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체험 Report과 목담 당전 공학 번이 름제출일A.답사계획을 세우면서근현대사 강의를 듣게 되면서 그 범위가 생각보다 무척 넓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었다. 마침 역사체험 레포트를 제출하게 되었는데 어떤 곳을 가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해 매우 고민하게 되었다.문득 든 생각은 일제 강점기 직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여러 곳을 묶어서 구성해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구한말부터 최근의 한국전쟁, 민주화 운동까지 모두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 중에서도 대한제국이 성립되기 바로 직전, 을미사변-아관파천-독립문건축 이렇게 세가지 사건을 묶어서 구성해 보았다.B.건청궁경복궁 경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태전에서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한다. 옆쪽으로는 경회루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1)고종의 의지-경복궁에서 가장 뒤쪽인 향원정 윗쪽에 있던 궁으로, 1873년(고종 10)에 지은 건물로 고종이 고위관료는 물론 흥선대원군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짓다가 건립사실이 알려져 반대의견이 빗발쳤지만 고종의 강력한 의지로 지은 궁이다. 건청궁을 지을 때 연못을 파고 가운데 부분에 섬을 만든 뒤 그 위에 향원정을 짓고 '취향교'라고 부르는 구름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당시 고종은 재위 10년으로 접어 들면서 친정을 내세웠고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주도하겠다는 의지의 실험인 듯 고종은 조정의 관료들은 물론 흥선대원군조차 모르게 건청궁을 짓는 공사를 벌인 것 같다. 건청궁은 왕으로서, 정치가로서 스스로 서려는 고종의 자립의지의 징표라고 할 만하다.2)을미사변-1894년에 고종은 창덕궁에서 돌아와 건청궁에 거주했는데, 1895년 일본인들은 명성왕후를 제거할 이른바 "여우사냥"이란 작전을 세웠다. 1895년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가 이끄는 일본군, 일본낭인 등은 건청궁까지 난입하여 부속건물인 곤령합에서 명성왕후를 끌어내어 칼로 찔러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워 연못에 던져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명성왕후는 1897년(광무 1)에 명성황후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처음 청량리 홍릉에 장사하였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경기도 금곡의 홍릉으로 이장하였다.일제는 1929년 건청궁일대의 건물을 허물어 버리고 1939년에 미술관을 지었다가 현재 건청궁 복원공사중이다. 지금은 명성황후순국숭모비(明成皇后殉國崇慕碑)와 명성황후조난지지비(明成皇后遭難之地碑)가 있다. '명성황후조난지지(明成皇后遭難之地)'란 글씨는 이승만 당시대통령의 친필이다.자주적으로 조선을 이끌려던 고종의 조력자 민비의 죽음은 단순히 힘없는 나라의 설움과 슬픔, 그 이상의 것으로 다가왔다.3)최초의 전등-재미있는 사실은 우리 나라 최초의 전등이 경복궁 건천궁에서 점화되었다는 것이다. 전등이 가설되기 이전 경복궁에서는 도기등 또는 칠기등 등의 촛대에 밀초를 사용하거나 쇠기름으로 만든 초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빛도 약하고 그을음과 냄새가 발생하는 등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로는 첨단 제품인 전등이 점화되어 구중 궁궐 깊은 곳을 환하게 밝혔으니 사람들의 놀라움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경복궁의 연못인 향원정의 물을 끌어들여 증기를 만들어 발전을 했기 때문에 전기를 '물불'이라 부르며 신기해 했다고 한다.당시의 정경을 운현궁에 기거하고 있던 한 상궁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향원정의 취향교와 우물 사이의 중간 연못에 양식 건물이 세워지고 건물안에 는 여러가지 기계가 설치되었다. 그 공사는 서양인이 감독하였다. 궁내의 큰 마루와 뜰에 등롱같은 것이 설치되어 서양인에 의하여 기계가 움직이자 연못의 물을 빨아 올려 물이 끊는 소리와 먼 우렛소리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얼마 있으니까 궁전내의 가지 모양의 유리에는 휘황한 불빛이 대낮같이 점화되어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밖의 궁궐에 있는 궁인들이 이 전등을 구경하기 위하여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는 내전 안으로 몰려들었다,"당시 경복궁의 발전 설비는 16촉광의 전등 750개를 켤 수 있는 동양에서 가장 훌륭한 모델 플랜트였다. 에디슨이 동양에서 자사 제품 판촉을 위하여 시공한 전등 시설이기 때문에 동양에서 유일한 일류 시설이었던 것이다. 영국의 교습생들이 와서 구경할 정도였다니 당시로서는 가히 세계적인 설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설비는 중국이나 일본의 궁성 설비보다 약 2년을 앞지른 서구적인 사업 이었으며 에디슨이 백열 전구를 발명한 후 정확히 7년5개월만의 일이었다.그러나 지속적으로 이용되지 못했다. 멕케이 외에는 발전과 보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조선인 보조 기사가 있긴 했지만)그가 없으면 사소한 고장이 발생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첫점등이 이루어진 지 얼마 후에 멕케이가 권총 오발로 사망하여 상당 기간 동안 점등이 중단되기도 하였다.이런 우여곡절 끝에 조선 정부는 전등 교사로 영국인 2명을 고용하여 6개월만에 겨우 재 점등할 수 있었다. 조선정부는 이 같은 점등 사고를 방지 할 목적으로 영국인 전등 교사들과의 계약시 '전등교사들이 조선인 전등학도를 착실히 지도하지 않으면 해고한다'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고 한다.C. 구 러시아 공사관찾느라 무척 고생한 기억이 난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서울시립미술관과 예원학교를 지나 올라가다보면 뮤지컬 극장인 팝콘 하우스 옆에 있다.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3호로 지정되었다. 러시아 공사관 건물은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1885년(고종 22)에 착공되어 1890년 준공되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1896년 2월 1일 세자(뒤의 순종)와 함께 옮겨가 이듬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피신했던 곳이다. 또한 아관파천 중에 친일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는 등 역사적으로 의의가 큰 건물이기도 하다. 탑 아래의 석단 시설이나 주위 상황으로 보아 이 건물에 이어지는 건축물이 있었을 듯한데 현재는 탑부만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현재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는데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조선 말기에 건축된 이 건물의 설계자는 러시아인 사바틴이며, 탑은 3층의 벽돌 구조이다. 공사관 건물은 6·25전쟁 때 불타고 탑 부분과 지하 2층이 남아 있었는데, 1973년 현재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1981년에 건물과 주변 조경을 재보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전망탑은 회색 벽돌로 이루어졌는데, 탑 외부를 단장할 때 흰 회반죽 칠로 마감하였다. 