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社會學 提出 論文월트디즈니의 漫畵映畵그 神話와 眞實에 關한 硏究2000年 12月 4日漢陽大學校 經常大學經濟學部 1996052495 전구경목 차Ⅰ. 서론Ⅱ. 본론1. 월트디즈니1)생쥐 미키마우스와 도덕주의2)디즈니의 권위주의와 가부장주의3)인종주의자, 반공주의자로서의 디즈니4)남성우월주의자로서의 디즈니2. 디즈니 만화의 세계1)부성컴플렉스와 가족주의,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피터팬 신드롬2)청교도적 윤리관과 미국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3)디즈니 만화의 담론적 특성4)디즈니 만화의 보수성3. 월트 디즈니에 대한 재평가Ⅲ. 결론붙임) 1.월트디즈니사 - 내부 마케팅-2.일본 애니매이션 휴머니즘 사이펑크 담론Ⅰ. 서론21세기를 목전에 둔 오늘의 사회는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문명 속에서 역사는 이념의 대립에서 탈피하여 경제의 충돌, 나아가 문화의 충돌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 문화는 그 영역을 확대하여 산업적 차원의 의미가 날로 증대하고 있으며, 특히 대중문화는 과거 엘리트문화의 대립적 개념에서 탈피하여 현대 문화흐름의 분류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현실입니다.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대중문화 영역이 만화, 특히 애니메이션이다. 서울 국제만화페스티벌을 비롯하여 애니멕스포, 만화페스티벌, 강원도 춘춘 시가 애니메이션 도시를 내세우며 연 만화축제 등 다양한 국제행사들이 비슷한 시기에 열리면서 1997년 여름은 온통 만화 영화들의 경연장이 된 바 있다. 이렇게 애니메이션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게 된 것은 이 분야가 나름대로 경쟁력 있는 산업분야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만화, 그리고 만화영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디즈니 이다.월트 디즈니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꿈과 환상, 동화의 세계를 전해준 '인자한 아저씨'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미키와 도날드, 풀루토와 구피,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를 보며 자란 세대에게 그는 여전히 아름답고 순수한 세계의 상징이다. 그가 안 향락주의적인 영화로 돈을 벌었던 메니저들은 월트 디즈니와 제휴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자신들이 건전하고 도덕적인 가족 오락물을 만드는데 전념하고 있다는 걸 세상에 알려야만 했던 헐리우드는 1931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새로 제정한 최우수 단편영화상을 디즈니에게 수여했다.2) 디즈니의 권위주의와 가부장 주의외부적으로는 헐리우드의 도덕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디즈니는 그러나 디즈니 스튜디오 내부에서는 누구보다도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가정적으로도 그는 결코 정상적이거나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늘 강박관념과 결벽증에 시달렸고 성불능, 폭음, 신경증세를 보였다.월트 디즈니는 스튜디오의 노동자들에게 철저히 가부장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노동자들의 '아버지'라 여겼고 또 노동자들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줄 것으로 믿었다. 그는 스튜디오의 노동자들이 자신에게 불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월트의 35번째 생일 파티에서 스튜디오의 만화가 두 사람이 미키와 미니를 주인공으로 월트가 자신들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것을 빗대어 항의하는 만화영화를 제작 상영한 일이 있었다. 월트는 박수를 치며 이 훌륭한 만화를 만든 재주꾼이 누군가를 물었다. 두 사람이 손을 들자 월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고, '둘 다 해고야'하는 말과 함께 파티장을 나가 버렸다."이런 그가 디즈니 스튜디오에 노조가 조직되는 것을 허용할 리 없었고 그는 마피아까지 동원해 노조 결성을 방해했다. 스튜디오의 노동자들은 1941년 마침내 파업에 돌입했다. 그는 파업을 주도했던 대부분의 뛰어난 만화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소했고 결국 모조리 해고시켜 버렸다. 그 가운데에는 디즈니 스튜디오의 가장 뛰어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환타지아'의 유명한 버섯장면을 창조한 아서 배비트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가 소송과 복직을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 회사를 떠났을 때, 디즈니는 배비트가 참여한 모든 작품의 타이틀 자막에서 그의 이름을 영원히 삭제할 것을 지시했 수 있다.