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조사현재 녹차음료시장- 웰빙 열풍에 부합한 녹차와 생수, 기능성 음료시장 성장,- 원산지 경쟁 가속화,- 후발 브랜드 속출.- 향후 성장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됨.녹차의 효능카테킨 - 성인병이나 피부 노화 등을 일으키는 ‘유해 성분’인 활성 산소의 생성을 억제. 체내에서 지방이 흡수되는 것을 막고 몸 밖으로 배출. → 성인병 예방, 충치 예방, 다이어트 효과 등.그린타임---------------2003년 3월 출시.중국 절강성 여린 차잎 사용.산뜻하고 깔끔한 이미지.국내 녹차음료 시장 점유율 2위 → 3위동원보성녹차--------------국내 녹차음료 시장 점유율 1위1996년 출시. 2003년 동원녹차 → 보성녹차로 브랜드 네임 변경 지역마케팅 성공녹차하면 ‘보성’ 이라는 이미지.보성이 키우고 동원이 담습니다.
백자에 대하여글을 쓰기에 앞서 지금까지 수업시간에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서, 또 슬라이드 사진들을 보면서, 인사동 방문도 해보고 교수님 전시회에도 가보면서 여러 가지 도자기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디자인과 관련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봤었다. 이번 레포트를 준비하면서도 도서관의 여러 책들도 찾아보고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미술관도 찾아가면서 또한 얻은 것이 많은 것 같아 오랜 시간이 걸렸어도 후회 되지 않을 것 같아 참 기분이 좋았다.조사해본 백자의 종류와 특징은 이렇다. 백자란 백토로 그릇의 형태를 만들고 그 표면에 투명한 유약을 입혀 구워낸 도자기를 말한다. 백자의 색감은 태토 및 태토에 입혀진 유약의 색으로 좌우되며 유약의 성분, 가마 안의 조건 등에 따라 눈같이 흰 설백색, 우윳빛이 도는 유백색 파르스름한 색을 머금은 청백색 푸른 기가 짙은 청백회백색등으로 제작시기와 지역에 따라 색조의 차이를 보이며 최상품 백자는 태토의 입자가 곱고 밀도가 강한 백토에 파르스름한 투명유가 입혀져 있다. 이러한 백자의 특징은 귀족들을 위한 우아, 섬세한 청자나 서민의 정서를 담은 분청사기와 달리 백자는 단정한 양식, 풍만한 양감을 지닌 자기라는 점이다. 순백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한 백자는 순백에 대한 조선인의 미감을 반영한 도자기였으며 조선 건국 이래 세종연간까지만 왕실에서 적용하였을 뿐 그 이후 상하계층을 막론하고 백자를 사용하였다. 백자의 양식의장은 중국자기의 영향을 보이는 청화백자도 있고, 같은 시대에 유행하던 분청사기의 장식적 요소를 보이는 청화백자도 있다. 백자의 제작이 변화를 겪게 되는 시기는 경기도 광주분원이 설치되는 1467~689세조 말 예종 초)년경이며 이때부터 분원관요시대에 들어가 백자는 대량생산. 분청사기는 쇠퇴하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100년 이상 백자침체기를 맞게 되었으나 숙종년간(1674~1720)부터 백자의 제작이 활발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되었다.청자와 백자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술품이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지만 막상 그 자기의 양 그리고 가마에 굽는 방식에 따라서 색이 결정된다. 가마에 구울 때 산소가 많아서 붉은 색 불꽃이 나는 것을 산화염이라 하고 시퍼런 불꽃이 나는 것을 환원염이라 한다. 청자는 철분이 약간 들어 있는 태토 위에 철분 1~3퍼센트가 함유된 유약을 바르고 환원염으로 구은 청록색 자기를 말한다. 종종 산화염으로 굽거나 황록색 유약이 들어 있어 황갈색, 회녹색이 나는 자기도 청자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9~10세기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 청자가 제작되기 시작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12세기에 이르러 선과 색이 뛰어난 고려청자를 만들어 내는 개가를 올렸다. 나아가 상감청자라는 독자적인 제품을 창조하기도 했는데, 상감청자는 표면에 문양을 새겨 도려내고 그 부분에 흰색이나 붉은 색의 태토를 메워 구워내는 독특한 기법으로 제작된 청자를 가리킨다. 