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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가] 빌라 로보스의 생애
    빌라-로보스의 생애Villa-Lobos (Rio de Janeiro 1887.3.5~Rio de Janeiro 1959.11.17)중남미에서 출생한 최대의 작곡가로써 브라질에서 명성을 떨친 문인.역사가이며 아마튜어 음악가였던 부친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는데 어린 시절 첼로와 클라리넷을 공부하였을 뿐 아니라 피아노를 비롯하여 각종 현악기, 특히 브라질 기타의 연주에 능숙했다.1887년 3월 5일 리오데지네이로에서 출생하여 이미15세 때는 오케스트라의 첼로 주자가 되었다. 1905년부터 민요 채집을 시작하였고 작곡 공부도 했으며 1907년 내셔널 콘서바토리 음악원에서 본격적인 학문을 훈련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사적으로 그 연구를 계속했다.1912년 스스로 네번째의 가장 대규모적인 브라질 대륙 깊숙한 지방의 풍속과 음악의 조사를 착수하여 브라질 음악의 특이한 성격을 깨닫고 1915년 이후 작품에 강한 향토적 개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는 기타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서 기타 반주를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할 수 있는가를 지방 민요 가수들로 부터 배웠다. 그러므로 그가 나중에 첼로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기타를 위한 수많은 작품을 작곡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콘서바토리에서 배웠었다.10대(代) 시절부터 기타를 들고 거리의 방랑 음악가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던 적이 있는 그는 동부 브라질을 답사한 이후 20대(代)부터 모든 분야에 걸쳐 작품을 열심히 발표하기 시작하여 브라질 악계의 주목을 끌었다. 1923년 36세때 처음으로 유럽에 건너가 파리에서 유학. 런던, 빈, 베를린 등을 방문 구미각지(歐美各地)를 돌며 활동(자작지휘등)을 계속하였는데 브라질 시절 못지 않게 그의 명성은 각국에 알려졌다.한편 그는 조국의 음악 환경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있는 힘을 기울여 "빌라-로보스 관현악단"의 창립과 브라질에 있어서 바하의 대작 초연 등 각지의 관현악단 합창단의 지휘자로 있었으며 학교용의 민요 수집을 완성했다. 해가 거듭함에 따라 그는 국제적 존재가 되어서 브라질뿐만 아니라 신대륙음악 수준을 높힌 작곡가로서 우러러 보게 되었다.빌라-로보스는 평범하지 않는 다산(多産)의 작곡가였다. 그의 작곡의 수는 넘버링의 방식여하에 따라서 800편에서 2000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의 가장 개인적인 혁신은 악기의 앙상블에 의해서 주로 야외에서 연주되어지고 브라질과 인디안의 민속음악의 요소들을 넣은 갖가지로 얻어진 소품들을 쵸로의 예술적 음악의 영역속에 소개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의 작품들은 바하로부터 인상파에 걸친 유럽음악의 기교와 브라질 민속음악의 요소와의 융해로 특징지워진다.기타곡은 그의 위대한 작품 리스트 중에서는 미미하게 보이나 언제나 유닉크한 미(美)를 높여 현대 기타음악의 귀중한 레파트와로써 애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기타곡중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1908~1912년에 지은 "Suite populaire bresilienne" 와 1920의 Choro no.1 1929년 파리에서 작곡한 "12 Etudes"라는 작품. 1940년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쓴 "5 Preludes"로써 이 작품들은 연주자로 부터 최고수준의 기교적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의 다른 작곡가에 비하여 기타의 성능을 독특하게 살려서 연주자와 청취자 양편에서 모두 풍부한 음악적 아름다움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와 친교가 깊은 탁월한 연주가 세고비아는 연습곡집을 스카를랏티와 쇼팽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양손의 연주기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정말 중요하고 더불어 연주곡으로서도 지속적인 심미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보내온 빌라-로보스의 기타를 위한 협주곡의 초연에도 힘썼다고 한다.
