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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철학사상] 진리사람 다석 류영모를 읽고
    동양철학사상 REPORT진리사람다석 류영모를 읽고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동물 중 으뜸이라는 인간조차 완전하지 못하다는 모순을 보완하기 위해 우리는 종교를 통해 인간의 부족한 조각을 채우려한다.하느님을 믿는 자는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통해서 부처님을 따르는 자는 불교를 통해 정신적 안정을 추구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그분들에게 의지함으로 위안을 얻게 된다.그러나 현실의 문제는 그렇지가 못하다. 종교를 마치 그날그날 제출해야 하는 출석표인 것처럼 눈에 보이는 믿음에만 독실하다.나는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왜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에 국한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부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고, 마호멧의 사상도 믿는다고 하면 마치 이단자 취급을 받거나 종교에 대한 믿음이 없는 얄팍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가에 대해서 말이다.사실 나는 천주교 신자다. 어려서부터 성당에 나가 세례를 받고 영성체를 모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주일이면 꼬박 미사에 참가했고 한달에 적어도 세 번이상 고백성사를 보는 나름대로 믿음이 강한 신자였다.그러나 대학생이 되고 여타 다른 환경을 접하게 되면서 소위 내 신앙심은 약해져 갔다. 성실성의 문제도 있지만 21살 때 철학과 종교란 수업을 듣고서부터는 나는 무교론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종교에 대한 생각에 일몰의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무교란 종교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열려있는 마음이다. 절대적 존재자로서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석가모니, 마호메트, 공자, 겸애, 묵자 등 그분들 역시 실존 인물이고 그 시대에 큰 사람으로 모두에게 존경받아 왔기에 후세에도 그 명성이 이어 내려오나 나약한 인간이 자신의 든든한 의지자로 만들기 위해 그 분들을 절대적인 사람 즉 신성시 해온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오직 한분만을 위한 믿음으로 타 유명가의 사상을 무시하는 것보다 모두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종교라고 말이다.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내 생각의 줄기가 가늘어질 때쯤 나는 내 생각과 꼭 맞아떨어지는 한 분을 만났다. 바로다석 류영모의 생활1) 은둔하는 생활류영모는 '북한산인', '삼각산인', '비봉거사'라는 칭호를 듣는 산속 초야에 묻혀 사는 은군자가 되었다. 세상에 나타나려고 하지 말고 숨어야 한다. 위(하느님)로 오르려는 사람은 깊이 숨어야 한다. 숨는다는 것은 더 깊이 준비하고 훈련한다는 것이다. 자기 훈련으로 자기 수양으로, 사람은 진리인 도(道)에 이를 수가 있다.요즘 사람들의 교제가 너무 값이 싸다. 단지 필요에 의한 만남을 통해 관계를 만들어가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관계의 명분은 사라진다. 서로가 그 점을 아쉬워 하지도 더 유지하지도 않으려 하며 그것을 당연시 여긴다. 우리는 매우 짧은 사이를 두고 만나기 때문에 제각기 새로운 가치를 얻을 시간의 여유가 없다. 인간의 가치란 살갗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남의 살갗에 닿아 본다고 그 가치를 아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들이 가장 친밀한 교제를 즐기고 싶다면 우리도 침묵을 지킬 뿐 아니라, 서로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육체적으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인생을 즐겁게 사려면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다석이 말하는 슴는다는 의미는 사람과의 단절 속에 고립되는 의미가 아니라 현상계의 물질 문명으로부터 은든의 삶을 말하는 듯하다.인간이 만든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편리함 속에서는 진정한 진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온갖 이기적인 편리를 다 누리면서 하는 신앙이란 어딘가 모르게 깊이가 없는 듯 하다.부족한 듯 모자란 듯한 삶 속에서 구한 참 뜻이야말로 석가모니가 말하신 "내안으로부터의 깨달음"의 귀결인 셈이다.2) 삼독(三毒)하는 삶류영모는 "나(自我)가 죽어야 얼(靈我)이 산다"고 하였다. 석가의 말이나 예수의 말은 내 마음을 죽이는 것이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다. 나(自我)가 한 번 죽어야 마음이 텅 빈다. 한 번 죽은 마음이 빈탕(太空)의 마음이며 빈 마음에 하느님 나라, 니르바나 나라를 그득 채우면 더 부족한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다석은 나(自我)를 죽이는 길은 삼독을얼나(靈我)가 산다. 나(自我)가 완전히 없어져야 참나가 된다. 나(自我)가 죽어 내 마음이 깨끗해지면 하느님을 볼 수 있으며 죽음을 넘어서 울리는 영원한 생명인 성령의 소리 즉 복음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이렇게 나(自我)가 죽으면 미움도 없어지고, 미움이 없어지면 원수도 없다. 류영모는 미워하는 진(瞋)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오 5:43)라고 예수는 가르치셨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만이 원수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노자(老子)도 원수를 덕(德)으로 갚으라고 하였다. 