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걸리버 여행기(Guilliver Travels)]는 스위프트의 작품중 가장 보편성을 띤 풍자이다. 비록 이 작품이 당대 및 그 근년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암시(allegory)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1726년이나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풍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라든지 혹은 인간의 불완전함이 낳은 불완전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제도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있기 때문이다.Satire를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1969)는 이렇게 정의했다.1. 어떤 형태로 이든 아이러니, 조롱 혹은 재치와 우매함 혹은 사악함을 폭로하도록 사용된 문학 작품.2. 그와 같은 작품들을 포함하는 문학의 갈래.3. 조롱조의 재치를 어떤 맥락에서나 우매함 혹은 사악함을 공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 1)-풍자의 존재 이유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악덕과 우매함을 고치는 약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자의 대상을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일들을 제외하고 치료될 수 있는 잘못들에 국한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스위프트가 [스위프트씨의 죽음에 관한 시문](Verses on the death of Dr.Swift)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을 때 바로 이 점을 그는 강조한 것이다.Yet malic never was aim;He lashed the vice, but spared the name...His satire point at no defet.But what all mortals may correct...2)그러나 악의는 그의 목적이 결코 아니었다.그는 악덕에 채찍질을 가하였으나 이름을 건드리지는 않았다.그의 풍자는 아무 결함이나 겨냥하는 것이 아니고온 인간들이 고칠 수 있는 것만을 겨냥한다.Swift의 풍자는 인간의 참모습을 가식 없이 제시하는 것 이상의 목표를 추구한다. 그는 이 글을 통해서 독자가 자신의 모든 부정적인 요소와 마주 선후에, 그것을 넘어서야 한의 Part I, II에서 나타나는 정치, 종교, 제도, 인간성에 대한 풍자를 알아보고, 이러한 풍자를 통해 Swift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1) In LilliputSwift는 영국정부의 정책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당대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는 하였지만 정치에 동참하여 적극적인 개혁을 할 처지가 못되었지 때문에 다만 개혁을 방해하는 시대상의 모순이나 정체된 정신상태를 자극시키는 풍자라는 무기로써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간접적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Part l에서는 Queen Anne통치의 후기와 George 1세(1714-27)초기의 영국에 나타났던 정치적 사건들과 무능한 정부 속에서 자행되고 있는 온갖 우행을 풍자하였는데, 특히 Oxford와 Bolingbroke경 두 사람이 Tory정부를 이끈 1708년부터 1715년까지 영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Swift는 Tory당의 대변인으로서 Oxford경과 Bolingbroke경 두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충실히 봉사하였다. Gulliver는 때로는 Oxford이기도 하고 때로는 Bolingbroke이기도 하다. 저명한 인사나 특히 왕족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은 그 당시로 보아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비유적인 위장이 되어왔다. Part l에 나타나는 여러 사건들은 1710-14년사이 Swift가 Tory당에 협조하고 있었을 때 영국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풍자적으로 다루고 있다.Ch.5에서 그는 구두의 높은 뒷축, 낮은 뒷축이라는 뜻의 Tramecksan과 Slamecksan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개의 파당이 서로 다투어 왔다는 사실로서 High Heels는 그 당시의 Tory당을, Low Heels는 Whig당을 각각 비유한다.There have been two struggling parties in this empire, under thename of 'Tramecksan', and'Slamecksan' form the high and low heel중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험은 언제 왕의 눈밖에 날지 모르는 신하들의 처지를 각각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재무대신인 Flimnap가 너무 높이 도약했을 때, 그의 낙하를 안전하게 도운 왕의 방석은 당시 Kendal공작 부인을 풍자하고 있으며, 이 부인의 영향력 덕분에 권좌에서 쫓겨났던 Walpole가 다시 왕의 총애를 받게 된 것이다.