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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독]제임스 카메론 평가A좋아요
    계명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 4472350 최미현//제임스 카메론 (James Cameron)//◆감독연보+ 본명 (Full Name) : James Francis Cameron?+ 생년월일 : 1954년 8월 16일 월요일+ 성별 : 남자 / 출생지 : 캐나다 온타리오주 카퍼스캐싱?+ 데뷔 : 1981년 식인 피라니아+ 약력 : 1998년 아카데미 골든글러브 수상 (감독상,각본상,작품상) 타이타닉+ 대표작 : 트루라이즈, 터미네이터, 에이리언, 타이타닉, 다크엔젤 외 다수?◆작품연보-감 독2005년?? 에일리언 오브 딮 (Aliens of the Deep)?2003년?? 고스트 오브 어비스 (Ghosts of the Abyss)?2002년?? 제임스 카메론의 비스마르크호의 비밀 (Expedition : Bismarck)?1997년?? 타이타닉 (Titanic)?1994년?? 트루 라이즈 (True Lies)?1991년?? 터미네이터 2 : 심판의 날 디렉터스 컷 (Terminator II : Judgment Day Extended Special Edition)?1991년?? 터미네이터 2 : 심판의 날 (Terminator II : Judgment Day)?/ 액션, SF1989년?? 어비스 (The Abyss)?1986년?? 에이리언 2 (Aliens)?1984년?? 터미네이터 (The Terminator)?1981년?? 식인 피라니어 (Piranha II : The Spawning)?/공포, 멜로/애정/로맨스, SF-출 연2005년?? 에일리언 오브 딮 (Aliens of the Deep)? /다큐멘터리2002년?? 제임스 카메론의 비스마르크호의 비밀 (Expedition : Bismarck)?-각 본1997년?? 타이타닉 (Titanic)?1995년?? 스트레인지 데이즈 (Strange Days)?1994년?? 트루 라이즈 (True Lies)?1991년?? 터미네이터 2 : 심판의 날 디렉터스 컷 (Terminator II : Judgment Day시리얼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어느 날, 세미나 장에 짐의 운명을 바꿀 연사가 등장했다. 직업 다이버였던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짐은 1만 볼트짜리 전류가 온 몸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액체 산소 실험’에 직접 참여했다는 그 다이버는, 자신이 액체 산소를 통해 약 45분 동안이나 호흡을 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것은 짐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람의 폐를 ‘아가미’처럼 만들 수 있는 물질이라!”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심연을 누비는 것은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아니겠는가? 짐의 열렬한 ‘바다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는 곧장 스쿠버 다이버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이후 틈이 날 때마다 물 속으로 들어가 물고기와 대화(?)를 나누며 깊은 사색에 잠기곤 했다.‘액체 산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짐은 언젠가 ‘다이버에 관한 걸작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게 된다. 물론 그 영화의 중심 소재는 ‘액체 산소’가 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짐은 즉시 ‘다이버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를 하나 써내려갔다. 내용은 간단했다. “해저의 연구 시설에서 일하던 일련의 과학자들이 특수한 잠수복과 ‘액체 산소’를 이용해 누구도 들어가 보지 못한 깊이의 심연(abyss)에 도전한다. 물론 심연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해서, 한번 그 곳에 들어간 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이 짧은 이야기가 바로 ‘매머드급 심해 영화’ 의 출발점이기도 했다.그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해양생물학을 전공하였으나 해양생물학자란 결국 물고기 부화장에서 연어알이나 세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고,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물리학은 사물의 근원을 추구하고자 했던 그의 관심에 부합하였으나 물리학자가 되기에는 자신의 수학실력이 턱없이 모자라다는 생각에 좀 더 창의적인 일을 찾기로 한다.중퇴한 카메론은 결혼을 하고 트럭운전사로 일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그는 LA로 가서 로저 코먼의 뉴월드영화사에 들어간다. 로저 코먼의 수하에화의 특수효과가 워낙 빼어난 탓에, 회원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진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특수효과로 만들어낸 부분’ - 예컨대 물 위에 떠있는 거대한 벤틱 익스플로러 호는 놀랍게도 미니어처 모형로 촬영된 것이다 - 을 각인시키지 못한다면 는 시각효과 부문의 상을 탈 수가 없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가 헛되지 않아, 는 1990년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가 영화사에서 ‘특수효과의 새 장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진짜 이유는 바로 ‘물기둥 장면’이라고 한다.91년 제임스 카메론은 3년간의 침묵을 깨고 실패를 거울삼아 만든 로 헐리우드 영화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한다. 는 헐리우드 블럭버스터 영화를 테크놀로지의 격전장으로 이끈 유도탄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중무장 시킨 미래 전사를 데리고 돌아와서(I‘ll Be Back )한 순간도 고삐를 놓치지 않고 SFX를 극단까지 밀고나가는 는 전적으로 테크놀로지로 재편된 영화이다. 내러티브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다르지 않으며, 컴퓨터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배우를 대체 하고 있는 는 이미 해체되어 있는 이미지를 다시 한번 해체하고, 전혀 다른 단계에서 종합함으로써 지금까지 모든 영화제작의 역사를 부정하고 영화를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뿐만 아니라 는 제작비를 엄청나게 초과하고 개봉일을 준수하는 법이 없는 그의 악습이 생각만큼의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음에도 헐리우드의 어떤 제작자라도 '박스오피스 터미네이터'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매혹적인 존재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이로써 조지 루카스가 떠난 헐리우드에서 스필버그와 맞서 싸울수 있는 유일한 감독이 된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 속에서 SFX의 스펙터클과 이야기의 몰입이라는 두 명제는 과연 이율배반일까 라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리고 조작된 화면의 진실과 SFX가 압도해버린 스펙터클 사이에서 전자의 편에 서서 (94)를 만든다. 