    예체능| 2005.05.14| 2페이지| 1,000원| 조회(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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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타의 역사
    Guitar의 역사1.guitar의 기원GUITAR 는 목(neck)이 있는 발현악기(撥絃樂器)로 류트(lute) 와 함께 분류상 lute-guitar족(族)(혹은 류트족)에 포함됩니다. 혹자는 guitar와 류트가 많이 닮았다고 해서 류트를 guitar의 전신(前身)으로 보기도 하지만 류트 연구가들은 서로 다른 줄기로 발전해온 점과 오늘날 독립된 연주 악기의 형태로 남아있는 점을 들어 달리 분류하기도 합니다.류트(lute) 'guitar'(독/gitarre, 불/guitare, 이/chitarra, 스/guitarra)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키타라(Kithara) 라는 악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데 이 악기는 목이 없기 때문에 guitar의 조상으로 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기타'는 그 유래를 고대음악에서부터 찾을 수 있는데, 인류 역사에서의 출현 시기에 대한 정설은 없으나 대략 B.C.4,000~3,500년 경으로 보는데 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고대 이집트, 아라비아 등지에서 발견된 고분, 벽화 등의 자료에서 기타와 모양이 닮은 여러 종류의 발현악기의 그림이 있는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B.C. 1400년의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유적(사진:2)에는 네퍼(Nefer) (그림:1), 혹은 오오드(Oud)로 불리우는 보다 더 진보된 발현악기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그 이전의 힉소스(Hyksos)시대에 서아시아의 침입자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여러 형태의 공명통이 있고, 이미 16 개의 프렛(fret)를 가진 것도 있는 가늘고 긴 넥크는 악기로의 형태를 분명하게 갖추고 있었습니다. 네퍼는 나일강의 음악생활에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네퍼로 반주된 노래는 주로 향락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유적(사진:2)네퍼(Nefer) (그림:1)고대 그리스의 발현악기로는 리라(lyre;참고)와 키타라가 있었는데 이 중 키타라는 서아시아에서 수입된 무겁고 연주하기가 난해한 악기였으며, U자 형이며 무거운 공명통을 가지고제국의 스페인 지배 당시, 무어인들이 들여온 퀴타라(Quitara)라는 악기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무슬림(muslim)제국을 건립하기 위해 이집트를 거쳐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에 간 아랍인들이 이 기타의 기본형태를 서유럽의 악기 제작가들에게 전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참고) 훗날 lute의 조상이 된 '알-우드'라는 악기도 이때 들어왔다고 합니다.키타라(Kithara) 그래서 스페인에 살던 아랍인들에 의해 기타가 탄생하는 기반이 만들어졌다고 보며, 이를 아라비아 풍의 기타(모로, 혹은 무어풍의 기타)라고 합니다. 아랍의 지배하에서 스페인의 예술과 과학은 번창하였으며 이는 기타와 기타리스트의 출현을 촉진시키고 최초의 기타 음악학교인 비울리스타스(Vihuelistas)를 낳기도 하였다고 합니다.그런데 당시 스페인에는 이미 라틴 풍의 기타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이스의 키타라가 발전한 것으로 로마인에 의해 전래되어 여러 차례의 개량을 거쳐 훗날 16 세기 경의 스페인 비우엘라(Spain Vihuela)로 발전되었다고 합니다.이상의 2악기(무어 풍의 기타와 라틴 풍의 기타)가 근대 기타의 직접적인 원조(元祖)로서 이들이 통일, 개량되어 전 유럽에 보급되었다고 합니다.2.중세~현대의 고전 기타 음악사중세에는 많은 발현악기들이 있었지만 현대인들이 '기타'라고 부를 수 있는 개념과 구조나 성능을 같이하는 악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중세의 기타는 단음으로 합주에 참가해 하나하나의 성부를 맡았으리라 추측되며, 화음을 만들어 노래 반주를 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나 가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기타에 근접한 악기는 키타라(Kithara)류와 기턴(Gyterne)을 들 수 있는데, 이 기턴은 시턴(Cittern)으로 발전하게 되며, 이것은 영국에서 잉글리쉬 기타(English Guitar)로 유행되었으나 스패니쉬 기타(Spanish Guitar)의 등장으로 소멸되었다고 합니다. 13 세기에 만들어진 '성모마리아 찬가'에 묘사되어 있는 바로는, 중세의 음유시셋을 한 조(組)로 하는 여러개의 줄을 라스게아도(Rasgado) 주법으로 거칠게 연주하였다고 합니다.무어풍의 기타가 고음의 가락을 연주하고 류트가 춤의 리듬을 맞추며 여기에 라틴풍의 기 가 더해져 3 개의 악기가 어울어져 연주되었다고 합니다.이 시대의 기타들은 대개 가장 높은 음을 제외하고는 모두 겹줄(코스;courses)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작은 음량을 크게 하기 위한 것으로 겹줄의 사용으로 표현되는 미묘한 음감과 뉘앙스는 당시에 성행되던 다성부(polyphony)음악형식과도 상당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이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악기는 13 세기에 나타나 16세기에 크게 성행했던 비우엘라입니다. 표준적인 비우엘라는 6음현으로 되어있고 동음이나 한 옥타브 차이로 조율된 겹줄로 되어 있었고 맨 윗현만 한 줄이었습니다.