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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고대사회의 남과북의 발전양상
    1.국가의 성립1) 철기의 사용청동기의 사용은 최초의 계급사회인 군장국가를 출현케 하였는데, 이들 군장국가 중에는 청동기시대 말기에 이르러 보다 발전적 국가형태로 넘어가는 곳도 있었다. 일찍부터 군장국가를 이룩한 고조선은 청동기문화가 성숙하자 초기국가의 단계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군장국가에서 정식 국가단계로 진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鐵器(철기)의 사용이었다. 이와 같은 철기의 전래에 따라 우리나라는 철기가 상용되기 시작함으로써 각지에서 보다 강력한 정치조직체인 국가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B.C. 4세기 경이었다. 이 때 중국의 戰國時代(전국시대)에 출현한 철기문화가 한국에도 들어왔던 것이다. 이 철기문화는 압록강 중류와 청천강 상류를 거쳐 대동강 유역으로 들어왔는데, 그것은 철기와 함께 전국시대 燕(연)의 화폐인 明刀錢(명도전)이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들 철기문화의 소유자가 해안선을 타고 온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자리잡은 집안 지방에서 압록강을 건너 대동강 유역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주목되는 것으로 뒤에 衛滿(위만)의 이주와 연관지을 수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수입된 철기문화는 한국에 들어오자 곧 토착문화로 수용되었다. 그것은 우리나라 각지에서 철기를 만드는 鎔范(용범)이 다수 출토되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철기가 들어온 초기에는 역시 전부터의 청동기가 많이 사용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철기문화의 유적에서 철제유물과 함께 청동기가 출토되는 것은 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의 청동기 중에는 중국의 그것과는 다른 독특한 형식의 세형동검과 靑銅戈(청동과)·多⊙細文鏡(다뉴세문경)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특히 세형동검은 祖形(조형)이 만주 요령성의 비파형동검이지만 청천강 이남의 한반도에서만 발견되어 이 지역이 요령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한다. 초기 철기시대에는 여전히 청동기의 이용이 많았지만 한 군현이 설치된 용되어 있는 에 따르면 이미 B.C. 4세기 이전부터 조선에서 '王'을 칭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즉, 周(주)가 쇠약해져 연이 왕을 칭하고 동쪽을 침공하려 하자 朝鮮侯(조선후)가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오히려 연을 치려다가 대부인 禮(예)가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한다. 그 뒤에 조선왕의 자손들이 더욱 교만해지자 연은 장군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방 2,000여리를 공략하고 만번한으로 경계를 삼았다 하였는데, 진개가 조선을 침공한 것이 B.C. 4세기 말이니만큼 처음 조선에서 왕을 칭한 것은 B.C. 4세기 이전으로 보인다. 조선왕이 왕을 칭하였을 뿐 아니라 그 자손들이 왕위를 세습하였고, 연을 치려할 만큼 국력이 강성하였으며, 大夫(대부)라는 관직이 있는 것을 보아도 이 시기를 초기국가의 단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은 연의 공략으로 일시 쇠약해졌지만 B.C. 3세기 후엽까지도 否王(부왕)·準王(준왕)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이 때 요동지방에서 秦(진)·漢(한) 교체기의 혼란을 피하여 조선으로 유입해오는 자가 많았는데, 그 가운데 衛滿(위만)이라는 사람이 있어 준왕은 그에게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이민세력을 기반으로 자기 세력을 확대하여 마침내 준왕을 축출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이로써 고조선은 새로운 시기로 넘어가게 되었다.4) 위만조선준왕의 왕조에 대하여는 箕子(기자)의 동래에 의해서 건국된 기자조선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이것이 중국계의 식민지가 아니라 조선인의 토착적인 왕조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준왕의 왕조에 대신하여 들어선 위만조선도 역시 토착인의 국가였음은 다를 바가 없었다. 연왕 盧⊙(노관)이 한에 반하여 흉노로 망명할 때 위만도 그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는데, 그를 연인이라하여 위만조선을 중국인의 식민정권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가 입국할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연 지방에 살던 조선인이 틀림없다. 또한 준왕이 그를 신임하여 博士(박사)에항은 특히 한 군현의 변두리에서 두드러져 4군 설치 후 20 여년만에 진번·임둔의 두 군이 폐하여지고 그 일부 지역은 가까운 낙랑·현도군에 합해졌다. 그 후 몇년도 못가서 현도군마저 그곳에 살던 예인들의 반항에 의해서 만주의 興京(흥경)지방으로 쫓겨가게 되고 그 관할하에 있던 임둔 옛땅이 다시 낙랑군에 예속되면서 변군에 東部都尉(동부도위)와 南部都尉(남부도위)가 설치되었다. 중국에서 왕망이 타도되고 후한이 세워진 동란기인 A.D. 30년에는 낙랑군의 토호인 王調(왕조)가 漢人太守 劉憲(한인태수 유헌)을 죽이고 독립세력을 일으키려 하였다가 7년만에 낙랑태수 王遵(왕준)에 의하여 평정되었으며, 이 때 동부도위와 남부도위가 철폐되었다. 그 후 후한 말에 요동지방에 있었던 公孫氏(공손씨)가 남쪽의 辰(진)을 견제하기 위하여 진번 옛땅에 帶方郡(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이것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낙랑군과 함께 소멸되고 말았다(A.D. 313). 