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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기과정고고학 평가A+최고예요
    후기과정고고학 사조의 내용1. 후기과정고고학의 정의과정고고학과는 달리 후기과정고고학은 뚜렷한 하나의 관점으로 정의할수 없다. 이 사조를 처음으로 주장한 호더는 이 고고학은 다양성과 여러 목소리의 공존을 그 특징으로 삼고있다 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 인간행위를 형성시키는 무수히 많은 다양한 요인들이 있다는 자각과 더불어, 고고학 자료로 잔존하기 힘든 인간행위의 측면들에 대한 해석상의 다양성을 아울러 포괄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후기과정고고학의 형성에는 주변 학분문야에서 제기된 서로 다른 다양한 연구시각들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주변 학문분야는, 후기실증주의 Post-positivism적 시각, 구조주의 Structuralism, 신맑스주의 Neo-Marxism, 구조화 이론 Structuration Theory, 해석학적 접근 Hermeneutic Approach, 비판이론 Critical Theory, 후기구조주의 Post-structuralism, 그리고 1970년대부터 학문적·사회적 현상으로 대두된 페미니즘 Feminism과 탈모더니즘 Post-modernism적 사고등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연구시각 속에서 나름대로의 후기과정고고학적 사고를 형성시키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떠한 방향에 비중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2. 후기과정고고학의 내용(1) 과정고고학 사조에 대한 3가지 측면에서의 반발신고고학 연구시각에 대한 비판작업을 하면서 후기과정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 였는데, 이러한 비판들은 크게 과정고고학자들이 기본 연구자료로 삼는 물질문화의 성격에 대한 문 제와 이러한 물질문화를 연구할 때 활용하는 방법론에 대한 문제, 그리고 문화에 대한 개념규정 문 제가 주로 언급된다. 이렇게 주로 3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던 과정고고학에 대한 후기과정고고학자 들의 비판내용에 대하여 살펴보겠다.첫째, 물질문화의 성격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였다. 과정고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물질문화의 성격은 과거 인간이의 의미가 해석되어야 한다는 역사적 특수성을 강조하였다.셋째, 문화에 대한 통합적 개념 설정이다. 신고고학이 1960년대 등장할 당시 빈포드 등은 화이트가 정의한 문화의 개념에 입각하여, 문화를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수단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인 간행위가 결국 물질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였고, 인간행위 중 관념과 가 치기준 등은 단지 고고학 상황속에서 존재하는 증거물에 의하여 단편적으로 추측될 뿐인 것으로 치 부하였다. 또한 그는 물질문화의 특질과 분포양상간의 관계는 기능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과거 인간행위가 반영된 물질문화는 어떤 특수한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도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후기과정고고학자들은 신고고학 및 과정고고학에서 간과하고 무시하였던 문화의 인지적 측면과 개인의 창조적 행위 그리고 특수한 맥락에 관심을 집중한다. 후기과정고고학 자들은 인간행위가 문화적으로 구성되고 이는 개인들의 중개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리고 문화의 변화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 또는 개개인의 행동을 통해 협의되어진 것으로 파악하여 문화를 능동적 으로 적응이 일어나는 매개체로 간주하였다. 여기에서 후기과정고고학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행 위를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 뿐만 아니라 사회환경 혹은 문화환경에 대한 적응양상 속에서도 파악해 야 하며, 아울러 이러한 문화내에서 벌어지는 인간 개개인의 능동적인 상징행위의 중요성과 이러한 상징행위와 서로 다른 역사적 시기에 존재했을 사회적 맥락과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것이다. 