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료 의식영국에는 ‘Knighthood(기사도)’ 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것과 비슷한 말로 호주에는 ‘Matehood(동료애)’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Matehood(동료애)’이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는 분명히 알 길이 없다. 옛 호주는 당초 죄수와 병사들, 다음으로는 ‘골드러시’에 의한 광부들의 유입 즉, 영국의 노동자층이 중심이 되어 사회가 구성되어 있었고. 거기에 관헌이 있었다고는 해도 영국 본토와 같은 귀족층은 아예 없었다. 따라서 영국 귀족들에게 사역되느니보다는 차라리 죄수는 죄수끼리, 군인은 군인끼리, 막벌이 일꾼은 막벌이 일꾼끼리 뭉쳐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아마도 ‘Knighthood(기사도)’가 아닌 ‘Matehood(동료애)’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멀리 고국에서 떠나왔다는 운명에 대한 공감이 동료의식을 낳고 그에 따라 ‘Mate’라고 하는 물씬 젖어 있는 듯한 친밀감을 낳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호주는 한마디로 말해서 영국 본국에 대한 사모와 더불어 발전해온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이곳 원주민은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강력하지도 않았고 그 수효도 적어 쉽사리 영토 지배권을 양도 받을 수 있었고, 퓨리탄 적인 엄격한 종교적 심정도 그 배경에는 없었다. 관헌의 지배는 퍽 강력했고, 지배층은 스스로를 영국의 일부라고 여겼으며, 피지배층은 이에 정면으로 대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동료끼리 서로 위로로써 안주했다. 악착같이 경쟁한다느니 보다는 동료간에 적당히 넘어가려는, 그러니까 좋게 말한다면 따뜻한 정, 나쁘게 말한다면 안이한 의식, 곧 ‘Matehood(동료애)’이 이때부터 호주인의 의식 속에 뿌리내리어 오늘날까지 사회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2. ‘Matehood(동료애)’ 정신의 뿌리귀족계급의 후예가 거의 없는 호주이므로, 귀족과는 인연이 먼 나라이지만 그러한 사회적 평등주의의 나라 일수록 국민들의 의식 속에는 명예에 대한 동경이 강하게 마련이다. 호주의 경우 영국 여왕에 의한 ‘Knight’ 칭호의 수여가 영국연방 국의 일원으로서 제도화 되어 있다. 귀족의 창설이라든가 또는 상류계층을 이룩해 보려는 시도와는 동일시할 수 없다. 호주의 많은 사람들은 ‘Knight’ 작위를 퍽 동경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단 그 영예를 얻게 되면 가문의 명예로 기뻐한다. ‘Knight’ 작위 수여 때에는 여왕이 칼로 가볍게 두 어깨를 두드리는 게 고작인데 이처럼 여왕의 칼이 어깨에 닿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일부러 영국으로 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호주인 일반이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일반인들은 어디까지나 ‘Mate’이며 또한 영국처럼 상류와 하류의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지도 않다. 고학력이나 가족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Mate’쪽에 가깝다. 그러나 그들은 ‘Matehood(동료애)’ 내지는 영국식 신사도를 익히고 싶어하는 심정이 늘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Ⅰ. 서 론성은 우리 사회에서 낮고 밤의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낮의 얼굴은 주로 터부와 금기로 포장되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엄숙함을 지닌다면, 밤의 얼굴은 금기와 억압에서 해방된 본능과 자유를 표출하는 모습이다. 겉으로는 성을 꺼리고 기피하지만 속으로는 성을 다른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성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고 성에 관한 언행을 삼가는 반면에 사생활의 일상 속에서는 성만큼 흥미진진한 화젯거리가 없으며 음담패설이나 소위 Y담 과 같은 외설을 은밀하게 즐기는 풍습이 있다. 또한 자신의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꺼리지만 다른 사람들의 성행 태는 일종의 스캔들로서 흥미 있는 화젯거리가 된다. 