이와 같은 중국군현에 대한 반항운동은 토착사회의 정치력을 발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중국의 군현정치는 이민족에 대한 식민지 지배이면서도 토착적인 군장국가의 國邑體制(국읍체제)를 인정하여 원주민사회는 어느 정도의 자율성이 확보될 수 있었으므로 이 사이의 자기성장은 군현에 대한 반란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기한 바 A.D. 30년에 토착인 왕조는 봉기하여 한인태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하였던 사건은 바로 이를 나타낸 것이며, 이러한 움직임은 낙랑군 중심지에서도 일어났으나 특히 변군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고구려·옥저·동예·진(삼한) 지역에서 군현 축출을 위한 정치력의 결집은 군장국가의 내부적 발전을 촉진하고 초기국가 성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국군현이 토착인 거수들에게 관작이나 印綬·衣⊙(인수·의책)을 주는 등 회유적인 분리책으로 내부적 성장을 저지하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토착민들의 정치적 자각은 변군지방의 정치·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한의 군현은 우리 나라 사회와 문화의 향상에도 영향을 끼쳤다.이룬 듯하다. 이 지방에 설치되었던 현도군이 B.C.75년에 만주로 쫓겨간 것도 고구려의 세력이 성장한 결과로 풀이된다. 전술한 바 A.D. 9년에 왕망이 부여·고구려에 책명사를 보내 왕을 후로 내려 부르도록 한 사실이나, A.D. 12년 고구려가 新의 명을 듣지 않자 왕망이 嚴尤(엄우)를 시켜 고구려후 騶(추)를 치게 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의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A.D. 1세기 후엽인 太祖王(태조왕) 때에는 정복사업을 활발히 하여 동으로 옥저를 복속시키고, 남으로 청천강까지 그 영토를 확대하여 커다란 영토국가를 이룩하였다. 원래 고구려에는 貫那·桓那·緣那(관나·환나·연나) 등 여러 那(나)가 존재하고 있었으니 5部로 칭하여지는 桂婁部·消奴部·絶奴部·順奴部·灌奴部(계루부·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 등도 이 나의 별칭으로 보인다. 이들 여러 나는 종래의 군장국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구려가 국가형태를 갖추기 전에는 이들 나라 하는 군장국가가 분립되어 있다가 B.C. 1세기 경에 이 가운데서 가장 강력하였던 계루부에서 대군장이 나오고, 다른 나들을 예속시켜 초기국가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의 정치조직은 국왕 밑에 여러 관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초기국가 고구려의 중앙관제를 기록한 동이전에는 相加·對盧·沛者·古雛加·主簿·優台·丞·使者·⊙衣·先人(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 등의 관직명이 보인다. 상가는 각 부의 장인 대가 중에서 선출된 대표자로 보이며, 실제로 국광직속의 우두머리는 대로 또는 패자로서 대로가 있을 때에는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을 때에는 대로를 두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이들이 국정을 관장하는 수상이었을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5부의 대가도 각기 사자·조의·선인 등의 관리를 두었다 한다. 이것은 종래의 독립적인 군장들이 초기국가로 넘어간 후에도 여전히 자치권의 일부를 인정받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계루부에서 나온 국왕에 의하여 국가형태를 이룩하였으나 종래의 부족한 부족의 귀족이 우대되고 일반 군장과 구별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대가들은 여전히 부족적인 전통을 유지하면서 중앙정치에 참여하여 국왕과 함께 지배계층으로 행세하였다. 초기국가에서도 국민의 기저를 이룬 것은 하호였다. 하호는 종래의 부족사회의 氏族員(씨족원)의 후신으로 군장국가에 이르러 군장의 지배를 받은 일반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초기국가에 이르러 아직도 대가들의 자치적인 통솔을 받았는데, 그것은 부여에서 제가들이 독립하여 싸울 때 하호들이 양식을 날라다 주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이들 하호는 농업을 중심으로 한 생산담당자로서 양인신분이었는데, 초기국가가 발전함에 따라 점차 대가의 지배에서 이탈하여 국민화의 길을 밟았던 것이다.10) 초기국가의 문화{강화 지석묘초기국가는 국가를 지배하기 위하여 그에 알맞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地理志(지리지)에는 고조선에 8條(조)의 법금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만 3조 만이 전하고 있다.1 相殺 以當時償殺 (상살 이당시상살) 사람을 죽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2 相傷 以穀償 (상상 이곡상) 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 배상한다.{고창읍 죽림리 지상석곽식 고인돌3 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상도 남몰입위기가노 여자위비 욕자속자 인오십만) 남의 물건을 훔친자는 노비로 삼고, 스스로 재물을 내고 죄를 면하려는 자는 1인당 50만전을 내야한다. 이것은 살인·상해·절도에 관한 법률인데, 이에 계속하여 婦人(부인)들이 貞信(정신)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한 것을 보면 간음을 금하는 또 하나의 1조가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부여에도 고조선과 비슷한 법속이 있었다. 즉, 동이전에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으며, 도둑질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하고, 간음을 한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한다. 특히 부인의 투기를 미워하여 이를 사형에 처한 후 시체를 나라 남쪽의 산위에 버려 썩게 하였는데, 만약 여자의 집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주어야 했다한다. 이 고조선·부여의 법속은 대체이다.