(이런 경향은 월트가 죽은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 만들어진 최근의 '라이온 킹'에서까지도 드러난다.)'백설공주'는 고전적인 동화의 줄거리를 충실하게 따라간 작품이지만 월트 디즈니가 이 작품에서 특히 강조점을 두었던 것은 난쟁이들에 대한 백설공주의 모성애적인 관계였다. 디즈니는 백설공주와 난쟁이들의 관계를 자신과 스튜디오 노동자들의 부성애적 관계에 동일시하였고, 계모의 악마적인 계략에 맞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백설공주의 처지를 헐리우드의 투기장에서 살아남고자 애쓰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유로 간주했다. 특히 '백설공주'가 당대의 미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작품의 주제가당시 미국인들에 처했던 상황, 즉 미국을 위협하는 사악한 세력 앞에서 전쟁에 돌입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앞두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미국 대중의 심리와 맞아 떨어졌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백설공주가 무시무시한 계모로 부터 위협을 받으며 싸우는 내용은 곧바로 국민들의 그런 두려움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월트 디즈니의 부성컴플렉스가 좀 더 분명히 드러나는 작품이 '백설공주'의 후속으로 제작된 '피노키오'이다."외로운 꼭두각시 제작공 제페토가 만든 작은 나무 인형 피노키오는 푸른 요정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지만 아직 온전한 인간이 아니다. 요정은 열심히 일하고 학교에도 잘 다니는 착한 행동을 하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피노키오는 사악한 무리들의 꼬임에 빠져 나쁜 길로 들어서게 되고 꼭두각시 쇼를 하는 스트롬볼리는 피노키오를 노예처럼 부리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한다. 스트롬볼리로부터 탈출한 피노키오는 커다란 고래가 삼킨 제페토를 구하고 진짜 사람이 된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이야기는 원래 19세기 이탈리아의 동화작가 카를로 로렌치니의 작품이다. 디즈니는 원작에서 다소 위악적인 존재로 묘사되어 있는 피노키오의 성격을 바꾸어 피노키오가 어리석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착한 심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묘사했고, 메뚜기 변천사와 시대상의 영향5 대사의 시적추구6 색채선정의 미학7 동작과 표정의 지속적 연구8 전체 작품의 일관적인 조명계획 진행9 배경음악의 스토리화⑩ 더빙의 탈정형화가 불러온 포스트정형화디즈니의 모든 작품은 신화, 동화, 민담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초기 작품들은 미국과 유럽의 동화에 기초하여 작품을 구상했으며, 최근에도 국지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설화 등의 수집에 열중하고 있음을 볼 때 신화분석(Myth)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이미 파악하고 작업을 시도하는 듯 하다. 이러한 원작의 전용전략은 혼성모방(페스티쉬)이라는 심화된 기법으로 분석되기도 한다또한 이미 지적했듯이 디즈니는 문화제국주의의 첨병역할을 애니메이션 작품그룹으로 형성해 낸다. 어릴 때부터 디즈니메이션과 디즈니의 칼라판 도서를 보고 자란 어린이 및 청소년들은 미국의 이미지에 대해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제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가상적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극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디즈니사가 최초로 시작한 국가별 배급쿼터제는 국가별로 배급가격 가이드라인을 설정, 국가경제수준에 맞는 비용으로 마케팅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전 세계적인 효율적 배급이 가능하게 되고, 이에 따른 규모의경제와 범위의 경제가 가동될 수 있게 된다.신데렐라 콤플렉스와 피터팬 신드롬의 절묘한 공략은 각 연령층과 세대층에 관계없이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디즈니 여성캐릭터들의 담론 변천사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됨에 따라 시대적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형식을 취할 정도의 순발력과 탄력성을 보여준다.