그 당시 다른 기타들에 비해 더해진 두, 세개의 현은 사회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비우엘라는 세레나데를 부르는 공작부인에 어울리는 귀족적인 악기가 되었고(사진:4) 기타는 서민이나 농민이 노래나 춤의 반주로 사용하는 대중적인 악기로 쓰였다고 합니다당시 이발소에는 손님들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타를 연주하며 기다릴 수 있도록 기타를 이발소에 놓아두는 것이 상례였다고 할 만큼 일반인들에 의해 많이 연주되는 대단히 인기있는 악기였다고 합니다.일반적으로 16세기와 17세기는 피아노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클라비코오드와 하아프시코오드의 전성기로 인식되어 있으나, 실상 이는 극소수의 귀족과 그들의 궁정악사를 위한 전용물로 연주되었으며 오히려 이 시대에 서민과 수많은 음유시인(그림:4)(사진:5)들 사이에 널리 통용된 악기는 비우엘라와 류트였다고 합니다.음유시인(그림:4)이 시기에 스페인에서는비우엘라가, 유럽의 다른나라에서는 류트가 현대의 피아노만큼 중요하게 쓰였다(사진:5)고 합니다.루이스 밀란(L.Milan), 루이스 데 나르바에스(L.de Narvaez), 알론소 무다라(A.Mudarra), 에르난드 데 카베손(H. de 보다 합리적인 개량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에스피넬은 5현 기타를 확립하였고, 아마트는 이 기타를 스페인 전역에 보급하는 한편, 조율도 현대 기타와 별 차이 없게 완성시켜 놓았습니다.(현대 기타에서 6번 선이 없는 것과 동일)당시 5코스 기타를 다루었던 음악가들은 화음을 울려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폴리포닉(polyphonic)한 음악을 만들어 연주하기도 했는데, 라스게아도 주법과 류트에서 배웠던 푼테아도(punteado)주법을 교묘하게 섞어 연주하기도 했습니다.17세기 바로크의 5코스 기타는 18세기 들어와서도 얼마간 사용되었으나 차차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는 고전파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18세기 음악은 다성부에서 단성부로 옮겨갔으며 악보상으로도 타블라추어에서 새로운 5선 기보법으로 옮겨갔는데, 이러한 점에 숙달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기타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제 1쇠퇴기'라고 부릅니다.가스파르 산즈(G.Sanz),로베르트 데 비제(R.de Visee) , 프란시스코 코르베타(F.Corbetta),포스카리니(이탈리아), 루드비코 론 칼리, 프란시스코 게라우.근대에 들어서는 18세기 후반에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기타리스트가 아닌 보케리니, 힘멜, 플레이넬, 베라르와 롬베르크 등의 일반 고전음악 작곡가들이 기타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들 가운데에 복케리니가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다장조의 오브리가토적 기타 협주곡과 다, 라장조의 기타 5 중주곡, 마단조의 기타 5 중주곡은 현재에도 많이 연주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작품은 거의 현악기와 기타의 중주곡이었으며, 화려한 현악기의 기교나 가락에 비하면 기타는 너무 단순하고 여렸고 단지 아르페지오로 시종일관 반주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18세기 후반에 가면 쇠퇴기를 맞았던 기타가 다시 일어날 기미를 보이는데, 5선 악보에 의한 최초의 교칙본을 내놓은 안토니오 다실바와 페르난도 페란디에르와 같은 기타 작곡가들이 이 이어 안토니오 토레스(1817~1892)가 근대 표준형의 기타를 확립시켜놓았습니다. 이 성능 좋은 기타로 고전파 기타리스트들은 단성부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으며, 고전적인 작곡기법과 악기특성을 그들 나름대로 연구하여 아름다운 고전기타아의 명곡들을 많이 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기간은 기타의 황금시대라고 할 만큼 위대한 기타리스트들이 속출하였습니다. 이 가운데에 이른바 "표현파"로 불리우는 위대한 스페인의기타아리스트 소르와 아구아도, 이탈리아의 줄리아니의 활약은 고전기타아 음악사에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오늘날 평가하고 있습니다.페르난도 소르(F.Sor)디오니시오 아구아도(D.Aguado)마우로 쥴리아니(M.Giuliani)페르디난도 카룰리(F.Carulli)마테오 카르캇시(M.Carcassi), 루이지 레냐니(L.Legnani), 프란치스코 몰리노(F.Molino), 필리포 그라냐니(F.Gragnani), 쟈니 데 페란티(Z.de Ferranti), 지몬 몰리토르(S.Molitor), 벤제르 마티카(W.Mategka), 레오나르 데 카알(L. de Call), 요셉 퀴프너(J.Kuffner), 안톤 디아벨리(A.Diabelli), 요한네포무크 훔멜(J.N.Hummel),누구나가 들고 다니면서 기타를 연주했던 이 시기에는 많은 음악가들이 기타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대가로서 니콜로 파가니니(N.Paganini), 카알 마리아 폰 베버(C.M.von.Weber), 프란츠 슈베르트(F.Schubert) 등을 들 수 있다.이렇게 다시 활성화된 기타는 19 세기중, 후기에 와서는 전 세기의 대가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한편, 그랜드 피아노와 확장된 오케스트라의 출현으로 음악의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음량이 적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기타가 한 때 쇠락하는 제 2의 침체기를 맞게 됩니다. 그리하여 기타는 기타의 고장 스페인에서 조차 떠돌이 집시나 거리의 악사, 농부들만이 만지는 하류악기로 전락하게 되고, 기타리스트가 유명해질 수 있는 길은 술집 외에니다.