    인문/어학| 2002.05.30| 11페이지| 1,000원| 조회(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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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국가형성기의 고구려 평가C아쉬워요
    -고고학으로 본 국가 형성기의 고구려-고구려의 수도와 성곽고구려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의 형성은 상당히 일찍한 시기부터 이루어 졌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주체는 맥(貊)족이라고 한다. 맥족은 고조선시기부터 혼하(渾河)와 압록강 중류 계곡사이의 좁은 평야에서 하나의 정치집단으로 존재하여 중국에도 알려져 있었다.{고구려는{{방어에 유리한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중국과 북방 이민족과의 끊임없는 항쟁과 교류를 통하여 점차 국력을 성장시켜 나아갔으며, 건국초기부터 동으로는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까지, 서로는 요동(遼東)지방, 북으로는 송화강 일대까지 진출하였고, 서기 313년에는 낙랑군을 몰아낸 뒤 보다 남쪽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요하에서 한강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수도를 옮겼는데, 처음 환인(桓仁)에서 일어나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고, 남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427년에는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5~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으나 668년 나 당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였다.{{{좌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오녀산성, 국내성, 국내성 북쪽성벽, 평양성의 궁궐이 있었던안학궁터, 대성산성)고구려의 문화{고구려는 부여의 문화를 바탕으로 외래문화를 다양하게 수용하였다. 즉 중국, 북방민족, 낙랑, 서역계통의 문화와 불교문화 등 실로 다양한 문화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고구려 특유의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창조하고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고구려 문화의 국제성과 선진성은 천문, 지리, 문학, 음악, 무용, 공예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집안· 평양일대의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특히 벽화무덤을 통하여 고구려인의 강인한 힘과 창조력을 느낄 수 있으며,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웅장한 형태에 유려하면서도 힘찬 기운이 담겨져 있는 고구려 특유의 글씨체로 당시 동아시아 최강자로서의 고구려의 위상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측의 주장은 비석을 석회로 발라 비문의 글자를 조작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면서부터 한일 양국 학자들 간에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문제의 신묘년조 비문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학자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고 있다.중원고구려비입석마을의 입구에 서있는 이 비석은 마을에서 오래 전부터 선돌로 모신 것인데, 1979년 충주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의 모임인 "예성동호회"에서 발견하여, 정영호 교수(당시 단국대학교 교수)에게 연락하여 학자들이 현지를 조사한 결과 고구려 때의 비석으로 밝혀지게 되었다.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광개토대왕비와 마찬가지로 4면 모두에 글을 새겼다. 글자는 전면이 10줄에 23자씩이고,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글자의 지름은 3∼5cm이다.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 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 비석의 발견이라는 점과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더구나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으로 남아 있는 것은 광개토대왕비, 연가칠년명 금동불의 광배뒤에 새겨진 글 등 몇 점되지 않는 현실에서 중원지방에 이러한 고구려의 비석이 남아 있다는 것은 고구려사 연구에 획기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글씨나 글에 고구려인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비석이 만들어진 연대는 423년 장수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고구려의 고분{고분은 지배층인 피장자의 정치적, 사회적 위치를 잘 나타내며 당시의 매장 관념과 함께 피장자가 속하고 있던 시대상 등도 반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분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화, 발전하고 지역에 따라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분 측조의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고분 문화 시대의 추이와 덮은 다음 봉토를 쌓은 것이다. 굴식은 널방에서 밖과 통할 수 있는 널길이라는 일종의 통로를 내놓은 방식의 무덤이다. 구덩식이든 굴식이든 석실 내부에는 유해와 함께 많은 부장품이 묻혀 있다.{고구려의 고분은 고구려 영역 내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조성되었을 터이지만, 초기의 중심지인 압록강 유역과 후기의 중심지인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특히 5세기초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 집안 일대에는 1만여기가 넘는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왼쪽의 그림은 중국 집안 지역의 고구려 고분군으로 뒤에 환도 산성이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의 벽화고분들이 중국당국의 무관심으로 많이 훼손되고 있다고 한다. 반면 고구려고분이 가장 많이 밀집되어있는 평양일대에는 북한당국의 관리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평양일대에는 천여 기의 고구려 고분들이 있는데, 벽화 고분은 대성산 고분군, 장산동 1.2호분, 진파리 1.4호분, 동명왕릉이 있다. 