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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역사]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대응 방안
    급변하는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빠른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한다. 개인이 있기 때문에 나라가 있고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국에 대한 정체성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각 국은 세계에서 자국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국에 대한 긍지를 높이고 자국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세계에 변화하고 대응해나간다. 일본이 지금 하고 있는 교과서 문제도 그렇다. 일본은 자국에 대한 애국심을 높이고 긍지를 키우겠다는 신념하에 역사를 자국 중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새 교과서가 문제되는 것은 바른 역사가 아닌 왜곡된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저는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해서 우선 이러한 왜곡 문제를 만들어 낸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단체를 알아보고, 다른 개정 교과서와는 다른 후소샤판이 무엇인지, 왜 교과서 문제가 일본에서 발생되었는지에 대해 기술하고, 우리는 앞으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글을 적을까 한다.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는 2001년 2월 말경 일제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아시아국가들에 대한 가해행위를 은폐하고자 한 중학교용 역사교과서 8종 이 문부성의 검정을 통과하면서부터 화제에 오르기 시작했다.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만든 단체는 철저한 황국·식민사관으로 무장되어 있는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학자들이 중심이 된 이란 단체이다. 특히 이 단체에서 만든 후소샤판 중학교 사회과 역사 교과서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은 지난 1997년 1월 도쿄대 후지오카 노부카쓰 교수와 전기통신대 니시오 간지교수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이다. 이들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 사실을 중학교 교과서에 담는 것은 일본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역사교과서에 난징 대학살과 종군위안부 문제 등은 삭제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겼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후소샤를 출판사로 정해 자신들만의 사관을 담은 역사교과서를 편집했다. 교과서를 만드는데 있어서 동일한 주제라도 교과서 저자들의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출판사별로도 서술의 차이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측에서 검정을 신청하여 합격한 후쇼샤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철저하게 일본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는 반면에 일본과 관련된 다른 나라의 역사는 부정적으로 기술하거나 일본에게 불리한 내용의 역사적 사실은 아예 삭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와 민간단체 등에서 성명을 통해 왜곡된 역사 교과서의 시정을 요구하고 있으며, 주변국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규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면 이처럼 일본 내에서도 규탄의 목소리가 커져 가는 상황 속에서 일본은 왜 역사를 왜곡하려 하는 것일까? 먼저 그것은 역사가 가지는 힘 때문이다. 역사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 마치 우리가 선조가 남긴 좋은 예는 따르려 하고, 좋지 못한 예는 지양하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역사를 왜곡해서라도 후세 사람들에게 일본의 좋은 면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또한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이 재발하는 원인은 일찍이 일본과 한국 두 나라의 입장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흥선대원군 때 일본 사신을 투옥하고 외교문서를 찢어버린 강경책 때문에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일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이에 대처하는 한국정부의 애매한 눈치보기식 대응이다. 이런 일만 생기면 주한일본대사를 불러서 “왜 그러느냐” 고 한마디로 대처하려는 안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재편 움직임이 발생하게 된 또 다른 이유로 제 2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인 미국이 일본의 전쟁책임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범처리가 불충분한 가운데 냉전을 맞아 일본제국주의의 과거청산이라는 과제는 흐지부지 되고 만 것이다. 일본과 같은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독일은 어떠한가? 독일은 주변 피해당사국에 완벽할 정도로 정신적, 물질적 배상을 했다. 