이전의 도자가 의식용으로 한정되었던 데 비해 고려청자는 접시와 술잔 같은 실용적인 제품으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고려청자는 불교사회와 귀족문화를 기초로 생성된 것을 은은하고도 맑은 색과 유려한 선의 흐름을 특징으로 한다. 그에 비해 백자는 원만하고 절제된 선과 번쩍거리지 않는 순백색을 특징으로 하여 한층 실용적이고 서민적인 미감을 대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자는 순백색의 태토에 투명한 유약을 발라서 환원염으로 구운 반투명질의 자기이다. 유약을 입히기 전에 그릇 표면에 코발트색 안료로 그림을 그린 후 유약을 씌워서 구운 백자를 백자청화라고 하며, 붉은 색 흙을 상감기법으로 새겨 넣어 검은색 문양이 나타나게 되는 자기를 백자상감이라고 한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도자기 제작을 국가에서 관리하였기 때문에 기준에 합격한 백토만을 사용했고, 제작과정도 엄격하게 지켰다고 한다. 왕실용 자기를 구워내던 사옹원의 분원이 경기도 광주에 생기면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지방의 가마가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지금 남아 있는 광주지역의 가마들도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말 무렵부터 청자와 같이 백자도 제작되었 베이지색과 푸른 기를 띤 것으로 표면은 매끈하게 잘 정리되었다. 10세기 무렵까지 고려백자는 청자에 비하여 매우 적은 수량이었는데 해무리굽 백자가 소량 생산되었다. 기벽은 초기보다 두껍고 유약에는 대체로 미세한 빙렬이 있고 푸름이 감돈다. 11세기의 백자는 질이 초기보다 자화되지 않아 더 약하고 바탕흙[胎土]은 마치 잡물이 섞인 석고와 같다. 유약은 아주 얇게 발라졌으며 바탕흙과 유약이 서로 밀착되지 않고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고 초기보다 퇴보한 느낌이다. 12세기에는 주로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과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에서 소량의 백자를 생산하였다. 12세기 백자는 기형(器形)이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고려적인 세련미를 보이고 바탕흙 자화를 이루고 있다. 14세기 전반에는 기벽과 유약이 두껍고 표면발색은 푸른 기를 띠며 조금 거칠지만 새로운 백자시대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14세기 후반의 고려 백자 가마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록 석수동(石水洞)에 있으며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일대의 조선 초 백자 가마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명나라의 영향으로 명관요백자(明官窯白磁)의 흐름을 받아들여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용재총화》와 《광해군일기》에 왕은 어기(御器)로 백자를 사용한다고 하였고 《세종실록》에 명나라 사신이 백자를 요구한 사실이 여러 번 있는 것에서도 이미 조선 초기에 우수한 백자를 생산하였으며 백자에 대한 선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백자는 경기도 광주와 관악산·북한산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광주는 중앙관요로서 조선 백자 가마의 핵심이었다. 백자는 상·중·하품이 있었으며 상품백자는 갑(匣;개비)에 넣어 구운 것으로 형태와 질·색이 아주 우수한 것이며 이를 갑번(匣燔)이라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상품백자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中部面) 번천리(樊川里)와 경상북도 상주시(尙州市) 북추현리·이미외리, 고령군(高靈郡) 예현리 등 3개 지방에 4곳의 가마가 있다고 하였는데바탕흙색이 담회색이며 유약도 담청색을 머금어 표면색은 담담한 회청색이다. 유약은 미세한 빙렬이 있는 경우가 많으며 가는 모래받침으로 번조하였다. 전기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다.조선중기(1651∼1751)의 백자는 전기의 백자보다 더 엷은 푸른 기를 띠며 바탕흙도 순백이다. 표면발색은 아주 엷은 청색이므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순백색으로 보인다. 