고구려에는 돌을 쌓아서 만든 무덤들, 큰 화강암을 잘라서 겉을 층층으로 쌓아올린 피라밋같은 무덤들, 그리고 경주나 공주에서 보는 자그만 한 동산 같은 봉토고분들이 골고루 자리하고 있다. 피라밋들이 경이로움을 준다면 이 고분들은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모양부터 피라밋 무덤들이 동적인 파도를 연상시킨다면, 흙무덤들은 정적인 물결을 느끼게 한다.그럼 지금부터 고구려 고분들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알아보자.고구려고분은 먼저 외형상의 특징에 의해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돌로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흙으로 덮은 봉토무덤이다. 돌무지무덤이 먼저 나타난 무덤양식으로서 대략 BC 3∼2세기경부터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며, 봉토무덤은 AD 4세기경에 비로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먼저 돌무지무덤에 대해 살펴보면, 주로 압록강과 그 지류인 혼강, 독로강유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나왔으나 대체로 랴오둥반도에 분포하는 고조선시기의 돌무지무덤에서 찾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축조방식이나 용재의 등으로 기단을 마련한 것이 특징인 기단식 돌무지무덤은 AD 1∼2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파악되며, 강가뿐만 아니라 산기슭에도 만들어져 있고, 이에 따라 무덤축조의 재료로서 냇돌 외에 모난 산돌도 많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3∼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기단 위에 덧널의 구획을 잡고서 돌로 곽벽을 쌓아 올린 뒤, 그 벽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덧널의 둘레에 다시 돌을 쌓아 마치 새로운 단을 만든 것처럼 해놓고, 덧널의 윗부분을 몇 겹의 돌로 덮은 것이다. 이로 인해 무덤의 테두리를 이루는 기단 즉 첫째단과 덧널의 벽체를 이루는 둘째단, 덧널의 상층부를 이루는 셋째단이 외형상 계단 모양을 취하게 된다.장군총과 같은 초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는 계단의 숫자가 3단이 아니라 7단까지 이르기도 하며, 이 경우 시체가 묻히는 장소는 둘째단이 아니라 정상부에 가까운 곳에 조성된다. 내부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거의 대부분이 매장주체부를 지하나 지면에 바로 두지 않고 돌무지부 중에 마련하는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그리고 매장주체시설로는 흔히 돌덧널이 설치되는데, 원래는 시체를 위로부터 묻는 구덩식이 기본이었으나, 계단식 돌무지무덤 단계에 이르면 굴식에서 볼 수 있는 널길의 흔적이 나타나기도 하며, 장군총이나 태왕묘 등의 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는 실제로 연도가 딸린 굴식의 돌방이 조성되어 있다. 한편 축조 재료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주로 냇돌이나 산돌 등의 막돌을 이용한 것이 많았지만, 계단식 돌무지무덤 단계에 이르면 정성들여 다듬은 절석을 사용한 것이 출현한다. 이러한 절석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무덤축조에 들인 공력의 측면에서 다른 무덤양식을 압도하며 장군총의 예에서 보듯이 초대형인 경우가 많아, 대체로 왕이나 최고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상에서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다양한 무덤양식과 그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결국 돌무지무덤 축조방식의 발전과 분화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 무덤양식에도 엄격하게 가해지는 모습, 즉 고구이 너무 심해, 랴오둥지방의 중국 한나라 돌방무덤이나 낙랑의 벽돌무덤의 영향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4세기 중엽 고구려의 장악하에 있던 평양 부근에서 안악 3호분과 같이 중국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는 벽화무덤이 봉토돌방무덤으로 축조되고 있었던 사실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봉토무덤은 4세기 이후 1세기 이상 돌무지무덤과 공존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다양한 무덤양식을 파생시키는데, 예컨대 재래의 돌무지무덤에서와 같이 돌로 기단을 두른 후 흙으로 덮은 봉토돌방무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봉토무덤처럼 돌방을 지상에 설치하고 돌을 덮은 돌무지무덤, 즉 소위 봉석돌방무덤이 나타나기도 하였고, 완전한 봉토가 아닌 토석혼봉의 돌방무덤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묘제상의 혼효는 봉토돌방무덤의 아이디어가 고구려 사회에서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것이고, 고구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봉토돌방무덤 일색이 되고 만다. 봉토무덤은 규모의 대소, 널방의 숫자, 널방의 축조재료, 널방천장의 조성방식, 벽화의 유무 등을 기준으로 다양하게 구분되고 있다. 여기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봉토무덤의 발전과정도 나타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피장자의 신분에 따른 무덤양식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이 흙무덤들이 더욱 신비로운 것은 그 안에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집이 있고, 사람이 있고, 그들이 살던 세계가 하나하나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현재까지 발견된 벽화분은 90여 기에 이르는데, 주로 평안도 지방의 평양일대와 황해도의 안악지방에 있고, 나머지인 약 20여기가 만주지역, 그것도 거의 집안에 있다. 고구려는 중기까지는 남쪽과 북쪽이 문화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남쪽인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은 바다를 건너 중국 지역과 일찍부터 교류를 했기 때문인지 먼저 벽화 고분이 생겼다. 벽화가 발견된 무덤 중 돌무지무덤인 지안 우산하 41호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봉토돌방무덤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에서의 벽화분의 출현은 대략 4.