독일 역사 교과서에 전쟁범죄의 책임을 명기하고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지금까지 판매를 금지할 정도로 역사교육에 철저했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후손들에게 알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죄하고 무릎을 꿇었다. “독일인인 것이 자랑스럽다” 는 말이 나오자 “기쁘고 고마울 순 있어도 자랑스러울 수는 없다” 고 제동을 거는 대통령이 있고, 틈만 나면 자기들 때문에 희생된 외국인들의 무덤 앞에 헌화하고 용서를 구하는 총리가 있기에 오늘의 독일이 있는 것이다. 이는 전쟁 범죄를 한사코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일본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어학| 2005.06.10| 2페이지| 1,000원| 조회(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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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진주성을 다녀와서(문화재 답사기) 평가D별로예요
    매주 월요일 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할 때마다 교수님의 열정적이어서 약간은 허스키한 목소리에 빠져 맨 앞자리에 앉아 노트에 글자를 끄적거리면서 가끔은 졸기도 하면서 향토사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번 답사 과제물은 24년 동안 경남지역에 살면서 우리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막상 과제물을 받았을 땐 어디로 답사를 가야하나...라는 고민을 할 만큼 향토사에 관심이 없었던 나에겐 좋은 경험이 되었다.마산과는 가까운 진주라는 도시는 어릴 때 삼촌댁을 방문하면서 나에겐 익숙한 곳이었다. 진주는 문화 관광의 도시다, 혹은 교육의 도시다 라는 말을 나 자신도 그렇게 하고 또한 많이 들어 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말고도 진주라는 곳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을 때 또한 외부의 관광객이 진주라는 도시에 대해 물어봤을 때 교수님께서 마산을 방문했던 일본 문화공연단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얼마만큼 알고 대답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니 너무나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진주성으로 답사를 가야겠다고 계획을 잡은 당일 날 아침, 마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것 같이 흐렸다. 하지만 사나이가 칼을 한번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진주로 향했다. 다행히 진주의 하늘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햇빛이 쨍쨍 비추며 완연한 봄 날씨였다. 오전 9시경 진주성에 도착하여 입장료 1000원을 내고, 답사를 한다하기 보단 날씨좋은날 카메라 하나들고 소풍을 간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성문을 통과했다.진주성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간 곳은 촉석루였다.촉석루를 소개한 글에 의하면, 강 가운데 돌이 오뚝 오뚝 솟아있다 하여 붙인 "촉석루"는 진주성의 대표적인 명승지로서 전쟁 발발 시에는 주장이 병졸을 지휘하던 장소로 쓰였으며 평소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과거시험을 보던 장소로 이용됐다촉석루는 장원루 또는 남장대라고도 부르며,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지이다. 진주성 남쪽 성벽 위에 우뚝하여 웅장한 위풍은 진주성의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고려 고종28년 진주목사 김지대가 창건하고, 충숙왕 9년 목사 안진이 재건하였다. 우왕5년에는 해구의 침략으로 불탄 것을, 조선조 태종13년(1413)에 목사 권충이 중건하였고, 성종22년에는 목사 경임이, 선조16년(1583)에는 목사 신점이 중수하였다. 선조26년(1593)에는 왜적의 침략으로, 진주성이 함락되는 와중에 또 불탄 것을, 광해군10년(1618)에 병사 남이흥이 중건하였다. 경종4년(1724)에는 병사 이태망이 중수하였고, 1950년 6.25전쟁으로 또 불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중건하였다. 하륜의 「촉석루기」를 비롯, 많은 시인묵객의 시서화가 오늘에 전한다.신발을 벗고 촉석루에 올라서 보니 과연 영남 제일의 명승지답게 그 장관은 일상의 스트레스로 꽉 막힌 내 가슴을 뻥 뚫어 주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진주의 남강은 저 멀리 보이는 오리 페달 보트와 어울려 너무나도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다음엔 꼭 여자친구와 놀러와서 보트를 타고싶게 만드는 그런 풍경이었다.다음으로 간 곳은 의기사, 논개 영정을 모신 사당이었다. 왠지 모를 엄숙한 분위기에 어깨가 움츠러들어 향하나를 피워 올리고는 절을 하고 나왔다.요즘 매스컴의 화두로 떠올라 이슈가 되고있는 논개 영정 문제로 현재는 의기사 참배가 통제되었다는데, 그 전에 참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하고 또한 논개가 그 옛날 화장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영정에 있는 것처럼 참 예뻤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논개 사당을 뒤로하고 향한 곳은 의암이 있는 의암사적비...촉석루에서 남강 쪽으로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아래에 작은 섬처럼 떠 있는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뛰어들었던 의암이다. 의암은 윗면의 크기가 2.65m ×3.3m로 평평하다. 의암은 본디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이라 하였는데, 논개의 충절을 기려 의리를 세운 바위라는 뜻으로 의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이 의암은 조금씩 움직여서 촉석루 쪽 절벽에 들러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는데, 절벽에 와 닿으면 나라에 큰 재앙이 난다는 전설이 있다. 