1층에 반원 아치의 출입구가 있으며, 2층은 벽면으로 처리하고 전망대 구실을 한 3층은 사방에 한 쌍씩 반원 아치 창문을 설치하고 위에 삼각형 페디먼트로 구성되었다.1)아관파천-앞에서 언급했던 을미사변 후 국모시해로 인해 고조되었던 백성들의 반일감정은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전국적인 의병봉기를 초래하였다. 김홍집내각은 지방의 진위대만으로 의병을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수도경비에 공백이 생겼고, 이 기회를 틈타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는 친러파들의 음모가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일본의 압박이 더욱 심해지고 있던 중 1896년 2월 11일에 친러세력과 러시아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아관은 러시아공사관을 말하며 정동에 위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아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손상되자 국내외적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고종은 파천초에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것은 경운궁이 당시에 수리 중 이었으므로 환궁시기를 늦추고 경운궁부근에 있는 구미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론은 정부의 대외의존자세를 비난하고 조속한 환궁을 요구하였다. 정부의 대신과 각계 요로에서도 환궁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친러파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운동을 개시하고 장안의 시전들이 철시를 단행할 조짐을 보이는 등 여론이 더욱 거세어지자, 고종도 갑자기 환궁을 결심,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에 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환궁 후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여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라 하여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아관파천은 을미사변을 통해 불법적으로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세력에 대한 친러세력의 반발로 초래된 사건으로서 국왕의 무능, 나약함과 정부지도자들의 파쟁상이 단적으로 노출되었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이와 같은 난국을 당하여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중들의 자주의식이 각성되었으나, 이와 같은 움직임도 왕실과 보수집권세력의 반동으로 인하여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로 국가 상황이 점점 어려워 질수 록 왕실, 지도층과 민중의 모습은 판예하게 다름을 볼 수 있다.D.독립문과 독립협회독립공원 내에 있으며 이 공원에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도 함께 있다.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전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하여 세웠다. 창건 당시의 면적 2,800㎡ 였으며, 총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3,825원이 소요되었다. 완공일은 1897년 11월 20일이다. 현재의 면적은 2,640㎡이다.프랑스의 에투알개선문을 본떠서 서재필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하였다. 공역은 건축기사 심의석이 담당하고 노역은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였다. 공사비는 주로 기부금으로 충당, 1897년에 준공하였다. 재료는 주로 화강암을 사용하였는데,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문 앞에는 구 영은문의 주초였던 두 돌기둥이 있다.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 복원하고 예전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놓았다.
낭만주의 시대의 절대음악 VS 표제음악과 목담 당전 공학 번이 름제출일A.들어가며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물론 절대음악이 더 오랜 시간 존재해왔지만 표제음악이란 개념이 나타난 후에 그에 대비되는 의미로 재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우선 표제음악에 대해 알아보겠다.B.표제음악의 발전배경예술사를 보면 19세기처럼 여러 형태의 예술들이 문화적 통합을 이루었던 시대는 없다. 문학, 미술, 음악 등은 서로 긴말한 관계를 가지고 발전하였다. 시인, 화가, 작곡가들은 같은 주제에 흥미를 가졌으며 빈번히 공통관심사를 서로 나누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시대에 음악은 소수의 특정한 후원자들만을 위한 것이었으며 음악가들은 일종의 고용인 신분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와서 예술가들은 일종의 문화적 영웅이 되었다. 이 시대의 주요 작곡가들은 일반적으로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다양한 예술 매체에 고루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슈만, 리스트, 베를리오즈와 바그너는 모두 역량 있는 작곡가인 동시에 비평가 겸 작가이기도 했다. 특히 바그너와 베를리오즈는 자신들의 오페라 대본을 직접 썼다. 대부분의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화가, 시인, 배우, 극작가들과 함께 일하고 사교생활을 하였다. 쇼팽은 소설가와, 리스트는 작가와 함께 생활하였다. 베를리오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너무도 사랑하여 그 당시의 셰익스피어 연극의 주연 여배우와 결혼했다. 작곡가들은 삶과 예술에서 19세기 유럽의 문학운동과 보조를 함께 하였다.B-1.표제음악의 특징표제음악이란 이야기식이나 서술적 묘사를 하는 음악 유형을 말하며 리스트가 자신의 교향시를 설명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고안한 말이다. 19세기 이전의 표제음악에는 문학적 영향보다는 주로 자연의 현상이나 소리를 모방하거나 묘사한 곡이 대부분이다. 쟈스깽의 유명한 샹송 ,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나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등은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곡들은 진정한 의미의 표제음악으로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곡들은 그 제목이 곡의 형식구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제목이 없더라도 음악적 내용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19세기의 표제음악에서는 음악외적 프로그램이 음악의 형식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그 음악적 제스쳐나 내용을 좌우하는 주요인이 된다. 따라서 각각의 표제음악 작품은 그 작품에서만 등장하는 독특한 형식과 내용으로 음악이 진행된다.19세기의 교향곡이나 다른 여러 작품들에서 문학적, 회화적 아이디어에 기초하는 작품의 수가 증가하였다. 작곡가들은 빈번히 자신들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동기나, 음악이 암시하는 감정 또는 행위를 설명하는 해설을 음악회 프로그램에 첨부하였다. 