    인문/어학| 2002.05.30| 8페이지| 1,000원| 조회(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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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증법적 유물론 평가B괜찮아요
    변증법적 유물론-서론-변증법의 본래 뜻은 대상들의 바로 그 본질 속에 있는 모순을 연구하는 것이다. 대상이나 현상을 분석하는 데는 그것이 갖는 모순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며, 모순을 대립적인 측면, 성질, 경향들의 통일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모순의 상호 연관성을 밝히려고 노력해야 한다. 각각의 대상과 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의 부정적인 측면이나 긍정적인 측면만을 보는 것, 곧 낡은 측면이나 새로운 측면만을 보는 것, 다시 말하면 각각 모두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갖는 통일성과 상호 연관성 그리고 모순적인 상호 작용을 간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상과 현상들에 대한 검증이야말로 그것들의 본질에 다가서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인식과 변혁의 보편적 방법으로서 유물론적 변증법에 초점을 맞춰서 유물론적 변증법의 법칙들과 범주들에 대해서 서술하겠다. 특히 근대의 대 사상가인 마르크스-엥겔스 그리고 헤겔의 철학에 중점을 두고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하여 고찰해보기로 한다.-본론-19세기 중엽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이루어진 철학의 혁명은 그 이전의 모든 철학과 동시대의 모든 부르주아 철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형태의 철학이 탄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철학이 모든 과학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과학적 탐구의 전술이나 과학이론의 형성을 지도하는 방법의 핵심으로 유물 변증법적 방법을 제시하였다. 철학은 항상 어떤 계급의 입장을 표현해 왔으며 또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철학의 혁명은 새로운 계급의 입장, 즉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타파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상체계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지배를 거부하고 사회의 계급적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위한 사상적 무기로 자리잡게 된 것 볼 수 있으며 인간 세계에도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이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역사상 경제 형태에 따라 사회를 구분했는데 최초에는 원시 공산적 경제 형태를 가진 원시 공산 사회가 나타나고 이 사회가 생산력의 발달에 의해 발전하여 가진 자 대 가지지 않은 자 즉, 상부 구조 대 하부구조의 대립이 생기는 노예적 고대 형태를 지닌 고대 노예제 사회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사회는 다시 발전하여 농노제적 봉건 형태의 경제 조직을 가진 중세 봉건 사회로 발전하게 되고 그 이후에 다시 임금 노동자적 자본주의 형태의 경제 조직인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발전의 원동력인 생산력의 발달은 사유의 개념을 확대시키므로 계급 투쟁이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이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의 소유자와 비소유자로 나뉘게 되어 근대 자본주의 사회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된다고 설파하고 붕괴 이후에는 계급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가 등장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중간에 사회주의 단계를 설정하고 있는데 이 단계는 공산주의와 같이 모든 생산 수단을 국유화하는 것을 추구하는 단계라고 하면서 생산 수단만을 사회화하는 것은 사회주의라 하고 이에 비해 공산주의는 기간 시설 및 개인적인 것까지도 사회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도 존재하는데 먼저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면 공산주의에 이르면 역사는 정지하는가 하는 이론적 모순 점이 지적되고 역사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이 경제력이라 하나 그 이외에도 많은 힘이 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즉 민족주의처럼 민족을 중심으로 민족이 역사 발전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보이고 인도의 경우처럼 종교적인 원인도 찾아져서 반드시 생산력이 역사의 원동력이 아닌 경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하는 사람만이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 노동을 하는서 서방으로 진행한다. 왜냐하면 유럽이야말로 실로 세계사의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동방이라는 것 자체는 상대적인 것이지만, 세계사에는 절대적인 의미의 동방이 존재한다. 지구가 구체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가 지구 둘레를 원을 그리면서 도는 것은 아이고 오히려 역사는 동방을 향하고 있다. 이 동방이 아시아이다. 밖에 있는 자연의 태양이고 여기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진다. 그 대신 자의식이라는 내적인 태양은 사방에 출현해서, 그것보다 훨씬 빛나는 빛을 반사한다. 세계사는 무자제적인 자연적 의지를 보편적인 것과 주관적인 자유로 가르쳐 길러 주는 것이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단지 한 사람만이 자유라는 것을 알았을 뿐이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에 반해서 그리스와 로마의 세계사에서는 약간의 사람이, 세르만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를 알고 있다. 따라서 세계사의 보이는 첫 번째 형태는 전제 정체이고, 두 번째 형태는 민주정체와 귀족정체이며, 세 번째 형태는 군주정체이다. 