공자(孔子)는 원수를 곧음(直)으로 갚으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미워할 것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미워할 것은 미워하되 나의 삼독(三毒)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삼독을 잘 다스린 데서 성인(成仁)이 된다. 류영모는 이렇게 제나(自我)가 온전히 없어지자 얼나(靈我)가 탄생하였다.류영모가 하루에 한 끼니씩만 먹기로 한 날이 1941년 2월 17일부터이다. 1941년 2월 17일, 식색(食色)을 끊은 지 거의 1년이 되는 1942년 1월 4일에 중생(重生)의 체험을 한다. 류영모의 말대로 나(自我)가 죽은 빈 마음에 '하느님의 나라', '니르바나의 나라'가 들어선 것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나는 이 책을 통해 류영모의 사상에서 공감대를 얻었다면 류영모의 생활(욕망을 누르며 사는 삶)을 읽고는 존경해 마지 않았다. 참으로 끊기 어려운 것이 탐욕이다. 아니 어쩌면 인간이란 그 욕망에 이끌려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나 역시 욕망으로부터 내 자신을 끄집어 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머리로만 잘 알고 있지 실천을 하기가 아렵다. 류영모가 존경받아야 할 점은 머리로 한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지행합일의 의지가 아닐가 생각한다.나는 시험기간에는 주로 소식을 한다. 모자란 듯한 느낌일 때가 오히려 집중력도 좋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것 한가지에 대한 강한 몰두가 나를 식탐으로나 마찬가지로 삼독의 나를 초월하자는 것이다. 성령이 먼저 와서 삼독이 물러서느냐 삼독을 먼저 쫓아서 성령이 오느냐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도 성령을 주시려고 하는 것은 틀림없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줄탁( 啄)의 은총과 기도가 맞아야 하기에 죽어가는 날까지 지성감천의 삶을 살았나보다.3) 죽음을 기다리는 삶빛보다 어둠을, 한낮보다 저녁을, 생명보다 죽음을 사랑하여 아예 다석(多夕, "하도 지낸 저녁")을 아호로 삼은 사람, 류영모는 기도(기도란 생각하는 순간이다)할 때 눈감듯이 어둠과 저녁을 "얼나"를 밝히는 지혜의 순간으로 삼은 분이다. 그래서 그는 만년에 나이 찬 처녀가 시집가는 날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호기심과 설렘과 벅찬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렸다고 한다. 이 세상에 와서 3만 3천 200날의 하도 많은 저녁(다석)을 보내면서 류영모는 영원한 저녁을 그리워했다. 다석에게 영원한 저녁은 다름 아닌 영원한 생명의 세계, 하늘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28세의 다석은 1918년 1월 13일부터 산 날을 세기 시작했다. 아침에 잠이 깨어 눈을 뜨는 것이 태어나는 것이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 잠드는 것이 죽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루동안에 일생을 산다는 일일일생주의(一日一生主義), 즉 다석의 오늘살이 정신이다. 하루를 무심히 지내면 백년, 천년을 살아도 시간을 다 잃어버리는데, 하루하루를 지성껏 살면 무상(無常)한 인생도 비상(非常)한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우리에게 죽음이란 단어는 자꾸만 피하고 싶어진다. 일종의 두려움같은 것이며 불가피하게 받아 들여야하는 현실이기에 죽음이란 상황을 생각하기를 꺼려한다. 인간의 죽음은 곧 자신의 인생의 끝이라는 귀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석의 생각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틀리다. 류영모에게서 죽음은 그저 오늘 하루의 저녁에 불과하다.나는 하루가 밝아오면 비장한 각오로 다짐을 한다. '오늘은 이런 것들은 꼭 지켜야지!' 그러나 막상 반나절을 흘려버리고 나면 '내일이 있으니까 내일은 꼭 리가 아닌 것이 없다. 21세기 진정한 지리사람이라는 칭호가 실로 안성맞춤인 듯 하다.2. 종교사상류영모는 정신은 하느님밖에 그 무엇에도 매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 정신을 어디에 매어 놓으면 일이 잘 될 것같이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정신을 붙들어 매어 놓고 싶어 하지만 정신이란 그런 게 아니다. 마음은 자유로운데 그 본질이 있다. 무엇에 매여 사는 것은 내려가는 것이다. 매이는 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어디에다 묶어 놓을 수 있는 게 정신이 아니다나는 종교 없이 산 적은 없다. 종교 없이는 하루라도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제까지 교회 없이 살아왔다. 종파별로 또 정치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분리교회란 내게는 언제나 국가주의의 풍자화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얼마쯤의 존경심과 질투심을 가지고 로마 가톨릭교회를 바라보곤 하였다. 그러나 이 찬란한 가톨릭 교회는 가까이 다가가면 유혈·폭력·정치·비열의 냄새가 풍긴다.다석의 종교론적 견해를 살펴보면 그 깊이를 느낄 수 있다. 학문적 견해가 깊은 사람의 사상을 우리가 배우고 계승하기를 좋아하기에 오늘날 우리가 다석 류영모를 기억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그의 사상적 맥락은 다원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학자는 류영모는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서구의 종교다원주의보다 70년 앞서는 탁견이요 혜안이라고 호평하기도 한다.크게 두가지 관점으로 그의 자취를 조심히 밟아보려 한다.1) 귀일(歸一)신학 : Returning to the One류영모 신학의 핵심을 꿰뚫는 말이 바로 '귀일歸一'이다. 이 개념은 '화해'라는 종교철학적 개념과 연관하여 한국 지성사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멀리는 손님과 신을 화해시켜주는 무당의 존재가 있는 샤머니즘부터, 원효와 지눌 그리고 율곡을 거쳐 류영모에까지 이르고 있다. 사실 그동안 서구 신학계의 주된 흐름 가운데서 많이 주장되어 온 예수 중심주의나 신 중심주의는 일방향적인 면이 많은데 반해, 이 개념은 온 곳이 있고 또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양다.