이러한 음악은 순수한 기악음악이면서도 음악회 프로그램 해설에서 청중들에게 설명되는 음악외적 아이디어들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그러한 예를 베를리오즈의 교향곡 에서 볼 수 있다. 이 곡의 제목은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유명한 시 와 연관되는데 개별 악장들의 제목은 보다 구체적으로 관련된다. 즉 제1악장은 산 속의 해롤드- 우울, 행복, 기쁨의 장면들, 제2악장은 ‘저녁 찬송을 부르는 순례의 행렬’을 묘사하고 있다.어떤 표제음악은 작곡가의 실제 경험이나 상상적인 경험을 암시하기도 한다. 베토벤의 에서 각 악장의 제목은 작곡가가 실제로 보았거나 머릿속에 그리던 전원의 풍경- ‘시골에 도착해서 느끼는 유쾌한 기분’, ‘시냇가의 정경’ 등을 말해준다. 프로그램은 시각예술과 관련되기도 한다. 무소르그스키의 은 어느 화가의 그림들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했다. 또 차이코프스키의 은 러시아가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얻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쓰여진 곡이다.물론 표제적인 작품들 중에서 음악외적 아이디어와 관련되는 정도는 작품마다 다를 수 있겠으나 이러한 아이디어와 친숙해 진다는 것은 듣는 이에게 음악의 구도를 쉽게 따라가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의 줄거리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같은 제목으로 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즐길 수 있는데 그것은 음악 자체가 극적이고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연극과 차이코프스키의 서곡이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가를 알게 되면 우리의 감상경험은 더욱 충실해 질 수 있을 것이다.C.표제음악의 유형들낭만주의 시기에 작곡된 프로그램 음악의 유형에는 표제교향곡, 교향시, 음악회용 서곡과 연극음악은 물론 짧은 피아노 소곡들이 있다. 이중에서도 교향시가 가장 전형적인 낭만주의 표제음악의 산물이다.C-1.표제교향곡베토벤의 6번 교향곡은 19세기 표제교향곡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의도는 후의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 채택되어 교향악적 작품들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표제교향곡의 가장 성공적인 작곡가는 베를리오즈와 리스트였다. 베를리오즈의 대표적인 표제교향곡은 와 이며 리스트는 와 이 있다.특히 은 음악적 아이디어와 음악외적 상념의 연관성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자꾸 재출현하는 이다. 베를리오즈의 고정상념은 이 교향곡 전체를 통하여 그의 연인을 나타낸다. 이것은 서주 후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소나타의 제시부의 주요 시작 주제역할을 하며 5개의 모든 악장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재출현한다. 이 주제는 전형적으로 낭만적인 선율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보여준다. 이 상당히 긴 선율은 느린 리듬과 빠른 리듬진행을 골고루 가지고 있으며 강한 박자감을 주지 않는다.이곡의 프로그램은 일련의 강한 낭만적 대비를 전개하고 있다. 주인공은 아편중독으로 인한 깊은 꿈속에서 극에서 극을 달리는 환영을 본다. 그의 마음은 일면 야성적이면서 또 시적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은 셰익스피어 연극의 주연 여배우, 해리엇 스미슨을 향한 작곡가 자신의 열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이 곡은 그의 자서전적 연애감정보다는 예술가적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이곡은 오늘날 교향곡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곡이나 1830년에 초연될 당시에 대부분의 파리 청중들의 귀에는 매우 거슬리는 곡이었다. 특히 극도로 반음계적인 화성은 초기의 청중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으며 따라서 어느 비평가는 ‘청중은 이 연주 전체를 통하여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하였다’고 부정적인 발언을 하였다. 또한 풍부하고 다채로운 관현악의 음악은 당시 청중들에게는 압도적인 것이었으며 마녀들의 향연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분노의 날 선율은 단순한 충격 이상의 것이었다.C-2.교향시낭만주의 시대에는 비교적 적은 수의 표제교향곡이 쓰여졌다. 대신 많은 작곡가들은 새롭고 짤막한 형태의 곡- 교향시 또는 음악시- 으로 관심을 돌렸다. 교향시란 본질적으로 단악장으로 된 표제교향곡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의 비교적 짧은 길이는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소품 선호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사실상 짧은 피아노 성격소곡, 예술가곡과 교향시는 낭만주의 음악의 가장 독창적인 장르들이다.교향시의 창시자는 리스트로 그는 1848~58년에 12곡, 1881~1882년에 한곡을 작곡해서 도합 13곡의 교향시를 썼다. 그중에서 전주곡, , , , 등이 유명하다. 교향시는 19세기 후반의 여러 작곡가, 특히 민족주의 작곡가들이 즐겨 쓰는 음악장르가 되었다. 그 중에는 체코의 민족주의 작곡가 스메타나의 대표작 이 있는데 이것은 여섯 개의 교향시가 모여서 하나의 곡을 이룬다.C-3.서곡과 연극음악표제음악에 가장 중요한 자극을 준 곳은 역시 극장이었다. 낭만주의 음악가들이 연극의 줄거리나 등장인물을 기초로 한 음악을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그 목정을 위하여 서곡은 특히 효과적이었다. 서곡이란 원래 어떤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의 제1막이 시작되기 전에 연주하도록 되어있는 곡으로써 그 작품의 몇몇 주제들을 미리 소개함으로써 앞으로 나오는 곡의 분위기를 확립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곡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서곡들은 그 착상에 있어서 큰 규모의 곡들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며 그 중에서 몇곡은 개별적인 작품으로 독립되어 나와서 음악회 레파토리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D.절대음악이란?낭만주의를 풍미했던 표제음악과는 대립적으로 음악 이외의 요소에 구애되지 않고 순수한 추상적인 음의 구성, 순수한 음악예술로만 듣는 이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음악이다. 표제음악과 대립된다고는 하지만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는 없고 절대음악은 온전히 음악과의 관계를 뜻하며 깊은 이해와 높은 예술작품으로 더욱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절대음악의 대가로는 바하,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베토벤을 중심으로 고전파 절대음악 형식의 최고인 ‘소나타’ 형식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표제 음악에 대립되는 개념의 음악으로 작곡자의 정신적인 내용을 음악을 통하여 표현한다. 이러한 음악이 예술로 높여진 것인 18세기 이후였다. 표제 음악은 문학적인 이야기나 상념을 바탕으로 음악이 만들어지지만 절대음악에서는 그러한 바탕이 없다. 