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음기법12음기법은 열두 개의 음이 동등하게 다른 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용되는 작곡방식으로, 쇤베르크의 피아노 작품에 처음 적용되었다.쇤베르크가 그의 피아노 작품에 적용한 12음기법이란 무조음악의 필연적 귀결로 이해할 수 있다. 12음이 자유롭게 사용된 무조음악에는 전통적 또는 새로운 체계가 없기 때문에 작품의 통일성이 결여되었고, 이 때문에 비교적 짧은 형식의 작품에만 적용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쇤베르크는 작품의 응집력을 구축하는 어떤 질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는 12음기법이라는 작곡체계를 만들게 되었다. (12음기법에 의한 작품에서도 조성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를 넓은 의미에서 무조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12음기법은 평균율로조율된 한 옥타브 12개의 음을 조직적으로 배열하여 곡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12음이 한번씩 사용된 기본음렬과 여기서 파생된 , , 음렬을 사용하는 철저하게 체계화된 작곡기법이다: 우선 작곡가는 개인적인 선택에 따라 12개의 음을 순서대로 배열한다. 이 때 모든 음고는 한 번만 선택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의 나열을 또는 이라 한다. 형은 기본음렬의 선율진행을 반대로 배치하는 것이고, 은 기본음렬의 진행을 거꾸로 돌려놓은 것과 같고, 은 전위된 음렬을 거꾸로 돌려놓은 것과 같다. 이렇게 형성된 네 가지 음렬 형태는, 각각 시작되는 음에 따라 12가지의 변형이 가능하므로 하나의 기본음렬에서는 총 48개의 음렬이 발생한다.한 작품을 위해 기본음렬이 만들어지고 여기서 48개의 음렬이 파생된 후에도, 이 음렬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음렬들은 수직적 측면과 수평적 측면에 적용된다. 즉 한 음렬을 선율로 또는 주제로 사용할 수도 있고, 또한 화성에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반주가 있는 성악곡이라면, 독창성부와 반주에 함께 적용될 수 있다. 그 외에도 한 음렬에 어떤 리듬이 적용되느냐, 어떤 악기로 연주되는가에 따라서 은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변화된다. 즉 12음기법은 음악의 구상을 하한 음도 특별한 기능을 갖지않는 무조적 또는 범조선(pantonal)음악이다. 쇤베르크는 모든 조성을 혼합했다는 의미에서 12음 음악을 범조성(pantonal)음악이라고 불렀으나, 전통적인 조성을 찾을 수 없어서 일반적으로 무조음악이라고 부른다. 이 새로운 음악 양식의 두가지 중요한 의미는 후기 낭만주의의 불협화음이 극단적으로 확대되고 전통화성과의 연관성이 거의 없어졌다는 점과 선적 대위법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는 점이다.1900~1920년 동안 스크랴빈, 쇤베르크, 베르크 등이 주로 무조음악을 작곡했는데, 이중에서도 특히 쇤베르크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1920년 대에서 dodecaphony가 '음열주의'라는 하나의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음열주의 음악에서는 재배열된 12개의 반음으로 구성된 '음열(series)'이 기본형으로 사용되는데, 각 음은 옥타브와 무관하게 취급되며 둘 이상의 연속되는 음이 화음이나 화성적 음정을 형성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있다. 음열의 기본형은 전위형(I), 역행형(R), 전위역행형(RI)으로 변형할 수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하나의 기본형에서 48개의 음열이 파생되는데 이것을 통털어 'Matrix'라고 부른다.1913~1923년 사이 무조음악 발전에 기여한 또 한 사람은 아우어(Josef Hauer, 1883~1959)인데, 그는 덜 효과적이긴 하지만 12음을 두개의 6음음계(hexachord)로 분리한 후 각 hexachord 내에서는 음의 순서를 정하지 않는 방법을 적용하였다. 쇤베르크의 제자들 중 베르크는 무조음악을 조성음악과 혼합시키는 시도를 하였고, 베베른은 이와 달리 엄격한 음열주의 원칙에 대단히 정밀한 대위법을 적용하여 극도로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쇤베르크는 자신도 말기에는 조성음악과 무조음악이 조합된 작품을 썼다. 