민둥산이 되어 조금만 비가 내려도 토사가 쓸려 내려와 개천을 메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영조가 즉위한 1725년경에는 토사가 쌓여 하천 바닥이 평지와 같은 높이가 되기에 이르러 준천(濬川: 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 바닥을 깊이 파서 쳐냄)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이에 영조는 20여만 명을 동원해 자연 하천의 준천 공사에 대대적으로 착수하기에 이른다. 영조가 개천 준설을 시작한 까닭은 두 차례의 전란 이후 생계를 위해 도성으로 몰려든 유민들에 대한 구휼의 목적도 있었다. 이는 당시 그 일대 모여든 유민의 생활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청계천 유역은 오랫동안 수도 서울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해왔고, 문화와 경제부분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해 다른 지역에 비해 도시화가 빨리 이뤄졌다. 청계천을 따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가 생겨나고, 시전이 형성되었다.청계천은 북촌과 남촌을 구분하는 경계의 공간이기도 했다. 또 청계천 주변은 역관, 의관, 시전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 있었다. 이처럼 구도심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도시이므로 도시계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자연공원을 제외하면 녹지가 없는 지역으로 대부분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으로 이뤄져 있었다.1800년대 중반 서울의 풍물을 노래한 「한양가」에는 광통교 주변의 서화사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광통교 아래 가게 각색(各色) 그림 걸렸구나보기좋은 병풍차(屛風次)에 백자도(百子圖) 요지연(瑤池宴)과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며, 강남(江南)금릉(金陵)경직도(耕織圖)며한가한 소상팔경(蘇湘八景) 산수도(山水圖)도 기이하다.그 당시 광통교를 중심으로 한 청계천 주변과 정릉동(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반은 땅 위에, 반은 물위에 떠 있는 판자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형성된 판자촌과 여기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로 청계천은 더욱 빠르게 오염되어 갔다.도시 전체의 이미지도 크게 손상되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으며, 위생 면에서나 도시경관 면에서 청계천을 그대로 두고 서울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당시 어려웠던 우리나라의 경제상황 속에서 청계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유일한 방법, 그것은 '복개(覆蓋)'였다.이승만 前 대통령이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개하기 시작한 청계천은, 1970년 박정희 前 대통령 때 이르러서야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박정희 前 대통령은 청계천 주변을 기점으로 상가의 밀집과 교통량의 폭주로 1967년 8월 15일부터 4년에 걸쳐 청계고가도로 공사를 추진했다. ‘3-1고가도로’라고 불리는 청계고가도로는 도심에서 마장동까지 신호 없이 통과할 수 있는 고가도로로, 근대 서울 개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 청계천을 덮은 자리에 동대문운동장이 들어섰는데, 그 옆에 고속버스 터미널이 있어서 항상 사람들로 붐비던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의 성동구청 동쪽의 내부순환도로와 지하철 2호선 지선은 청계천 위에 만들어졌고, 중랑천은 동부간선도로와 평행하게 만들어졌다. 조선시대부터 있던 옛 하천이 현대 서울의 도로망 형성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경우다.청계천 주변에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촌은 헐리고 대신 현대식 상가건물이 들어섰으며, 토사와 쓰레기, 오수가 흐르던 하천은 깨끗하게 단장된 아스팔트 도로로 탈바꿈하였다.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에는 하루에도 수십만 대의 차량들이 지나다니게 되었고, 도로 양편으로 공구상, 조명가게, 신발상회, 의류상가, 헌책방, 벼룩시장 등 크고 작은 상가들이 밀집하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서울의 가장 부끄러운 곳이었던 청계천은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으로 서울의 자랑거리가 되었의 변화과정에서 중심부와 주변부가 역전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북촌의 모습> < 개량한옥>2) 북촌의 상징- 골목길?우리에게 '골목길‘이란?서양은 마을 한가운데 교회가 서고 광장이 있는 경우가 많다. 또 서양의 집들은 큰길 바로 옆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마을이나 도시에는 광장이 없었고, 교회처럼 중심이 되는 건물도 없었다. 또 유교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가족이나 가문을 가장 중시하여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대체로 가문 안에서 해결했고, 그래서 집안사람들끼리만 회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큰 광장이 필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집 안의 공적인 공간보다는 사적인 공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큰길 옆보다는 도시 안쪽에 집을 짓기 좋아했다. 