당대의 영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풍자는 계속 진행된다. 다음은 인용문은 Lilliput궁정에서 왕과 왕비 및 수상 앞에서 베풀어진 여흥 뒤에 수여되는 색실에 대한 묘사이다.The Emperor lays on a Table three fine silken Threads of six incheslong. One is blue, the other Red, and the third Green, These Thteadsare proposed as Prizes, for thoes Persons whom the Emperor hath a m-ind to distinguish by pecliar Mark of this Favor.(P.2032)재주 있는 신하들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색깔의 명주실 중, 녹색 실은 1703년 Anne여왕에 의해 부활된 Thistle훈장을 풍자한 것이고, 홍색 실은 Bath훈장으로 1725sus George 1세에 의해 부활된 것이며, 청색 실은 Garter훈장으로 1726년 Robert Walpole에게 수여되었다.이로써, Swift의 풍자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종교계도 간과하지 않는다. 신(神)자체는 공격의 범위를 초월한 대상이지만, 종교를 신봉하는 신도들이나 성직자는 공격이 가능한 존재들이고, 성직자라는 근엄한 가면 아래에서 저지르는 위선과 비리는 매우 훌륭한 풍자의 재료이다. 종교적 분쟁의 근원을 찾아보면 15세기 중엽 헨리8세가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왕비 Catherine과의 이혼문제로 로마 교황과 대립되어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를 설립, 국교로 선포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표방하였다. 이er's Travels에서 보이는 가장 대표적인 종교 풍자로 Part l의 Lilliput으로의 여행 편에서 Big Endians 와 Little Endians사이의 싸움을 들 수 있다. 계란을 어느 쪽으로 깨먹느냐에서 비롯된 파생은 왕국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다.It is allowed on Hand, that the primitive Way of breaking Eggsbefore we eat tham, was upon the larger End: But his present Majesty'sGrandfather, while he was a Boy, going to eat an Egg, and breakingit according to the ancient Practice, happened to cut one of his Fingers.Whereupon the Emperor his Father, published an Edict, commanding allhis subject, upon great Penalties, to break the smaller End of their Eggs.(P.2038-9)소인국에서 전쟁의 추이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구교도와 신교도의 분쟁은 Charles 1세 처형과 James 1세의 망명, 그리고 구교도의 공직 임명에 제약을 가하는 법령을 제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Swift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영국 국교회간의 나라를 뒤흔드는 싸움도 결국 달걀을 어느 쪽으로 깨먹느냐 정도의 하찮은 문제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Ch.7에서의 the Man-Mountain(P.2052)에 대한 4개의 탄핵조항은 영국의 the Earl of Oxford와 Viscount Bolingbroke에 대한 풍자이다. 모반죄로 기소하려는 계획에 대하여 듣고서 Gulliver는 Blefuscu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환대를 받는데 이것은 Bolingbroke가 France로 망명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 자체를 묘사하려는 의도에 는 놀이와 같은 말초적 감각의 문제이지 도덕성 따위와는 무관하다는 신랄한 공격이 되는 것이다.2) In BrobdingnagLilliput에서는 인간사회의 축소판이 Satire의 대상이 되고 Gulliver가 비판하는 입장에서지만, 다음에 상륙한 대인국 Brobdingnag에서는 Gulliver와 그가 대표하는 인간사회 전반이 Satire의 대상이 되고 대인국의 현명한 국왕이 비판하는 입장이 된다. 재덕을 겸비한 이상적 인간상인 Brobdingnag의 왕과 Gulliver와 의 대화내용은 Swift의 Satiric force에 대한 보기로서 자주 인용된다.애국적인 영국인 Gulliver는 my own dear native country'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조국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려고 한다. 경멸의 대상이던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겸 조국을 변호할 더 없는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영국의 문물제도와 역사를 이야기한다. 또한 자기조국 영국에 대한 약점과 추한점을 감춘다. 