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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고백서
    6.25 전쟁 이후,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던 어린 시절에는 그저 굶지 않는 것만이 소원이었습니다. 너무나 가난한 환경에서 부모형제들이 고생하는 모습들을 보는 것이 그지없이 아팠던 저는 가난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삶의 목표로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성장하여 직장을 구하게 된 이후부터는 일에만 매달려 살았습니다. 그렇게 뒤도 돌아볼 겨를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일만 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친구와 사업을 했으나 친구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남을 아프게 한 적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었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가난은 다시 어마어마한 빚으로 제 앞에 나타나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빚의 무게는 사랑하는 자녀들과 아내에게도 피해를 줄 만큼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막대한 빚과 집으로 쉴 새 없이 밀려오는 빚쟁이들에게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족들과 헤어져 있어야 할 막막한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은 죄도 없이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현실이 기가 막혀서 울분이 가득하던 그때에 저는 원망할 곳이라도 없으면, 당장 죽어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예수님을 믿으라던 부모님과 형제들의 권유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믿는 예수가 진짜 있다면,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었는지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렇게 예배당의 문턱에 들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뭔데,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당신이 있다면, 열심히 살아 온 사람에게 상은 못 줄지언정 이런 식으로 힘들게 하면 안 되잖아.” 그렇게 기도도 아닌 원망하고 또 원망하는 말을 하면서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던 그때에 마음 속 깊은 곳 알 수 없는 곳에서 누군가가 절 어루만지고 위로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습니다. 가슴 속에 당장 터질 듯이 쌓여 있던 원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막막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제 인생에 어떤 길 같은 것이 보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희망 때문에 힘을 얻은 저는 하나씩 하나씩 눈 앞에 펼쳐진 상황들을 정리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0여년에 걸쳐 상황이 어느 정도 해결되자, 그때 느꼈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갈증이 더 심하게 느껴졌습니다.그와 함께 상황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어도 수중에 결과로서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던 저에겐 또다시 인생의 허무가 밀려왔습니다. “나는 왜 태어났고, 도대체 왜 살고 있으며, 또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마음 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의문이 강해질수록 10년 전에 느꼈던 마음을 감싸안아주는 듯한 그 느낌의 실체를 더 경험하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신학교에 입학이었습니다.신학을 공부하고, 끊임없이 매달렸던 예배와 기도 생활 속에서 저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더욱 강렬하게 느꼈고, 삶의 의문도 해결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은 은혜를 과거의 저처럼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려 합니다.제가 신학을 공부하고, 예배 생활을 하면서 만난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랑그 자체이셨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뭐라고 규정할 수조차 없는 양의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이셨습니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면서 신이 정말 있는 거냐고 소리 지르고 외치던 제가 그 모든 상황들을 하나씩 해결할 수 있는 용기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사랑 덕분이었음을 이제는 확실하게 압니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나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의 말씀으로 저는 제 삶의 모든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두려움은 제 몸을 갑옷으로 감싸나, 사랑의 하나님은 제가 진정으로 벌거벗고 설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두려움은 저를 소스라치게 했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저를 달래주셨습니다. 두려움은 절망으로 저를 공격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제 마음을 치유하셨습니다.또한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이 울부짖는 걸 들으셨습니다. 제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걸 전부 다 보셨고, 제가 얼마나 간절히 진리를 바랐는지 알아주십니다. 제가 고통 속에서 그것을 달라고 소리쳤을 때, 주님은 결국 신학 4년과 목회 대학원에서 보낸 2년의 시간과 현재까지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응답해 주셨습니다. 모든 곳에 존재하시는 주님의 응답은 이미 발간된 신문기사 속에 들어있기도 했고, 텔레비전에서 하는 영화나 길거리에서 들리는 노래나 새로 알게 된 동료들의 말 속에서도 있었습니다. 바람의 속삭임과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천지를 울리는 천둥소리와 나직하게 두드리는 빗발 소리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주님께서 제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항상 도우리라는 진실은 밤하늘만큼이나 외경스럽고, 갓난아기의 옹알이만큼이나 단순명료합니다.