이처럼 문화의 개념에 있어 신고고학(과정고고학)이 강조하는 유물론적 입장과 이전 전통고고학에서 보이는 관념론적 입장을 통합하고자 하는 의도는 후기과정고고학자들이 오랫동안 이분화된 개념들, 즉 변이 성 대 규범, 과정 대 구조, 사회 대 개인, 객관 대 주관, 일반 대 특수 등에서 보이는 양극화 현상을, 변증법적으로 그 간격을 분쇄하고 고고학의 연구시각을 통합하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2) 후기과정고고있 다. 이처럼 후기과정고고학자들은 현상적인 체계 내에 흐르는 과정을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서는 그 이면에 내재되어있는 개개인의 사고와 집단이데올로기의 구조를 파악해야 가능하고 봄으로 써 과정(체계) 대 구조와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3 유물론 대 관념론과의 통합전통고고학자들은 뚜렷한 방법론적 근거없이, 그리고 상징유물과 유적이 지니고 있었을 의미에 대 한 검토없이 관념론적 시각에서, 추측에 추측을 거듭하여 접촉·문화접변·전파라는 개념으로 해석 하였다. 이러한 비관적이고 주관적·비논리적인 해석에 반기를 든 과정고고학자들은 유물론적 사고 에 입각하여 과거의 복잡한 경제체계 및 조직과 사회체계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기 술체계 및 경제체계에 대한 추론은 비교적 쉽게 할수 있고 물질문화에 투영되어 있는 상징체계 및 이념체계에 대한 설명도 어렵지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상징체계 및 이념체계에 대한 연구 는 거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과정고고학자들이 과거인의 사고나 관념 및 이념 등 은 고고학의 영역 밖인 정신분석학적 차원에서 다룰 수밖에 없다는 사고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기과정고고학에서는 전통고고학의 관념론적 시각과 과정고고학의 유물론적 시각을 연결해 줄 수 있는 변증법적 과정들을 추구한다. 이들은 사회가 형성되는데 관계되는 물질적 구속력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의미 및 관념 그리고 상징성을 통합시킬 필요성을 강조한다.4 사회 대 개인, 객관 대 주관, 일반 대 특수간의 통합과정고고학에서는 고고학 상황속에서 개개인의 결정이나 의도는 파악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대신 개인이 이루는 사회체계의 속성에 대한 파악을 시도하였다. 체계를 설명하는 이론들은 데이터 에 의해 객관적으로 검증될수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과학적 방법을 통해 인간행위에 대한 일반법칙 을 이끌어 낼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고고학자의 학문행위는 과학적이며, 그 내용은 객관성을 유지 하고 어떠한 당대의 사회적·정치적 상황과는 무관한 가치 중립적인 것으로 간자들이 문화의 개별측면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모든 세부사 항에 대해 검토하는 것을 맥락적 접근의 철칙으로 삼고, 고고학 증거들을 문화적 맥락과 넓은 지역 에 대한 역사적 맥락 역시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장기적으로 형성된 문 화전통들은 문화변동을 야기시키는데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 는 물질문화의 기능과 상징적 의미 그리고 맥락적 의미를 강조하게되고, 물질문화의 맥락적 의미는 현상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읽혀져야만 하는 텍스트로 간주하여 그 의미를 읽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 비판이론(Critical Theory)비판이론 하에서, 모든 지식이란 역사적으로 각시점마다 있어 왔던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편견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객관적인 지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간주된다. 실제 고고학사적 측면에서 보면, 그때 그때마다의 사회적(계몽주의적 사회전통·진화론이 팽배하던 시기·모더니즘 시대·탈모더니즘시대 등)·경제적(자본주의 시장경제하에 구제발굴의 수주·공산주 의 국가경제체제하의 국가사업적 발굴 등)·정치적(제국주의·유럽민족주의·독재국가체제·공산주 의체제·제 3세계 민족주의 등) 상황에 따라, 그리고 개개인 학자의 흥미와 학문집단의 이익에 따라, 동일한 고고학적 증거가 얼마나 다르게 해석되어 왔는지 바로 느낄수 있다. 후기과정고고학자들은 현재에서 얻은 자신들의 경험이 과거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에 어떻게 그리고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 는 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된다. 