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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임진왜란시기 명의참전과 영향
    壬辰倭亂시기 明의 참전과 그 영향{Ⅰ. 序論Ⅱ. 명군의 참전태도와 배경ⅰ. 명군의 참전의 배경ⅱ. 전투참가의 실상Ⅲ. 명군참전이 조선에 끼친 영향ⅰ. 정치적 영향ⅱ. 경제적 영향ⅲ. 사회적 영향Ⅳ. 結論Ⅰ. 序論16세기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은 동북아 삼국인 朝鮮, 明, 日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전장이었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정치, 경제, 문화, 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은 未曾有의 국난이었다.임진왜란에 관한 연구는 일제시기부터 시작되었는데 정치사, 특히 전쟁사에 치중되었다. 전쟁사 위주의 서술은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한반도 침입의 원인과 동기, 임란 중 조선의 政情, 남해안 등지의 축성, 兵器와 兵法의 변천 등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연구는 일본인 池內宏, 中村榮孝등에 의해 이루어져 한국 측에 불리한 면만을 들추어내는 연구경향이 많았다.한국 내에서 본격적인 임란사의 연구는 1950년대에 한우근의 「임진난 원인에 관한 검토」가 발표되면서 활기를 찾기 시작하여 60-70년대에 들어와서 다양한 연구가 심도 있게 진행되었다. 우선 난중 사회상을 밝힌 연구로 임란 때 沿海民의 동태, 민중의 동향, 민간반란사건 등이 주로 다루어졌다. 또 연구가 활발했던 분야는 明의 援兵과 이에 따른 외교문제와 관련된 테마들이다.임진왜란의 경과를 살펴보면 명의 파병은 전황의 변화와 강화시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후의 국제정세에도 영향이 컸다. 명군의 파병에 대한 연구는 조영록, 최소자등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파병의 원인을 조선의 방위를 위하기보다는 일본군의 중국 진출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자기나라를 방어하기 위한 정책적인 결정에서 파병 한 것으로 명 원병의 활동은 처음부터 한계성을 지닌 것임을 논증하였다.본고에서는 임진왜란의 여러 연구 분야 중 明의 파병과 관련하여 파병과정과 파병목적, 명군의 임란 참전 경과와 명의 태도, 그리고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승전.{) 『明神宗實錄』 券 272 萬曆 22年 4月 癸酉條 『宣祖實錄』 券 54 甲午年 乙丑條.고 밝혔으며 大學士 趙志皐는왜가 중국을 북으로 범할 수 없는 것은 오로지 조선의 전라도 경상도 두 도가 우리의 울타리가 되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라도 경상도가 망하면 조선은 반드시 망하고 조선이 한번 망하면 왜는 육로를 따라 요동을 범하지 않고 반드시 한강 임진 청천 대정 대동 압록의 강들을 따라 군사를 나누어 사방에서 나올 것이고, 가까운 장래에 큰 걱정이 있게 될 것이다.{) 『明神宗實錄』 券 307 萬曆 25年 2月 乙亥條고 하면서 天律 登萊의 방어를 논하고 있다. 이것은 해로를 통한 중국으로의 진출에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정리해보면 첫 번째로 면적이 광활한 요동지역 보다는 좁고 험준하여 방어에 용이한 경상도 전라도 지방을 이용하는 것이 병력 절감과 물자수송 비용도 절감이 되어 이롭다는 점, 두 번째로 그동안 해안등지에 출몰한 왜구의 피해와 만약 명이 출병하지 않아 조선이 일본에게 점령되어 요동으로 진입한다면 북경이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참전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즉 명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 라는 脣亡齒寒 의 논리에 입각하여 출병하였지만 이를 인정할 경우 자구책으로 보이기 때문에 조선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병을 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는 再造之恩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ⅱ. 전투참가의 실상명은 조선에 순망치한의 논리를 가지고 참전했기 때문에 전투과정과 강화회담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지 않고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다. 명군이 참여한 전투 平壤戰(1592. 7. 17~1593. 1. 6-9)을 시작으로 碧蹄戰(1593. 1. 25-27), 慶州戰(1593. 8 .6), 安康戰(1593. 12. 2), 南原戰(1597. 8. 13-16), 稷山戰(1597. 9. 6-7), 報恩戰(1597. 9. 20), 蔚山戰(1597. 7. 12-1598. 1. 1), 三嘉戰(1598. 3. 24), 茂朱戰(15 條.)벽제전 패배 이후 小西行長과 明의 沈惟敬 사이에 회담이 시작되었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강화회담은 평양수복 이전 일본이 조선을 무혈로 점령하려는 수단으로써 강화를 요청하는 和 · 戰 양면 전략을 구사하면서 제기되었다. 대동강에서 李德馨과 승려 玄蘇가 접촉하였는데 이덕형은 왜군이 먼저 철군할 것을 강력히 제의하였지만 왜군은 끝내 이를 거부하고 명으로 가는 길을 조선이 허용하여 줄 것만을 요구하였으므로 결국 회담이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임진왜란 중에 조선과 왜군은 어떤 강화 논의도 하지 않았다.회담이 성립된 배경은 첫째 명군이 벽제전 패전으로 더 이상의 전투의 의욕을 상실한 것을 들 수 있다. 둘째 내적으로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안고 있던 명은 막대한 戰費를 조달함으로써 民怨을 야기하고 있었다. 셋째 일본군에 비해 우세하지 않았던 명군의 피폐한 軍勢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배경은 평양전 이후 물자 보급과 신병 충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기아와 질병에 시달려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 있던 명군의 상황이다. 