열심히 조국을 설명했음에도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난 대인국왕은 이렇게 애기 한다.But by what I have with much pains wringed and extorted from you, Icannot but conclude the bulk of your native to be the most perniciousrace of little odious vermin that nature ever suffered crawlupon the surface of the earth, (P.2095)이와 같이 Brobdingnag왕의 인간성에 관한 견해는 보다 신랄하고 정확하게 맹점과 결점을 지적하면서 그는 인간을 diminutive insects 이니, the most pernicious race of little vermin"이니 하고 혹평하였다. Brobdingnag의 왕이 영국정부를 비평한 생생한 climax나 인간에 대한 평가는 Gulliver's Travels에서 가장 성공적이며, 또한 오래 있다.
포우와 휘트먼의 비교분석 .포우와 휘트먼은 둘 다 낭만주의 시인으로써 존재하였지만 그들의 추구하는 시적 표현에 있어서 많은 상이함을 가지고 있다. 그 두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차이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었는데 첫 번째로 시 형식적 면에서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포우는 머릿속에서 모든 plot과 효과와 주제 등 완벽하게 정돈되고 정교하게 짜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 펜을 들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 예시로 raven을 설명하였는데, 길이, 소재, tone, 후렴, 여운을 아주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생각하고 詩作을 한 모습을 text를 통해서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시의 절정인 마지막 연을 먼저 쓴 뒤 거기에 맞추어서 앞의 연들을 써내려 갔다. 그러나 휘트먼은 시작은 머리를 굴려가며 계획을 세우고 끙끙거리는 것이 아니라 영감이 떠오르면 아무런 제약없이 그 느낌에 따라 자유롭게 써내려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의 시에서 읽지 않은 상태에서도 연의 배열이 마치 산문처럼 자유롭게 배열되어 있는것에서 그의 의도를 파악 할수 있었다.시를 읽어보면 분위기면에서도 차이를 느낄수 있다. 둘다 美에 대한 주제를 설명하고 있으나 포우는 죽은 여인의 미가 가장 아름답다 여기고 시제를 설정한 것에서 그리고 까마귀라는 다소 불길한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암울하고 어둡고 가라앉은 듯한, 마치 꿈꾸는 듯한 분위기를 나타내지만 휘트먼은 미국의 광활하고 풍요로운 자연에 대한 미에 대해 노래하면서 열정적이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밝은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CDMA & TDMA ..........- 국내에서 얼마전부터 코드분할 다중접속 방식(CDMA) 방식의 이동전화 상용서비스 가 시작되었다. 이는 우리손으로 세계 처음 디지틀이동전화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부는 PCS(Personal Communication System) 즉, 개인휴대통신 사업자의 기술표준으로 CDMA 방식을 채택키로 결정했으며 미국도 PCS사업자의 50% 이상이 CDMA 기술방식을 채택하겠다고 결정했다고 한다.기지국과 단말기 사이의 무선구간을 연결해주는 다중접속기술에는 크게 나누어 TDMA와 CDMA, 그리고 FDMA등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가 현재 사용 하고 있는 방식은 아날로그방식이다. 아날로그방식은 도로를 4차선이나 8차선으로 나 누는 것처럼 주파수 대역을 30kHZ 단위의 여러 채널로 나누어 그 하나의 대역을 한 채널로 한다. 그리고 그런 아날로그 방식을 주파수분할 다중접속방식 FDMA( Frequency Division Multiple Access)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CDMA와 TDMA에 대해 정의하고 비교하면서 설명하겠고 우리나라가 최초로 채택한 CDMA의 문제점과 발전 방향에 대하여 설명하겠다.1. CDMA란?최근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자주 눈에 띠면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CDMA는 디지털 이동통신시스템에 적용되면서 각광을 받고 있는 전파기술의 하나이 다.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방식을 우리말로 표현하면 [코드분할 다중 접속]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한 주파수를 이용해 여러사람이 통화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사람의 음성마다 통화자 고유의 코드를 매긴 뒤 넓은 주파수 대역(1,230KHZ)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보 낸다. 신호를 받는 쪽에서는 주파수 대역에 실려오는 수많은 정보중 특정 코드만을 골라내 원래 신호로 재생한다. 기존의 아날로그방식보다 통화품질이 훨씬 뛰어나고 또한 전파의 대역확산 기술을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 통화의 음질이 깨끗하다는 장 점이 있다. 송-수신시 고유한 부호를 사용하기 때분에 통화의 보완성이 뛰어나다. 잡음과 혼신이 거의 없기 때문에 컴퓨터 멀티미디어 정보를 송-수신 하는데도 적합 하다. 