    예체능| 2005.05.14| 13페이지| 1,000원| 조회(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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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 수제천과 춘향전
    수제천수제천은 매우 느리면서 불규칙한 박자 구조로 이어지는 합주음악이며, 정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데 신라시대에 창작되어 오늘날에 이른다고 한다. 원래는 정읍사를 노래하던 곡이었으나 성악부분은 없어지고 지금은 관악합주곡으로만 쓰인다. 그래서 수제천의 다른 이름은 정읍이다. 또 빗가락 정읍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관대를 치켜 잡고 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느리면서도 불규칙한 박자 구조는 궁중을 중심으로 연주되었던 음악에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인데, 이는 음악의 쓰임이 감상보다는 의식에 치중해 있었던 역사적 전통 때문이다.수제천은 춤의 반주나 왕세자의 거동 등에 쓰였으며 지금은 처용무의 반주음악으로 쓰인다. 그러나 편재 무용 반주음악보다는 순수 기악 합주음악으로서의 면모가 더욱 부각되어 있으며, 그 예술성도 널리 알려져 있다.정읍사는 7세기 중엽 이전부터 불리웠다는 백제시대의 노래로 고려인들의 입에서 불려오다가 조선조에 와서야 처음으로 문자화된 노래이며 정읍현에 사는 행상의 아내가 행상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 남편 오기를 기다리며 부른 노래로서 '달아 높이 떠서 멀리 비추어 우리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밝혀 주소서'하는 내용이다.10세기부터는 궁중에서 춤을 추면서 부르기도 했으며 14세기부터는 임금님이나 왕세자의 연희 행차 할 때도 연주했다고 한다. 조선중기 이후 노래는 없어지고 지금은 관악합주 음악으로 연주되며, 처용무의 반주 음악으로도 연주되고 있다.연주악기로는 향피리 2(목피리, 곁피리), 대금, 해금 ,북, 장고 등 삼현육각(三絃六角)의 편성이 원칙이나, 근래에는 소금, 아쟁, 박을 덧붙여 연주하며, 각 악기 수의 제한없이 대편성으로 연주되기도 한다.수제천의 특징은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1장에서는 가락을 제시하고, 2장에서는 이를 반복하며, 3장에서는 극적인 변화를 이루고, 4장에서는 이를 마무리한다. 각 장단의 처음은 기덕·쿵의 갈라치고 시작된다. 1박의 시차(時差)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한 장단을 연주하는 시간에 다소의 차이가 생긴다. 따라서 연주자들간의 호흡이 더욱 중요시되는 음악이다.특색있는 점은 우리가 운동회에서 릴레이 달리기를 할 때, 1번 주자가 뛰고 나면 2번 주자가 뛰듯이 이 수제천도 피리가 불고 나서 쉬면 대금이 불고 또 대금이 끝나면 해금이 부는 식으로 릴레이식으로 곡을 전개한다고 한다. 이 곡을 들으면 여유가 있고 화려하면서도 웅장하고 또한 웬지 모를 우아함. 또한 뭔가를 찌르는 듯한 가락이 느껴진다고 한다. 또한 이 곡은 신비로운 꾸밈음의 아름다움이 이 곡의 극치를 이룬다고 한다. 곡의 흐름이 화려하고 가락이 힘이 있고 장중하며 박자와 선율의 흐름이 연주자의 선험적 교감으로 전개된다.음량이 크고 주된 가락을 맡는 향피리가 연주를 하다가 쉬면, 그 뒤를 이어서 당적, 대금, 해금, 아쟁 등의 악기가 받아서 가락을 연주하는 마치 가락을 주고 받는 듯이 연주하는 기법(연음:連音)을 사용하고 있다.흔히 외국인들은 '영적인 음악'이니 '천상의 음악'이니 하며 가장 한국적인 음악이라고 동의하는 곡이 바로 수제천이다.이 곡을 가르켜 흔히 아악곡의 백미라고 말하기도 한다.수제천을 들으며 느낌 점들을 몇 가지로 적어보고자 한다.1.관악기들이 펼쳐내는 힘찬 역동성과 잔잔한 물결같은 섬세함과 영롱함을 함께 맛볼 수 있으며, 그 특징이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유장한 가락에 있다.2.대금의 시김새가 끝나는 것을 보아 가며 합주가 들어가고 피리 가락이 끝나는 것을 느껴가며 모든 악기가 울리고, 조화가 주조를 이루지만 주조가 훼손되지 않는 사이사이에 콕콕 부조화를 삽입시킴으로써 멋을 느끼게 한다.