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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신미양요&병인양요 평가B괜찮아요
    1.양요의 특성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1866년과 1871년에 서해 해상을 통하여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 및 미국 함대와 조선군과의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이 두차례의 양요는 한민족이 다른 민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운 수많은 전란과는 상이한 몇가지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첫째. 병인양요와 산미양요는 한민족이 역사상 최초로 서양세력의 침공에 맞서 이를 물리치기 위하여 대항한 사건이었다.(=>그 이전까지의 이민족의 무력침공은 주로 중국이나 한족)둘째. 병인 신미 양요는 동양 삼국중 청국과 일본이 이미 서구 열강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하여 문호를 개방해 버린 상황하에서 조선만이 유일하게 열강국의 무력시위에 굴하지 않고 이에 대항함으로써 야기된 무력 충돌이었다.셋째. 병인 .신미양요는 전근대적인 조선군과 근대화된 프랑스군 및 미군 사이에 이루어진 전투기법 내지는 화기 성능을 비교하는 하나의 실험장이 된 사건이었다.넷째. 병인 신미양요는 조선측에 의하여 강화도 일원의 제한된 지역에서 일어난 조선의 중앙 정계와 도성에 미친 영향은 매우 지대한 것이었다.강화도는 수도 한성의 인후에 해당하는 요지로서 한강을 통하여 도성에 이르는 해상 및 수상교통의 관문이다. 그런데 양대 양요를 통하여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가 강화도의 일부를 점령하여 한강수로를 봉쇄하자 한강으로 수송되던 도성의 생필품 반입은 일시에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병인 . 신미양요가 지속도니 시기는 비록 짧은 것이었으나 이 사건이 바로 도성의 인후부인 강화도에서 발발하였던 관계로 도성의 민심은 큰혼란의 와중에 휘말려들게 되었으면 정국도 극도의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19세기 후반기의 한국사회가 아직도 봉건제도의 질곡속에서 침체상태를 탈피하지 못하고 갖은 난관을 겪고 있을 때에 세계의 정세는 격심한 변동을 하였다. 중세의 각(殼)을 탈피하고 근대사회를 만들어 낸 서구제국(西歐諸國)은 자본주의혁명에 성공하여 급속적인 문화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이러한 서구제국은 고문명(古文明)을 자랑하던 동방의 여러 나라들을 계속적으로 정복하기 삼 등의 천주교도간부들이 그와 같은 구상과 희망을 갖게 된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즉, 그것은 대원군의 아내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가 천주교에 감화되었던 탓으로 아들 재황이 국왕에 등극할 무렵 천우지은(天佑之恩)에 감사한다는 뜻에서 특별 미사를 올리게 했다는 사실과, 또한 국왕 고종의 유모가 박(朴) 말다(Martha)라는 영세명(領洗名)을 가진 아주 독실한 천주교도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천주교의 교리와 풍속이 이미 대원군의 가정에까지 침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이 과거 흥선군으로서 극히 불우한 신분의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당시 관직에서 밀려나와 몰락생활을 하면서 천주교의 감화를 받고 있었던 남인계 인물들과도 비교적 많은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도 그러한 동기의 하나로 되었다.이와 같이 대원군 자신이 무엇보다도 천주교에 대하여 적지 않은 이해와 관심을 가졌던 까닭에 대러(大露)문제가 대두하기 시작한 고종 초년부터는 극비로 교도를 통하여 불란서의 힘을 국내에 이용하려고 잠복중인 베르노(Bereneux 장경일)주교에 교섭토록 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내정을 탐지한 결과 그들 계획의 허구성과 기만성을 알게 됨과 동시에 다행히도 러시아가 그들의 개항요구를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원군의 천주교도에 대한 태도도 변화되어 갔다.이러할 무렵에 천주교와 양학(洋學)을 경계했던 조대비를 비롯하여 영의정 조두순, 좌의정 김병학 등과 그 밖의 정부고관의 거의 모두가 천주교와 양학을 극렬하게 배척하고 나섬으로써 대원군의 천주교도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은근히 비난하였으며 철저한 강압을 주장하였던 것이다.한편 대원군은 집정초부터 불우한 천주교도에 대하여 비록 동정하고 이해했을 망정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으로서의 정의(情誼)였지 공적인 면에서의 자세는 아니었다. 따라서 국책에 위배되는 반국가 반왕실적인 천주교의 유해행동에 대하여 언제까지나 방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영의정 · 좌의정 등 정부의 원로급 중신이 천주교를 규탄 여러가지 문제점을 분석검토한 결과, 한강수로는 함대항행(航行)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연안정비가 견고하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함대가 왕도 서울에 접근하는 작전을 피하고, 강화부를 점령한 후에 한강하류를 봉쇄하는 전술 · 전략을 채택키로 하였다. 