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부들의 순교와 동정들어가는 말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최초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한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그의 안에서 이루어진 성부 하나님의 역사를 감지하시고서 그를 “반석”이라고 부르셨으며, 그 반석 위에 튼튼한 교회를 지으실 것인데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교회를 소유하실 것이다. 둘째, 이 교회는 이 세상뿐만 아니라 지옥의 권세와 세력의 배척을 받을 것이다. 셋째, 이 교회는 마귀와 그의 모든 간계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속할 것이다.오늘날까지 교회가 통과해온 모든 경로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예언을 증명해준다. 교회는 지금까지 거친 풍파를 헤쳐 왔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림으로 교회는 존속되어 왔다. 교회는 순교를 사모했고 ‘죽고자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하는 자는 죽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순교를 통한 신앙의 완성을 기대했고 이를 실천해왔다. 진정한 영성에는 고통과 분리될 수 없는 극기를 전제해야 하는데, 초대 교회 당시에은 어떤 형태로든지 죽음까지도 예상되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금욕 수행자와 순교자는 참된 영성인들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박해와 무서운 형벌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라는 풍성한 수액을 공급받아 성장했고 순교자들은 교회의 최고의 영예로운 인물들로 존경받았다.1. 초대교회 박해의 역사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 역사의 매우 초기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주후 41년부터 44년까지 유대의 행정장관이 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선왕 대헤롯의 왕국을 재현시킬 생각과 유대인 신하의 호감을 사기 위하여 기독교인을 박해하였다. 이 박해로 스데반이 순교한(행7:54-60)후 잠시 평화로웠던 예루살렘 교회는 다시 소란하여졌으며, 요한의 형 야고보가 순교하였다. 그러나 이 박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행8:2) 복음의 씨는 오히려 유대지방을 넘어 사마리아, 황제는 갈릴리 지방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살아 남은 유대인들 중 만칠천명은 애굽이나 그 밖의 다른 나라로 팔려가 종살이를 했고, 이천명은 티투스가 개선하여 로마로 돌아갈 때 그를 따라갔다. 그들 중 일부는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었고, 나머지는 또 다른 방법으로 살해되었다.속사도들 가운데서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끌려가면서 “칼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었다. 그는 복음이 가르치는 구원과 내세를 너무나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한번은 대적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 모든 것이 허울뿐인 거짓이라면 왜 내가 결박되어 있겠습니까? 왜 내 자신을 죽음과 불과 칼과 맹수의 입에 내주겠습니까?” 또한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불과 십자가 앞에서도, 맹수 떼 앞에서도, 뼈가 으스러지고 사지가 절단되는 고통 앞에서도, 온 몸이 산산조각 나는 아픔 앞에서도, 마귀가 가하는 모든 사악한 고뇌 앞에서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즐거워하리라”고 썼다. 그는 안디옥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된 뒤 콜로세움에서 사자들에게 던져졌다. 로마제국의 황제 트라얀(Tranus, 98-117) 통치 기간에 순교했다.이그나티우스의 글을 받은 바 있는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은 안토니어스 피어스 황제 통치기간(138-161)에 순교를 당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지막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행정관이 폴리갑의 인격과 연로함을 보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희생제물을 바치면 죄를 용서하고 석방시켜 주겠다고 제의를 하였다. 그러자 그 행정관에게 “나는 86년간이나 그분을 섬기었으나,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한 내 왕을 비난할 수 있겠느냐?”고 하여 결국 화형에 처해졌다. 타는 불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 저 같은 것을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해 주시고, 예수님의 고난의 잔에 참여시켜 주시는 이 날을 감사 찬송 드리나이다.”하고 기도했다. 이때 이상한 것은 불길이 폴리갑의 몸을 태우지 않고 좌우로 갈려 그의 몸 그리스도의 참된 모방자들이고 추종자들이므로 그들을 공경할 수 있다고도 한다. 177년 경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갈리아 지방의 비엔느와 리용의 공동체들은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그들을 찬양하였다. "베띠오 에빠가토는 그리스도의 참된 추종자였다. 그는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따라가다가 순교로 어린양의 죽음까지도 따라 갔도다."라고 찬양하였다. 순교자 치쁘리아노 성인은 양떼들에게 인내와 고통의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을 의무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이들은 누구나 고통 당하신 그분을 본받음으로써 그분의 동료와 동업자가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2. 초대 기독교인들의 순교에 대한 카리스마(은사)적 이해초대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신비적인 차원으로 이해했고 사모했다. 그들은 순교자가 진실로 특권을 입은 개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순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가장 완전히 부합되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순교자라는 용어를 그리스도를 위해 죽은 자 혹은 그렇게 하려던 자에게 사용했다.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사람들은 “고백자”(혹은 때로 “순교자”)로 불려졌으며, 비슷한 존경을 받을 권리를 얻었다.초대 기독교인들은 순교자들의 영예를 하나님의 사자(천사) 혹은 지상의 신으로서, 신령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옷 입은 자로 여겼다. 로마의 히폴리투스는 3세기 초경에 쓴 구절에서, 주님을 위해 감옥에 갇힌 자는 안수 예식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장로직의 영예를 주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고대 교회의 “성인”이었으며, 적어도 처음 두 세기 동안에는, 오직 그들만이 죽자마자 즉시 그리스도를 만나 뵙는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졌다.터툴리안의 잘 알려진 어구에 의하면, 교회를 자라게 만드는 것은 바로 순교였다. 즉 기독교인의 피가 씨앗이 되고 교회는 성장한다고 믿어졌던 것이다. 반면 초대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은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순교에 따른 권리를 요구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들이 홀로 고난당하고 있지 않다는 굳은 확신이 동반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가능한 한, 가까이 따르고 있었으며 그들의 고난 속에서 그의 현존을 체험하고 있었다. 『폴리캅의 순교』에서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 그리스도와의 결합이 압도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어서, 어떤 고통의 느낌도 제거한다. 