--- 디즈니의 여성캐릭터 변천사 ---(순종, 객체적 지위 → 저항, 주체적 지위)1 백설공주의 완전순종형2 신데렐라의 부분순종형3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불만순종형4 인어공주의 반항가출형5 벨(미녀와 야수)이 보여주는 이지적이고 침착한 평강공주형6 알라딘의 쟈스민공주가 보여주는 능동적 내조형7 포카혼타스의 반민족적 애정추구형8 에스메랄다(노틀담의 꼽추)가 보여주는 헌신적이면서 공격적인 집시여 아주 싫어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회사는 완벽하게 영리추구의 뜻을 이행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고심하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복잡하고 어렵게 일처리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를 부러워한다.쾌활한 영혼보다는 덜한 월트 디즈니의 생각은 나이든 미국인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울렸다. 그 미국인들은 오래된 회사선전용의 문구로 이용된 "즐겁고 유쾌한 사람을 거리에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는 디즈니의 생각에대한 완고한 광고라고 생각했다. 그 겸손한 사절단은 단순하게 행복을 수백만에게 가져다 주는 사람이다. 익살을 부려가면서, 그는 일을 하는 동안은 휘파람을 불어가면서 재미있게 하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그 일은 하기 쉽다고 넌지시 비췄다. 월트 디즈니가 노년기에도 만족해하는 기분을 가졌으므로 그 말은 정말 진짜같이 들렸다. 그의 성공이 미국인들이 꿈꿔온 것들의 많은 원리를 확인시키지 않았는가? 자기 속에 고이 간직했던 신화를 동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보다 나은 쥐를 제작하지도 않고, 세계를 그의 의지대로 개척하지 않았는가? 그는 모범적이고, 친절하게 일하며, 이야기를 만들면서, 세계인들에게 친숙한 만화를 제작함으로써 그의 부와 명예를 키워 나가지 않았는가? 월트 디즈니가 한창 때 흥행면에서 성공할 때는 대중들로 인해 분개하거나 대중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헨리포드는 그렇게 운이 좋았어야 했고 빌 게이츠도 그렇게 운이 좋았어야 했다.조심성있는 작가에 의해 묘사되는 디즈니에 관한 진실 즉 "어떤 비공개적인 악령의 채찍질 아래서 나타나는 키 크고 칙칙한 약간 덜 친절한 사람"에게 많은 흥미를 가졌다. 친절한 월트는 실제적으로 그의 몸에 아저씨같은 뼈를 가지지 못했다. 비록 그가 다소 낯선 사람과 함께 거칠면서 상냥함을 다루고 사실 단점과 의심 무엇보다도 조절된 자연이 그의 것이었다. 이유가 있다.왜냐하면 그는 경제적인 것보다는 더 무서운 감정적인 가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엘리야스는 많은 직업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세
{목 차{1친일.친일파의 의미와 청산이 필요한 이유2친일파의 역사적 존재 양태3친일파의 대표적 인물4친일파의 재생산 구조5해방후 친일파 청산6친일파에 대한 견해와 극복※ 붙임소신 있는 친일파이면 면죄의 대상인가1. 친일.친일파의 의미와 청산이 필요한 이유‘친일’이란 일제식민정책에 어떤 형식으로든 협조.기여한 행위를 말하며,‘친일파’란 그런 행위를 한 자를 말한다. 한마디로 민족과 역사보다는 개인의 안녕과 영달에만 매달려온 민족반역행위와 민족반역자를 일컫는 말이다. 친일파(親日派)는 말 그대로는 '일본에 친한 사람들 혹은 무리들'을 말한다. 친일파라는 말을 그런 뜻으로만 이해하면, '친일파가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나 거래에서 일본과 친한 사람들이나 집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친일파를 먼저 정의할 필요가 있다.'친일파'는 한말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침략에 협조하면서 국권을 상실케하였거나, 일제를 등에 업고 동족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들을 총칭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재 일본에 있는 지인(知人)과 가까이 지낸다거나 일본인들과 사업차 거래하는 사람들까지를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다. 친일파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 일본의 한국 침략에 편승하여 민족을 배반하고 동족에게 고통을 가한 무리들을 이른다.해방후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행한 사람들을 청산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법률을 만든 적이 있다. 