그러므로 절대음악이 훌륭한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완전한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절대음악은 언어를 쓰지 않으므로 성악이 아니라 기악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따라서 이 음악이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형식과 기악의 발전을 필요로 한다. 고전파 음악은 바로크 시대 음악에 이어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의 음악을 말하며, 이 시대의 음악은 계몽주의 사상과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형식미를 중요시 하였으며, 바로크 시대의 대위법적 다성음악 보다는 화음을 중시하는 화성음악의 발달로 오페라, 실내악, 소나타 등의 절대음악을 탄생시켰다.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와 바그너의 음악극의 비교 연구과 목담 당전 공학 번이 름제출일A. 들어가며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탄생한 오페라는 로마, 베네치아, 나폴리를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여 17세기를 통해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 주요 국가들로 전파되었다.오페라는 음악인 동시에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렇게 때문에 각 민족의 고유한 정서에 따라 선호하는 극의 소재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음악도 극의 내용에 걸맞도록 작곡되어 아주 다양한 양식을 창출한다. 또한 각 나라마다 다른 언어의 분절, 강세, 억양의 특징을 음악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선율의 모양새도 크게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나라 양식의 오페라냐 하는 문제는 작곡자가 어느나라 사람이냐, 혹은 어느 나라에서 주로 공연되었느냐 하는 문제 보다는 대본이 어느 말로 되어 있느냐에 따라 분류하는 되는 것이 보통이다. 똑같이 모짜르트가 작곡한 오페라라 하더라도 는 독일 오페라인 징슈필로, 이나 는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은 오페라 부파로 분류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물론 번역 오페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본을 번역하게 되면 언어의 특징과 음악이 잘 맞지 않아 알아듣기 힘든 경우가 많고, 이 점은 우리가 요즈음 우리말로 번역된 외국 오페라를 감상할 때 자명하게 드러난다.1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는 유럽 오페라에 있어서도 각 나라간의 차이는 그 소재나 음악양식에 있어서나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선 대본의 선택에 있어서 이탈리아에서는 남녀간의 사랑과 복잡하게 얽힌 연정관계가 주요소재로 등장하고 음악적으로는 서정적인 아리아가 중심이 되는 선율 위주의 음악이다. 한편 독일 오페라는 신화를 극의 소재로 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탈리아 오페라에 비해 화성이 훨씬 복잡했다. 프랑스의 오페라는 이탈리아나 독일 오페라에 비해 무대 장치가 훨씬 화려했고 발레가 삽입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의상이나 조명 등 시각적 효과가 두드러졌다.이제부터 오늘의 주제인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오페라와 바그너의 음악극을 중심으로 한 독일 를 비교해 보도록 하자B. 이탈리아 오페라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주로 그 소재를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에서 찾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리아가 절대적인 중요성의 차지한다. 본디 노래를 좋아하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청중은 대형가수가 멋지게 아리아를 열창하는 것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오페라 감상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적재적소에 심금을 울리는 아리아가 있어야만 이탈리아 오페라답고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이탈리아 작곡가들이었다. 흥행에 관하여 탁월한 감각을 지녔던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는 중 유명한 아리아인 을 개봉 전날까지 공개하지 않을 정도로 주요 아리아에 대해서는 철저한 보안, 관리를 하였다. 물론 그의 예상대로 그 아리아는 초연 때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은 북쪽의 나라들, 즉 프랑스나 독일 등에서 낭만주의 음악양식으로 탈바꿈하려 할 때에도 낭만주의의 새롭고 복잡한 화성양식에 별다른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큰 변혁을 격지는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같은 시대의 프랑스, 독일 오페라에 비해 단순한 화성을 가진 보수적 양식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오페라 전통은 롯시니에서 시작하여 도니제티와 벨리니를 거쳐 베르디에 의해 전성 시대를 누리게 된다.B-1. 롯시니에서 벨리니까지롯시니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은 항상 명랑하고 주로 선율에 의존하며 화성은 단순하고 구성은 간단명료하다. 그는 혁신적인 작곡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오페라는 독창적인 데가 있었다. 활기찬 리듬과 뛰어난 희극적 장면 묘사, 그리고 음악을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콜로라투라와 카덴짜를 직접 악보에 써넣은 점, 또 피아노 반주로 된 레치타티보 세코를 관현악 반주로 바꾼 점 등은 그가 이탈리아 오페라의 양식의 굴레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했음을 보여준다. 또 이러한 시도들은 당시 프랑스와 독일에서 추구되었던 낭만주의 운동, 즉 화성을 비롯한 음법을 완전히 개혁하고자 했던 시도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의 는 모차르트의 , 베르디의 와 함께 희극오페라의 3대 걸작으로 꼽힌다.도니제티와 벨리니는 연령상으로는 롯시니와 채 10년도 차이가 나지 않지만 롯시니가 10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하였고 또 인생의 후반부에는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두 작곡가의 오페라는 롯시니의 오페라들보다 한 세대 늦은 작품들이다. 또 도니제티가 50을 넘자마자, 벨리니는 34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이들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낭만 오페라에서 보자면 롯시니의 전통을 받아 베르디로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도니제티는 오페라에 대한 감각과 재능, 훌륭한 선율을 바탕으로 70여곡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특히 희극 오페라에 역점을 두었다. 그의 음악은 이탈리아 오페라사에 등장하는 앞뒤의 거장들, 즉 롯시니나 베르디의 작품에 비하면 거칠고 세련미가 부족하며, 또 흥행만을 목적으로 성급히 작곡되어 작품으로서 성숙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를 비롯한 몇 개의 작품들은 롯시니의 작품에 견줄만하다. 