유약은 망상의 빙렬이 있는 경우가 많고 표면에 재티가 내려앉아 담록·담청의 작은 볼록점이 있는 것도 있다. 기형은 세장(細長)하여 준수한 모습이고 각이 진 형태가 등장하며 아가리[口緣部]도 부드러운 각으로 마감한 것이 많다.조선후기(1752∼조선 말)의 백자도 중기후반과 같이 상품백자 위주로 생산되었으며 후기 말 무렵에 중·하품백자가 병행하여 생산되었다. 바탕흙은 순백이며 문방구를 제외한 다른 그릇들은 기벽과 유약이 두꺼우며 유약에는 전기보다도 철분의 함유가 조금 많기 때문에 푸른기가 진하여 청백자로 잘못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고화도에서 자화가 충실하고 완벽하게 이루어져서 매우 치밀하고 견고하며, 유약에는 빙렬이 없고 기포가 많으며 바탕흙과 밀착되어 절대로 박락하는 일이 없다. 기형은 너그럽고 풍만하며 특별한 모양이 없고 몸체도 유려하거나 유연한 곡선이 없어 단정한 모양이다.달항아리 - 리움박물관이렇게 백자의 문양에 따른 종류를 조사해보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고미술 상설 전시를 하고 있는 리움(Leeum 삼성 미술관)을 지난 5월 30일에 방문했다. 현대미술에서 고미술에 걸친 여러 작품들이 전시 되어있었는데, 고미술 중에서도 일반 미술관에서는 보기 힘든 국보급, 보물급 도자기들을 볼 수 있어서 참 귀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조사하고 있는 것이 백자이니 만큼 백자가 전시되어있는 곳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는데 무게 있고 중후한 느낌의 도자기에서부터 아기자기한 장식용 도자기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위에 작품은 그 중 특히 멋지다고 생각되는 작품이다. 왕실용 백자를 제작하던 경기도 광주(廣州)의 백자가마에서 들어 붙인 다음 높은 온도에서 굽기 때문에 대개는 접합부분이 변형되어 의도한 둥근 형태가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 항아리는 일반적인 작품에 비하여 크기도 크고 몸체 중앙에 이음새의 흔적도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어 달항아리 중에 드물게 잘생긴 형태미를 자랑한다.아무런 장식이 없는 순백의 태토(胎土) 위에 투명도가 매우 높은 백자유가 씌워져 있으며 굽은 깎음새가 단정하고 세부를 꼼꼼히 다듬어 마무리하였다. 굽안바닥까지 시유한 후, 접지면의 유약을 닦아 내고 구웠으며 받침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표면에는 유면(釉面)에 형성된 작은 기공(氣孔) 사이로 간장과 같은 색이 짙은 액체에 의한 옅은 갈색의 얼룩이 스며 세월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으며, 몸체의 형태와 입과 굽의 처리에서 이 시기의 세련된 조형감을 볼 수 있다.백자로 제작된 명기 - 리움박물관이 작품은 위에 것과 대조적으로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어서 기억에 남는다. 백자철채 인물명기 일괄로 크기도 약 10센티미터 정도 밖에 안되는 작품들이다. 조선시대에 백자로 제작된 명기(明器)는 그릇과 인형으로 대별되며, 실제와 달리 크기를 매우 작게 만든 것이 특징이고, 조선중기에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부장용으로 제작된 인물모양의 명기는 보통 남녀가 몇 쌍을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현생에서 묘주(墓主)를 모시던 시종(侍從)으로 추정된다.이 작품은 세 쌍의 인물상 이외에 하나의 가마가 포함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인물상은 다리를 드린 여인과 상투를 튼 남자로 표현되어 있으며, 모두가 두 손을 앞에 모아 가마를 타고 승천(昇天)하는 묘주의 명복을 비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조각수법도 뛰어나 얼굴표정에 생동감이 넘치고 옷을 입은 모습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으며, 머리와 옷소매, 옷주름 등에 철사안료(鐵砂顔料)를 칠하여 세부를 강조하였다.가마는 의자의 앞뒤에 네 개의 긴 손잡이가 뻗어 있는 형태로 손잡이와 외면에는 철채장식(鐵彩裝飾)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가마를 남여(藍輿)라고 하는데, 3품의 승지(承旨)나 각 조(曹)의 었다.