실제 1986년 영국 사우삼턴대학에서 열렸던 제 1 회 세계고고학대회 주최측 집행부는 자국 내에서 인종차별정책을 고수하고 있다는 이유로 남아프리 카공화국과 나미비아의 고고학자들의 대회참가 신청서를 반송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세계 고고학자 들은 과연 고고학이란 학문이 지니고 있던 객관적이고 정치중립적인 전통적 의미가 여전히 유효한지 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나아가 생 연구 사조간에는 제각기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되고, 향후 보다 풍부한 고고학연구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이 두 고고학 연구사조의 통합 필요성을 제기하기에 이른다1. 후기과정고고학의 기여1 물질문화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후기과정고고학의 제창자인 호더가 고고학연구에 끼친 가장 큰 기여는 역시 물질문화의 성격과 역 할에 대해 고고학자들로 하여금 천착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과거의 물질문화를 단순히 기능적 필 요성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폐기된 것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회관계를 형성시킬 수 있 는 능동적이고도 상징적인 의미체로서도 간주해야 한다는 지적이 바로 이것이다. 이처럼 능동적이고 도 상징적인 의미체로서의 물질문화 성격에 대한 파악은 물질문화를 통해 과거 개개인의 사회적 역 할과 집단 이데올로기, 나아가 과거 인간의 상징체계·가치기준 등 이념에 대한 설명도 가능하게 해 주는 길을 열어 주었다.2 고고학 이론에 대한 관심 증대에 기여고고학에서 이론이라 함은 고고학적 상황 속에서 관찰되어진 수없이 많은 물적 증거들을 모두 포 괄하여 과거 인간행위에 대해 설명 혹은 해석할 수 있는 준거틀이라 말할 수 있다. 초창기 고고학에 서 이러한 이론적 형식학적 방법에 내재된 근거에 집중되었고 신고고학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이론 적 논의는 인식론적 관점(고고학자들이 안다고 말하는 것을 고고학자 자신들이 어떻게 알 수 있는 가)으로 확대되어, 고고학적 설명의 본질에 대한 의문과 사회변동 과정에 대한 설명에 관한 의문에 대해 열띤 이론적 공방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신고고학의 시대에서 고고학 연구는 대부분 환경자료 와 과거 인간의 생업행위와 연관된 각종 자료를 분석하기 위한 갖가지 새로운 연구방법과 이러한 연 구방법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논의가 주류였을 뿐, 이론 그 자체에 대한 논의는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후기과정고고학이 등장하는 1980년대부터, 종래 고고학의 연구목 표·연구방법·이론에 있어서 단된다.
    인문/어학| 2002.06.14| 9페이지| 1,000원| 조회(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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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셰익스피어에 대해 평가A좋아요
    세익스피어에 대하여...세익스피어. 세익스피어의 일대기1564년4월 23일, 워릭셔 주 스트래트퍼드 온 에이븐에서 부친 존 셰익스피어와모친메리 아든의 장남으로 출생1568년(4세) 부친 스트래트퍼드 온 에이븐 시장에 피선1576년(12세) 영국 최초의 상설 극장이 런던에 개설됨.1577년(13세) 이 무렵부터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부친 존은 공식 회합에 나가지 않음.1581년(17세) 이 무렵에 작성된 랭카셔의 알렉산더 호톤의 유서에 '배운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나온다.1582년(18세) 11월 27일,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8세 연상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1583년(19세) 5월 하순, 장녀 스잔나 탄생.1585년(21세) 장남 햄닛과 차녀 주디스 쌍둥이 탄생.1587년(23세) 이때쯤 셰익스피어는 런던으로 어느 극단을 따라갔을 것이라는설이 있다.1590년(26세) 제 2 부, 제 3 부 초연.1591년(27세) 제 1 부 초연.1592년(28세) 초연. 초연. 런던에 질병이유행하여 이 해 후반에는 극장이 폐쇄됨.1593년(29세) 초연. 초연. 시집 출판. 