는 일상적인 공간을 보이지 ator 2: Judgment Day)?-1991년 린다 헤밀턴, 에드워드 훼론 주연.-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전편이 나온 지 7년 후 '변형 터미네이터'란 영화 사상 최고의 특수효과를 선보이면서 91년 한 해 영화계와 극장가를 뒤흔들어 놓았던 속편. 사라 코너 역을 했던 린다 헤밀턴은 시리즈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어린 존 코너로 등장한 신예 에드워드 훼론 역시 이 영화에 출연하면서 많은 팬들을 만들었다. "SFX 기술의 총체적인 성공"이라고 평가받는 터미네이터의 영상 장면들과 아카데미 음향상을 수상한 효과음은 가히 최고이다. 전편에서 마이클 빈이 인류를 위해 터미네이터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면, 속편에서는 린스가 경고했던 핵전쟁의 공포와 함께 액체 인간의 활동을 영상에 담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한 특수효과가 주 볼거리다.?92년 아카데미에서 6개 부문 노미네이트(촬영, 편집, 특수효과, 음향효과편집, 분장, 음향상)되어 기술 관련 4개 부문(특수효과, 음향효과편집, 분장, 음향상)을 석권했다. 92년 골든글로브 각본상 수상. 1992년 영국아카데미 영화제 2개 부문(음향, 특수효과) 수상, 1992년 독일 굴든 스크린 영화제 '골든 스크린상' 수상, 1992년 휴고 영화제 휴고상 수상, 1992년 MTV 영화제 6개 부문 수상.?상영 시간 2시간 15분 내내 폭발과 파괴와 총격과 추격, 그리고 화염과 굉음이 초대형 화면을 메우는 이 영화의 제작비는 1억 달러(역사상 1억달러를 돌파한 첫 영화다). 이 제작비는 미래 세계를 구축하는 세트 제작비와 특수효과 비용에만 8800만 달러가 투입되었고, 스타 슈왈츠네거는 개런티 1500만 달러(1200만 달러짜리 자가용 제트기를 선물받았다고 한다), 카메론 감독에겐 600만 달러, 린다 해밀턴은 100만 달러, 그리고 카롤코가 전편 제작사인 헴 데일에 지불한 영화화 판권료 500만 달러 등이 지불되었다. 특히 1990년초를 기준으로 슈왈츠제네거에게 지불된 1500만 달러는 기록적인 개런티다. 러리맨인 사실이 불만이다. 또 한창 반항이 심한 사춘기의 외동딸 데이너도 골칫거리. 해리의 선물도 쓰레기통으로 직행. 유치한 그랜지 룩으로 몸을 감싼 록광인 소녀다. 결국엔 아버지를 매일 데리러 온 깁의 지갑에서 용돈을 훔치기에 이른다.국가를 지키기 위해 여러명의 남자를 살해하며 위기일발의 순간을 넘기고 집으로 돌아온 수퍼맨이건만 자기집에서는 위엄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다.오메가 섹터 본부. 신텔 시스템즈에 출근. 해리와 깁은 사무실 안을 깊숙이 들어가 아무것도 없는 흰 벽에 카드를 댄다. 비밀 문이 열리고, X선 모니터가 설치된 통로를 빠져나와 지문과 눈동자 체크를 받는다. 이곳이 대통령 직속의 최신정보기관 오메가 섹터 본부이다. 스위스에서 입수한 데이타 화일을 해독한 결과, 이슬람 원리주의의 핵테러리스트에게 1억 달러 정도의 거액이 흘러들어갔다는 사실,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구 소련의 어떤 공화국에서 훔친 핵탄두 4기와 관련되어 있는가를 알아냈다. 거기에다 그 제네바에서 탱고 상대였던 주노가 얽혀있다. 재빨리 해리는 주노의 사무실로 향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몇명에게 붙잡힌다. 실은 오늘이 해리의 생일. 헬렌은 가족과 친지를 초대하는 생일파티를 생각했었다. 깁은 헬렌으로부터 여러차례 계획을 듣고, 해리를 8시까지 집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해리의 집앞을 해리 일행이 탄 차가 그냥 지나간다. 그런 그녀의 뒷배경에는 적색 지하드라는 테러 집단이 숨어 있었다.? 한편 일상생활에 지쳐있던 해리의 아내 헬렌은 자칭 첩보원이란 사이먼에 이끌려 가끔 만나곤 한다. 아내가 사이먼과 통화하는걸 들은 해리는 지갑과 전화에 도청 장치를 한다. 사이먼은 가짜 첩보원으로 결국 사이먼과 헬렌의 밀회장소에서 그들을 체포한다. 영문도 모른체 체포된 헬렌은 공간에 갇히고 음성으로 들리는 남편은 사랑하냐는 해리의 말에 아직도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한다.[헬렌 태스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를 사랑할겁니다.”]이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왜냐하면 호텔방에들어
    예체능| 2006.06.28| 8페이지| 1,000원| 조회(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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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국제 석유정책과 동북아 평가A+최고예요
    국제정치경제론 레포트 정치외교 4472350 최미현국제 석유정책의 패러다임적 변화:정통론 VS 신정치경제론적동북아의 국제석유질서에 주는 의미목차Ⅰ. 서론Ⅱ. 1. 석유의 국제정치?경제적 등장2. 석유의 정통론적 입장3. 신정치경제론적 입장4. 동북아시아의 석유 현실Ⅲ. 결론Ⅰ. 서론변화하는 국제시장에서의 석유정책을 진단하고 이런 변화가 우리가 속한 동북아시아의 국제석유 질서에 주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우선 국제석유 시장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를 위해 석유가 세계경제의 주력 에너지원이 된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그리고 국제석유 정책을 지배해 온 패러다임을 검토할 것이다. 국제석유 관계가 미국중심의 관계에서 1970년대 OPEC이 주도하면서 형성된 패러다임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정통론(orthodox)이라고 할 수 있는 70년대의 패러다임은 90년대 들어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이 새 패러다임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국제석유 산업에서 정통론에 견줄만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가 동북아시아 석유관계에 주는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동북아시아의 석유현실을 살펴본 뒤 이런 변화가 주는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Ⅱ-1. 석유의 국제정치? 경제적 등장군사용으로 주로 사용되던 석유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경제성장을 위한 주력 에너지로 변신하였다. 제2차 대전 전후복구가 시작될 무렵인 1950년 석유는 에너지소비 국가들인 OECD 전체 에너지 소비의 29.5%에 불과하였다. 불과 10년 후인 1960년, 세계경제는 전후 복구에 상당한 진전을 보게 되었다. 당시 석유는 전체 에너지 소비의 40.6%를 차지하여, 2차 대전까지 주력 에너지원이었던 석탄을 대체하였다. 이러한 변화에는 석유가 석탄에 비해 갖고 있는 우수성 때문이었다. 