결국 무조음악이나 범조성 음악이라는 용어는 모두 조 중심이 명확하지 않은 음악을 말하는데, 12개의 반음을 포함하는 음열이나 set에 기초하는 12음음악이라고 해서 반드시 무조적이나주의 수법에는 표현 기술상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 인상파에 속하는 화가들은 사물에는 일정한 빛깔이란 없으며 태양 광선에 의해서 바뀐다고 생각, 전여 새로운 화풍을 개척하였다. 인상파 라는 이름은 ,1874년 제 1회 무명 협회전에 출품된 모네의 을 보고 비평가가 비꼬아서 붙인 것이다. 그러나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그 화풍이 인정되었다. 대표적 화가로는 마네, 피사로, 모네, 르느와르 등이 있다.기법으로는 광학파, 외광파등의 이름이 붙어있는 인상파는, 최초로 광선에 의한 색채의 변화를 자연에서 그대로 관찰하고 그 효과를 화면에 드러내는 방법으로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관찰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이제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질문이 주제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각을 둘러싼 기술과 개념의 변화와도 일맥상통한다. 이전 그림들과 인상파 작품을 비교했을 때, 빛의 효과를 그려 넣은 종전의 그림들이 관념적 광원을 드러냈던 것에 비해, 인상파 작품에는 훨씬 더 밝고 많은 광선의 느낌이 구체적으로 담겨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상이란 것은 시각적 효과(optical effect impression)를 포착하는 것인데, 고유색의 개념을 상대적이고 조건적인 것으로 이해함에서 나온 것이다. 이후 많은 예술작품에 영향을 주게 되는 인상파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주제'의 표현으로 더욱 중요하다.인상파의 관심은 주로 도심에 모아진다. 파리 시민들의 여가생활, 휴일 근교로 나가서 즐기는 그들의 레져 생활이나 도시 속에서 벌이지는 문화 공간들이 화가들의 중요한 관심이 된다. 로버트 허버트(Robert Herbert)는 인상파의 기술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러한 관심이자 주제라고 강조한다. 재현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여가선용, 레져, 오락, 소비, 돈, 보여지는 어떤 것으로서의 도시가 상당한 비중을 갖는다.(Herbert, Impressionism. Art, Leisure, and Parisian Society, New Haven, 1화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도시의 근본적 부분이 되었기에 주제로서 모더니티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러시아 5인조1855년부터 재위했던 니콜라스(Nicholas) 1세가 죽은 후 러시아는 인구, 산업, 교육 등 다방면에서 규모가 확장되었고, 1860년대에는 예술분야에서의 민족주의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음악에서 이탈리아의 영향은 점차 쇠최하였고, 러시아 음악에 전통적인 화성법이나 대위법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은 오히려 러시아 음악의 독창성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러시아 작곡가들은 자신들 만의 독자적인 작곡방법을 추구하였고, 작품의 소재와 재료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민요나 역사에서 선택했다.이러한 경향을 주도했던 러시아 5인조는 맨처음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하여 울리비셰프(Ulibishev)의 주선으로 1855년 경 글린카를 만나고, 다시 비슷한 경로로 1857년 경 큐이를 만난 후, 큐이가 여기에 무소로크스키를 소개하면서 5인조를 형성하게 된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러시아의 모든 민속음악을 그들 음악의 소재로 이용하였다. 엄격한 독일 대위법이나 유럽의 다른 기법은 무시하면서 사실주의를 옹호한다. 낭만주의 정신과 양식을 선호하고 전통적 고전주의는 거부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러시아 5인조는 이들의 강력한 민족적 성향 때문에 '막강한 소수(The mighty handful)'라고 불린다.러시아 5인조에 속하는 사람들이 활동하기 이전의 중요한 러시아 작곡가로는 스타소프(Valdimir Stasov, 1824~1906)가 있다. 그는 음악과 문학에 있어서 새로운 소재를 제시해 주었고, 특히 러시아 음악에 대한 그의 저서는 자신과 동시대 음악인들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자료가 되었다.