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도덕의 기준인가? NO행복은 도덕의 기준이 아니다. 나는 행복이라 함은 인간이 어떠한 일을 행할 때나 행해진 결과에 대한 만족감 또는 자신의 감정의 즐거움, 쾌락이라고 생각하고 도덕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한다 . 인간은 자신이 더 좋은 환경에 주어지기를 열망하고 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 인간은 행복이라는 가치를 설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의 방향을 궁극적으로 행복이라는 가치에 맞추는 듯하다.이렇게 행복이라는 가치만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행복이 도덕의 기준이라면 남의 행복을 침해하더라도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 행동은 윤리적이라고 과연 할 수 있겠는가?아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그렇게 때문에 자신의 행복추구만을 위해서 살아 갈 수 없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 도덕이 만들어 졌다. 이 말은 다시 생각 해보면 서로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을 때도 있었다는 말이다. 즉 서로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부작용을 막기 위해 도덕 규범이 생겼다면 당연히 행복은 도덕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행복이 도덕의 기준이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도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 도덕의 기준은 행복이 아니라 선과 악(옳고 그름)이다. 선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직관적으로 인정되는 도덕적 의무나 원칙이다. -(우리는 서로 선에 대해 합의하지 않아도 '살인은 나쁘다. 도둑질은 나쁘다. 거짓말은 나쁘다."라는 것이 선이라는 사실을 인간이면 누구나 아는 것이다. 설사 한 사람을 살인하더라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꺼려하는데 이는 우리맘 속에 이미 선이 있기 때문이다.) 또 선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의 의무, 원칙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선은 지켜서 좋은 것이 아니라 원칙인 것이다. 결과이전의 의무 문제이다. 이는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겠지만 예외 없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이에 대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는 공리주의는 행복이 도덕의 기준이라고 한다. 이들은 도덕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든 사실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도덕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것, 즉 필요라는 것은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고 이 원함이 이루어지는 것도 행복추구라는 사실임을 강조한다. 도덕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서로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고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며 행복이 모든 행위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전체의 이익이 될 때는 도덕적인 일이고 그렇지 못한 일은 비도덕적인 일 인 것이다.이는 행동을 옳거나 그르게 만드는 것은 그 행동이 가져올 결과의 좋고 나쁨인데 이는 효용성에 따라 지나치게 많은 예외를 가져온다먼저 기준이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옳다. 그르다 라고 판단 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 누구나 보편 타당하게 인정하는 사실이 있어야 된다. 하지만 공리주의의 결과판단은 보편 타당한 중심이 되는 사실이 없다.A라는 사람이 어떤 행위에 의해 B라는 결과를 가져 올 때 그 B라는 결과가 한 사회에서는 좋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회 속에서는 나쁠 수 있다. 또 결과가 한 사회 속에서도 시대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 있다. 기준이 된다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아야지 다양한 상황들이 발생해도 공평하고 올바른 판단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런데 변화는 결과를 기준으로 본다면 상황에 따라 다른 그 판단은 일관성이 없다.예를 들어 한사람이 빵을 훔쳤다고 하자. 이 빵을 훔친 사람은 매우 굶주리고 있고 돌봐야 할 가족이 있다. 하지만 피해자는 부유하고 빵 하나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크게 손해 볼 것이 없다. 이런 경우 공리주의는 그 빵을 훔친 사람의 행동은 빵을 훔친 사람과 가족에게 행복을 줄 수 있고 잃어버린 사람도 큰 손해가 없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나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이 도덕의 기준이 옳다고 할 수 있을 까? 내가 보기에는 그 빵을 훔친 사실은 좋은 결과, 많은 사람의 행복을 가지고 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옳은 행동은 아니다. 다시 말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지 선은 아니다.우리는 그의 행동의 동기를 보고 그 행위를 이해하고 동정 할 수 있지만 결과 판단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빵을 훔친 행위의 결과 판단에서 그 사람의 행위는 비도덕적인 것이다. 만약 결과의 좋고 나쁨으로 도덕적 행위를 판단한다면 가난한 사람이 노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돈을 훔칠 경우 그리고 그 돈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액수가 큰 손해를 미치지 못한다면 그 행위가 단지 유용성의 결과로 따져서 도덕적 기준에서 선의 범주에서 속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이기적이다. 이기적이다라는 말은 타인과의 관계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이 모든 일이나 선택에 중심이 되게, 또는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처럼 자신이 중심이 되는 행동,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이기적인 행동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이고 싶고 더 나은 상황이고 싶고 자신의 선택의 결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괴롭고 슬플 수도 있어도 자신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기를 바란다. 