이 구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는 보편적인 정신적 생명이고, 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이것에 대하여 신뢰의 정을 품는다. 또 습관은 국가에 의한 것이고, 따라서 개인의 본질과 현실성은 국가에 의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먼저 개인의 현실적 생활이 이 통일의 무반성적인 습관과 풍속에 지나지 않는가, 혹은 개인이 벌써 반정석이고 인격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주관인가 하는 점이 문젯거리라는 것이다. 또 이러한 점에서 실체적 자유와 주관적 자유가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체적 자유란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의지의 이성이며, 이 이성이야말로 곧 국가 안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성의 단계 안에는 아직 자기의 통찰력과 자기의 의욕, 즉 주관적 자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관적 자유는 개인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며, 개인의 양심 안에서는 개인의 반성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단순한 실체적 자유에서는 명령과 율법 따위가 절대로 움직일유'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역사는 자유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즉, 역사는 본질적으로 이념과 정신의 역사이며, 정신의 본질인 자유가 실현되는 것이 세계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사의 목적이란 인간의 '자유'를 실현시키는 일이다. 자유는 정신의 본질이지만 정신이 자유스럽다는 것은 그것이 본래 지니고 있던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일을 뜻하며, 세계사란 바로 '자유의식의 진보'인 것이다. 그러면 세계사의 궁극적 목적인 자유는 어떻게 세계사에서 실현되는가? 원래 정신의 본질인 자유 그 자체는 내적인 것이어서, 아직 밖으로 나와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내적인 자유는 인간의 의지와 활동, 특히 어떤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자기의 온 정열을 다 쏟을 때 실현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 이 세계에서 이루어진 위대한 사업 치고 정열 없이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단언했다. 역사과정은 자유를 실현해 가는 보편적인 성격을 띠지만, 겉으로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의 욕구. 정열. 관심 등을 인류의 역사적 행위를 일으키는 동이로서 그는 인정한다. 헤겔은 이러한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역사적 이성'이라는 것이 동시에 여기에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즉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개인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정열을 다 쏟는데, 이때 어떤 보편적인 목적이 실현된다. 다시 말해 개인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하지만, 이것은 자신도 모르게 자유를 진전시키는 보편적인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활동하는 개인은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것을 추구하고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보다 높은 것을 실현하기 위해 봉사한다. 이것을 헤겔은 '이념의 간계'라고 했다. 헤겔은 세계사를 동방, 그리스, 로마, 기독교권의 유럽의 삼 단계로 구별하고 있다. 이에 동방에서는 단지 1인만이 자유로우며, 노예가 있었던 그리스. 로마에서는 소수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게르만이 자유를 갖게 된 것은 우선 그리스도 교를 통해서 이며, 인간은 그리스도 교 덕분으로 회된다. 결국 최초의 테제를 폐기한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테제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며, 최초의 테제는 부정된 채로 보존된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의 특징이며, 이렇듯 부정한 채로 보존하는 방법을 우리는 지양이라 부른다. 이리하여 우리의 제 2의 반정립의 테제도 부정하게 되고, 이 컵은 위에서 보면 둥글고 옆에서 보면 사각형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결국 원통형의 입체로 확인되어 종합에 이르게 괸다. 그러므로 이 종합은 처음 두 가지의 태제보다도 앞선 단계로 나아간 것이며, 우리가 행한 변증법적 운동의 성과로서 이 경우에 한해 우리는 이것을 '진정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정반합의 원리이다.헤겔 변증법의 합리적 핵심은 무엇보다도 형태들(자태들)의 변증법적 생산과정으로서의 역사이론의 흔적이다. 헤겔의 역사 혹은 변증법은 포이어바흐의 이론적 인간주의에 의해 이론적 후퇴를 가져왔으나 마르크스는 이론적 인간주의와의 단절을 통해 이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변증법적 과정으로서 헤겔 적인 역사관에 있어 치명적인 손상은 헤겔적 변증법의 바로 그 구조 속에 새겨져 있는 목적론적인 변증법관이다. 역사철학에서 목적론을 제외시킨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 헤겔적 변증법 구조로 복귀하는 한 모순에 빠지고 말게 된다. 그 이유는 헤겔적 변증법 역시, 핵심구조가 변증법 안에서 목적론 그 자체인 부정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그 구조에 있어서 목적론적이기 때문이다.마르크스는 헤겔에게 과정이라는 결정적인 철학적 범주말고도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개념을 빚지고 있다. 헤겔에게 있어 역사는 소외의 과정 혹은 변증법적 과정이며, 이 과정은 그 주체로서 인간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즉, 역사는 인간의 소외가 아니라, 정신의 소외, 즉 이념의 소외의 궁극적 계기라는 것이다. 이 소외과정의 유일한 주체는 과정의 바로 그 목적론이며, 그것은 이념을 이념으로서 형성하는 자기소외의 과정 속에 존재하는 이념이다. 그러므로 헤겔적 목적론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면 마르크스가 계승한 철학적 범주, 즉 있다.