수제천은 우리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지 않고서는 제대로 알아 듣기 어려운 음악이라고 한다. 음악은 흐르는데 시간은 멎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시간은 멎어 버린 듯하나 그 속에 생명감이 꿈틀거리듯 수제천의 가락은 끊이지 않고 힘있게 흐른다고 누군가 말했는데 나에게도 역시 그런 느낌이 들었다.3.우리가 수제천을 들을 때 각자의 음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이것은 음을 하나의 음정에 고정시키지 않고 다양하게 변화시키는데서 비롯된다. 즉, 음을 끌어 올리거나 내리고 큰 폭으로 떠는 등 특유의 독특한 표현기법이 사용되는 것이다. 수제천을 빛내주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는 고도로 발달된 장식음의 사용이다. 각 악기들이 서로 다르게 연주하는 화려한 장식음은 가히 장관을 이루면서 음악에 색채를 더해준다.4.수제천을 들었을 때 느낀 점은 찌르는 듯한 느낌과 웅장한 느낌이 들었었다. 이런 느낌은 나에게 십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 듯한 말로 표현이 가능 할 것 같은데 곡을 들을 때 너무나도 시원한 느낌을 받았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 같지만 매우 맑고 가벼운 느낌 그렇지만 상당한 웅장함이 느껴지는 곡인 것 같았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조화랄까!춘향가는 남원 퇴기 월매의 딸인 성춘향이 남원 부사의 아들인 이몽룡과 백년 가약을 맺었으나 이별한 뒤에, 신임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여 옥에 갇히자, 암행어사가 된 몽룡이 구해 준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으로, 문학성으로나, 음악성으로나, 연극적인 짜임새로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서 가장 예술성이 높은 마당으로 꼽힌다.판소리의 춘향과 몽룡의 사랑 이야기는, 한문으로 된 이야기 책에서 따 온 것이라느니, 한글로 적힌 이야기 책에서 따 온 것이라느니, 중국의 옛날 희곡인 원곡에서 따 온 것이라느니, 남원의 양 진사가 광대에게 행하 돈 대신으로 지어 준 것이라느니, 남원의 신임 사또가 못생긴 어떤 처녀의 원혼을 달려려고 마련한 살풀이굿에서 비롯되었다느니 말들이 많았으나, 요즈음에는, 에 전하는 성세창의 사랑 이야기나, 에 전하는 기생 이야기와 같은 여러 사랑 이야기들이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로, 또 노정의 암행어사 이야기나, 박문수 암행어사 이야기와 같은 여러 암행어사 이야기가 이몽룡 암행어사 이야기로 되어, 그 전해지는 이야기를 가색이 소리로 짠 것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춘향의 이야기가 어느 때부터 판소리로 불리게 되었는지를 알 갈이 없으나, 영조 30년에 유진한의 문집인 에 실린 “가사 춘향가 이백귀”라는 글에, 가색이 춘향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부르는 것이 시로 읊어져 있으며, 순조 때의 문인인 송만재가 적은 “관우희”라는 글에는 가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음으로 보아, 는 적어도 숙종 무렵에는 판소리로 불리기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이야기의 줄거리나 소리의 음악적인 짜임으로 따져, 첫째로, 몽룡이 광한루에서 춘향과 만나는 대목, 둘째로, 몽룡이 천자풀이를 하는 대목에서 두 사람이 사랑가를 부르는 대목까지, 세째로, 이별하는 대목, 네째로, 신연맞이 대목에서 춘향이 옥중가를 부르는 대목까지, 다섯째로, 몽룡이 과거에 급제하고 전라 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와서 춘향 어머니와 옥에 갇혀 있는 춘향을 만나는 대목까지, 여섯째로, 변 사또의 생일 잔치가 벌어지는 데에서 뒤풀이까지로 나눌 수 있다.첫째 부분은 화창한 광한루 경치를 배경으로, 몽룡, 춘향, 방자, 향단의 즐거운 거동이 그려지므로, 소리는 중몰이와 중중몰이 장단에 화평스러운 우조나 평조가 많이 쓰인다.둘째 부분은 몽룡과 춘향이 아기자기하게 사랑을 나누는 정경이 그려지기 때문에, 중몰이와 중중몰이 장단에 화평스러운 평조가 많이 쓰인다.
