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학과 98302010 오현진존경하는 지도자 인텔사의 앤드류그로브경영관리기능의 하나인 지휘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려면 전문경영자는 올바른 지도력을 발휘하는 지도자의 지질을 갖추어야 한다.[서초패왕]이라는 중국영화가 있다. 보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어떤 내용이라는 것쯤은 알 것이다.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 경영자가 지녀야 할 리더로서의 자질이다.물론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 관찰력, 의사결정능력, 추진력, 책임감, 경영자적 리더십 등은 리더에게 필요한 것이며 그들의 지질과 관련되는 것이다.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리더는 인간성과 합리성을 갖춘 리더로서 리더임을 보여주는 것보다 조직이라는, 조직의 일원 중 한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는 리더를 말한다.그러면서 완벽한 리더역할을 해나가는 사람을 말한다.[서초패왕]이라는 영화를 보면 유방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던 항우는 백성들이 전쟁의 도탄에 빠져 있다는 부하의 간언을 듣고 결단을 내린다.항우는 싸움을 끝내고 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항우가, 서쪽은 유방이 다스리며 평화롭게 지내자고 제안을 하게 되고 연패하고 있던 유방은 무릎을 꿇어 고마움을 표시하고 둘은 피의 맹세를 하게 된다. 그러나 유방은 항우의 군대가 쉬고 있는 틈을 타 기습하여 섬멸하고 만다. 이에 항우와 그의 부하들은 자결을 하게 된다.항우와 유방 중 누가 더 바람직한 경영자일까?경영자는 자기 부하들이 안정적이고 편하게 만들어 줄 책임이 있다.전쟁에세 패해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부하들까지 모두 죽음으로 이끈 사람이 어떻게 훌륭한 경영자일 수 있을까?또한 유방 역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천하를 통일해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는 목표로 사람으로서의 가치인 믿음, 신뢰라는 것을 져버렸다. 후에 누가 그를 믿겠는가?한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가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생존의 위험을 받는 것이 아닐까?누가 더 훌륭한 경영자일까?결국 유방이나 항우나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경영자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고 기업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가 바로 리더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는 바로 이러한 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자본주의의 제왕 에 비유되는 기업가. 그리고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꿈꾸는 백만장자. 혹자는 행운을, 혹자는 노력을 성공의 지렛대로 들지만 그들의 화려한 현재에는 남들과 다른 비법이 숨겨있다. 또한 오늘날의 기업가는 출세한 특정인의 차원을 넘어 한 사회의 전체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다.1997년 타임스지는 그를 지난해 미국을 이끄는 10인 중 한 사람으로 꼽았고 전세계 컴퓨터업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 3인에도 선정했다.얼마 전 포천은 분야별 최고의 가업가들이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했다.그 중 컴퓨터 엘리트 5인 중 2위로 뽑힌 사람이기도 하다.자신의 일에 미쳐야 최고가 될 수 있다" 고 설파하는, 결과를 중시하는 반도체 제왕 , 인텔사를 창업하고 이끌어 온 세계적인 최고경영자그가 바로 앤드류그로브이다.193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앤디(앤드류그로브의 애칭:이하 앤디라 명함)는 유년시절신문기자가 되려 했다. 그러나 1956년 부다페스트의 봄이 소련군의 군화에 짓밟힌 헝가리동란을 계기로 그는 공산주의 체제의 언론통제에 염증을 느껴 기술자로서 성공하겠다고 생의 목표를 바꾼다. 결심이 서자 앤디는 조국을 버리고 홀홀 단신 이민선을 타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영어 한마디 못했던 그였지만 헝그리 정신’으로 고학해 뉴욕시립대학을 졸업하고 63년에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생시절의 고생은 결국 그를 전자부품 전문회사인 페어차일드사에서 고든 무어, 밥 노이스와 만나게 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세 사람은 의기투합해 인텔사를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했고 결국 세계적인 반도체회사로 만들었다. 특히 그로브는 ‘아메리칸 드림’을 쫑아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 1세대로 각고의 노력 끝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런 결실은 출신성분과는 관계없이 능력만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컴퓨터업계 특히 실리콘밸리에서 사업을 시작했 발명하는 등 발전을 거듭했다.인텔은 앤드류그로브(Andrew S. Grove)사장이 취임한 이후 급격한 성장을 해 왔으며 1985년 업종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스스로 시장을 창출하여 1994년 115억 달러였던 매출액이 1996년에는 208억 달러를 기록하는 등 매년 30%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 거대기업으로 변신했고 순이익만 52 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런데도 인텔사는 아직 불확실한 미래 를 걱정하고 있다.