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교육의 특징과 폐단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서구사회 특히 미국을 이끌고 있는 지배적 패러다임은 소위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개인주의 적이며, 시장의 효율성과 자유를 강조하는 사상이다.신자유주의자들은 한 사회의 기본 질서는 각 개인들의 집합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러한 개인들은 자신의 선호(選好)를 충분히 알고, 이를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계산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가정하여 전재하고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자들은 각 개인들이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만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식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사회의 공익(公益)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이러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은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작용된다. 그들은 교육이 더 이상 국가가 지배하는 공익영역이 아니라, 민간과 시장이 지배되는 사적 영역으로 이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교육도 산업이며, 상품이라는 것이다.신자유주의자들은 교육이 사적영역으로서의 시장경제화로 재 규명 된다면, 그동안 국가의 통제 속에 획일화 되었던 많은 문제점들이 자유화와 자율성의 재고로 발전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소비자 주권 또는 소비자의 선택권이 지금보다 훨씬 발달될 수 있으며, 그로인하여 결과적으로는 교육의 질이 향상될 것이라고 본다.신자유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공립학교 또는 공교육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첫째는 교육 관료조직의 공무원화에 따른 경직된 분위기가 학교교육 전반에 팽배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학교의 자율성이 심각하게 저해되고 있다는 것이다.둘째는 학교 간의 경쟁이 없는 상태가 되었으므로,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한 내부의 노력이 자생될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셋째는, 교육의 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필요와는 무관하게도, 공급자인 학교의 편의와 편익을 위해 일방적이고도 획일적인 교육서비스를 제공 받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점들의 해결책은 오로지 교육의 사적 영역화 즉 민영화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공립학교를 사립학교처럼 만듦으로서 단위학교의 자율성과 책무성을 강화할 수 있고, 학교간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여 교육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교육 소비자들에게 선택권을 부여하게 되어 필요에 맞는 교육을 서비스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몇 가지 현실적이며 논리적인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첫째는 교육의 자율성에 대한 그들의 확고한 믿음이다. 현실적으로 사립학교의 자율성은 소유주(이사장)나 학교장의 자율성이지 실질적 교육의 주체인 교사의 자율성이 아니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현재의 사립학교 법에 의하면 학부모나 학생은 사립학교를 통제할 수 있는 아무런 법적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하다.둘째는 교육 자율화에 따른 교육서비스 강화 가능성에 대한 근원적인 의구심이다.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이 만연해 있는 우리의 교육 풍토에서, 교육 소비자들인 학부모나 학생들의 학교 선택 기준은 당연히 대입 진학률(정확히는 서울 소재의 4년제 명문대학 진학률)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자율화에 따른 교육 서비스의 경쟁력 강화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심히 걱정스럽다 아니 할 수 없다. 분명 고급 입시학원화 되어갈 것이 자명한 사립학교의 모습이, (인성교육이 내포되어 있어야 하는)교육 서비스의 향상과는 반드시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오히려 인성교육은 등한시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한국 입시의 문제점과 이제는 전인평가의 입시로의 제안나는 지난날의 한국 교육에 대해서 지나치게 비판적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교육인 까닭도 있지만, 한국교육 반세기엔 공(功)도 있었고 과(過)도 있었으며 또 그나마 이 정도의 학교와 대학을 운영할 수 있는 것도 여러 후진국의 사정에 비하면 다행이라고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의 기회균등을 넓힌 초, 중등, 대학을 망라한 그간의 대대적인 양적 팽창 또한 이루기 쉬운 공은 아니었다.