석탄에 비해 석유가 갖는 경제성 외에, 국제 정치적 요인도 석유가 주력 에너지원으로 등장하는데 기여하였다. 제2차 대전의 전승국인 미국은 과거 적국이었던 독일 및 일본부의 재분배를 위한 도구 및 공급위기에 대한 소비국의 집단적 대응 등 크게 4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런 정통론은 73년 석유위기 이후 80년대 후반까지 국제석유 관계의 기본적 토대가 되었다고 하겠다.첫째, 자원민족주의란 한 국가의 영토 내에 있는 자원을 특정민족의 이익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 구체적인 실현은 국유화(nationalization)를 통해서 이뤄진다. 경제적 민족주의(economic nationalism)의 일부인 자원 민족주의는 세계 시장경제는 자국경제 혹은 자국민의 복지에 불리하게 운용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석유의 경우, 석유자원을 보유한 국가들은 시장경제 논리에 의한 석유개발은 곧 자신들의 착취이며 그 결과는 경제적 발전의 저해로 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석유 소비국의 경우에도, 자국 내 석유산업에 외국자본의 진출은 국부의 유출로 인식하였다. 실례로, 프랑스는 이미 1930년대에 프랑스에 상륙하려는 국제석유 회사들이 국익을 해칠 수 있다는 인식에 민관합동으로 국영 석유회사인 CFP를 창설하여 대항하기도 하였다. 석유산업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정치적 힘이 석유산업에 대한 시장의 압박에 대항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석유자원 혹은 석유산업의 국유화는 바로 한 국가의 정치적 힘에 바탕을 둔 자원 민족주의적 정책수단이라고 하겠다. 석유에 대한 자원민족주의는 세계 에너지 경제구조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원 민족주의에 의한 상류부문 국유화로 당시까지 석유산업의 특징이었던 철저한 수직통합 구조가 붕괴되었다. 70년대까지 세계 석유산업은 소위 ‘메이저’라는 석유회사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들 회사들은 석유발견에서부터, 생산, 수송, 정제 및 판매까지 수직적으로 통합된 기업구조를 갖고 있었고 세계 석유산업은 소수의 이들 기업에 의해 지배되었다.) 메이저 회사들의 특징은 석유의 생산과 판매의 순환과정(cycle)에서 발생활 수 있는 부조화를 자체적으로 조절하여, 이에 따른 비용을 석유 소비자, 석유를 생산하는 생산자, 그리고 생산물로부터 조세를 부과하는 정부에게 분배된다. 그런데 유가가 적정이익을 보장하는 가격이상으로 형성될 겨우, 석유는 소비자로부터 생산에 관련된 행위자들에게 부(wealth)가 이전되는 효과적인 통로가 된다. 이런 현상이 70년대에는 국제적인 양상으로 나타났었다.정통적 입장의 네 번째 특징은 산유국의 움직임에 대한 소비국의 집단적 대응이다. 석유 소비국들은 제1차 석유위기가 발발한 지 1년도 채 지나지않은 1974년 10월 국제에너지 기구(IEA))를 창설하였다. 당시 OPEC)은 전세계 확인 매장량의 85%를 장악하고 있었고, 비공산권 석유 소비량의 65%를 공급해 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공급위기로 인해 소비국들은 석유공급원 상실우려로 인해 일종의 공황에 빠졌고 자원외교라는 이름하에 산유국들의 각종 요구에 소비국들은 수동적으로 이끌려 갔다. 공급위기와 이에 따른 여파에 대해, 미국은 이들 문제를 미국 혼자 힘으로는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유럽 등 여타 국가들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국제경제 이슈로 규정하면서, 소비국들이 집단적으로 대응할 것을 제안했다. 미국은 자신의 정치적 지도력하에 소비국들을 결속하지 않을 경우, 산유국의 요구에 소비국들이 쉽게 무릎을 꿇을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당시 미국 국무장관인 키신저의 주도하에 소비국들은 집단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연속적으로 개최하였다. 미국 주도에 의한 소비국의 집단대응에는 세계 석유소비와 국제경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선진 공업국가들이 거의 대부분 참여하였다. 미국과 주요 석유소비국들은 석유 문제의 집단적 대응응 위해 국제에너지 기구(IEA)를 창설하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에 설치하였다. 이에 의해 소비국들은 대규모의 전략 비축유)를 보유하여 산유국의 공동금수 및 우발적인 공급혼란에 대비하였고, 위기시 회원국간 협력을 이꿀어 내기 위해 석유 및 에너지에 관한 정보를 상호공개하였다. 이런 노력에 대해 사우디 한 것이다. 이들은 경제성장을 위한 외화가 필요하였고, 이를 조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유효한 수단으로서 석유수출을 중요시하였다. 이들 국가들은 카스피해 유전 등을 외국, 서방 투자자들에게 개방하였고, 석유수출을 통한 외화수입을 확대하기 위해 석유시장 확보에 주력하였다. 90년대 후반까지의 저유가는 바로 냉전붕괴에 의한 자원 민족주의의 퇴조에서 그 원인의 일부를 찾을 수 있으며, 자원 민족주의도 국제환경의 변화로 위력이 퇴조되었다.둘째, 신 정치 경제론자들은 정통론자들이 근거하고 있는 석유자원의 유한성에 대해 상이한 의견을 제시한다. 제1차 석유위기가 발생한 1973년의 세계 확인매장량은 약 4,250배럴)로써, 당시 소비량을 기준으로 향후 약 30년 후면 석유자원은 고갈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이후 발표된 석유 매장자료들은 70년대의 예상과는 달리 매장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 정치 경제론자들은 이런 전망의 오류를 다행한 일로 보면서, 이런 확인 매장량의 변화에 근거하여, 석유 매장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이 것으로 이해하고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석유를 고갈성 자원으로 인식하고 매장량을 고정된 비축물량(fixed stock)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즉, 생산이 모두 이뤄지기 전까지 지하에 존재하는 석유 매장량을 알 수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석유는 마치 고정된 비축물량을 사용하고 나면, 남는 매장량은 줄어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마치 은행계좌처럼, 인출한 금액을 다시 채워넣을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해야 된다는 것이다. 석유는 결코 고갈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석유 수요가 사라지면 생산을 중단하여야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문제는 언제 수요가 사라지느냐는 것이다. 석유수요의 향후 존속여부는 석유의 경제성 확보와 경쟁 에너지의 경제성 여부에 달려있다. 우선 석유의 경제성은 기술혁신을 통해 향상된다는 것이다.셋째, 석유 매장량과 관련하여, 신 정치경제론자들은 기술혁신이 중요한 역할을론의 네 번째 특징은 산유국과 소비국의 협력 가능성이다. 정통론자들은 산유국과 소비국간의 대립구도에 초점을 맞춘 결과 산유국과 소비국 진영간의 집단적 대응을 강조한 반면, 90년대 들어 이들간의 협력 가능성이 모색되고 있다. 