우리는 성을 양지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음지에 숨겨져야 하는 것으로 보는 한편, 성의 쾌락에 은밀하게 집착하더라도 남 앞에서는 성의 도덕성을 강조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성생활이 금욕과 쾌락사이에서 위선적이고 분열적인 상태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 한국인의 성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성문화의 이중성과 남성의 성, 여성의 성에대하여 그리고 성 자유화 속의 딜레마와 성 거래의 일상화 등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Ⅱ. 본 론1. 성문화의 이중성금욕주의가 낮의 성을 지켜주는 것은 밤의 쾌락추구적인 성을 오히려 더 자유롭게 방치할 수 있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밤의 얼굴은 낮의 얼굴을 간판삼아 그 정체를 은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의 낮과 밤의 얼굴은 한편 우리 사회에서 성이 윤리와 본능으로 대조되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 즉 성이 공적으로는 윤리의 차원에서 접근되는 반면에 사생활에서는 본능으로 취급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딜레마는 성의 일상 속에서 윤리로서의 성과 본능으로서의 성이 공존하는 것에 있다. 성윤리는 가족윤리와 사회윤리의 기본이 되는 것이라 한다면, 성을 윤리가 아닌 본능의 차원으로 방치하는 것은 결국 가족윤리와 사회윤리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매매춘을 필요악으로 인정해온 것은 바로 그 대표적인 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성학대나 성폭력 등의 충동을 유발하고 결국 인간적인 성 자체를 부정하고 파괴시킬 소지가 많은 것이다.이처럼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경직된 성도덕론과 무분별한 성 쾌락주의가 양극을 이루는 상황에서 개인들 간에 편차가 점점 더 심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또한 성에 대한 인식과 말과 행동 간의 괴리가 적지 않다. 청소년세대 내에서도 전통적인 정조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보수파와 성을 일종의 유희로 즐기는 자유분방의 개방파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혼재하고 있다.(김성애, 1996). 성을 아직도 더러운 것으로 기피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성에 식상하다고 토로하는 학생도 있다고 한다. 어떤 학생은 결혼해서 남편이 잠자리에서 테크니컬하게 해주기 못한다면 난 오르가즘도 느끼지 못한 채 죽어야 하나하는 망상을 하게 된다. 고 토로한다. 이처럼 개개인의 성지식, 성경험, 성인식의 차이가 너무나 클 뿐 아니라 각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오해나 편견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유외숙, 1996)성인들에게서도 성 개방에 대한 대조적인 입장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 기혼 남녀 직장인 대상의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성개방풍조가 만연해 있다 고 보는 사람이 67%를 차지하는가 하면, 반대로 우리 사회는 성의 자유로운 표출을 억압하고 있다 고 보는 경우도 61%에 해당된다.(한국성문화연구소, 1998) 이것은 성의 개방이나 자유에 대한 이해와 관점에서 차이가 적지 않을 뿐 아니라 금욕주의와 쾌락주의의 이분법적 잣대가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2. 남성의 성, 여성의 성우리사회에서 성문화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시키고 차별하는 사회제도 및 성별문화(gender culture)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결혼제도가 남성과 여성에게서 각기 다르게 적용되는 성윤리와 성규범을 형성시켜온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다.(장필화. 1997) 가부장적 성윤리는 여성의 성을 최대한으로 규제하는 반면에 남성과시하고 쾌락을 즐기는 소재로 삼는 반면에 여성의 성적 농담은 곧 여성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된다. 조선시대의 기녀제도는 남성이 주색을 즐길 수 있고 성적 쾌락의 상대를 아내가 아닌 외간 여자로 충족시키는 습관을 반영한 것이다. 