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도 없는 것이다. …… 나는 내가 못난 줄을 잘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이 하나, 민족이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온 것이다." 필자가 책 서두에서 자신의 심정을 대신하고자 필자가 그렇게 극진히 모시고 따랐던 백범이 한 말을 옮긴 것이다. 필자 정정화는 본명 정묘희로, 부유한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 행복하게 유년시절을 보냈다. 11살에 남편인 성엄 김의한에게 시집가서 한 평생을 살면서 남편과 시아버지를 모신다는 일념하에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뒷바라지를 비롯하여 나중에 자신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그녀. 장강일기는 그녀가 겪어온 독립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독립... 어찌보면 굉장히 원대한 일이며, 끝도 보이지 않는 일이겠지만, 그러한 이상만을 가지고 투사로서 살아온 그녀는 아니었다.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며, 본분에 다하는 그러한 그녀의 일대기를 살펴본 이 장강일기는 현재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 아닌 식민지하에 놓여 있는 우리나라에서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보여주는 책인 것이다.Ⅱ. 장강일기필자 정정화는 11살이 되던 해 친정 할아버지의 고집 덕에 동농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결혼을 한다. 동농 김가진은 1946년에 안동 김씨 집안에서 서출로서 태어나 최초로 종일품의 직위까지 오르는 문필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과 박영효 등과 가깝게 지냈으며, 직접 거사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이후 군국기무처의 의원으로 있으면서 여러 개혁안의 안건을 기초하고, 의결시켰다. 이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이 일본의 피보호국으로 전락되자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국민운동에 전념하였다. 합방 이후 일제로며, 만주에까지 조직을 뻗치고 있었다.1919년 필자의 시아버지인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은 상해로 망명하고, 김가진은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추대된다. 그리고 3·1운동 다음가는 큰 사건인 대동단 만세 시위사건의 실패로 필자의 큰 오빠 정두화는 왜경에 체포되고, 필자는 첫 딸을 잃는다. 그리고 필자는 상해 망명을 결심하고 친정에 가 아버지 정주영과 상의하고 압록강을 건넌다. 서울에서 의주, 봉천, 산해관, 천진, 남경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여 마침내 상해에 있는 김가진, 김의한 부자와 상봉을 한다. 그리고 상해에서의 망명생활을 21세에 시작을 한다. 상해에 망명한지 한달 보름 남짓 지났을 무렵 필자는 너무도 어려운 임시정부 생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국내로 들어가기로 하고 신규식을 찾아가 상의를 한 끝에 국내로 들어가게 된다. 필자는 연통제를 따라 이륭양행의 배편을 이용하여 안동현까지 진입하고, 그 이후 우강과 대면하여 신의주까지 가게된다. 그리고 신의주에서 이세창을 만나 서울까지 가게 된다. 서울에서 그리 많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의 자금을 마련한 필자는 첫 번째 국내 잠입에 성공을 하게 된다. 이후 필자는 상해에서 화제가 된다. 그리고 이후에 필자는 5차례의 국내 잠입에 성공한다. 상해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필자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여러 임시정부의 거물들과도 접촉한다. 그러던 필자가 이욱이라는 사람과 3차로 입국하다가 둘의 실수로 왜경에 의해 체포되게 되고, 신분이 노출되었으나 별다른 조치없이 석방된다.그해 7월 동농 김가진은 망명한지 3년만에 불귀의 몸이 된다. 그해 10월 필자는 네 번째로 입국을 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다. 이후 필자는 아들 후동이를 낳는다. 그리고 성엄 일가는 일파 엄항섭의 일가와 가깝게 지낸다. 그리고 필자는 일파의 아내인 연미당과 절친한 사이로 지낸다.1908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연미당은 1930년 8월 중국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을 맡으면서 활발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해 상하이 한인 여성에 관한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수행하였다. 또 1938년 10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으로 항일 선전 및 홍보 활동에 주력하였고, 1941년에는 충칭에 3·1유치원이 설립되자 이국영·필자 등과 함께 충칭 주재 교민 자제를 교육하는 데 힘썼으며, 1943년 충칭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으로 선출되어 방송을 통한 교민들의 반일의식 고취에 주력한 뒤, 이듬해 중국 국민당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협조 속에서 대적선전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 상황을 우리말로 방송하기도 하였다. 이후 광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에 대한 소모공작 전개, 한국 여성들의 총궐기 촉구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기초위원, 한국독립당 집행위원 등을 지낸 엄항섭의 부인으로서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일파 일가와 가깝게 지내면서 필자는 석오 이동녕과 가까워지게 된다. 