    독후감/창작| 2012.02.13| 3페이지| 1,000원| 조회(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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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소설의 환상적 전통
    1. 서론1990년대 이후, 컴퓨터 통신을 통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환상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하나의 장르로 정착된 것은 최근 우리 문학이 겪고 있는 현상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이전에 환상문학이 담고 있는 환상적인 주제와 내용은 매우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인식되어 독자들에게서도 외면당했을 뿐 아니라, 비평가들 역시 환상문학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리얼리즘에 밀려 오랫동안 수준낮은 독자들이나 읽는 질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던 환상문학이 1990년대에 들어 갑자기 양지로 나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우리가 배워 왔던 소설의 대표적인 특성으로 우리는 “개연성”을 꼽는다. 개연성이란 현실에 일어날 수 있음직한 일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은 소설이 있음직한 일들만 그려내야 한다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소설이라는 것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만 한다고 해서 완벽하게 인간의 삶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일까?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 했고,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여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임을 말하였다. 인간은 생각을 함으로써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는 생각은 온전히 현실적인 것 뿐일까? 필자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인간의 생각 속에는 현실에 대한 생각도 있겠지만, 현실 생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을 상상하며 더 나은 미래는 꿈꾸는 것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생활이 고단할 때도 인간은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을 지도 모르는 꿈 또는 이상을 소망으로 간직하여 살아 간다. 만약에 인간의 생각이 현실적인 것만으로 한정되어 있다면 인간은 발전도 없을 것이고, 인간일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현실에 몸을 담고 살아 가지만, 근본적으로 “환상적”인 존재이다. 문학이라는 것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도 인간이 “환상을 먹고 사는” 존재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문학은날 밤 이생은 담을 타고 넘어 가 최랑과 만난다. 최랑과의 만남이 탄로날 것을 걱정하는 이생에 비해 둘의 관계가 탄로나더라도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지겠노라고 말하는 최랑의 태도는 의연하다. 매일 밤 은밀히 만남을 가지던 두 사람의 관계는 이생이 아버지의 의심을 받고 남쪽의 시골로 쫓겨나면서 위기를 맞는다. 딸의 비밀스러운 사랑을 알게 된 최랑의 부모는 결혼을 추진하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은 성사된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얼마 가지 않아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홍건적의 난으로 인해 최랑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옛집에 홀로 돌아온 이생은 또 다시 생전의 모습과 똑같은 최랑을 만나게 된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 것은 남은 인연을 다시 맺어 자신의 맹세를 헛되게 하지 않으려는 이유에서였다. 이생은 최랑이 귀신인 것을 알지만 최랑의 존재가 있음을 기뻐하며, 다시 결혼생활을 계속한다. 벼슬길로 나아가지도 않고 심지어는 친척들의 방문과 집안 대소사를 모두 뒤로 한 채, 문을 닫고 최랑과 함께 시를 읊으며 몇 해를 살았다. 그러나 역시 이들의 이별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최랑 역시 저승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이생을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산골에 버려져 있던 최랑의 유해를 거두어 들여 장사를 지낸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2) 다른 차원의 세계를 경험한 이야기와 처럼 죽은 사람과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아니지만, 역시 다른 차원의 사람과 교류를 나누는 것은 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개성에 사는 한 부잣집 아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술에 취해 부벽정에서 여인과 함께 시를 주고받으며 노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때 함께 시를 주고 받은 여인은 옛날 은왕의 후예이고, 기자의 딸이다. 결국 그녀 역시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의 혼백인 것이다. 그녀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주인공은 ‘꿈도 생시도 아닌 이상한 일’에 당혹감을 느낀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주인공은 그 여인을 생각하다 병을 얻어 세상꿈을 좌절시키려는 운명과 갈등관계에 놓여 있다. 조동일 교수는 “자아와 세계의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관계를 초월적 원리에 따라 해소하고 조용히 물러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라고 함으로써 『금오신화』의 환상성이 주인공과 세상의 갈등을 해소시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금오신화』의 환상성은 주인공과 세상의 갈등을 해소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해소한 것은 아니다. 현실은 주인공을 인정해 주지 않지만, 초현실적인 세계에서는 주인공의 능력을 인정해 준다. 그러나 주인공의 몸은 현실세계에 있다. 현실세계에 있는 주인공과 초월적 세계의 상대방과의 이별은 예정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별과 주인공의 좌절은 주인공의 갈등을 잠시나마 해소시켜준 것처럼 보이는 대상이 초월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초월적 세계는 주인공에게 기쁨을 주었다가 도로 빼앗아 버리기에 처음부터 기쁨을 주지 않던 현실보다 더 잔인하다. 