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연 비판적이 될 수밖에 없다. 우선 한국교육의 황폐상에 대한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원성과 호소가 너무 요란하다. 그것을 대변해서 신문들이 앞 다투어 한국교육을 고발하는 특집 연재기사를 싣고 있다. 확실히 한국교육은 어떤 극한점에 치닫듯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시정될 줄 모르는 황폐상, ‘열악상’을 보이고 있다.한국교육의 황폐상은 여러 견지에서 분류, 분석할 수 있을 것이지만, 특히 입학시험 대해 문제 삼아 보고자 한다.한국의 입시위주의 교육이 불러온 사회적 면을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면 몇 년 전 ‘시험이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살한 학생이 있었다.한국 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대학입시다 이제는 모든 입시가 대학입시 한 곳으로 압축되어 더 지독한 지옥이 된 것도 문제지만, 마치 압축된 공기일수록 더 멀리 터져 번지듯이, 그 ‘재해’가 전 교육에 넓게 번져 있는 것이 문제다. 고교에서 이루어서 학원이니 과외니 하여 입시준비를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일찌감치 중학교, 초등학교 때부터 ‘자율학습, 보충학습, 연습장, 참고서’ 등으로 서두른다. 심지어 취학 전 아이들까지도 사실은 시험문제 풀이 연습만 하는 상업성의 ‘지능개발’ ‘조기교육’ ‘속셈학원’으로 몰려 오히려 정말 지능개발과 조기교육은 차질을 겪고 있다.우리는 우선 입시가 왜 있으며 그런 온갖 재난을 수반하는 혹독한 입시준비 교육이 왜 생겼는지, 어떻게 보면 뻔한 일이겠지만, 그 연유와 까닭을 분서해 보아야겠다. 그것이 후에 그 해결방안을 논의할 때 전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험난한 대학입시가 있는 이유, 그리고 교육의 본연마저 일그러지게 하는 치열한 경쟁이 있는 이유는, 원천적으로 생각하면 아주 명료하다. 대학입시가 있는 이유는, 첫째, 교육열이 높아서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가려하고, 둘째, 그러나 대학의 입학정원에 한정이 있고, 셋째, 대학간, 학과 간 명성차 마저 크다는데 있다. 그리고 여기에 보태서 그 치열한 경쟁을 대비하는 입시준비 교육이 교육의 본질을 병들게 하고 황폐화하고 있는 이유로서 넷째, 대학입학 전형방법과, 다섯째, 교사, 부모, 학생들의 빗나간 교육관도 들지 않을 수 없다.특히나 우리 대학입시는 수치화의 맹신에 빠져 있다. 숫자, 수치로 표현된 것이면 아주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믿고, 그것을 개략치로 취급하거나 변형해서는 안되는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총점 400점짜리를 낙제 시키고 399점짜리를 급제시키는 것은 “절때” 안되는 일이고, 400점 동점짜리가 여럿이 생기면 그 속에서 또 다른 수치를 정해서 그것을 높은 자부터 뽑아야 직성이 풀린다. 가히 ‘수치의 신격화’다.입시와 입시교육의 재해를 해결하고 한국교육을 본연의 정도로 올려놓아야 한다고 그렇게 많은 부모들, 교사들이 외치는데도 그 해결의 길은 좀처럼 나서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는 종래의 합리화와 체념의 타성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긴 세월에 걸려도 그 길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우리가 그 동안 관례적으로 빠져든 타성부터 반성하고, 타성적으로 취해 온 전제 또는 기본가정을 가차없이 자체 재검토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그 첫 번째로 문제의식이다. 사회적으로 어떻게 하면 입시교육의 무서운 재해에 대한 문제의식을 체념과 불감증과 중독에서 벗어나서 현실적인 절박감으로 이어지게 하느냐가 그 해결을 찾는 길의 첫 번째 정책적 관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두 번째는 입시준비 교육을 정상교육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문제가 모든 문제를 우선하며 혹 그 해결에 수반되는 문제나 부작용에도 우선해야 한다는 결의를 포함해야 한다. 또 본래 교육이 먼저지 대학입시 합격이 먼저가 아니다. 우리 부모, 학교, 학생, 그리고 사회도 실은 이 아주 자명한 명제부터 거꾸로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공부는 공부하는 것이 본연이지 시험문제 풀이 연습이 공부는 아니다. 교육에서는 전인이 먼저지, 지식기억이 먼저가 아니다. 갈래길에 서게 되면 취해야 할 것은 전인의 방향이지 박식의 방향이 아니다. 시험, 고사, 검사, 측정에서는 타당도가 먼저지 객관도가 먼저도 아니고 전부도 아니다. 약간의 주관성이 낄 수밖에 없다 해도 취해야 할 방향은 타당도 쪽이다. 