또 여러 사용자가 시간과 주파수를 공유하면서 신호를 주고 받는 다중접속 방 식이기 때문에 기존 아날로그방식보다 수용용량이 최고 20배까지 늘어난다. 아날로그 기술로는 전파 하나를 1명만 이용할 수 있다면 CDMA기술은 20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가 되는건 특정목소리만 코드화해 식별하고 처리하는 능력뿐 인데 이것마저도 최근 고도로 발달한 반도체 기술덕분에 충분히 해결되었다.이 방식은 원래 군사통신용으로 개발된 것으로 91년 미국의 벤처리업 퀄컴 이 이동전화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창안해 내었다. 본격상용화는 우리나라가 세계최초이다.2. TDMA란?TDMA(Time Division Multiple Access)는 각 지구국이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데이터 비트를 고속으로 전송하는 방식이다. 각 지구국에 할당되는 시간은 매우 짧지만 이 순간에는 변환기의 대역폭을 모두 사용하기 때문에 많은 양의 비트를 전송 할수 있다. 기존의 아날로그 주파수폭을 3등분해 세 사람이 동시에 사용하는 방식으로, 가입자 수용능력도 아날로그 방식의 3배이다.시간을 각 지구국에 배당하는 방식은 일정시간씩을 윤번제로 고정배당하는 방식과 필요한 요구에 따라서 배당하는 방식이 있다. 이러한 배당은 제어 채널 혹은 order wire라고 불리우는 채널에 의해 행해진다. 이 방식은 모든 음성, 화상, 데이터 등을 모두 디지탈화하여 전송하게 된다.주파수 분할 멀티플 엑세스방식에 비해 guardband의 할당에 의한 대역폭의 낭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접한 캐리어끼리의 intermodulation효과를 걱정할 필요도없어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나 동기방법이 까다롭다. 즉, 각 지구국간의 거리가 일정치 않을 뿐만 아니라 위성은 태양 및 달의 영향으로 약간씩 그 위치가 달라진다. 따라서 사용되는 장비는 이러한 사항을 고려하여 설계되어야 한다.3. CDMA와 TDMA 비교TDMA는 일찍 상용화가 이루어져 기술의 안전성이 우수하며 그만큼 이를 채택하는국가가 많다. CDMA는 최근들어 상용화가 추진되고 있지만 기술자체가 TDMA보다 월등히 우수하다. TDMA의 경우 이동통신이 장래 동화상 등 멀티미디어까지 수용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릇이 너무 좁다는게 특징이다. 하지만 CDMA는 고도의 정보 처리능력과 함께 통신품질자체가 TDMA보다 우수해 궁극적으로 CDMA로 귀결될거 같다. 하지만 아직은 상용화가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국은 CDMA채택을 주저하고 있다.
메타분석법.......서론간호학·의학의 여러분야에서 수많은 실험 연구나 상관성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특정한 한가지 연구 주제에 대한 연구물만 세어 보더라도 이제까지 수십편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이 많은 연구들은 궁극적으로 환자 치료에 활용되기 위하여 시행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타인의 연구를 참고로 하여 가장 좋은 치료법을 결정하게 됨이 임상전문인들의 일상적인 과정이라 보여지는데, 이렇게 많은 연구 논문들을 단순히 읽음으로써 개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객관성이 결여된 방법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각 연구물의 결과가 때로는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며, 이에 앞서서 각 연구가 여러 면에서 다른데 대상자수, 치료법, 치료기간, 분석방법 등이 매우 다르고, 또한 연구자들의 판단기준에 따라 이 연구들을 개관한 결과가 매우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논문에 제시된 결과를 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개관하는 통계적인 방법이 바로 메타분석이며, Abraham 과 Schultz (1983) 는 메타분석이 간호학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이미 시사하였다. '개략' 또는 '개관' 한다는 뜻으로 Glass (1976) 에 의해 '메타'란 이름이 붙여진 메타분석은 그 근본이 되는 통계적 이론은 1930년대에 Fisher (1932) 와 Pearson (1933) 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이 이론이 실제 연구물 분석에 이용된 것은 1970년대에 교육학과 심리학 분야가 선두였었다.메타분석을 분명히 정의하라면 어떤 특정한 연구 주제에 대해 행해진 여러 독립적인 연구결과들을 종합하는 방법이다. 다라서 여러 연구결과물을 '분석'하는 것이 메타분석이며, 연구물에 대한 매우 적극적인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제약조건 ( 즉 작은 표본수, 한정된 대상자. 연구조건의 여러 가지 한계 등)에 의해 영향을 받는 하나의 연구결과물은 매우 미약하다고 볼 수 있지만, 같은 목적을 갖고 시행한 여러 연구들의 종합적인 결과는 결코 미약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수많은 연구가의 정확도가 높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대로 환자치료에 반영하여 수술전에 일반적으로 실시하는 mediastinotomy를 생략할 수 있다고 한다.