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미래의 도전에 대비중인 것이다.세계 컴퓨터업계를 들썩거리는 거대기업 인텔이지만 아직도 창업 당시의 벤처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오늘날 성공적인 인텔을 만들 수 있었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기업가의 앞을 내다볼 줄 아는 비전과 과감한 결단력, 독특한 경영 방법, 그리고 인텔의 독특한 기업문화와 인텔의 경영철학이 바로 그것이다.앤디는 자신을 비롯해 모든 임직원들이 회사로부터 복지를 누리는데 아무런 차별이 없도록 하고 있다. 그의 사무실은 비서가 사용하는 방보다 조금 크고 특별히 화려하지도 않다. 손님들은 방금 사용한 컴퓨터와 널려 있는 서류로 가득한 조그만 그의 일터를 보고 그저 놀랄 뿐이다. 또한 국내 출장의 경우 통상 일반석(Economy Class)을 이용한다.임원전용 주차장이나 식당도 없다. 오히려 임원이라 하더라 별도의 사무실이 아닌 일반 종업원과 같은 칸막이에 있다인텔 직원 주차장은 선착순이다. 그가 차를 몰고 나와 주차 할 곳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그는 자신보다 일찍 출근해 근무하는 직원들을 보고 흐뭇해한다.바로 이러한 점들이 내가 생각하는 리더의 모습이다.자신도 직원들과 똑같다는...직원이 맘 편하게 즐거운 맘으로 일자리를 제공하는 모습말이다.그의 인생 모토는“미친듯이 집착한 자만이 살아 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e)”고 강조한다. 자신의 일에 미쳐야 세계 최고가 된다고 직원들에게 얘기한다.경영철학으로는 마이클 포터 미국 들의 불평과 루머 등 나쁜 뉴스들을 지나쳐 버리지 말라는 권고다.항상 현재 자신의 기업을 구닥다리로 만들라’는 얘기도 다른 기업가들에게 빼놓지 않는 충고 중 하나다. 매일 변하는 기업이 되자는 의미다. 그래서 그는 “항상 배운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인텔의 경영철학은 결과에 대한 책임과 리스크테이킹(risk-taking)이다.자신이 시작한 일은 그 자신이 마무리를 짓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치밀한 계획과 점검이 수반된 리스크테이킹의 경우 비록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을지라도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한 기술력은 인적 자원에서 창출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인적 자원을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사업을 전개할 경우에도 필요한 인적 자원을 신규채용하기 보다는 기존직원들을 재교육시켜 활용한다.1996년 회장으로 승진한 앤디는 형식보다는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결과지상주의자’다.부하들을 카리스마적으로 이끌고 신상필벌을 철칙으로 삼는다. 물론 그 자신도 실리콘밸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철저한 ‘악바리 경영자’다.그가 얼마만큼의 악바리 근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다음의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앤디는 전립선암 선고를 받고 1995년 여름에 수술을 받게 되었다.그는 투병 생활의 고통과 컴퓨터에 대한 깨달음을 글로 발표해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준 바 있다.그가 수술대 위에 누웠을 때의 일이다.젊은 의사 두 명이 환부에 쏘일 방사능의 양을 측정하기 위해 컴퓨터로 전립선 내 종양의 크기를 계산하고 있었다. 너무 시간이 걸려 의사에게 컴퓨터의 기종을 물어 본 결과 자기가 13년 전에 내놓은 286인 것을 알고 새로운 기종의 응용이 늦어짐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병상에서도 그는 연구를 계속했다.이렇게 그는 어떤 과제에 대해 그 해답이 나올 때까지 연구하는,공부하는 사람이다. 비록 몸이 불편하다 하더라도 말이다.편집광(偏執狂)! 국어사전에는 어떤 일에 집착하여 상식 밖의 짓을 태연히 하는 정신병자 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정상인이 속 좁은 고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를 정신병자 수준으로 몰고 가는 진짜 고민거리는 그 스스로 전략적 변곡점 이라고 부르는 개념이 언제 어떻게 들이닥칠지를 파악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어떤 사업영역에 근본적인 변화가 오는 시점이다.즉 무엇인가 크게 변화하는 시기, 무언가 달라지는 시기, 살아남기 위해 온통 정신을 팔다가 훗날 되돌아보면 그 변화의 무게를 절감하게 되는 시기를 전략적 변곡점이라고 정의한다.예리한 관찰력과 판단력을 겸비한 경영인으로서 앤디는 첨단산업을 경영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이론, 즉 이른바 전략적 변곡점을 정립하고 이용하고 있다.기업환경, 특히 기술이 10배로 변화할 때 전략적 변곡점을 접하게 되는데 이에 잘 대처한 기업은 생존하여 번성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생존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이러한 변곡점을 잘 넘기려면 경영인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과거에 성공한 경영인일수록 과거의 타성 때문에 전략적 변곡점의 논리에 굴복하는 마지막 사람이 되어 새로운 환경에 부적합한 인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고 경고하고 있다.앤디는 우리의 회사와 우리들이 견뎌내야 하는 이 험한 땅을 죽음의 계곡 이라 부른다. 이는 전략적 변곡점이 포함하고 있는 불가피한 부분인데 그것에 잘 대처하려면 명료한 전략적 방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쟁자를 앞질러 죽음의 계곡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특정 방향과 특정 속도를 가지고 미친 듯이 일하며 앞으로 매진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일개 기업수준이 아니라 시장환경자체가 변하는 그 격변기를 새로운 기술도입이나 경쟁사들과의 싸움에 전념하는 정도로는 헤쳐 나갈 수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꼭 재난을 뜻하는 것은 아니어서 그것을 잘 활용할 경우 도리어 엄청난 기회가 되기도 한다.나는 늘 전략적 변곡점의 제물이 아니라 그 원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고 앤디는 말한다. 1980년대 중반 인텔이 일본 반도체업계의 역풍을 맞았을 때 메모리 사업을 포기하고 당시로서는 새로운 분야였던 마이크로영화인