처음은 미군정기인 1947년 7월에 과도입법의원에서 상정한 '민족반역자·부일 협력자·간상배 조사위원회법'이었으나 군정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정부수립 후 1948년 9월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어 거의 1년간 시행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반민족행위처벌법'은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한 자를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첫째, 일본정부와 통모(通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하였거나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하는 자. 둘째, 일본정부로부터 작(爵)을 받은는 동양평화론과 대동아공영권등으로 발전해 갔다. 이 동양평화론은 침략과 예속화의 근원적인 출발점으로서 일본이 아시아 연대에서 맹주가 되어야 한다는 지배적 위치의 요구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일제의 만행이라 하여도 이를 수행한 이들은 모두 친일 조선인들이었다.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 을 꿈꾼 극렬 친일파도 있었으니 이들은 내선일체를 주장하였고, 이를 황민화의 각종 시책중 하나로 만들어진 「황국 신민의 서사」도 조선인이 지은 것이고 신민의 서 역시 김문집이 쓴 것이다. 이보다 더한 것으로 일제의 친일 행위를 독립운동으로 날조·강변한 이도 있었다.3. 친일파의 대표적 인물1) 친일관료―바늘구멍에 들어간 낙타들사이토가 취임한 후 조선인 관리를 중요 친일세력으로 키워서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앞잡이로 이용하려고 했다. 따라서 재임 중 군수급 이상의 숱한 조선인 관리를 접견했으며, 관리의 임용 승진에서도 '능력'과 아울러 '친일성'을 더욱 중시하였다. 이것은 왕족이나 귀족 등 옛 친일파의 이용가치가 줄어든 것과 내외정세가 능률 있는 식민지 관리의 확보와 이용을 더욱 더 요구하고 있던 사정 때문이었다. 게다가 3·1운동을 즈음하여 많은 하급관리가 민중의 투쟁에 자극 받아 직접 투쟁에 참여하거나 사직 태업 등으로 공공연히 저항해서 그 결과 지배기구가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던 때인 만큼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1920년 초 사이토총독은 '이 기회에 조선인 관리의 상벌을 분명히 하고 양부(良否)를 가려내어 관규를 숙정'하고 '배일사상을 품고 조선의 독립을 꾀하거나 제국의 통치를 벗어나려고 꾀하는 것은 물론, 적어도 반국가적 태도를 취하는 자에 대해서는 조금도 가차없이 엄벌에 붙이는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방침을 세웠다.이렇게 해서 많은 조선인 관리들이 자리에서 쫓겨났으며, 반면에 '친일성'과 '충성도'를 인정받은 자는 승진을 보장받았다. 3·1운동 때 군수였던 박영철은 궐기한 민중을 모독하는 발언을 에 발표해서 그 '공'을 인정받아 도참여관으로 승진하였다. 식적인 경찰예산이 1천7백만엔인데, 이 중 기밀비가 4백만엔에 이른다. 이는 당시 총독부의 교육예산과 맞먹는 수치이다. 물론 3.1운동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과다하게 책정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밀비는 매년 공식적인 경찰예산에서 1/8∼1/10을 차지하였다.직업적 친일분자에는 선우순 민원식 박춘금처럼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자와 방태영 이희간 김기선 김린 같이 은밀하게 활동하는 자로 크게 나뉜다. 이들은 주로 경무국의 간부와 함께 민중의 눈을 피해 밤에 사이토관저를 드나들었다. 그런데 직업적 친일분자 가운데 오태순, 이한복, 박의병, 김승익, 유래정, 박영근처럼 무명의 인사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사이토를 수차례 만난 다음 홀연히 사라진 경우도 있다. 이들의 경우는 종적을 알기 힘들지만 아마도 민족운동 진영을 분열시키는데 참여했던 고급밀정이었을 가능성이 많다.직업적 친일분자를 계통별로 나누어 주요 인물들의 반민족 범죄행각을 보도록 하자.첫째, '합방'전부터 친일파로서 활약하다 192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친일단체를 조직·운영했던 자로서 친일여론 조성 단체인 국민협회의 민원식, 김명준과 일본의 우익정치단체인 동광회의 조선총지부장 이희간, 그리고 지주·자본가의 친일화와 노동운동 파괴를 목적으로 한 유민회의 고희준, 미신단체 청림교의 김상설 등을 들 수 있다.이토의 후원에 힘입어 고관이 되고, 고종의 처조카 사위까지 되었던 민원식은 항상 입버릇처럼 "나의 오늘이 있음은 전적으로 일본과 일본인 덕분"이라고 말할 정도로 진심으로 일본에 고마워했다. 그런 그이기에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을 '망동'이라 비난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3.1운동 후 그는 신일본주의 단체 협성구락부를 개편하면서 참정권 청원운동을 벌였다. 이것은 3.1운동으로 격양된 조선인의 정치의식을 무마하기 위한 일제의 정치모략으로 조선에서도 의원선거법을 시행하라는 것이었다. 