치료효과에 대한 유의성검정메타분석은 구체적으로는 유의성검정 (significance testing) 과 치료효과 또는 유효크기의 추정 (effect size estimation)을 목표로 한다 (Glass, 1976; Hedges, 1983; Rosenthal, 1983). 우선 여러 연구의 p값을 병합하는 유의성 검정에 대해 본 절에서 설명하겠다. 매우 단순순히 메타분석의 대상으로 두 연구가 있다고 할 때 두 연구결과가 표 1과 같이 다양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경우 1과 2를 보고서 연구자는 두 연구결과가 일치하는 증거로 볼 수 있겠고, 경우 3과 4를 보고서 연구 2는 연구 1의 연구결과를 재현하지 못했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모두 틀린 대답이다. 유의성 검정의 '유의하다' '유의하지 않다'의 결과만으로는 두 연구결과의 일치성 여부를 알 수 없는데, 우선 치료군의 효과가 있다는 방향으로의 결과인지를 구분해야 하며, 이제 모든 경우에서 치료군이 효과가 있다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왔다고 가정할 때, 경우 1또는 2라 하더라도 두 연구결과가 서로 매우 다를 수 있고, 경우 3과 4라 하더라도 두 연구결과가 서로 같을 수 있다.표 1. 두 연구결과의 비교연구 1 연구 2경 우 1 유의하다 유의하다2 유의치 않다 유의치 않다3 유의하다 유의치 않다4 유의치 않다 유의하다fisher (1932) 와 Pearson (1933) 은 개별 연구의 검정 결과인 p값을 병합함으로써 이 연구들로부터 과연 치료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다음과 같은 비모수적 (nonparametric), 역카이제곱법 (inverse chi-square method)을 제시하였다.Fisher의 역카이제곱법 : 독립된 k 연구로부터 k개의 p값 (즉, pl, , pk) 이 있다. 각 연구의 치료효과를 구체적으로 평균, 평균의 차이, 또는 가설의 방향성이 치료효과가 있다는 방향으로 정해져 있음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양측검정에서 구해진 p값은 2로 나누게 되면 단측검정의 p값이 된다). 다시 말하면 메타분석에서는 치료군이 대조군보다 더 효과가 있는지, 아니면 반대로 대조군이 치료군보다 더 효과가 있는지의 두 사실을 구분하기 위하여 부호를 붙이게 되며, 다음 절에서 설명하게 되는 유효크기도 부호와 함께 제시한다. 연구결과가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방향과 일치하면 양 (+) 의 방향으로 정하고, 예상하는 방향과 반대이면 음 (-)의 방향으로 정한다. 다시 말하면 대다수의 연구결과의 방향을 편의상 양의 방향으로 채택한 것이다.실제로 여러 연구결과들을 병합하고자 할 때 치료효과를 측정한 변수가 매우 다양할 수 있으며 또한 사용된 검정통계량도 매우 다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스트레스를 측정하는 도구가 서로 다를 수 있고, CT 사진상에서 종양의 크기를 측정하여 치료효과를 알아볼 때, 지름 또는 면적을 측정할 수도 있다. 또한 연구의 결과를 분석할 때 연구자들이 분석에 사용한 검정통계량이 t 또는 F로 서로 다를 수 있다. 메타분석이 측정변구가 동일하고 검정통계량이 동일한 연구들만을 개관할 수 있다면, 이 분석법 역시 매우 국한된 개관방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Fisher의 역카이제곱법에 의하면 측정변수의 다름이 문제가 되지 않고, 또한 각기 다른 검정통계량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단지 정확한 p값이 있으면 병합이 가능한 것이다. 이를 일컬어서 역카이제곱법을 비모수적 방법이라 한다. 앞으로의 논문결과의 제시에 p.05로 표시하기 보다는 정확히 p=.003 또는 p=.08 등으로 표시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유효크기의 추정여러 연구들을 비교하거나 종합하고자 할 때 중재 (intervention) 또는 치료 (treatment) 효과의 크기를,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는, 같은 척도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여러 연구결과를 쉽게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유효크기를 정의하였다. 치료효과를 측정하는 변수질 수 있으나, 대조군의 표준편차로 나누게 되면 같아진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조군과 실험군의 표준편차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면 대조군과 실험군의 합병표준편차 SP로 나눔이 더욱 바람직하다. 이와 같이 계산한 유효크기를 d로 표시한다.메타분석의 발전 초기에는 치료효과를 나타내는 반응 또는 결과변수가 연속변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유효크기를 이와같이 표준화된 평균차이로 정의하였으나, 반응 또는 결과변구수 이산변수일 경우에는 유효크기를 평균차이로 제시치 않고 비율차 또는 상대적 위험율의 함수로 제시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위에서 정의한 유효크기는 해석이 가능하며 유효크기 d가 0.8이라 할 때 이는 Cohen (1977)에 의해 '큰 효과' 로 표현되었고 치료군의 평균이 대조군의 평균보다 0.8배의 표준편만큼 더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Cohen은 0.5의 유효크기를 '보통효과'로, 0.2의 유효크기를 '적은 유효크기'로 표현하고 있다. Cohen (1988)은 유효크기를 모집단에서 현상 (phenomenon)이 나타나는 정도 (degree), 또는 귀무가설이 어긋나는 정도라고 표현하였다. 