반면에 벨리니는 희극 오페라를 쓰지 않아서 그가 남긴 10개의 오페라는 모두 진지한 내용을 가지며 따라서 음악도 매우 서정적이다. 벨리니의 대표작으로는 가 있다.B-2. 베르디의 오페라와 푸치니, 그리고 베리스모 운동서양음악사에 있어 한 개인의 행적이 한 시대, 한 지역의 역사로서 그대로 기록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베르디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베르디의 작품 활동은 19세기 후반의 이탈리아 음악사 바로 그것인 것이다. 베르디는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로 당시 유행병처럼 번졌던 낭만주의 운동을 외면하고 심지어는 후배작곡가들이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한탄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이탈리아 고유의 음악적 독립성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베르디의 작품은 일관성 있게 오직 한가지의 방향, 즉 점점 성숙하고 세련되어지는 방향으로만 나아가 결국 이탈리아 오페라를 최고의 경지까지 끌어 올렸다.이 당시 오페라에 있어서 이탈리아적인 특성이란 프랑스 그랑도럼 대편성 관현악과 합창이 낀 사치스러운 전시목적의 대규모 작품이 아니라 주로 독창 아리아에 의존하는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한 양식을 가리킨다. 또 내용에 있어서는 독일 오페라에 있어서처럼 신비로운 신화를 소재로 하지 않고 인산사회의 이야기를 심각한 멜로드라마로 꾸민 것이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음악적으로도 유럽에 널리 퍼졌던 낭만주의 운동과는 무관하게 실험적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베르디는 당시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 번져가던 낭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낭만주의 시대의 고전주의자이며 이런 면에서는 기악음악의 브람스의 입장에 비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낭만주의 운동을 외면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오페라에는 몬테베르디로부터 스칼라티를 거쳐 롯시니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 즉 직감적이고 명료하며 단순한 인간중심적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며 이는 독일 낭만주의 정신이나 음악어법과 도저히 합치될 수 없었다.푸치니의 음악은 이탈리아 민족주의 음악이라는 항목 아래서 다루기는 약간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푸치니의 작품들이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 병행5도의 연속 등 그의 많은 작품들이 20세기에 작곡되었기 때문에 음악 양식적으로 보더라도 그 이전의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오페라에 비하면 훨씬 더 근대적이다. 그의 선율은 선법 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있고 그의 화성은 기능화성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그의 음악을 얘기할 때 곧잘 따라 나오는 용어가 이다. 이는 19세기 말의 문학에 있어서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문자 그대로 진실(Veritas)을 추구하는 사조 또는 주의라 할 수 있다. 베리스모의 기본 취지는 예술작품을 만듦에 있어 무엇이든 미화시키거나 과장되게 낭만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지양하고 보다 진실 되게, 그리고 현실 그대로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페라의 경우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소재를 사용하게 되로는 격정, 분노, 질투 등의 감정이 여과를 거치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출되며 음악의 세련미가 부족한 경우가 있다. 마스카니의 , 레온카발로의 등이 대표적인 베리스모 오페라이다.푸치니 역시 베리스모 오페라 작곡가로 분류되는데 은 예술가의 생활환경과 성격을 낭만적으로 포장한다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있을 법한 생활을 그리고 있다. 등 이탈리아 오페라의 걸작들에 드러나는 뛰어난 서정성을 볼 때, 그를 다른 작곡가들과 함께 베리스모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보고 넘어가는 것은 그에 대한 정당한 예우가 아닐 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소박한 맛을 베르디의 작품들의 세련된 맛에 비교하면 푸치니는 틀림없이 베리스모 작곡가이다.C. 독일 오페라낭만주의 오페라는 문학과 음악의 긴밀한 상호관계 뿐 아니라 의상, 무대까지 합쳐진 복합 예술형식을 보인다. 낭만주의 운동이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오페라에 있어서도 각 예술분야가 혼합되는 추세는 독일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베버에 의해 정립된 독일 낭만 오페라의 전통은 바그너에 이르러서 그 완성을 본다.C-1. 베버와 기타 작곡가들베버는 를 작곡함으로써 독일 낭만 오페라의 전통을 확립했다. 슈베르트 역시 몇 편의 오페라와 징슈필을 작곡했지만 자기 생전에 무대에 올리지 못했고 따라서 향후 독일 오페라사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반면의 는 당시 독일 문화권에서는 거의 독보적이라 할 만큼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그것은 반드시 음악적으로만 아름답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주제가 독일인들의 민속적 특색에 잘 맞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는 선과 악의 싸움에서 결국 선한 쪽이 이긴다는 권선징악의 주제를 담고 있으며 이탈리아 오페라와는 달리 비현실적인 개념, 즉 마력을 가진 탄환, 악마, 영혼의 거래, 구원 등이 등장한다.베버 이후 20년간 독일은 일급 오페라 작곡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당시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작곡가로는 마르쉬너와 로르칭을 들 수 있는데 마르쉬너는 징슈필로 그리고 로르칭은 희극오페라 분야에서 뛰어
플라톤의 을 읽고과 목담 당전 공학 번이 름제출일A. 플라톤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플라톤은 인간을 최상의 선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을 탐구하여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 첫 번째 철학자이다. 그러나 철학의 실천적 방향은 도덕적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정의는 도시국가의 일이기 때문이다.