로오즈제독은 이러한 전법에 의하여 서울에 이르는 항로를 차단하면, 멀리 삼남(三南) 및 양서(兩西)지방에서 서울로 전송되는 조세미와 양곡은 자연히 정지당하게 되므로 조선정부는 부득이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관측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봉쇄작전에는 상당한 병력이 필요하므로 그는 서둘러 아시아 여러 곳에 주둔하고 있던 불란서의 전 해군력을 지부로 집중케하였다. 치밀한 계획에 따라 작전을 짠 로오즈제독은 10월 11일 순양(巡洋)전함 게리에르(Guerriere)호에 장기(將旗)를 달고 프리모오그 · 라플라스(Laplace) · 타리디프 · 러브르돈(Lebrethon) · 데룰레드 · 킨샹(Kienchan)호 등 군함 7척으로 편성된 원정함대를 이끌고 지부로 출발하여 13일에는 부평 앞바다의 물치도와 호도(虎島)사이에 닻을 내렸다.[註8] 그런데 그 원정함대에는 일본 횡빈(橫濱)에 주둔중인 해병 1개지대(支隊)가 급거 승함(乘艦)합류하였으므로 총 병력은 1,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이와 같은 대대적인 영해불법침입에 격분한 영종첨사 심영규는 곧 현지에 중군(中軍) 김종화(金鍾華)를 파견하여 경위를 따지는 한편, 즉각 퇴거를 명하였으나 거절 당하고 말았다. 로오즈제독은 10월 14일(음 9월 6일) 기함과 2척의 전함을 물치도에 둔 채 장기(將旗)를 데룰레드호에 옮겨 달고 킨샹호 등의 포함과 초함(哨艦)만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도중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날 갑관진(甲串津)에 쉽사리 상륙한 후 우선 진해부근의 고지를 점거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침략행위에 놀란 강화부 유수(留守) 이인기는 경력(經歷) 김재헌(金在獻)을 로오즈제독에게 파견하여 그들의 침략을 규들이 채택한 배외정책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성과인 것처럼 자부하고 외적침략세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마저 빚어 내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정부가 국민에게 고취한 쇄국사상의 표어인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이란 것을 통해서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하여튼 우리 봉건정부는 전후처리에 있어 의기양양하였다. 그것은 비단 대내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상에 있어서도 반영하려 했다. 즉 그것은 청국정부에 통보한 전승의 과시(誇示)와 또한 일본에 대해서도 전승을 통보함과 함께 양이(洋夷)에 대처할 자위호국책(自衛護國策)을 강구하라고 격려하는 등 위세당당한 면을 보였다. 당시의 국제정세 동향과 국내정치가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던 대원군은 국제정세의 조류, 즉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을 전혀 무시하고, 봉건국가 조선이 선진제국과 교류없이 고립하면서도 항상 자립번영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쇄국사상이 바로 그의 굳은 정치적 신념이었으며, 또한 대외정책의 근본이념으로서 구현되고 있었기 때문에 불란서함대의 그러한 개국요구가 수락될 리 만무하였다. 다시 말해 '병인양요'는 대원군정권을 빛내는 대외정책 중에서도 가장 전시효과를 나타내는 전승의 하나로 장식되는 것이었다.{(로즈 제독의 작전회의){(병인양요 전승 비각)《셔어먼호 사건의 발생》1866년 7월에 미국상선 제너럴 셔어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상에 침입하여 소각 당하는 사건이 발발하였다. 이 사건은 고종 8년 4월에 일어났던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구실이 되었던 만큼 한미양국간의 국제관계에 있어 의외의 불행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 즉, 제너럴 셔어먼호에는 선주 프레스톤(Preston, 미국인)을 비롯하여 선장 페이지(Page, 미국인), 일등항해사 윌킨슨(Wilkinson, 미국인), 상승역(上乘役) 조오지 호우거어드(George Hogarth, 영국인)외에 4명의 구미인(歐美人)과 15명에 이르는 중국인 · 마래인( 상당한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야심은 당시 극동에서 아직 미개방상태에 있었던 조선에 더욱 의욕적으로 기울어졌는데, 그 동기와 목적을 정치나 종교적인 것보다도 조선과의 교역을 통하여 거리(巨利)를 얻자는 순전한 경제적 이유에만 두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사전에 조선에 관한 용의주도한 연구를 함으로써 교역실현의 기회를 포착하려 하였다. 오페르트가 처음으로 조선에 내항한 것은 고종 3년(1866) 6월 21일에 로오나호를 타고 충청도 해미현(海美縣) 조금진(調琴津)에 정박하면서 해역을 탐사한 것이라 하겠다. 