    인문/어학| 2001.04.27| 7페이지| 1,000원| 조회(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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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영양화의 현상 및 원인 대책 평가C아쉬워요
    부영양화(富營養化, Eutrophication)호수나 연근해 등에 질소, 인 등의 영양분이 증가하는 것으로, 원래 빈영양호(貧營養湖)였던 호수에 영양물이 유입됨에 따라 수초·조류(藻類)등이 증가하여 물이 탁해지고 호수바닥에 퇴적물이 쌓임에 따라 부영양호로 바뀌는 것을 부영양화라 한다. 자연현상으로서의 부영양화는 수천 년이 걸리지만 공장폐수와 생활하수등의 유입이 심하면 20∼30년 정도의 기간에도 부영양화가 될 수 있다. 부영양화가 진행되면 호수 근처에서는 이 물을 상수원(上水源)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하천이나 호소가 공장폐수 등에 오탁되어도 그대로 상당기간 방치하여 두면, 자연의 치유력 즉, 물리적·화학적·생물학적인 작용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하여 원래의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는데 이러한 현상을 자정작용이라 한다. 호수나 저수지도 하천에서와 같은 자정작용이 근본적으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호수나 저수지에서는 일정한 방향을 가진 흐름이 없기 때문에 하천에서와 같이 분명한 지대(Zone)는 없는 반면, 수심에 따른 온도차이 때문에 물의 밀도가 변화하게 되어 수직 방향으로 물의 운동이 생길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자정작용이 생긴다. 자정작용의 부하를 넘는 영양염류가 호소에 유입되면 수(水) 평형이 파괴되어 부영양화를 일으킨다. 오염물(영양염류)이 저수지로 유입될 때 영양염류는 수중생물의 영양원이 되어 어류 및 미생물 등의 먹이가 된다. 어류의 개체 수는 많지 않으므로 크게 문제가 안되지만, 미생물은 급격히 번식하여 세포합성을 한다. 이 미생물은 성장 후 사멸하여 다른 미생물에 의하여 분해되고, 분해된 것은 다른 수중 생물의 영양원으로 작용하는 순환과정을 거쳐서, 이런 순환과정이 반복되면 저수지의 수질은 점차 악화되고 나중에는 쓸모 없는 늪으로 변하게 된다.이와 같이 영양염류가 증가하는 상태를 일컬어 부영양화(eutrophication)라고 한다. 따라서 저수지에 미생물이 많이 번식한다는 것은 부영양화 과정에 있음을 뜻한다. 즉 부영양화란 영양소에 의한 물 저하시킨다. 수면에 조류피막이나. 부패덩이가 생기고 냄새가 발생하거나 채색이 일어난다.2) 용존산소의 일주변화폭을 크게 하고 야간에 용존산소를 매우 낮은 농도로 저감시켜 물고기가 죽게된다.3) 식물성 플랑크톤과 수초가 침전하여 침전물 산소요구량(SOD)을 증가시키고, 따라서 호수나 저수지 또는 수심이 깊은 하구의 심층에 용존산소를 감소시킨다.4) 규조류와 섬모상조류 등은 상수처리 과정에서 여과 매체의 구멍을 막아 역세척을 자주 하게 한다.5) 뿌리를 가진 수초의 과잉성장은 배의 운항을 방해하고, 용존산소량을 감소시키며 수로에서 이동 가능한 물의 양이 저감된다.6) 해안지역에서 나타나는 적조현상과 같은 부영양화에서는 유독성 조류를 발생시켜 마비성 조개 중독을 유발한다.이와 같이, 부영양화 문제란 유기 및 무기영양물질이 수체로 유입되어 조류나 수초들의 수중식물을 성장시키고 이로 인하여 물의 미적 위락적 가치를 저하시키고, 물고기 치사를 유발하며 용수공급을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1.2 부영화된 호소의 특징① COD 증가(조류합성에 의한 유기물 증가)② 한번 부영양화된 호수는 회복이 힘들고(먹이 연쇄의 반복), 점차 악화③ 생태계 파괴(생물체 생존환경 악화) - 어패류 폐사 등④ 마지막 단계에서 청록색 조류(남조류) 번식⑤ 냄새 발생(조류에 의한 발취 및 혐기성 분해)⑥ 투명도 저하 및 착색(조류 발생으로 현탁)1.3 호수의 변천과정빈영양호(Oligotrophic lake) → 중영양호(Mesotrophic lake) → 부영양호(Eutrophic lake) →저층습원(Low-moor) → 초원(Glassland) → dry land2.1 영양염류의 유입과정부영양화의 원인물질은 질소(N), 탄소(C), 인(P)과 같이 조류에 영양분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이 저수지나 호소에 유입될 때 일어난다.① 자연의 산림지대 등에 있는 섞은 식물이나 동물사체② 농지에서 사용되는 비료(특히, 질소 비료, 인산질 비료)③ 목장지역의 동물의 분뇨④ 합성세제⑤ 처리되지 않은 가정하수 현상은 물의 수직운동이 없는 여름과 겨울에 일어나며, 봄과 가을에는 호소의 물의 수직 혼합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분명한 밀도층의 구별이 없어지게 된다. 즉, 호소는 수직혼합(Turn-over)이 일어나는 것이다. 계절별로 성층현상과 전도현상에 대하여 알아보면 겨울 수면이 얼게 되면 얼음 표면의 기온은 영하로 되며, 얼음 바로 밑의 물은 0℃에 근접한다. 심층으로 갈수록 기상의 영향을 적게 받으므로 연중 4℃를 유지한다. 물의 특성상 4℃에서 최대 밀도를 가지므로 호소는 비교적 안정된 평형상태에 있고 되어, 수직 혼합은 일어나지 않는다. 봄이 되면 얼음이 녹으면서 표면부근의 수온이 상승하기 시작하여 4℃가 되면 최대 밀도가 되므로 표층의 물은 하부로 이동하게 되고, 그 대신 하부에 있던 물이 상부로 이동하므로써 호소는 순환(수직혼합)하게 된다. 