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쓰기와 풀어쓰기의 효율성 비교차 례Ⅰ. 서론----------------------------------p.1Ⅱ. 모아쓰기와 풀어쓰기 논쟁---------------p.21. 풀어쓰기 논의의 태동2. 풀어쓰기 논의의 근거Ⅲ. 논쟁의 주요 화두-----------------------p.31. 맞춤법 문제해결2. 인쇄의 효율성3. 필기의 간편함4. 독서의 효율성5. 문자의 표의적 측면Ⅳ. 결론-----------------------------------p.6참고문헌Ⅰ. 서론한글은 제자(制字) 원리상으로 상형문자?음소문자?자질문자의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한글은 운용상으로는 모아쓰기에 의해 음절문자로 조합해서 쓰는 절묘한 유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단어를 인지하는 과정에서 그 하위 범주인 음절을 식별하는데 효율적이라는 생각 하에 한글의 장점으로 일컬어지며, 모아쓰기가 가지는 표의성을 중시한 태도라 할 수 있다.그러나 한글 인쇄 문화의 발달이 시급하던 개화기에 주시경의 풀어쓰기론을 위시하여 김두봉(깁더조선말본, 1992), 이필수(정음문전, 1992), 최현배(글자의 혁명, 1947)로 이어진 풀어쓰기 지지론은 현대에도 김정수에 의해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 주장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한글의 인쇄 기술적 측면이 해결된 지금에 와서 쓸모 없는 주장처럼 여겨질 뿐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모아쓰기의 관습이 굳어져 풀어쓰기로 전환해야할 당위성에 상당한 부족함이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풀어쓰기의 논의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단지 인쇄과정의 편리성을 배려한 방법에서 나아가, 맞춤법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열쇠로까지 논의가 확대된다. 따라서 우리는 풀어쓰기 주장을 고찰해봄으로써 그것의 의의를 밝히고, 모아쓰기와의 비교분석을 통해, 한글을 운용함에 있어 어떠한 방식이 더욱 타당한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Ⅱ. 모아쓰기와 풀어쓰기 논쟁1. 풀어쓰기 논의의 태동한글의 자모는 초성 19자, 중성 21자, 종성 27은 풀어쓰기를 하므로 26자면 해결되어 기계화에 유용하다. 때문에 한글 인쇄 문화의 발달이 당위적이었던 개화기에 주시경의 풀어쓰기론이 주장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논리이다. 주시경은 『말의 소리』(1914)에서 부록을 통해 「우리글의 가로 쓰는 익힘」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한글 풀어쓰기 주장의 최초이다. 이는 훈민정음이 음소글자이나 음절글자를 짜맞추어 써오던 것을 음소글자 본래의 성격을 잘 살린 운영 방안이라 하여, 외솔 최현배는 ?글자의 혁명?이라 일컫는다.주시경의 제자였던 최현배는 1942년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혐의를 받게되어 옥중생활을 하게되는데, 그의 풀어쓰기 연구는 옥안에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풀어쓰기 연구는 1947년 5월에 출간된 『글자의 혁명』에서 집약되는데, 이 책에서 외솔은 크게 한자폐지와 가로글씨에 대한 30여 년의 연구결과를 쏟아내고 있다. 최현배 이후에도 한글 풀어쓰기 주장은 그 명맥이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오지만, 이 논의에 있어 가장 중심에 서있는 학자가 최현배이며, 후의 주장들 역시 외솔의 주장을 기초로 조금씩 보완된 논의인 만큼 이제부터 최현배를 중심으로 한 풀어쓰기 주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아울러 공통의 화두에 대해 모아쓰기와 풀어쓰기의 입장에서 각각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살펴보자.2. 풀어쓰기 논의의 근거풀어쓰기 논의는 한글이 가지는 특징과, 형상과 운동 관계라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함으로써 문자적 본래 기능의 최대 효과를 거두려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출발한다. 아래의 인용글을 통해 우리는 풀어쓰기의 기본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가로글씨는 결코 서양 글자의 흉내가 아니요, 인체의 구조와 생리작용에 정확한 근거를 가진 것으로, 세계 전 인류의 가장 자연스런 글자이다. 가로글씨는 결코 개인의 취미스런 장난이 아니다. 글자살이를 합리화하며, 문화 생활의 과학화 능률화의 근본스런 중대한 할 일인 것으로, 겨레의 번영과 나라의 발전을 원하는 과학적 두뇌와 진취 정신의 소유자는 당연히 이를 연구 촉진하지 않으면 가장 자연스러운 글이다⑧ 피할 수 없는 학문상의 대세이다⑨ 풀어쓰기로의 통일은 교육적이다.