즉 남성에게는 성이 여색을 즐기는 여흥과 외도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을 말한다. 남성의 자유로운 성생활의 습관은 남성의 성본능을 여성보다 몇 배 더 강하게 표출하도록 허용해왔고 그 결과 남성은 성본능이 강한 존재라는 사회통념이 형성되었다. 여성학자 밀레트(K. Millet)가 지적한 것처럼, 부권제 사회는 여성의 성적인 잠재능력을 파괴하고 왜곡시켰으며 여성의 성을 단지 남성에게 성욕의 배출구를 제공하는 것으로만 존재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남성의 경우에는 강한 성욕이 남성성의 상징으로 미화되면서 남성의 성욕은 사회적으로 규제할 수 없을 만큼 본능적으로 강하다는 신화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 신화는 남성으로 하여금 성욕이 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나 complex를 갖게 할 뿐 아니라 남성의 성본능을 강하게 표출하도록 자극하고 조장하는 매춘제도를 정당화 해온 것이다.한편 가부장제 결혼제도에서 정착되어온 성규범은 양성 간에 상호 대칭적인 속성을 지닌다. 이는 두 가지의 사회문화적 배경에 기인한다. 하나는 남녀간에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한 부계부권제의 결혼제도 하에서 남녀간의 성적 결합이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에 있다. 엥겔스가 지적한 것처럼 여성은 남성의 가장권에 경제적, 성적으로 예속된 존재가 된 것이다. 남성이 여성의 성을 통제하는 결혼제도는 여성의 성적 자율권을 박탈하는 것이며 성을 매개로 남성의 권력을 유지, 강화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또한 여성의 성이 남성의 지배대상으로 객체화되는 것은 남녀간에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성적 교류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배경은 가부장제하에서 규정되어온 성역할과 성적 정체성이 성문화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에 있다.성역할은 남성이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생각뿐, 난 성을 즐기고 싶다. 그렇지만 섹스를 할 때는 같이 즐겁지만 손해를 보는 것은 여자 쪽이라는 생각이 나의 행동을 억제중이다 (김성애, 1996). 순결은 후회 없이 살기 위한 필요조건 이라는 생각 때문에, 또는 임신의 위험성이나 순결을 잃은 이후에 버림받을 수 있다는( 따먹고 버린다. ) 피해의식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순결의 대가를 위해서 또는 순결상실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순결을 지키는 편이 낫다고 보는 것이다. 또는 성관계를 갖는 것이 연애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부담이 된다는 인식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처녀는 천연기념물 이라는 말이 젊은 세대에게서 유행한지가 벌써 오래된 것처럼, 실제로 미혼의 여성이 처녀로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한 여대생은 이렇게 반문한다. 남자를 한 번쯤 사귀어본 여자라면 처녀성을 갖고 있는 여자가 솔직히 몇 명이나 있겠어요? 자유연애가 늘어날수록 순결을 지키는 여성들은 자연히 줄어들 것이라는 지적이다.한편 여성의 순결과 대조를 이루어온 남성의 외도는 어떠한가? 가부장적 성문화속에서 외도는 특권으로 간주되어 왔다. 여자는 순결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에서, 남자는 외도를 얼마나 잘 즐기는가에서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사회분위기가 존재해온 것이다. 한 70대 할아버지는 돈만 있었으면 왜 바람을 안 피웠겠어. 라고 서슴지 않고 말할 정도이다. 젊은 남성들은 여성에게만 순결을 강요하는 이중적 성윤리의 전통을 적극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전통이 남성에게 물려준 성적 자유와 특권을 향유하는 것에서는 과거 세대와 별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젊은 세대는 과거 세대보다 외도를 즐기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 덜하다는 점을 주목하게 하는 조사결과도 있는데, 이는 젊은 세대에 올수록 외도는 성생활을 즐긴다는 측면에서 과거보다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성도덕의 문제에 앞서 성 쾌락을 중시하는 현대은 아내들의 성적 욕구를 감당해야 된다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느낀다는 지적이다. 