게다가 도시나 마을을 형성할 때에는 곧은 길을 만들기보다는 굽을 길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주거지는 광장 대신 많은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복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역시 골목길이다.< 북촌 한옥마을의 골목길>북촌의 한옥 사이사이로 실핏줄처럼 얽혀 있는 골목길들은 한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성'이 담긴 생활공간이다. 한옥에서의 생활은 담장 안쪽에서 뿐만 아니라 담장 밖 골목에서도 여전히 일어난다. 골목은 빨래를 널고, 곡식이나 고추를 말리고, 아이들이 뛰노는 또 하나의 마당인 동시에, 이웃과의 담소가 오가고, 동네 노인들이 어울리는 마을 공유의 공간이다.한편, 한옥동네를 방문하는 사람에게는 서울 시민이 함께 공유할 도시경관이 된다. 작은 한옥들이 군집하여 만들어 내는 골목의 풍경이 가지는 아름다움은 서울의 대표적인 역사경관으로서 가치를 가진다.(3) ‘길’의 상품화 사례?베이징의 후통- 후통은 베이징의 모든 골목길을 지칭하지만, 협의의 후통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老베이징의 오래된 골목길을 의미한다. 또한 그 후퉁을 형성하는 전통 사합원의 건축까지도 포함한다. 이러한 공간적인 특징과 더불어 그 속에 살가고 있는 사람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 등을 동맛있고, 북촌에는 떡이 맛있었다고 한다. 북촌에서 떡이 유명해진 것은 궁궐에 살던 상궁 가운데 만들던 사람이 이곳에 터전을 잡고 떡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그 전총이 이어져 낙원동 떡이 유명해졌다는 말이 있다.?인사동의 현대적 건축 예술 공간- 쌈지길2004년 12월에 인사동길에 오픈한 '쌈지길'은 이름 그대로 '건물'이라기보다는 '길'의 의미가 강하다. 인사동에 수평으로 흩어져 있는 작은 가게들을 한 건물에 수직으로 옮겨 놓은 느낌이다. 특히 건축적인 특징에서 친환경적인 자연자재의 사용을 통해서 자연을 닮은 모습을 찾아내 가장 전통적인 한국적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최소 3평의 공간에서는 작가들에게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하고, 여러 디자이너들의 작업의도를 최대한 강조할 수 있는 작가별, 분야별 단독매장 형태를 취하는 특성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공예, 디자인, 전승문화의 종합문화콘텐츠를 한곳에서 누릴 수 있다.근래 들어 인사동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작은 가게들이 합필되어 현대식 대형건물이 신축되는 사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열두 가게 역시 그런 맥락에서 퇴출 대상이 퇴출 대상이 되었다. 1999년 12월 8일 이를 반대하는 이른바 '작은 가게 살리기 캠패인'이 시작되고 시민단체와 인사동 상인, 유명인사들의 청원운동이 계속되었다. 이때 철거 위기에 놓은 열두 가게 부지를 재인수한 것은 패션업체 쌈지다. 쌈지는 퇴출된 두 가게의 입주를 허락하고 이후 쌈지의 건물이 들어서더라도 열두 가게의 입주를 보장함으로써 열두 가게 살리기 캠페인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4. 근대유산의 보고- 정동정동일대는 조선개국 이후부터 수도인 한양의 중심지였고, 19세기말 20세기초 우리 근현대사의 중추적인 장소로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서구열강의 침탈과 대한제국의 멸망, 식민지의 오욕과 해방, 그리고 강대국에 의한 분단의 아픔 등 근현대사의 주요한 장면들이 이곳을 무대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있다.
1. 인구고령화의 개념인구고령화란 전체 인구 중 노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는 것을 말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고령사회(高齡社會)란 노인인구가 일정비율로 증가한 어떤 단계에 와서 그 비율이 거의 안정된 상태를 가리키며, '고령사회'란 전체인구에 대비한 노인인구의 비율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상태, 즉 인구의 고령화가 진행 중에 있는 사회를 뜻한다.고령화, 고령사회의 기준으로는 UN이 정한 65세이상 인구의 상대적 구성비를 활용하고 있다. 첫 번째 분류체계는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7% 미안인 국가를 고령기 국가(aged nation), 4% 이상 7% 미만인 국가를 장년기 국가(matured nation), 4%미만인 국가를 청년기 국가(young nation)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 분류체계는 세계적으로 고령화 현상이 두드러지지 못한 20세기 중반에 있어서의 분류체계라 할 수 있다.두 번째, 분류체계는 전체인구 중에서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7%이상 14% 미만의 사회를 고령화사회(aging society), 14% 이상 20% 미만인 사회를 고령사회(aged society), 20% 이상인 사회를 초고령사회(ultra-aged scociety)라고 한다. 이 분류는 고령화 현상이 급속히 진전되는 것을 인식하여 UN이 다시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후자의 분류기준을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2. 