왜군 역시 기아와 질병의 발생은 물론 용산 곡창을 명군에게 빼앗긴 상황이여서 양쪽 모두 강화회담을 원했다.小西行長은 명군과 교섭할 구실을 찾고자 玄蘇로 하여금 조선과 명에게 각각 강화요청서를 보냈으나 조선에는 전달되지 않고 이여송 만이 일본이 강화하려는 뜻을 알게 되어 그는 비밀리에 왜군과 교섭해 강화에 대한 논의를 송응창에게 건의하였다.강화논의의 결과, 1593년 4월 일본군이 서울에서 물러나자 명은 이제 조선이 거의 회복된 것으로 파악하였고 명군의 철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이어 향후 대책으로 劉綎, 吳惟忠, 駱尙志가 지휘하는 남병과 沈茂의 병력을 대구, 조령, 서울 등 요충지에 배치하고 요동에 정병 2천을 남겨두는 것 이외에 모두 철수 시키자고 청하였다.{) 병부상서 석성, 경략 송응창, 유격 심유경으로 이어지는 명군 지휘부와 후경원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일본과의 강화=봉공방침이 굳어져가는 가운데 명 조정 일각에서는 반대의견이 제시지대에 머물며 끝내 철수하지 않았을 뿐더러 조선과 명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요구조건을 내걸면서 강화협상을 파탄의 국면으로 몰고 갔다. 일본은 명의 책봉사절들이 북경에 있을 때는 조선으로 나올 것을, 그들이 서울로 들어오자 남원으로 내려올 것을, 그들이 부산의 일본군 진영으로 들어가자 조선사신도 明使와 함께 동행 할 것 등을 일본군 철수의 조건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일본군의 완전한 철수를 위해서는 조선이 통신사를 보내야 한다는 일본의 주장과, 가능하면 일본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강화협상을 매듭지으려는데 급급했던 명군 지휘부에 밀려 조선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명의 참전은 표면적으로는 조선을 구원한다는 명분 아래서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자국의 안위를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전쟁과 강화를 자의적으로 구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의견이나 민족적 감정은 철저히 무시하였다. 요컨대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강화협상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된 채 군사 작전권을 상실하는 등 明의 정치적 입김에 끌려 다녔던 것이다.Ⅲ. 명군참전이 조선에 끼친 영향ⅰ. 정치적 영향명군이 조선에 참전하면서 대두된 문제는 명에 신료들에게 조선 조정의 권위가 실추이다. 이전까지 조선의 국왕은 명 황제에 대해서는 臣從해야 한다는 관행이 있었지만 명의 신료들과 조선 국왕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지 명백한 관행이 존재하지 않았다. 선조는 전쟁 초반 의주까지 파천하여 이미 군주로의 권위가 떨어져 명군 지휘관에게 저자세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1593년 윤 11월, 황제의 칙서를 전달하기 위해 왔던 行人 사헌이란 인물은 선조에 대한 南面을 요구한 것으로 엿볼 수 있다.이런 배경에서 조선 군신들의 권위 실추는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론이 대두되면서 심화되었다. 강화론자들은 조선 내 일본에 대한 민족적 감정을 무시하고, 강화를 통해 전쟁을 종식시키려 했다. 반대론자들은 명의 안위를 위해 조선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양자 모두 명의 군사적 · 경제적 부담을 줄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기상황 속에 위축되 있던 선조나 신료들에게 명군의 참전과 1593년 1월, 명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쟁 전체의 흐름을 단숨에 바꾸어버리는 계기가 된 것은 한 줄기 복음 이었다. 절망적 상황속에서 평양전투의 승첩소석에 예조는 국가의 재조(再造)가 오로지 평양 승첩에 달려있다 운운하면서 즉시 종묘에 고할 것을 주장하였다.(한명기,『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1999 p.72)재조지은 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임진왜란 말기 명 조정과 지휘관들이 조선에 대해 시혜자로서 생색 을 내기 시작한 것과 맞물리면서 확대되었다. 그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정유재란 이후에는 명 역시 재조지은 이란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 점을 내세우며 실제, 1599년 형개는 전쟁이 끝난 후 경제적 보상을 노골적으로 종용하였다. 이에 조선은 5천 필과 인삼 5백근을 보냈었다. 명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해야 한다는 조선의 입장과 그를 강조하는 명의 태도가 맞물리면서 재조지은 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확대되었다. 17세기 명나라 인사들은 임진왜란을 東援一役 으로 나타내며 凍援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광해군대에 들어와 후금에게 요동을 상실당하고, 수도 북경의 관문인 山海關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왜란 당시의 은혜를 거론하면서 조선의 보답을 촉구하는 태도는 더욱 심화되었다. 당시 후금에게 요동지역이 무너지자 그 지역 사람들이 압록강을 넘어와 지내는 것의 근거 또한 재조지은이었다.임진왜란 시기 명군의 참전과 평양전투 승리를 거치면서 형성된 재조지은 은 17세기 초에 이르면 대명관계를 원활히 유지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일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향후 강성해가는 후금과 점점 약해져 가는 명, 두 나라를 대하는 조선에게 난감하고 어려운 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ⅱ. 경제적 영향명군의 참전은 조선의 경제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이 변화는 은 본위의 一條鞭法{) 명(明)나라 후기부터 청나라 초기까지 중국에서 시행된 세역(稅役.