실제, OPEC 영향력의 궁극적 와해를 목적으로 하였던 IEA는 걸프전이 종전된지 1년 후인 1992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산유국을 포함한 대규모 전문가 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회의에서 IEA측은 산유국과의 에너지 정보, 즉 투명한 에너지 통계교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이후 IEA는 산유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런데, IEA는 OPEC과의 직접적인 대화가 산유국과 소비국간의 유가조정 매카니즘으로 발전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국제 석유시장의 역할이 축소되고 유가가 다시 정치적 요인에 의해 결정될 지도 모른다는 점이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IEA측의 내면적 논리이다.4. 동북아시아의 석유현실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90년대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석유수요도 놀라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의 대표적인 석유소비국가인 중국은 2003년 일본의 석유소비를 능가하여 세계 2위의 석유소비 대국이 되었다. 이런 지속적인 수요증가에 의해, 아?태지역은 북미 및 유럽지역 석유 비해 가장 빠른 소비증가를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급속한 수요증가에 비해 아?태 지역의 석유 공급능력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 석유수요는 전세계 석유수요의 25%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석유 매장량은 전세계의 4%에 불과하며, 생산량은 전세계의 11%에 불과하다. 이 지역은 중동과 멀리 서부 아프리카 지역으로부터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이 가장 높은 의존을 보이고 있는 지역은 단연 중동이다. 석유수급 불균형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어서, 아?태지역의 역외 석유 공급원에 대한 의존도는 앞으로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태지역은 앞으로 대규모 석유매장지가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낮으며, 자체적으로 공급할 수 한다.
    경영/경제| 2006.06.05| 8페이지| 1,500원| 조회(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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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학]국가승인제도
    ■ 국가승인제도 國家의 承認 recognition of state1. 의의: 기존국가가 새로 성립한 국가를 국제법주체로 인정하는 단독행위를 말한다.2. 연혁: 원래 그로티우스나 바텔에 의하면 국가는 성립과 동시에 당연히 국제법주체가 되므로 국가승인이라는 문제는 특별히 거론될 여지가 없었다. 승인제도가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 및 라틴계 이 독립한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였다.3. 제도적 취지: 신국가가 성립하는 경우는 전술한 바와 같이 창설?분리독립?분열 및 합병이 있다. 그 중에서 국가승인이 특히 문제되는 것은 기존국가의 일부가 본국과의 투쟁을 거쳐 분리독립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본국은 신국가의 성립을 부인하는 것이 보통인데, 제3국도 본국의 승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의 자격을 갖춘 신국가를 승인할 수 없다면, 신국가의 국제법주체성을 부인하게 되므로 그 지역 내에 있는 자국의 권익을 보호할 방법이 없게 된다.또한 신국가의 입장에서도 주권국가의 자격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본국과의 관계 때문에 기존국가들로부터 국제법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는 불합리하고 부당하다. 이러한 난점을 배제하기 위해 확립된 것이 다름아닌 국제법상의 국가승인제도라 하겠다.4. 문제점: 승인은 역사적으로 국제정치상 권력정치의 유용한 무기로서 그 역할을 훌륭히 해내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그와 같은 인상을 씻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다. 왕왕 상조(尙早)의 승인 시비로 승인제도는 국제관계를 파국 직전까지 몰아넣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원래 국제정치상의 문제이던 것을 국제법적으로 해명하려는 데 승인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승인문제를 특히 그 본질 내지 효과에 관해 국제법학자들의 견해가 대립되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5. 법적성질1) 단독행위(單獨行爲): 국가승인은 승인국의 일방적 의사표시, 즉 단독행위이다. 승인과 동시에 외교관계의 수립이 승인국과 피승인국의 합의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 때문에 승인을 쌍방행위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2) 정치성(情致性)과봐야 할 것이다.9. 방법(方法)1) 법률상 승인(法律上 承認)과 사실상 승인(事實上 承認)① 법률상 승인: 승인요건을 구비한 국가에 대해 행하는 승인방법으로 이 방법에 의해 승인의 법적 효과가 발생한다. 승인이라 하면 보통 이 의미로 사용된다.② 사실상 승인㉠ 의의(意義): 법률상 승인을 받을 만한 요건을 구비하지 못하였거나 기타의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법률상 승인을 앞두고 과도적으로 행하는 승인방법을 말한다.㉡ 효과(效果): 신국가는 사실상 승인에 의해 국가로서의 국제법주체성을 사실상 인정받게 된다. 사실상 승인은 효과면에서 법률상 승인과 거의 같으나, 그 성격이 일시적? 잠정적이므로 외교관계나 조약관계가 보통 비공식적? 잠정적이며, 사실상 승인 후 승인요건이 구비되지 않았음이 명백해지면 철회할 수 있다.㉢ 문제점(問題點): 사실상 승인은 승인국으로서는 상조(尙早)의 승인을 피하면서 일시적 이해관계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반면 철회가능성이 하이 유보되어 있으므로 승인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많다.2) 명시적 승인(明示的 承認)과 묵시적 승인(?示的 承認)① 명시적 승인: 승인의사를 직접적으로 명백히 표시하는 승인방법인데, 국가승인은 보통 이 방법으로 행해진다. 방법으로는 선언? 통고? 조약규정? 국제회의의 결의 등이 있다.② 묵시적 승인: 승인의사가 추정되는 행위에 의해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승인방법이다. 이 방법에는 신국가와의 외교사절의 교환? 양자조약의 체결, 신국가의 국기승인 등이 있으나, 신국가와의 단순한 통상교섭행위나 통상대표의 파견? 접수는 묵시적 승인이 되지 않는다. 다만 신국가의 영사(領事)에게 인가장을 발급한 경우 또는 신국가에게 자국영사의 인가를 요구한 경우는 묵시적 승인으로 보는 것이 국제관행이다. 