때문에 주인공의 고통은 극을 달리고, 주인공은 병을 얻어 죽기까지 한다.김종철 교수의 “현실적 논리에 입각한 직접적 대결을 통하지 않고, 비현실계의 개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에서 비현실계의 개입을 통해 주인공의 대결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은 본인도 공감한다. 그러나, 이 말은 비현실계를 통한 투쟁이 현실과의 대결에 비해 가벼운 것이라는 전제를 지니고 있다. 『금오신화』에 나타난 환상성은 주인공의 꿈을 이루어주는 공간이기에, 현실에서는 주인공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더욱 대비시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주인공의 꿈을 이루어준 환상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공을 더욱 절망에 빠뜨리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것이다. 때문에 『금오신화』의 환상성을 금오신화의 한계로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금오신화』를 효과적으로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하는 수단으로 보아야 함이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된다.2. 『홍길동전』의 환상성한글로 씌어진 최초의 소설인 허균의『홍길동전』은 적서차별 문제에서 출발하여, 당대 사회모순 전반으로 그 관심의 폭을 넓혀 중세홍길동전』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주제는 사회전반에 널리 퍼져 있는 탐관오리의 수탈 등 전반적인 사회모순이다. 백성을 착취하는 부패한 관리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활빈당의 활동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작품의 문제의식은 적서차별 문제를 넘어 당대의 사회모순으로 확대되어 있다.이와 관련하여 우선 주목할 대상은 활빈당으로 조직화되는 군도(群盜)들의 존재이다.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관료들이 보았을 때, 활빈당이라는 군도들은 모두 체포해야 할 도적집단이다. 이들은 모두 토벌하고, 처형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홍길동전』을 읽는 독자들은 처형당해햐 할 도적집단인 활빈당의 승리에 통쾌함을 느낀다. 또한 이들의 승리를 읽고 통쾌함을 느끼는 독자들은 자신의 의식이 불순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독자들은 『홍길동전』에 나오는 인물들을 도적집단이 아니라 생존의 필요성 때문에 저항의 길에 나선 민중으로 의식하기 때문이다. 홍길동과 그의 부하들은 깊은 산 속에 모여 살면서 양반들을 약탈대상으로 삼지만, 그들은 도적집단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이다. 홍수와 가뭄 등의 자연재해와 혹독한 관리들의 수탈로 인해 정든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게 된 농민들은 결국 도적집단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탈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대부분 소규모였던 이러한 유민단체들은 관의 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할 만한 힘은 없었다. 홍길동이 활빈당을 이끌어 그들과 함께 부패한 관리들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고 승리를 거두는 초현실적인 능력을 지닌 영웅으로 형상화된 것은 이런 불리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이 각박하고 고단하면 할수록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이상의 꿈을 꾸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을 작품 속에서라도 이루게 하여 읽는 이들의 마음에 통쾌함을 불러 일으키는 『홍길동전』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환상적인 사회소설이며, 도술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3. 『구운몽』의 환상성『구운몽』이 창작된 17세기 후반은 사대부들이 소설에 대그러하듯이 『구운몽』의 주인공은 천계와 지상계를 마음대로 오가는가 하면, 지하계와 수중계를 마음대로 오간다. 성진은 형산 연화봉에 있는 육관대사의 수제자로서 천상계에 머물던 중 대사의 심부름으로 동정용왕을 만나기 위하여 깊은 바다 속으로 내려간다. 용왕을 만나고 돌아오는 도중 팔선녀를 만나 희롱하여 번뇌와 망상에 사로잡힌 죄로 팔선녀와 함께 지옥으로 보내진다. 그러나 염라대왕이 불쌍하게 여겨 죄를 용서하고 성진을 인간세상으로 보낸다. 성진은 회남에 살고 있는 양처사의 아들 양소유로 환생하여 온갖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린다. 중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팔선녀의 환생한 인물들은 다시 만나 아내와 첩으로 삼기도 한다. 이렇게 천상 세계에서 시작하여 수중세계를 거쳐 지상생활을 하던 양소유는 마침내 다시 천상 세계로 되돌아온다. 이 작품에서 처음과 끝 부분의 세계가 동일하며, 그 중간 부분의 이야기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속한다. 구성에 있어 격자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성진의 이야기가 액자에 해당한다면, 양소유의 이야기는 액자 안에 들어 있는 그림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격자 소설치고는 아주 색다르다. 비록 환몽구조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격액자구실을 하는 꿈을 꾸기 이전과 이후의 세계가 현실 세계이며, 그림 구실을 하는 꿈의 세계가 환상적인 세계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에서는 액자나 그림이나 모두가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세계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을 성진으로 볼 것인가 양소유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학계의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그러나 꿈을 꾼 당사자인 성진은 환상 세계의 인물이고, 꿈 속의 인물인 양소유 역시 환상 세계의 인물이기에 그들이 환상 세계의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죄를 지어 지옥에 보내졌다가 다시 인간세계에 환생하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다시 돌아와 미몽에서 깨어나는 경험은 환상세계의 인물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경험이다. 『구운몽』에서 이러한 환상적인 요소를 제거해 버린다면, 『구운몽』은『구운몽.