“철학자는 정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하며 정의로운 국가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 플라톤플라톤은 아테네의 명문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정치를 지망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되는 것을 보고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참뜻이 될 수 있는 것을 추구, 필로소피아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BC 385년경 아테네의 근교에,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신역에 학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개설하고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생활에 전념하는 사이 80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이나 시칠리아섬을 방문하여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 이상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그의 철학의 방향을 잘 말해준다.생전에 간행된 거의 30편에 이르는 저서는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되었는데,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종의 희곡작품으로서 여러 가지 논제를 둘러싸고 철학적인 논의가 오간 것이므로 이라 불린다. 소크라테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연대에 따라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주로 ‘덕 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대체로 아포리아(aporia/길이 막힌 것)에 빠진 채 끝나는 전기 대화편(등), 영혼의 불멸에 관한 장려한 미토스(mythos)로 꾸며지고 소크라테스에 의해 이데아론이 펼쳐지는- 문예작품으로서는 가장 원숙한 중기 대화편(등), 철학의 논리적 방법에 대한 관심이 농후하고, 영혼과 이데아설이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함께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후기 대화편(등)으로 나눈다.플라톤에게 필로소피아란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이며 소크라테스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였다.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대화편의 대부분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그들의 생활과 활동을 조직 ?지도 ?규제하는 강제력을 가진 사회조직이다. 이러한 국가개념에 따르면 그 기능은 사회조직의 구성과 개편, 사람들의 사회활동에 대한 일상적인 지도통제, 사회제도의 수립과 개편 등이 되며 국가기관과 관련해서는 입법 ?사법 ?행정의 3권 분립을 들 수 있다. 국가의 본질과 기능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다. 사회 전체의 구성원들을 지배하는 강제적인 제도로서의 국가는 플라톤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생명력을 가지는 유기체로 파악한 이래 홉스 ?루소 등의 사회계약에 의한 국가론을 거쳐 헤겔의 절대정신이 발현된 최고의 조직체로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가에 대한 규정은 마르크스주의의 등장으로 계급적 지배를 은폐하려는 관념론으로 비판되었고, 이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의 국가론은 국가를 철저히 계급지배의 관점에서 파악하였다. 즉, 국가의 기원은 사적 소유와 계급의 발생에서 찾을 수 있으며, 국가의 본질 역시 특정사회의 지배계급이 자신의 계급지배를 관철시키기 위해 배타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공적인 정치권력기구라는 것이다. 이 국가론에 따르면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국가는 지금까지 고대 노예제국가, 중세 봉건제국가, 근대 자본주의국가의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이러한 국가유형에 따른 분류는 각각 노예주와 노예, 영주와 농노,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계급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국가유형 내에서도 국가기구의 편성방식 및 국가제도의 조직화방식에 따라 다양한 국가형태가 존재하기도 한다. 즉, 고대 노예제국가는 군주제, 귀족제, 공화제, 민주제 등의 국가형태로, 근대 자본주의국가는 의회민주주의, 보나파르티즘, 파시즘 등의 국가형태로 다시 구분된다. 현대에 와서 국가론은 크게 다원주의국가론과 도구주의국가론 그리고 구조주의국가론 등으로 대별될 수 있다. 다원주의국가론은 서구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옹호하는 것으로서 국가를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집단의 이익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공들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다루었다. 우선 천성적으로 철학자의 소질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즉, 학문(철학)에 열의가 있어야 하고, 모든 실재를 사랑하여야 하며 진실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구두쇠 근성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크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영혼과 만물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의 생활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철학자는 기억력이 좋아야 하며 참된 실재를 지향하는 균형이 잡힌 올바른 정신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시점에서 아데이만토스는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월만 허비하면 정상적인 인간과 거리가 먼 국가와 사회에 쓸모가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배에 대해 모르는 수부들이 권력을 잡고 있을 때, 진짜 타수는 수부들에 의해 “쓸데없는 토론에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취급당하며 푸대접을 받는다는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다음에는 대다수의 철학자가 엉터리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을 살펴보고 있다. 즉 진심으로 배우기를 좋아하고 올바른 품성과 절도, 용기, 도량, 이해력, 기억력 등이 철학자의 조건이기 때문에 철학자의 조건을 완전히 갖춘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인데 그 귀한 소질마저 시들어 버리는 까닭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철학자의 조건을 갖추고 있을 경우 그의 친지나 국가에서 그를 자기들의 일을 위해 크게 이바지하게 하려고 갖은 아부와 숭앙, 탄원 등으로 그를 구슬린다. 거기다 만약 그가 큰 나라에서 태어나고 좋은 집안과 부를 갖추고 있다면 그는 큰 야망에 불타 지성이 결여된 교만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하는 일을 어떻게 다루어야 국가가 번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루게 되었는데 그 방법은 이렇다. 청소년이나 유년 시절에는 그들의 취지에 맞추어 철학을 가르치고 성인이 되어갈 무렵에는 신체에 유의하며 철학을 숭상할 수 있는 기초를 쌓아야 한다. 그러나 나이가 지긋하여 영혼이 성숙해갈 무렵에는 지적 훈련을 강화하고 체력. 