내가 답사를 간 5월엔 뛰지 않고도 충분히 건널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와 닿아 있었는데, 나라에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된다.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현대식 조형물이 보이는 광장에 들어서니, 김시민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각과 함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진주시가 제작한 '호국의 종'이 자리하고 있었고 광장 위쪽으로 거대한 현대식 조형물이 세워져있었다.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라 명명된 이 조형물은 왜적의 침략에 순국한 충혼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된 단으로 왜란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부조로 담고 있다.'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있는 광장에서 내려오는 계단 양쪽엔 이름 모를 붉은 꽃들이 만발해서 마치 순국 혼들의 넋이 왜란당시의 투혼을 화색을 통해 보여주는 것 같았다.광장을 내려와 길게 이어져있는 예쁜 길 오른편으로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있고, 왼쪽으로는 돌담이 쌓여있어 문화재가 아닌 연인의 데이트 코스로 더 안성맞춤 인 곳이었다. 담 옆으로 나있는 쪽문으로 들어가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있는 쌍충사적비가 있다.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국한 제말 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을 기린 비로써 1792년 촉석루 옆에 쌍충각을 지어 비석을 세웠는데, 일제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현재 자리로 옮겨 세웠다. 비석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으로 이수는 용 2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엉켜 여의보주를 물고 있는 모양이며 아랫부분에 4개의 국화무늬를 새겨넣었다. 귀부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두 눈을 돌출시켜 강조하였다. 비문은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서유린이 지었다고한다. 쌍충사적비는 논개 영정을 모신 의기사 뒤편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협소한 공간에 비석 하나만 달랑 세워져 있어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을 것 같아 외로워 보였다.쌍충사적비를 나와 길을 쭉 따라가니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된 영남포정사문루가 있었다. 영남 포정사 문루의 설명을 보면,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 남이흥이 신축하였는데 이것이 망미루의 전신이다. 고종 32년에는 진주관찰부, 건양원년(1896)에는 경상남도 관찰사 청사의 관문으로 영남 포정사라 하였으며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문루 양옆으로 덩치 좋은 옛날 병사의 마네킹이 마치 실제 사람처럼 창을 들고서 있어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창으로 막을 것만 같았다.진주성을 답사하면서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문화재라기 보다는 공원이나 쉼터같은 느낌을 주는 아름답고 평온한 곳들이 성내 곳곳에 자리잡고있어 과연 진주성은 진주의 자랑거리라 할 만큼 잘 꾸며놓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그러한 장소 중에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에서 포정사까지의 길은 잘 정돈된 정원을 연상시킨다. 탁 트인 너른 대지 위에 아름답게 조형된 잔디와 나무들, 외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진주성벽의 조화가 사색을 즐기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커서 결혼을 하고 애기를 낳아서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 할 나이가 되면 꼭 손을 잡고 진주성을 다시 찾아와 사진도 찍고 싸온 김밥도시락도 먹으면서 우리 고장의 문화를 가르칠 수 있었음 하는 바램이다.탁 트인 잔디밭을 지나 큰칼을 옆에 차고 손을 들어 호령하는 듯한 김시민 장군 동상 앞에 서니 내 고향 통영 남망산 공원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순신 장군도 호가 충무공인데, 김시민 장군의 시호도 역시 충무였다.김시민 장군의 설명을 보면,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 시호는 충무이다. 무과에 급제, 훈련원 판관이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가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이 되었다.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천, 고성, 진해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금산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왜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7일 간에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하고 승리를 했으나, 김시민 장군은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영남포정사문루를 지나 계속 길을 따라가다 보면 약 30여개의 비석이 줄지어 세워져있는 곳이 보인다. 진주성 비석군이라는 이 비석들은 진주성 또는 시내 각처에 있던 것을 1973년 문화재보호협회 진주지부에서 모은 것인데, 조선조 선조 37년(1604)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 검목사 이수일의 유애비를 비롯하여, 효종 10년(1656) 목사 성이성의 창덕 유애비등 조선 시대에 세워진 비들이 대부분이다.