    예체능| 2002.11.29| 4페이지| 1,000원| 조회(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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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성모형과 그 이론
    발성모형과 그 이론성악은 인체가 악기이므로 신체의 구조를 알 필요가 있다. 특히 노래할 때 직관되는 발성기관이라든가, 호흡기관, 공명기관의 구조와 작용의 이해를 통하여 과학적인 가창법을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성악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호흡법의 체득이라고 할 수 있다. 호흡법은 발성의 거의 90%를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나머지가 공명법이라든가, 발음에 관계되는 딕션 등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노래를 부를 때는 주로 복식 호흡으로 보조를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호흡에 과다한 신경을 쓰다보면 바른 호흡에 필수조건인 무리없는 편한 자세를 잃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무리없는 편한 자세란 머리는 곧바로 세우고, 가슴은 높이 고정된 상태로 안정시키고, 골반근육을 위쪽으로 올려 받쳐서 머리와 가슴, 골반이 척추에 의해서 일직선으로 받쳐지게 하는 것이다. 어깨는 뒤로 젖히고 편안히 내려서 긴장도 풀고, 양손은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옆으로 내린 상태다.앞에서 말한 올바른 자세로 하부늑골을 벌리고 횡경막을 아래로 내리면서 숨은 되도록 빨리,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여 마셔야 한다. 숨은 적당량을 들여마셔야 하며, 무리하게 많이 들여마시려고 하면 가슴에 힘이 들어가서 압박받는 듯한 좋지 않은 소리가 나오게 된다. 어떤 사람은 노래할 때 요하는 호흡은 '꽃향기를 맡을 때'와 같은 상태가 좋다는 비유도 한다.숨을 들여마신 다음에는 멈추지 말고 순환하듯이 조용히 고르게 불어내고, 이어서 호흡을 멈추지 말고 들여마셔서 부드럽게 회전하는 듯한 호흡으로 노래를 불러 나간다. 내가 미국에서 배웠던 아일린 패럴 선생도 'Sing, right on your breath!' 라고 이 점을 역설하셨던 기억이 난다.그러면 연습량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 이것은 성별, 성악을 경험한 연수 등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음악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면 하루의 연습량은 평균 한 시간 정도 연습을 한 후에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렇지 않고 한 시간 3 - 4시간 동안을 휴식없이 노래를 해도 전혀 피로가 없다고 하지만, 이것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과다한 연습은 성대근에 이상이 생기기 쉽고, 결국은 성대결절 등의 음성장애를 일으키게 된다.A.1]우리가 흔히 말하는 Bel Canto 창법이란 무엇인가? 말 그 자체대로 아름다운 노래를 만드는 창법을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 Bel Canto 라는 말의 뜻을 잘 이해 한다면 발성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 입니다.2]우선 발성 이라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Mother Nature) 으로 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가 노래 하는 것을 어떤 무슨 방법으로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색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아~" 하고 소리 내보라고 하면 발성에 아무런 지식이 없는 그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소리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3]애석하게도 인간은 성장하면서 점점 인위적인 것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러한 인위적인 요소들을 어머니의 태속과 같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다시만드는 작업이 소위 좋은 발성을 만들어 가는 방법 입니다.4]구체적이고 쉽게 이야기 해서, 발성 이라는 것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부터 먼 곳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소리의 연결인 것입니다.5]정말 고급스러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절대로 힘을 써서 되는 것이 아니고 테크닉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특히 고음으로 갈수록 힘들여 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게 하는 것은 공명과 빛깔을 만들기에 오히려 방해되는 요소일 뿐입니다.6]물론 노래하는데는 에너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힘하고 에너지를 잘 구분 할 수 있는 사람이 역시 좋은 노래를 만들기 마련입니다.B.1]노래를 멋있게 잘 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요소중 한가지는 노래하기에 앞서 기분을 상기 시키고 exciting 하게 만들 수 있는 Contral mind(마음을 조정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발성을 잘 만들고 호흡을 잘하고 하는 것에 앞서 훨씬 더 중요합니다. 