봄에서 여름이 되면 대기온도가 상승하여 표층의 물은 밀도가 낮아져 순환현상이 조금씩 감소하게 되고, 온도차가 커져서 수직운동(전도현상 : turn over)은 차츰 상부에만 국한된다. 가을이 되어 호소 표면의 수온이 하강하면 수직적인 정체현상은 파괴되고 물은 다시 수직적인 혼합을 하게 된다.이와 같이, 여름과 겨울에는 수직운동이 없어서 정체현상이 생겨 수심에 따라 온도와 DO농도의 차가 크지만, 봄과 가을에는 순환현상이 발생하여 수심에 따른 온도나 DO농도에는 변화가 작다. 또한 여름의 정체현상이 겨울보다 더 뚜렷하다. 봄과 가을에 호소의 수직운동은 대기 중의 바람에 의하여 더욱 가속되어 이와 같은 수직운동을 전도(turn over)라 한다.부영양화에 있어서 혐기성 상태 하에 있는 심수층의 물이 전도되면서 저질 층에 있는 영양염류를 표층으로 이동시켜 미생물의 영양원이 되어 수질의 악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2.3 미생물의 영향미생물은 부영양화에 있어서 여러 가지 영향을 준다. 첫째로, 영양염류의 순환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미생물은 호소로 유입되는 영양염류를 섭취·증식·사멸·분해되어 다시 영양물질이 된다. 둘째로, 호질관리의 궁극적 목표는 수질을 비롯한 호소생태계의 유지에 있다. 호소의 오염은 호소 외부로부터의 오염물질 유입에 의한 호소 외적오염과 호소내부의 물질순환에 의한 호소 내적 오염으로 구분된다. 이에 따라 호소 정화방안도 호소 외적대책과 호소 내적 대책으로 구분되어질 수 있는데 호소의 특성에 따라 각 대책의 중요성에 대한 비중이 달라진다.(1) 호소 외적대책 (External measures)폐하수처리 (Wastewater treatment) - Advanced treatment of wastewater인 제거시설 (P elimination plant)하수의 분리 (Sewage diversion)비점 오염원의 감소 (Reducing non-point sources)오염된 하천수의 처리 (Treatment of polluted streamwater)① 저수지의 인공순환 : 기계적으로 산소를 공급하여 성층을 파괴하고물을 혼합시키므로 저수지의 자정작용을 촉진시키는 방법이다.- 산소가 풍부한 표층의 물이 저수층과 혼합되므로 저수층에 산소전달효과가 있어 심층수의 무산소층이 없어진다. 이 방법은 소규모의저수지에 주로 사용된다.② 수위 감소법 : 저수지 물을 완전히 제거하여 겨울철 동결이나 여름철의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저수지내 각종 식물의 성장을 통제하는 방법.- 기상조건만으로는 효과적이지 못하며 저니층을 제거하는 방법 병행③ 수초 및 저생생물 제거 : 수초가 가을에 사멸하면 수초 생체내의 유기물, 질소 및 인이 수중으로 분리되면서 부영양화 된다. 따라서 사멸기에 미리 수초를 제거한다.④ 생물 제어 : 수생식물을 섭생하는 곤충이나 어류를 이용하여 조류를 섭취하도록 유도 하는 방법으로 생태파괴 등 부작용을 검토해야 한다.⑤ 저니층 격리법 : 저수지바닥과 수층을 격리하여 수초의 생장과 각종 물질이 바닥에서 수층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하는 방법- 저서생물에 영향을 주고 비용부담이 큰 단점이 있다.⑥ 차광막 설치 : 조류가 증식하는데는 영양염류외에 빛이 절대로 필요하므로 차광막을 설.(2) 호소 내적 대책 (Internal measures)물리적 대책 (Mechanical measures)퇴적물 제거 (Sediment removal)플러싱 (Flushing)심수층 폭기 (Aeration in hypolimnion)심층수 배제 (Diversion of hypolimnic water)퇴적물 피복 (Sediment covering)산소주입 (Injection of oxygen)호소수 강제순환 (Forced circulation)화학적 대책 (Chemical measures)응집 (Flocculation)퇴적물 산화 (Sediment oxidation)생물학적 대책 (Biological measures)수초제거 등 (Grass carp & Biomanipulation)① 수생식물 식재 정화법수생식물 식재 정화법은 수생식물의 자연정화기능을 활용한 정화법으로 부레옥잠, 부평초 등의 수생식물을 이용하거나 습지의 갈대밭을 이용하여 오염부하의 삭감을 행하는 것이다.부레옥잠을 이용한 방법은 만입부로 유입되는 농경지 배수를 처리하기 위하여 `92년도에 팔당호에 현장 적용한 것으로 부레옥잠의 성장율에 따른 영양염의 처리효율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는 호소 수심이 얕고 체류시간이 긴 경우 상당히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v갈대밭을 이용한 정화는 수생식물에 의한 오염물질의 흡수작용 이외에 수생식물의 줄기나 잎의 주변에 부착된 생물막과 토양계면에서의 흡착, 질산화, 탈질, 분해 등의 복합된 기능에 의하여 복잡하게 작용하고 있다. 갈대밭은 큰 정화능력을 갖고 있지만 질소나 인 등의 무기영양염류 제거효율이 다소 낮으며 동절기에는 정화능력이 크게 저하된다. 이것은 枯死한 식물이나 토양으로부터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이들의 처분이 필요하다. 또 주변이 도시화가 되어 있지 않은 지역에서는 간이처리장치로써 갈대밭의 자연정화능력을 갖춘 소규모 저농도 처리시스템을 강구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주택지와 갈대밭의 위치가 가까운 경우는 생활 잡폐수의 유입구 부분에서 있다.
    자연과학| 2001.04.27| 6페이지| 1,000원| 조회(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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