즉 순교자들은 이미 육체밖에 있는 천사적인 존재가 된다고 믿어졌다.예루살렘의 시릴에 의하면, 고난 중의 순교자를 돕는 분은 위로자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성령이다. 그는 고난 받는 자에게 희망의 말을 속삭이며 그에게 잠시 낙원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고난받는 자는 그에게 가해지는 고문을 극복한다. 사실상 순교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언하도록 하는 힘은 성령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2:3을 인용하는 시릴의 말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3. 초대 기독교인들의 순교에 대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재연으로서의 이해초대 기독교인들은 순교자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갱신되며, 그들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대표적으로 리용의 순교자 중의 하나인 쌍투스의 몸 속에서 그리스도는 고난 받으셨고 위대한 기적을 이루셨다고 『사도들의 교훈』에서 나타난다.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체험이 고통에서의 구제를 가져온다고 기록된 『폴리캅의 순교』에서처럼, 리용의 순교자 중의 한 사람에게서도 같은 체험이 기록되고 있다. 그녀는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에 끝내는 의식을 잃는다. 이러한 고통에서의 해방은 “그녀의 희망, 그녀가 믿었던 바를 붙든 것과 그리스도와의 교제 때문에” 그녀에게 허락되었다. 『펄페투아와 펠리시티의 수난』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사투루스와 펄페투아에게 위로를 가져다 주는데, 그들은 원형 경기장 내의 투기장에서 죽을 운명이었으나, 천사들에게 이끌려 주님의 현존에로 들어갔다. 그리고 네 천사들이 그들을 들어 올렸으며, 그들은 천사들에게 입맞추었고 천사들은 손으로 그들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고 한다.『폴은 많은 사람을 위한 정화가 된다. 아마 예수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을 때 우리가 예수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것과 똑같이, 어떤 사람들은 순교자들의 보혈로 값 주고 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일 의롭다함을 입었을 뿐 순교자가 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었을 때보다 더 높이, 그들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아퀼레이아의 크로마티우스는 4세기 말경에 쓴 저서에서 “물세례는 확실히 좋은 것이다. 그러나 순교자의 세례는 더 좋은 것, 아니 가장 좋은 것이다. 전자는 사유이며, 후자는 상급이다. 전자는 죄의 사유인데, 후자를 통해서는 덕의 면류관을 공로로 얻게 된다.”고 goTEk.5. 초대 기독교인들의 수도원 운동에 대한 순교적 이해터툴리안의 글 속에서 순교자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감옥은 마치 실제로 수도원인것 처럼 묘사된다. 수도 생활은 금욕에 의한 매일의 순교였으며, 순교자의 영웅적 행위에 대한 대치물이었다. 제롬은 그의 수도사들에게 행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 흘리는 데에만 순교가 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순교는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열망했던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 이집트의 안토니가 그랬듯이, 수도사는 언젠가 그도 실제로 피를 흘릴 기회를 얻게 되리라고 희망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수도자적 신분은 순교로 지칭되었으며, 사실상 강제로 죽임을 당하지 않은 거룩한 사람들이 순교자로 언급되는 경우가 점증하고 있었다. 예를 들명 슬피키우스 세베루스는 그의 동시대인이며 4세기 초에 죽은 투르의 마틴에 대해 실제적인 순교의 고통은 겪지 않았지만 피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순교하였다고 말했다. 즉 배고픔과 잠을 자지 못함과 벌거벗음과 금식과 질투하는 자들의 가혹한 말과 불의한 자들의 박해등을 겪는 일을 순교의 행위로 보았던 것이다.6. 초대 기독교인들의 동정성 이해3세기 말경에 이르러 동정성은 순교에 비교되고 있었다. 올림풋의 메토디우스는 동정을 지킨 이가 주님을 좇아 천국에 들어가는 첫 번째 사람일 것이라고 기록한다.했다.
교부들의 성경들어가는 말교부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가장 위대한 교과서였고 가장 오래된 책인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그리고 큰 권위를 가진 책이었다. 그들은 진지하고 철저하게 성경에서 동기를 얻고 성경에서 지식을 얻으며 성경을 모든 철학과 인간의 사상을 재는 척도로 삼으려 했다. 비록 그들이 피타고라스주의, 신플라톤주의, 스토아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할지라도 그들은 주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스철학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두기위하여 그리스철학도 궁극적으로 성경이나 성경인물로부터 그런 요소가 유래되었다고 생각했고 지속적 가치가 있는 모든 지식은 성경으로 환원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는 무한한 영적 보고로서 신비적 차원에서 이해했다.성서의 두가지 의미초대 교부들은 성경의 의미에 두 의미 혹은 두 차원의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즉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이다. 이것은 초대 교부들의 믿음의 조항(the article of faith)이다. 이 의미에 대한 교부들의 입장은 다음의 세 학파, 즉 흔히 문자적 의미를 경시하면서 영적인 의미에 지나친 비중을 두는 학파와 영적인 의미를 경시하면서 문자적 의미에 지나친 비중을 두는 학파 그리고 다소 중도 노선을 걷는 학파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오리겐이다. 두 번째는 안디옥 학파와 서방의 펠라기우스주의자들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중도노선에는 매우 정교한 알레고리를 사용할 줄 알지만 문자와 영 모두를 중시하는 어거스틴을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다.(1) 알렉산드리아(Alexander) 학파의 풍유 해석학풍유 해석학(allegorical Hermeneutics)은 주후 2-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생겨난 성경해석 방법으로서 영적인 의미를 찾고자 하는 방법이다. 이 성경 해석 방법을 지명 이름을 따 알렉산드리아 학파(The Alexandrian School)의 성경 해석학이라고도 한다. 이 학파의 는 희랍 철학을 이용하여 성경을 해석하고자 했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자적인 의미는 성경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없고 풍유적 해석을 통해서만 성경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풍유적인 해석 즉 알레고리적 의미와 유형론적 의미는 다르다. 유형론적 해석은 구약의 일정 인물과 사건이 보편적으로 유형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신성한 실재였음을 믿는 해석이었다. 반면 알레고리적 해석은 희랍에서 기원이 되어지며 신의 메시지에는 신비스러운 의미가 있기 때문에 문자적인 의미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고 봤다. 그래서 풍유적인 해석(영적, 형이상학적)이 필요하다고 봤으며 영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신적인 기원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신적인 것은 영원하고 비역사적이며 초월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은 한계성이 있고 현상적인 것이다. 오리겐도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알레고리는 대체적으로 역사성을 완전히 부인하거나 아니면 더 깊은 의미를 위해 역사성을 무시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이나 제롬은 알레고리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교부들에게는 위험성이 명백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풍유적 해석의 대표적인 인물은 클레멘트와 오리겐을 들 수 있다.