그것이 잔인한 입시 준비교육에서 아이들을 구제하는 길이라면 약간의 어려움과 부작용이 예상되더라도 우리는 정도인 ‘전인’과 ‘타당도’와 ‘주관적 방법’의 길을 택해야 한다.대학 입시를 제자리에 잡고 입시교육을 정상교육으로 전화하기 위해서는 전인적인 평가를 해야 한다면 그리고 전인평가는 부득이 주관적인 방법에 의존해야 한다면, 우리는 주관적인 방법에 필연적인 평가의 오차도 받아들여야 한다. 때문에 잠재적으로는 ‘불이익’을 보는 일부 수험자들이 잇을 수는 있다 해도, 그 일부의 희생마저 각오하면서 그 타당한 주관적 방법을 취한다는 본연에 대한 우선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타당한 방법 때문에 생기는 일부의 희생보다는 학교 교육 전체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의 그런 ‘일부의 희생’은 실은 객관식 고사에서도 똑같이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더욱 주관적이지만 타당한 쪽의 방법을 취해야 할 이유가 된다.우리는 입시와 입시교육 개혁을 위해 여러 방안을 구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안에 앞서, 이 나라의 입시와 입시교육 때문에 애처롭게 시달리는 아이들, 어두워지는 미래를 구하는 것이 한국교육에 관한 한 다른 웬만한 부차적인 손해와 희생에 앞서는 최급선, 최우선의 순위에 있는 문제라는 절박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한국의 거의 모든 정책수립의 병폐는 경제정책이건, 사회정책이건, 교육정책이건, 너무 성급하고 너무 좁게 단시야적이라는 것이다. 해묵은 뿌리가 깊고 넓게 퍼져 있는 입시와 입시주비 교육의 문제에는 더구나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앞에서도 누누이 언급했지만 우리의 문제는 대학입시제도만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이 물론 교육관의 중요한 요인이기는 하지만 이 나라의 교육열, 대학차, 교육관의 문제 등에 다각적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희한한 정책이라도 만사를 일조일석에 바꾸어 놓지는 못할 것도 뻔하다. 그렇다고 불가능일고 포기, 체념하는 것도 단시이다. 대학입시제도 개선 자체도 하루아침에는 어렵다. 예컨대 대학입시를 본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완전히 대학의 자율에 맡긴다면 많은 대학이 그 개선방안을 연구, 홍보, 설득하는데에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 입시와 입시준비 교육 문제는 대학과 고등학교만의 문제도 아니다. 따라서 대학교 교수, 고교 교사만을 대상으로 그 개혁의 의지를 묻고 그 방향 탐색을 종용하는 정책만으로는 미흡하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집단. 특히 학부모 집단. 교사 집단. 교과학자 그리고 ‘입시산업’집단에도 어떤 개선의 의지를 묻고 부추기는 정책의 합성이 요망된다.따라서 이제는 수능시험이라는 대입시험에서 전인평가로 바뀌어야 할 때이다.
교육기회가 평등하면 사회가 평등해질까?식민지 경험과 남북분단(전쟁)의 경험을 통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사회적 계급이 급속도로 붕괴되어가는 것을 경험한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결정짓는 유일무이한 가치이자 수단으로서 우상화 되어왔다.하지만 해방이후 6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성숙기에 들어선 한국사회에서 교육을 통한 급격한 신분상승의 기회가 상당히 줄어들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강화되리라는 예상을 감히 해본다.교육 기회가 평등하면 사회는 평등해 진다. 이는 평등화론을 따르는 것으로 개인의 능력에 의해 사회적 계층이 결정된다는 능력주의를 확신하며, 갈등주의적 시각을 불신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할 조건이 있으니, 바로 끊임없는 교육개혁과 제도의 보완이 그것이다.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는 한국사회에서 평등은 곧 기회의 평등을 말한다. 때문에 평등한 사회라 일컬어짐은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 있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사회가 성숙되어 가고, 시스템이 발달되어 가면서, 각 개인의 능력을 능가하는 환경적 조건들이 탄생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적 조건들의 대부분은 부모의 직업이나 재산과 같은 계층적 속성을 띄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부모의 계층적 속성이 개인의 능력을 한정짓고 오히려 결정짓는 역전 현상이 이제 우리사회에도 고착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이는 장구한 인간의 역사로 보았을 때, 지극히 일반적이고 필연적인 사회의 진행방향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인류의 바른 진행방향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결국 역사의 반동은 그러한 계급적 갈등과 모순에서 비롯되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결국 문제는 교육에 대한 기회 즉 접근성을 얼마만큼 부모의 