    인문/어학| 2012.02.13| 17페이지| 1,000원| 조회(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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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빌라이의 치세
    Ⅰ. 머리말중국인은 예로부터 스스로를 중화(中華)라 칭하며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고, 주변 제민족에대해서는 이적만융(夷狄蠻戎)이라 부르며 경멸했다. 그리고 夷狄은 중국에 복종하여 문명의혜를 받고, 또 교화되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인식해 왔다. 그런 중국인에게 잊을 수 없는 치으로 기록될 최초의 사건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몽고인에 의해 남송이 멸망당해 중국 전역이그들이 그렇게도 멸시하던 오랑캐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다. 징기스칸으로부터 시작되는 몽는 중앙 아시아 및 동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후 이윽고 금을 멸하고 남송을 정복하여처음으로 이민족이 중국 전토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 고유의 영역까지 아울러지배한 민족국가를 역사가들은 그 이전의 이민족국가와 구별하여 중국의 정복왕조라고 부르고있다.명대 이후의 사학자들은 정복왕조를 주변민족사의 분야라 하여, 깊이 연구하는 것을 꺼린이 사실이다. 그러나 북송의 멸망 이후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이(유목민을 통해서지만)다시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원의 창업주인 쿠라이가 고수하였던 중국의 지배방식은 후대 원이 멸망할 때까지 그 후손들에게 답습되었기에쿠빌라이의 통치시대를 살펴보는 것은 원나라 이해에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라 생각되기에,고에서는 제왕 쿠빌라이에 대해 다루려 한다.Ⅱ. 본론1. 쿠빌라이의 집권칭기스킨 초기부터 반세기 이상, 유라시아의 상당한 지역을 그 손 안에 장악하고 있던 제왕뭉케가 최전선의 군영에서 돌연히 타계했을 때, 제국의 정세는 단번에 긴박해졌다. 이 때 제은 유라시아 동ㆍ서에서 2대 작전을 전개 중이었다. 동방에서는 남송에 대한 뭉케의 친정이단행되고 있었고, 서방에서는 뭉케의 동생 중 한 명인 훌레구의 서정군이 이미 북시리아로공하고 있었다. 몽골분열의 가능성과 후계자 다툼에 대한 염려를 한 채, 1259년부터 다음해인1260년은 혼란의 해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몽케의 후계자 후보로 두 무리의 인물이 떠올랐다.한 무리는 뭉케의 친동생인 쿠빌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즉위 후 수년 동안 아릭 부케의 반란진압과 국정비에 쫓겨 남송공격에 나설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한인막료 학경(經 ; 1223~1275)을견하여 송과의 강화를 진행시키려 했다. 이 무렵 남송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인물은 가도(1213~1275)였다. 그는 앞서 뭉케를 중심으로 한 몽고군의 침입당시 송조군 방위군의 최책임자였는데, 뭉케의 죽음으로 쿠빌라이 진영과 은밀한 정전협의를 진행했었다. 그런데 우카다이군과의 합류를 이룬 바아투르 부대가 그 합의에 따라 군대를 끌고 장강을 건너려 할 때남송군의 일부가 습격을 가해왔다. 몽골측은 경미한 손해만을 보았지만, 가사도는 이를 두고적군격멸의 대승리라 보고하고, 이로써 영웅이 되어 수도 임안으로 되돌아가 독재권력자가었다. 그런데 강화교섭을 위해 파견된 학경을 가사도는 강북 진주에 구류시켜버렸다. 그로서는전에 몽고군을 격퇴했다고 과장하여 조정대신들 사이에 유포시킴으로써 재상직을 차지할 수있었던 터에, 몽고측의 고압적인 화의조건이 밝혀져서는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학은 남송이 멸망하기까지 수십년 동안 적지에 억류된 채 보내야만 했다.남송이 학경을 구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은 것은 쿠빌라이에게 출병을 위한 절호의 구실을들어주었는데 이에 덧붙여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 산동지방에서 발생한 한인세후 이의 반란이었다. 화북일대에서 비교적 물산이 풍부한 지역인 산동의 익도를 본거지로 한 씨는,몽고정권에 복속되고 나서도 누차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며 은밀히 남송과 기맥을 통하고있었다. 그러다 때마침 아릭 부케의 난이 일어난데다가 남송측의 사주도 작용하여 봉기했던인데, 반란은 불과 5개월 만에 진압되었다.이 반란을 계기로 쿠빌라이는 한인세후의 폐지를 단행하여 그들이 지니고 있던 민정 및 군권을 박탈했다. 이리하여 반란이 일어난 다음 해 한인세후는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반을 부추긴 남송에 대한 분노로 남송을 토벌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정에서 팽배해졌다.2.2 남송의 멸망원의 남송토벌은 주도 능한 강남의 장을 앞세워 14만의 대군을 몰아 두 차례나 일본을 원정하였으나 번번이 격퇴되었다(1281년).이 실패는 기후에 대한 인식 부족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당시 일본의 정권을 쥐고 있던 군사권인 가마꾸라 막부의 저항, 대한해협의 도항으로 군마가 피로해져 몽고기병의 기동력이 충히 발휘될 수 없었던 지리적 조건 등이 원인이었다.쿠빌라이는 대리국의 항복을 받고 운남성을 평정한 다음 서남방면에 있는 면국(緬國, 버마)로진출하고자 했다. 몸에 적응되지 않은 더위 때문에 몽고군은 악전고투 끝에 면국을 항복시켰고나아가서 샴까지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쿠빌라이는 또다시 고찐 남쪽에 위치한 참파국을 남방지방 특유의 역병에 시달리면서 고투 끝에 겨우 정복하기는 했지만 원정군이 입은 손해도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사절을 보내어 남양제국에 조공을 바치라고 촉구한 바 스마트라는 입했으나 자바는 이에 불응했으므로 무력으로 정복하여 역시 조공을 바치게 했다. 이리하여 원의국위는 남양(南洋)지역에까지 파급되었다.4. 쿠빌라이의 통치4.1 몽고 지상주의몽골 인은 피지배자인 한족에 비해서 인구가 너무 적었고 문화수준도 열등했으므로 그들고유의 상무적인 기질과 군사조직을 유지시키지 않으면 그 주도권을 지켜나갈 수가 없었다.러므로 어느 정도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전대의 이민족 왕조들과 마찬가지로중국 문화에 동화되어 민족정신을 잃게 될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세조 쿠빌라이는 중국통치에있어서 정치사회적으로 몽고족에게 극단적일 정도의 우위 내지 특권을 부여해 주는 체제를축했다. 이른 바 몽고지상주의라 불려지는 것이다.4.1.1 극단적인 신분차별정책쿠빌라이는 남송을 정복하고 중국의 주인이 되자 백성을 인종별로 4등급으로 나누었다. 제1급은 몽고인이고, 제 2급은 몽고군이 서역을 공략했을 때 항복한 서역인인데, 이들을 색목이라고 불렀다. 제 3급은 옛 금국 내에 살았던 북방의 중국인으로서 이들을 한인(漢人)이라고불렀다. 제 4급은 남송에 속한 중국인들로서 남인이라고 불렀다. 몽고인은 되었다. 이 양경제(兩京制)는 '초원의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중화의 경제력'을장악하는 방법이었다. 