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5)클레멘트는 교부 주석가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헬라 철학의 신적 기원을 믿었다. 그는 성경이 참뜻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클레멘트는 “성경의 감추어진 의미는 모든 사람을 위해 적합하지 않고 단지 참 지식(the true Gnosis)을 위해 선택받은 그 완전한 기독교인들을 위해 적합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성경에 다섯 가지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론화시켰으며 가장 심오한 의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밝혀지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다섯 가지의 의미는 역사적 의미(Historical sense), 교리적 의미(Doctrinal sense), 예언적 의미(Prophet라톤(Platon)이 이데아(Ideas)의 영역이라고 부른 하나님의 영역은 모세(Moses)가 모든 것을 우주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장소라고 말한 것처럼 얻기 힘든 영역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멀리서 보여 졌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세대(generation)의 영역 안에 있었으며 그는 천사에 의해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는 지식의 그런 순전하고 영적인 적용에 의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라고 말한다.”② 오리겐(Origen of Alexandria and Caesarea, 185-254)오리겐은 클레멘트의 탁월한 후계자였다. 그는 성경이 풍유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오리겐은 “지금까지 아마추어들의 습작에 지나지 않았던 성경 해석에 숙련가의 솜씨를 첨가한 사람이었다.” 제롬(Jerome)은 오리겐을 가리켜 아리안(Arian)주의자라고 불렀고 거짓말 하는 것을 승인하는 사람이라고 혹독히 평했다. 그러나 라이트푸트 감독은 오리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칭찬의 말을 한다. “그는 명백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옛날이나 현대를 막론하고 뒤따라오는 주석의 가치 있는 상당한 부분이 오리겐으로 인한 것이다. 깊이 있는 사상가요, 정확한 문법학자요, 가장 열심히 노력한 일꾼이요, 가장 진지한 기독교인인 그는 성경 해석의 기초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정도로 성경 해석의 구조를 이룩해 놓았다.”그는 언어에 있어서나 본문 연구에 있어서나 그 당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깊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리겐은 사람이 몸(body), 혼(soul), 영(spirit)의 세 구성 요소로 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도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몸에 해당하는 것은 문자적 의미요, 혼에 해당하는 것은 도덕적 의미이며, 영에 해당하는 것은 풍유적이거나 신비적인 의미라고 오리겐은 생각했다.오리겐을 그의 학적인 깊이를 가지고 성경 본문을 해석했지만 그의 전제가 플라톤의 전제였 알레고리를 함께 제안함으로써 사실상 역사적 낙원의 의미를 제거하고 만다.(2) 안디옥(Antioch) 학파의 문법적 역사적 해석안디옥 학파는 구약의 사건들과 복음서의 사건들을 역사적인 것으로 믿었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르나 타르수스의 디오도르같은 4~5세기의 주석가들은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을 거부하였고, 영적인 의미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문자적 또는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안디옥은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최초로 이방인이 신자를 크리스천이라고 불렀던 곳이며 동방 제국의 수도였다. 안디옥학파에 의하면 성경의 주된 의미는 역사적인 의미 즉 문자적인 의미라고 믿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성경의 깊은 의미를 풍유적인 방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안디옥학파는 성경의 깊은 의미는 theoria(θεωρια)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봤다. Theoria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나 희랍어로 Theoria는 “보다” “관찰하다” “묵상하다(contemplate) ”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사고나 논리적인 추론이라기 보다는 이미 소유한 지혜나 지식을 관조하는 통찰력(insight)을 의미한다. 확정되지 아니하고 변화하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사변이나 논리적인 추론이 필요하지만 이미 확정되고 확고 부동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여기서 Theoria는 관찰 혹은 통찰력이라는 말로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기초로해서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성경은 구속사이다. 구속사이기 때문에 예언과 성취가 있고 그 가운데 모형과 원형이 있다. 가령, 가인은 회당을, 아벨은 교회를,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와같이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유지하면서 그 문자가 예표하는 깊은 영적 의미 즉 theoria을 찾는 방법이다. 예표론은 성경의 역사에서 이전의 사건들(출애굽, 가나안, 할례)이나 사람들(아담, 요셉, 다윗, 솔로몬, 모세, 엘리야)이나 제도들(제사제도, 성전)을 예정적인 실체나 '예표로 이해하였음을 전제한다.램(B. Ramm)의 다음 말은 이를 잘 뒷받침해주고 있다. “우화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구약 사건의 명백한 역사적 의미 위에 유동하고 있는 의미는 또 다른 하나의 영적 혹은 신학적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시리아 학파(안디옥 학파)에 의하면 역사적 의미와 메시야적 의미는 마치 피륙(옷감)의 가로와 세로의 올이 결합된 것과 같은 것이다. 구약의 메시야적 의미라고 해서 역사적 의미 위에 유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사실을 해석함에 있어서 풍유적 해석가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의미가 그 본문 속에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안디옥 학파는 그 사건이 믿음과 신뢰의 행위를 대표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역사적 도시 하란(Haran)에서 가나안(Canaan) 땅으로 옮긴 것으로 해석한다.안디옥 학파는 중세와 종교 개혁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계시의 발전을 인전했고 구원에 관한 계시가 창세기에서 얻은 것보다 누가복음에서 얻은 것이 더 풍성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의 통일성이 기독론적임을 인정했다.하지만 안디옥 학파는 이렇게 훌륭한 성경 해석 방법을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을 잃고 말았다. 그 이유는 데오도르의 제자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이해하여 양성의 교통을 부인하므로 안디옥 학파는 정통에서 떠났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따라서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안디옥 학파의 제어가 없는 형편 가운데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더욱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풍유적 해석은 날로 성행하게 되었다.(3) 제롬(Jerome)과 어거스틴(Augustine)- 중도 노선제롬(347-419)은 주석가로 보다는 번역자로 잘 알려진 학자이다. 그의 벌게이트(Vulgate, 라틴어 역 성서)는 그가 남긴 큰 공헌이다. 