세계의 인구 구조 (2005년 기준)1) 주요연령계층별 인구구성비? 2005년 세계인구 구조를 보면, 0-14는 28.3%, 15-64세 64.4%, 65세 이상은 7.3%로 구성되어 있다.- 선진국(17.0%)은 0-14세 인구비중은 개도국(30.9%)보다 낮은 반면,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15.3%로 개도국(5.5%)보다 2.8배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경우, 0-14세 인구비중은 19.2%로 선진국(17.0%) 보다 약간 높은 반면, 65세 이상인구(9.1%)는 선진국(15.3%) 보상대적으로 낮다.? 이러한 세계 인구구조는 2050년이 되면 0-14세 인구는 점차 낮아져 19.8%가 되며, 15-64세 인구는 63.9% 수준을 유지하고, 65세이상 인구는 꾸준히 증가 하여 16.2%에 이를 전망이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는 0-14세 인구가 꾸준히 감소하여 8.9%가 되며, 15-64 세 인구도 감소하여 53.0%가 되고, 65세이상 인구는 38.2%로 늘어나 세계평 균(16.2%)보다 2배이상 높을 전망이다.? 한편, 2005년 각 연령계층별로 지역별 분포를 보면, 유소년인구는 선진국에 11.2%, 개도국에 88.8%가 분포하며, 고령인구는 선진국에 38.9% 개도국에 61.1%, 초고령인구는 선진국에 50.7%, 개도국에 49.3%가 각각 분포하는 것으 로 나타난다. 세계 연령별 인구구조 연령별인구의 지역분포2) 노년 부양비? 2005년 세계 인구의 노년부양비(15-64세 인구 100명당 65세 인구 비율)는 11인데, 선진국은 23, 후진국은 9로 나타난다.- 대륙별로 보면 유럽이 23으로 가장 높고 아프리카는 6, 남북한은 똑같이 13 으로 나타난다.?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출산력이 낮아짐에 따라 세계인구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 행되면서 2050년 노년부양비는 25로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우리나라의 노년부양비는 2030년(38)이후 선진국(36) 보다 높아질 것으로 전 망이다. 노년 부양비3) 노령화 지수? 2050년 세계인구의 노령화지수는 8? 2005년 세계 인구의 노령화지수(0-14 세인구 100명당 65세이상 인구 비율)는 26인데, 선진국은 90, 개도국은 18로 나타난다.- 대륙별로 보면 유럽이 100으로 가장 높고 아프리카는 8로 가장 낮다.- 남한은 47 북한은 35로 아시아 평균(23)보다는 높다.? 2050년 세게인구의 노령화지수는 82로 크게 늘어날 전망이며, 이중 선진국은 172로 늘어날 전망이다.- 대륙별로는 유럽이 190으로 가장 높고,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모두 100 수 준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우리나라는 2020년 126으로 선진국(118)보다 높아질 전망이다. 세계 지역별 노령화지수아프리카의 노인인구 증가와 노령화 지수는 어떠한가?1. 아프리카의 인구구조 아프리카 0-14세 인구비율 아프리카 15-64세 인구비율 아프리카 65세 이상 인구비율 아프리카 80세 이상 인구비율 아프리카 유년, 노년 부양비1) 주요연령계층별 인구구성비? 2010년 아프리카의 인구 구조를 보면, 0-14세 40.3%, 15-64세 56.3%, 65세 이상 3.4로 구성된다.- 아프리카는 한국 0-14세 16.2%와 비교하여 약 3배정도 높은 반면에, 15-64세 72.8%, 65세 이상 11% 보다는 상대적으로 낮다.? 이러한 아프리카의 인구구조는 2050년이 되면 0-14세 인구는 점차 낮아져 27.3%가 되며, 15-64세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여 65.6%에 이르고 65세 이상 인구는 7.1%로 늘어나 2010년(3.4%)보다 2배 이상 높을 것으로 전망한다.? 2010년 아프리카의 80세 이상 초고령 인구 비중은 0.4%로 아시아 1.1%, 유 럽4.2%, 북아메리카 3.8%, 오세아니아 2.9%와 비교하여 현저히 낮다.- 2050년에는 1.1%로 2010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하지만, 다른 대륙과 비교하 면 여전히 낮을 전망이다.2) 노년부양비? 2010년 아프리카 대륙의 노년부양비(15-64세 인구 100명당 65세 인구 비율) 는 6로 나타난다.- 유럽 11%, 아시아 10%, 북아메리카 19%, 오세아니아 17%로 비하여 현저 히 낮다.? 아프리카는 기대수명이 2010~2050 54.1세에서 67.4세로 늘어나고 이와 더불 어 출산력도 37,883,000명에서 83,302,000으로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2050년의 노년부양비는 11로 2010년 대비 약2배 증가할 전망이다.3) 노령화 지수? 20105년 아프리카 대륙의 노령화지수(0-14세인구 100명당 65세이상 인구 비 율)는 9로 나타난다.- 아프리카의 유소년 인구가 40.3%로 매우 높기 때문에 노령화지수가 낮게 나 타난다.? 2050년의 노령화지수는 25로 2010년 대비 3배정도 증가하지만, 다른 대륙과 비교해 볼 때( 아시아 98, 유럽 190, 북아메리카 126, 오세아니아 106) 현저히 낮을 것으로 전망한다.2. 북아프리카에서 나타나는 특징1) 북아프리카의 위치 및 국가? 서쪽으로 대서양에서부터 동쪽으로 이집트 사막까지의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 안지역이다.? 모로코, 모리타니, 리비아, 수단, 이집트, 튀니지 등이 속한다.? 그 중,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의 5개국에 걸친 석유매장지역이 있다.< 지도1> 아프리카 (녹색: 북아프리카)2) 북아프리카의 인구구조? 북아프리카의 대표적인 국가인 알제리, 리비아, 튀니지의 0-14세 인구비중은 30%미만으로 아프리카 평균인 40.3%에 비하여 현저히 낮게 나타난다.? 