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은이 해로부터 1596년경까지 씌어졌다.1594년(30세) 6월에 런던의 극장이 정식으로 문을 열어 극단의 재편성이 있었음.셰익스피어는 극단 일에 참여한다. 시집 출판. 초연. 초연. 초연. 출판.1595년(31세) 초연. 초연.1596년(32세) 햄닛 사망. 부친 문장 사용의 허가를 받음. 10월경 셰익스피어는런던의 비숍스 게이트 에서 템스 강 남안 서리 주로 이사감. 초연. 초연.1597년(33세) 고향 스트래트퍼드 온 에이븐에 호화스런 저택 뉴플레이스를 구입. 제1부, 제2부 초연. 출판. 출판. (불량 텍스트) 출판.1598년(34세) 초연. 초연. 제1부 출판. 출판. 프란시스 미어즈의 (셰익스피어에 관한 중요한 문헌) 가 출판됨.1599년(35세) 초연. 초연. , (우량 텍스트) 출판. 글로브 극장이 개장됨.1600년(36세) 초 영국의 수호성인인 세인트 조지의날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 4월 26일 윌리엄이라는 이름을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자라 청년기를 맞은 그는 나이 스물 하나에 이미 8년 연상의 여인 앤 헤서웨이와 결혼해 수잔나라는 딸을 가진 아버지가 되었다.결혼생활에 대한 준비도 없었을뿐더러 세상을 보고 싶어한 그는 연극배우가 될 희망을 품고 런던으로 갔다가극작가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헨리 6세'를 시작으로 '한 여름밤의 꿈',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 등으로 유명한 극작가의 대열에 오른그는 오늘날 4대 비극으로 꼽는 햄릿, 오델로, 리어왕, 맥베드 같은 명작들을 만들어 냈다. 명성과 부를 얻은 세익스피어는편하게 말년을 보내기 위해 1610년 스트랫포드로 되돌아 왔다. 조용한 가운데 글을 쓰던 그는 1616년 영원히눈을 감았다.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 세익스피어와 그의 가족들이 함께 잠들어 있다. 그의 무덤 위 벽에는 그를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기념상이 만들어져 있다. 세익스피어의 흔적은 아직도 시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그 흔적을 밟아 스트랫포드를 걸어보자. 버스로 도착했다면 바로 시내 중심가의 입구에 서게 된다. 기차역에서내린다면 시내로 향하는 길을 걸어 에이븐 강을 가로질러야 한다.세익스피어 생가세익스피어의 아버지가 구입한 것으로 세익스피어가 태어나고자란 곳이다. 보통 일반가정으로 보기에는 큰 건물인데원래 있던 집에 증축한 흔적이 남아있다. 건물 뼈대는 16세기것이지만 19세기에 일부 손질되었다. 집은 오리지널 튜터스타일로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생가로 들어가기위해서는 세익스피어 센터로 먼저 가야 한다. 티켓을 구입해서안내를 따라가면 정원을 통해 이어진다. 생가 안에는당시의 가구 몇 점이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볼거리는없다. 건물 자체만으로의미가 충분하지만 뭔가 특별한 것을바랬다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방과 방 사이 이어지는 복도와천장, 부엌 등을 눈여겨 보는 게 좋다나쉬 하우스 & 뉴 플레이스나쉬 하우스는 즐릿 등이 바로 이에 기여했던 대표적 문인들이다. 그러나그들이 이룩해 놓은 낭만적 셰익스피어상(像)은 20세기에 들어와 크게 수정되기에 이르렀으며 학문적·비평적 연구의 큰 성과와 더불어 그를 16세기의 극작가이자 동시에 20세기에 사는(때로는 동시대 작가처럼보고자 하는) 작가로 보는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따라서 작품해석이 다양하게 전개될 뿐 아니라 고전의 ‘살아 있는’ 모델로서 셰익스피어를 대하려는 경향이보인다. 한편, 작품이 영어로 씌어져 있음에도 셰익스피어가 영국인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라는 인식은이미 19세기 이후에 두드러졌다. 세계 각국에서 자국어(自國語)로 번역 출간하여 읽는 셰익스피어에못지 않게 또한 무대 위에서도 보는 셰익스피어가 세계 곳곳에서 상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셰익스피어가 한국에 알려진 것은 개화기(開化期) 초에서부터였으나 그 때는 단편적인 소개에 지나지않았으며, 본격적인 소개는 1923년 현철(玄哲)에 의한 《햄릿》의 완역(完譯) 출판이 시초이다. 1920년대에는이 밖에도 셰익스피어 소개가 있었으나 모두 단편적 이었으며, 1930년대에 와서 극예술협회에 의한《베니스의 상인》 공연이 있었고, 이것도 법정장면만을 다룬 부분적인 소개였다. 