이것은 종전까지 남성이 성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믿음과 자긍심이 거꾸로 피해의식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일반화되기가 어려운 것이며, 또한 남성이 현재 성생활에서 느끼는 부담은 성관계에서 종전의 남성우월주의가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것에 대한 과민반응일 뿐이다.그러나 성자유화나 성개방화에 있어서도 남녀간의 차이가 크게 나타날 만큼 성에 대한 남성의 적극성과 여성의 소극성이 여전히 대조를 보인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전화방, 섹스섀, 터키탕, PC통신 음란물, 음란 서적이나 비디오, 노출이 심한 음란극, 성인전용 극장의 허용에 찬성하는 비율이 남성의 경우에는 70%-80%이상의 비율을 나타내는 반면에 여성의 경우에는 20%미만이 찬성의 입장을 표시한다(한국성문화연구소, 1998). 여성에게 부과되는 전통의 굴레와 엄격한 사회적 규제는 여성으로 하여금 성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여성은 자유연애를 즐기면서도 미혼모가 되고 그로 인해 예기치 않은 피해들을 입게 될 것이라는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며, 기혼여성은 애인을 갖고 싶어도 바람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질타와 갖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우려가 앞선다는 것이다. 남성은 미혼부가 되었는지도 모를 만큼 직접적인 책임과 피해가 따르지 않고 따라서 자유로운 성관계에 대해 피해의식이 없다는 점에서 여성의 경우와 큰 격차가 있다. 또한 성 시장은 남성을 겨냥하여 수많은 성 자극제를 제공하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개방의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다. 성개방의 전반적인 추세가 종전까지 성문화에서 나타난 여성과 남성간의 격차를 결코 줄어들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성 거래의 일상화우리는 성의 시장거래와 대중소비가 날로 늘어나는 일상 속에서 살고 있다. 어린이나 어른을 막론하고 모든 연령과 계층의 소비대중이 만화, 컴퓨터 까?
INDEXⅠ.서론Ⅱ.본론ⅰ) 파리의 역사ⅱ) 파리의 여성ⅲ) 여성의 생활로 알아본 프랑스인 들의 생활ⅳ) 파리의 명소를 통해 알아본 그들의 관광산업노틀담 대성당개선문몽마르트르 언덕뽕삐두 센터루브르 박물관에펠탑Ⅲ.결론【끝으로 시대별로 알아본 프랑스 역사이다.】Ⅰ.서론프랑스하면 생각나는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 다양한 것들이 나올 것이다. 이때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들이 개선문, 몽마르뜨 언덕, 노틀담 성당, 패션의 나라, 쁘레따 뽀르떼 패션쇼, 에펠탑 그리고 파리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 중에서도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자 문화의 도시, 패션의 도시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도시로써 프랑스 = 파리 라는 등식이 성립이 될 정도로 앞서 말한 것들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프랑스의 대표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단어 격인 파리를 통해서 프랑스 역사, 사람들, 그들의 생활, 생각하는 것, 관광산업 등 프랑스의 전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Ⅱ.본론ⅰ) 파리의 역사기록에 의하면 켈트족의 파리지(Parisii)라는 부족이 기원전 300년 경에 쎄느강의 섬들에 정착했다고 한다. 기원 후 52년 시저에 의해 갈리아 지방이 정복되면서 파리는 로마의 속주가 된다. 당시 파리는 루테시아(Lutecia, 불어로는 Lutece)로 불리웠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파리는 상당히 팽창을 했다. 정복자들은 로마식으로 도시를 세웠다. 광장과 사원, 그리고 재판장을 포함하는 포럼이 높은 곳에 위치했고, 지금도 남아 있는 목욕탕이(그 건립연대는 2세기말에서 3세기 초로 추정됨) 포럼 주위에 세워졌다. 파리는 BC 3세기말에 센 강의 한 섬(지금의 시떼 섬)에 있는 취락이었으며, 파리 시 부족으로 알려진 갈리아 부족이 거주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 취락의 최초 이름은 루테티아(라틴어로 '강 중류의 거주지'라는 뜻)였다. 