이 중 주목해야할 몇 가지 근거들을 중점적으로 풀어쓰기 논의의 핵심을 알아보자.Ⅲ. 논쟁의 주요 화두1. 맞춤법 문제해결한글은 받침 표기를 할 때 난해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받침이 있는 어간과 어미의 결합에 있어서 어미가 모음일 경우 어간의 받침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음 음절의 처음으로 올려야 하는가의 문제를 의미한다. 예컨대 ?맑은?이라고 써야 하는지, ?말근?이라고 써야 하는지 등의 혼란스러움이 이러한 예인데, 이 경우들은 그 어간을 모두 외워야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불규칙 용언들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춥다?를 활용시켜 보면, ?춥으니, 춥워서, 춥으면?이 아니라, ?추우니, 추워서, 추우면?이 되는 경우인데, 이는 중세국어의 ?순경음ㅂ?이 시대를 거쳐 ?ㅜ?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자생활을 하는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이 역시 따로 외워야만 하는 불편함이 있다. 또한 하나의 단어에서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데, ?걸음?이라고 써야 하는지 ?거름?이라고 써야 하는지 등이 그것이다.최현배는 이를 모아쓰기의 불이익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풀어쓰기를 주장하고 있다.가로 글은 오늘날의 맞춤법의 어려움을 많이 줄인다(輕減한다). 가로 글에서는 한 낱말은 순전히 한 덩이로 씨기(쓰기) 때문에, 풀이씨(用言)의 줄기(語幹)와 씨끝(語尾)을 갈라씨지 아니하며…… 오늘의 내리글에서는 ?같으니?와 ?가트니?, ?떨어지다?와 ?떠러지다?, ?걸음?과 ?거름?이 어느 것이 옳은가? 어느 쪽으로 하여야 할기?가 어려운 물음이 되어 있지마는, 가로글에서는, 그것은 당연히 각각 ㅇ을 없애고서, 한 줄로 벌러 적으면 그만이 될 것이다. (ㄱㅏ ㅌㅡㄴㅣ , ㄸㅓ ㄹㅓ ㅈㅣ ㄷㅏ, ㄱㅓ ㄹㅡㅁ))모아쓰기 측의 입장은 받침 표기의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표의적 표기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비해 두어야 하는 활자는 적어도 2,500개에 정도에 이르며, 그러고도 특수한 방언을 나타내려면 새 활자를 따로 만들어야 한다. 근래 컴퓨터의 개발로 이 문제는 대부분 해소되었지만, 완성형을 만드느냐 조합형을 만드느냐의 문제와 완성형에서 쓰이는 글자가 2,350자에 이르고, 더욱이 유니코드에 할당된 글자는 11,102자로서, 이는 세계 전체 유니코드의 25%를 한글이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이 때문에 최현배는 모아쓰기를 풀어쓰기로 바꾼다면, 활자의 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어 그에 따라 설비하는 공장의 면적과 채자(採字)와 식자(植字)에 들이는 노력과 시간이 줄어든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활자수의 감소에 따른 오자가 나오는 비례가 감소하며, 인쇄비용 역시 절약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풀어쓰기 방식으로 바꾸는 것은 분명 기존의 모아쓰기에 비해 인쇄비용, 노력은 줄어들 것이 분명하지만, 그에 반하여 받침으로 있던 자모들이 옆으로 옮겨짐에 따라 종이의 양이 많이 소요될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비용은 물론이고, 책의 쪽수 역시 늘어날 것이고, 책을 보관하는 장소 등의 비용, 들고 다니는 책의 무게 또한 증가할 것이다. 때문에 인쇄의 효율성에 대한 것을 근거로 풀어쓰기를 주장하는 것은 난점이 생긴다.3. 필기의 간편함최현배는 풀어쓰기가 쓰기 편하다고 말한다.사람의 팔굽을 일정한 자리에 붙이고서, 그 아래팔을 움직여서 글을 씸에는, 가로씨는 것이 세로씨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 곧 그 운동의 범위가 상하보다 좌우가 수배로 넓으며, 운동이 편이하며, 따라 씨기의 속도가 빠르다. 가로글은 소리없는 ㅇ을 쓰지 아니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수고와 시간을 절약하게 되는 이익이 있다.)그런데 최현배의 이러한 주장에는 허점이 있다. 즉 소리 없는 ?ㅇ?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고아?와 ?과?와 같은 단어를 풀어쓰기로 표현하면 둘 다 ?ㄱㅗㅏ?가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봉선은 ?딴 t?를 통해 논의를 보충하는데, 예컨대 장봉선의 풀어쓰기표현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딴 h?