    인문/어학| 2006.05.02| 11페이지| 1,500원| 조회(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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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왕건과 훈요십조
    왕건과 훈요십조를 통해 본 고려의 성격{Ⅰ. 서론Ⅱ. 본론(1) 후삼국 통일 과정으로 본 왕건(2) 통일 후 왕건의 정책(3) 훈요십조의 내용(4) 훈요십조를 통해 본 고려의 성격Ⅲ. 결론Ⅰ. 서론몇 년 전 태조 왕건 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었는데, 후삼국의 정세와 통일국가 고려의 건국을 다룬 그 드라마는 왕건을 카리스마적이고 모든 것을 잘하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왕건은 역사 속에서도 카리스마적이고 완벽하였을까? 그리고 그가 후대왕에게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왕건이 원하는 고려의 성격을 어떠하였으며 그것은 고려사회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우리는 왕건의 생애와 정책 그리고 훈요십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훈요십조를 통해 본 고려의 성격을 논의하기로 하였다.Ⅱ. 본론(1) 왕건의 생애와 정책왕건{) 877(헌강왕 3) 943(태조 26). 고려 제1대왕. 재위 918 943. 본관은 개성(開城).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 출생.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이 청년으로 성장한 900년 전후의 한반도는 극도의 혼란기였으며, 신라의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재정이 바닥나 백성들에게 무리한 세금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자 농민들은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이런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나라를 세운 이가 바로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은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892년 5000명의 병사로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여 왕을 칭하고 전라도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국호를 후백제라 정하고 도읍을 완산주(지금의 전주)로 정하였다. 한편, 궁예는 신라의 왕족출신이다. 정권경쟁에서 밀려나서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가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환속하여 기훤, 양길등의 밑에서 일하다 독자세력을 형성하여 철원을 기점으로 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때 왕건 부자가 궁예의 밑으로 들어오고 왕건 부자의 합류로 세력이 커진 궁예는 송악에 거점을 잡고 901년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여 나라를 세웠다. 그 후 국호'태봉'으로 바꾸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후삼국은 성립된다.왕건은 궁예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900년에는 광주(廣州) 충주 청주(靑州: 지금의 淸州) 및 당성(唐城:지금의 南陽) 괴양(槐壤:지금의 槐山) 등의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阿飡)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부근 10여개 군현을 쳐서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해에 그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閼飡)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飡)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하지만 통일 후에도 많은 당면과제가 있었는데, 첫째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지혜롭게 대처해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나갔다. 왕건의 정치로 나라는 안정되었고, 919년(태조 2)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친화정책을 썼는데, 이에 따라 후백제와는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930 년 태조는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지방)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 년 후백제의 왕실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지금의 善山)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2) 통일 후 왕건의 정책태조의 기본 정책은 평화유지 정책과 민족통일 정책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918년 즉위한 후에도 그를 협조하지 않는 세력들이 그를 질시하고 적대하여 정권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주위의 여러 호족들로부터 협조를 받을 수 있는 호족포섭정책을 쓰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첫째, 호족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동시에 왕실의 세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결혼정책을 실시하였다.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 만났던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후비들의 지역적인 배경에서 그 목적을 찾을 수 있는데, 광주, 충주, 명주등 유력한 세력들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유대관계를 강화하고자 한 정치적 의도를 엿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태조는 각지의 유력한 호족들이나 세력가의 딸들과 혼인을 통한 유대관계를 강화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나아가서 통일을 위한 군사적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둘째, 유력한 호족들에게 王씨를 하사하여 이들과 의제가족(擬制家族)적인 관계를 맺어 유대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태조 5년(922) 오랫동안 불복한 면주 장군 순식이 그의 아들 수원을 보내 귀부해 오자 태조는 왕성(王姓)을 주어 태조의 세력으로 편입시켰다.그 밖의 호족에 대한 시책으로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가 있는데 사심관 제도의 목적은 호족세력을 무마하고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 중안의 통치력이 지방까지 침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개경에 거주하는 호족들로 하여금 출신지역을 관장케 하는 간접적인 지방통제를 꾀하였던 것이다. 기인제도는 호족의 자녀를 인질로 두는 제도인데, 태조는 지방 호족세력들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시행하였다. 또한 호족 포섭을 위해 국가 공로자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는 등 여러 가지의 유화적인 화합정책을 추진하였다.태조는 호족포섭 정책과 더불어 민생의 안정추구를 강조하였다. 태조의 대민정책은民政策),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애민정책(愛民政策)이었다.(3) 훈요십조(訓要十條)의 내용1조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은 여러 부처가 도와준 덕분에 이루어 졌다. 이런 연유로 선종과 교종 사원을 창건하였으니 여러 종파가 다투지 못하게 하라.2조 절은 도선이 산천의 순(順), 역(逆)을 정한 곳에 창건하였으니 다른 곳에는 함부로 짓지 말라.3조 왕위는 적자(嫡子)에게 물려주는 것이 보편적이다. 하지만 원자가 못났으면 다음 아들에게, 그도 못났으면 형제 중에 여러 사람이 추대하는 자에게 물려 주라.4조 중국의 문물과 예(禮)·악(樂)을 준수해 왔지만 나라와 풍토가 다르고 사람의 성품이 다르니 구차하게 같게 할 필요는 없다. 