로마인이 들어왔을 때 파리 시 부족은 자체의 금화폐 주조소를 갖고 있을 만큼 부유했고 조직화되어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전기(BC 52)에생상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오스만은 이런 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첫번째로 교통망을 조직하고, 둘째로 도로망 이외에도, 물을 계속 흐르게 하고, 하수구를 설치하며, 가로수를 심어 청결한 도시를 만들고, 셋째로 여러 시설을 지었다. 시청과 구청들, 도서관, 교회, 극장, 공공 시장 등을 전 도시에 고르게 분포시켰으며, 파리의 구(arrondissement)를 20개로 정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파리의 역사를 알아봄으로써 우리는 프랑스 역사를 엿볼수 있었다.ⅱ) 파리의 여성프랑스 여성들이 성적으로 상당히 문란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프랑스 여성보다 더 보수적인 여성은 드물 것이다. 12세기 루이 왕조 시대의 화려한 궁중생활과 문란했던 정부제도를 읽고 지금의 프랑스 여인들도 그러리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들은 결코 문란하지 않다. 길가는 파리젠느에게 윙크 한번 해서 당장 따라오리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그것은 환상이다. 프랑스 여성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쉽지 않다. 한 여성과 데이트를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딸들에 대한 프랑스인 들의 감시는 대단하다. 중세적이라고나 할까? 프랑스 가정에서 딸들의 외출은 잘 허락되지 않으며 허락할 경우에도 귀가 시간은 철저히 지키게 한다. 파리보다 딸들을 더 안전하게 키울 수 있는 곳은 없다고 생각된다. 파리의 기숙사는 아직도 남녀가 엄격히 구별되어 있다. 남, 여 기숙사가 한데 있는 곳이 드물다. 그리고 기숙사의 문은 밤10시면 굳게 닫혀진다. 학생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간까지는 돌아와야 한다. 오페라나 음악회가 있어 늦을 때는 원장이나 사감으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아야 늦게 들어올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엄격한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당장 추방이다. 프랑스의 여학생 기숙사가 이렇게 엄한 것은 기숙사 운영자가 대부분 수녀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파리라고 해서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자유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한 자유로움, 개방적, 이란 단어 뒤에 살리는데 주력한다. 그들은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 변화 있는 헤어스타일과 화장, 옷차림으로 남편들을 즐겁게 해 준다. 프랑스 여성은 32%가 분을 바른다고 한다. 그런데 영국 여성은 72%, 덴마크 57%, 벨기에 60%, 네덜란드 48%, 루즈는 프랑스 여성의 65%가 바르는데 비해 스웨덴 77%, 영국 75%, 덴마크 69%, 네덜란드 69%, 스위스 62%. 이것만으로도 프랑스 여성이 화장 면에서 얼마나 검소한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이렇게 여성들이 생활을 통해서 프랑스의 여성들의 위치 와 생각, 맞벌이가 보편적인 프랑스 가족의 생활상, 프랑스인의 검소함, 등을 알 수가 있다.ⅳ) 파리의 명소를 통해 알아본 그들의 관광산업{노틀담 대성당씨떼섬에 한 가운데 위치한 이 성당은 1163년부터 1345년까지 200 여년간 3세기에 걸친 대공사 끝에 건축된 프랑스 고딕예술의 최고 걸작품이다. 노틀담 대성당은 19세기 비올레-르-뒤크(Viollet-Le-Duc)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오랜 동안 프랑스 역사의 중요한 증인이 되어 왔다. 일몰 후 세느강에서 바라보는 성당의 모습은 저절로 감탄사가 나올 만큼 아름답다. 노틀담 성당은 프랑스의 대 문화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꼽추'의 배경이 되어 우리에게 더욱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성당 앞 광장에는 프랑스 거리 측정의 기준이 되는 zero point가 표시되어 있다.