를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4. 독서의 효율성최현배는 사람의 눈이 형태상 수평으로 나란히 있고, 그 눈은 가로째져 있어 옆으로 보는 시야가 넓고 또한 운동이 편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해부상으로도 눈알을 움직이는 힘줄이 좌우에는 상하보다 튼튼한 힘줄이 둘씩 있어서 눈알의 운동은 좌우가 상하보다 수배나 용이하다. 이를 근거로 최현배는 가로글을 읽는 것이 피로가 덜하며, 이해가 용이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풀어쓰기는 소리글의 뜻글자삼기(표음문자의 표의문자화)가 가장 완전히 되어서, 글자와 생각과의 일치가 긴밀하여 뜻의 이해가 빠르다고 말한다.이에 반해 이익섭은 모아쓰기가 풀어쓰기에 비해 읽기가 쉽다고 주장하며, 출판자가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즉, 어간 / 어미의 분리로 단어의 의미를 독자가 빠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김정수는 옛 글에서 소리마디의 경계가 표기법에서 고정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모아쓰기로 굳어진 우리들의 눈에 풀어쓰기가 혼란스럽게 보이는 것이지, 당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보였을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익섭의 논의에 반박한다. 이는 어간, 어미의 구분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어간 / 어미의 분리로 인해 단어의 어미를 쉽고 빠르게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역시 그 동안 모아쓰기만을 써 왔던 기준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5. 문자의 표의적 측면문자가 단어의 의미와 어원을 밝혀 적는 것을 일컫는 표의적 측면에 대해서는 논란이 심하다. 모아쓰기를 주장하는 측은 모아쓰기가, 풀어쓰기를 주장하는 측은 풀어쓰기가 더욱 표의적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문자인지 단위와 과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데, 아직 이것에 대해서도 두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먼저 모아쓰기 논의 학자들은 언어생활은 귀와 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의해서도 영위되므로 맞춤법도 눈을 위한 것이고, 눈에다.
R/E/P/O/R/T{제목 :{신채호의 문학세계{{{{{{{{{{과 목 : 비교문학·문학론담당교수: 선생님학 과 :학 번:이 름:제출일: 월 일 요일{{{{{[차 례]신채호의 문학 세계1. 서론--------------------------------------------------p.22. 단재의 생애와 삶----------------------------------------p.41) 단재의 생애2) 국내에서의 활동3) 국외에서의 활동3. 단재의 활동--------------------------------------------p.61) 역사 저술2) 문학 저술3) 언론 활동4) 독립 운동4. 단재의 문학 저술 활동-----------------------------------p.101) 역사전기소설2) 꿈하늘3) 용과 용의 대격전4) 이태리건국 삼걸전5) 을지문덕전5. 결론1. 서론단재 신채호는 언론, 역사, 독립운동, 교육,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활동을 전개한 선각자로 근대 인물 가운데 지조와 의리를 소중하게 여긴 마지막 선비였다.1905년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위원으로 시작하여, 1906년 항일언론에 앞장섰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기자로 봉직하고, 해외에서는 1911년 러시아 불라디보스톡에서 ‘대양보(大洋報)’의 주필로, 이어서 12년에 나온 ‘권업신문(勸業新聞)’과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대립한 ‘신대한(新大韓)’의 주필로 활약한 언론인이었다. 한 평생을 병고와 가난으로 지냈지만 항상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고 대의를 위하여 싸워 나간 큰 학자였다. 1936년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이후 단재의 이론과 학설에 대한 평가가 시작되어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우리나라에서는 단재 학설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연구가 홍기문(洪起文:괴산 출생으로 벽초 홍명희의 장남)이 조선일보 1936년 2월 29일치에서부터 8회에 걸쳐 연재된 ‘조선역사학(朝鮮歷史學)의 선구자(先驅者)인 신단재학설(申丹 되었다. 