짐승과 같은 나라인 거란의 의관(衣冠)제도는 본받지 말라.5조 삼한 삼천의 숨은 도움에 힘입어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으로 대업을 만대에까지 유지시켜줄 땅이다. 각 계절 중간달마다 서경에 행차하여 1년에 100일 이상 머물도록 하라.6조 짐이 바라는 것은 연등회와 팔관회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팔관은 천령(天靈)·5악(嶽)·명산·대천·용신을 섬기는 것이다. 더하거나 감하지 말고 원래대로 행하라.7조 비판하는 말을 따르고 참소 하는 말을 멀리하라. 민을 때에 맞게 부리고 노동력과 세금의 징수를 가볍게 하라. 상과 벌을 올바르게 행하라.8조 차현 이남과 공주강 외(外){) 차현 이남 공주강 외(車峴以南公州江外)는 차령고개를 넘어서면 공주강에 들어선다. 공주강은 지금의 금강이다. 외(外)를 바깥 으로 해석하면 차령 이남과 공주강 외는 옛날 백제 땅이 시작되는 경계.는 산형과 지세가 배역(背逆){) 바라보는 쪽을 등지고 돌아서듯 물이 흐르거나 산줄기와 물줄기가 바라보는 쪽으로 치듯이 달려오는 형세를 배역 (背逆)이라 한다.으로 달리고 인심도 역시 그러하니 비록 양민이라도 관직에 올라 일을 보게 하지 말라.9조 백관에게 적절한 녹봉을 지급하고 병졸을 잘 대우하라.10조 근심 없을 때를주공이 쓴 책. 정치가에 덕목에 대한 이야기. 책머리에 범례와 목록이 있고, 권1·2에는 《주역(周易)》의 효사(爻辭)와 상사(象辭), 권 3 에는 《서경(書經)》의 <대고(大誥)> <낙고(洛誥)> <다사(多士)> <무일(無逸)> <군석(君奭)> <다방(多方)> <입정(立政)> 등의 원문, 권 4 에는 《시경(詩經)》의 <칠월(七月)> <치효> <동산(東山)> <당체> <문왕(文王)> <대명(大明)> <면> 등의 원문, 권5∼10에는 《주례(周禮)》의 <6관(六官)>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10권 4책. 규장각도서.을 그려서 걸고 출입 때마다 보고 반성하라.(4) 훈요십조(訓要十條)로 통해 본 고려의 성격후대왕에 지침서인 훈요십조(訓要十條)의 1조와 2조 6조는 불교숭상에 관한 것이고 3조는 왕위계승, 4조는 풍습 5조와 7조에서 10조까지는 왕의 정사에 지표로 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1조와 6조의 내용에서는 고려사회가 불교사회였음을 알 수 있는데 건국기에 왕건은 동요하는 민심을 무마하고 지방 호족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일련의 회유 정책으로써 불교를 숭봉하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즉위 원년(918)에, 신라 봉건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해 연례행사로 치러졌던 왕실 주체의 호족불교 행사인 팔관회 제도를 받아들였다. 불교 숭봉을 표방하면서도 동시에 "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아 승려의 청탁을 따르게 되면 각 종파가 서로 사찰을 뺏는 다툼을 벌일 것이니, 이를 엄금할 지어다." 라고 하여 불교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불교는 지배층의 안녕과 복을 빌어 주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교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특히 팔관회와 연등회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불교 의례로 볼 수 있는데 불교 격식 그대로 열리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널리 천신, 수신, 지신 등 여러 토속신에 대한 제사도 아울러 겸하고 있었다. 국가를 위하여 전사한 장병들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지신과 수신을 즐겁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을의 풍성한 추수에 대해다.
    인문/어학| 2006.05.02| 5페이지| 1,000원| 조회(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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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사화를 통해본 훈구와 사림
    士禍를 통해 본 勳舊와 士林{一. 序論二. 本論(1) 훈구세력의 등장(2) 사림세력의 등장배경(3) 사화(4) 사화 이후의 정국三. 結論一. 序論고려말기 원과 권문세족(權門勢族)으로 횡포로 나라의 모든 것이 황폐화 됐을 무렵, 남송의 성리학을 받아들인 신진세력이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의해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비록 이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신흥사대부들은 정계 진출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정권을 잡게 되고, 新興士大夫세력은 이성계를 따르는 정도전을 주축으로 하는 역성 혁명파와 고려의 존속을 지지하는 정몽주를 주축으로 하는 온건개혁파로 나뉘게 된다. 하지만 온건개혁파의 정몽주가 이방원의 철퇴에 목숨을 잃고 그 후 이씨 조선이 건국된다. 이에 따라 역성 혁명파에 반대 해온 온건개혁파 신흥사대부는 지방으로 내려가 향촌에서 교육을 통한 후진 양성에 힘쓰게 된다. 이 온건개혁파가 훗날 사림파이라 불리게 되어 역사에 다시 등장을 하게 되며, 역성 혁명파는 훈구파라 불리게 되어 조선 초기사회를 이끌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勳舊와 士林중 사림에 더 비중을 두어 사림이 정계에 재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며 사림파의 등장에 따른 훈구파와의 여러 갈등, 권력다툼 때문에 생겨나는 4대 사화와 이러한 사화 속에서도 끝끝내 중앙정계의 중심에 서게 되는 사림의 이후 정국 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二. 本論(1) 훈구세력의 등장고려후기부터 재지중소지주인 향리층 속에서 성장한 신흥사대부들이 점차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과의 접촉을 체험한 신흥사대부들은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과정에서 그 입장을 달리하면서 두 계열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 가운데 조선 개창에 적극 참여하거나 지지한 세력들은 개국공신(開國功臣), 혹은 여타의 공신에 책봉되면서 건국 직후 집권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개국공신 주도하의 정국 속에서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다. 兩次의 왕자난을 통하여 定社 · 佐命功臣이 책봉되었다. 이들 양 공신은 개국은 정난 · 좌익 · 적개 · 익대 · 좌리의 다섯 공신집단이며, 이 중에 世祖의 즉위와 관련하여 책봉된 공신이며, 이들 양 공신이 세조 대의 주요관직을 독점하고 있었음은 세조 12 년까지의 인사이동에서 3政丞과 병조판서 전원이 공신이고 吏曹判書는 7명중 5명이 공신이었던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결국 소수 공신집단에의 권력집중현상은 소외된 非功臣들의 불만을 가져왔을 것이고, 이를 해소하여야 할 필요성에 의해 책봉된 것이 이시애란(李施愛亂){) 이시애의 난(李施愛--亂) 조선 세조 때 함경도의 호족(豪族) 이시애(李施愛)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한 직후의 敵愾功臣이었다. 적개공신 책봉 후 1년도 채 안되어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한 직후에 익대공신이 책봉되었다. 南怡의 獄事 이후에 책봉된 익대공신은 적개공신을 제외하고는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공신에 책봉된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예종의 즉위와 더불어 공신집단의 정치적 입장이 더욱 강화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그에 따라 이들의 權貴化 현상도 심화되어 갔을 것으로 여겨진다.재위 만 1년도 채 못 되어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한 후인 2년(1471) 3월에 또 좌리공신이 책봉되었다. 좌리공신에는 형제 · 부자 · 숙질을 위시하여 親姻戚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많았고, 다섯 차례의 공신책봉 중 두 차례 이상 참여한 인물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그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서도 세조대의 핵심적인 勳臣들은 적개공신을 제외하고는 공신책봉에서 빠진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세조대의 정난 · 좌익 공신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대응세력 없는 유일한 정치세력인 勳舊 또는 勳舊派 로서 성립되었음을 알려 준다. 