사이버 마케팅1994년부터 시작된 인터넷 가상시장(사이버 마켓)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사이버 마케팅 혹은 온라인 마케팅은 소비자와 기업간의 커뮤니케이션과 상거래가 쌍방향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컴퓨터사용자는 컴퓨터와 전화선을 연결하는 도구인 모뎀을 통해 온라인 정보서비스에 접속되어 자신의 원하는 제품정보를 입수하거나 제품을 구매한다.사이버 마케팅의 중요성구매자 측면 : 인터넷 안에 형성된 가상점포를 잘 활용하면 구매자는 싸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품에 대한 정보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기업측면 : 매장설치비와 운영비용이 따로 들지 않기 때문에 상품가격을 파격적으로 낮출 수 있다. 또 잠재고객도 많이 늘어난다. 가상시장은 특히 자본과 마케팅이 취약한 중소기업에게는 기회의 장소이다.사이버마케팅의 현황1997년 인터넷 검색 도구인 야후에 등록된 사이버 쇼핑물은 6백여 개나 되고 가상점포를 운영하는 개별업체도 7만개가 넘는다.사이버 마켓에 진출한 국내 업체도 2백여 개에 이른다.업종은 꽃배달부터 가전제품대리점까지 다양하다.국내에서 가상쇼핑몰을 개설한 선두주자는 롯데백화점이다. 1996년 롯데인터넷백화점을 개설한 이후 월 평균 1억5천 만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 이후 신세계도 1997년 9월 가상백화점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데이콤은1996년6월인터파크라는가상쇼핑몰을개점했다. 현대백화점은 1997년 9월 가상백화점 메타랜드 에 입점하였다.사이버마케팅의이점1. 기업의 규모에 상관없이 이를 활용할 수 있다.2. 인쇄물광고나 방송매체광고와 비교하여 무제한의 광고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3. 정보에의 접근과 이의 인출이 매우 신속하다.4.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신속한 쇼핑을 할 수 있다.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잠재구매자에게 제공되는 이점·편의성 : 소비자는 점포를 방문하기 위해 교통체증을 감수하거나 주차공간을 찾기 위해 고 생할 필요가 없으며 원하는 제품을 찾기 위해 점포내의 수많은 통로를 돌아다닐 필 요가 없다.·정보제공 : 고객들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 경쟁기업과 제품들에 대한 정보를 탐색하 여 객관적 기준들을 토대로 구매대안들을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가격, 품 질, 성능, 이용가능성 등의 객관적 기준들을 토대로 구매대안들을 평가 할 수 있 다.·판매원의 고압적 판매노력을 피할 수 있음 : 고객들은 판매원들의 설득적 노력으로 인한 불 쾌감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마케터들에게 제공되는 이점·시장여건변화에 대한 신속한 대응 : 기업은 시장상황의 변화에 따라 신속하게 제품을 변화 시킬 수 있다.·저원가 : 온라인 마케터는 점포구입 및 유지비용(임대료, 보험료, 전기료 등)을 피할 수 있 다.또한 인쇄된 카탈로그의 제작 및 우송비용보다 훨씬 저렴한 디지탈 카탈로그를 제작할 수 있다.·고객과의 관계구축 : 온라인 마케터는 소비자와의 대화가 가능하고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 울 수 있다. 마케터는 온라인 서비스 시스템내에 무료의 뉴스레터나 소프트웨어 견 본을 적재할 수 있으며, 소비자는 이러한 정보들을 자신의 전자사서함에 옮겨 저장 할 수 있다.·정확한 청중규모의 파악 : 마케터는 얼마나 많은 청중들이 자사의 온라인 사이트를 방문하 며 사이트내 특정 장소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인지를 알 수 있다. 이러 한 정보는 표적청중의 욕구에 부합되도록 제품믹스와 광고를 향상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사이버 마케팅의 유형마케터는 4가지 방법으로 사이버마케팅을 수행할 수 있다. 4가지 방법은 홈페이지의 개설, 포름 뉴스동우회, 게시판에의 참여, 온라인 광고, E-메일이용이다.1) 홈페이지의 개설최근 많은 기업들이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있으며 이 홈페이지는 사용자들에게 기업과 그 기업이 취급하는 제품의 소개 또는 제품에 대한 특성, 구매방법, 가격들을 소개하는 기업카탈로그, 기업현황, 신제품 소개와 같은 자사 뉴스 등의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홈페이지를 개설하기로 결정한 기업은 두 가지 대안이 있다. 첫째는 인터넷에 자신의 전자점포를 개설하는 것이고 둘째는 상업적 온라인 서비스로부터 공간을 구매하는 것이다.홈페이지의 개설과 홈페이지에 대한 고객의 방문은 별개이므로 유망고객의 방문을 유도할 수 있도록 기업의 홈페이지를 신선하고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홈페이지의 내용을 지속적으로 수정·보완해야 한다.2) 포름, 뉴스동우회, 게시판에의 참여기업은 비상업적목적으로 형성된 다양한 동호인집단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참여는 기업의 가시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효과를 줄 수 있다. 기업이 활용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비상업적동호인집단에는 포름, 뉴스동우회, 게시판 등이 있다.