그러나 미승인국 대표가 참가하는 국제회의에 출석하는 것만으로는 묵시적 승인으로 볼 수 없다. 묵시적 승인은 UN에의 가입과 관련해서도 문제된다.3) 개별적 승인? 집합적 승인 및 집단적 승인① 개별적 승인(個別的 承認): 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승인은 단순히 그 수립의 단서에 불과하다. 보통 승인과 함께 외교관계가 개시되며, 일단 수립된 외교관계가 단절되어도 승인의 효과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3) 기타의 효과승인의 효과로서 지금까지 설명한 것 외에도, 영? 미 관행은 대체로 다음의 것을 인정하고 있다. ①국가행위인 승인행위에 대하여 법원에 제소할 수 없으며, ②피승인국은 승인에 의하여 제소권을 얻으며, ③피승인국은 승인국 관할 내에 있는 선행국의 재산을 승계할 권리가 인정되고, ④피승인국 기관 및 국유재산은 승인국 내에서 재판상의 면제를 향유한다.11. 미승인국(未承認國)의 지위(地位)승인에 의해 신국가는 승인국과의 관계에서 국가로서의 국제법주체성을 확인받게 된다. 그러므로 승인을 받기 이전의 신국가의 국제법상 지위가 문제된다. 이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점을 알아보자.1) 미승인국의 국제법주체성: 그러면 미승인국을 단순한 사실적 존재로만 간주하고 민승인국이 국제법주체성을 전혀 갖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본국과의 투쟁을 거쳐 분리독립하는 신국가의 경우에는 국가의 승인이 특히 문제가 되는데, 이 경우 신국가가 승인을 받을 때까지는 이론적으로 본국의 일부로 보아야 하며 국가로서의 국제법주체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새로 사실상 성립한 이 미승인국이 아직 국가로서의 국제법주체성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전혀 국제법주체성이 없는 단순한 사실적 존재로만 볼 수는 없다.왜냐하면 신국가는 내란 과정에서 일정지역을 실력으로 지배할 경우 이미 교전단체로서의 승인을 받는 경우가 많으며, 이에 의해 전투수행방법이나 외국인의 권익보호에 관해 국제법의 적용을 받아 국제법주체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기 때문이다. 즉, 신국가는 분리독립을 완성하여 국가권력을 확립하기 이전에도 제한적이긴 하나 이미 국제법주체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내란에서 승리하여 본국의 실효적 지배를 완전히 배제하여 이전보다도 그 권력이 더 강화되자마자 국제법주체로서의 지위를 잃고 단순한 사실적 존재로 전락한다면된 것이므로 국제법상 일반적으로 확립된 원칙이 아니며 국제사회의 관행과도 합치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주의도 정부승인의 요건이 아니다.④ 망명정부의 승인: 제2차 대정중 미? 영 양국은 정부권력의 확립요건이 결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의해 본토를 점령당한 프랑스 망명정부를 승인한 사례가 있다. 망명정부 승인의 이론적 근거는 당해 정부가 망명 이전에 갖고 있던 합법성의 계속적 유효성에 있다.6. 의무(義務): 신정부가 승인요건을 구비한 경우 타국가의 승인의무의 存否에 관하여 국가승인과 마찬가지로 학설이 대립한다. 그러나 실정법상 승인의무는 없다고 본다.7. 방법(方法): 정부승인 방법은 대체로 국가승인방법과 동일하여 법률상 승인과 사실상 승인, 명시적 승인과 묵시적 승인, 개별적 승인? 집합적 승인 및 집단적 승인, 무조건승인과 조건부승인 등이 있다.정부승인에 있어서도 법률상 승인을 하기 전에 사실상 승인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상 승인을 받은 신정부는 국제법상 正式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비공식협정의 체결 또는 비공식대표자에 의한 교섭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상의 정부승인은 철회 할 수 있다. 그런데 ‘티노코청구권중재사건 ’ 등에서 국제법원은 국가책임의 경우 효과면에 있어서 사실상의 승인과 법률상의 승인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영국법원도 ‘아란차주 멘디號事件 ’에서 재판면제와 관련하여 동일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례가 국제법상 원칙으로 확립된 것인가에는 의문이 있다.8. 효과(效果)정부승인의 효과도 국가승인의 효과와 대체로 동일하지만 다음을 유의해야 한다.1) 특성(特性)① 확정성(確定性): 정부승인은 국가승인의 경우와 같이 철회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상의 승인은 철회할 수 있다.② 소급성(遡及性): 승인의 효과는 신정부가 사실상으로 확립되었던 때까지 소급한다. 이 원칙은 ‘루터 대 사고르사건’과 ‘프랑스의 페루에 대한 청구권중재사건’에서 인정되었다.2) 일반적 효과① 국가대표자격의 승인: 신정부는 승인에 의해니므로, 이때의 승인은 선언적인 것이 아니고 창설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2) 성격: 교전단체의 승인은 확실히 하나의 국제법상의 제도이나 중앙정부와 제3국이 각각 필요에 따라 행하는 정치적? 재량적 행위이다. 따라서 승인의 요건이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중앙정부와 제3국은 승인의 의무가 없다.4. 요건1) 중앙정부에 의한 승인의 경우: 중앙정부에 의한 교전단체승인은 국제법상으로 특별한 요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앙정부의 승인으로 인하여 제3국의 이해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앙정부가 叛徒를 진압하지 못하고 피점령지역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을 때 비로소 반도를 교전단체로서 승인하게 된다.2) 제3국에 의한 승인의 경우: 제3국이 叛徒를 교전단체로 승인하려면 반도는 다음 요건을구비해야 한다. ①叛徒가 일정지역을 점거하고 사실상의 정부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중앙정부의 통치를 완전히 배제해야 하며, ②叛徒가 병력으로 중앙정부와 투쟁해야 하고, ③叛徒가 중앙정부와의 투쟁에서 전쟁법규를 준수할 의사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3) 요건과 관련되 문제: 叛徒가 2)의 요건을 구비하면 제3국은 반도를 교전단체로 승인할 수 있으나, 그 전에 승인하면 상조(尙早)의 승인이 되어 중앙정부에 대한 불법간섭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요건이 구비되기 전이라도 중앙정부가 승인한 후에는 제3국이 승인하여도 그 승인은 적법하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제3국은 교전단체의 지배지역 내에서 자국의 법익침해에 대한 책임을 몰을 상대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5. 방법1) 중앙정부에 의한 승인의 경우: 명시적 승인과 묵시적 승인이 있다. 중앙정부가 교전단체승인을 선언한 경우는 명시적 승인이며, 叛徒에 대하여 교전단체와 동일한 대우를 하는 경우에는 묵시적 승인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2) 제3국에 의한 승인의 경우: 명시적 승인과 묵시적 승인이 있다. 제3국이 叛徒와 중앙정부의 전쟁에 대하여 중립을 선언하는 경우는 명시적 승인이며, 반도에 대하여 교전단체와 동일한 대우.