    독후감/창작| 2005.06.10| 4페이지| 1,000원| 조회(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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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학] 교육의 본질적 가치와 피교육자의 올바른 모습 평가A좋아요
    교육을 하나로 통일하여 정의 내리기는 무척 어렵다. 교육에 대한 정의를 몇 가지 면으로 나누어 내리자면 첫째,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신장시키도록 돕는 일 이다. 둘째는, 페스탈로치가 내린 정의와 같이 교육은 사회개혁의 수단이라는 것, 셋째는 문화유산의 전달이나 생활 그 자체가 교육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교육을, 개인의 소질과 적성을 키워서 좀 더 가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이처럼 교육이라는 단어는 어느 한가지로 정의 할 수 없는 매우 광범위한 말로써 옛날부터 지금까지 여러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정의되어 왔으며, 따라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육하는 방법과 형태도 조금씩 차이가 났다.교육은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되어 왔지만, 그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이, 인류는 사회라는 울타리 속에서 사회화라는 교육을 받으며 지내왔다.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교육은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렇듯 교육은 사회적 의미가 강하다.하지만 사회가 아닌 현재의 학교에서 교육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땅에 떨어진 교권, 교실의 붕괴등과 같이 교사와 학생간의 문제가 심각한 교실에서, 교육자와 학습자와의 관계를 떠나 인간과 인간으로써 지킬 예절조차 습득되어 있지 않은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무슨 보람을 느낄 것이란 말인가...이는 사회의 탓도 매우 크다. 언제부터인가 사회의 분위기가, 교육은 사람을 만들기 보다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인재를 양성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참교육의 본질을 변질시켜버렸다. 이런 면에서 고찰해보면 교육의 본질적인 가치는 이해와 사랑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이론적인 교육을 제쳐두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제지간의 정이기 때문에,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참교육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문화의 차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으로써 서로를 대한다면 그 폭은 조금씩 좁혀지지 않을까...그러한 폭을 좁힐 수 있는 대안으로 내가 생각해본 것은 매일 학생 한 명씩 선생님이 되어 교탁에 서서 발표 수업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선생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 교육 정책의 틀에서는 그러한 방법이 미봉책이 되기 십상일 것이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교육 시스템을 개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만, 올바른 소수가 잘못된 전체의 교육시스템을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교육학| 2001.10.24| 1페이지| 1,000원| 조회(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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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메리칸 뷰티를 보고 가족의 문제점... 평가B괜찮아요
    아메리칸 뷰티를 보고...이 영화는 미국의 두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해야될 가치, 혹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먼저 제인의 가족을 살펴보면 회사원인 아버지, 부동산 중개업자인 어머니 그리고 외동딸인 제인이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마을의 2층 주택에 살며 매일저녁 가족이 모여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촛불이 켜진 식탁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도 행복한 가정입니다. 하지만 가장인 레스터는 아버지로서의, 또는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일상을 무기력함 속에서 보내고 회사에서 짤릴까봐 떨면서 사는 한심한 남자입니다. 부인과 딸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것을 알고있으면서도 무시당하는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부인인 캐롤린은 부와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부동산 중개업자입니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집을 팔지 못했습니다. 아직 팔지 못한 집을 열심히 닦고 쓸며 오늘만은 꼭 집을 팔겠노라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집을 보러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광고와는 다른 집에 대해 실망하고 돌아갑니다. 결국 집을 팔지 못한 캐롤린은 울면서 자기 뺨을 때리고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합니다. 딸인 제인은 고등학생에서 치어리더를 하고있습니다. 제인은 부모님에 대해 굉장히 불만이 많습니다. 무능력한 아버지를 무시하고 버릇없는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습니다.이웃집에 사는 리키는 제인과 같은 학교 남학생입니다. 항상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제인을 찍으며 이상한 것들을 찍고 다닙니다. 리키의 아버지는 해병대 대령이며 사회의 모든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인데 약간 정신이 이상한 듯한, 항상 멍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리키의 가족은 해병대인 아버지에 의해 엄한 규율 속에서 항상 긴장된 생활을 하고있습니다. 리키가 대마초 하는걸 알아챈 아버지는 리키를 군사학교에 보내고 정신병원에까지 보냅니다. 그리고 6개월마다 소변검사를 해서 리키가 대마초를 피우는지 감시합니다. 하지만 리키는 가짜 소변으로 아버지를 속이고 대마초를 피우며 심지어 대마초를 판매하기까지 합니다. 해병대 대령인 아버지가 항상 강함만을 내세워 아들을 힘으로 통제하고 감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리키는 겉으론 얌전한 아들이지만 속은 반발심리로 가득 찬, 아버지를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로 여기는 아들입니다. 리키의 가정을 보고있노라면 가족간의 대화가 있긴 하지만 서로 단절되어있는 듯하며 각자의 사생활을 숨기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사회과학| 2001.10.19| 1페이지| 1,000원| 조회(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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