석오 이동녕은 필자가 임정생활을 하는 동안 백범과 함께 모셨던 임정의 어른이었다. 임정의 살림을 석오장과 백범이 다 짊어지다시피 할 적에 백범은 필자 일가와 절친하게 지냈었고, 필자 역시 백범을 극진히 모신다. 아들을 낳고 필자는 마지막으로 귀국을 하게 된다. 이후 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이 일어나고 독립운동의 근거지들이 전부 파괴된다. 그리고 의열단의 테러활동이 활발해지고, 그 시기 윤봉길 의사의 만보산 의거가 성공하게 된다. 의거의 성공과 함께 임정 일행은 상해를 탈출하여 가흥으로 간다. 가흥에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범의 가족과 만났고, 필자는 그의 가족을 극진히 돌본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뒤 일제는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중국의 정세는 날로 심각해 가기만 하고 국민 정부의 지원마저 일제의 압력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남경 학살이 일어나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임시정부는 장사를 빠져나가 광주로 향했고, 임정에 있던 청년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간다. 광주로 가던 중 망명정부는 주강의 목선에서 생활한다. 그리월 석오 이동녕이 별세한다. 본관은 연안, 호는 석오이며 자가 봉소로, 충청남도 천안에서 출생한 이동녕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전덕기·양기탁 등과 상동청년회를 조직, 계몽운동을 벌였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해 북간도로 가서 이상설·여준 등과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교포교육에 힘썼다. 1907년 귀국 후, 안창호·김구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청년학우회 총무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 신흥강습소를 설립, 소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과 교포교육에 힘썼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대동신문》 《해조신문》을 발행하였으며, 1913년 대종교에 입교하고,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장·내무총장,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안창호·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 단결을 촉진하였다. 1924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을 겸직하고 이어 대통령대리가 되었으며, 1926년 국무령, 1927년 주석(主席)이 되었다. 1929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이사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재차 의정원 의장이 되었으며, 임시정부 주석은 계속 역임하였다. 1935년 양우조 등과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에 가담하여 항일전을 구상하며, 1939년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사천성에서 병사하였다. 임시정부 국장으로 장례가 거행되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동녕은 유언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세 정당이라도 통합할 것을 남겼다. 그리고 두달 후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은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고, 중앙 집행위원장으로 백범이 선출된다. 그리고 필자도 창립 당원이 된다. 그리고 성엄은 광복군의 창설에 관여한다. 그리고 그해 7월 일본은 남진정책이라는 자기 무덤을 파게 된다.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중의 카이로 선언이 발표된다.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독립될 것을 결의한다는 것이다. 44년에 들어서자 연합국의 승리가 굳어지고, 일본은 국내에서 더더욱 비인도적인 악행을 저지르는 마지막 발악을 하고, 일본의 패전이 임박해지게 된다. 그해 4월 임시정부는 통일정부로 개편된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독립의 해를 쟁취하게 된다. 트루만이 취임한지 3개월 후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뜨리고, 왜놈은 항복하고야 만 것이다.8월 15일 이후 한 달동안 국내에서는 미 군정이 친일파들을 고관으로 임명을 하고, 미 극동사령부가 남한에 군정 실시를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미 군정 점령당국은 임시정부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임정일행들은 두 달 후 임정의 요인 자격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성엄은 28년만에, 필자는 15년만에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귀국 이후 필자 일가의 살림은 아주 궁색하였다. 그리고 백범이 한 달에 한 번씩 보내주는 만원이 고정수입이었다. 독립 이후 이승만과 김의한의 관계는 정치적 견해의 대립으로 틈이 생기고, 이승만의 단독선거로 결국 민족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신조어를 낳으면서 분열되게 된다. 그러던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정복을 한 현역 군인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의 초점은 안두희의 배후가 누구인가에 맞춰지게 되고, 안두희는 한독당에 비밀당원으로 입당했다고 알려졌다.백범 김구의 본관은 안동이고, 본명은 창수로,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 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