이 때 그가 다시 지하로 되돌아 간다고 할 경우,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려면 또 시간이 필요하게 되고 그가 지상에 다녀왔기 때문에 눈을 버리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여기서 시각을 통해 나타나는 장소는 죄수들의 집, 불빛은 태양, 지상에 올라가는 것은 영혼이 가지계(可知界)로 옮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의 영혼 속에는 학습에 필요한 능력과 기질이 이미 내재해 있고 영혼 전체와 함께 생성하는 것으로부터 실재하는 것에 도달하여 그 가장 밝은 부분을 관조하면서 능히 견딜 정도가 되어야 하며 가장 밝은 것이란 선이라고 하였다. 또 새 나라를 건설하려면 가장 뛰어난 소질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최대의 학문을 깨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국가의 법률도 국가 전체에 행복을 가져오도록 하고 전 국민을 설득, 화합시켜 공공의 일에 이바지하여 거기서 얻는 이득을 나눠 갖도록 하는 것이라 하였다. 지배자가 권력을 탐내는 일이 적을수록 그 나라는 잘 통치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 일반 지배자들보다 더 나은 생활을 찾아 줄 수 있다면 옳게 사는 방법이 풍부한 자가 나라를 지배하게 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통치자는 나라 일에 대해 가장 지혜롭고 식견이 넓으며 정치적 야심가와는 다른 명예를 지닌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다음에는 영혼을 키워 실재로 인도해 갈 수 있는 지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우선 교육에 체육과 음악이 있다는 것에 착안하였다. 그리고 체육은 육체의 생육와 쇠퇴에 관련이 있고 음악은 조화롭고 활동적인 성격을 형성하지만 지식을 줄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더 보편적인 것을 취할 필요가 있게 되는데 소크라테스는 거기서 생성에서 실재에 이르는 가장 손쉬운 길은 수학이라고 하였다. 수학이야말로 지성만을 사용하여 실재로 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기하학을 들었는데 기하학 속에는 실재의 최고 행복이 깃들어 있고 실재의 학문이란 인식을 위한 것이며 기하학은 영혼을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울 필요성이 있다고 한 것이다. 해 네 개의 국체를 들었는데 그것들은 스파르타식 국체, 과두정체, 민주정체, 참주정체이다. 그리고 국가의 형태에 따라 개개인의 정신 형태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첫째로 귀족정치는 명예를 사랑하나 불화가 일어나면 귀족정치와 과두정치의 중간적인 명예정치를 취하게 된다. 명예정치는 선과 악이 혼합되어 공명심과 진취적 기상이 눈에 뜨이는 국체이다. 따라서 명예정치에는 승리를 좋아하고 기개적인 부분에 양도하여 오만하고 명예심 강한 사람을 대응시킬 수 있다.그 후 점점 장사와 돈을 중시하면서 과두정치가 등장한다. 이런 나라는 유능하면서 가난한 이가 쓰일 수 없으며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로 나뉘어 분열이 일어나고 돈에 대한 애착으로 군비 지출을 아껴 전쟁 능력이 없다. 여기에는 돈을 탐내고 인색하며 교양이 없는 사람이 대응될 수 있다.또 가난한 자들이 승리를 얻어 평등해질 때 민주제도가 발생하는데 이 국체는 여러 빛깔이 모인 것 같아 국체 연구에 가장 적당하다. 그러나 훌륭한 외관에 비해 무질서하고 능력을 무시한 평등이 있는 국체이다. 그러므로 이런 국체의 인간은 변화가 많고 변덕스럽다. “가장 고도의 자유에서 가장 야만적인 예속이 발생된다.” 라는 말 같이 다음에는 전제정치가 발생하게 된다. 이것은 민중 속의 과격한 투사 속에서 전제 군주가 출현하기 때문이다. 즉 정도를 지나치고 정상에서 이탈한 자유는 참혹한 노예 제도로 옮아가게 되는 것이다.제9권의 처음 부분에서는 전제정치를 좋아하는 인간을 다루고 있다. 민주제도에 어울리는 인간이 자신을 유혹하는 자들에게 이끌려 방종한 생활을 하게 되고 결국 자제심을 잃게 되어 욕망 속에 광적으로 빠져들게 되므로 전제적 인간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또 참된 의미에서의 전제적 인간은 술과 애욕에 미치다시피 되었을 때에 가능한데, 부모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에서 시작하여 마침내는 어린 시절의 선악 관념에서 떠나 마음의 왕국에서 횡포를 일삼는 애욕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만일 민중이 이런 이들에게 반항한다면 그들은 새 친구를 끌어들여 민중을다.
6시그마란?1. 6시그마의 정의에러나 미스의 발생확률을 가리키는 통계용어다.통계학에선 1백만번에 3.4회 에러가 나는 수준을 6시그마로 규정하고 있고 5시그마는 1백만번에 2백33회, 4시그마는 6천2백10회 미스가 발생하는 수준이다. 6시그마는 실제업무상 실현될 수 있는 가장 낮은 수준의 에러로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경영혁신 수단으로서의 6시그마 운동은 제품설계 제조 및 서비스의 품질 산포를 최소화해 규격상한과 하한이 품질 중심으로부터 6시그마 거리 (1백만개중 3.4개)에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통계용어에 불과한 6시그마를 기업경영이 도달해야 할 목표치로 설정하는 것이 6시그마 운동의 출발점이다. 6시그마의 목표달성을 위해 필요한 도구는 "6시그마 기법", 그 기법을 활용해 회사전체가 하나가 돼 추진하는 활동을 "6시그마 활동"이라 부른다.2. 6시그마의 시작6시그마는 모토로라에 근무하던 마이클 해리에 의해 1987년 창안됐다.당시 정부용 전자기기 사업부에 근무하던 마이클 해리는 어떻게 하면 품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중 통계지식을 활용하자는 착안을 하게 됐다. 이 통계적 기법과 70년대 말부터 밥 갈빈 회장 주도로 진행되어온 품질개선 운동이 결합해 탄생한 것이 바로 6시그마 운동이다.해리는 모토롤라 사내에 설치된 모토롤라 대학 내에 "6시그마 인스티튜트"를 열고 연구를 거듭해 6시그마를 수준 높게 발전시켰다. 그 결과 6시그마는 모토롤라 이외의 기업에도 적용 가능한 경영기법으로 확립됐으며 제품 품질 또한 획기적으로 좋아졌다. 이후 텍사스인스트루먼트가 92년 6시그마 운동을 도입했으며 점차 ABB GE IBM 소니 등으로 확산돼 갔다.3. 왜 6시그마인가?21세기는 흔히 "무한경쟁의 시대"라 불린다.경쟁이 기업경영의 전 분야에 걸쳐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벌어진다는 의미다.무한경쟁 시대엔 기업 경쟁력은 단순히 코스트(비용)를 줄이거나 품질을 향상시키는 것만으로 높아지지 않는다. 제품 품질은 물론 서비스의 품질, 판매와 구매, 만통의 우편물이 잘못 전달되는 수준이다. 이에 비해 6시그마가 목표로 하는 정품 확률 99.99966%는 5년에 1건 정도 항공기 이착륙 사고가 일어나고 매시간당 우편물 7통이 잘못 전달되는 수준이다. 엄청난 차이다.6시그마는 그러나 단순한 품질혁신 운동이 아니라는데 기존 운동과 큰 차이가 있다. 제품의 생산 공정은 물론 서비스 분야와 전반적인 관리시스템에까지 적용 된다. 6시그마 운동은 일반적으로 투입대비 10배의 효과를 거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업뿐 아니라 정부조직 공공서비스 가계 등 전 부문에 적용 할 수 있다. 정부부처나 공기업도 6시그마를 도입할 경우 경쟁력을 크게 높일 수 있다. 고비용 구조에서 고효율 구조로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6시그마의 도입과 구축1. 6시그마 도입의 이유첫째 최고경영자의 강력한 의지라고 할 수 있다.Six Sigma 역시 다른 경영 혁신 프로그램이나 품질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최고경영자의 리더십과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Six Sigma 전략은 실행에 있어 전사적인 교육과 훈련, 상당한 초기 비용의 투자, 개선 활동을 위한 세부적인 시스템 확립 및 지원 체계가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하므로 최고경영자의 강한 리더십과 지원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General Electric사에서 대표적인 예를 찾을 수 있는데, General Electric의 경우 6시그마를 다른 기업보다 늦게 시작한 편이나 현재는 6시그마의 GE화를 이루어 오히려 다른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어 있다. 