이 밖에 학교극으로서셰익스피어가 상연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셰익스피어가 소개된 것은 해방 후인 6·25전쟁이전에 김동석의 《셰익스피어 연구》, 설정식의 《햄릿》 번역이 나왔고, 1950년대에 들어와 각 대학의셰익스피어 강의가 보편화되었으며, 세계문학출판이 활기를 띠면서 부터 학문적 연구·번역·공연 등이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1953년 이후 수년간에 걸친 극단 신협(新協)에 의한 일련의 셰익스피어극 공연은 공연내용과 관객동원이다같이 수준 이상의 평을 받았으며, 강단에서는 최재서(崔載瑞)의 업적이 크다. 이어, 1960년대에 들어와셰익스피어 공연은 본격화되었고, 1964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기념행사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이에앞서 1963년에 한국 셰익스피어 협회가 결성어왕》 《맥베스》와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하나로 손꼽히지만, 다른 비극에 비하여 사실적이며 가정비극의 색채가 짙다. 인간의 사랑과 질투를 선명하고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콜리지가 ‘무동기(無動機)의 악’이라고 부른 이아고의 악의 추구는 무시무시할 만큼 박력이 있다.내 용베니스의 고관 브러벤쇼는 어느 날 저녁 자신의 아름다운 딸 데즈데모나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집을 나가한 마디 말도 없이 집을 나가 흑인 장군 오델로와 비밀리에 결혼을 한 사실을 알게 된다. 불같이 분노한브러벤쇼는 바로 하인들을 데리고 오델로를 찾아가 딸을 미혹게 한 죄로 원로원에 고발을 한다. 국가의안전을 위해 흑인을 고용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오델로를 경멸하던 브러벤쇼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이오델로의 시커먼 가슴에 자발적으로 안겼을리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로원에 불려 온 데즈데모나는자신이 오델로의 아름다움을 그의 시커면 얼굴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용감하고 의로운 그의 내면에서찾았으며 결혼은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밝힌다. 오델로 역시 자신이 얼마나 데즈데모나를 사랑하는지밝히고,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로원과 브러벤쇼는 그들의결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원로원은 때마침 사이프러스를 공격해 오는 터어키 군을 막기위해 오델로를 총대장으로 삼아 군사들을 사이프러스로 급파한다.한편 오델로와 데즈데모나의 비밀결혼을 브러벤쇼에게 일러 바쳤던 오델로의 기수 이아고는 오델로가자신을 부관으로 승진시켜 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 그는 데즈데모나를 짝사랑하는 어리석은로더리고와 함께 또 다른 음모를 꾸민다. 오델로와 데즈데모나가 사이프러스에 도착한 날 터어키 군은폭풍우에 휩쓸려 전멸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오델로의 성공과 행복을 위협하는 무서운음모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시작된다.그날 밤부터 이아고는 부관이 캐시오를 술에 취하게 만들어 싸움을벌이게 유도한다. 그리고 이아고는 싸움을 벌인 죄로 부관 자리를 박탈당한 캐결된 이야기로는 명료하지 않는 점이 있다.어떤 시편은 거의 관련성이 없기도 하다. 154편의 시중에서 좋은 것들은 애정의 환희와 고뇌를 우아하고재치 있게 표현하였으며, 그 속에는 진질성과 심오한 철학이 있으나 어떤 작품들은 다만 기교의 연습이지나지 않는다.영문학사상 위대한 걸작품으로 추천되는 시편은 12, 15, 18, 25, 29, 30, 33,34,48, 49,55, 60, 66, 71, 73, 97,98, 99, 104, 106, 115, 116, 130, 146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은 같은 빛깔이면서도 여러종류의 구슬이 섞여 있는 한 목걸이로 볼 수도 있고, 도립된 구슬들이 들어 있는 한 상자라고 할 수도있는 것이다.베니스의 상인(Merchant of Venice)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1564∼1616)의 5막 희극.대본작가 : 셰익스피어국적 : 영국구성 : 5막1596년경의 작품. 1600년에 초판. 이탈리아의 옛날 이야기에서 취재한 것이다. 로맨틱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감미로운 장면이 풍부한 희극이지만, 당시 런던 시민이 가지고 있던 증오심과 반유대 감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극에서 샤일록은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오히려 비극적 인물로서 묘사되고 있는 점이 주목을 끈다.