·포름 - 상업적 온라인 서비스에 주소를 두는 토론집단으로 도서관, 대화방, 분류된 광고목 록 등을 운영한다. 참여를 원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비용이나 무료로 포름에 가입할 수 있다.·뉴스동호회 - 인터넷에서 운용되는 포름을 말하는데 뉴스동우회는 도서관이나 회의실 등의 공식적인 공간을 운영하지는 않으며, 특정 주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국한된다. 인터넷 사용자는 가입신청 없이 뉴스동우회에 참여할 수 있다.·게시판 - 특정주제나 동호인집단만을 다루는 전문적 온라인 서비스이다 게시판가입자는 서 로에 대한 충성도가 높으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기업의 공격적 마케팅노력에 대해 부 정적인 반응을 보인다.3) 온라인 광고의 이용기업이 상업적 온라인 서비스에 광고를 게재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첫째, 기업이 규모가 큰 상업적 온라인 서비스가 운영하는 분류된 광고란에 광고를 게재하는 것으로, 각 기업의 광고는 게재 날짜순으로 나열된다.둘째, 상업적 목적으로 결성된 뉴스동우회에 광고를 게재할 수 있다.셋째, 온라인 빌보드에 광고를 게재 할 수 있는데, 가입자가 광고를 신청하지 않더라도 서비 스 이용 중에 떠오른다.
경영학과 98302010 오현진지난 10여년간 우리는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정보기술의 발전을 목격한 바 있다. 특히 제국주의적 종속체계를 감수하면서도 외형적이나마 정보화의 수준을 국제적으로 맞춰보겠다는 정부의 기술정책에 힘입어 우리는 속 빈 강정처럼이나마 일견 정보화시대 라는 열차에 동승한 착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경과였다. 무서울 정도로 증가되는 컴퓨터 보급률과 각종 네트워크산업의 발달, 그리고 정보산업의 폭발적인 발전 등은 누가 봐도 우리나라가 정보선진국에 별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청소년세대가 컴퓨터와 정보기술이라는 블랙홀에 열광적으로 몰입하게 되고 컴퓨터와는 거의 상관이 없었던 중장년세대는 그같은 정보화의 흐름을 경이와 공포의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국외자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특히 경제적, 교육적인 측면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던 노동자대중은 더더욱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쳐지는 빈익빈 부익부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이제 우리는 광풍처럼 이 사회의 저변을 뒤흔들고 있는 정보화 라는 문제에 대해 보다 깊숙한 고찰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컴퓨터로부터 소외당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정보화 라는 말이 컴퓨터 네트워크 라는 말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 동안 전문적인 기술자들의 몫으로만 여겨졌던 사무관리직의 업무로만 여겨졌던 그리고 전문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나 경제적으로 자본의 입장에 선 사람들의 몫으로만 여겨졌던 이 정보화 라는 단어에 대해 노동계급에서도 보다 공세적인 자세로 분석하고 판단하고 대응할 필요가 절실하게 요청된 것이다.정보화 혹은 정보사회 와 관련하여 우선 그것을 이른바 정보초고속도로 (Information super-highway) 및 그것을 포함한 컴퓨터 통신을 중심으로 표상하는 경향과 현재 특히 극소전자혁명을 핵심적 내용으로 하면서 진행 중인 과학기술혁명이 생산 및 사회에 미치는 전반적 영향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두개의 경향이 있는 것 같다.정보화 혹은 정보사회 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는 대개 후자의 관점 즉 정보화 를 보다 넓고 포괄적인 변화로 보고 있으나 예컨대 영국 노동당의 문 건 Labour Communicating Britain's Future (Introduction)이나 노동당 Shadow 내각의 Heritage Secretary인 Chris Smith의 1995년 10월 당 대회에서의 연설 INFORMATION SUPERHIGHWAY는 정보화를 컴퓨터 통신 및 그 기반시설로서의 이른바 정보초고속도로 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국내에서의 논의 경향은 기본적으로는 과학기술혁명 일반과 그 영향이라는 식으로 광의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新노사문화의 출발점새로운 세기를 목전에 두고 세계는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세계화와 정보화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가운데 생산, 유통, 소비패턴은 물론 문화양상도급변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노사관계를 둘러싼 국내외의 환경 역시 크게 변화되고있다. 세계화에 의한 무한경쟁의 압력과 정보화로 대변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자본의 합리화와 더불어 노동의 유연화를 재촉하는 한편 노사관계에 있어서는 대립적인 관계로부터 보다 참여.협력적인 관계로의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기존 성장체제가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가운데 맞은 이러한 급격한 환경변화는 우리에게 도전적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무한경쟁을 헤쳐나가기 위한 경쟁력의 배양을 위해서는 기존 성장체제가 전환되지 않으면 안되며 이 성장체제의 전환에는 기존 노사관계의 변화도 포함된다.