계층적 속성에 무관하도록 사회 내지는 국가가 이를 뒷받침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서울대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을 때, 서울대의 신입생 중 상당수가 강남에 거주하는 중상층 이상의 부모를 두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현실이다. 2001학년도 서울대 신입생 아버지 직업분포와 일반적인 직업분포 비교 (단위: %)관리직전문직사무직서비스판매직농어업숙련노동자기능, 기계, 조작, 조립, 단수노무직서울대 2001학년도신입생 아버지 직업분포28.024.816.515.015.92000년도 일반적인 직업분포18.711.223.910.236.0- 서울대학교 학생생활연구소(2001), 2001학년도 서울대학교 신입생 특성조사 보고서, 2001년 7월-통계청, 직업별 취업자, 통계DB(KOSIS) 온라인통계간행물 경제활동인구월보 중 7-1번, www.nso.go.kr/kosisdb- 관리직: 기업체 경영주(5인 이상 고용), 기업체 간부(부장 이상), 고급공무원(중앙관서 과장 이상), 사회단체 간부, 군인(영관급 이상), 경찰(경정 이상) 등- 전문직: 의사, 약사, 대학교수, 변호사, 판사, 검사, 회계사, 언론인, 방송인, 예술인, 종교인, 예술인, 교사, 간호원 등
교과, 학문, 경험중심교육과정 비교와 논평서 론분자생명과학대학원을 때려 치고 교육대학원으로 바꾸게 된 계기가 미국 하버드대학의 부설 유치원에서 참관수업을 받고 나서 였다.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였으며 그것이 교육학 수업을 받고 나서 듀이의 실험학교 맥락이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유치원의 교육은 많은 것을 경험해 보게 하고 특히 아이가 흥미 있어 하는 부분을 선생님이 이끌어 내어 가르치고 있었다. 참관수업 중 몇 가지 비디오를 보았는데 물론 언어의 장벽이 있었지만 그 영상물은 한 아동의 하버드 부설 학교에서의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성장을 담고 있었다. 그 여자 아이는 유아기 때 인형놀이를 좋아했고 유치원 선생님은 아이와 인형놀이를 같이 해 주었다. 아이는 인형의 옷을 갈아입히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유치원을 졸업할 때에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인형의 옷을 만들어 발표를 하였다. 초등학교에서는 디자인과 색감을 배우며 자신의 옷을 스케치하기 시작했고 졸업 발표 때는 자신이 만든 옷을 선보였다. 중학교에서는 옷을 좀 더 돋보일 수 있도록 장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선생님과 상의를 했고 졸업 발표 때에는 옷에 장식을 더해 주었고 고등학교 때에는 모자나 브롯지 가방 등에 관심을 갖으면서 졸업발표에서 유명 디자이너에 버금가는 깃털 장식 모자를 발표했다.이 여학생뿐만 아니라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 악기를 다룰 줄 알게 되고 작곡을 하게 되는 성정과정도 있었다. 이 학교의 특징은 졸업을 할 때 꼭 졸업 발표회를 한다는 것인데 하나 같이 학생이 관심 있어 하는 부분에서 점차 발전해 가면서 성장함을 볼 수 있었다. 아이의 흥미와 적절한 선생님의 교육이 빗어낸 결과가 아닌가 싶다.많은 학자들이 여러 기준을 가지고 교육과정의 유형을 제시하고 있는데, 나는 교육과정의 중심은 학생에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다. 따라서 경험중심 교육과정이 가지고 있는 체계적인 학습이 안된다는 단점을 보안한다면 현 21세기의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시대에 다른 여타의 교과중심 학문중심 있게 된다. 둘째, 교사가 주도하는 수업 유형이 되며 학습자 개인의 의견이나 문제 또는 욕구 등은 수업에 반영되기 어렵다. 학생은 교과서를 중심으로 교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수업이 교사에 의해 통제된다. 셋째, 일률적인 교재에 의하여 그 교과가 규정하는 영역 안에서 학습활동이 전개된다. 이러한 점 때문에 교과중심 교육과정은 교육의 획일화, 기계화를 초래하기 쉬운 측면이 있다.교과중심 교육과정의 장점은 객관성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구체적인 점을 들면,첫째, 논리적으로 조직된 지식의 체계는 경험을 해석하는데 유효하다는 점이다. 즉 이전에 발견된 법칙과 원리의 이해가 새로운 원리의 이해나 새로운 경험을 해석하고 조직하는데 유효하다는 것이다. 또한 각 개인의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둘째, 그 조직이 단순하고 누구나 용이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교육과정 구성에 있어서 교사는 교과서에 준하기 때문에 그다지 곤란한 연구가 필요하지 않다. 또 학생의 입장에서도 교과서에 의존하게 되므로 학습할 모든 영역이 명료하다. 이러한 단순성과 용이성은 교과중심 교육과정이 여러 가지 지적을 받으면서도 오랫동안 교사들의 호응을 얻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셋째, 학습결과의 평가가 용이하다는 것이다. 즉 교과서에 의하여 학습 내용이 전반적으로 예상되므로 학습 결과의 평가는 이미 부여된 교과가 어느 정도 잘 이해되었느냐 하는 점에 대체로 국한된다.넷째, 교사와 학생 및 학부형들에게 최대의 안정감을 준다. 