노인 부양인구인 15-64세 인구구조 역시 65% 이상으로, 아프리카 평균인56.3%보다 10% 더 높게 나타난다.? 65세 이상 인구도 3국가에서 모두 4.4% 이상이 나타나고 이는 아프리카 평균 3.4%보다 높다.? 0-14세의 유소년인구의 비율이 현저히 낮은 북아프리카에의 튀니지 29.5%, 알 제리 17.2%, 리비아 14.5%로 아프리카 평균인 8에 비해 상당히 높다. 아프리카 국가별 인구구조, 부양비, 노령화지수 아프리카 지역별, 기간별 60세 이상 인구 비율3) 북아프리카의 경제? 아프리카 원유 매장량은 2007년 기준으로 전 세계의 9.5%에 해당하는 1170 억 배럴으로 추정된다. 미 에너지부는 2020년 세계 원유 생산에서 아프리카가 차지하는 비중이 25%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그중에서도 북아프리카는 전 체 아프리카 대륙에서 절반 정도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MENA (Middle East North Africa)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말한다. MENA 의 전체 인구는 3억5천5백만명에 달하며, 구매력 지수로 평가한 국내총생산 (GDP)은 2조4천억 달러이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세계평 균보다 높은 6%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의 공통점은 모두 아랍계이며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이 풍부한 국가들이라는 것이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비교하여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높은 경제수준을 가지 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인구구조도 다른 개발도상국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The world's ageing population benefit Africa? 2009년 60세 이상 인구비율 -아프리카1) 아프리카 대륙은 2005년 이라는 전례없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중국을 포함한 많은 선진국들은 15-64세의 노인부양 인구가 줄어들고, 동시에 젊고 풍부한 노동력 공급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Ⅰ. 주제설정 및 한국 성당 건축의 문제점1. 주제설정이유나는 모태신앙을 가진 천주교신자로서, 내가 기억을 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성당에 다녔다. 이사를 다니며, 지금까지 5~6개 정도의 성당을 옮겨 다녔는데,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은 나의 첫 번째 본당인 '시흥동 성당'이다. '명동성당'처럼 고딕양식의 웅장한 모습은 아니지만 한쪽 벽면이 스테인드 글래스로 장식된 시흥동성당은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떤 성당보다도 멋진 곳이다. 성당을 건립한지 50년이 넘었고, 그 성당을 짓기 위해 신자들이 벽돌을 한 장씩 날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인지, 더 애착이 가는 게 사실이다.나는 당당히 '나는 천주교 신자'라고 말 할 수 있었던 순간부터, 우리나라 성당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당의 외형적인 모습 때문이다. 두집 걸러 하나씩 생겨나는 교회에 비해서 성당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더군다나 언제부턴가 성당건축이 각 성당들마다 비슷해지고 특히 2000년 이후 건립된 성당은 대형 교회의 외관과 별반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나의 잘못된 종교관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성당건축은 뭔가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동성당이나 인천의 답동성당과 비슷한 모습을 원하는 게 아니다.현재 한국의 성당은 성당의 근본적인 의미와 한국 혹은 우리시대의 정체성을 표현해 내지 못한 모습이다. 얼마 전, 우리 옆 동네인 은행동에 새로 성당을 건립하였다. 땅의 매입부터 매우 힘들었고,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새로 건립될 성당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성당이 다 지어지고 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술가가 많이 참여하여 특이한 조형물도 많고, 또한 건물 자체도 매우 실용적이라고 칭찬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 성당 역시 요 몇 년 한국에서 지어지고 있는 성당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은행동 성당은 2010년 4월에 완공되었다. 박스형태의 종탑 형식이나 스테인드 글래스로 표현한 창문은 다른 성당건축과 비슷한 모습이다.'한국성당의 또한 기록적인 수치를 보이고 있다. 2005년을 기준으로 전국의 본당 수가 약 1450개소이며, 내년 신축되는 성당 수도 50개 정도 이다.그런데 이처럼 엄청난 숫자의 성당이 건립되고 있음에도 전례적, 건축적 가치가 있는 성당은 극소수에 달한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더구나 건축적인 작품성이 있다고 평가되는 성당들도 실제 사용자들의 불평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이와 같은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겠지만 주된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째, 성당건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성당건축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성당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일까?