제롬은 빌레몬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디도서의 주석을 썼다. 그는 히브리어와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개혁자들의 삼위일체론1. 들어가는 말아우구스티누스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잘 계승하는 동시에 창의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은 마틴 루터와 칼빈에게 영향을 주어 종교개혁의 뿌리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성을 띄게 된다.본 발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종교개혁자들의 삼위일체론을 연구하여 삼위일체론 전체 역사 흐름 가운데 고대와 중세의 전환점에 위치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16세기 종교개혁 사이의 삼위일체론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한다.2.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요약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은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기아 교부의 삼위일체론과 연결점을 보여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들처럼 교회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으며, 사벨리우스주의를 경계하며, 한편으로는 아리우스의 종속론을 극복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카파도기아 교부의 신학과 연관성을 지닌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고수하고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하다고 가르쳤다.그의 삼위일체론은 구원을 위한 실천적이고 필수적인 항목이었으며 이는 그가 영혼 안에 담긴 삼위일체 형상을 묵상함으로써 인간 영혼이 형상의 원형인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확인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사에 있어서 계획하시는 성부. 실현하시는 성자, 우리안에 적용하시는 성령의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의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으로서 유지 되어야 한다고 밝힌다.)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도입한 관계의 개념을 발전시켜 관계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사용했으며, 이는 서구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삼위일체적 유비를 강조하고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의 친교와 사랑이라고 정의하여 고유한 방향으로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다.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 유비를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의 삼중구조에서 찾음으로써, 관계의 삼위일체론을 지향하였다 있다.)중세 초기에는 프로소파(prosopa), 페르조나(persona)등의 중요한 용어들을 설명하는데 논의가 모아졌다.) 먼저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 전통은 하나님의 일체성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삼위성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신적 실체 안에 존재하는 세 위격들에 대한 표상은 서방교회 신학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서구의 사고에 있어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표상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이고 움직이지 않으는 분으로 고난을 받을 수 없는 존재로 규정되었고, 삼위일체론은 불가피하게 추상적인 단일신론으로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페르조나(persona)의 의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단순히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킨다는 입장을 배격했다.) 그 결과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을 설명함에 있어서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페르조나(persona)개념을 차용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들의 ‘관계’ 안에서 존재하신다는 성서의 증언을 도외시함으로써, 점차로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경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이에 따라 아퀴나스는 단 하나의 신적 본질 속에 그 단일성이 있다고 생각한 단 하나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일체된 세 위격들의 표상에 도달하였다. 그는 그의 저서『신학대전』에서 자연신학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과 그 하나님이 한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한 연후에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관해 논하여서 삼위일체 교리를 주변으로 내몰았다.) 이리하여 아퀴나스 이후의 중세 서방교회 신학은 아퀴나스를 따라 주로 하나님의 단일성을 먼저 말한 후, 삼위일체론은 부수적으로 다루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점처 서구 신학계에서는 삼위일체론이 구원론적 의미를 잃어가고 하나님의 내적 비밀에 대한 사변적인 탐구로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삼위일체론은 단지 하나님 안에 있는 신비를 다루는 무의미한 사변이나 신앙의 본질과는 무관한 부수적 교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중요성은 여전히 받아들여졌지만,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에라스무스와 같은 르네상스의 여러 기독교 인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루터, 쯔빙글리, 칼빈은 신성의 내적 삶의 신비를 너무 합리적으로 살피는 것을 피하였다. 이들은 가능한 한 스콜라 신학의 머리를 짜내는 작업은 피하면서 교부시대에 성립된 삼위일체의 교리를 고백하고자 하였다.)하지만 기념비적인 16세기 동안, 루터와 쯔빙글리가 시작한 개신교 종교개혁의 성공은 이전보다 기독교 전통에 도전할 수 있는 자유를 창출하면서, 삼위일체에 대한 새로운 고찰은 피할 수 없었다. 소위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온 “반삼위일체적 합리주의자들”은 개신교 지역에서 은신처를 찾았고 개신교도들로 하여금 전통적인 가톨릭 구원론과 성례전 교리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삼위일체에 관련된 교리들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고자 하였다. 세르베투스와 파우스투스 소치누스와 같은 과격파 종교개혁자들의 도전은, 니케아의 삼위일체 신앙에 대한 정통을 따르고자 했던 제도권 종교개혁자들로 하여금 이들 추종자들 사이에 계속 되는 삼위일체 신앙을 옹호하게 하였다.1) 마틴 루터마틴 루터는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의 기폭제이면서 중심적인 지도자로 알려져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서 사제 생활을 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구역 담당 보좌신부로 여러 차례 아이스레벤 지역에 체류했다.)그는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에 소재한 성당 문에 그 유명한 “95개 조항”을 게시하면서, 루터는 교리적인 성찰에서 논리와 사색을 강조했던 중세 스콜라 신학을 반박하였고, 니케아 신조와 삼위일체 교리를 포함한 모든 교회의 전통을 파기하려 했던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다른 개신교도들을 반박하였다.