왜냐하면 이 유형은 일반적으로 교사나 학부형에게 오랫동안 익숙해 있었고 또 상급학교의 입학요건이 교과본위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나아가 교육과정의 중앙집권적 통제가 용이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교사는 자가가 가르쳐야 할 교재에 정통만 하면 되고 학생도 교재에 쓴 대로 학습하면 되기 때문에 각자가 하여야할 일이 미리부터 분명히 정해져 있는 점도 안정감을 갖게 되는 이유가 된다.교과중심 교육과정의 단점은첫째, 단편적이며 분과적인 교과조직이므 가져야 하며, 교실에서 교과서만 가지고 수업하는 방법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활동과 지역사회와 관계되는 자료나 시설을 직접, 간접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2. 학문중심 교육과정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모든 분야에 걸쳐 지식, 기술은 폭발적으로 증가함으로서 모든 지식을 교육과정 속에서 조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이전과 같은 암기위주의 주입식 교육으로는 평생을 두고 학습해도 모든 지식을 배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학교교육은 모든 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나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나 원리를 정선하여 적은 양의 지식으로 활용범위를 극대화할 수 있는 생산적인 교육이 요청되게 되었다. 이 교육과정 프로젝트가 기울인 역점은 교육과정에 포함될 교과내용의 선정에서 보다 적절한 기분을 찾아내고 그것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학문마다 다른 구조와 학문에서 지식을 발전하고 검증하는 독특한 과정들을 교육과정에 관한 문제의 접근방법으로 삼게 되었다.학문중심 교육과정에서는 ‘학문탐구과정의 조직’으로 정의된다. 학문중심교육과정에서는 학문의 내용과 탐구과정이 교육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용인이 된다. 그러나 교과중심 교육과정 이론이 비판받는 것처럼 학문적인 지식을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의 내용과 탐구과정이 학생에게 학습되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형태로 번역되지 않으면 안된다. 학문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교육과정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각 학문의 성격을 밝히는 일과 그것을 학생들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번역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일은 사실상 밀접히 관련된 일이다.학문중심 교육과정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그 특색은 교육과정을 현대화하자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의 내용과 방법의 근본적인 개혁을 의미하며, 모든 학생들의 창조적 사고의 싹을 찾아내어 그것을 남김없이 개발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교과중심 교육과정과 경험중심 교육과정을 학문중심 교육과정과 비교해용으로 선정하여 교육과정을 구성하기 때문에 능률적이고 질 높은 교육이 가능하다.둘째, 기본개념을 학습하게 되므로 그곳에서 얻어진 지식은 다른 사태에 잘 전이되고 또 생성력이 있어 그것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셋째, 학문의 탐구방법을 체득할 수 있다. 학문중심 교육과정에서는 발견과 탐구의 방법으로는 학습하게 되므로 그곳에서 체득한 방법이 다른 사태에 잘 응용되므로 창의적 활동이 가능하다.넷째, 내적 동기유발의 방법을 교수에서 사용하므로 학문자체에 대하여 희열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즉각적인 보상보다 연체보상을 갖게 된다.학문중심 교육과정의 단점을 학자들의 말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King과 Brownell이 쓴 ‘Curriculum and the Disciplines of Knowledge' (1966)에서 첫째, 지식을 가르치는 것과 ’덕‘을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지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기를 수는 없다. 둘째, 오늘날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 문제는 각각 독립된 ’학문‘으로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지식의 구조를 가르친 결과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각 학문에 내재해 있는 지식의 구조는 학생이 배우기에는 너무 어렵다. ’일반교육‘을 위해서는 학문의 구별 없이 전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넷째, 교육은 사회에서 직접 유용한 ’항상적 생활사태‘ 또는 실재적인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지식의 구조는 실생활에 별로 쓸모가 없다. )이영덕은 ① 단절된 교과목 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많으며 그들 교과간의 상호 통합성이 상실된다. ② 교육내용의 선택문제와 학습 가능성의 기준설정이 미비되어 있다. ③인간성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인간의 지적 능력의 개발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고 지적하고 있다.J.L. Goodlad는 ‘학문중심 교육과정에서는 그 내용을 학생이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인가의 문제보다 학생이 어느 나이에 무엇을 배울 다양한 의미의 체험을 시키는데 중점을 둔다.