결국 조선건국에서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공신가문이나 구래의 전통가문은 몇 개의 공신을 兼帶한 토대 위에, 또다시 좌리공신의 책봉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치 · 경제적 특권을 더욱 강화해 갔으며, 이로 인해 이들의 권귀화 현상도 더욱 심화되어 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원상제(院相制)를 통하여 정치에 깊이 관여 훈구파의 여러 전횡에 불만을 품었던 성종의 바램대로 신숙주 홍윤성, 성봉조 등 사망하는 공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그리고 훈구파에게 땅을 빼앗겨 전호로 전락한 농민들은 새로운 정치세력을 끌어들이는데 이들이 정몽주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지방에서 학문을 닦던 사림인 것이다. 바야흐로 사림의 정계 진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참고로 사림이란 박지원의 『연암집』에서 보면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나온다.(3) 사화사화는 조선 중기에 조신(朝臣) 및 선비들이 정론(正論)을 주장하다가 반대파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림(士林)의 화 의 줄임말이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 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乙巳士禍)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첫 번째로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연산군 4년(1498) 7월에 《成宗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당상관(當相官)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史草)에 삽입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조선 성종 때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하여 지은 글. 문체는 굴원(屈原)의 초사체(楚辭體)를 모방한 운문체이다. 항우(項羽)가 초회왕(楚懷王;義帝)을 죽인 중국의 고사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뒤에 김종직의 문인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 글을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이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았다고 비방한 것이라 하여, 이것을 문제삼아 유자광과 함께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이로 인해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으며,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은 부관참시{) 이미 죽은사람의 관을 열어 다시 목을 치는 형벌.되었다. 또한 이극돈도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 고려·조선 시대에 사관(史官)이 시정(時政)을 매일 기록한 초안. 사관(史館) 혹은 춘추관(春秋館)에 소속된 사관이 기록한 이 자료는 시정기(時政記)라 하여 매세하기 위해 연산군에게 생모의 폐비·사사사건을 몰래 고하였다. 이에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를 모해한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를 죽이고 안양군(安陽君)·봉안군(鳳安君;熢)도 죽였다. 연산군의 포악한 행위를 꾸짖던 인수대비(仁粹大妃)는 화병으로 죽었다. 이때에 연산군이 윤씨를 왕비로 추숭(追崇)하여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祀)코자 할 때 대부분의 정신(廷臣)들은 이의가 없었으나 응교(應敎) 권달수(權達手), 이행(李荇) 등이 이를 반대하자 권달수를 처형하고, 이행을 귀양 보냈다. 이렇게 하고도 분노를 누르지 못한 연산군은 윤씨 폐사(廢死)에 찬성하였던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浚)·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 10명을 사형에 처하였고,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처하였으며, 이들의 가족들에게도 벌을 주었다. 이를 갑자년에 일어났다 하여 갑자사화라 한다.이전에 있었던 무오사화(戊午士禍)가 기성세력인 훈구파와 신진세력인 사림파의 대립·갈등의 소산이었다고 한다면, 이 갑자사화(甲子士禍)는 궁정 중심의 관료세력과 신진사림을 포함한 정부 중심의 관료세력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사림파 세력은 중앙 정계에서 거의 도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사림파는 잠재적인 성장을 지속해 갔다.세 번째로는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1519년(중종 14) 11월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재상에 의해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신진사류가 화를 입은 사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유교적 정치질서의 회복과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신진사류 중 조광조는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유숭조(柳崇祖지목된 남곤과 훈적에서 삭제당한 심정 등은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 홍경주와 손잡고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며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19년 11월 조광조 일파가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주도록 상계를 올렸다. 그 결과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곧 사사되었고 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 등은 귀양가서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그 밖에 김구(金絿)·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 등 수십명이 귀양가게 되고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형제 등은 파직되었다. 이 사화에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한다. 이렇게 기묘사화를 통해 대거 신진사류들이 제거됨으로써 사림파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 이후 집권 훈구파는 사림파의 개혁성과를 하나씩 제거해 가는 방향으로 정국을 이끌어갔다. 이에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은 좌절되었으며 이후 사림파는 향촌에 은거하여 그 곳의 세력기반을 다지는 잠재적 활동을 지속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기묘사화는 무오사화와 같이 훈구파와 신진사류간의 반목·배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정치적 음모가 유효하였던 정쟁이었다는 점과 갑자사화와 같이 정치적 투쟁목적과 이념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마지막으로 네 번째 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소윤(小尹)의 권력쟁탈전에 의한 사림(士林)의 화옥(禍獄)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이다. 중종비 신씨(愼氏)가 즉위 직후 폐위되어 후사가 없었고, 제 1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가 세자 호(岵;뒤의 인종)를 낳은 뒤 죽었다. 그뒤 왕비책봉문제로 조신간의 논란이 벌어졌으나, 1517년(중종 12) 윤지임(尹之責)의 딸이 제 2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로 책봉되어 경원대군(慶源大君;뒤의 명종)을 낳았는데, 이 두 계비는 같은 파평윤씨(坡平尹氏)였다.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이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다.