이전에 당왕조가 장안과 낙양을 두 도읍으로 한 것처럼 역사상 종종이는 '이중수도'가 아니었다. 유목지역인 몽골고원과 농경지역인 화북이라는 완전히 다른 두계의 양쪽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이 양경제는 '점'으로써 두 개의 도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두 개의 '점'사이와 그 주변, 긴 쪽의 지름이 거의 350km나 되는 타원형의 영역 전체가 의미를 가졌다. 즉'면'으로서의 수도였다. 이 '면'안에 각종의 궁전도시·공예도시·창고도시·군사도시 등을 점재시다. 그리고 이들 여러 도시 사이를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단 및 궁정·정부를 이끌고 계절이동을했다. 쿠빌라이 직속의 유목기마군단은 이런 이동 동안 그들로서는 몹시 소중이 여기는 말들을유지하고 관리해야 했다. 상도와 중도의 대거점 이외에 이 영역 가운데 때때로 체류한 곳이른바 수도였다. 군사와 통치와 경제 등을 동시에 겸비한 다기능의 '수도권'을 쿠빌라이는 지의 중해지역으로 한것이다. 이러한 유목민의 계절이동 생활양식과 통치를 위한 정치체계를 동시에 조직한 방식은이후 원나라의 기본형태가 되었다.4.2.2. 3大 2小 왕국쿠빌라이는 성년이 된 자식들을 군사적 지배를 위해 '부왕(副王)'으로 기용했다. 특히 중요한것은 정후(正后)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들이었다. 4명의 적자 가운데 장자는 일찍 죽었다.그리하여 사실상의 적장자가 된 '칭킴'은 '연왕(燕王)', 다음에는 '황태자'로서 화북지역의 서(庶政)을 위임받았다. 셋째 아들인 '망갈라'는 '안서왕(安西王)'의 왕호를 받아 쿠빌라이 즉위전의 옛 영지였던 섬서의 경조(京兆)-육반산(六盤山) 지역을 받았다. 넷째아들 '노무간'은 '北王'의 왕호를 받아 몽골본토에 해당하는 고비 이북의 고원과 그 곳에 산재한 전통 천호군의이 되었다. 쿠빌라이는 이처럼 아들 3명을 자신의 '분신'으로서 군사와 그 땅의 일반서정(政)에 관한 황제권을 3분하였다. 각각의 담당지역 안여주려 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대도라는 거대한도시는 그 자체가 쿠빌라이의 지배와 제위를 상징한 일대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다.4.2.4. 교통의 정비와 무역의 활성화그는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교통문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도로를 보수하고 길을 따라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를 심었으며 정규역참에 대상들의 숙소를었다. 이로써 여행자의 교통도 안전해지고 동·서양 두 지역 간의 교통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다. 서아시아 뿐 아니라 유럽의 상인들이 육로는 중앙 아시아와 천산남로를 거치거나 시베리아남부로부터 천산북부를 거쳐 카라코룸이나 대도를 왕래하였다. 페르시아, 인도와 중국과의상교통도 활발해져 강남의 천주, 복주의 여러 항구는 세계 유수의 무역항이 되었고 외국상인의거류민도 1만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이탈리아의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방문한 다음 귀국 후쓴 여행기에 의하여 고도의 중국문명에 관한 지식이 서유럽 사람들에게 전해졌다.4.2.5. 재정 문제쿠빌라이의 행정에서 가장 열등한 분야는 재정이었다. 쿠빌라이는 송의 제도 중에서 초(),즉 지폐의 사용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것을 전반적으로 통용되도록 하였으며 그의 재정정책의토대로 삼았다. 1264년에 그는 주요 재화에 대하여 지폐로 가치를 밝히는 법령을 반포하였다.그의 최초의 재무대신이었던 부하라 출신인 무슬림 사이드 아잘은 합리적인 한도 내에서화를 발행했다. 그러나 그의 후임 대신들은 무분별하게 행동했는데 처음에는 트란스옥시아나사람 아흐마드 파나카티, 그 다음에는 위구르 사람 상가였다. 이 두 사람 모두 초의 가치를격히 떨어뜨린 무제한 통화 팽창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재화를 모으기 위하여 반복적인전에 의존하였고 짐스러운 전매제도를 실시하였다. 1282년에 암살된 아흐마드는 죽은 후빌라이에 의해 강등되었고, 상가는 독직 혐의로 사형당하였다(1291). 쿠빌라이의 치세가난 뒤에는 앞서 발행된 지폐의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새로운 지폐를 도입할 필요가 있었으나그에 따라 새로 발행된 지폐들은 모두 가치가 저락되
    인문/어학| 2011.12.01| 12페이지| 1,500원| 조회(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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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거에 대한 자신의 견해(반대의견)
    1. 여는 말시대는 변하고 있다.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어 보편화되면서 유교적인 가치관은 점점 그 위력을 잃어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전 세대들이 정해 놓은 틀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한 현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거 문화의 보편화가 아닐까 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인간과 함께 존재해 온 가장 오래된 규범이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동거문화의 바람이 불면서 결혼제도는 점차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프랑스만 하더라도 결혼 가족의 인구와 동거 가족의 인구가 비슷하다고 알고 있다. 결국 프랑스는 동거도 결혼의 일부로 간주하여 동거에 대한 정식적인 법률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동거 중 두 사람이 헤어졌을 때의 재산분배, 자녀 양육 등의 전반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기준을 이미 마련해 놓은 것이다. 그러한 제도가 필요할 정도로 동거문화가 보편화되어 있고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우리 나라의 경우는 비록 서구적인 사고 방식이 보편화되어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뿌리깊은 유교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에 동거문화를 보는 시각이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여성의 순결을 강조하여 결혼 전의 순결을 목숨처럼 중시하는 측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 전에 동거를 하여 결혼에 이르면 무방하나, 헤어지게 되었을 경우 여성에게는 치명적인 인생의 결함이 된다는 시각이 지배적인 것이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그러한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남성이 결혼 전에 다른 이와 성관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또는 으레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여하튼 동거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매우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20대 이상의 젊은 층들에게 이미 동거라는 단어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인식되어 있다. 25살이 넘어가면, 주변에서 동거하는 친구들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동거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점차 동거라는 것을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렇게 반대할 만한 것도 아니라는 견해가 점차 대두되면서 자신이 동거한다는 사실을 떳떳하게 밝히는 사람들도 많아졌기 때문에 동거의 인구는 더욱 증가하는 듯하다.2. 