할 수 없이 신성우는 처가가 있는 안동권씨 마을로 외동아들인 신광식을 보내어 외가살이를 시키게 된다.단재의 아버지 신광식은 가난한 시골 선비로, 본래 살던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을 떠나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 마을 외가댁 옆에 간신히 묘막을 얻어 살아야 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외가인 권씨촌 도리미에서 신광식은 부인 밀양박씨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 신재호를 낳았고, 서른 두 살이 되어서는 둘째아들 신채호(申寀浩) 낳았다. 이 이름은 나중에 채호(采浩)로 고쳐지는데 이 사람이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선생의 아호 단재는 최영 장군의 단심가에서 따온 것이다.형인 재호는 순흥안씨와의 사이에 향란이라는 딸을 두었는데, 단재 나이 13세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단재는 중국망명시기 향란의 결혼문제와 관련하여 국내로 들어왔다가 혈연의 정을 끊기도 한다. 단재는 16세가 되던 해에 집안에서 정해준 풍양조씨와 결혼을 하여 첫아들 관일을 낳았으나 우유에 체해 아들을 잃고 난 후 부인과 이혼을 한다. 17세에는 진사를 지낸 신승구의 집에서, 19세에는 목천의 신기선의 사저를 드나들면서 한학을 익힌 단재는 드디어 신기선의 추천으로 19세에 성균관에 입교하게 된다. 성균관에 입교한 단재는 이종원, 이남규 아래에서 수학을 하며 훗날 이름을 날리는 변영만, 김연성, 유인식, 조용은 등과 교유하게 된다.중국망명 중이던 1920년 단재는 박자혜와 두 번째 결혼을 하여 그 사이에 수범과 두범 두 아들을 낳는다. 박자혜는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현 서울 도봉구 수유리 화계유치원자리)에서 태어나 1914년 숙명여학교 기예과(2회)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조선총독부 부속병원(현 적십자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소위 '간우회사건'을 주동한 인물이었다. 당시 박자혜는 북경 연변대학에 재학중이었는데 단재와의 결혼은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성사되었다. 박자혜는 연경대학에서 여대생 축구팀을 구성하여 주장으로 활약할 만큼 활달한 성격의 의 기력을 회복한 단재는 신규식이 운영하던 동제사에서 잠시 머물면서, 신규식의 도움으로 박달학원을 개설하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박달학원은 단군의 얼을 살려 민족의 살 길을 찾아보려는 단재의 의식으로부터 시작한 교육기관이었다. 이 학원의 강사로는 문일평, 홍명희, 조소앙, 신규식 등이 초빙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1914년 단재는 중국 망명 중 역사의식의 대전환을 맞는 기회를 갖게 된다. 윤세용·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그들이 창설한 동창학교(東昌學校) 운영에 참여하기 위하여 환인현으로 갔던 것인데, 윤세복·신백우·김사·이길룡 등과 함께 백두산을 거쳐 만주를 돌아가는 대 여행을 가졌던 것이다. 백두산과 광개토대왕릉 등의 여행은 이후 단재에게 대고구려적인 사고를 갖게하는 귀중한 경험을 준다. 단재가 구상하던 고대사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시작되고 구체화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이후 단재는 이상설·신규식·박은식·유동열·조성환·성낙형·이춘일 등과 함께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지만, 이 조직의 활동이 실효성이 없음을 알고 역사연구와 문학적인 창작에 몰두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1916년 봄에 단재는 북경에서 중편소설 『꿈하늘』을 탈고하는데, 이 작품은 단재가 한놈의 입과 손을 빌어 나라의 독립운동전개를 상징적 수법으로 극화한 대표적 소설이다.{단재는 이 기간동안 대종교(大倧敎)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는데, 대종교의 제1대 교주 나철이 구월산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긴글을 남기고 자결하자 그 비통한 심사를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지어 바치며 달랬다. 그후 단재는 제2대 교주 김교헌과도 함께 대종교 교육에 참여하였으며, 이 일에는 유근·박은식 등이 함께 하였다. 후일 단재의 「조선상고사」는 대종교의 교본이 되기도 한다.아끼던 제자 김기수의 죽음과 조카 향란의 혼인 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돌아온 단재는 그후 북경의 보타암에 기거하며 역사연구에 매진하였다. 