    인문/어학| 2004.02.16| 7페이지| 1,000원| 조회(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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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사] 중국역사
    오늘날 세계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10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 중국 대륙은 예전의 폐쇄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개방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세계의 이목이 중국을 향하고 있다.특히 우리 나라는 같은 유교 문화권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아 왔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 역사를 더 잘 알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중국은 한족의 역사 무대라고 여기기 쉬우나 실제로는 여러 민족이 흥하고 망하는 것을 반복해 온 교두보였으며 현재만 보아도 한족, 몽고족, 티베트족, 만주족, 위그르족 등 50여종의 잡다한 민족들이 중국대륙에 살고 있다. 따라서 주국 문화는 우리와 같은 단일 문화가 아닌 복합 문화라고 봐야 한다. 이처럼 인종의 집합지인 중국의 단순하지만은 않은 오랜 기원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중국 문명의 기원과 상(商)·주(周) 왕조이집트 문명, 황화 문명, 양쯔강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4대 문명의 발상지로서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다. 문명의 발상지의 두곳이나 중국 대륙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서도 중국은 얼마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지를 알수 있다.중국에서 인류의 활동이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170만년 전이라 추정되고 있는데, 모두 불과 간단한 타제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직립 보행은 하였지만 현대인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으며 20만~10만년 정도에 이르러 점차 현생인류에 가까워 졌다.대략 3~4만년 전이 되면 인류는 더욱 진화하여 현대인과 같은 단계인 호모 사피엔스로 발전했다. 이들은 정교한 도구인 돌화살촉과 뼈바늘을 사용하였으며 석기의 가공능력도 한층 발달하였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죽은 사람에 대한 종교적인 행위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구석기인들이 이제 삶과 죽음에 대한 초보적인 종교관념을 갖게 되었음을 알려준다.구석기 시대에는 무리를 이루어 큰 사냥감을 찾아다니며 무리생활을 하였다. 무리 가운데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권력을 가지지는상 말기에는 왕권에 예속되어 버린다. 이것은 상대의 신정적인 성격의 왕권이 세속적 왕권이 강화되면서 그 의미가 축소되고 결국 왕권에 흡수되었음을 뜻한다.주(周)왕조는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전 249년까지 은(殷)나라에 이어 성립된 중국의 고대 왕조이다. 처음에는 은나라에 귀속된 속국이었으나 문왕(文王)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이 은의 폭군 주(紂)를 몰아내고 건국했다. 주(周)는 은(殷)의 말기에 처음 시작된 봉건제도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국가로서 봉건제에 의해 혈연관계가 없는 부족까지도 주의 친척으로 보는 유사혈연제를 만들어 제후로 봉하고 유사시 무력을 동원하도록 하여 강력한 무력국가를 만들었다. 주왕조는 종법적 봉건제 통치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천명을 강조함으로써 통치자 개인의 덕치를 강조하는 문화적 전통을 확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문치위주의 사회가 형성되는 전통이 확립되었으며, 후대 관료제 발달의 이념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와 함계 소농민의 생계를 보장하는 정전제가 실시되었다는 전승에 힘입어 주왕조는 중국 역대 왕조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시대로 추앙받게 되었다.이러한 주왕조도 서융(西戎)이라는 유목민의 침입을 피해 기원전 770년에는 동쪽 낙양(洛陽)으로 천도했다. 동쪽으로 옮겨갈 때까지를 서주(西周)라 하고,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한다. 동주시대에는 국력이 쇠약하여 각 제후들에게 실권을 빼앗긴 채 명목만 남은 국가가 되었다. 기원전 256년 진(秦)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25명의 제왕이 514년간 동주왕조를 이끌었다. 동주시대는 곧 춘추전국시대에 해당한다.진시황제는 유학자와 그들의 학문을 대상으로 그렇게 끔직 춘추전국시대를 일컬어 격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춘추의 5패 - 제(齊), 송(宋), 진(晋), 진(秦), 초(楚) - 라고 불리우는 패자가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고 전국의 7응이라고 불리운 제후 즉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연(燕), 초(楚), 진(秦)이 정치를 전단하는 시대가 시작된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항을 조직화할 수 있는 경제력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진나라 정부는 이들에 대한 경고이상의 조처를 취해야만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분서갱유'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그러나 진(秦)제국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처음으로 중국에 통일국가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현재 차이나(China)라는 영어 이름도 진(Chin)에서 기원한 것이다.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초한전(楚漢戰) 끝에 BC 202년에 한나라(漢)의 고조(高祖) 유방은 숙적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격파하고 통일된 왕조 한(漢)을 세웠다. 수도는 장안으로 정했는데 위수분지가 비옥하다는 점과 함께 산과 강으로 둘러쌓인 천연적인 요새라는 지형적인 요인을 감안한 것이었다.고조가 죽은 후(B.C.195), 장자인 혜제가 즉위하였지만, 병약하여 일찍 죽고 황태자가 없어 고조가 처인 여후가 후궁의 아들을 내세워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B.C 180년 여후가 죽자 고조의 공신이었던 태위 주발과 진평 등이 여씨 일족을 죽이고, 대왕이었던 유황을 맞아 제위에 올렸다. 이가 문제였다. 문제와 그 뒤를 이은 경제의 통치시시(B.C. 179~141)는 문경지치라고 하여 치세로 칭송되고 있다. 