이때 평신첨사(平薪僉使) 김영준(金泳駿)과 해미현감 김응집(金膺潗) 등은 문정(問情)하기 위하여 로오나호를 임검(臨儉)하였지만 오페르트 일행은 본선은 상선으로서 통상을 하기 위하여 내항한 것이라 고(告)하고 국왕에게 예물을 헌상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김첨사 등은 지방관의 권한으로서는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곧 퇴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때문에 오페르트일행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동월 25일에 상해로 귀환하고 말았다.문정관일행과 오페르트 사이에는 주로 청 · 한 종속문제(宗屬問題)에 관하여 논의가 되었거니와 특히 문정관은 조선정부는 중국의 허락없이는 대외통상을 할 수 없다고 조선 측의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하여 오페르트는 미국선박 셔어먼호사건과 불란서함대의 소위 조선원정(朝鮮遠征) 실패는 다른 서구열강제국에 있어서도 큰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열강의 조선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변화하지를 않고 오히려 '포도(葡萄)의 낙원'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원정이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강한 태도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 열강 중에서도 특히 미국은 각별한 국가였고, 그 다음이 프랑스 · 러시아 · 영국의 순서였다고 하겠다.신참사의 재차의 문방(問訪)에 의한 항의에 부딪치자 그들은 그들의 요청이 수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최후수단다.
    인문/어학| 2001.12.15| 22페이지| 1,000원| 조회(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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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독립운동사
    어떤 역사학자들은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침략과 저항'의 틀이 아닌 '수탈과 개발'의 틀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지만, '수탈과 개발'은 '침략'의 내용을 이루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침략과 저항'의 틀을 버리고 식민지시기의 역사를 보자는 주장은 결국 민족독립운동사를 부정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인정하자는 주장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요즘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에 움직임에 대해 이러한 부분에서 한목소리를 내서 대항해야 할 대목이다, 그런데 ,민족독립운동사가 차지하는 위치가 이같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이에 대한 연구는 왜곡과 굴절의 과정을 걸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한반도를 지배해온 냉전 이데올로기는 민족독립운동사 서술의 굴절과 왜곡을 심하게 만들었다..또한 민족독립운동사를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민족해방운동 전체를 관통하는 지도사상과 노선이 먼저 설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민족독립운동은 식민지 특유의 모순구조에 기인하여 광범한 계급 계층이 참가하며, 다양한 주의 주장이 제기된다. 더구나 민족독립운동 세력 내에서도 각종 좌우익적 편향과 여러 분파들의 난립 등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현상을 일관된 맥을 가지고 정리하지 못하면 민족독립운동사는 파벌투쟁의 역사가 되고 말 것이기때문이다.또한 이러한 주류를 설정하는 것은 강만길의 '민족통일전선운동론'과 같이 실천적인 문제로써 분단의 극복이라는 현실적 문제의 방안 모색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할것이다.1)우익주도론우익주도론은 일제하 민족운동과정에서 우익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강조함과 더불어 우익운동에 정통성을 주는 것이다. 해방이후 지금까지 이에 근거하여 학계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성을 강조하였으며, 3·1운동시 민족지도자의 역할과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하였다. 아울러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 만주에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군 운동이 거둔 승리와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의 활동 등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또한 우익계인사에 대외에서 만들어진 여러 정부가 통합된 정부라는 점에서 정치사적으로 정통성을, 헌정사적으로 법통성을 지닌다는 주장이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통론은 대한민국 정통성론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시 헌법제정 과정에서 "3 1 