노사관계는 어디까지나 사회체계의 하부체계인 만큼 기존 노사관계의 변화 즉 새로운 노사관계의 확립을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적 장치와 함께 의식과 관행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생산체제나 기술의 변화에 수반되지만 반드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국내외 환경의 변화에 상응하는 새로운 노사관계를 구축해나가는 적극적이고도 의식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노사관계를 직·간접적으로 규정하는 제도, 의식, 관행 등의 인프라를 통틀어 노사문화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시대적 과제는 새로운 노사관계의 정립을 위한 신노사문화의 형성과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노사관계에 대한 생각은 노사관계 3주체(노.사.정) 각각이 다를 수가 있다. 실제 이러한 차이가 현재 노.사.정위원회의 파행과 같은 현안을 낳고 있다고 할 수 있다.같은 맥락에서 신노사문화를 보는 눈도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정부와 사용자 일각에서는 여전히 신노사문화를 「무분규선언」과 등치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겉과 끝만 맞추고자 하는 기존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노사문화와는 거리가 있을 뿐 아니라 실제 신노사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장애가 된다. 변화하는 국내외 환경에 상응하여 경쟁력을 제고함과 동시에 노동의 인간화를 지향하는 시대적 과제 속에서 신노사문화를 진지하게 사고하여야 할 것이다.경쟁력 제고와 노동의 인간화는 상호모순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경쟁력의 최 일선 담당자는 노동자이며 경쟁력 제고를 위한 노동의 유연화는 무엇보다도 노동자가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대접받을 때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노동자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분절적 사고는 신노사문화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사실을 분명히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2분법적 사고를 깨뜨리는 것이 우리 신노사문화의 출발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로부터 출발하여 우리의 신노사문화는 노·사·정 3주체간의 대등성을 바탕으로 참여적 노사관계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참여는 협력을 전제로 하고 반드시 책임을 수반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효율이 증진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참여적 노사관계를 지향하는 가운데 비단 노사관계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역동성과 더불어 인간화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신노사문화는 한마디로 참여적 노사관계의 정립을 위한 인프라이다. 따라서 그것은 머리 위로 현란하게 흔드는 깃발이 아니라 차근히 다져가야 할 밑바닥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한다.이렇게 노·사·정 3주체간의 대등성을 바탕으로 참여적노사관계를 지향한다면 정보화 사회의 노사관계의 전망은 밝게될 것이다.노사관계의 주체인 근로자와 기업, 정부는 새로운 노동환경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고용기회 창출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협력관행을 창출해 나가야 한다.
한국 노사관계의 특징노동자의 불신과 불만은 1960년대 경제개발을 위한 정부정책으로 先성장 後분배 의 원칙하에 이끌려 왔고, 1970년대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등으로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을 전면 부정하고 노동문제가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정부의 직·간접적인 규제속에 있었으며 1980년대 초에는 입법회의에서 노동3권이 현실적으로 행사될 수 없게 노동법을 개정하고 3자 개입금지 조항 등이 신설되면서 노사간 힘의 불균형이 강화되면서 정부의 정책에 대한 노동자들의 내면적 불만이 더욱 고조되면서 노사관계는 정부가 주도하는 대로 일방적으로 노동행정을 펴나갔고 이로 인해 노사 당사자간이 자율적 노사관계를 형성해 가기에는 노사 쌍방 경험이 축적될 수 없었다.1990년대는 노사관계에 있어서 결코 밝은 전망을 가지고 출발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소위 문민정부 가 출현하면서 정치적·사회적으로 개혁이라는 거센 돌풍이 몰아쳤으며 UR협정으로 대표되는 국제경쟁상황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기에 우리의 취약점이 여러가지로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민자당 출범 문민정부 출범과 육체노동이 필요한 직종에서 인력난이 심화되고 정부의 ILO가입과 함께 UR타결되었다.또한 경제적으로는 사업구조조정에 따라서 고용불안이 심화되었으며 경제침체 그리고 성장기조에 급격한 완화가 되었다.한국노동연구원에서 발표한 한 조사에 의하면 6·29이후의 노동운동이 기업경영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경영자 측은 인건비 상승에 의한 부정적 요인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반면에 노조측은 경영합리화의 자극제가 되었다고 평가함으로써 서로 이견을 나타내었지만 양측 모두 노사간 대화촉진의 계기가 이루어짐으로서 노무관리와 노사관계 발전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고 한다.따라서 6·29선언 이후 뜨거운 여름 (1987년 6·29선언이후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노사분규의 양상을 뜨거운 여름이라 불렀다.)