    인문/어학| 2006.05.02| 8페이지| 1,000원| 조회(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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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사]중국의 고구려사왜곡에 대한 한국의 입장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한국의 입장{Ⅰ. 서론Ⅱ. 본론1) 中國의 주장2) 韓國의 주장3) 대응방안Ⅲ. 결론1. 서론요즘 우리나라에 화제가 되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이다. 2001년 북한이 유네스코(UNESCO)에 고구려의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고 하자 중국을 등록을 지연시키는 등 사실상 방해공작을 펼쳤고, 2003년에는 집안(集眼)시 주변의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했다. 이 뿐 아니라 정부기관이 앞장서서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 중국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 직속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 2002년 2월부터 동북변강의 역사와 현상에 대한 연속 연구공정 프로젝트. 중국 동북 지방의 역사와 현실 문제 등을 다루는 국가 차원의 중점 프로젝트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동북공정에서 고구려를 비롯 고조선과 발해 등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의 주장과 이에 대한 한국의 입장과 반박하는 내용을 알아보려고 한다.2. 본론1) 中國의 주장고구려사가 중국의 역사 라는 중국의 주장에는 네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 첫째, 고구려는 독립국가가 아닌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건국 이래 북위, 북조 및 남조의 각 나라 정권에 공물을 바치고 조공과 책봉을 하는 군신관계였고, 이 관계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둘째, 고구려의 선조는 상(商)나라에서 분파 된 민족이다. 셋째, 고구려 멸망 후 대부분 고구려 유이민은 중국에 편입되었다. 넷째, 고구려는 활동의 중심이 바뀌면서 몇 번의 천도가 있기도 했으나 결코 한사군{) B.C.108~ B.C. 107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치한 4개의 행정구역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은 이런 네 가지 주장을 펼치고 있으나 조금만 자세히 알아보면 허점 투성의 주장이다.2) 韓國의 주장위에서 살펴 본 중국의 주장에 대한 한국의 반박도 만만치 않다. 첫째 중국에 대해 고구려가 공물을 바치고 조공을 했기 때문에 중국의 지방정권이란 주장에 대해서는 단지 외교관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고구려가 존재한 700여 년 간 중국에서는 왕조가 20여 개나 생겼다 사라졌다. 불과 몇 십 년 만에 없어진 왕조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종주국과 복속국,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조공과 책봉은 주국이 외국을 상대하는 관계의 한 유형이며, 중국적 세계질서를 규정하는 양식이며, 주변 국가가 중국의 여러 왕조와 맺는 외교관계의 한 형식에 불과하다. 만약 조공책봉관계를 문제삼아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으로 간주한다면, 여기에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 일본, 베트남도 해당되며, 고려와 조선까지 해당되므로 우리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모순이 생긴다.둘째, 고구려는 상(商){) 중국 고대의 왕조(B.C.1600~B.C.1046). 은(殷)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설 속의 왕조로 여겨지다가 20세기 은허(殷墟)의 발굴로 의해 실제 존재하였던 왕조라는 것이 밝혀졌다. 은나라 전기는 B.C.1600~1300년이고, 도읍은 은으로 바꾼 은나라 후기는 B.C.1300~B.C.1046년이다.의 한 민족, 즉 한족(漢族)의 한 갈래였다는 주장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중국은 고이족을 중국 전설상의 인물 고양씨의 후예로 설정하여 고구려왕조의 후예임을 주장하는데 그것을 근거로 제시하는 『일주서』는 문제가 많은 사서이며, 고이족은 기원전 10세기경 등장하는 종족으로 기원전 1세기에 건국된 고구려와 시기가 맞지 않는다. 고구려는 구려(句麗) 에서 비롯한 것이며, 고양씨는 전설상의 인물로서 단지 고씨이기 때문에 이 둘을 연결시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 일축한다. 고구려는 고조선이나 부여와 마찬가지로 예맥(濊貊) 계통이다. 예맥족은 일찍부터 돌로 무덤을 조영하였는데 고구려인들도 적석묘(積石墓)를 조영하였다. 고구려인들의 뿌리인 예맥 문화의 영향으로 고구려인은 압록강 중상류는 만주 대평원이나 초원지대와 구별되는 산지지대에 압록강변의 크고 작은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고구려인들은 만주 곳곳으로 진출한 다음에도 돌 다루는 솜씨를 활용하여 대평원 안쪽의 산지에 성곽을 쌓고 그 주변의 하곡(下谷)평지를 다스렸다. 광활한 만주 대평원을 발판으로 중국 대륙으로 진출한 요나 금과 뚜렷이 대비되는 면모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대제국을 건설한 다음에도 요동평원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한반도 남쪽 깊숙이 진출하였다. 고구려는 어디까지나 우리 조상인 예맥족의 문화를 밑바탕으로 삼아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또한, 고구려는 예맥 문화 기반과 정체성을 지녔기 때문에 중국 대륙의 선진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전통적인 지배이념이나 정치제도를 바탕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다. 특히 추모왕(동명성왕)이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이라는 건국 설화를 바탕으로 고구려가 천하에서 가장 신성하며 주변국을 복속 시키는 것은 당연하다는 독자적 천하관을 확립한 것은 고구려가 한족의 한 갈래인 고이족이라는 중국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셋째, 고구려 멸망 후 대부분의 유이민이 중국에 편입되고 일부만 신라로 이주했다는 주장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고구려 멸망 후 대부분 사람은 고구려의 장군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발해민이 되었다.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은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는데, 765(文王29)년 일본에 조문사를 보내면서 스스로를 고려대왕 대흠무 (高麗大王 大欽茂 )라 칭하는 것과 신라가 발해를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로 이해하여 발해를 칭하여 북국(北國)이라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넷째, 중국은 고구려의 중심이 한사군 유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데, 한사군은 일본의 한국의 고대사 왜곡을 위해 과장한 것으로 실제로 한사군은 낙랑군을 제외하고는 존속기간이 불과 25년 정도로 짧았으며, 한나라가 멸망한 220년 이후 낙랑군은 한나라와는 무관하였으며, 통치기구로서의 성격보다는 중국대륙과의 무역·통신 업무 등을 수행하는 상업적 기능의 조계지(祖界地){) 조약에 의하여 한 나라가 그 나라의 영토 일부를 한정하여 외국인의 거주와 영업을 개방한 지역와 비슷한 것임이 밝혀졌다. 이와 같이 한나라가 세운 한사군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중국의 주장은 주장 자체의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다.위에서 살펴 본 네 가지 주장 이외에도 고구려와 수·당간의 전쟁은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닌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의 통일전쟁이라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 주장에도 모순이 있다.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은 70년간이나 지속 되었으며, 수나라가 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왕조가 멸망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이것으로 보건데 이 전쟁은 고구려의 대륙정책과 수·당의 세계정책이 충돌하여 빚어진 국제전이었다. 더구나 여기에는 고구려와 수·당뿐만 아니라 일본과 돌궐까지 참여한 동아시아의 국제전쟁 이었다. 그리고 수·당과 고구려가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천리장성이다. 천리장성은 고구려와 당나라를 갈라놓는 국경선이었다. 중앙정권과 지방정권 사이에 이런 국경선이 존재할 이유는 없다.3) 대응방안우리의 대응방안으로는 첫째, 당면 과제인 유네스코에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다. 만약 중국과 북한이 동시에 채택될 때에는 중국이 종래 주장하던 일사양용론을 이용하여 고구려사의 중국편입을 더욱 활발히 진행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한을 도와 유네스코의 고구려 고분군 채택을 도와야 할 것이다. 보류된 이유 중의 하나인 보존상태 미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기술지원이나 시설지원을 통하여 관리상태를 호전시켜야 하고, 고분군 주변의 정비사업도 도와야 할 것이다.