여기에는 Jack Welch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이 주요 요인이었다는데 아무런 이의가 없다. 실제로 6시그마의 체계화가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는 Allied Signal사의 경우도 1991년 GE에서 옮겨와 회장으로 취임한 Lawrence Bossidy 의 강한 리더십이 주요 성공 요인이었다. 그러나 Six Sigma 성공을 위하여 최고경영자가 앞장서서 이끌어 갈 각오와 충분한 지원 없이 막연한 결과에 대한 기대공 사례가 보여 주는 결과가 워낙 매력적이다 보니 여러 기업들이 이를 냉정히 판단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성공한 기업의 결과만을 살펴보면 6시그마의 효과가 기대 이상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참고로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Allied Signal사는 1995년과 1997년 1/4분기 사이에 Operational Excellence (Allied Signal사의 6시그마 프로그램 이름) 로 인한 비용 절감액이 8억 달러에 달했다고 발표하였다. General Electric사의 경우도 1997년 3/4분기 이익률이 13.8%에서 14.5%로 증가했는데 이는 6억 달러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General Electric사의 Jack Welch 회장은 앞으로 5년 안에 80억 달러에서 120억 달러에 해당하는 비용 절감이 6시그마로 인해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6시그마 성공의 결과는 이 같은 엄청난 재무 성과뿐만 아니라 기업 문화의 긍정적이고 심도 있는 변화, 개선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 방식, 공통적인 언어의 (시그마 수준) 사용에 따른 비교 기준의 제공, 데이터에 기초한 관리 및 개선 등의 효과도 아울러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6시그마 성공 기업 사례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대부분의 기업이 6시그마를 적용하여 성공에 이르기까지 평균 5년 정도 걸렸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전략을 5년 동안 꾸준히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시켰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넷째 "품질은 공짜이다 - 품질은 제값을 한다" ("Quality is free - It pays for itself") 라는 이유이다. 즉, 품질 향상에 따른 이익 효과가 품질 향상에 투자한 비용보다 훨씬 큼으로 품질 향상에 대한 투자는 비용이 들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품질을 어느 수준 이상 높이게 되면 품질 향상에 따른 이익에 비해 비용이 급격히 증가하므로 품질의 최적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총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낡은 이론이 되어 버린 지 오주도할 챔피언 블랙벨트 그린벨트 등을 뽑는 것도 이 단계다. 이들의 역할분담을 분명히 하고 간부사원에 대한 교육 일정도 짜야 한다.블랙벨트가 중간에 경과보고 할 시점도 정해놓고 각 챔피언 블랙벨트 등이 달성해야할 목표도 정한다. 보고 방법, 예산 배정, 구성원간 의사소통 방법, 지원부서 선정 등도 계획단계에 확정지어야 한다.계획 실행 : 3단계에서 짠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이다.최초의 교육 대상은 프로젝트를 주도할 챔피언 블랙벨트 그린벨트 등과 관리자와 재무부문 관계자들이다. 교육대상은 차차 현장으로 범위를 넓혀간다. 계획실행에 필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비롯 각종 자원을 제공하고 각 프로젝트의 을 밟는다. 각종 미팅과 분기별 보고,월례 미팅 일정도 잡는다. 계획 실행의 장애를 정의한 뒤 비로소 6시그마 활동을 시작한다.이익 평가 : 개별목표의 달성 정도와 아울러 진척 관리도 평가한다. 계획이 예정대로 실행됐는지 평가하는 과정에서도 계획 자체의 적합성은 계속 검증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프로젝트에 문제가 발생한 경우는 프로젝트의 지속 여부를 다시 논의해야 한다. 사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프로젝트는 6시그마 활동에서 제외한다.이익의 유지 : 성과를 유지하는 것은 단순히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어려운 단계다. 성과를 유지하기 위해 관리계획을 세우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각종 의사소통 채널을 정비하는 과정이다. 당초 계획대로 보상을 실행하고 그 성과에 대한 영향을 계속 연구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다시 가려 뽑는다. 브리핑 비디오 사내보 등을 통해 성공체험을 알리고 공유하는 활동도 필요하다. 필요에 따라 챔피언 블랙벨트 그린벨트 등과 그밖의 간부 사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한다. 더 많은 프로젝트 리더들을 만드는 것도 이 과정에서 수행할 작업이다. 연간 예산계획에 6시그마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도 새로 추가해야 한다.3. 6시그마 달성프로세서-MAIC6시그마 기법을 이용하여 경영개혁 프로세스는 각 기업의 위치나 시장성 및가 나타나는지를 체크하고, 공정능력을 재평가한다. 이러한 분석결과에 따라 앞에서 실시한 MAIC 사이클의 재실시 여부를 결정한다.4. 6시그마의 인프라 구축과 제도 - 벨트 제도벨트(Belt)제도는 모든 임직원의 품질개선을 참여를 유도하고, 과학적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단계별 구분하여 자격을 두어 운영하는 제도를 말한다. 여기서 벨트라는 명칭은 태권도나 유도의 띠에서 유래되었다.+ 각 벨트별 개요 및 역할챔피언(Champion)챔피언은 6시그마의 경영의 전력수립과 실행을 책임지는 고위임원들이다. 이들은 최고 경영자를 마스터챔피언이라고 하고 이를 수행하는 사업부별 최고경영자를 챔피언이라고 한다. 챔피언은 6시그마 경영활동에 대한 진단과 점검을 통해 활동을 지원하고, 추진과정을 지원한다. 6시그마 경영을 기업문화에 접목하여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한다. 구체적인 역할은 다음과 같다.①블랙벨트의 선정②프로젝트의 선정③목표 수립④각 기능집단간의 협조 유도⑤추진상의 장애물 제거⑥필요한 자원의 재배치챔피언은 6시그마 경영을 위해 전임하지는 않는다. 다음 적극적인 활동에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챔피언은 기업의 변화 속도를 가속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 마스터 블랙벨트와 유대 속에서 함께 노력한다. 블랙벨트들에게 활동에 많은 관심을 보여 활성화를 유도한다. 활동을 격려하고 진행사항을 정기적으로 진단한다. 프로젝트 개선, 관리단계에 도달하면 공정 책임자가 지원하고 있는지를 확인한다.마스터 블랙벨트(Master Black Belt:MBB)6시그마 경영활동의 전문가로서 마스터 블랙벨트 교육과정을 인수하고 인증받은 사람이여 개선프로젝트 실행의 지도 전담자이다. 블랙벨트의 프로젝트 수행에 대한 지도와 자문, 문제해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애로 사항 해결 및 지원, 각종기법과 교육자료 개발. 이들은 6시그마 경영 기법에 대한 깊은 이해, 강의 능력, 리더쉽을 겸비한 블랙벨트에 대한 조언자이자 코치이다.블랙벨트(Black Belt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