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에 반대하여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는 영원 속에서 신성의 삼위일체적 삶의 내적 작용들에 대한 사색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는 스콜라 형이상학을 “매춘부”라고 몰아붙였고,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모든 형이상학을 대담하게 십자가에 매달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이고 영원하며 삼위일체 실재를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삼위일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소박하면서도 단순한 예화”를 사용하였다. “한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혈육과 그 존재를 받듯이, 아버지께로 출생한 하나님의 아들도 영원부터 아버지로부터 그의 존재와 본성을 받는다.” 이러한 유비를 사용한 루터는 이 유비가 영원한 신성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을 잘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2) 존 칼빈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삼위일체 교리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단연 칼빈이었다. 많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칼빈의 교리는 주로 세르베투스와 같은 이단들에 대한 반박을 위한 것이었고, 새롭다고 할 만한 특별한 것을 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을 답습하여 반복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몇몇 중요한 점들에서 삼위일체론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먼저 그의 신학적 구조는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띄고 있다. 이를 칼빈 신학의 집대성인 『기독교 강요』최종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4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권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2권은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3권은 성령을, 그리고 4권은 교회를 다루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점에서 창조를, 구속을, 성화를, 교회를 볼 때에라야 제대로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한 분이라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자신이 삼위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머리에는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 떠돌 뿐 참 된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또한 칼빈은 삼위일체론은 구약과 신약의 증언에 대한 교회의 주석으로서 “교회에 속한 교의”라고 말한 바르트의 견해나, 삼위일체 교리는 복음을 왜곡에서 지키려고 했던 노력에서 나온 “방어적 교리”라고 말한 브루너의 주장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성서에 근거한 삼위일체를 주장하려 하였다. 그가 모든 진리를안하였다. 이를 통해 각 위격이 스스로 존재하는 신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모사요 만물을 질서있게 배열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을 주장하시는 분이다.” 이처럼 삼위가 서로에 대해 구별되는 독립적인 존재라면, 삼위는 어떻게 하나가 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당연히 제기된다. 칼빈에게 삼위는 각각이 구별된 하나님이지만, 서로가 상호 내주의 관계를 통해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성부는 창조자요, 성자는 구속자요, 성령은 성화를 가져다 주는 분이라는 식의 정통적인 신성 분업 이론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자요, 구속자요, 동시에 성화를 가져다 주는 자였다. “질서를 가진 상호관계 안에 있는 세 구별되는 위격들” 이것이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요체이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는 단일하나 이 단일성은 경륜의 신비를 통하여 삼위로 나타나셨다. 신분이 아니라 지위에 있어서 삼위이고, 본질이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 삼위이며, 능력이 아니라 현현에 있어서 삼위이다.” 또한 그는 필리오케의 서방의 전통을 따른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고, 성부가 성자를 낳았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발출되었다는 서방의 전통적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하나의 나누어질 수없는 신성 안에서 상호 내주하는 인격적 관계들 혹은 실재들이라는 칼빈의 사상은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다.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상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는 또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삼위의 광채에 둘러싸이지 않은 채 한 분을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즉시 한 분께 돌아오지 않은 채 세 분을 구분할 수 없다”)또한 칼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는 사색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으로 보았다. 그가 세르베투스와 같은 반(反) 삼위일체론자들과 그토록 치열하게 논쟁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의 영성1. 들어가는 말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신학이 다 그의 신학에 기초를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100권이 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와 수많은 설교문과 서신들은 서양 문화와 사상을 바꾸어 놓았다. 그의 영성은 신학적으로 바울의 영향을 입고 철학적으로는 신플라톤주의의 방법으로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에서 위대한 영향을 끼쳤다.)그의 영성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주제들이 거론될 수 있겠으나 본 발제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목회와 신학의 뿌리였던 그의 기도에 초점을 맞추려한다. 사실 그는 『고백록』을 통해 자기의 생애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삶을 지탱한 뼈대가 다름 아닌 기도와 실천, 그리고 또 그 기도와 실천이 변증법적으로 연결되는 특징을 이루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와 실천의 변증법적 삶의 특징은 기도가 삶과 사상의 뿌리가 되어 실천으로 승화되고, 또한 실천에서 발견된 모티브로 다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역동성을 말한다.또한 그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정가운데 겪어야 할 영적 싸움, 즉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일을 강조하며 영성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성장함을 말한다. 이를 통해 성숙한 기도의 단계에서는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하나님 한분만을 즐거워하게 된다. 이렇게 기도로 하나님께, 또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그의 기도 영성은 마음의 영성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이러한 그의 기도의 영성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그의 삶을 하나님께 향하는 여정으로 이해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기도에 영향을 끼친 배경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의 기도와 영적싸움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고찰하고 이어서 그의 영적 진보, 관상적 체험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2.