은 그 이전의 「경제우선정책」에 따른 권위적 노사관계가 민주적 노사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중요한 전환되었동조합에 통보하는 형식만 취할 뿐 실질적인 교섭 내지 대화를 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이에 대하여 이들 공공기업의 노동조합 및 근로자들은 공공기업이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이행하지 않는 것은 정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므로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단체교섭에 나서서 실질적인 협상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또한 공공기업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외면한 채 근로자들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정리해고 또는 복리후생조건의 감축을 즉시 중단할 것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해당 공공기업이 해당 근로자들을 고용하는 사용자이므로 정부가 직접 단체교섭 석상에 나설 수 없다는 이유로 교섭을 거부했고 해당 공공기업은 정부의 지침, 지시를 거부할 수 없고 이미 주어진 예산의 범위 내에서만 협상할 수 있다는 논리로 결국 정부가 지시한 근로조건을 노동조합이나 근로자가 수용하라는 답변만 하고 있다. 그리하여 공공기업의 노동조합은 정부가 근로자들의 삶의 질을 무시한 채 일방적 구조조정으로 근로자들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서울지하철파업을 필두로 연대투쟁을 선언한 것이고, 서울지하철조합은 근로자 2,078명을 감축할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고용창출, 지하철개혁대안 5개항을 제시하고 단체협약위반의 철회와 노사합의사항의 이행을 촉구하며 전면파업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지하철공사는 정부지침을 이유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고 정부와 서울시는 사용자가 아니므로 협상테이블에 앉을 수 없다는 것이다.이번 파업의 근본 원인은 단순한 근로조건 다툼이 아니다.민주노총의 입장과 정부의 입장으로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민주노총은 지난해 2월 노사정 대타협 이후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구조조정을 막지 못 했다는 이유로 반발한 현장 정서에 밀려 배석범 위원장 직대가 사퇴하는 등 홍역을 치렀다. 이번 지하철 파업이 성공해야 정부가 추진중인 구조조정을 저지하고 5월 총파업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시민 불편이란 위험부담을 감수한 채 초강수를 던졌다는 게 노동계의 분석이년 4월 26일 - 노조 파업철회 선언▲1999년 4월 27일 - 지하철공사는 10시까지로 했던 2∼4호선을 정상운행, 파업 사태가 진정⇒구체적1999년 2월 2일 서울시는 정부의 공기업구조조정 방침에 따라 지하철공사 인력 2078명을 감축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999년 2월 12일, 3월 3일에 서울시 지하철공사는 노조와 두 차례 교섭을 벌였으나 결렬되고 1999년 3월 5일에는 서울시가 직접교섭을 거부했다.1999년 3월 26일 노조는 파업을 결의하고 1999년 4월 7일에 노조는 4월 19일 파업돌입 을 확정했다.1999년 4월 9일에 서울시 지하철공사 노조는 임시 대의원 대회를 열어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노조원에 대해 제재를 가하기로 의결했다.노조는 반조직행위 유형을 1급, 2급, 3급등으로 구분해놓은 뒤 투쟁이 끝나면 대의원대회를 열어 노조원 자격박탈 등 처벌 수위 및 방법 등을 결정하기로 했다. 노조는1급 반조직행위 는 처음부터 파업에 불참하고 업무를 수행하거나 현장 복귀를 선동-종용하는 행위로 규정했다. 2급 은 파업 중 노조위원장 지시 없이 조기에 업무에 복귀하는 행위, 3급 은 파업 조직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행위로 결정하고 이에 대해 공안대책협의회는 파업 불법 을 규정했다.1999년 4월12일에 13일 기술지부, 14일 차량지부, 15일 승무지부 순으로 [본업외 지시거부], [정시운행 등 준법투쟁], [근무시간 중조합원 집회개최] 등 순으로 투쟁강도를 높여나가기로 했다 고 12일 밝혔다. 고건 서울시장이 노사협상을 벌였으나 의견접근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노조는 준법투쟁에 돌입했다1999년 4월13일에 지하철 노조원 700여명은 서울 성동구 용답동 군자기지에서 파업돌입에 앞서 [현장간부 결의대회]를 가지고 1999년 4월 14일에 공공연맹노조 대의원들은 사업장별로 쟁의행위찬반투표를 벌렸다.서울 지하철공사 노조는 전동차의 안전점검과 정비작업을 거부하는 실상의 태업에 돌입했다.지하철군자, 신정 등 5개 차량기지에 근무하는 2천여명의 노조원들은 업에 돌입한다 고 밝혔다.석치순 노조위원장은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19일 1차로 지하철 노조를 비롯해 공공연맹 산하의 데이콤 등 22개 노조가 파업에 들어갈 것이다 라고 말했다.서울시는 노조원 기관사들을 대체할 경력 기관사와 소방관, 군 인력 등 500여명을 차량 기지별로 배치하는 등 파업에 대비했다. 또 방학동∼창동역, 하계동∼염리동 등 시내버스 21개 노선에 517대를 임시편성하고 마을버스 266개 노선 1426대를 연장 운행키로 하는 등 막바지 비상수송대책을 점검했다.노사 양측은 밤샘협상을 벌였으나 타협점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참여연대, 전국연합 등 55개 시민사회단체는 기자회견을 갖고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책임 있는 대화에 나서줄 것 을 호소했다.또 교통문화운동본부 등 시민단체로 구성된 서울지하철문제 시민대책위원회 도 서울시와 노조는 적극적인 자세로 협상에 임할 것을 촉구했다.1999년 4월 19일에 서울 지하철공사 노조가 오전 4시부터 전격 파업에 돌입했다.