전례·신학적인 관점에서 성당의 1차적인 존재이유는 미사전례를 거행하기 위한 장소와 공간의 필요성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962년에 개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내용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미사전례에 있어서 신자들의 적극적이고 완전한 참여를 천명하였다. 이는 성당의 형태적인 측면 역시 현대의 다양한 재료와 구조기술의 발달에 따라 과거 양식을 벗어난 자유롭고 창조적인 모습을 보이도록 하였으며, 각 지역의 전통적인 문화 내용을 담으려는 토착화의 노력을 찾을 수 있다. 성당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신성 강조로 인해 사제석과 신자석의 구별되어 있는 '하느님의 집'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집'이란 인식이 필요하다.둘째, 성당건축에 관계된 이들의 '진정성'을 지닌 자세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건축가는 성당의 계획단계에서 '싸고 폼나게' 또는 '빨리' 짓는 것이 주요관건이 될 때가 많다. 또한 전통적인 양식의 성당들을 지어야 한다는 정서가 지배적이어서 건축가들의 창조성을 억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가장 만만하다고 생각되는 종탑을 짓는다거나 예술가의 조형물이나 그림을 장식하는 성당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Ⅱ. 한국성당건축의 변천 역사 및 현대적 흐름220여년의 한국교회사에서 한국의 성당건축 역사는 110여년의 역사 밖에 되지의회 이후에는 전례의 변화와 함께 근대주의 개념의 성당이 시작되었으며, 토착화의 노력이 일부 발생한 이후 1980년대부터는 다원주의적 성격의 성당이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1. 초기 성당건축의 수용에서 근대 이전까지 (1880-1960년)1) 한옥식 성당신앙의 자유가 막 주어지기 시작한 1880-1890년에는 주로 기존의 한옥건물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부분적인 개조를 하여 사용하다가 보다 넓은 내부공간이 요구됨에 따라 한옥식 성당을 건축하였다. 한옥성당의 주된 특징은 한국의 전통 목조건축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옥성당은 주로 지방에서 건축되었으며, 당시 지방의 기술적·경제적 여건에도 적합하였다. 대표적인 성당은 전북고산 되재성당과 옛 공세리성당이다. < 옛 공세리성당 >2) 서양식 서당서양식 성당은 19세기 후반부터 대도시와 개항지를 중심으로 프랑스 신부들의 주도하에 붉은 벽돌조로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국내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의 대부분은 르네상스 양식이었으나 성당건축의 경우에는 주로 고딕양식이 채용되었다.서양식 성당은 주로 파리외방전교회의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얀세니즘(Jansenism)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라 근대문화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문화적 전통이나 역사에 대해 편견을 지니고 있었으며, 경건주의적 신앙과 자국의 문화 우월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서양식 성당을 그대로 도입한 배경에는 서양의 문화적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도 내포되었다고 여겨지며, 특히 당시 명동성당은 위치적으로 높은 언덕에 위치할 뿐 아니라 그 장대한 규모로 인하여 현대의 빌딩들로 가려지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서울의 중요한 랜드마크 역할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뽀족 첨탑의 고딕식 성당이 신자를 비롯한 일반인들에게도 그리스도교 종교건축의 기호처럼 여겨지는 정서를 지니도록 하였다고 추정된다. 그래서 이후 경제력이 약한 지방에서는 소규모의 약현성당을, 경제벽돌이 성당의 이미지로 간주되기 시작하였으므로 그 요소를 적극 수용하여 성당을 짓게 되었다.한·양 절충식 성당으로는 화산성당(1916), 황해도 은율성당(1918), 안성 구포동성당(1922) 등이 있다.?4) 양식 변형의 서양식 성당양식 변형의 서양식 성당은 외관 특히 종탑과 정면의 양식적 형태는 고수되고 있으며, 특히 전란 후에는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와 견고함이 새로이 인식되어 성당은 하느님의 견고한 성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구조체계와 관계없이 외벽을 화강석으로 치장하였으며 특히 종탑에 치중되었다. 이 당시 전통적인 양식성당을 건축하기에는 기술적·경제적 문제가 따랐기 때문에 외관이나 내부를 적절히 흉내 내는 수준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이 대부분이었다.주요 성당으로는 춘천 죽림동성당(1952), 의정부성당(1953), 용산성당(1954) 등이 있다.? 2. 