민원식의 친일행각이 조선인에게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는 상해임시정부가 맨먼저 죽여야 할 친일분자로서 민원식 선우20년대라는 조선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있다. 3·1운동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독립에 대한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때마침 일제가 3·1운동에 대한 회유책의 하나로 합법적인 사회단체를 허가함으로써 약간의 숨구멍이 터지자 각종 사회단체가 속속 만들어져 민중에 대한 계몽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20년대의 '문화운동'은 조선 민중의 정치적 의식을 더욱 각성시키고, 결국에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위태롭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사이토총독은 반일기운에 대해 압박을 주어 없애는 방법은 효과가 없으니 오히려 '위력을 동반하는 문화운동'을 통해 조선인들의 '반일적 문화운동'을 체제내의 운동으로 끌여들이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래서 물산장려운동 같은 경우도 식민 지배를 전제로 하는 타협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허용하려 했다. 즉 일본 제품 배척이 아닌 토산물 애용으로, 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활개선이나 향상을 위한 것으로 운동을 변질시키려 하였고, 이 테두리를 벗어나려 하자 공금유용 등의 명목으로 탄압하여 소멸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문화운동의 추진단체 간부진에 친일파나 타협적인 성격이 짙은 사람을 넣어 운동을 어용화시키는 방법도 취하였다. 조선인산업대회의 박영효·조희문·윤치호, 조선물산장려회의 유성준·이규완, 민립대학설립기성회의 유성준·고원훈·이범승·최린 등이 그 사례이다. 또한 문화운동을 둘러싼 타협·비타협의 대립을 이용해서 민족주의자들을 갈라놓아 우파의 대일 접근을 촉진시키고, 막 등장하기 시작한 사회주의자와 맞붙도록 부채질하여 반일 역량을 분열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이렇게 해서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정치사에서 '민족운동 진영의 분열'이라는 무대가 형성된다. 감독 사이토총독, 연출 사이토의 정책 브레인 아베, 주연 이광수·최린·최남선, 조연 김성수·송진우 등등. 연극은 1921년 5월 일제의 회유로 이광수가 상해에서 주필 자리를 버리고 귀국하는 한편, 그해 6월 복역 중이던 당대의 문장가 최남선과 '33인'의 하화이며 3만의 조선인이 살 길남아 한번 세상에 나 이런 好機 또 있던가위국충절은 그대만의 행운 가라 조선의 6천 학도여이광수의 이 같은 친일행적은 많은 독립지사들의 분노를 샀고, 해방 후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속죄 대신 자기 행동을 변명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 「나의 고백」이라는 수필에서는 친일을 한 것은 부득이 민족을 위해서였다고 변명 하기도 하였다. 이광수는 반민법에 의해 심판 받기도 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고 6.25때 납북 되었다3. 서정주 1915 - 시인. 호는 미당(未堂).서정주가 친일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42년 7월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친일시인으로 작심하고 친일 어용 문학지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 일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작품을 양산했다. 당시의 문단 비중에 비해서 상당한 분량의 친일작품을 남긴 것이다. 평론 1편, 시 4편, 단편소설 1편, 수필 3편, 르포 1편 등 합계 10편의 친일 작품을 썼다. 친일작품을 연대별로 살펴 보면 1942년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 1943년 수필[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인보(隣保)의 정신], [스무살 된 벗에게], [보도행], 시 [항공일에], [헌시(獻時)], 소설 [최체부의 군속 지망], 1944년 시 [무제] [오장 마쓰이 송가]등이 있다. 서정주는 친일문학 활동뿐만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나서 1943년 10윌 엿새 동안 일본군 경성사단의 추계 훈련에 종군하고 참관기를 쓰기도 하였다. 해방 후 조선청년문학가렵회 시분과 회장을 맡고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한국문인협회 회장 등 문단의 감투를 쓰고 이승만의 전기를 접필하는 등 '정치문인'으로 5공화국 때까지 맹렬한 활동을 했다.4. 김활란(1899 - 1970) 호는 우월, 인천 출생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김활란은 1907년부터 이화학당에 입학해서 1918년 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