파업을 선언한 지하철공사 노조원들은 파업출정식을 가진 뒤 세종대에 집결해 파업결의를 다졌다.파업에 참여한 노조원들은 세종대, 명동성당, 신정차량기지등에 분산돼 정부의 구조조정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에 경찰 4개 기지창에 공권력을 투입하고 서울시측은 새벽부터 간부직원과 외부인력 등 대체인력을 역무원과 차량 검수원, 기관사 등으로 투입, 지하철을 정상운행시켰다.또한 지하철공사는 석치순노조위원장과 노조원 86명에 대해 업무방해혐의로 서울지검과 성동경찰서에 고소-고발장을 접수시키고 서울지검 공안2부 신태영 부장검사는 석치순 노조위원장등 노조 지도부 13명과 기술·차량지부 등 각 지부장과 사무국장 6명 등 19명에 대해법원으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섰다.이날 정오 현재 전체 노조원 9840명중 16%인 1577명이 작업에 참여했다,1999년 4월 20일에는 서울지하철 노조의 불법 파업 이후 이틀간 발생한 10여건의 사고 가운데 7∼8건이 인위적 369명의 노조원이 복귀, 오후 9시 현재 작업에 복귀한 노조원은 전체 노조원 9천756명의 37.2%인 3627명으로 늘었다.이에 따라 비노조원을 포함한 근무 인원 1만786명 가운데 처음부터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노조원 946명을 포함, 전체의 43.2%인 4657명이 지하철 운행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기관사의 경우 이날 하루 12명이 추가로 복귀, 복귀자가 67명으로 늘어났다.이날 경찰은 서울대 교내 100m까지 진입하여 노조들이 서울대 도서관을 점령하기도 했다.1999년 4월 26일 서울지하철 노조는 오후 서울시에 노사협상재개와 파업철회 의사를 밝혔다.서울지하철 석치순 노조위원장은 서울시와 공사는 구조조정안에 대한 노사협상을 재개하고 12월말까지 협상을 완료하자 며 노조의 요구안이 받아들여지면 즉시 파업을 철회하겠다 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시 관계자는 협상재개는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징계방침 철회와 민사상 책임의 면제는 협상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고 말했다.1999년 4월 27일 지하철공사는 10시까지로 했던 2∼4호선을 정상운행하고 이와 함께 한국통신 노조가 파업을 전격 유보, 파업 사태가 진정되었다.서울시 지하철 공사 파업의 결론서울 명동성당에 머물던 서울지하철 파업 지도부의 파업 철회 선언은 26일 밤 전격적으로 이뤄졌다.민주노총과 서울지하철 노조 지도부 10여명은 이날 낮 12시부터 농성 텐트 주변에 취재진의 출입을 막으며, 4시간 가까이 마라톤 회의를 계속했다.석치순 노조위원장은 오후 3시30분쯤 기자회견을 갖고 징계 철회와 민사상 책임 면제를 조건으로 한 협상재개와 파업철회를 제안했다.성당 내 노조원들은 석 위원장의 기자회견에서 파업 철회 움직임을 감지했다고 말했다.석 위원장은 전날까지의 강경자세에서 벗어나 서울시측에 9개의 수정안을 제시했다.굳게 문을 잠근 텐트 안에서 지도부는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한 채 서울시의 답변을 기다렸다.그러나 오후 6시쯤 서울시측에서 노조의 수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공식 입장 발표만이 있었다.민노총 장했다.
경영학과 98302010 오현진경영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높은 성취의욕을 갖도록 동기부여 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리더가 됨으로써 조직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경영자의 책무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리더십이란 다른 사람을 동기부여 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특정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적 라이벌이었다.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기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었으며 이들은 영·호남의 지역감정으로도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우리나라 과거 대통령인 김영삼 대통령과 현재의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로서의 자질을 비교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먼저 김영삼 대통령의 리더로서의 자질에 대해 설명하고자 몇 가지 기사내용을 조사하였다.지난 2월 25일 한보사태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고개 숙인 모습으로 취임 4주년 담화문을 읽어 내리는 모습을 보고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왜 김대통령은 줄기차게 부르짖어온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했을까. 남은 1년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이 실패에 책임질 일은 없었는가 하는 생각에 착잡했습니다.현정부에서 고위 경제관료 생활을 한 어느 경제학자의 말이다.고개 숙인 김 대통령 을 본 이후 요즘 경제 부처와 그 주변에서는 지난 4년간 문민정부의 개혁작업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가 주요 화젯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이 대화의 큰 줄기는 정권말기의 개혁무망론이지만 간간이 자성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비판과 자성의 주체는 대체적으로 정책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사람을 쓰는 것까지 대부분 정당 운영식 정치논리가 경제개혁의 논리를 지배했고, 관료들은 복지부동의 자세로 이것을 방관했기 때문 이라는 것으로 모아진다.