독립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는 귀절을 헌법 전문에 넣어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는 선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통론은 "일제하의 민족운동사는 임정을 중심으로 서술되어야 하며, 그러한 임정의 정통성을 대한민국이 그대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임정 정통성론은 해방 직후 한민당의 임정 봉대론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중경임시정부는 3 1운동 당시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중국 미국 등지에서 독립을 위해 혁혁하게 싸웠기 때문에 중경임시정부를 추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 임정 스스로도 중경에서 포고문을 통하여 "국내의 과도정권이 성립되기 전에는 국내 일체 질서와 대외 일체 관계를 본 정부가 책임을 지고 유지할 것"이라고 명시하여, 전 민족의 의사에 의한 과도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는 임정이 임시로 정부의 구실을 하겠다는 뜻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임정은 귀국 후에도 임정 법통성론을 강조하면서 인민공화국 등과의 합작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조선공산당은 1945년 9월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철쇄하에서 악전고투하며 구사일생해온 것은 노농대중이고, 이 노농대중이 금일 국가적 독립과 민족적 해방의 주체자가 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운형도 임정은 30년간 해외에서 지리멸렬하게 유야무야중에 있던 조직이니 국내의 기초가 없어 군림이 불가하다는 점, 연합국이 임정을 승인할지도 알 수 없다는 점, 국내에서는 투옥되었던 혁명지사가 다수인데 반해, 안전지대에서 객지고생만 한 해외 혁명가 정권을 환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 중경 임정을 환영하는 자들은 혁명공적이 없는 자들로 호가호위하려는통성론은 임정이 귀국 후 정부권력을 한 번도 행사하지 못했고, 임정 세력이 분단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대한민국의 수립과정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적으로는 좌초하고 말았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헌법 전문에 법통성론이 거론되고, 이후 남북 분단 상황하에서 이승만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한 정권측이 대한민국의 정통성론을 거론할 때마다 임정의 법통성을 계승하였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아왔다. 이로써 '임정의 법통성'은 현실적으로 단절되었지만, '임정 법통성론'은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제위에 수립되었다는 것 등 일정한 역사적 진보성을 지닌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임정만의 활동을 강조할 경우 다른 세력 단체의 활동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며, 또 임정의 활동이 부진했던 시기에 다른 독립운동 세력의 운동 또한 부진했던 것처럼 보이게하여 결과적으로 풍부했던 우리 민족해방운동사를 왜소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 민족해방운동 선상에서 임정만의 배타적 정통성을 강조하고, 그러한 정통성을 대한민국만이 계승하였다는 식의 주장은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의 상황하에서 결코 분단 극복을 위한 노력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또 임정이 과연 전체 민족운동을 올바르게 지도한 대표기관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즉 임정이 수립 당시만 해도 많은 운동가 단체 등을 포괄한 기관이었고 국민적 기대도 컸지만, 1년도 채 못되어 그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에는 완전히 1개 독립운동단체로 전락해버린 것이다.---독립군 운동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운동의 분화 과정중 독립전쟁론에 의해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지도되는 자산계급의 군대였다.초기에는 그 기여도가 매우 컸으나 거족적인 항일무장 항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정치사상을 가지지 못했고, 광범위한 대중과 연계를 이루지 못했으며, 독립군 부대간의 대립이 심화돼 2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쇠퇴하였다.1940년 임정은 광주의 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두 세력이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전개한 운동을 민족해방운동의 주류로 인식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인식의 대표자는 강만길이다. 