긴장 되었을때 노래를 잘 하는 이유도 바로 이국 길을 만들고 색깔을 내고 공명을 만드는 발성은 모든 중요한 요인에 있어 5% 정도라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호흡과 발성 이전에 노래부르고 싶은 마음, 노래 부를 수 있는 마음이 없이는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3]우리가 무엇에 마음이 쏠리면 계속 그것을 생각 하듯이, 성악가는 항상 소리 만드는 것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다시말해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꾸준하고 많은 시간의 투자가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노래는 꼭 피아노 앞에 앉아 소리를 내면서 해야지만 연습하고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길어야 1시간 정도의 소리내는 시간을 갖고 나머지의 시간은 끊임없이 발성의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으로 해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생각하는 시간을 하루라도 거르게 되면 발성에 관해 지금까지 해온 것을 많이 잊어 버릴 수 있습니다. 만일 하루에 10시간씩 20년을 끊임없이 생각했다면 아마도 발성의 대가가 될 것입니다.C.1]노래를 하기 위해서 발음을 바꿀때면 항상 Jaw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또박또박 이야기 해보면 느낄수 있는데, Jaw를 움직이지 않고는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없습니다.2]그리고 자음이 발음 될때는 Jaw가 닫혔다가 모음으로 연결되면서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입니다.3]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Jaw를 열고 있으면 안되고 닫혀있는 상태에서 여는것과 동시에 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렇게 Jaw를 움직여 줘야 소리가 걸리지 않고 자유로이 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Open the Jaw의 과정인 것입니다.4]The line of Voice는 얼굴에 있고, 그리고 각 음의 Place는, 중간 C가 코 바로 밑에 그리고 옥타브 위의 C가 눈사이에, 그 사이를 6등분 하여 D E F G A B 를 설정 합니다. 그리고 코 밑 (중간 C) 에서부터 코끝 방향으로 대각선을 만들고 각 음의 Place와 그 선을 연결해 만나는 점이 바로 Point인 것입니다.5]고음을 내는 기분은 상기 되어있는 상태에서 분수 물줄기 같이 소리를 Lift 하다. 그리고 이마 부분이 항상 Open 되어 있어야 합니다.7]발음이 소리의 Line을 건드리지 않게 주의 하고 항상 소리의 Line 을 따라서 발음을 만들어야 합니다.8]소리가 먼저 나감과 동시에 발음을 만들어야 하고9]숨의 압력을 너무 세지 않게 적절히 조절 하여야 하며, 항상 순발력을 가지고 움직여야 합니다.10]코양옆, 광대뼈, 눈사이 를 연결하는 5각형이 공명의 중요한 위치이며, 그 5각형을 크게 늘리는 듯한 기분으로 얼굴 안면을 열어줘야 합니다.11]공명은 항상 딱딱한 부분을 쳐줘야 하는데 그 곳이 바로 이마(눈사이)와 광대뼈 이고, 코 양옆에는 항상 소리가 붙어 울림이 있어야 합니다. (Resonance)12]음이 높아 질수록 Point는 항상 Up & Front로 멀리 보내야 합니다.13]울림(공명)의 범위는 코 밑으로 내려가면 안되고, 폭은 광대뼈까지, 그리고 위로는 눈사이까지 가야하며, 눈사이는 굉장히 중요한 위치인데, 고음이나 중음, 저음의 소리의 방향이 항상 이 곳을 향하고, 그곳으로 모아져야 합니다.14]노래를 할 때, 모음은 항상 길게 연결하고, 혀와 Jaw는 많이 움직여 주고, 목젖도 살짝 들어주며, 입술과 턱에는 힘을 빼고, 공명이 다된 후 최후에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입술로 모아져야 합니다. 자음은 항상 빠르고 강하게 붙이며, 자음이 터지는 순간 그 자리에 모음을 빨리 붙여야 하며, 소리는 멀리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내야 합니다.D.1]우리가 외유내강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노래를 멋있게 부르는데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외: 즉, 밖으로 보여지는 부분; 입술, 소리... 등은 부드럽고, 내: 안의 것; 혀 Jaw, 에너지... 등은 강하게 움직여야 합니다.2]소리는 마치 분수 물줄기 위에 가벼운 탁구공을 올려놓은 듯 한 느낌, 즉 에너지는 강하고 소리는 부드럽게 되어야 합니다.3]호흡은 숨을 들이쉬고, 중단(참고), Attack의 순서로 이어지는데 숨을 들이쉬고 참고있을때 명치부분에서 양면의 힘을 느껴야 합니다. 즉 숨을 들이 밖으로 빼내어 주는 힘, Hold는 그것을 올라오지 못하게 막는 힘, 이 두 힘이 만나는 곳이 명치부분인데 이 두 힘을 잘 조절해야지만 노래를 잘 할 수 있습니다. Support가 너무 강하면 호흡이 짧고, 반대로 Hold가 너무 강하면 소리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4]Root와 Top은, 아랫배 부분이 삼각형의 밑변이며 얼굴에 있는 Point가 삼각형의 윗꼭지 부분인데 중요한 것은 Root는 불변이고 Top만 이동할 뿐 이라는 것입니다. 이 것은 소리의 중심을 말한 것 이고, 소리의 조절은 배꼽 밑의 한 점에서 해야 합니다.5]이 때의 자세는 가슴은 항상 서있고, 어깨는 힘을 빼고, 고개는 약간 들고, 턱은 자연스럽게 당겨져 있어야 합니다.6]호흡에 있어 흡기때는 Belt line을 튕기면서, 낚시할 때 고기를 낚아채 듯, 배 둘레를 팽창 시키면서 순간적으로 호흡해야 합니다.7]소리는 얼굴 안쪽에 The line of voice에 다림질 하듯 붙여 올라가면서 움직여야 합니다. 뒤(목젖뒤)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필자도 그랬슴) 후두와 목젖뒤는 단지 소리가 통과하는 부분일 뿐 소리가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되고 안면 뒷쪽 The line of voice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8]고음으로 올라갈 때 약간의 발음의 변화가 있는데 [아]는 [어], [에]는 [외] 또는 [이] 비슷하게 되며, [이]는 [위]로, [오]는 [우] 같이 발음되어 져야 합니다.9]이것은 Option인데, 여성의 경우 이방법을 쓰면 아주 바람직할 때가 있습니다. 입술이 모아지는 발음 [오][우][외][위] 등의 발음외에 열리는 발음 [아][에][이] 등의 발음은 송곳니를 살짝 보이며 웃는 모습을 하고 코 풀듯 하면 소리가 눈사이와 코 뒤쪽으로 잘 붙습니다. (단지 입술을 들어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웃을때 보이는 입술들림을 의미함)10][아][에][이]는 같은 입모양에 혀의 위치만 다르고, [오]와 [아]는 혀의 위치는 같고 입술의 모양만 다르고, [오]와 [우]는 소리의 깊이가 니다.