⑥지능이나 태도를 다른 교과와 분리하여 가르치지 않고 보다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경험의 일환으로 가르친다.⑦교재와 결부된 교수방법에 주력하지 않고 학습자의 학습방법에 따르도록 노력한다.⑧모든 학생에게 일률적으로 하습을 시키지 않고 학생들의 개인차를 인정하여 가르친다.⑨일정한 틀에 맞추지 않고 학생 개개의 창의성을 육성한다.⑩교육을 수업이라 하지 않고 끊임없는 성장의 과정으로 본다.경험중심 교육과정의 특징은첫째, 학생들의 흥미와 필요를 토대로 학습내용을 구성하고 학생들의 자발적 활동을 촉구한다. 따라서 경험중심 교육과정에서는 학생들의 흥미나 요구, 필요가 무엇인가를 파악하여 그러한 것을 충족시키는 활동을 통하여 교수목표를 달성하도록 계획하여야 한다.둘째, ?Learning by Doing?라는 경험과정 적용원칙은 학습심리의 원리에 합치되므로 활발한 학습활동이 전개될 수 있다. 학생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직접 참여하기 때문에 학습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셋째, 실제적인 생활의 장을 부여하고 생활문제와 결부되는 학습활동을 영위할 수 있으므로 생활문제를 올바르고 종합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그러나 학문중심교육과정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변화하는 미래에 적응하는 능력을 생각지 않고 현재의 문제해결에 주력하므로 현재 지향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넷째, 민주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창의성, 사회성, 관용정신, 반성적 사고방식 등의 능력을 기르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공동문제를 가지고 공동으로 해결하는 학습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러한 학습과정에서 위와 같은 민주시민으로서의 태도와 정신을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다섯째, 수업진행에 있어 학습현장에서 학생과 교사와의 공동계획을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학습형태가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경험중심 교육과정의 장점첫째, 학생의 흥미나 필요를 토대로 구성되는 교육과정이므로 학생들의 자발적인 활동을 촉진한다.둘째 ?Lea다.
재생산론의 관점에서 본한국교육의 현실왜 하층계급에게는 시간개념이 없고, 중간계급은 만성피로 증후군으로 시달리는데, 상류계급만 여가와 여유를 즐길 수 있는가? 왜 감정의 풍요로움과 지성의 향기를 사회 전체가 공유할 수 없는가?이제 문화는 일탈이나 위반의 계기 또는 대동단결의 장이 아니라 계급투쟁-분류투쟁의 가장 격렬하고 미세한 장이 되었다.- 부르디외, 최종철 역, ?구별짓기?, 1996. 下권 표지에서재생산이론이란알뛰세르(Althusser, L.)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속하는 학교, 부르디외(Bourdieu, P.)의 문화자본에 의한 상징적 폭력의 기제인 학교, 보울스와 진티스의 차별적 사회화와 대응이론(또는 상응이론)에서의 학교 등 크게 세 가지 논의로 이루어진 재생산이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간 불평등이 학교교육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성적과 학력의 차이를 낳고, 이것이 다시 사회적 지위 및 경제적 부 등 계급의 불평등과 연결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즉, 공정한 것처럼 보이는 학교가 사실은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기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재생산이론은 첫째, 50?60년대의 주된 관점이었던 구조기능주의와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등장한 신교육사회학을 비판하면서 모습을 드러낸다. 먼저 구조기능주의의 관점은 한국인 모두가 지니고 있는 믿음, 즉 ‘학교는 공정하며 위대한 평등 장치이다’, ‘학교를 통해 계층상승이 가능하다’, ‘학교는 사회화와 선발?배치의 기제이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관점 하에 50년대 이후 대부분의 국가, 특히 제3세계는 학교를 확대하는데 대대적인 투자를 하게 된다. 한편 영국 노동당 정부의 교육개혁이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교육불평등의 원인을 학교 내부에서 찾으려고 하는 신교육사회학이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등장하여 학교의 교육과정 및 교과지식, 교사?