경제의 뒤를 이어 무제는 16세의 나이로 황제자리에 올라 B.C.87년까지 55년간의 재위기간에 정치·군사문화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무제시기는 전한의 전성기이자, 또한 이 시대를 경계로하여 중앙집권적인 체제의 확립을 지향하던 시기와 제국의 성격이 변모하는 시기의 분수령을 이루었다.한(漢)은 진(秦)이 엄중한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실패했던 것을 감안해, 법제를 늦추고 부분적으로 봉건제를 부활해 군현제와 병용하는 이른바 군국제(郡國制)을 실시했다. 특히, 무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해감에 따라 그것을 사상적으로 지지해주고 국가의 권위와 위엄을 갖추어줄 기반을 유학에서 구함에 따라 유학은 한제국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유교의 경전인 오경(五經, 易, 書, 詩, 완전히 막을 내렸다.◎북방민족의 이동과 남북조 시대후한이 멸망한 뒤 위·촉·오 삼국의 대립을 거쳐 서진(西晉)이 잠시 중국을 통일하였지만, 내부의 분란과 북방민족의 중국 내지로서의 이동으로 멸망한 후, 중국은 남과 북의 분열·대립시기로 접어들었다. 누구나 한번쯤 읽어보았을 삼국지의 얘기가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조조가 사실상의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지만 얼마 못가 운명을 달리함으로써 선양의 형식으로 그의 아들 조비가 위를 수립했다. 이후 유비가 한(漢)을, 손권이 오(吳)나라를 세우게 되니, 중국의 천하는 명실공히 삼국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그러나 삼국의 국력을 비교하자면 단연, 위가 압도적으로 우월했으며, 촉한의 세력이 가장 미미했다.생사기로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삼국시대였지만 삼국의 경쟁 속에서 내지의 국토는 더욱 확장, 개발되었고, 특히 위나라에서 시작된 여러제도, 일종의 국영농장인 둔전(屯田)의 토지제도, 관리 추천제인 9품관인법등 선진적인 여러 제도는 위진남북조시대의 한 전형이 되었다.여기서 9품관인법이란 호족계층과 국가권력의 결합을 도모하자는 의미에서 조비가 실시한 관리추천제로써 군국에 각기 중정관을 두고 그 지방의 인재를 가문, 덕행 및 재능과 향론에 따라 9등급으로 등급을 매겼다. 원래 제도 자체가 귀족제를 옹호하고 지탱해 주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으나 가문의 고하를 판별하고 귀족의 관직의 서열을 정하는 수단으로 운용되어, 신분질서가 이 향품의 고하 즉 가격의 고하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가 형성되었다.사마염이 위나라의 제위를 빼앗아 진나라를 세운 후, 삼국으로 분열되었던 중국은 잠시 통일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 통일은 불과 4대 37년간에 불과했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었으며, 중국의 분열은 당분간 지속될 형편에 있었다. 이 분열기를 위진남북조시대라고 부른다.위는 삼국 중 강성했던 조조의 나라 이름을 딴 것이고, 진은 통일 왕조인 서진과 유목민족에게 북중국을 빼앗기고 강남에 수립한 이른바 동진을 합친 사마씨의본래의 도가사상과는 거리가 있다. 도교는 오늘날까지도 유달리 건강에 관심이 많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염원되었던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해방, 즉 불로장생의 염원이 담긴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음양오행설, 참위설 혹은 민간의 잡다한 신앙들이 뒤섞인 것이다.이와 대조적으로 국가 불교로 재해석된 불교의 윤회설을 현실에 적용하면,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은 지배층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생에서의 자신의 잘못된 행위의 결과, 즉 인과응보이므로 누구를 탓할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민중의 저항은 부당한 것이 되고, 현실에서의 불평등한 사회질서는 정당화되는 것이다.◎수당 통일제국과 동아시아 세계후한 몰락이후, 분열의 상태가 자그만치 370년간 지속되면서 다시는 오리라 믿기 어려웠던 중국사회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581년 외척 양견이 북주의 왕위를 찬탈, 수나라를 세우더니, 마침내 589년에는 진을 멸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했다. 그가 수 문제다.문제는 통일의 힘으로 발휘되었던 백성들의 측정할 수 없는 열기를 토대로 정치에 힘써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당제국의 기초가 되었던 각종 제도들은 바로 문제가 북조의 각 제도를 수렴하고 정비해낸 것들이다.균전제에 기초한 부병제와 조용조의 세제, 문별에 의한 9품관인법에 대신하여 중소 지주층의 관계진출의 길을 연 과거제 3성 6부의 중앙관제 등이 실시되었다. 주, 군, 현의 지방행정 조직이 간소화되어 주현제로 정착하게 되었고, 인보제를 실시하여 백성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수 양제는 문제의 둘째아들로 뛰어난 용모와 재능으로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양제의 평생 길이 남을 업적인 대운하를 개통하여 남북 문물교류를 활발히 함으로써 오랜 남북 분열을 통합하고 통일을 실질적으로 완성했다. 최초로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진의 상징물이 만리장성이라면, 수의 중국 재통일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대운하를 꼽을 수 있다.대운하는 주요 강, 백하, 황하, 회수, 양자강, 전단강 즉 5대강의 하류를 남북으로 연결했다. 이로써 실핏줄처럼
    인문/어학| 2003.07.09| 9페이지| 1,500원| 조회(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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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학개론] 환경위기와 녹색대안
    환경위기와 녹색대안1. 현대사회와 환경문제사회학은 전통적으로 한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문제들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왔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며 이 사회문제라는 것은 각 사회의 특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과거에는 범죄, 마약, 폭력, 일탈, 노사갈등.... 등이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지역주의의 대두, 외국인노동자문제, 인종차별주의등 새로운 사회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 중 시급한 대응으로 요구하는 사회문제로 우리는 환경위기라는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환경문제는 그 규모와 심각성에 비추어 볼 때 과거의 환경문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우리는 환경문제가 사회체계 전체의 문제와 어떻게 얽혀 있는가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사회체계 수준에서의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1. 