근대 성당건축의 수용(1960-1980)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성당건축의 방향을 암시해주고 있지만 한국천주교회가 이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지 못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1960년대 이후에도 한국의 성당건축은 주로 양식변형의 서양식 성당으로 계속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주의(Modernism) 개념의 성당과 토착화의 시도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60년대 이후 한국의 성당건축은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1960년대의 성과는 극소수 한국인 건축가의 혁신적인 시도가 있기는 하였지만, 베네딕토 수도회의 독일인 신부 알빈(Alwin Schmid)의 개인적인 활동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가 20년 동안(1958-1978) 한국에서 설계한 79개의 성당은 같은 기간에 지어진 성당의 약30%에 해당되는데, 이는 성당건축가로서의 그의 재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당시 한국 건축계에 성당건축의 전문가가 부재하였음을 말해주기도 한다.1)근대화의 시도와 모색? 혜화동 성당(1960년)혜화동 성당은 기존의 전통적인 양식을 벗어난 근대주의 성당건축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엄성과 가톨릭을 훌륭하게 융화시킨 수준 높은 건물로 평가 받는다. 3. 현대 한국 성당건축의 경향(1980-현재)1980년도를 전후해서 한국 천주교회는 급격한 교세성장을 보였는데, 특히 경제발전과 관련한 사회의 도시집중화 현상과 병행하여 수도권을 비롯한 지방의 도시를 중심으로 신도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건축된 성당건축의 숫자는 거의 1,000개소에 육박한다. 이처럼 폭발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엄청난 숫자의 성당이 건축되었는데 그 양적팽창에 반비례하여 질적 수준은 대부분 저급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성당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염두에 두고, 우리시대의 문화적 내용을 담으려고 애쓰면서 성당건축의 본연의 모습을 구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1) 후기 모더니즘 유형의 성당후기 모더니즘은 근대건축의 이념과 형식을 계승하고 미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려는 시도 속에서 건물의 구조와 기술적인 이미지를 과장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또한 극도의 논리성, 극도의 동선, 기술의 강조, 기술의 장식적 사용, 실용주의적 사고 등을 표현함으로써 근대건축의 원리를 기술적 완벽의 경지에까지 발전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현대 한국 성당건축의 주된 성격으로 볼 때 상당부분이 이 유형에 속하고 있다.? 마산 양덕 성당양덕성당은 근대주의적 이념과 함께 전통주의적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간개념을 지닌 성당건축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중곡동 성당(1996-2001년)< 중곡동 성당의 외부 > 중곡동 성당 주변에는 주택과 3-4층 규모의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데, 도시의 외관을 염두에 두고 두 개의 박스를 연결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심곡 부활성당 (1997년) - 답사/인터뷰 조사부천에 위치한 심곡 부활성당의 형상은 병아리를 품은 어미닭의 모습에서, 또는 막 깨어나려고 하는 최초의 움직임이 있는 '알'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형상을 의도하고 있으며, 겹겹이 중첩된 벽으로 둘러싸인 큰 알의 표면은 깨진
등소평의 리더십에 관한 연구Ⅰ. 서 론내가 상해(上海)를 처음 간 것은 2002년이다. 그 이후에도 3~4차례도 더 상해를 방문했었지만, 내가 처음 도착에서 본 상해라는 도시는 나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포동(浦東)지구에 들어선 우뚝 솟은 현대식 빌딩이며, 다국적 기업들의 간판, 서울에 버금가는 자동차의 수 그리고 이른 아침 공원을 메우는 시민들의 태극권 등, 아직까지는 도로마다 자전거 행렬을 이루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어딘가 촌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자신감과 에너지로 가득 찬 그들에게 나도 모르게 위압감을 느끼게 되었다.그러면 무엇이 이 잠자는 거인을 깨운 것일까? 그것은 바로 개혁개방이었다. 등소평의 개혁개방 기치 아래 13억 인구가 일어선 것이다. 개혁개방은 제도와 이념에 구애되지 않고 대외개방을 하여, 다시 말해서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을 중화민족의 저력과 문화에 접목하여 21세기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하겠다는 야심찬 전략이다.1970년대 후반에 정권을 잡은 등소평(鄧小平)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오늘날 중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가져왔다. 또한 중국 공산당에서의 활동부터 항일전쟁, 국공내전, 문화혁명 등. 중국 근현대사의 격동기에는 항상 등소평이 있어 왔기에 등소평의 치열했던 삶이 곧 중국의 근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후에도 13억 중국인을 이끌어 나가는 중국 대륙의 정신적 지주인 등소평의 힘은 과연 무엇일까? 三上三下의 파란만장한 정치적 역경을 딛고 일어나 중국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받게 되는 등소평의 리더십은 무엇일까?나는 등소평의 생애와 그의 정치 역사, 그가 추진한 정책 등을 통하여 그의 리더십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Ⅱ. 등소평은 누구인가?