한국 문화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에 대하여...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지 어느덧 61년이 지났다. 당시 몸 바쳐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고, 많은 분들은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제의 잔재는 우리 문화 속에 깊이 스며들어 지워질 줄을 모른다. 그동안 우리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제의 이런 잔재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씻기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문화를 짓밟으려는 일본의 계획이 얼마나 치밀하고 지독했는지 알 수 있다.어릴 적 많이 듣던 얘기로는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를 없애려고 몽땅 뽑았고, 아카시아를 심어서 다른 나무들은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5학년 때까지만 해도 국민학교라고 부르던 걸 6학년 되서는 초등학교라고 부르던 것도 생각난다. 그런데 이번 레포트 주제를 받고, 얼마나 많은 일제의 잔재들이 남아있나 조사해보니 정말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고 아무런 생각 없이 쓰던 말들, 어릴 적 재미있게 놀던 놀이 등 너무도 많은 곳에 일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내가 생각하기로 놀이 문화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는 매우 심각 한 것 같다.동네 아이들 여럿이 모이면 다같이 하던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놀이, 숨바꼭질 할 때 술래가 부르던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모래사장에서 두꺼비집 만들면서 부르던 ‘여우야, 여우야 모하니 헌집 줄게 새집 다오.’노래, 고무줄넘기 할 때 부르던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노래, 쎄쎄쎄 하면서 부르던‘아침 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기 저기’노래 등 무수히 많은 전래 동요나 놀이에서 일제의 잔재를 확인 할 수 있다. 또, 승부를 정할 때 자주 하는 '가위바위보'는 일본의 '장껭뽕'이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건너와 현재의 형태로 굳어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것들이 일제의 잔재라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 아이들을 일제의 정서 속에서 자라도록 한 식민교육이 그 성과를 발휘한 것이다. 나도 이런 것들을 알아보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고, 어릴 적 친구들과 재미있게 하던 놀이, 혹은 우리 부모님 세대 때부터 해오던 전통 놀이 정도로 생각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일제의 식민정치에 의한 것들이라니…….뿐만 아니라 우리의 청소년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에도 많은 일제의 잔재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교실마다 교탁 위에 있는 액자 속 태극기도 일제시대에 일장기 걸었던 것에서 유래되었고, 원래는 계양을 하는 것이 맞는다고 한다. 또 내가 다니던 중, 고등학교에도 있었던 선도부 역시 일제의 잔재이다. 월요일 아침이면 운동장에 전교생을 모아놓고 교장선생님 말씀을 듣던 애국조회도 일제시대에 황국신민 정신을 가르치던 '월요연찬'에서 그 이름만 바뀐 것이라 한다. 나는 사립 중,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남자만 있는 학교라 그런지 군대식의 분위기가 강했었다. 애국조회시간에 선생님께 인사할 때도 구호를 붙이며 거수경례를 했었고, 받아주는 교장선생님 역시 거수를 한 채 학생들을 한바퀴 훑어 본 뒤 팔을 내리면 차렷 자세로 돌아오던 것도 생각난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냥 선생님이 시키니까 당연히 하는 걸로 알고 있던 것이었는데 그것들이 모두 일제시대의 잔재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과연 우리의 선생님들은 이런 것들이 일제의 잔재였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교육제도는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고 7차 교육과정을 거쳐서 이제는 수시로 교육제도를 바꿀 수 있다는 수시개정체제로까지 발전되었다. 잘못된 교육제도를 바로잡고 현 상황에 맞게 고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전에 식민지 잔재의 청산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학생들의 의식만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이미 현재의 문화에 익숙해져있는 어른들을 교육시키기보다는 아직 일제의 문화에 그나마 덜 물든 청소년들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인 것이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일제 시대를 국가의 치욕으로 다루고 있고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 함을 교육시키고 있으면서, 정작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에서부터 이런 일제 잔재들을 방치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조국 통일을 이야기하고, 정치개혁이니 교육개혁이니 하는 것도 일제 잔재 청산 없이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격이 될 것이다.
IT Korea-KIECO 2006 를 ‘체험’ 하고나서...지난 15일 코엑스에서 열린 IT Korea-KIECO 2006를 다녀왔다. 오랜만에 하는 서울 나들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코엑스로 향했다. 집이 서울이면서 서울로 나들이를 간다는 것도 참 안타까웠다.관람을 하면서 내내 느낀 점은 우리나라 IT산업이 이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엘지의 102인치 PDP를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디자인을 배우는 학생의 입장으로 간 것이지만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조금 더 갖게 된 기회였다. 디자인적인 관점에서 생각이 난 것은 ‘체험‘이라는 단어였다. 수업시간에 sp, pop등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소비자가 직접 체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얼마나 구매효과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풀게 되었다. 직접 보고 만지면서, 비록 내가 제품을 사러 간 것은 아니지만 정말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생각했던 대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삼성과 엘지였다. 그리고 비교를 하게 될 수 밖에 없었는데, 부스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엘지가 더 깔끔하고 정리 되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삼성은 전체적으로 이미지가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도우미들은 어쩜 그리 한결같이 예쁜지 신기했다. 이런 요소들도 구매 욕구를 높이는데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삼성을 둘러보는데 중간에 홈씨어터를 설치해놓고 볼 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전체적인 전시 디스플레이와 맞추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조금 쌩뚱맞아 보였다. 집에서 실제로 보는 듯한 느낌을 더 살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삼성은 제품마다 그 제품 설명을 보여주는 작은 LCD액자를 놓았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어느 정도 관람하다가 교수님께서 미리 말씀해주신 파주 운정지구 'U-시티'에 가서 음료수와 과자를 먹으면서 조금 쉬었다. 나만 먹을 것에 빠져서 그랬는지 무엇을 설명하려 했던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편하고 친숙한 이미지를 바랬던 것이었다면 성공일 것 같았다.