    인문/어학| 2006.05.02| 4페이지| 1,000원| 조회(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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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역사 평가B괜찮아요
    일본의 역사사학과 03 김세영시대개관1. 구석기 시대 2. 신석기 시대 3. 야마토 시대 4. 아스카 시대 5. 나라 시대 6. 헤이안 시대 7. 가마쿠라 시대 8. 무로마치 시대시대 개관9. 아츠지 모모야마 시대 10. 에도 시대 11. 메이지 시대 12. 다이쇼 시대 13. 쇼와 시대 14. 헤이세이 시대구석기 시대약 300만년 전부터 B.C. 1만1000년 작은 혈연 집단을 이룸 사냥과 채집생활 뗀석기 이용신석기 시대(죠몬 시대)B.C. 1만년 전후부터 B.C. 4세기 무렵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작은 공동체 사냥과 낚시, 채집생활 아직 농경과 목축은 시작하지 않았다. 죠몬 토기 제작신석기 시대(야요이시대)처음으로 농경생활을 시작한 시대 소규모 취락을 이루었고 공동체 내부에서 계층 분화가 촉진되어 빈부차 청동기와 철기를 사용 정치력을 가진 수장(首長)이 나타나면서 원시적인 소국 야요이 토기죠몬 토기야요이 토기야마토 시대4C~7C 중엽 야마토를 중심으로 하는 긴키 지방의 정치 체제 내지는 국가체제 6C이후 정치 조직을 정비했으며 , 672년 임신(壬申)의 난을 계기로 율령체제를 세움 689년 아스카기요미하라령으로 천황(天皇)칭호가 정식으로 사용 한반도의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어 철 수입과 새로운 기술을 독점다이센 고분(大山古墳)스에키 토기아스카 시대592~710 수도가 아스카에 있던 1세기 동안 삼국의 정치 조직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씨성 제도에서 관사(官司)제도로 개편 스이코천황의 즉위 후에 개인능력에 따라 승진이 가능한 관료 조직을 형성하려는 움직임 관위 12계, 헌법17조아스카 문화중국과 한반도에서 불교를 비롯한 유교․도교의 사상이나 천문․역법․채색․제지 등 각종 선진 기술이 전해짐 6세기 무렵 유입된 대륙의 여러 문화가 불교문화로 종합된 점이 특색 사원이 많이 건립되고 조각․회화․공예에 뛰어나 불교 미술 작품이 나타남하쿠호 문화아스카 문화의 영향이 남아 불교문화가 중심이지만 견수사․견당사의 파견으로 직접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서 초당(初唐)문화의 영향도 강함 한자 사용이 진전됨에 따라 한시문(漢詩文)을 짓는 것이 유행, 와카(和歌)등의 문학 발전에 영향호류사호류사 금당벽화고류사 반가사유상금동 미륵반가사유상다카마쓰 고분벽화고구려 수산리 고분벽화고후쿠사 불두나라 시대수도가 헤이죠쿄(平城京)에 있던 710~794 702년부터 8차례에 걸쳐 견당사를 파견하여 중국의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 중앙집권국가의 정비와 더불어 지배 영역을 북쪽에서 남쪽까지 현저히 확대 신라, 발해와의 교류도 활발히 하였다.덴표 문화귀족 중심의 문화 견당사가 가지고 온 성당(盛唐)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 불교는 국가의 보호 아래 사상․학문은 물론 미술․공예까지 강한 영향월광보살입상조모입녀정창원헤이안 시대794년 헤이안쿄(平安京)로 수도를 옮겼을 때부터 정치․문화의 중심이 헤이안쿄에 있었던 약 400년을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 초기에 율령국가의 재건을 도모하고 민정 진흥에 노력하며 왕조의 기반을 확립 이후 후지와라가문은 대대로 섭정을 권력을 독점 시라카와 천황은 천황 중심의 정치 원정(源政)1)성립의 바탕 무사세력 대두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승리한 미나모토가문이 가마쿠라 정권을 성립고오닌·조오간 문화9세기 말에 섭정 정치가 시작될 때까지 약 100년 간 당풍(唐風)문화의 최전성기 천태․진언․양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 시기의 문화에는 밀교적 요소가 강하다후지와라 문화10세기 이후 12세기 무렵 일본적 특색이 강한 문화 894년 견당사(遣唐使)가 폐지된 이후 앞서 유입되어 있던 당의 문화를 일본 고래의 문화에 동화시켜 일본 특유의 문화를 발달 전대의 문화에 비해 역동감은 없지만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미적 감각에 특징이 있는 문화불화약사여래상여래좌상법화경 책자원씨물어가마쿠라 시대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연 1185년부터 1333년까지를 가마쿠라(鎌倉) 시대 1221년 바쿠후를 타도하기 위해 일으킨 조큐의 난 이후에 국가적 기능 대부분이 바쿠후(幕府)로 이행 1274년,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원의 침입과 도쿠소 체제에 대한 고케닌의 반발, 고케닌의 곤궁과 바쿠후의 대책 실패, 슈고의 강대화 등으로 인해 바쿠후의 지배는 흔들림 1324년 쇼츄(正中)정변, 1331년 겐고정변을 거쳐 1333년 멸망가마쿠라 문화우아하고 섬세한 조정의 귀족 문화와 신흥 무가의 현실적이며 실질적인 문화의 양자간의 뚜렷한 대조 ․원의 문화가 적극 도입되어 문화에 새로운 요소를 첨가 종교적 색채가 강해 문학․예술에서 불교적 세계관이 반영 문학에서는 헤이안시대의 공가 문화의 전통이 살아 있으면서 신흥 무사나 승려에 의해 새로운 작품이 창작금강역사상무착보살갑옷무로마치 시대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바쿠후를 연 