그는 "3 1운동 이후 우리 민족해방운동의 전체 과정은 좌우익 전선의 분립과 대립을 극복하고 해방 후의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지향하면서 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기 위한 운동의 연속선상에 서 있었다"고 주장한다.그는 임시정부의 수립도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한다. 또 국외 전선에서 임시정부 운동이 약화하고 국내 전선에서 민족개량주의 노선이 대두하자 이에 대응하여 1920년대 후반 민족협동전선을 지향하는 민족유일당 운동과 그 연장으로서의 신간회 운동이 일어났다고 파악한다. 1930년대초 민족협동전선 운동은 일시적으로 와해되지만, 1930년대 중엽 이후 파시즘이 등장하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반파쇼 통일전선 노선으로 전환함에 따라 국외에서 한국국민당과 민족혁명당 간의 통일전선 형성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고, 1943년경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이들 세력을 포괄하는 통일전선 정부로 바뀌었음을 그는 강조한다. 국내에서도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 이후 통일전선을 일정하게 수용하면서 광범위한 반일 반파쇼 통일전선을 수립하려는 노선의 운동이 일어났으며, 식민지 시기 말기에는 국내 좌우익 세력의 연합에 의한 건국동맹이 결성되어 해외전선, 특히 중국 관내전선과의 연결을 기도하여 일부 성공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강만길이 민족통일전선을 중심으로 민족독립운동사를 파악하는 데에는 식민지 시기의 현실에 대한 그 나름의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식민지시기의 민족독립운동은 독립운동인 동시에 근대 민족국가 수립운동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운동은 불행하게도 하나의 정치 사회적 세력이나 노선에 의해 독자적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계급적인 면에서 볼 때 부르주아지나 프롤레타리아트 중의 어느 한 계급이 민족해방운동 전체를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만큼 계급적 성장을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또 이데올로기적인 면뒷받침할 만한 계급적 성장이 부진했던 것도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조건 아래서 추진된 민족해방운동은 당초부터 좌우익세력, 나아가서 반일 제국주의노선, 전체 민족세력의 협동 내지 통일에 의한 운동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현실인식이다.그는 분단체제하에서의 민족해방운동사 인식과 연구는 그동안 좌익전선 자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관점, 아니면 반대로 우익전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관점이 주류를 이루어왔다고 지적하고, 이는 학문내적 문제라기보다 학문외적 조건의 결과였다고 비판한다.강만길의 역사인식은 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설정하고 근대 이후의 민족독립운동사를 국민국가 수립운동에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과정에서 파악하였다 점에서 발전적이었다고 평가되었다.그러나 강만길이 민족독립운동의 주체를 '좌우익의 민족협동전선'으로 파악하는 관점에 대해 그가 주장하는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가 누구의 주도권하에 이루어지며, 그에 따라 국가권력의 성격은 어떠한 것이 되는지에 대한 명백한 규정이 없다고 지적된다. 또 1925년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주체가 피압박대중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양 세력이라고 보고 그것은 해방 직전까지 거의 불변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이것은그 이후 변화를 고려에 두지 않은 기계적인 해석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이는 1930년대 이후 국내 민족주의 세력은 민족해방운동 선상에서 대체로 탈락하고, 운동은 주로 기층민중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는 점과 1930년대 이후 국외에서 진행된 좌우합작운동과 민족유일당운동도 계급적 토대에 바탕을 둔 통일전선이라기보다는 상층부 지도자들의 연합전선의 성격이 강하여 독립운동의 주체적인 흐름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는 면을 보아야 되기 때문이다.3 )좌익주도론해방후 북한에서는 항일무장투쟁론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해방 3년동안에 남한에서 활동한 진보적인 세력들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일제치하에서 가장 많은 고장했다.
    인문/어학| 2001.10.11| 4페이지| 1,000원| 조회(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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