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의 여정앞서 말한바와 같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성은 기도와 청해야 할 중요한 때에 냉담한 자기를 이상히 여기며 어머니의 간절한 중보의 기도가 역사함으로 자기의 영적이며 육적인 이중적 죽음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힘입게 했노라"고 고백한다.)아우구스티누스는 "그와 같은 두려운 공격이 내 어머니의 자애의 가슴속에서 극복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 질병은 치료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그 사랑을 나는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녀의 해산의 고통, 육체를 이 세상에 출생했을 때 겪었던 그것보다도 성령을 통해 나를 출생케 했던 것이 더욱 심했다. 계속적으로 당신에게만 향해진 그 같은 기도들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오! 자비의 하나님! 당신은 하루에 두 번씩 빠지지 않고 계속 당신의 보좌에 희생을 드리는 한 과부의 순수하며, 절제와 함께 드리는 겸손하며 상한 심령을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아직 불신앙 속에 있었던 자기를 위해 기도한 어머니의 경건성을 여러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그의 『고백록』에서 그의 생애에 어머니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회심 사건 이후의 어머니와의 신학적 대화 속에서도 밝히고 있다.신학적 소양과 신앙의 경건성을 소유한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에 직면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객지에서 영면하기 직전에 보여준 어머니의 결단성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기술하기를 "너희들은 나의 몸이 어디에 묻히는 것에 개의치 말아라. 유일무이하게 너희들에게 요청할 것이 있는데 너희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주의 제단에 거할 나를 잊지 말아라."라고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영적 거장이 된 배후에는 어머니의 감동적인 기도가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회심 후의 삶은 그가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고도 남는다.)한편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회심과정에서 신플라톤주의뿐 아니라 빅토리누스의 회심 사건과 그가 알려준 안토니의 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가 그의 회심에서 발휘한 역할을 감춘 적이 없으며, 평생 동안 플라티누스의 지성에 심어 놓은 영상들에 의해 자신이 여전히 공격받고 있다고 고백함으로써 영적싸움의 끝없는 연속성을 밝힌다.)이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다양한 육체적 작용과 정신적 작용 안에서 경험하는 갈등을 인정했다. 이 긴장상태는 피조된 영 자체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과 자아 사랑 사이의 보다 근본적인 구분의 표현이라고 이해되었다. 인간의 영은 원래 하나님의 진리와 아름다움과의 연합 안에서 만들어지고 세워졌다. 지혜의 인도를 받는 영혼은 자신의 모든 작용을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향하게 함으로써 그 작용들의 조화를 이루었다. 천사들의 원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원죄 역시 인간 개인의 선과 물질 세계를 지배하는 것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이다. 피조물은 신적 지혜의 인도하심을 거부했고, 교만하게도 자율적인 선택권을 행사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과 육에 대한 바울의 개념을 하나의 영혼이 지니는 두 개의 반대되는 지향이라고 설명했다. 사랑 혹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 그리고 교만 혹은 피조물의 자율성, 피조된 영혼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바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지향하는 태도에 반대함으로써, 자신의 파생된 선과 능력을 선호함에 의해서 내적으로 분열하여 “육”(flesh)이 된다. 이를 표현하며 그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의 쇠사슬에 의해서가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의 의지의 쇠사슬에 의해 묶여 있었습니다. 원수가 내 의지를 지배하여 그것으로부터 쇠사슬을 만들었고 그 쇠사슬에 의해 나는 묶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왜곡되어 육욕이 생겼고, 육욕을 계속 따름으로 버릇이 생겼으며, 그 버릇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이 생겼기 떄문입니다. 오, 나의 하나님, 당신을 자유롭게 예배하고 즐기려 하는 '새로운 의지'가 내 안에 태어났어도 그 의지는 아직 약해서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강한 '옛 의지'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이리하여 나의 두 의지, 즉 옛 의지와 새로운 의지, 육의 의지와 영의 의지는 내 안에서 서로 싸워 내 영혼을 찢어 놓았형을 따르고 있다. 그는 또 『영혼의 크기에 관하여』에서 영혼의 7등급, 즉 생명, 감각, 예술, 미덕, 평안, 접근 그리고 묵상을 말하기도 하고, 이 단계들을 "육체의 영혼, 육체를 통한 영혼, 육체에 대한 영혼, 영혼 자체를 향한 영혼, 자기 자신 안의 영혼, 하나님을 향한 영혼, 하나님 안의 영혼"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고 한다.)이러한 여정의 과정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자아로 가기 위해서 감각적인 욕망과 인식의 대상에 과도하게 집착하는데서 비롯된 도덕적 무질서와 오류로부터 정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직 그런 예비적 정화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반성과 내성에 들어서게 되어 영성의 틀이 구성된다고 한다.)한편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여행에서 지성의 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터툴리안의 "불합리하기때문에 믿는다"는 입장에서 벗어나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는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을 내세웠다. 그에게서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지식과 궁극적 진리의 소유는 축복받고 행복한 삶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는 하나님은 진리의 빛으로 인간의 지성을 께우치시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광채를 보게 되기에 이른다고 말한다.)4.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와 관상적 체험회심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등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인격적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근거하여 끝없는 영혼의 방황을 끝내고, 조물주 하나님의 품안에서 순진무구한 어린애처럼 기도를 통한 에피그노시스(통달의 지식)에 만족한다. 헨리 머로우는 그의 저서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성을 현대인들이 재발견해야할 사색적이면서 동시에 실천적인 지혜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의 사상은 영성과 도덕성과 삶의 구체적인 현실이 전능자이신 하나님과 불연속이 아니라 연속되어 있다고 정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사도직 생활로 인해서 자신에게 요구되었던 각양 각색의 활동들에 몸을 담고 있으므로 바쁜 생활을 했지만, 요소가 포함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서 사랑이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은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여정인 동시에 정신적인 여정이다.