비록 인간의 행동 중 이타적이라고 여겨지며 사회에서 이기적이지 않다라고 여겨지는 도덕, 윤리적 생각, 행위 또한 이기적이라 할 수 있다. 도덕, 윤리는 이 사회가 발전하고 규모가 커지면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원래 사회는 이타적인 마음이나 사랑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다른 동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시작된 것이다. 이 사회 속에서 이기적인 인간이 서로 자신의 이익이나 자유를 위하기 때문에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덕 윤리가 나타났지, 이타적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을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이익을 바라본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항상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나는 여기서 당연히 '아니다.'라는 답변을 할 것이다. '인간은 항상 이기적이다.'라는 말의 상대적인 말로 '우리는 항상 이기적이다.'라는 말이 있을 것이고 여기서 상응되는 말은 '항상 이기적이지 않지만 대체로 이기적이다.' '이기적이지도 않고 이타적이지도 않다.'라는 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타적이다'라는 말은 보편성을 가지지 못하고 '이기적이지도 않고 이타적이지도 않다.'라는 말은 자신에게만 국한된 표현인데 이는 타인과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항상 이기적이다.' '대체로 이기적이다.'를 중심으로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이에 대한 결론으로 '인간은 항상 이기적이다.'라는 말에 반문하겠다.인간의 행동 중 항상 이기적인 행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대체로 이기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인간의 행동 중에는 이타적인 면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첫 번째로 2001년 2월 26일 일본 도쿄 신오쿠보 역에서 사망한 故 이수현씨가 있다. 이는 신오쿠보 역에서 지하철을 타려다 위험에 빠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죽은 사람이다. 이수현씨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본인을 구하려 들었고 결국 자신이 죽었다. 또 몇 년 전 교통사고가 났을 때 아버지가 자식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의 몸으로 아이를 덮어서 자신은 죽고 아이가 산 일이 있다. 작년 8월 달 동해 해수욕장에서 초등학생 8명의 목숨을 살리고 죽은 2명의 고등학생이 있다. 또한 올해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자신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기관사와 많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승객의 목숨을 구하러 들어가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례가 있다. 이 사례를 항상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다.'라는 사실의 근거로 들겠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 죽은 이 사람들의 행동은 이타적인 행동의 사례들이다.여기에 대해 '인간은 항상 이기적이다.'는 측의 반박은 심리적 이기주의와 윤리적 이기주의로 대변한다. 윤리적 이기주의는 사람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즉 인간은 A라는 상황 속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B라는 행위를 자신이 하고 싶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비난이나 자신의 명예 도덕적 양심 때문에 해야한다는 말이다. 심리적 이기주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보편적이고도 경험적인 사실을 말한다. 인간의 행동에는 그러한 행동을 우발시키는 동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이수현씨 예에서 첫 번째로 이수현씨는 윤리적 이기주의에 의해 일본인이 처한 그 상황에서는 그 사람을 돕는 일은 당연하다고 교육받아 왔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자신의 양심의 가책이나 타인의 비난을 받을 수 도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 일을 하는 데에는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동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일로 자신의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보상금으로 어려운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 일이 좋고 기쁘기 때문에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일의 뒷면에는 자신의 이익이 되는 어떠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또 자식을 살리려다 죽은 부모의 경우도 자신이 죽고 자식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 자식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부모의 마음에는 항상 전제되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식이 죽고 자신만 살면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자책보다 자신이 죽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또한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다 죽은 고등학생도 도덕적 교육과 심리적 동기 유발 때문이라고 한다. 대구 지하철 역 승무원의 예도 자신의 직업이기 때문에 사회적 질책이 두렵거나 그 희생이 보상금으로 가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자신이 하고 싶어서 라고 말한다.하지만 이 두 주장들은 인간이 자기 중심적이라는 말에 맞지 않고 인간의 마음 중 우리가 거의 느끼지도 못하는 순간을 무시했다.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이를 구한 사람의 마음에는 이타적인 마음이 있었다. 이수현씨가 일본인을 보고 지하철로 뛰어든 것은 순수하게 이타적인 마음이다. 기차가 온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도 모르게 뛰어든 것이다. '사람이 철로에 빠졌기 때문에 구해야한다.' 그래서 뛰어든 게 아니다. 