이제 예제로써 유효크기를 이해해보겠다. 수술후 입원일수가 평균 9일이고 표준편차가 3일인 경우 수술전에 적절한 카운슬링을 시도하여 이에 대한 효과로 유효크기가 0.5였다면, 구체적으로 1.5일의 단축을 초래하였고 이는 카운슬링을 시도하기전의 입원일수와 비교하여 1.5일/9일 = 16.7% 의 효과를 본 셈이다.연구에서 관측하는 바가 변수간의 상관관계일 경우에는 중재효과 또는 치료효과를 상관계수 r로 표시할 수 있는데, 측정단위에 무관한 상관계수는 유효크기로도 사용되고 있다. 유효크기 d와 r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여러 가지 검정통계량에 대응하는 유효크기를 구하는 자세한 과정은 문헌을 참고하기 바란다 (송, 1992, pp. 17-19)간호학의 수많은 연구는 새로운 간호중재법이 예전의 것에 비해 좋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시행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치료효과를 =1.766t=4.16t=4.1479607190(1,77)586988.337 .706.226 .456.448 .987.404 .873유효크기의 비교 : χ2=2.26, df=3, P=.26(네 연구의 유효크기가 서로 다르지 않다)병합된 유효크기 : d=.780, r=.363여러 연구들의 비교 및 병합-Stouffer (또는 Mosteller와 Bush)방법앞의 2절에서 설명한 역카이제곱법은 전반적인 치료효과에 대한 검정에 그치고 있으며 치료효과의 합병 추정치를 제시해 주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모수적 방법인 Stouffer방법은, 여러 연구들의 치료효과가 과연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의 검정과 더불어, 여러 연구들의 합병치료효과 추정치를 제시한다.메타분석에서 연구결과물을 병합한다고 할 때 각 연구의 p값을 병합할 수도 있고 또한 통계량을 병합할 수도 있으며, 병합에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모수적(parametric) Stouffer 방법 (또는 Mosteller 와 Bush 방법)을 설명하겠다.Stouffer 방법 : θi로 개별 연구 i의 치료효과를 나타낼 때, 이의 추정치를 θi^라 하고 편의상 분산의 역(inverse)을 wi=1/va*r(θi^)라 하면 점근적 (asymptotically) 으로 θi^는 정규분포 N(θi, wi-1)를 보인다. 따라서 Hoi : θi=0이 성립될 때에 θi^wi는 정규분포 N(0, wi)를 보이며, Ho : θ1=θ2= =θk=0 이 성립될 때에 이들의 합인 ∑θi^wi 도 정규분포 N(0. ∑wi)를 보인다 [A]. 이제 Ho : θ1=θ2= =θk=0 의 검정은 마지막 정규분포성[A]를 이용하여도 되고, 정규분포의 제곱인 카이제곱합을 이용하여 (∑θi wi)2/∑wi를 자유도 1의 카이제곱 분포와 비교하여 검정하여도 된다. Stouffer 방법이란 개별 연구의 pi를 이에 대응하는 표준정규분포 점수 Zi로 변환 (Z score transformation) 시켜 [A]에 적용하는 방법이며, 이와 같는다.
한국전쟁에 대하여.......서 {한국전쟁의 배경과 그 결과(한국전쟁과 미국)론한국사(韓國史)에 있어서 커다란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으로서 한국전쟁(韓國戰爭)을 들 수 있다.해방 50년을 맞이하여 실시한 여론조사{. 1995. 3. 5. 조선 일보를 볼 때 일제의 식민 정치에서 해방된 이후 최대 사건으로 국민들의 약60%가 단연 한국전쟁을 꼽는다. 현재 전쟁을 체험한 사람들은 전쟁을 겪지 않은 전후 세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해방 이후 최대 사건으로 꼽는 것은 그 만큼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한국전쟁은 공산국가와 비공산국가 간의 냉전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념을 달리한 강대국들이 자국의 군사력 증강과 이념의 확대 등 자국의 이익을 목적으로 발발된 한국전쟁은 강대국의 이념 문제를 벗어나 우리 민족 자체가 상당히 고통받은 전쟁이었고,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 커다란 응어리로 남아 있다.제 2 차 세계 대전 이후 한반도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국가는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이 남한에 주둔해서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주요 정책들에 대부분 결정을 내려 왔으며 지금도 남북한 관계에 많은 개입을 하고 있다. 한국 전쟁에서 미국의 개입은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었다.그러므로 우리는 이 글에서 한국 전쟁의 대외적 측면, 즉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어 보겠다. 20세기가 끝나 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 나라의 통일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이슈(issue)로 떠오르고 있다. 따라서 분단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한국 전쟁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한국 전쟁의 원인과 그 과정, 그리고 휴전, 이후 현재 남북한 관계, 그리고 한국 전쟁 속에서의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고 앞으로의 통일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본 론1. 