그리고 그의 신비적 서술은 형식이나 기교보다는 그의 기독교 생활의 경험, 즉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탐색을 통해 교리와 생활, 신학과 경건 사이의 올바를 결합을 나타내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도들에게조차 내면 생활에 대해서, 관상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그의 고백록 갈피마다 그의 관상적 경향이 속속들이 배어 있음을 볼 수 있다.그대 자신의 밖으로 나가지 말고 안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시오, 진리는 내적인 인간안에 머뭅니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그대의 성격이 끊임없이 변할 수 있는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대 자신을 뛰어 넘어가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이성의 빛을 비추어 주는 빛의 원천에로 나아가도록 하시오.)아우구스티누스의 주요 강조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안으로 찾아들어가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여정이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내면이 영혼의 여정의 첫 단계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양심, 우리의 감추인 곳, 우리의 내실 등,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의 내적 존재에서 우리가 주님을 찾게 되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여러 가지 표현들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머물러 계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곳으로서의 우리 존재의 바로 저 심부라고 하는 동일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그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여행을 설명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위로 올라가고, 하나님은 위로부터 아래로 인간의 경건의 삶 속으로 들어오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은 인간 자신의 능력에만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도가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보이는 세상에 계신 것도 아니고 인간 때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시대의 삼위일체론1. 들어가는 말오리겐 신학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출발한 삼위일체론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도전 속에서, 특히 아리우스 논쟁으로부터 기인한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일단락 지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니케아 신경은 정치적, 신학적, 용어 사용 등의 여러 문제점 때문에 아리우스 논쟁을 종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니케아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삼위일체 논쟁은 결국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결론지어진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기독교 20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경이자 가장 정통적인 신경으로 손꼽히는 신경으로 무엇이 정통인가, 이단인가를 판별하는 결정적 표준이고, 어떤 교회가 올바른 신앙 위에 서 있는지를 규정지을 수 있는 결정적 권위를 가진 신경, 이른바 정통신경 가운데 정통신경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는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기아의 세 교부의 신학적 공헌이 내재되어 있다. 그들은 니케아 신앙을 발전적으로 재해석했고, 성령의 신성을 고백했으며 본질의 하나 됨뿐만 아니라 삼위의 구별을 강조했다. 그들은 신플라톤적 이해에 대항하여 삼위의 존재론적 동등성을 입증하고 삼위일체 안에서의 위계를 거부했다. 또한 그들은 아버지를 근원과 원리로 가르치고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삼위의 내주와 상호침투를 강조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서 모든 의지와 행위가 하나라고 주장함으로써 삼위일체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를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본 발제에서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기아의 세 교부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특징을 간략하게 짚은 뒤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삼위일체론을 계승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2.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니케아 회의 이후의 논쟁 중에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서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였다. 그는 약 30본질) 견해파가 서로간의 너무나 흡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고) 카파도기아의 세 교부가 그의 신학에 완전히 동의했다는 점에서 그의 신학은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에게 하나님의 통일성은 확실한 것이었고 삼위일체는 신비였다. 그에게 문제가 된 것은 그러면 세 인격이 어떻게 한 하나님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카파도기아의 세 교부에 의해 다른 시각으로 다루어진다.2. 카파도기아 세 교부의 삼위일체론현재 터키에 속해있는 소아시아 남부에 위치한 카파도기아에는 “위대한 카파도기아인들”로 알려진 세 사람이 살았다. 이들은 곧 가이사랴의 바질과 그의 동생이자 신비적 명상의 경향을 띤 작품으로 유명한 닛사의 그레고리, 그리고 그들의 친구인 시인이자 웅변가이며 그가 남긴 찬송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회 속에서 고전적 작품으로 남게 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이다.먼저 동방수도운동의 아버지라 불렸던 바질은 수도생활의 조직과 확장, 그리고 니케아 정통 신학의 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방대한 양의 서신교류와 수권의 신학 논문들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침묵과 고독을 즐기는 성격의 닛사의 그레고리는 바질 사망 후 니케아파를 이끄는 지도자들 중 하나가 되었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니케아 신조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승리를 가져오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또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친구 바질의 죽음을 통해 그가 그토록 원했던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한 투쟁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의무감을 느끼고 379년 콘스탄티노플에 나타났고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되었다.)그들은 아타나시우스가 한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그 한 하나님에게 세 인격이 어떻게 관계된 것을 이해하려고 한 것에 반해 세 인격으로 시작하여 그것에 한 하나님이 어떻게 관계된 것을 이해하려고 했다. 즉 이들은 본질(우시아)과 위격(휘포스타시스)을 구분하고, 만약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본질이라면 이들님이라고 선언하고 삼위는 하나의 신성과 능력을 지니며, 모든 면에서 같고 모든 면에서 동일하며, 동일본질을 가진다고 가르쳤다. 