동거 선택의 이유동거를 선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일단, 동거가 보편화되어 있는 서구의 사람들은 이혼한 후에 위자료의 부담을 덜고자 하는 남성들의 심리가 동거 이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혼률이 유난히 높은 서구의 사람들에게는 이혼 후에 남성을 파산 직전까지 몰아갈 수 있는 위자료의 부담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동거가 점점 보편화되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론이나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 흔히 언급되는 이유는 대략 네 가지 정도가 있다. 첫 번째는 상대방이 자신의 결혼상대로 적합한 지 알아보는 탐색 과정으로 동거를 선택하는 경우이다. 이들이 보통 동거를 선택하며 하는 말은 살아 보지도 않고 어떻게 평생 같이 살 사람을 성급하게 결정하겠느냐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경제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결혼을 하고 싶긴 하지만, 결혼비용을 부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돈을 번 후에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그저 상대방이 좋아서이 살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네 번째 이유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주는 책임에 얽매이기 싫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헤어지고 싶을 때, 결혼보다는 쉽게 헤어질 수 있는 동거를 선택하는 것이다. 또한 동거하고 있는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다른 이성과의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명분이 주어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이 위와 같은 이유로 동거를 선택한다고 할 수 있다.3. 동거 선택의 맹점위에서 밝힌 이유들 때문에 동거라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실질적이고, 이성적이며 냉철하고, 진중한 선택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이유들은 모두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치명적인 맹점을 지니고 있다. 위에서 제시한 이유들을 토대로 동거의 맹점에 대해 논의해 보자.일단 첫 번째 이유부터 살펴보자. 결혼이라는 것은 물론 진중하게 선택하여 자신과 잘 맞는 상대와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혼률도 줄어들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세상에 자신과 딱 들어맞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서로 20년 이상을 다른 부모 밑에서 제각각 다른 교육을 받고,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남녀는 본질적으로 똑같을 수도 없으며 서로 잘 맞거나 어울릴 수가 없다. 동거를 통해서 자신과 맞는 사람을 찾아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결혼이란 서로 맞지 않는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과 이해로 서로에게 자신을 맞추어 나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맞추어 가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추어 줄 상대를 찾으며, 자신과 맞는 상대인지를 시험해 보겠다는 전제를 밑바탕에 지니고 있는 결합이 온전할 수 없다. 또한 이들이 결혼에 성공한다 하여도 동거라는 것이 그들의 사랑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나 이해라는 측면을 무시하고 있는 이러한 이유들은 커다란 맹점을 지니고 있다.동거를 선택한 사람들의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자. 경제적인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서 결혼식을 할 수 없다면 동거 이전에 결혼신고를 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두 사람이 결혼을 전제로 하고 행하는 동거는 결혼과 다름없기 때문에 혼인신고 과정은 필수이다. 우리나라는 결혼법정제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부정행위 등에서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혼인신고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동거 선택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면, 혼인신고라는 과정은 필수적인 것이다.세 번째 이유인 그저 좋기 때문에 동거한다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동거를 한다면 결혼을 하면 되는 것이다. 결혼할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혼인신고를 하고 같이 살 수 있다. 결혼하기에는 이른 나이이기에 부모님이 반대를 하신다면, 결혼을 허락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인 것이다. 특히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동거를 선택하는 경우, 그들의 동거는 부모님 몰래 그들의 자취방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떳떳하지 못하게 하는 동거는 사랑하는 사람을 욕되게 하는 행위라고 본다. 또한 사랑하기 때문에 시작한 동거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얼마든지 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생활이 연속적으로 되풀이되었을 때, 당사자의 도덕적인 책임감은 점점 떨어지게 될 것이고, 성적인 문란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 될 것이다. 때문에 동거 선택의 이유가 그저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주 무책임한 발상인 것이다.