한국 전쟁의 원인 및 배경한국전쟁의 발발 배경은 미국 내의 대한 정책의 변화, 남한의 이승만 체제 강화, 북한의 통일 정책해야 하며, 침략이 있을 경우엔 U. N.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한편,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기 때문에 조기 철군을 주장하였던 군부의 태도는 그들이 북한 군의 군사력 증강과 남침 위협 보고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설명을 보충해 주고 있다.1945년 8월 15일 이승만 세력과 한민당은 미군정의 도움으로 한국독립당 등의 우익 세력까지도 배제하고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대중적 정치 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 수립 과정에서 드러난 반민족적, 반민중적 성격 때문에 출발부터 정치 위기에 몰렸다.이승만은 정부 수립 초기부터 제헌국회 소장파 의원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소장파 의원들은 외국군의 철퇴와 평화 통일을 주장하였고, 반민족 행위처벌법, 농지개혁법 등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여 이승만의 정치 기반을 위협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1949년 5월에서 6월 사이에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하여 소장파 핵심 의원들을 남로당 프락치라는 혐의를 씌워 체포해 버렸다. 이 무렵 이승만에게 가장 큰 정적이던 김 구 또한 암살됨으로써 이승만에 대항하던 중간파 정치 세력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다.이승만은 1950년 봄까지 국회 안의 반대파인 소장파를 제거하고, 민중의 무장 투쟁을 탄압하여 정부 수립 초기의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정치 기반을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1949년 12월에 공포된 국가보안법은 좌익 세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쟁자들, 그리고 민중을 탄압하는 무기로 달리 활용되었다.북한은 1948년 9월 9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뒤, 1949년 6월 이러한 국제환경의 변화와 남한 내 이승만 체제 강화로 인해, 남ㆍ북로당을 조선 노동당으로 합당하고 조국 통일 민주주의 전선(조국 건설)을 결성하여 남한에 대한 통일 공세를 갖추었다. 북한은 조선 전선을 통해 남한에 평화적 조국 통일안을 세 차례에 걸쳐 제의하였다. 북한이 제안한 통일 방법은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고 정치 자유가 보장된 상황에서 남북 총선거 실시로 전 조제에 대해 계속하여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확인을 할 정도로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 였다.김일성과 박헌영은 미군의 주둔 시에는 그것이 조국 통일의 최대의 장애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미군이 철수하자, 그들의 많은 연설과 스탈린 및 모택동과의 비밀 회담에서 드러나듯이 이번에는 물러간 그 최대의 장애 가 다시 돌아오는 것에 대해 가장 깊고 예리하게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다.북한은 미국의 개입을 예상하고 있었을까? 미리 결론을 말하면 북한은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개입하더라도 그 이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전쟁을 개시하였다. 소련 공산당 문서 이나 에서도 김일성의 이러한 인식을 곳곳에서 확인 가능하다. 이것은 신뢰할 만한 모든 자료의 공통된 지적들이다. 김일성은 전쟁이 끝났을 때에도 이러한 생각을 인민군들 앞에서 숨기지 않고 피력하였다. 지난 전쟁시기에 만약 미제와 그 추종 국가 군대가 아니라 리승만 괴뢰군만을 상대로 싸웠다면 우리는 벌써 그를 소멸하고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였을 것입니다. {. 조국 해방 전쟁의 력사적 승리와 인민군대의 과업에 대하여 - 조선 인민군 제 256군부대 관하 징병들 앞에서 한 연설 - 1953년 10월 23일, 남한 인민이 자신들의 지지 세력이자 전쟁의 개시에 호응하여 봉기할 혁명의 수원 세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전쟁을 개시하는 데 미국의 불개입과 함께 북한 리더십의 두 확신 요소였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스탈린 및 모택동과 김일성, 박헌영의 대담이나 , 그리고 박길룡의 증언을 통해 그들의 인식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련 외교관들과의 대담에서도 남한 인민의 혁명성에 대한 그들의 확신은 확고하였다. 즉 박헌영과 김일성은 전쟁이 발발하면 남한 인민들이 적극적으로 봉기하여 자신들을 지지할 것으로 믿었다.흐루시초프는 일찍이 드디어 예정된 시각이 다가옴에 따라 전쟁은 시작되었다. 인민군은 재빨리 남으로 휩쓸고 내려갔다. 