덩샤오핑 鄧小平(등소평) [1904.8.22~1997.2.19]1904년 쓰촨성[四川省]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프랑스로 유학, 1921~1924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모스크바의 중산(中山)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1927년 광시[廣西]에서 공산당 지하운동에 아는 지도자였다고 한다. 그는 손문이 만든 동맹회의 혁명군 소대장을 맡았고 민간비밀결사체에서 두령을 지냈고 광안현의 단련국장을 지냈다. 이것을 보아 등문명은 약자를 대변하는 군인적 기질을 지닌 지도자였음 알 수 있다. 이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 등소평은 자연스럽게 변혁의 물결을 맞고 있는 조국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여러 조직에서 중책을 맡는 아버지를 보며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적 리더십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억눌리고 착취 받는 노동자들의 편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등소평 자신도 거대한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중국 인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개혁적 리더십을 가지게 되었다.프랑스 유학을 통해 주은래, 이립삼 등과 친분을 맺고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프랑스 유학을 계기로 그의 잠재해 있던 지도자적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다. 또 프랑스라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생활 경험이 등소평을 개혁주의자로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한편 유학시절에 그는 낮에는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그러나 중노동에도 불구하고 저임금, 연이은 실직과 배고픔을 체험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 착취와 서양인으로부터 받는 굴욕감이 등소평의 정체성을 흔들리게 하였다.하지만 그는 이를 잘 이겨내어 후에 지도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 이 시기는 그의 주체적 자아가 객체적 자아에 의해 수동적일 수밖에 없던 소년기를 지나 프랑스에서의 청년기는 객체적 자아를 능동적으로 주체적 자아로 수렴시키는 전환적 계기가 된 것이다. 이 때 형성된 그의 주체적 자아는 그에게 실용주의 개혁적 노선을 지닐 수 있게 하였다.ⅱ)내전과 항일전~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정치적인 훈련을 따로 습득했다기보다는 국민당과 일본이라는 이중의 적에 대한 오랜 혁명전쟁 과정에서 단련된 군사적 리더십을 통해 정치적 지도력을 형성해 왔다. 등소평 또한 1978년 미?중 국교정상화를 추진할 때 미국측 대표 브레진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주석은 군인이었고, 주총러한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낸 등소평에게 모택동은 "정확한 노선, 적절한 방법, 큰 업적"이라고 치하하였다. 서남지구에서의 시기는 그가 자신의 구상에 따라 한 지역을 독자적으로 지도했던 산 경험이었으며 아울러 놀라운 정치?경제적 성과를 거둠으로써 그의 군사적 리더십이 정치?경제적 리더십으로 전환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이 시기에 중국의 민족해방투쟁 및 국공내전 과정과는 달리 사회주의 현대화가 주요한 과제로 등장한 상황에서 전(專)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홍과 전의 문제는 중국 혁명의 계속성이라는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운용되어야 할 幹部지침이었다. 간부들은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론적으로는 모순이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현대화가 갈등적 영역으로 변질되자 전과 홍의 관계 또한 선택의 차원으로 변하게 되었다. 각각의 파벌 세력은 외양적으로는 이 兩者간의 동등한 무게 중심을 강조하면서도 각자의 정책노선에 따라 어느 쪽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에는 異見을 보였고 따라서 路線鬪爭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문제로 비화되었다.이 때 등소평은 1952년 8월 정무원 부총리로 선출되고 11월에는 국가획위원회 위원이 되어 48세에 중앙으로 진출한다. 그 다음 해인 1953년에 “사회주의로의 과도기 총노선”이 확정되었다.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추진된 제1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은 과도기 總路線에 근거한 최초의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경제성장 정책이었다. 이 계획은 소련식 모델에 따른 사회주의 경제발전의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중국내부의 노선투쟁에 의해 변질되었다. 