내 용베니스의 상인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절친한 친구가 있다. 그의 이름은 바싸니오인데, 그는 그동안 안토니오에게 돈을 수 차례 빌렸으나 방탕한 생활로 돈을 모두 써버렸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벨몬트에 사는 부자 상속녀이자 아름다운 포오샤에게 구혼을 하여 자신의 행운을 시험해 보고자 한다.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안토니오에게 비용으로 쓸 돈을 빌려달라고 청하는데, 재산이 모두 배에 실려 바다에 나가있는 안토니오에게는 현금이 없다. 결국 바싸니오는 유태인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에게 가서,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를 담보로 필요한 돈을 빌리게 된다. 샤일록은 유태인고리대금업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동안 안토니오로부터 갖은 박해와 모로는
    인문/어학| 2002.05.31| 37페이지| 1,000원| 조회(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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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흄의 사상 평가A좋아요
    ▷의식과 인식로크 및 버클리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흄에게 있어서도 본유 관념(ideae innatae)이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유래한다. 모든 의식 내용(perceptions:지각들)은 인상(impressions)이나 또는 관념(ideas)으로부터 성립한다. 인상(印像)은 때로는 감각적 느낌들(보는 것, 듣는 것등=외적 지각)의 직접적이고도 생생한 인상이며, 또 때로는 정서와 감정 상태의 직접적이고도 생생한 인상(사랑, 증오, 의욕 등=내적 지각)이다. 이에 비하여 관념이란 간접적이고도 약한 인상의 모사(copies)이다. 관념은 상상력(imagination)에 의하여 생기며 언제나 인상으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신 관념 자체도 오성이 (경험된) 지혜와 선의 인간적인 성질을 무한으로 고양시킴으로써 얻어진다. 그것은 인식론적으로 모든 관념이 인상으로되돌아갈 경우에만 정당성을 갖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흄에 의하면, 관념은 표상 이외에 회상과 생각이기도 하다.여러 가지 관념은 말하자면 다음의 3가지 연상 법칙(聯想法則)을 근거로 서로 결합된다. ①유사성(resemblance) ②시간이나 공간에서의 근접성(contiguity in time or space) ③원인과 결과(cause and effect).로크와 비슷하게 흄은, 인상이 보다 단순한 요소로 분해되거나 되지 않는 정도에 따라서 단순한 인상과 복잡한 인상(simple and complex impre-ssions)을 구분하며, 또한 복합 관념이 외적 또는 내적 지각에서 유래하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단순한 관념과 복잡한 관념(simple and complex ideas)을 구분한다.흄에 의하면 인상과 관념 이외에도 특정한 의식 기능이나 정신 활동(ope-rations of the mind)이 있으며, 우리들은 내적 지각을 통하여 그것들을 안다.흄은 사유 및 탐구의 대상을 관념의 관계(relations of ideas)와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로 세분한다. 관념의 관계는 직관이나 논증에 의하여 얻어지는, 그리고 존재 문제와는 상관없이 순수 사유에 의하여(a priori: 선천적으로) 얻어지는 모든 판단이다. 예컨대 수학의 명제는 이것에 속한다. 사실 문제에 관한 판단은 이에 비하여 관념의 관계와 같은 확실성의 정도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논리적인 모순 없이도 사실의 성립대신에 사실의 불성립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영혼과 자아흄에 의하면 우리들은 물질적(연장적인) 실체에 관하여 언급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은 영혼의 성질에 관해서도 예컨데, 영혼이 데카르트가 가르치듯이 비연장적(非延長的) 실체인지의 여부를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영혼은 우리들에게 외적 인상으로도 그리고 내적 인상으로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들은 영혼에 관한 아무런 관념도, 아무런 인식도 소유할 수 없다. 