이때 벽초 홍명희는 남양군도에서 삼년간 방랑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였는데, 단재의 숙중은 식민지 조선인 모두를 상징한다. 그의 혁명적 일원론은 서구문학에 대한 민족문학의 항거였고 문예반정(文藝反正)이었던 것이다.넷째, 단재의 작품을 소설이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루카치(Lukac's)적 관점에서가 아닌, 우리 나라 전통의 문학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논자는 1 이광수 - 염상섭 - 이기영 - 이상 - 김승옥으로 이어지는 흐름과는 다른, 2 신채호 - 홍명희 - 황석영 - 김지하 - 이문구로 이어지는 흐름을 생각해 보았다. 잠정적으로 1 을 이광수적 축, 2 를 신채호적 축으로 명명해 둔다. 물경스런 가설로 보일 수도 있는 두 흐름은 그러나, 크고 깊은 한국문학의 강속에 녹아 있는 하나의 물줄기로 합쳐져 있음은 당연한 것인 만큼 단재의 문학사적 의의는 크다. '이식문화론과 전통단절론은 이론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는 해묵은 과제의 실마리를 단재류의 역사전기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서구 소설의 영향보다도 고전소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음이 확인되었다.다섯째, 단재의 민족주의 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자칫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수주의와 영웅 사관에 대한 맹목적 찬양은 단재의 문학과 사상을 훼손할 염려가 있다. 단재는 절대주의적 관점에서 살고 썼고 죽었지만 지금 우리는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논하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3) 언론 활동단재가 신문 언론계에 처음 투신한 것은 1905년 그의 나이 26세부터이다. 『황성신문』의 사장 장지연의 초빙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신문의 논설기자가 되어 언론활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당시 유학 부문의 최고 관문인 성균관 경학시험에 합격하여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성균관 박사가 될 정도로 그는 20대의 청년기에 백과전서적인 박식가로 이름이 났으며, 설득력 있는 문장을 쓰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황성신문』에서 단재가 활동하였던 기간은 얼마되지 않았다. 그러나, 항일언론의 최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의 초빙을 받아 논설기자로 참여하게 됨으로써 그의 언론활동은 절정을 이루게큰 공헌을 하였다. 우리 나라 독립운동에 있어 1920년대 특징의 하나는 국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선의 일부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체념하고 대일본제국 내의 조선자치구역을 추구하는 자치론자들이 대두한 것이었다. 이들은 일제와의 타협론을 제창함으로써 완전독립론과 자치론 사이에 대립·투쟁을 야기시켰다. 즉, 이러한 자치론의 대두는 독립운동 노선에 혼선을 가져오고, 일제에 대항하여 굳건히 서야 할 독립운동 노선을 비틀거리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이러한 조건에서 단재의 절대독립론은 완전독립론과 자치론의 대립·투쟁에서 완전독립론·절대독립론이 압도적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비틀거리던 독립운동노선을 바로 잡아주고 우리 나라 독립운동의 갈 길을 명료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을 통해서 극명하게 선언된 절대독립론은 1927년에 자치론을 철저히 분쇄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노선을 정립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치었다.또한 독립운동 방략으로서 단재의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한국민족의 생존의 필수조건까지 철저히 박탈하는 강도적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무장투쟁만이 이를 몰아낼 수 있으며 민중직접의 폭력혁명방법이 가장 효율적으로 이를 타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단재의 이러한 독립운동론은 큰 영향을 끼치어 독립운동자들이 독립운동을 바로 민족혁명운동이라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스스로 혁명가라고 자처하고 독립운동을 혁명적으로 전개하도록 작용하였다.