    법학| 2006.06.05| 18페이지| 1,000원| 조회(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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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현대사] 문화대혁명과 중국의 미래
    문화대혁명과 중국의 미래◆목차◆Ⅰ. 서론Ⅱ. 본론1. 문화대혁명의 배경2. 문화대혁명의 전개과정3. 문화대혁명의 결과4. 문화대혁명의 역사적 의의Ⅲ. 결론문화대혁명과 중국의 미래참고문헌Ⅰ. 서론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은 중국 공산당의 역사나 세계의 다른 어느 공산주의 운동에서도 그 유례가 없었다. 수년 동안 전국의 지도부뿐만 아니라 기층까지 분열되고 혼란에 빠져 분쟁이 진행되는 속도와 형태는 사회적 여건과 지역에 따라 매우 달랐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변화되었다.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중앙에서 기계적인 통제를 할 수는 없었으나 전반적인 통제력을 잃지는 않았다. 국가의 모든 정치 기구가 도전 받는 위기에서 좌파가 문제시했던 것은 연안시대와 대약진 운동기에 윤곽이 잡혀진 중국 공산주의의 기본 실천, 즉 대중노선이었다.문화대혁명 당시 새삼스럽게 강조되었던 모택동 사상의 우상숭배는 모택동이 구상하고 있던 가치구현에 대한 대중조작의 방법이었지만, 그것은 결국 지도자와 대중사이의 간격을 축소화시키려던 기도이었던 것이며 따라서 문화대혁명은 대중의 정치참여를 새로운 문제로서 등장하게 하였던 것이다.문화대혁명은 자본주의와 수정주의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정형화된 보수주의 사회에 대한 거부이며, 그에 따라 사회주의에로의 전환 시기에도 계급 투쟁이 지속될 것이고 신부르주아가 구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사멸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또 정치의식상의 이념 혁명 없이는 사회주의 체제가 무의미하다는 확신을 가진 좌파의 실패한 혁명이었다.Ⅱ. 본론1. 문화대혁명의 배경문화대혁명은 중국에서 1966년 5월부터 76년 10월까지 모택동(毛澤東)에 의해 계획, 추진된 대규모적 상층구조의 이념투쟁 및 권력쟁탈운동이다. 이 운동이 시작된 배경은 중국식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운동이 61년에 이르러 수천만명의 아사자를 내면서 실패로 끝나, 이 운동을 주도했던 모택동 일파의 권력이 위협을 받으면서였다. 대약진운동이 좌절된 이후부터 중국 공산당 내부의 노선 대립과 권력 투쟁의 시작이었다. 결국 1966년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모택동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문화대혁명은 1965년 9월에 개최되었던 당중앙위 정치국회의에서 모택동이 중국사회의 지식인과 그들의 부루주아 사상 을 비판한 것에서 고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진원은 지도계층내부의 분열이었다. 1962년부터 회복되기 시작한 경제는 실용주의적 정책의 계속적인 추구냐, 아니면 과격한 정책에로의 환원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했고, 이것을 중심으로 지도계층의 분열은 계속되었다.이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는 오늘의 중국 대륙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966년 5월에서 76년10월에 걸쳐 중국에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문화대혁명은 정치적 성격을 띤 문화운동으로 '문혁'이라 줄여 부르기도 한다. 문혁은 그 발발과정부터, 경과, 종말이 거의 밝혀졌다. 한동안 중국인들은 이 역사적인 세월을 기억에서 되살려내는 것을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했었다. 당시 문혁의 중추세력이었던 10대중반의 홍위병(紅衛兵)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이제 중국의 각 조직 책임자급으로 성장해 있지만, 그들의 한때가 황폐했던 만큼 지도력의 위기감을 느낄정도로 큰 역사적 공백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 많은 인구가 정말 바보같이 휩쓸린 일종의 광풍을 10년간 지내며 중국은 황폐할대로 황폐해졌다. 중국의 온갖 역사적 유물-오래된 사원, 옛날 서적등등-은 불살라졌다. 교수란 직업은 멸시당하였고, 대학교육은 10년간 사라진다. 어른이 아이에게 수염을 뽑히는등 정상적인 국가운영 체제는 무너지고, 오직 모택동 일인의 새로운 가치체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2. 문화대혁명의 전개과정1965년 상해시 당위원회 서기였던 요문원(姚文元)은 북경시 부시장 오함(吳 )이 쓴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이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가 실각한 국방부장 팽덕회(彭德懷)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를 계기로 실권파의 권력기반이었던 북경시 당위원회와 삼가촌(三家村)그룹은 모택동 추종자들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결국 1966년 4월 북경 시장 팽진(彭眞)이 해임되고,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모택동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1966년 8월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백만인 집회에 모인 홍위병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 진출하여 모택동사상을 찬양하고 낡은 문화를 일소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교를 폐쇄하고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하였으며, 당의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전국 각지에서 실권파들이 장악한 권력을 무력으로 탈취하였다. 그러나 실권파들이 완강히 저항하고 홍위병에 내분이 발생하자 1967년 1월 모택동은 임표(林彪) 휘하의 인민해방군이 문화대혁명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인민해방군은 각지의 학교 ·공장 ·정부기관을 접수하였을 뿐 아니라 초기에 문화대혁명을 주도하였던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을 깊숙한 산골로 추방하였다. 혼미를 거듭하던 정국은 1968년 9월 전국 각지에 인민군대표, 홍위군대표, 당간부의 3자 결합으로 ‘혁명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진정국면으로 들어섰다.문화대혁명은 1969년 4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모택동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되고, 국방장관 임표가 후계자로 옹립됨으로써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1971년 임표가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를 당하고 모택동에게 충성을 바쳤던 군부 지도자들이 대거 숙청되자 많은 사람들은 문화대혁명이 모택동의 개인적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1973년 주은래(周恩來)의 추천으로 등소평이 권력에 복귀한 후부터 문화대혁명의 정신은 여러 측면에서 공격받기 시작하였다. 모택동을 지지하는 세력은 이데올로기 ·계급투쟁 ·평등주의 ·배외주의를 강조한 반면, 주은래와 덩샤오핑을 지지 세력은 경제성장 ·교육개혁 ·실용주의 외교노선을 주장하였다.