1) 사회학과 환경문제초창기 사회학자들이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원인은 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부터 출발한다. 사회생활의 집합적 차원에 관심을 기울인 사회학은 자본주의적 산업사회가 가져온 사회적 문제 에만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불평등과 빈곤, 억압 등을 가져오는 통제되지 않은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출발하였던 것이다.이러한 경향은 성장의 황금기가 점차 빛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1970년대 인류가 추구하는 경제성장 모델에 회의적인 의견이 등장하면서이다.1972년 로마클럽이 발표한 라는 보고서는 인구증가율, 식량생산능력의 향상 속도, 산업화, 자원고갈의 속도, 오염증가 추세가 현재와 같은 속도로 지속된다면 1백년 이내에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그 이전에 지속가능한, 생태학적이고 경제적인 안정을 되찾기 위해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그런데 환경사회학은 사회학에 환경문제를 추가한 것을 넘어서 환경문제에 접근하기 위하여 인접과학들의 연구성과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1. 2) 환경문제와 근대성의 위기16세기 이후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 사회사상은 진보 를 인간사회가 지향해야 할 하나의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진보(경제성장)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 방향으로 과학적 발전을 추구하였고 과학기술에 기초한 물질적 생산의 증가의 결과 환경문제의 심화는 근대성의 위기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구환경 위기가 널리 인식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제 인류에게 진보 라는 문제보다는 생존 이라는 문제가 더욱 절실한 문제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현재 지구가 처하고 있는 위기를 근본적인 수준에서 논의하자면 진보를 믿는 근대성 자체의 위기인 것이다.우리는 한 시대의 팽배하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패러다임이 시대적 사조이자 유행이라고 본다면 근대성의 패러다임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근대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또한 그것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을 요구한다.삶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회체계를 짜는 포스트모던한 사회의 발현을 위한 노력이 오늘날 포스트모던 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그 대안을 모색해 볼 수가 있겠다. 그들에 따르면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는 경제적, 사회적, 영적차원의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현재 인류는 환경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처를 하지 않고 있으므로 근대적 가치관으로부터 탈피, 탈근대적 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 3) 환경문제, 민주주의, 경제정의앞서 탈근대적 정치의 필요성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진보와 포스트모던한 사회추구의 두 갈림길에서 우리의 입장은 서구의 것과는 어느 정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세기마다 패권을 지고 평화의 시대를 누린(팍스로마나, 팍스브리태니카, 팍스 아메리카나) 국가의 흐름에 대한 메가 트랜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이제는 아시아야말로 새로운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는 약속의 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민주주의, 경제정의, 환경경의 위기는 사회의 민주화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환경문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문제제기가 없었더라면 결코 환경문제는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정의와 환경문제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계급분화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동반하기 때문이다.인간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의 환경문제에 대한 공동의 인식과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의 연대 가 없이는 환경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도 중요한 쟁점이다. 지구의 환경위기는 인류공동의 위기이며 공동의 인식과 행동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2. 생태주의 패러다임과 환경문제에 대한 담론신사회운동의 하나로 환경운동을 언급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환경은 단순한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여러 요인이 하나로 얽혀 생겨난 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정책적 처방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근대사회의 계급적 수준의 차원을 초월하여 다양한 이해관계들이 적극적으로 사회변화를 추구해야할 운동인 것이다.따라서 새로운 사고의 틀로 전환이 불가피하다. 이는 곧 기존의 패러다임을 허물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밀브레이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구성원들의 사고의 틀을 DSP에서 NEP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DSP란 성장위주의 전통적 패러다임(좁은 범위의 특정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자연의 가치를 경시. 현재사회에 만족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성향. 부의 극대화를 위한 위험감수. 끊임없는 성장의 선상에서 진보를 주장)을 의미하며 NEP란 환경의 문제를 극복할 새로운 생태학적 패러다임(넓은 범위의 초계급적 성격. 자연에 높은 가치부여. 새로운 사회의 추구. 위험을 피하고 사려깊은 계획과 행동추구. 성장의 한계에 대한 인정)을 의미한다.