단재의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강도와 같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폭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 정당함을 가르쳐주어 그 후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방법적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의열단뿐만 아니라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까지도 단재가 합리화하고 정당화한 폭력수단을 채용하게 된 것은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에서 천명한 독립운동 방략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4. 단재의 문학 저술 활동1) 역사전기소설단재는 역사전기소설을 많이 창작했었다.
{차 례Ⅰ. 서론----------------------------p.11. 문제제기2. 방법Ⅱ. 붉은 악마의 영향----------------p.21. 금기의 파괴(1) 광장(2) 레드 콤플렉스2. W세대의 등장(1) W세대와 N세대(2) W세대의 미래Ⅲ. 붉은 악마와 촛불 시위-----------p.41. 촛불시위 논란2. 순수성의 정치적 이용Ⅳ. 결론----------------------------p.6참고문헌Ⅰ. 서론1. 문제제기“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곳곳에 울려 퍼지고,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이룩한 월드컵 4강진출 신화가 월드컵 1주년을 맞이해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사람들은 붉은 악마이든 아니든 ‘Be the Reds’의 붉은 티셔츠를 입고 광장으로, 역전으로, 운동장으로 집결했다. 개인주의 현상이 지나치게 만연해있다는 걱정을 듣던 20, 30세대는 그러한 의식이 무색하게 함께 거리로 나와 국민적인 축제분위기를 선동했다. 월드컵 열기로 온 나라가 온통 흥분해있었던 작년의 6, 7월이 그렇게 지나갔었다.이러한 붉은 악마의 거리응원은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응원문화의 창출을 통한 놀이문화의 변화,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 제고와 홍보성, 축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 증대 등을, 내면적으로는 국민통합 및 단결, 군중모임이나 레드 컴플렉스와 같은 금기에 대한 의식변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주체의 변화 등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들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반면 붉은 악마에 대한 맹목적 중우성이나 탈정치화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부정적인 효과 또한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당시에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질책과 불신이 팽배해 있었고 2차 서해교전도 발생했었으나 국민들은 붉은 악마의 활동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무난하게 넘어가버린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렇다면 우리는 이 붉은 악마의 거리응원과 이것이 가져온 많은 효과들을 어떤 시각에서, 무엇을 비판하며 살펴보아야 할 것인가. 일련의 군중모임으로 일컬어지는 노사모, 촛불 시위와 그것은 서에서는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긍정적 영향 몇 가지만을 언급하고, 비판적 시각을 통해 본 부정적 영향, 블은 악마의 정치적 이용 등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II. 붉은 악마의 영향1. 금기의 파괴(1) 광장작년 6월 붉은 악마의 응원문화 현상을 일부 전문가들은 87년 6월 항쟁의 연속선상에서 지적했었다. 그때만 해도 ‘유희의 시대’를 상징하는 20기 젊은이들과 ‘민주화’라는 엄숙한 정치적 구호 아래에 모였던 87년 당시의 젊은이들을 어떻게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가 의아했다. 그런 맥락에서 소위 ‘국가주의의 음험한 도래’라는 관점에서 응원 열기를 분석하는 일련의 흐름도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붉은 악마들은 거창하게 정치와 세상을 바꾸겠다는 목적을 가지지도, 월드컵을 통해 국운을 상승시켜 보자는 대통령의 말에 감화된 이들도 아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지 개인적인 유희 추구가 시대적 흐름을 주도하던 때에 우연히 집단주의적 열기가 만나 크게 부각되었을 뿐이며 오히려 ‘정치의 시대’가 ‘유희의 시대’로 변모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생각했다.