양 노선간에 경쟁적으로 추진되던 과도기 총노선은 결국 소련식 공업화의 성공이 중국산업에서 절대적 비중을 점하는 농업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데다 오히려 그들의 犧牲위에 이룩된 결과였으며, 특히 부르주아 문화의 부활이라는 측면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모택동 노선의 전형적 모델인 ‘大躍進 運動’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등소평은 과거 엄청난 재해를 가져왔다. 59 년부터 식량생산량이 급격히 떨어졌고 58~61년에 걸쳐 약 2,000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이 것은 생산력의 기반이 약한 중국현실의 여러 조건을 무시하고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농업을 뒤로하였고 이에 따른 농민의 생산의욕 감퇴, 그리고 계속된 자연 재해, 더불어 소련의 원조중단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모택동은 국가 주석직을 사임했고 당 지도부의 일상업무를 제1부주석인 유서기와 총서기인 등소평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공동책임을 맡게 되자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이는 모택동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대약진이 실패로 끝난 1959년과 그에 대한 조정을 준비하던 1960년과 그 이후의 시기는 등소평과 중국사회주의가 대내적으로 곤란에 처함으로써 등소평의 정치 리더십은 최초로 국가적 범위에서 시험받게 되었다. 등소평 리더십을 구성하는 3대 요소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 사상, 중국사회주의의 혁명적 경험이다. 이 3요소가 조화스러운 관계에 있을 때는 국가건설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이들 간에 갈등이나 모순이 형성되는 경우에는 위기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고 등소평이 이 3요소에서 어느 것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그의 리더십이 평가되었다. 조정정책을 해나가면서 등소평은 모택동의 리더십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중국사회주의를 경영할 수 있는 기업가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모택동 개인과 모택동 사상을 분리해서 생각하였으며 실사구시를 그의 정치사상 원칙으로 확립했다. 그리고 그의 실용주의 사상이 최초로 구체화되었다. 등소평의 대표 이론인 ‘백묘흑묘론’에서 잘 나타나 있다.유백승 동지는 사천말로 노란 고양이든, 검정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고 항상 말했습니다. 이것은 전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개석을 패퇴시킬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규칙이나 옛날 방법대로 싸운 것이 아니라 먼저 모든 상황을 살핀 후 쥐를 잡을 궁리를 짰기 때문입니다. 현재 농업생산을 하기 위해서도 역과 국민적 一體性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이라는 과거의 ‘파괴’와 중국현대화라는 미래의 ‘건설’이 가능하려면 권위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바탕 위에 국민적 一體感을 형성시켜 그의 구상대로 중국사회주의 현대화를 실현시켜 나가야 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그가 제시한 방법은 ‘改革’이었다. 여기에서도 등소평은 발전의 문제와 체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중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 대안은 이론 면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의 종합화였으며 실천 면에서는 그를 통한 제도화였다. 1977년 천안문 사태에서 폭발적인 정치적 참여로 보여준 중국인민들의 기애를 수렴하여 정치 이데올로기를 재구성하고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구체화시켜내는 문제야말로 등소평 정치 지도력의 총체적 결론이며 화국봉 실각 이후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의 이념적 순수성과 현실적 적용성이라는 미묘한 영역을 탄력있게 넘나들었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상황에 따라 취사 선택하여 사회주의의 순수성에 접목시키거나, 때로는 완전히 이탈함으로써 중국인민의 현실적 요구와 중국사회주의가 처한 모순을 해결하려는 새로운 실험을 감행했던 것이다.등소평 정치 지도력의 의의는 바로 이러한 모순적 문제들을 쉽게 재구성하여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연결시켜 냈다는 점에 있다.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적대적인 정치?사회체제의 장점과 우수성을 통합하여 중국식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주조, 생산력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사회주의의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적 경제방식을 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잠재해 있는 중국인민의 발전적 원동력을 자극하고 동기화시켜 억눌려 있던 인민대중의 생산력을 해방시켜낸 것이다. 이 양자의 결합을 통해 그는 중국사회주의 현대화에 새로운 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개발도상국들에게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다.등소평 개혁정책의 특징적인 점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첫째, 인센티브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