말년에 모택동은 두 노선을 절충한 후계자를 물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1976년 9월 모택동이 사망하고, 화국봉(華國鋒)에 의해 모택동의 추종자인 4인방(四人幇:王洪文 ·張春橋 ·江靑 ·姚文元) 세력이 축출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977년 8월 제11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그 종결이 선포되었다.3. 문화대혁명의 결과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계급, 계급투쟁, 계속혁명'론에 입각하여 모택동 만년의 개인적 이념, 정념, 야망의 달성을 위해 모택동 개인 숭배를 최대한 활용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의 조직원칙이나 국가기구의 법질서를 억지로 짓밟고 강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현실에 불평불만을 품고있던 대중, 특히 젊은이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모택동의 호소에 대응하여 그 에너지를 폭발시킨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젊은이들의 행동은 권력투쟁에 이용되었으며 공식 발표만으로도 박해로 사망한자가 3만4,800명, 중상, 박해 당한자 74만 2,511명이라는 희생자(이는 1981년 1월 임표4인조재판의 기소장에 따른 것이다.)를 내면서 현상을 무엇하나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의 후퇴, 교육의 황폐, 문화의 파괴, 사회질서의 문란 등을 남긴 채로 끝났다. 공산당만 하더라도 당에 대한 불신감을 뿌리 깊게 남겼으며 게다가 모택동에 대한 개인 숭배라는 것까지 남겼다. 모택동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여러 조건에 의해 형성된 개인 숭배문제는 중국에서 일조일석에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남은채 정치체제 개혁과 민주화에 있어 최대의 장애가 되고 있다.그리고 대학은 부루주아 학술 권위의 상징이라고 해서 1966년 9월부터 학생 모집을 중지하였고 홍위병은 실권파로 지목된 당·정 기관의 간부, 대학교수, 작가를 심하게 규탄했다. 생산, 행정, 연구, 교육은 정체되었다. 지식분자는 '학술계의 부루주아 권위' '아홉번째의 기피인물'로 업신여겼으며 홍위병에 의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외국어로 된 책자는 구분 없이 소각되고 소유자 스스로가 추궁을 우려하여 처분했다. 문혁 기간동안 문화적 공백이 이루어 진 것이다. '사람의 혼을 흔들어 놓는다'고 했던 문화 대혁명기는 문화 유산의 대파괴, 정신의 황폐를 낳게 하였으며 부모 형제조차 믿지 못하는 불신의 10년이었고 공산당의 위신 또한 크게 흔들어 놓았다.4. 문화대혁명의 역사적 의미문화대혁명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아직 문화대혁명의 관련 당사자가 많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지금까지 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첫째, 권력쟁탈설이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권력을 내준 모택동은 한동안 정치일선에서 물려 났지만 유소기 등의 개혁파의 정책을 보고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권력을 쟁탈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중국정치의 특징은 정치와 아무 상관없는 문학을 가지고 정치투쟁으로 이용한 사례가 많다. 단순한 문화투쟁이지만 이면을 살펴보면 권력쟁탈이 깔려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둘째, 그때 당시의 국제 상황이다. 이념문제로 소련과 팽팽히 맞서고 있던 중국은 소련의 후루시초프 노선을 비판한다. 국제적 역학 관계상 소련의 영향력에 벗어나려고 했고 소련과 전혀 다른 대안의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마르크스, 레닌의 순수성을 지향하자는 의미에서 문화대혁명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3.12.16| 6페이지| 1,000원| 조회(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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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사] 미국의 남북전쟁 평가B괜찮아요
    Ⅰ.서론미국의 남북전쟁하면 바로 생각나는 게 노예제도와 링컨대통령이다. 남과북은 노예제도의 폐지문제를 가지고 싸웠으며 링컨은 노예제도의 폐지를 지지하는 착한 대통령이라는 관념이 어렸을 때부터 박혀있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대학에 들어오면서 전쟁의 원인이 노예제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링컨 대통령도 몰론 훌륭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착한 정책만을 실시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이쯤 되니 이제 미국의 남북전쟁이 어찌하여 발발하였고 도대체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리고 남북전쟁에 대해서 조사하면서 도서관과 인터넷 검색창에 '남북전쟁' 이라는 단어를 입력했을 때 미국의 남북전쟁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남북전쟁이 뜨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알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음에는 우리나라의 남북전쟁에 대해서 깊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국의 남북전쟁을 조사하였다.Ⅱ. 남북전쟁의 원인남북전쟁(南北戰爭)은 1861∼65년에 미합중국의 북부와 남부가 벌인 내전(內戰)으로, 1863년 연방제도와 민주주의의 유지를 강력히 주장한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하였고 4년에 걸친 격전 끝에 65년,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났다.이 거대한 사건은 매우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났다. 전쟁의원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남부 농장주들로부터 노예를 해방시키려는 기독교인들의 거룩한 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노예제도가 아무리 가혹했다고는 하지만 북부의 공장주들 역시 노동자들을 노예보다 더 낫게 대우하지는 않았으며, 그리고 남부에도 양심적인 노예주들이 많았다. 노예문제는 표면적이고 명분적인 이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남북전쟁의 근원적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노예제로 대변되는 남북간 생활방식의 근본적 차이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미국사회는 급속한 성장과 변화의 시기였다. 특히 이시기에 미국은 북부, 서부, 남부의 3지역으로 재편성되면서 각 지역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북부는 제1차 산업혁명으로 도시화, 산업화되는 가운데 보다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사회로 발전해 나갔다. 특히 1820년대부터 일어난 사회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공립학교 제도가 보편화됨으로써 교육이 발전하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서부 역시 이주와 개척이 활발한 가운데 소맥, 옥수수, 목재, 철광석, 납, 구리등을 지닌 미국의 곡창지대와 지하자원의 보고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였다. 