돌이켜보면 이제까지 광장이라는 것은 학생운동을 위한 또는 각각의 필요에 의한 투쟁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이것은 암울했던 현대사가 낳은 금기로서, 이 때문에 학교나 정부기관에서는 광장을 협소히 만들거나 식물을 심는 방법까지 동원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난 6월 광화문 광장에서는 거의 처음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광장의 다른 용도가 보여졌다. 정치적인 목적이나 투쟁이 아니라, 단지 우승을 염원하거나 응원열기를 즐기려는 인파로 가득했던 것이다. 즉 국민의 축제로서의 의미로 광장에 집결해 뭉치고 소리를 냈던 것이다.그러나 이 광장의 의미변화에 대해 각종 언론에서는 광장에 대한 금기의 파괴라며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으로 일관했었는데, 과연 그렇게만 보아도 되는 것일까. 개인주의로 일색된 현대사회에서 IT기술의 소통 덕분에 폐쇄된 공간, 혼자만의 공간인 사이버에서 현실의 공간, 공동체의 공간으로 우리 젊회의식, 정치의식이 없이 군중이 모이게 되는 것은 자칫 권력에 그 모임이 이용당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것을 분명히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2) Red complex붉은 악마의 유니폼 색깔은 당연히 빨간색이었다. 그들은 거리를 온통 붉은 색으로 만들어 언론에서는 이를 보고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껏 붉은 색이 공산주의와 투쟁의 색깔로 인식되어온 까닭에 금기시되어 왔었다. 북한이나 중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색이 붉은 색이며 투쟁의 머리띠에도 붉은 색이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이것은 붉은 색이 갖는 힘과 열정, 선동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붉은 악마가 분명 그 색깔의 터부를 깨고 국민이 자연스럽게 붉은 색을 대할 수 있도록 했으나, 언론에서 말하듯이 그들이 과연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해낸 것일까.그러나 그들에겐 애초부터 레드 콤플렉스가 없었다. 그들은 판에 박힌 진보와 보수논쟁에 흥미를 잃은, 개혁이나 참자유 추구에 대한 의지도 없었다. 그 동안 존경과 고귀함의 표상으로 깎듯이 경례받아온 존귀한 태극기도 일상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감히(?) 몸에 두르고 치마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는 굳어진 성역이나 금기가 몸에 베어있지 않은 세대인 것이다. 피가 끓고 눈물이 나게 했던 한이 담긴 노래 아리랑을 빠른 템포의 응원가로 부를 수 있는 이 상식 파괴의 행동 역시 그들이 생활 속에서 금기에 억눌려 지내는 까닭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들이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해내는데 일조했다는 측면이 있으나, 그들이 주체적으로 의식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 오비이락으로 만들어진 현상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엄밀히 말해 붉은 악마를 통한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붉은 색에 자유롭다는 것, 투쟁이나 정치적인 목적에 대한 의식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2. W세대의 등장(1) W세대와 N세대작년 한일 질의 에너지로 나타날 것이라며 평가기사를 쓰곤 했던 것이다.W세대 이전에는 젊은이들을 일컫는 세대용어로 X세대나 N세대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N세대들은 인터넷 네트워크를 생활화해 이용하는 데에서 그 말이 비롯되었는데, W세대가 첨단기술의 대형 전광판과 인터넷을 매개로 모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N세대와 W세대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그러나 N세대는 네트워크(network, on-line)안에서 한국의 기존틀을 벗기고자 일조해 왔지만 W세대처럼 오프라인(off-line)상에서의 활동까지는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둘은 차이를 가진다. 