학생의 상호관계 속에 숨겨져 있는 불평등의 요소를 탐구하게 된다. 하지만 구조기능주의의 믿음은 현실화되지 못했고, 신교육사회학의 노력은 스스로의 반성처럼 ‘구조주의나 대안 모색의 어려움 등은 이론의 맹점이라기보다는 관심 영역의 차이로 보아야 한다. 사회구조에 의한 학교의 불평등을 모색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조주의의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구조주의라서 행위에는 약하다’, ‘인간과 학교를 수동적으로 본다’ 등의 문제제기는 재생산이론의 관심 영역에서는 과도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재생산이론에서도 대안모색과 관련한 인간과 학교의 노력이 논의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그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 하나의 제언 같은 성격을 띠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행위에는 약하다’나 ‘수동적이다’는 재생산이론에 대한 비판조차 구조와 행위를 변증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대 행위의 이분법적이고 대립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재생산이론 이후 등장하는 윌리스, 애플, 지루 등의 논의는 재생산이론을 부정하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이론이 미처 살펴보지 못한 부분(행위의 측면에서)을 상호 보완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이런 재생산이론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계급이 지니고 있는 자본은 차이가 있다. 경제자본(돈), 문화자본(학력, 문화적 소양) 사회자본(부모의 인맥, 관심과 배려)의 차이가 존재하며, 이것이 자녀의 성적과 학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 학교가 지니고 있는 계급적 편향(문화자본이든 차별적 사회화든) 및 서열구조와 학교 이후의 노동시장이 지니고 있는 서열구조와 차별이 관계를 맺는다. 그러면서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아닌 다른 요인으로 인해 학생의 성적과 학력이 결정되고, 당연히 보다 나은 사회적 지위와 부(부모의 그것과 흡사하거나 한 단계 높은)를 획득하게 된다. 그렇게 재생산이 이루어진다.한국의 모습 1. 넘쳐나는 대학생의 명암요즘은 흔해 빠진게 대학생이다. 이것을 부모세대에서는 자신들보다 학력이 높아졌으니 당연히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것으로 받아들인다. 불행히도 대학생이 많아진 것이 사회 버지 직업이 고소득 화이트칼라 계층인 경우는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생산직인 경우는 감소하였다. 더구나 부모 세대의 관리직?전문직이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18.7%인데 비해, 2001년 신입생 아버지의 동일 직업은 서울대 신입생 아버지 직업분포 중 52.8%나 된다(표). 고급공무원이나 기업체 간부이상 되는 부모의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비율보다 거의 3배 정도 많이 서울대에 입학한 셈이다. 또한 지역별로 볼 때, 2001년 서울출신 신입생이 전체 신입생 중 절반에 가깝고(47.3%), 광역시까지 확대하면 77.%에 육박한다. 그리고 2000년 서울출신 신입생 중 44.6%가 서초?강남?송파 등 일명 부자동네 출신이다. 결국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이젠 돈 잘 버는 고학력 부모와 함께 대도시 부자동네에 사는 것이 서울대 가는데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2001학년도 서울대 신입생 아버지 직업분포와 일반적인 직업분포 비교 (단위: %)관리직전문직사무직서비스판매직농어업숙련노동자기능, 기계, 조작, 조립, 단수노무직서울대 2001학년도신입생 아버지 직업분포28.024.816.515.015.92000년도 일반적인 직업분포18.711.223.910.236.0- 서울대학교 학생생활연구소(2001), 2001학년도 서울대학교 신입생 특성조사 보고서, 2001년 7월-통계청, 직업별 취업자, 통계DB(KOSIS) 온라인통계간행물 경제활동인구월보 중 7-1번, www.nso.go.kr/kosisdb- 관리직: 기업체 경영주(5인 이상 고용), 기업체 간부(부장 이상), 고급공무원(중앙관서 과장 이상), 사회단체 간부, 군인(영관급 이상), 경찰(경정 이상) 등- 전문직: 의사, 약사, 대학교수, 변호사, 판사, 검사, 회계사, 언론인, 방송인, 예술인, 종교인, 예술인, 교사, 간호원 등한편 서울대에서 눈을 돌려 우리 주변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의미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지방의 대학이나 2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 중 잘 사는 애들이 과연 서울의 일류대와 비슷한 비율일까? 