1336년부터 1573년까지 무로마치 시대 남북조시대, 무로마치시대,전국시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북조를 통합하고 쇼군의 권위를 높이며 쇼군의 최전성기를 실현 하타케야마, 시바 두 집안의 싸움이 다이묘 세력 싸움과 뒤얽혀 1267년 전국을 양분하는 대란으로 발전 이 시대는 전국 다이묘들이 각각 지역 권력을 형성하고 서로 항쟁을 거듭하는 시기 1573년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바쿠후를 명말시키고 157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해서 권력을 잡고 아츠지 모모야마 시대를 염기타야마 문화학문과 문학에서 송․원의 영향 전통적 귀족문화와 신흥 무가 문화의 융합이 특징 금각사하가시야마 문화교토문화가 지방에 파급 상공업자나 농민 중에서도 새로운 문화가 생겨남 꽃꽂이나 다도가 유행 전국시대에는 서양에서 기독교가 전래되어 오다 노부나가의 후원아래 기독교 신앙과 문화가 발전 서구인으로부터 유입된 조총과 화약도 사회적으로 의의금각사금각사은각사석정아츠지 모모야마 시대오다 노부나가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고 입경한 1568년부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권을 잡은 약 30년 선교사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취해 사원의 세력을 억제하면서 선교사와 연관되었던 남만무역을 활발히 추구 1592년, 1597년 임진왜란 히데요시는 전국의 토지 조사 실시와 무기몰수령․해적정지령을 공포하여 병농분리를 추진하고, 수획량에 근거를 둔 다이묘 영지와 조세 수취 제도를 정했으며 중요도시를 직할화하는 등 근세 사회의 기초 만듬모모야마 문화호화롭고 웅장한 기운 서원(書院)양식의 호화로운 건물을 짓고 화가들이 웅대한 장식화를 그림 고전의 부흥과 다도(茶道)같은 풍류 문화 남만(南蠻)문화는 상하 각층에 널리 보급되어 이 시대 문화 특유의 이국적인 정서히메지 성회도 병풍에도 시대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된 1603년에서1867년까지를 에도 시대 대외적으로는 외국 침략을 받지 않고 쇄국 정책을 고수했으며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 개국까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 1854년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개국을 단행 사쓰마․조슈번이 동맹을 맺고 토막(土幕)으로 전향하여 제2차 조슈 정벌에서 승리해 에도 시대 끝남간에이 문화모모야마 문화와 겐로쿠 문화의 중간에 위치 공가․무가․상층 상공업자의 문화가 고전 부흥을 축으로 융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겐로쿠 문화상공업자가 문화의 주체 사치 풍조를 띤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양식이 문화로 표현 극장과 출판등의 대중매체가 성립가세이 문화에도 문화는 교토․오사카에 맞설 만한 문화 서민 문화도 눈부시게 발전우네메 카부키 조오시쿠타니 자기이로에 바이게쓰몬 챠쓰보오오타니 오니지가이후우 카이세이즈메이지 시대1868년부터 메이지 천황이 사망한 1912년까지를 메이지 시대 바쿠후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적 지배체제를 타파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정부 아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 서양 열강에서 제도․지식․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부국강병․식산흥업․문명개화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 입헌적 정치 체제를 실현 1910년 한국을 식민지로 강탈비모관음호반다이쇼 시대다이쇼 천황의 재위기간이 1912년부터 1926년을 다이쇼 시대 쌀과 생필품 가격의 폭등으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1925년 선거법을 개정하여 25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 민주화 분위기는 이 시대의 문화․국민 생활의 각 방면에 영향을 미쳤으며 서양풍이 모더니즘으로 대대적으로 도입 학문과 문학이 대중화 되었으며 여성의 사회 진출쇼와 시대쇼와 천황의 재위기간인 1926년부터 1989년까지를 쇼와 시대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일어난 특수경기가 피폐화된 일본 경제를 태평양 전쟁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켰고,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자 일본정부는 적극적으로 미국에 협력하면서 경제 원조와 차관 제공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대일 배상권 문제를 해결헤이세이 시대1989년 아키히토 덴노가 즉위하면서 헤이세이 시대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세계 속의 강대국으로 위상국립 경기장국립 극장{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05.06.10| 67페이지| 1,500원| 조회(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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