▶발라키레프발라키레프(Mily Balakirev, 1837~1910)는 1860년 대에 민요 수집을 시작하여 이들 민요를 화성화시켜서 2권의 모음집으로 출판하였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곡은 러시아적 주제에 의한 인데 이 곡은 교향보로딘, 무소르크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에게 전수했고 더 나아가 드뷔시와 라벨에게도 영향을 미쳤다.▶큐이음악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큐이(Cesar Cui, 1835~1918)는 발라키레프 모임 중에서도 그 영향력이 가장 미약하다. 열렬한 국민주의 지지자였고 작품의 양도 많지만, 큐이의 모든 작품이 민족주의적이지는 않다. 그의 작품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15개의 오페라 중, 4개는 어린이를 위한 오페라이다. 그의 대부분의 오페라는 마이어베어(Meyerbeer)와 오베르(Auber)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밖에도 칸타타나 합창곡들, 현악 4중주를 비롯한 실내악, 관현악곡, 피아노곡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고, 특히 소품들이 우수하다.▶보로딘보로딘(Alexander Borodin, 1833~1887)은 어린 시절부터 플루트, 첼로, 피아노 등의 악기를 배웠고, 1859년 유럽 등지에서 잠시 음악 공부를 하였지만 독일에 가서는 약학을 공부하였다. 귀국해서는 1864년부터 상트 페테르부르크 의료원에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독일로 가기 전 알게됐던 무소르크스키와 계속 친분을 맺으면서 발라키레프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보로딘의 최초의 대작은 교향곡 제1번(1862~1867)이다. 이 곡은 19세기의 관습대로 스케르초와 트리오가 제2악장에, 느린악장이 제3악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1869년에 착수하여 1876년에 완성한 교향곡 제2번에서는 B단조-F장조-Db장조-B장조라는 특이한 조성을 설정함으로써 전형적인 러시아적 특성을 보여준다. 멘델스존풍의 서정적이고 묘사적인 성격이 강한 그의 음악적 특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 교향곡 제2번 역시 제2, 4악장의 색채적 관현악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869년 쓰기 사작한 오페라 은 가의 갑작스러운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 때문에 이후, 글라주노프(Glazunov)가 자신의 스승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18년에 걸쳐 두 사람의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어서 전체적으로 통일된 극 작품이라기 보다는 그림같라
15장 고전주의 교향곡고전 교향곡의 발달18세기 후반의 교향곡은 전시대의 여러 음악적 발다의 통합으로 이루어졌다.3부분형식으로 된 이태리 오페라 서곡은 초기 교향곡에 3악장 구조의 틀을(빠름-느림-빠름)제공했다.바로크 소나타 2부형식은 교향곡 1악장의 기본적인 소나타 형식의 발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하이든의 교향곡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릴만큼 많은 교향곡(104곡)을 작곡하였다.그의 음악은 논리적이면서 통일성을 잃지 않는다.그리고 오스트리아 민요와 바로크의 춤음악을 기초로 하고 있다.그는 고전주의적 의미에서 주제를 발전시켰으며, 극적목적을 위하여 조성의 변화와 전조의 엄청난 위력을 활용하였다.대규모 청중을 위한 음악가모차르트의 교향곡모차르트의 초기 교향곡은 하이든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짧고 단순하지만 그의 후기 교향곡들은 훨씬 길고 복잡하다. 그의 교향곡 41곡중 널리 알려진 곡으로는 39. 40. 41이다. 이 곡들은 고전주의 시대의 질서와 절제의 미를 가진 것은 물론 그 이상의 강렬한 낭만적 동경과 추구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자유스럽고 간결하고 맑은 수법들은 교향곡에서도 그의 놀라운 창작력에 더 많은 힘을 실어준 그의 장점이다.베토벤의 교향곡그는 전문적인 음악세계를 펼친 부와 명예보다는 음악을 더 사랑한 작곡가였다. 그의 교향곡은 그가 얼마나 고전주의 양식과 형식에 통달하였는가를 증명해 주는 곡들로서 교향곡이나 관현악곡의 작곡가 베토벤의 개성적 양식의 발달과정을 잘 보여준다. 