내면서 적게 받도록 되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잘못된 조세제도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복지시스템의 열악함이다. 교육, 의료, 주택, 문화 등의 사회적 기본권의 주요 영역은 언제나 국가 재정지출의 마지막 순위가 되었고, 그 결과 이 영역들은 개인의 힘에 의해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월 200만원을 받아도 이것저것 제하고 내고 여기저기 저축하고 나면 생활비는 언제나 빠듯했다. 거기다 경제개발의 명목으로 계속되는 통화량 증가는 물가상승만 부추겼다. 이것은 사회복지시스템 또는 사회안전망을 국가가 마땅히 구축해야 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시혜적 차원에서 접근한 결과이다.그러다 보니 뼈빠지게 더 일하면서 신분상승을 꿈꾸게 된다. 이렇게 ‘잘 살아보자’는 욕구는 출구를 찾게 되고, 자그마한 출구라도 눈에 띄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달려들어 병목현상을 초래했는데, 그것이 학교였다. 학교는 적어도 공정한 공간으로 가난한 집 아이라도 열심히 노력하고 부모가 물심양면 뒷바라지하면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를 팔든 땅을 팔든 아이를 다그치든 학교에서 성공만 하면 번듯한 직업, 경제적 부, 높은 사회적 지위, 탄탄한 인맥, 그리고 가족의 안녕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30~40대 중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서 비판적 사고, 공동체 정서, 저항의 실천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열이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사회안전망의 부재, 학력?직업간 임금격차, 성공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졸자답게 학력(문화자본)의 힘을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출구로서의 학교는 그동안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다른 계급보다는 못하지만 노동계급이나 농민의 아들 딸들이 실제로 학교에서 성공했고 신분상승을 이루었다. 물론 이것은 한국사회의 변동과 관련이 있다. 봉건사회를 붕괴시키고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급격한 산업화?근대화의 과정에서 많은 근대적 영역과 직업(국가관료, 기업의 중간관리층, 전문직 등)이 등장했고, 노동계급이나 농민의 아들 딸들 중 수에만 신경을 쓰고 교육기회의 격차는 등한시하여 앞서 언급한 대학생 증가의 성격처럼 교육기회의 확대가 출신 가정배경별 교육기회의 균등화로 연결되지 못했다.그러면서 95년에는 ‘5?31 교육개혁안’으로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의 집대성판을 만들었고, IMF 관리체제 속에서는 사회 전체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고전적 자유주의, 수정자유주의,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세 형태 중 마지막인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계급타협을 위해 노동계급에게 일정정도 양보했던 부문(임금, 사회복지 등)에 대한 재정투자를 삭감하고 자본의 운동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 자유로운 자본축적을 위해서는 ‘작고’, 자본축적에 방해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강한’ 정부가 등장한 것이다. 당연히 있으니 못한 사회안전망은 점점 더 부실해질 수밖에 없으며, 가진 자는 더 가지고 중산층은 몰락하고 못 가진 자는 더 못 가지는 ‘20 대 80의 사회’가 나타나게 된다. 흔히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국가로 선진산업국은 미국을, 개발도상국은 칠레를 드는데, 80년대 이후 순수한 신자유주의의 모델에 가장 근접한 개혁을 수행한 두 국가는 모두 심각한 사회불평등 수준을 보이고 있다.이런 사회에서는 학교에서의 성공에 대한 자본의 영향력이 커질 수 밖에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좋은 성적이나 높은 학력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가정의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이라는 것이 그 동안의 교육사회학 연구 결과였다. 따라서 학교가 공정하기 위해서는 학교와 가정의 사회경제적 지위(계급변인) 사이의 관계를 최소화시켜야 한다. 서구에서 교육의 평등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무상의무교육이나 단선형 학제, 평준화, 역차별 정책(보상교육) 등을 차례대로 시행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고, 한국의 경우에는 공교육 우위와 평준화가 부족하나마 뜻하지 않게 그것을 담당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조금씩 나타나면서 학교와 계급변인 사이의 연결을 막는 방패는 점차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그 결과 지금은 학교에서 성공하는 데에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