Package Design-패키지 디자인이 곧 브랜드 전략인가.패키지 디자인이란?패키지 디자인이란 말 그대로 제품을 포장하는 디자인을 말한다.원래는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생산된 물품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한 포장의 목적도 중요시 되고 있다.서구 세계의 시장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기술적 진보는 거의 모든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산업 분야에서 시장의 포화와 제품의 과잉 공급 사태로 이어지고 있다.이러한 시장 조건에서 제품이 아무리 좋더라도 제품만으로는 기업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과거의 성공적인 마케팅과 판매 전략은 이제 어디에서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다른 기회를 찾고 새로운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패키지 디자인이 곧 브랜드 전략인가?어떤 제품의 성공은 그 제품이 체험 가능한 어떤 이벤트로서 제시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러한 점은 다양한 제품을 모아 놓은 고전적인 광장에서 벗어나, 눈부신 제품 성능을 추구하는 시장의 추세와도 일치한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상황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을 향하게 하지 못하는 기업은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이렇듯 우수한 제품을 제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적절한 환경에서 그런 제품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정확한 미적 상황에서 감성적인 호소력을 갖고 제품을 커뮤니케이션 해야 한다. 시장에서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요소로서 점차 중요성이 커가고 있는 분야가 포장 디자인이다. 포장은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우수한 디자인의 제품이 성공하느냐 여부도 제품 포장에 달려있다. 이런 점에서 디자인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으며, 성공을 위한 전략에 디자인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판매자와 소비자와의 접촉은 가장 먼저 포장을 통해 이루어진다.그리고 중요한 원칙 하나는, 첫인상이 나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많은 경우에 포장은 소비자의 자세를 결정짓고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준다. 예를 들어 모든 여성의 40퍼센트는 포장재가 없으면 향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후각과 미각도 지배하는 것이다.기업들은 제품에 맞는 포장 개발에 종종 실패한다. 그 결과 시장 경쟁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 디자인은 제품개발에 있어서 뿐 아니라 기업의 커뮤니케이션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제품 포장은 항상 제품이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사항과 동일하게 디자인되어야 한다. 제품이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사항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 이것이 패키지 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라 하겠다.사례1_피터 슈미트 스튜디오(함부르크)제품과 그래픽 디자인 전문가가 있는 것처럼, 포장 디자인 분야에도 전문가가 있다. 기업은 이 분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피터 슈미트 스튜디오의 줍포장 디자인 분야에서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가고 있는 전문 업체 가운데 하나가 부르크의 디자이너 피터 슈미트이다.{피터 슈미트 스튜디오의 아뽈리나리스그가 디자인한 포장의 제품 하나 정도는 거의 모든 사람이 갖고 있을 것이다. 밀크 초콜릿부터 시작하여 제이콥스 커피와 다인하트 스파클링 와인을 비롯해, 하다못해 평범한 생수 병에 이르기까지 그와 그의 디자인 팀은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독특한 디자인으로 의뢰 기업의 성공에 큰 힘이 되고 있다. 피터 슈미트 스튜디오의 디자인은 특히 패션과 향수업계에서 큰 호평을 받고 있다.피터 슈미트는 자신의 작업이 물건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수수하면서도 매력적인 방식으로 소비자를 유혹하여, 포장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보고 싶은 욕구를 일깨운다. 포장 자체가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 피터 슈미트의 디자인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적인 미학이나 특별한 스타일이 아니라 효과 자체이며, 이러한 점은 디자인상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매출 증가에서도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