베토벤의 양식적 발달의 핵심에는 한 악장의 구조를 외적인 형식으로 보기보다는 내용을 구성하는 하나의 원리로 보는 견해가 깔려 있다.제1번과 2번은 고전주의 정신을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다.3-6번은 기초적 성향이나 구조면에서 고전주의적이긴하나 생동감과 강렬함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5번 교향곡은 대규모의 순환구조적 균형미를 보여준다.9번에서 최종악장은 음색적대비와 음향의 증가를 꾀하였다.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의 비교분 시 대류고전주의 음악낭만주의음악18세기말-19세기초나머지19세기선율주로 동기나 짧은 악구들로 구성됨매우 규칙적인 악구길이매우 서정적이고 길며 덜 규칙적인 악구 길이리듬분명한 박자한 악장에서 상당한 리듬의 다양성때때로 한 악장의 박자변화와 박자와리듬형태에서 폭넓은 다양성화성장-단조체계, 전조를 구조적 기초로 보다 많이 사용.장,단조 체계,전조와 반음계주의가 널리 확산 사용됨음조직호모포니가 중요하나 근본적으로 화성적인 음악 안에서 폴리포니도 게속 사용됨.호모포니와 폴리포니가 다 사용됨 대규모 단체를 위한 곡에서는 매우 빽빽한 음조직을 보임음색표준화된 오케스트라작은 기악합주,특히 현악4중주가 두드러짐.오케스트라 규모가 계속 확대됨 대규모합창단과 밴드 작은 규모의 합주도 계속 사용됨주요형식소나타,론도,주제와 변주곡 2부,3부형식여러 다악장 곡들고전주의 시대에 사용된 형식들 자유롭고 다양한 방법을 확대됨. 여러 다 악장 곡들주요작품유형미사, 오라트리오, 오페라, 독주협주곡과 소나타등의 기존유형 한벌의 소나타에 기초한 많은기아곡 유형들:교향고,협주고,소나타,현악4중주고전주의 시대의 작품 유형들이 확장됨 새로이 발달된 교향시,피아노 성격소품과 예술가곡16장 고전주의 협주곡고전적 협주곡의 발달고전적 협주곡은 본질적으로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음악적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협주곡의 기원기원은 바로크의 협주곡에서 발달되었다.비발디, 바하, 헨델 등의 협주곡들은 고전시대 독주 협주곡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고전주의 양식과 마찬가지로 협주곡 역시 이태리 오페라의 영향을 받았다.고전적 협주곡의 구조3악장의 구성이며 소나타의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다.1악장- 리토르넬 원리와 소나타형식의 원리가 통합된 형식.2악장- 일종의 "아리아", 독주자의 음악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3악장- 소나타와 론도형식,또는 주제와 변주곡의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모차르트의 협주곡모차르트는 그 어느 고전주의 작곡가들보다도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피아노 협주곡, A장조 』K.488 제 1악장 Allegro.제시부-바로크의 콘체르토 리토르넬로의 요소들을 가짐.(한가지 조성으로됨)발전부-새로 도입한 소재를 가지고 발전시킴.(e단조와 C,F장조 등으로 전조됨)재현부-발전부에서 새로 소개 되었던 주제가 재현. 카덴자
랄프 본 윌리엄즈(Lalph Vaughan Williams)▶본 윌리엄즈의 생애엘가의 뒤를 이으며 영국을 대표하는 음악가인 본 윌리엄즈는 1872년 10월 12일 글로스셔주의 사이렌세스터 부근의 다운 앰프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교구목사였다. 그는 명문가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리스 힐 플레이스에 있는 웨지우드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되고, 브리튼의 예비학교와 차터하우스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집안의 내력이라고 할 수 있는 회화, 도자기, 과학과 문학 등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그는 6살이라는 나이에 짧은 피아노 곡을 작곡했고, 2년뒤에는 에든버러 대학에서 음악과정을 밟고, 두 개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렇지만 그의 고모 다윈의 말을 빌리면 "그는 일생동안 내내 연주를 해 왔다. 6개월을 열심히 쳐도 그는 가장 쉬운 곡도 훌륭히 쳐낼 수가 없었다" 고 했다.