    인문/어학| 2011.12.01| 4페이지| 1,000원| 조회(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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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화단 운동
    1. 의화단 운동의 원인과 배경(1) 대책없는 근대화로 인한 사회 혼란의화단(義和團) 운동 이전 중국의 민족적 위기는 퍽이나 심각하였다. 다수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직접 중국에 군사를 파견하였고 공공연히 토지를 강제 점령하기도 하였다. 중국에 들어온 서양의 상품도 점점 증가하였는데, 그들 제국주의 국가는 또한 중국에 공장과 광산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제국주의는 또한 중국에 철도를 건설하여 서양 상품이 중국에 유입되는 것을 더욱 쉽고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과거의 여러 교통선이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운하(運河)와 한구(漢口)에서 북경(北京)까지의 육로는 예부터 중국의 주요한 남북 교통선이었는데 철도와 윤선이 건설된 후로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었다. 과거에 그 수로와 육로에 의지하여 살아왔던 자들의 생활 터전이 깡그리 박탈된 까닭에 많은 수의 수공업 노동자, 상인 그리고 운수 노동자들이 모두 파산, 실업자가 된 것이다.아편전쟁으로부터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양무파(洋務派) 관료에 의한 근대화가 그 후에 이루어져 초상국(招商局)이 만들어지고 해운이 근대화되었으며 차관에 의한 철도 부설로 육운(陸運)도 점차 근대화되었다. 아편전쟁에 따른 5항 개항으로 많은 실업자가 생겼고 양무파에 의한 운수의 근대화도 똑같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실업자는 유민화(流民化)되어 이 시대의 근대화는 유민만을 증가시켰다. 대책없는 근대화는 중국의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2) 거듭되는 변화의 실패로 인한 무거운 채무청조 정부는 아편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다량의 군비(軍備)를 배상하게 되었는데 그 부담은 전적으로 죄없는 백성에게만 전가되었다. 또 무신 변법의 해에 청국은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금을 완전히 갚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증세(增稅)라는 형태로 국민에게 부담이 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소작인들의 항조운동(抗租運動)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소작료의 감액에서부터 과격화하면 불납운동(不納運動)으로까지 발전했다. 중국 민중들의 삶은는 그 반대 현상이 많았다. 기독교의 포교는 조약에 의해서 인정되었지만 외국인 선교사 중에는 중국의 민정에 어두워 무리한 포교를 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중국인 신자 가운데는 관헌에 쫓겨도 교회로 도망치면 숨겨 준다는 이유로 입교하는 악한들도 있었다. 교회 내의 치외법권을 억지로 주장하고 그것을 미끼로 신자를 끌어들이는 경우까지 있었다. 기독교가 그렇게 고자세로 나간 것은 배후에 외국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민중의 반기독교 감정을 자극했다. 반기독교 운동을 구교(仇敎)라고 불렀다. 이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이 교안(敎案)이었다. ‘구교’는 단순하게 ‘배외(拜外)’로 발전했다. 군함이나 대포를 배경으로 하여 포교하는 당시의 상황은 기독교에 있어서도 역효과였다.2. 의화단 단체(1) 기원 - 의화권에서 의화단으로명대 이전의 민간에는 백련교(白蓮敎)라는 세상을 바로 잡을 것을 믿는 비밀결사가 생겨서 자주 농민폭동과 결부되어 그런 운동의 추진력이 되어 왔다. 한민족(漢民族)의 반만(反滿)운동을 겁내던 청조는 백련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엄중히 단속해 왔다. 백련교의 분파로는 대도회, 팔괘교, 의화문, 이괘교, 여의교, 산동노단, 의화권 등 그 수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밀 결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비밀종교결사는 18세기 초부터 강소, 하남, 산동의 3개성이 경계선을 맞댄 성계(省界) 지방, 즉 송대부터 “수호전”에 나오는 송강(宋江)과 같은 도적떼의 본거지로 되었던 지대에서 생겨났다.의화권은 주문을 외우고, 의화권이라는 권법(拳法)과 봉술(捧術)을 연습하면 화살이나 탄환에 맞아도 절대로 상처조차 입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교단이다. 1895년, 마침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당시부터 산동성의 기주부(沂州府)와 조주부(曹州府) 일대에서 의화권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단원들은 기독교를 눈의 가시로 삼아 자기들의 지역 내에 있는 기독교 성당을 불살라 버리고 또 기독교도들을 살해하며 돌아다녔다. 의화권 비밀종교단체 세력은 이런 멸망시킨다는 뜻이다.3. 발발 및 경과(1) 반기독교 운동의 전개의화단 운동의 출발점인 반기독교운동은 그 주도층과 성격에 따라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첫 시기는 1860년 북경조약의 체결부터 1884년 청불전쟁기까지이다. 이 시기 운동은 관리, 신사가 주도하였고 주된 양상은 선교사, 교민, 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두 번째 시기는 청불전쟁기로부터 청일전쟁기까지이다. 열강의 압력에 굴복하여 청조가 적극적인 진압책을 쓰기 시작하자 관리, 신사가 운동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민간 비밀결사를 포함한 민중이 주도하였다. 공격대상도 기독교 세력을 넘어서 구미의 영사관, 상업시설, 주거로 확대되었다. 1890년대 초 양자강 일대의 수십 개 도시에서 일어난 교안은 주로 가로회(哥老會)를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가 주도하였다.