그리고 W세대가 한국 사회에 보여준 변화으로는 레드 콤플렉스 탈피, 거리군중을 시위대로 모는 고정관념의 거부, 지나친 엄숙주의의 타파, 기성세대와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금기시되어왔던 ‘악마’의 자연스러운 애칭화, 권위와 경배의 상징인 태극기의 패션 활용 등을 꼽는다. 또 N세대가 지녔던 개인주의에서 자발적 응원과 애국심을 낳게 한 붉은 악마라는 촉매를 통해 W세대의 건강한 집단주의로 완성됐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나 청소년 등 일상에서 소외되어 왔던 잠재력 집단의 참여 등도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이었다.(2) W세대의 미래언론은 이러한 평가에서 그치지 않았다. 월드컵이 이후 이른바 W세대나 R세대 등으로 불리는 새로운 대중을 우리사회의 성장축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에 이른 것이다. W세대 특유의 자발성과 열정, 창의성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 시너지효과를 내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W세대는 그 특성상 공동체 의식이 강해 기성세대와도 쉽게 결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적 자긍심도 높다. 신명난 응원에서 나타나듯 명분과 공간만 제공되면 열정적으로 참여할 에너지를 지닌 민중이라는 점이다.인터넷 주도계층인 20대들이 사이버 세계만 머물지 않고 현실세계로 뛰어든 것은 분명 사회변화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속하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 폭발력, 동류의식 등의 특성으로 대중문화의동방향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만 W세대들은 결정적으로 이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명문에 대해 심도 있는 검토가 미약하면 그들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도 있으며,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변화를 양산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 결과는 월드컵의 이면의 정치활동에서, 촛불시위의 과정에서 실제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는 이 W세대가 만들어낸 문화가 초래한 결과에 대해 월드컵의 이면, 촛불시위를 비교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III. 붉은 악마와 촛불시위1. 촛불시위의 논란월드컵의 흥분 뒤에는 온 국민이 분개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미순이 효순이 사건’이라고 불리는 미군 장갑차에 의해 우리나라 여중생 두 명이 무참히 깔려 죽은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6월의 광장을 붉은 물결로 장관을 이루게 했던 그곳은 이제 촛불로 밝게 가득 매워졌었다. 이 시위는 효순이와 미선이가 운명을 달리한 후에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어져 버린 재판의 결과에 대한 분노와 어린 목숨들의 한을 승화시키자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효순이와 미선이 뿐만 아니라 지난 반세기 동안 쌓여온 미국에 대한 한의 응어리가 효선이 미순이 사건이 매개체가 되어 촛불시위란 형태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그러나 촛불시위는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채 쉽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촛불시위가 쉽게 무너진 이유는 시위가 조직적이지 못했다는 점과 시위의 목표나 내용에 알맹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번 촛불시위에 모인 사람들은 네티즌이나 일반 시민들로서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조직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인 까닭에 이들을 결속시키는 작업이 부족했다. 시위에 대한 당위성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분위기에 편승해 자리를 했던 만큼 그 열기는 쉽게 식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여론을 설득하기 위해서 내용에 대한 체계적 이해와 논리적 해결방법을 강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응집력은 있었으나 결속력이 부족해 촛불시위가 큰 반향을 일으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