그러나 처음 몇 발의 총성만 울리면 남한 내에서 민중이 괴뢰 정부군에 의하여 반역적인 침략을 받았으며, 그래서 자위로서 마지못하여 반격을 한 것으로 알게 되었다. -즉, 그들은 그들의 남침 이 아니라 우리의 북침 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 나라로서는 아무런 준비 없이 전쟁을 치러내야 했다. 미군들도 철수한 터라 그 날 당일 꼼짝없이 당했던 것이다. 미군이 다시 우리 나라에 돌아와 전쟁에 참여한 것은 일주일 정도 뒤였다. 그때까지 우리 군은 계속되는 후퇴만 있었을 뿐. 한국 전쟁은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나 미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 이후 최초의 대규모 분쟁이었고, 이 전쟁에 대처한 미국 정책 결정자의 행동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빈약한 무기를 가지고 조국 사수의 결의를 다짐하면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다. 그에 따른 수많은 피난 행렬이 이어졌다.북한 공산군의 남침에 대하여 유엔은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고, 북한의 남침은 불법이며,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 행위라고 규정하고, 한국에 대한 지원을 결의하였다. 동시에, 유엔군을 파견하여 북한 공산 집단의 침공을 저지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등 우방 16개국의 군대가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국군과 함께 각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전개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마침내 38도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수복하였으며,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이렇듯 민족의 통일이 성취되려는 시점에서 우리 국군과 연합군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중공군의 인해전술.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한때 한강 이남까지 후퇴하였으나, 곧 다시 반격 작전을 전개하여 38도선 부근에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3. 휴전 과정과 그 이후 남북한 관계일진일퇴가 거듭되는 가운데, 공산군측은 유엔의 소련 대표를 통하여 휴전을 제의하였다.이 같은 휴전 제의에 대하여, 우리 정부는 휴전을 하게 되면 국토의 분단이 영구화될 것을 염려하여 이승 전쟁은 3년간 계속되어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 전쟁 중에 사상자는 약 150만 명에 달하였고, 국토는 초토화되었으며, 건물, 도로, 공장, 발전 시설 등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다. 동시에, 남북간의 대립은 더욱 날카로워져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어렵게 만들었다.휴전과 동시에, 대한 민국은 황폐된 국토의 재건과 부흥을 서둘렀다. 미국 등 자유 우방도 이를 도와주었다. 복구 사업은 국민적 참여와 열의에 의해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생산 활동도 점차 회복되어 갔다.교통, 통신 기관이 점차 개선, 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멘트, 전력 등 기간 산업 시설도 갖추어져서 경제 발전의 기틀이 잡혀갔다.한편, 미국과 한. 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여, 앞으로 어떠한 외부의 침략에도 상호 협조하고 대항할 수 있는 공동의 준비를 해 나갔다.북한의 김일성은 6. 25 전쟁을 거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 세력들을 숙청하여 1인 독재 기반을 강화하였다. 그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남로당을 비롯한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였고, 이어서 그의 독재 체제를 비판한 연안파 공산주의자들도 숙청하였다.1960년대에 이르러, 북한에서는 김일성 독재 체제가 더욱 강화되어 그의 유일 지배 체제가 구축되었고, 그 과정에서 김일성에 대한 개인 숭배가 강화되었다.1973년에, 김일성은 새 헌법을 채택하여 국가 주석의 새 지위를 차지하고, 강력한 권력 기관인 중앙 인민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정치 권력을 아들인 김정일에게 세습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하여, 1980년 10월에 개최된 당 대회에서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공인하였다.1997년 현재 북한은 많은 내부 모순을 안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기아로 허덕이고 있는 가운데서도 한편에서는 전쟁 준비를 한다고 야단들이다. 그리고 작년 여름 북한과의 관계는 한때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무장공비 침투 사건. 우리 사회는 극도로 긴장감에 싸였고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무고한 젊은 생명들을 앗아간 이 사건은 우리에게 다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