자영농이 지배적으로 많았지만 서부는 공업화와 도시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남부는 북부와 서부와는 달리 도시화와 공업화의 길로 향하지 않았다. 이미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신생공화국 초기부터 정치적, 경제적인 위상을 지녔던 남부는 1792년 조면기의 발명과 더불어 면화생산에 있어서 세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부유한 농업지역으로 발전하여 갔다. 그리고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성장한 남부경제의 특수성은 노예제도의 폐지를 꿈조차 꿀 수 없게 만들었다.였다.이렇게 나라가 커지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북부의 생활양식이 남부를 압도하기 시작했으며 철도의 대부분이 북부에만 건설되었다. 또한 이민은 기반 잡기가 비교적 쉬운 북부와 서부에 집중되었고 노예들도 북부나 서부로 도망쳐나갔으며, 그도 모자라 북부가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남부의 생활기반을 흔들고 있었다.이상과 같은 요인들이 복잡하게 작용하는 가운데 형성된 남부백인들의 배타적인 지역주의는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찬양하는 신화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이 신화는 남부백인 전체를 결속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 결과 북부의 노예제도 폐지운동과 비난에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는 농장주들과 노예를 소유하지는 못했으나 불안감과 열세의식가운데 농장주 편에 가세한 대다수의 남부백인들은 힘을 모아 북부와 흑인이라는 적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Ⅲ. 남북전쟁의 전개양상1850년경에 이르면 남부와 북부간의 대립은 연방을 파괴할 정도로 첨예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를 전후한 일련의 사건들-텍사스독립과 연방가입을 둘러싼 대립, 멕시코와의 전쟁과 그에 따른 영토의 확장, 윌모트 단서조항이 가져온 남부와 북부의 대립, 캘리포니아 준주의 연방가입 문제를 둘러싼 남부와 북부의 의견의 차이, 노예제도 확산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건 공화당 창당, 도망노예인 드레드 스코트재판과 결과, 스토브 여사의 , 존 브라운의 봉기등-은 남부와 북부간의 적대감정을 더욱 부추기고 고조시켰다. 그리고 캔사스에서의 유혈사태와 존 부라운의 봉기는 이제는 더 이상 남부와 북부가 대화와 타협으로 그 대립을 풀어 나갈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1860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북부의 노예제도반대 입장을 대변하고 있던 아브라함 링컨이 당선되자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비롯하여 남부의 7주는 흑인의 수가 많은 주부터 차례로 연방에서 탈퇴하였다. 이들은 1861년 초에 알라바마의 몽고메리에 모여 새 정부를 창설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남부연합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제 한 나라안에 두 나라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1861년 3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링컨은 두 개의 나라로 분열된 미국을 다시 하나로 환원시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고심하였다. 그는 취임연설에서 남부와의 화해를 역설하고 남부인들에게 연방으로 복귀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의 취임 40일 만에 남부와 북부간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곧이어 버지니아, 아칸소, 테네시, 노스 캐롤라이나 4주가 연방을 탈퇴하여 남부연합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1861년 4월에 23개주의 북부와 11개주의 남부연합이 전쟁상태로 돌입하였다.전쟁을 시작하며 남부는 11개주에 그 중 350만은 흑인 노예인 900만여명의 인구, 미국전체의 34%인 7000마일의 수송능력, GNP의 25%를 가지고 있었으며 북부는 23개주에 전체 인구의 61%를 차지하는 2300만명의 인구, 전체의 66%인 20000마일의 수송능력 그리고, GNP의 75%를 가지고 있었고 물질적 자원이 풍부하였다. 그리고, 무기의 면에서 남부는 외국에 의존했던 것에 비해 전체 공장의 81%가 위치했던 북부는 무기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그리고, 군대에서는 남부는 육군이 우세했고 북부는 해군이 우세했는데 남부는 목화를 이용하여 영국의 도움을 얻으려고 시도하였다.1861년 4월에서 1865년 4월까지 만 5년간 전쟁이 지속되는데 북부 혹은 남부에 위치하면서도 상대방을 지원하는 주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전쟁은 남·북으로 갈라져서 이루어진다. 북부에서는 대통령으로 링컨이 있었고 사령관은 전쟁 동안 5회에 걸쳐 교체된다. 최초의 사령관은 남부 출신의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이었는데 그는 멕시코 전쟁의 영웅으로 남부 출신의 군벌을 형성했으나 전쟁발발시에 북군에 잔류한다. 그리고, 5번째 사령관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그랜트 장군(Ulysses Grant)는 후일 2회에 걸쳐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남부에서는 초기에 제퍼슨 데이비드 대통령이 총사령관은 겸임했으나 리 장군(Robert Lee)가 뒤를 이어 사령관이 되는데 그는 버지니아 출신으로 후에 그랜트에 항복하게 된다.전황은 초기에는 리 장군의 부대가 내륙전에서 우세를 보임에 따라 남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북군이 해안에서 우세를 차지하였고 서부와 제휴하여 50만의 의용군을 모집함에 따라 1863년을 고비로 북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1863년 1월 1일에 링컨은 62년 9월 22일에 했던 노예해방선언을 실행에 옮기는데 이 사건은 전쟁중인 북군에게 인도주의적인 위치를 부여했고 남부의 노예들은 이 사건으로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북부를 지원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863년 7월에는 결정적으로 전세가 바뀌는데 펜실바니아의 게티즈버그(Gettysberg)에서 대전투를 벌인 결과 북군이 승리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는 수많은 양군의 사상자가 생겼는데 링컨은 이 지역을 국립 묘지로 선언하고 전투 후 이곳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Gettysberg Adress,1863.11.19)'을 남긴다. 이 연설에서 링컨은 민주주의에 대한 유명한 정의를 남겼는데 그는 "The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arish from the earth."란 말을 남겼다. 1864년에 그랜트 장군은 남부의수도인 리치몬드를 함락시켰는데 1865년 4월 9일에 리 장군은 그랜트에게 항복한다. 이로서 만 5년간 지속된 전쟁은 끝이 나는데 희생자는 남군에서 26만, 북군에서 30만에 달했다.
    인문/어학| 2003.12.16| 4페이지| 1,000원| 조회(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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