상중류의 빅토리아조 가문의 아들에게는 음악을 직업으로 갖고 싶어하는 욕망은 그다지 호의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인습이 요구하는대로 대학에 입학하지 않고 왕립음악원에 직접 입학 허가를 받은 일은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또 하나 더 든다면 그는 신혼여행 조차도 바그너의 가 연주되고 있던 베를린으로 갔고, 거기에서 혹시나 새로운 선생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으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윌리엄즈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로 가서 역사와 음악학위를 얻으려고 했다. 거기에 있으면서 그는 그전에 그의 선생인 패리와 스탠포드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레슨을 받는다. 그리고 케임브리지의 선생인 찰스 우드에게도 많은 기법과 음악의 영향을 받는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라이벌의 관계에 있으면 서로를 경계하며 거리를 갖게된다. 그러나 윌리엄즈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영국 음악계의 또 한명의 유명한 작곡가인 홀스트와의 관계가 그러했다. 그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서로에게 가르치고 조언하며 또 격려하며 서로에게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시켰다.41세에 그는 군에 입대를 하게 되면서 그의 음악 인생은 끝이 나는 듯 했으나 5년 뒤 그는 전역하고와서 새로운 변화를 의식하지만 새롭게 발전된 모습으로 음악에 정진하게 된다. 그 당시의 엘가는 새로 달라진 세상에 완전 지쳐 버려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윌리엄즈는 그러나 달랐다. 새로운 세대의 음악가들에게 주저없이 질문을 던졌고, 그들에게 배우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는 라벨에게 사사한 일이다. 그는 이렇듯 쉬지않는 작곡가였고 87세에 갑작스럽고 평화스런 죽음을 맞이할때도 그의 책상속에는 새로운 오페라의 완성된 초안이 들어 있을 정도였다.그는 엘가나 동시대의 다른 유명한 작곡가에 비해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영국의 음악을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다리의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본윌리엄즈가 민족주의자라고 불리는 이유는?헝가리에서는 코다이나 바르토크와 마찬가지로 본윌리엄즈 역시 자기나라 영국의 민요 수집에 힘을 기울인 음악가로서 실로 800에 달하는 곡을 노동자나 농민으로부터 들어 수집한 작곡가이다.이들 민속소재는 당연히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어 초기의 작품중 어느 것에는 명료한 각인을 남겼는데 후기의 더욱 성숙한 대작에서 볼 수 있는 그의 독특한 선율의 취급도 민족 음악에의 관심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특별한 선법성을 때때로 간직하고 있다.다양한 모든 규모와 형태속에서 본 윌리엄즈의 음악은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두가지 원천으로부터 꾸준히 유출되었다. 그 두가지란 영국민요와 성가 그리고 서구적 전통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음악의 근본적인 성질을 어떤 유력한 사람들이 제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은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그의 말, '작곡가는 스스로를 절대로 닫지 말고 예술을 생각하며 같은 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살고 그의 작품을 사회의 모든 생활의 표현으로 만들어야 한다' 의 실제적인 본보기이다.본 윌리엄즈는 이론, 특히 실용면에서 거의 무시되는 이론에 대해 불신임하는 영국인의 전형적인 자세를 가진 대체로 보수적인 작곡가였다.그러나 위의 내용보다 그를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은 그가 고대와 현대의 찬송가를 교정하기 위해 음악편집장을 맡았는데 몇몇의 민요를 찬송가곡으로 채택하는 등 많은 영국인들이 음악에 접하게 되는 것은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갈 때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찬송가가 간결하고 단순하고, 음악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으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긴 하였지만 개혁을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