우리들의 의식에서는 지각(인상과 관념) 이외의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으며 또한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이 지각을 지지하는 어떤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지각과 나란히 또는 지각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자아란 아무 것도 없다. 자아는 아무런 지각도 소유하지 않으며 자아 자체가 이 지각이다. 자아란 상호, 결합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여러 가지 지각의 동일성에 대한 신념을 산출시키는 이러한 흐름 속의 관계이다.▷인과율흄은 인과율의 문제를 특히 상세하게 탐구하였다. 그는 이 문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인과 관계는 우리의 감각 인상을 벗어나며 사실을 목표로 하는 우리들의 사고 활동이 기초로 삼는 유일한 관계이기 때문이며, 또한 학문의 유용성은 원인과 결과에 관한 인식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흄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결코 단순한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 인과율에 관한 지식을 갖는다. 그 이유인즉, 결과는 원인과 구분되므로 원인 개념의 내용에 속하지 않고 따라서 원인 개념의 분석에 있어서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어떤 선천적인 추론에 의해서도 돌이 공중으로부터 언제나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고 확정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경험만이 가르쳐 준다. 그러나 오성은 결과의 종류에 관하여 선천적으로 아무 것도 형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원인과결과의 결합에 관해서도 아무 것도 형성할 수 없다.그러나 여기에서는 오성뿐만 아니라 경험도 소용이 없다. 경험은 말하자면 우리들에게 단지 특정한 현상이 규칙적으로 공간 · 시간적으로 상관된다는 것만을 제시해 주지만, 이 현상이 끊임없이 관계를 가지고 나타나도록 결합시키는 결속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결속, 곧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인 결합은 합리적으로 성립 가능하지도 않으며 경험적으로 확정 가능하지도 않다.우리들의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여 어떤 특정한 사건이 항상 다른 특정한 사건에 따라서 나타날 경우 우리들은 언제나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한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언제나 동일한 원인으로부터 동일한 결과를 기대한다. 그런데 이 기대는 사물들간의 특별한 힘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힘에 관하여 우리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또한 아무 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대의 근거는 오히려 언제나 그렇게 체험한 습관(custom 또는 habit)이며, 미래에도 항상 그렇게죄리라는 습관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나타나는 신념(belief)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상상력이 외물(外物)에 대한 어떤 기대를 우리 안에 환기시키는 인상을 첨가하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은 외적 인상(지각 B는 항상A를 뒤따른다)의 경우 및 외적 인상과 동시에 내면적 인상, 말하자면 우리들의 지각B가 A에 따라서 나타나면, 우리가 항상 우리들의 의식에 붙잡아 두는 저 습관에 일치하는 결합의 감정(feeling)을 갖게 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습관의 억압 감정을 우리들의 상상력의 기반으로 인하여 실재적인 억압으로서, 곧 필연적인 결합으로서 외적 지각의 대상들에 전가시킨다.흄의 사고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즉 오성은 자신의 내용을 단지 경험으로부터만 가진다. 따라서 모든 관념은 외적 또는 내적 인상으로 복귀 가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들의 의식에는 인과 관념, 즉 모든 결과가 그것의 원인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한다. 