지금부터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이에 대한 4가지 입장을 구분하여 서술해 보겠다.1 생태주의 :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과학기술, 정치체계, 생산양식을 모색하고 공동체주의적 지향성을 강하게 풍기면서 적정기술체계, 권력을 위해 영성을 강조하고 새로운 금욕주의적 생활양식을 실천하는 문화운동을 제창한다. 2 생태사회주의 : 사회적 평등과 환경문제의 해결을 동시에 추구하는 입장이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갈등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이 동시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인식,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생태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본다. 즉 환경위기의 원인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같은 사회구조적 조건으로부터 찾는다. 3 환경관리주의 : 기존의 정치경제체제 안에서 환경기술을 발전시키고 환경정책과 환경관리를 강화하여 사람들의 행위양식을 변화시키면 환경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환경문제를 정부의 정책이 낳은 부산물로 인식, 정부의 규제나 유인책 등의 환경정책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환경보존의 목적은 개발을 위하여 자원을 효율적으로 써야하며 낭비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결국 구조적 문제를 논하기 보다 기존의 체제내에서 합리적 관리를 통해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4 지속가능한 개발론 : 1992년 리우 세계환경회의 이후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개념으로 심층생태주의와 성장제일주의의 중간에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구의 수용능력과 저장능력을 고려하는 범위 안에서 성장을 지속시키자는 입장이다, 즉 환경과 개발의 조화라는 입장이라기 보다는 성장에 더 가중치를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브룬트란트 보고서는 경제성장과 산업주의가 세계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보면서 성장을 소생시키고 성장의 질을 변화시킬 것을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3. 지구환경 위기와 세계시민의식지구생태계는 현재의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살 인류의 후손과 다른 생물종들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인간사회 자체가 자연 생태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생태계의 균형이 깨지고 파괴가 일어나는 경우 인간사회 자체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생태계의 문제는 지역과 국가의 차원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라는경위기의 극복을 위해서 몇 가지 활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1세계 인구의 안정화 2환경친화적 기술의 개발과 이전 3우리의 결정이 환경에 주는 영향을 평가하는 경제적 규칙의 전면적 검토 4새로운 국제협정의 교섭과 승인 5지구환경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의 확립 등이다. 또한 선진국은 환경보전기술의 제 3세계 이전을 촉진, 가난한 나라들의 인구가 안정을 추진하며, 확실한 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예산을 늘려야 함을 주장하였다.인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관계가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앙정부가 존재치 않는 국제사회에서 힘의 관계에 의한 자국의 논리 중심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따라서 지구환경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세계시민의식 을 가지고 국가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사고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정체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일은 정부간 기구의 역할이기도 하지만 국경을 넘어서 활동하는 국제적인 비정부환경단체(NGO)들의 활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각국의 정부와 국제기구를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지구환경의 보호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는 그린피스와 같은 단체들의 활동이 그 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산업화 초기 노동자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하나의 집합적 조직을 형성하였다.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려는 노동운동은 자본중심의 자유경제체제하에 만들어진 하나의 노력인 셈이다.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양보다는 질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물질적 가치 이상의 것들을 위한 이해관계가 형성, 이들은 초계급적 성격을 띤다는 점은 이전의 것과는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이다. 그 대표적 예가 환경운동이며 이는 한국, 일본, 미국 등의 국가적 경계를 초월하여 전지구적인 문제이기에 우리는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지난해 겨울 승용차를 구입한 이후로 처음 맞이한 봄은 귀찮은 계절이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절이었다. 아침 등교길 차를 타려고 보면 간밤동안 수북히 쌓인 모래, 먼지를
    인문/어학| 2003.05.15| 5페이지| 1,000원| 조회(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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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학개론] 성. 여성, 가족