세 번째 시기는 청일전쟁기에서 1900년의 의화단 운동까지이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와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은 중국이 망하고 열강에게 분할통치를 당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열강의 제국주의적 경제침투는 중국의 소농민, 수공업자의 생존 기반을 침식하였고 기독교 세력의 활동은 여러 영역에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리, 신사가 다시 참여하여 민중, 비밀결사 등과 함께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이 시기의 운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민족적 위기가 고조되면서 반청적 색채가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청조를 따르고 서양세력을 타도한다는 ‘순청멸양(順淸滅洋)’의 구호가 나온 데에서도 이를 알 수가 있다.(2) 의화단 운동의 경과의화단 운동은 1898년 산동, 직예(直隸)성의 경계지역에서 일어난 반기독교운동에서 출발하여 1900년에는 최고조에 도달하면서 장강(양자강)의 하류와 서북지방의 일부에 이른다. 독일의 산동침략과 그에 따른 철도 개설 및 이에 필요한 토지 매입, 분묘파괴, 민가 철거 등으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과 때마침 일어난 산동지역의 자연재해와 기근이 겹치면서 1899년에 의화권은 산동에서 상당한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189 일부는 산서와 동북으로 갔다.1900년 5, 6월 사이 의화단의 세력은 이미 천진 북경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북경으로부터 천진, 보정까지의 철도선을 모두 단절시켰다. 북경의 각국 공사는 청조 정부로 하여금 곧바로 의화단 활동을 금지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북경의 도처에서 난이 일어나자 제국주의는 수십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천진 부근의 대고(大沽)항에 이르러 시위하게 하였다. 청정부는 대군을 북경성으로 파견, 의화단을 공격하였으나 이미 북경에서도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의화단의 세력은 꺽이지 않고 오히려 커져갔다. 서태후는 의화단에 대한 강경태세가 오히려 불리하다고 판단, 그들의 ‘부청멸양’을 이용하여 제국주의에 대항해 보려 했다. 그것이 실패한다 해도 의화단의 세력이 쇠퇴하면 자신의 반동통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의화단을 합법화시키고 그들의 북경 진입을 묵인하였다. 의화단이 천진과 북경에 들어왔을 때 일반 백성과 수많은 사병, 일부 수구적 관리들도 의화단에 참가했는데, 이들의 동기는 애국심보다는 외국에 대한 원한, 그들의 세력을 이용하려는 것이었고 심지어 파괴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의화단 내부는 이처럼 복잡한 것이었으나 그 세력은 나날이 부풀어갔다.의화단이 북경으로 들어오자 각국 공사들은 모두 긴급을 고하고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8개국은 즉시 연합군을 조직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여 침략을 확대하려 하였다. 1900년 6월 6일 연합군이 대고항으로부터 상륙하여 천진성 바깥에서 의화단과 전투를 개시하였다. 6월 8일 연합군 2천여명이 북경으로 진격하고 의화단은 한편에서는 철도를 파손하고 한편에서는 저항하였다. 연합군은 3일간 공격하였지만 사상자가 수백에 이르자 천진으로 도피하였다.당시 북경 동교민항(東交民巷)의 각국 사관(使館)에서는 모두 대포를 장치하고 긴장 상태에 있었다. 사관 내의 외국 병사 또한 걸핏하면 동교민항으로 들어와 의화단에 싸움을 걸거나 민간인을 살해해 의화단원은 이에였다. 서태후는 광서제와 일단의 군대를 이끌고 서안으로 도피해야 했다. 의화단의 혈전은 56일을 지나 끝이 났지만, 이들의 투쟁은 1년여 동안 계속되었다. 북경 점령 후 연합국의 약탈로 인한 물질적 손해, 부녀 강간, 잔인행위, 무법의 살인, 이유없는 방화 등 주민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었다.청왕조가 취한 의화단 운동의 전기와 후기의 태도가 판이하게 달라지면서 청왕조에 대한 의화단의 태도도 다르게 나타났다. 의화단 운동 전반기의 기본적인 구호는 “청왕조를 도와 서양을 멸하자”는 것과 “서양을 몰아내고 청왕조를 보전하자”였다. 이는 수구파의 서양에 대한 적대감과 일맥상통하였으므로 초기에는 조정에서 의화단의 손을 써서 조종하고 나아가서는 이용할 심산을 가지게도 하였다. 그러나 의화단의 왕성한 투지가 중국의 제국주의자 세력에 타격을 가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8 연합군이 구성되었다. 연합국은 신식장비로 의화단을 향해 반격해 오면서 의화단을 한정된 시간 내에 소탕하라고 청왕조를 협박하였다. 의화단은 계속 증파되는 십만의 연합군과 청의 관군에게 협공당하자 “관에서 인민을 핍박하니, 인민은 반란을 일으키는 길 밖에 없으므로 청을 타도하고 서양도 멸하자”는 쪽으로 구호를 변경하였고, 계속 저항하다가 1902년에 완전히 진압당했다.4. 의화단 운동에 대한 청조와 열강의 조치교안이 발생하면서 청과 열강 간에 외교적 마찰이 빚어졌다. 1880년대까지는 대체로 운동 주모자 체포와 진압에 소극적이었던 지방관의 처벌, 교회와 교민의 손실에 대한 배상금 지불로 교안이 처리되었다. 그러나 1890년대 이후가 되면서 열강은 교안의 처리과정에서 영토를 할양해 달라든가 이권을 넘겨 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독일은 1897년 산동성에서의 교안을 빌미로 산동성 교주만을 강제로 점령한 후 청조로부터 조차지로 인정받았다. 프랑스와 영국도 교안을 이용하여 영토 할양과 철도부설권, 광산개발권 등의 이권을 얻어냈다.(1) 청조의 조치의화단의 이념은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강하여 주술로 총포를 물리친다는 선전으다.
    인문/어학| 2011.06.22| 9페이지| 1,000원| 조회(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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