이러한 개혁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늘 주장했던 개혁에 대한 방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김영삼 대통령이 처음 취임하던 그 때. 군사정권의 통치를 벗어나 문민정부의 출범이라는 기대 속에 국민들은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정치에 대한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가 무너진 것은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적 마인드에 미치지 못하는 전략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관료들을 그는 어떻게 통치했을까?그가 내각을 이끌어 가며 관료들과의 협조체제가 곧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적 마인드를 수행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이러한 김영삼 대통령의 생각은 경제실패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에 따른 많은 의견들이 나타나게 되었다.경제계에서는 신 정부의 경제개혁정책이 실패한 요인으로는 정부가 개혁 대상과 방법에 대한 본질적 성찰보다는 정치적 상징성 에만 집착한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한마디로 개혁적 마인드는 있었지만 이를 총론적으로 구체화하면서 끌고 나갈 팀 도 전략 도 없었다는 것이다.문민정부 경제팀은 출범 초기 민간의 참여와 창의를 바탕으로 시장경제에 입각한 성장전략 을 기조로 한 신경제 5개년 계획을 입안하면서 일관성 예측가능성 투명성 을 경제 운용정책의 3대원칙으로 밝혔다. 하지만 5개년 계획은 용두사미 로 끝났고 운용원칙마저 허물어 졌다.개혁정책기조가 일관된 방향을 유지하지 못한 채 몇몇 경제관료들에 의해 신경제 세계화 경쟁력 10% 제고 식의 구호나열로 이어지는 동안 재벌의 재편을 유도하기 위해 기세등등하게 발표됐던 주력업종 전문화 정책 이 결국 재벌 주력업종 지원정책 으로 앞뒤가 뒤 바뀐 것도 단적인 예이다.결국은 민간위주로 추진하겠다던 경제정책이 재벌의 논리대로 이끌려 왔다는 비판마저 면치 못하고 있다.그리고, 사전에 치말한 준비가 없었던 데는 문민정부개혁의 최대 치적으로 꼽히고 있는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도 마찬가지다. 금융실명제는 전 국민의 생활과 직결된 부분이기 때문에 소득 계층간 공평과세 등 실명제를 받쳐줄 수 있는 제반 법규제정과 함께 이뤄져야 했다. 하지만 금융실명제 이후에도 상속·증여세의 면세 범위가 확대되고 비과세 상품이 속출하는 등 각종 조세 감면 조치는 오히려 늘었다. 이러한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의지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줄 수 있는데는 구체적인 조직도 없었을 뿐더러 이러한 조직을 운영해 나갈 수 있는 김영삼 대통령 스스로의 자질면에서도 많은 부족한 점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김영삼 대통령의 리더로서의 자질에 대해선 김영삼 정부를 이끌었던 관료층의 현조체제를 보면 알 수 있다.김대통령 스스로 정부를 이끄는 힘보다는 끌려가는 쪽의 힘이 더 컸던 것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리더로서 가져야 할 실천적 태도가 부족했다.현재의 시대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개혁정책만을 주장해 온 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낳았고 그에 따른 비판만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리더로서의 실천적 태도를 길렀다면 김영삼 대통령의 정책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국민들의 기대에 부흥할 수 있었을 것이다.대통령 스스로 개혁의지만을 중심으로 정책을 펼쳤을 뿐 그걸 실천하는 내각에 대한 관리는 소홀했으므로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는 대통령이 되었고 리더가 되었다.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던 정부를 뒤이어 받은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이다.김대중 대통령의 리더로서의 자질은 충분한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면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정책면이 아닌 실천적 행동에서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여러 기사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간력히 보면 다음과 같다.김대중 대통령은 당선 전부터 그의 승리를 예감하는 사람이 많았다.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할 만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여기저기서 내려졌기 때문이다.첫 번째로 김대중 대통령의 이념퇴조 현상은 그에게 대통령 당선이라는 희망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집권 여당의 파워블록의 붕괴현상으로 고정 지지세력이 집권당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마지막으로 정국을 불안하게 하는 모든 요인이 집권 여당에서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이탈세력방지에 주력하고 있는 신한국당이 내분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분열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김대중 대통령의 인터뷰 내용을 잠깐 보면 김대통령의 정책이나 그에 따른 실천계획을 통해 그의 리더로서의 자질을 엿볼 수 있다.그는 대통령이 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국민과의 화합이라고 말하고 있다.지역간· 계층간·세대간·남녀간 화해를 집권 1년 내에 실시하겠다고 함으로써 그를 지지해 준 세력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