기차가 오는 순간에 뛰어들려는 마음, 그 짧은 0.01초에 그 사람을 구하려는 마음은 이기적인 마음이 있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구하는 이수현씨의 마음은 이타적인 것이다. 윤리적 이기주의에서는 그 뛰어든 무의식, 이타적인 마음도 우리가 사회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교육받은 사회의 교육의 산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어떠한 일에 순간적으로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수현씨가 일본인을 구하려고 뛰어들기 전 그 상황을 보았을 때는 이수현씨에게는 그 상황 말고 다른 상황을 생각 할 여유나 이성이라는 게 없다는 것이다. 교육 된 무의식이 아니라 본능적 무의식이나 쉽게 말해서 우리가 어떠한 펜을 보면 그 펜을 보는 0.01초 당시 그 펜에게 집중하지 그 펜 외 어떠한 것에도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수현씨가 그 사람을 구하려는 생각은 그 상황에 그 사람에게 집중한 시선이지 사회에서 교육을 받아서거나 당위로써 한일이 아니다.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교육이 당위의 결과이고 자동적인 결과이면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다 뛰어들어야 했다. 그리고 인간이 항상 자기 중심적이라면 자신은 술에 취하지 않고 빨리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었던 이수현씨는 더 긴급한 상황, 즉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서는 자신만 피했어야 했을 것이다. 인간이 항상 이기적이라면. 또 자신이 그 사람을 구하고 싶고 그것에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뛰어들었다, 보상금을 노렸다 등의 판단은 자기 중심적이라는 말에 맞지 않다. 자신이 하고 싶어서 기뻐서 한다고 말한다면 이미 그 속에는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데 자신이 죽고 나면 그 기쁨이나 만족을 어떻게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진정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자신의 만족이 될까? 윤리적 행동의 기쁨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는 윤리적 행동에 의해 오는 것이다. 행위의 동기유발도 자신의 이익을 전제로 하며 자신의 존재 속에서 찾는다. 자신의 존재가 없어진다면 자신의 행동으로 온 모든 이익 또한 자신의 이익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 '인간의 마음이 항상 이기적이다.'라면 시간 공간을 초월해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변할 수 있는가? 마음속 본연에 이기심이라는 자체는 변하지 않고 과연 절대적인가? 그렇다면 이타적이라는 말과 이타적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가? 인간은 항상 이기적이고 그의 행동의 모든 것이 이기적이라면 남을 생각하는 마음은 없어야 당연하다. 비록 윤리, 도덕 측면에서 우리는 윤리, 도덕적인 행동은 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행동이고, 이익을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야 되는데 우리는 왜 이기심이 깔린 이타적 행동이라 하는가? 인간이 항상 이기적이라면 이타적이다라는 말도 없어야하며 이타적이다 했을 때 떠올리는 이타적인 개념 또한 없어야 한다. 나머지 사례 또한 이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진리는 주관적인가?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진리는 주관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진리가 주관적인지 객관적인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국어 사전에는 진리란 '(1)참된 도리, 바른 이치 (2)어떤 명제가 사실과 일치하거나 논리의 법칙에 맞는 것(3)언제나 또는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이라고 나와있다.하지만 나는 이 국어 사전의 의미를 진리로 본다면 당연히 진리란 없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이 진리라면 인식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이 인식을 한다는 것은 경험에 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포함한 이 세상에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경험 또한 모두 변하고 상대적일 뿐이다.지금 진리라고 믿는 것은 없기 때문에 인간의 경험 또한 모두 변하고 상대적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은 지금 당장은 진리라고 믿는 우리 인간들의 믿음을 뿐이고 그 믿음들은 한 순간에 그 가치가 뒤 뒤바뀔 수 있다.그래서 진리란 없는 개념이다. 진리가 인식하는 내용이라면 인간의 경험에 의해 느껴진 경험체계(믿음)이다. 다른 사람의 진리가 나의 경험을 통하지 못하고 나를 인식시키지 못하면 그 것은 단지 피상적인 사실에 불구 하다. 즉 주관적인 믿음일 뿐이다. 여기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우리의 예로 들겠다. 진리라고 믿는 믿음 객관적이고 절대 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의 역사나 경험에 의해 이미 알게 되었다.근대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을 진리라고 믿었다. 그 때 사람들은 이 믿음을 철벽같이 믿었다. 하지만 믿음이란 주관적인 확신을 말한다. 그 확신이 많이 모여서 많은 사람들이 확신하면 시대정신이 되지만 그 확신 또한 주관적이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객관적일 수 없다.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인식했고 지금의 과학으로 사실인 것처럼 인정된다. (하지만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이 지동설도 진리는 아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발표하기 전 사람들은 철통같이 천동설을 믿었다. 그 당시 과학 (기존의 관념, 천동설)에 경험적 관념(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며 지구를 돈다.)을 대응시켜 사실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이 좀 더 발전해서 자연현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찰하자 지구가 돈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렇게 진리라고 믿어지는 믿음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이지 않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 ?