    성. 여성, 가족1. 성이란 무엇인가성차별이란 남녀의 생물학적 성을 기초로 하여 특정성에 대해 사회적으로 부과된 편견이나 차별을 의미한다 여성학에서는 성별차이가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생물학적 성과 사회학적 성으로 구분하고자 하였다. 생물학적 성이 남성 혹은 여성을 결정하는 유전적, 신체적인 것이라면, 사회적 성은 사회문화적인 과정에서 획득,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따라서 성을 구별함에 있어 후천적 요소를 강조하는 사회적 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는 주장이다.물론 성은 단순히 성별 차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성적 특성을 의미하기도 하며 성적 특성 역시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형성된다.성적 특성은 성욕, 성관계, 성행위, 성문화 등을 내포하는데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의 외양적 특징을 기준으로 나라마다 다양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나 이성적 사랑만을 중시여기는 경향은 오늘날의 동성애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남성과 여성의 구별은 신체적인 외양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동성애자들의 등장은 성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적 정체성을 고정시키려는 시도는 이성애자들의 자기중심적인 사고이므로 성적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주장하지만 그들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인정받기는 우리에게 뿌리 내려진 성개념이 너무나 뚜렷하다는 것이다.2. 성별 차이와 지배사회에서, 가족관계내에서 성별 차이를 이유로 차별화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을 성차별 혹은 성불평등이라고 한다.전통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이라는 여성을 비하하는 관념이나 규범들이 존재해 왔다. 특히 조선시대 이후 유교의 영향 속에서 강하게 제도화되어 있었다.최근의 산업화와 민주주의의 발달로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지만 아직도 우리사회 곳곳에는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의 특성이 많이 남아 있다. 직장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거나, 같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남성이 먼저 채용, 승진되며, 임금도 더 많은 현실은 전통적인 성별 분업 의 논리하에 남성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다.이러한 불평등적 관계의 원인은 우리의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게 사회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별 분업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한 1960~70년 대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한 여성해방론의 관점에서 다양한 시각들을 알아보도록 하겠다.앨리슨 재거는 철학적 뿌리와 정치적 실천의 방향에 따라 자유주의, 맑스주의, 급진적,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으로 분류하여 원인과 해결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1 자유주의적 관점으로 본 여성해방론은 제도적인 기회의 불평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본다. 취업의 기회나 투표, 교육을 받는 기회의 불평등이 결국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므로 기회를 균등화하는 것이 여성 해방의 대안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2 맑스주의적 관점은 생산수단을 남성들이 가지므로 해서 일련의 불평등이 지속되는 것이며 전근대적 산물인 계급구조를 철폐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했다. 3 급진적 관점은 1960년 대 이후 기존의 맑스주의를 겨냥하여 성차별이 계급차별보다 더 오래되고 근본적인 차별이므로 가사일을 여전히 여성이 담당하고 있는 문제를 없애지 않는한 계급차별을 없앤다고 해서 남녀차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4 사회주의 관점은 최근의 관점과 흐름을 같이 하는데 기존의 맑스주의와 급진주의가 주장했던 계급문제와 가부장적 전통을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는 견해다.이제 20~30년간의 여성운동의 역사와 함께 전개되고 있는 여성해방론은 궁극적으로 모든 차별과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성적 불평등의 문제가 한걸음 더 진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문제들과의 결합 속에서 다양한 이론적, 실천적 관점에 기반하여 보다 철저하고 비판적인 인식하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남성답다는 것과 여성답다는 구분의 기준은 무엇일까? 신체적 차이에서 오는 생물학적 차이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 이기에 사회생활을 영위해 오면서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 다양한 모습을 두고 이분법적 구별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난 페미니즘주의자도, 반사회적 저항의식을 가득 품고 있는 대학생도 아니다. 단지 불과 몇일 전 사회의 일부에서 여자라는 이름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던 경험을 하고는 여성, 남성 이런 개념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누구나 그렇듯이 대학교 4학년이라면 취업준비에 여념이 없다. 나 역시 이력서를 작성하고 면접 준비를 하고 사회로 향하는 첫발이 설레기만 했다.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번번히 남자와의 경쟁에서 뒤걸음쳐야 했고 정규직 보다는 여성에게는 계약직을 원했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는 여성에게는 직업의식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여자는 부드러워야 하고 다소곳하고 아기를 낳고 살림만 잘하면 된다.... 전통적 가부장적 사회제도나 규범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여자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변하였음에도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옛것에서 변할 줄을 모르는 듯 하다.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순한 생물학적 성별차이는 다양한 사회적 과정 속에서 사회적 차별로 작용하게 되는데,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 속에서 가부장적 제도, 성별분업, 차별적 성규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그 이유는 현재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이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제도나 규범들을 적극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불평등한 규범들이 가족, 학교, 대중매체 등을 통해 무의식 중에 자연스럽게 사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지배와 억압이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별분업의 논리에 의해 여성에게 가사노동을 전담시키는 것이다. 전통적인 성별분업의 논리는 남성의 기득권을 보호하면서 여성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로막는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3.05.15| 3페이지| 1,000원| 조회(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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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문화사] `아틀란티스 전설은 미노아문명인가?`