어떻게 우리들이 특히 중요한 인과 관념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인가 관념의 객관적 타당성의 문제에 대한 답이다. 순수한 사유로부터는 그 답이 얻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답은 선천적인 사유가 아니라 조직 경험만이 어떤 것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 인과 관념의 외적인상의 결과일 수 없다. 왜냐하면 외적 인상은 항상 B가 A를 뒤따른다는 것은 제시하지만, 그 이유는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인과 결과를 결합시키고 따라서 B가 항상 A를 뒤따르도록 하는 결속은 아무런 외적 지각에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인과 관계의 관념이 논리적 근원도 그렇다고 실재적 근원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직 내적 인상에서 유래할 뿐이며, 다시 말해서 심리적 근원만을 가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흄은 습관에 의하여 내면적 강제의 감정에서 인과 관념의 근원을 발견한다. 이 감정은 필연성으로서의 상상력을 실재하는 대상에게 전가한다.따라서 인과성 문제에 대한 흄의 심리 발생학적 설명은 외계 존재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의 설명이다. 흄에 의하면, 자연 본능에 대응하는 습관은 여기에서 인식의 원리로 고양될 뿐만 아니라, 흄이 표현하는 것처럼 인과율의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삶의 인도자가 된다. 인과적 사건이 주관적 기능의 불확실성으로 되돌아가므로 인하여 자신의 확실성을 확신하며, 자연은 외적 사물에게 부여한 것과 같은 방향으로 인간의 사고를 이끄는 본능을 인간에게 심어 주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사고의 확실성을 정립시킨다. 그것은 흄이 (외계의 존재와 유사하게) 인과율의 객관적인 타당성을 이론적으로는 지양하지만 실천적으로는 신비적 규정을 통하여 타당하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윤리학흄은 모든 형이상학을 포기하면서 그의 이론 철학과 유사하게 그의 윤리학에서도 경험의 관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는 이론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윤리학에도 궁극적인 문제들을 피하지 않는다. 그는 도덕 판단의 기초를 그곳에서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가지고 분석하는 인간의 정서 생활로부터 자신의 출발을 취한다.인간의 의자 자유의 문제에 대한 결정론자와 비결정론자간의 싸움은 흄이 보기에 단순한 말싸움이다. 2가지 다 그릇된 전제를 구성했기 때문에 흄은 2가지 모두 반대한다. 그는 결정론자에 대하여 자신의 인과율 개념을 주장한다. 그의 인과율 개념에 의하면, 필연적 결합은 아무 것도 없으며 따라서 의지도 강제적으로 결정된 것일 수 없다. 그는 비결정론 자들이 대립되는 극단에 빠져서 의욕의 무원인성과 함께 우연을 도입하지만 어떤 학문도 우연을 가지고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없다고 비결정론자들에 반대한다. 흄은 '올바른' 자유 개념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바로 구속되어 있지 않는 한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시인되는 행동의 자유를 이해한다. 물론 흄은 이와 같은 자유 개념과 아울러 의지 자유의 고유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의욕의 (내면적) 자유 대신에 (외적·정치적인) 행동의 자유를 설정하기 때문이다.윤리적으로 가치있는 행동은 이성으로부터 생기는 행동이라는 (예컨대 소크라테스) 종래의 윤리적 견해에 대립하여 흄은 이성 활동이 이론적 사고의 영역에서 고갈되었으며, 그러한 영역에서 이성 통찰이 결코 윤리적 행동의 동기로 작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소질과 정서만이 동기가 될 수 있으며, 흄은 정서를 전체의 감정 생활로 이해한다. 쾌와 불쾌는 인간의 행동의 궁극적인 충동이고 그것에 비하여 이성은 단지 봉사하는 위치만을 차지한다. 우리는 정서를 오로지 또 다른 정서에 의해서만 억제할 수 있으므로 이성도 정서의 매개에 의해서만 작용할 수 있다. 우리들이 행동함에 있어서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적인 정서의 총체이지, 고유한 이성이 아니다.
    인문/어학| 2002.05.09| 4페이지| 1,000원| 조회(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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