믿는 믿음까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예전에 사람들이 믿었던 천동설이 깨어진 것처럼 우리가 믿고 있는 지동설도 깨어질 수 있다. 이것이 진리가 되려면 우리는 태양과 지구를 포함하여 우주로 벗어나 즉, 우리 은하를 벗어나서 지구와 태양을 동시에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지구가 태양을 돌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할 수도 없다. 지동설과 천동설이 사실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하나의 가설이다. 그리고 그 가설에 우리의 인식과 좀 더 객관성을 가진 것이라 믿는 과학적 사실을 대응해서 보면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맞는 말인 것 같기 때문에 사실인 진리인 것처럼 믿는다. 하지만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뀔 때와 같이 과학이 좀 더 발전하면 태양과 지구가 과학이 발전할 때까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또 다른 행성을 돌고 있다는 사실이 제기 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면 이 모든 과학까지도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 가설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는 절대적인 진리를 알아낼 재간이 없기 때문에 진리는 주관! 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 진리는 객관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진리라는 개념, 진리라는 말에는 변화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진리라는 말을 나타내는 다양한 언어는 가진 많은 나라들과 시간에 따라 다르며 진리라는 말속에 포함된 의미, 개념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라면 진리가 주관적인지 객관적인지 지금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습 또한 없어야 된다. 그래서 그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 무엇이 있는지 객관주의자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은 사실이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이 또한 우리가 흔히 옳다고 믿는 사실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의심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그 자체에 객관적 검증이 가능한 판단이 아니다. '모든 사람'속에는 내 경험이나 내가 믿을 수 있는 다른 어떤 사람의 경험도 미치지 못하는 먼 과거나 미래의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먼 미래 의학이 발전되어 신의 영역까지 도달할 수 있다면 먼 죽지 않는 인간이 나올 수 있고 획기적인 실험에 의해 영원히 죽지 않는 세포를 가진 복제인간이 미래에는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결코 우리의 감각적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실의 진위는 어떻게 가려 낼 수 있고 어떻게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그들은 판단이 사실에 일치 대응하면 진리라고 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판단 할 수 있는 표상 또한 관념 (바나나는 노랗다.)을 대상(바나나)에 대응시킨다. 그들은 우리가 바나나는 노랗다고 생각하는 그 바나나가 실제로 노랗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감각기관의 능력에 달려있다. 감각기관의 한계 내에서는 사실이고 진리인 것 같지만 과연 인간의 감각적인 한계가 변하지 않고 절대적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 이 주장이 올바른 주장이 되려면 관념과 대상의 일치 대응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다. 관념과 대상의 일치여부는 이들이 서로 비교되어야 되는데 이는 가능할까? 우리의 의식 속에는 '바나나는 노랗다.'라는 관념이 이미 고정되어 있다. 우리는 그렇게 확인한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바나나를 다시 한번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처음에 가졌던 '바나나는 노랗다.'라는 관념과 지금 다시 보면서 가! 지는 '바나나는 노랗다.'라는 새 관념이다. 우리는 이 두 관념을 비교할 뿐 관념과 대상 자체를 비교 할 수 없다. 이 때 우리는 바나나에 대한 또 하나의 관념을 가질 뿐이요 바나나 대상 자체에 도달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관념과 대상의 일치를 노리지만 관념과 관념의 일치를 확인하는데 그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이 표상주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체계, 더구나 옳다고 판단하는 체계에 비추어 볼 때 그 사실이 맞으면 참이란 것이다. 가령 '바나나가 노랗다.'라는 것은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과거의 경험적 지식의 토대가 있어야 가능하다. 우리가 가진 지각은 이미 잘 알고 있는 과거의 경험(지식 체계, 이미 통용되어 온 지식의 체계)에 비추어 보고 이해하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진리론이다. 이 지각은 기존의 판단 체계에 맞을 때 진리란 말인데 기존의 판단 체계의 진리성은 무엇에 의해서 확인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보다 앞선 기존의 판단 체계와 맞아야 하며 이 과정은 무한히 소급되어 더 이상 소급될 수 없는 제 1의 판단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이 제 1의 판단이 진리성은 무엇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는가? 이 세상의 어떠한 판단이나 사실도 객관적이고 절대적이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믿음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이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지 변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편성을 가질 수 있으려면 먼저 개인의 경험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믿음이 가는 확신들이 모이면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 자체에도 진리라고 믿는 ale음은 주관적인 확신을 말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믿음은 자신의 경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는 주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