    예체능| 2002.11.29| 7페이지| 1,000원| 조회(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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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왕
    세종대왕(재위기간; 1418. 8-1450. 2)은 한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역사적 인물로 꼽힌다. 우리나라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주도한 한글 창제는 한국인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업적이다. 우리말을 온전하게 문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노력 덕분이었다. 향후 근 500년간 지속되는 조선왕조의 모든 기반이 그에 의해 수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가 우리 역사에서 이룬 공로는 지대하다.그러면 무엇이 세종대왕을 이처럼 훌륭한 역사적 인물로 만들었던가?군주로서 세종은 다른 군주들과 다른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가 재위 초기에 연구기관으로 집현전을 설치하여 운영한 것부터 다른 군주들에게서 볼 수 없던 것이다. 그는 이 기관에 우수한 신하들을 배속시켜 왕정에 필요한 여러 가지 연구사업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왕정의 방향을 바로 잡고 정사의 질을 높혔다. 세종은 재위 10년까지는 왕정의 방향을 잡는 데 거의 시간을 다 보냈다. 백성들의 의식을 족하게 한 다음 유교적인 것을 통해 풍속을 순화시키는 것이 바로 왕이 수행해야 할 본무라는 것이 그가 얻은 결론이었다.그는 이러한 확신아래 10년 이후부터 백성들의 의식을 족히 할 수 있는 방도로서 중농정책의 구체적인 방법들을 강구하였다. 세종은 선진기술들을 조사하게 하여 그 요점을 간추린 농서로서 {농사직설}을 편찬하게 한 다음 그것을 그 이북 지역 각 고을에 부임하는 지방관들이 반드시 가져가 활용하게 하였다.14세기에 농업기술상의 새로운 동향과 함께 지식인들은 인구를 늘이기 위해 소아과, 부인과 등을 중심으로 의술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부단히 경주하였다. 세종대왕은 이를 총정리하여 체계화하는 정책을 수행하여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류취(醫方類聚)} 등의 의서들을 편찬해 내는 한편, 일반인들이 활용하기에 편한 부인과, 소아과의 보급판 의서로 {태산요록(胎産要錄)} 등을 간행하여 인구증가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고려시대까지도 한국의 인구현상은 소아사망율이 높아 한쌍의 부부가 얻는 평균 자녀수는 3인을 넘지 못했으나, 세종대를 거치면서 그 이상으로 넘어서는 추세가 되었다. 한국사회는 역사적으로 14세기 이후 많은 발전적 변화를 격었다.백성들의 의식을 개선하는 정책이 성과를 거두면서 그는 점차 백성들의 교화를 위한 정책도 시작하였다. 유교적인 풍속을 조장하기 위해 아악 연구에 획기적인 업적으로 닦는 한편,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있는 글로서 훈민정음 창제에 나섰다.15세기의 동아세아, 특히 그가 통치했던 조선왕조 상류사회에서는 중국문학·중국문화에 심취하고 있었고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대왕만은 달랐다.원래 중국의 한자는 모든 낱말이 저마다의 글씨를 갖는 문자체계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쉬운 글을 쓰거나 읽기 위해서도 다른 쉬운 문자를 익히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중국의 한자는 그 많은 글씨를 배울 만한 "여유"가 없는 서민들은 글을 익힐 생각조차 못했다.그 뿐만 아니라 한국어와 중국어는 어휘가 다르고 어문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일상일용의 한국어를 한자로 문자화하는 데엔 큰 어려움이 있었다.세종대왕은 그를 안타깝게 생각하였다.그래서 그는 오랜 시일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끝에 누구나 쉽게 배워서 쉽게 쓸 수 있는 한국의 고유의 문자체계인 한글을 창제하였다.'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글'이라는 뜻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이 한글의 원래 이름이다.1443년에 창제되어 3년 후인 1446년에 일반에 반포된 훈민정음은 표의문자체계인 한자문화권의 동아세아에서 중국문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음소문자(音素文字)로 탄생한 표음문자체계이다.그 점에서 한글은 한자를 고작 변형해서 만든 일본의 가나, 또는 거란이나 여진문자 등과는 확연히 다른 독보성을 지니고 있다. 15세기 한국어의 치밀한 음운분석에 기초하여 창안한 한글은 웬만한 사람이면 하룻밤 사이에 쉽게 익힐 수 있는 최고의 과학적인 음소문자요 최후의 알파벳문자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언제, 누가, 어떤 의도에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분명히 밝혀지고 있는 세계 유일의 문자이기도 하다.
    인문/어학| 2002.05.18| 2페이지| 1,000원| 조회(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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