또한 하나님에게는 하나와 셋이 매우 역동적인 관계를 가져 하나를 생각하면 셋을 생각해야하고, 셋을 구별하면 바로하나를 고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삼위일체 신학은 구원을 향해 연결됨을 말했다.) 또한 닛사의 그레고리에게도 삼위 중 어느 한 이름이라도 빠진다면 세례의 은총이 불완전한 것이었고 삼위일체 신앙이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이 항목으로 받아들여졌다.)또한 바질은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교환적이 상호적이며 침투적인 작용을 인정했다. 바실은 나아가 “성령은 한 아들을 통해 한 아버지와 연합되며, 자신을 통해 높이 찬양되는 축복된 삼위를 완성한다... 아버지가 하나이며 아들도 하나이듯 성령도 하나이다.”)라고 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삼위의 하나 됨과 고유한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최초로 관계 개념을 사용했으며 이 점에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정점을 이루는 서방 교회 삼위일체론을 예비했다고 볼 수 있다.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성자의 신성에 관한 니케아 회의의 신조를 다시 확인하였으며, 성령의 신성에 관해서도 동일한 내용을 추가하였다. 따라서 이 공의회에서 비로소 삼위일체의 교리가 확연히 선포되었다. 동종교회의의 결정들과 그 가운데 반영된 신학은 대부분 위대한 카파도기아인들의 사역 결과였다.)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특징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첫째,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os)임을 철저히 강조했다. 이로서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의 상이본질(anomoios)이나 유사 아리우스주의의 유사본질(homoiousios)을 철저히 배격했다. 더욱이 동일본질에 관련하여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니케아 신경은 이것에 대해 간단하게 끝을 맺고 있지만,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는 명백히 선언되었다.둘째, 본질과 위격을 명확히 구별하였다. 니케아 신경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에도 7세기에 이르기까지 동방교회 삼위일체 신앙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은 카파도기아의 교부들과 막시무스(Maximus) 등에 의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동방신학은 서방교회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스승 암브로시우스(Ambrose)는 니케아 신앙을 철저히 고수했고,) 이에 따라 동방의 사상과 관용어들을 서방교회로 도입했고, 동방의 철학, 신학, 해석학 저서를 과감하게 번역하며 인용하였다.) 암브로시우스로부터 지대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동방의 정통 신학의 유산을 물려받아 이를 바탕으로 정교한 사색을 통해 니케아 시대의 모든 신학자들보다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에 더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아우구스티누스는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을 독창적으로 종합하여 서방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의 특색과 완전한 표현을 이룩했다. 특히 그는 그의 세 번째 책으로,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으로 알려진 『삼위일체론』을 오랜 기간에 걸쳐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1권부터 7권까지 성서해설을 위주로 한 삼위일체 교리 이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가지고 반아리우스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들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고, 8권부터는 인간의 심리를 중심으로 한 유비적 삼위일체 접근에 주력하였다.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은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기아 교부의 삼위일체론과 연결점을 보여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들처럼 교회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으며, 사벨리우스주의를 경계하며, 한편으로는 아리우스의 종속론을 극복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카파도기아 교부의 신학과 연관성을 지닌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고수하고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하다고 가르쳤다.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나눌 수 없는 동등함으로 하나의 똑같은 실체의 신적인 유일성을 보여주며, 따라서 세 신이 아니라 한 신이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셨으므로 아버지이신나님이 아들을 파견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며, 그가 사랑하신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를 확신하게 만드시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목적은 우리가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을 뵈며 하나님께 밀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령이 파견되신 데 대해서도 같은 이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한편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세례는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그는 종종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출애굽의 이미지로 세례를 표현하면서 예수의 피로 죄 씻음 받음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줄리안과의 논쟁에서 세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까지 밝히며 자신의 세례에 대한 구원론적 생각을 드러냈다.) 그는 예수께서 세례 받는 장면을 설명하면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 삼위일체가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 위에 내린 것이(마 3:16)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것은 성령만이 하신 일이라고 말한다. 또한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막 1: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난 것은 같은 이 삼위일체가 하신 일이 아니라, 성자에게 하신 성부의 말씀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분리할 수 없으며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한다고 밝힌다.) 이 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이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사에 있어서 계획하시는 성부. 실현하시는 성자, 우리안에 적용하시는 성령의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의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으로서 유지 되어야 한다고 밝힌다.) 즉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은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활동이 세 위격들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신성인 삼위일체의 사역이라고 본다.) 엄격히 말하면 삼위일체가 창조하고, 삼위일체가 구원하며, 삼위일체가 거룩하게 한다는 것이다.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도입한 관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