    서양문화사 REPORT"아틀란티스 전설은 미노아문명인가?"과거를 발견한다는 것 그것도 고대 문명을 발견한다는 것은 역사학자들에게 있어 크나큰 억접이다. 존재할 것만 같았던 개연성을 각종 유물이나 사적을 통해 현실로 드러내는 것은 역사의 한 단편을 찾아내는 것이며 단편을 모아 하나로 연결되는 과거를 짜집기 함으로서 우리는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아틀란티스는 단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섬일까? 우리는 한번쯤 들어 본 듯한 이 지역이 단지 신화로 여기기엔 너무나 위대한 사람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철학자 플라톤에게서 언급된다. 아틀란티스에 관한 이야기는 플라톤이 쓴 와 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전설은 기원전 590년 경 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의 현인 솔론이 이집트의 사이스 신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플라톤이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몇가지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랄타 해협) 서쪽에 하나의 섬이 있었는데 이 섬은 리비아(북아프리카)와 아시아(소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더 컸다. 그 섬에서는 다른 섬으로 건너 갈 수가 있었고 그 섬들을 통해 대서양을 에워싸는 반대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 섬은 아틀란티스라고 불리웠는데 이 섬은 주변의 섬들과 리비아, 이집트, 유럽의 티레니아 근처까지 복속시킨 강대한 제국의 중심이었다. 이 국가는 헤라클레스 기둥의 안쪽 여러 국가 전부를 복종시키려 하였다.◎ 아테네 군대는 그리스 연합군의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싸워 침략군을 격퇴시켰다... 그후 격력한 지진과 홍수가 일어나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아테네 사람들은 땅속으로 가라 앉았고 마찬가지로 아틀란티스 섬은 바다 밑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방면의 바다쪽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대량의 뻘이 차서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그 섬의 침하 때문이었다.◎ 이 나라 시조 포세이돈의 장자 아틀라스가 초대의 왕이 된 데서부터 섬 전체와 주변의 바다에도 아틀란티스란 이름이 붙었다. 전성기의 수도는 바다와 이어지는 최대폭 533m의 3중의 환상 운하로 둘러쳐져 있었다. 아틀란티스에는 백, 흑, 적의 돌이 있었으며 이 세 가지 돌을 사용한 얼룩색을 띤 건조물이 있었다. 왕궁은 중앙 섬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었다. 여기에는 포세이돈과 애인 크레이트를 모신 신전이 황금의 벽으로 감싸여져 있었다. 이와 같은 건조물은 금, 은, 구리, 동, 상아 등 불꽃처럼 빛나는 이상한 금속 등으로 호화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육지로 이어지는 운하의 환상로에는 공원, 학교, 병사, 경마장 등이 있으며 이곳엔 또한 탑과 문이 달린 다리가 이어져 있었다. 큰 부두는 각지에서 모이는 상인들로 밤낮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아틀란티스의 수호신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다. 포세이돈은 그 섬에 살고 있는 가련한 처녀 클레이토와 결혼하여 10명의 사내아이를 낳게 된다. 그 아이들에게 그 섬의 10개 지역을 나누어 주고 각각의 왕으로 삼았다. 아이들 중 장자가 전체의 왕이 되었는데 그가 아틀라스이며, 그의 이름을 따서 아틀란티스라 이름지어졌다. 아틀란티스는 지형적으로 매우 기이한 섬이었다. 섬의 중앙부분에 둥근 고리 형태의 육지와 바다가 교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아틀란티스는 매우 풍요로운 나라였고, 무역 중심지로 성장하여 커다란 세력과 부를 축적시켰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훌륭한 나라였다. 그러나 나중엔 점차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 마침내 모든 신의 왕이었던 제우스가 아틀란티스에 징벌을 내리기로 결정했다.아틀란티스에 대해 지리적인 묘사까지 첨부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근거로 아틀란티스를 찾기 위한 노력은 상당부분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대서양의 중심에 가라앉은 대륙이 있다는 주장이 가장 많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대홍수의 전설과도 연결이 되는데, 거대한 대륙이 가라앉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해수면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주장은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기도 한데, 그것은 판구조론에 따르면 대륙 규모의 땅덩어리가 대서양 해저분지에서는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즉 아틀란티스 대륙도 지각판 위에 있어야 하는데, 이 지각판이 사라진다는 것은 현대 과학의 시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틀란티스는 현존하는 대륙의 일부라는 주장도 많이 있고, 나름대로의 설득력도 지니고 있다. 지중해에 있는 섬들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높은 산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영국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일부 지역이라는 주장도 있고, 남아메리카의 어떤 지역이라고도 한다. 이런 지역들의 공통점은 플라톤이 언급한 지리적인 여건과 어떤 공통점이나 유사성이 있거나, 또는 해당 지역의 아직 풀리지 않는 고대 유적의 비밀을 아틀란티스 문명과 연결시키려는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모든 주장을 합쳐 놓으면, 아틀란티스라고 주장되고 있는 지역은 전 세계적으로 200여군데에 이른다고 한다.
    인문/어학| 2002.12.14| 2페이지| 1,000원| 조회(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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