{개선문나폴레옹 시대의 상징물인 개선문은 1806년 프랑스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나폴레옹 대왕의 명에 따라 건축되기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선문의 증축은 여러 차례 중단되었고, 다시 시작하기를 되풀이하면서 1836년 루이 나폴레옹 시대에 완공되었다. 정작 나폴레옹은 1840년 그의 시신이 개선문을 통과하였을 뿐 이 건축물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개선문에는 나폴레옹 군대의 승전도가 부조로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고문서들이 보관된 박물관이 있다. 엘리베이터로 개선문 위에 올라가면 파리 시내가 한 문에 들어온다. 개선문이 있는 에뚜왈 받았다. 하지만, 퐁삐두 문화센터는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전이 열리는 국립 현대미술관, 도서관, 영화관, 각종 전시실, 회의장 등이 있어 파리 시민들뿐만 아니라 이 곳을 찾는 전 세계인들의 문화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은 1950년대 이후의 피카소를 비롯한 유명화가들의 그림들이 많이 소장되어있다. 센터 앞의 광장에는 거리의 예술가들이 펼치는 각양각색의 공연을 감상하는 젊은 여행객들로 항상 붐비고 있다.{루브르 박물관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최대의 박물관이다. 처음엔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지어진 성채였는데 1190년에 지어졌다. 그 후 건물은 증개축이 이루어졌고 화려한 궁전으로 꾸며졌다. 루이 14세가 초호화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옮겨간 후 루브르는 왕궁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중앙 미술관'이라 명명되고, 일반인들도 왕들이 소유하고 있던 소중한 예술품들은 볼 수가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이 급격히 늘어난 때는 나폴레옹 대왕 때이다. 그는 정복하는 곳곳에서 수많은 전리품을 가져왔고, 지금 소장하고 있는 많은 예술품들도 그 당시 가져온 것들이 많이 있다. 지금 현재는 25만점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미테랑 대통령은 루브르 박물관을 전문화 현대화 그리고 궁전 전체를 박물관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개 보수 작업을 지시하였고, 건물 일부를 사용하고 있던 재무부 공관을 이전하고, 광장 중앙에 지하입구로 통하는 유리로 된 피라미드를 건축하도록 추진하였다. 중국계 미국인인 이오 밍 페이에 의해 설계된 이 유리 피라미는 이전의 여러 곳의 박물관 입구를 하나로 통일 시켰다. 초기에는 초현대적인 유리 구조물이 과연 고풍스런 박물관 건물과 어울릴까 논란도 많았으나, 지금은 유리 피라미드 자체로도 기념 촬영의 장소가 되어버렸다.{에펠탑프랑스 혁명 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열린 파리 국제 박람회에 선을 보이기 위하여 1889년에 완공된 임시 구조물이었다. 1909년경 잠시 해체될 위기에 놓였었으나, 지금은 에펠탑이 없족(남), 부 르군트족(동), 프랑크족(북), 켈트족(서)이 정착.481년 : 프랑크(Franc)족의 클로비스가 골 지역을 통일, 메로뱅 왕조를 세움. 오늘날 프랑스 의 기원.511년 : 클로비스의 죽음과 함께 왕국이 오스트라지, 뇌스트리, 부르고뉴로 3분됨.687년 : 페팽(P pin de Herstal)이 3국의 왕이 됨. 732년 : 페팽의 아들 샤를르 마르텔 (Charles Martel)이 프와티에 지방의 사라센족을 몰아냄.751년 : 페팽 르 브레프(P pin le Bref)가 메로뱅 가의 마지막 후손을 제거하고 카롤랭 왕조 를 세움.800년 : 카롤랭 왕조의 샤를르마뉴(Charlemagne)가 로마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 칭호를 받음.843년 : 샤를르마뉴의 손자들(루이 1세의 왕자들)의 영토 싸움 끝에 베르덩(Verdun) 조약으 로 왕국이 3분됨. 이후 서부 프랑스(Francia Occidentalis)를 차지한 샤를르 르 쇼브 가 프랑스의 초대 왕이 됨.911년 : 노르망디 지방에 바이킹족이 침입하여 정착.987년 : 위그 카페(Hugues Capet)가 왕으로 추대되어 카페 왕조를 세우지만 로베르 2세, 앙리 1세, 필립 1세에 걸쳐(1108년까지) 파리 부근의 작은 영토만을 지배함.12세기 : 루이 6세와 루이 7세가 영토를 넓히고 봉건 영주들을 제압하여 왕권을 강화함. 중 세 봉건제도 의 정착. 종교(기사도, 십자군 등), 경제, 도시의 발달. 문화와 예술의 개화. 부르주아 계급의 형성. 프랑크족이 게르만어를 버리고 피지배민족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함. 이후 1328년까지 왕조가 유지됨.1180-1223년 : 필립 오귀스트의 통치기간. 영국으로부터 노르망디와 앙쥬 지방을 탈환함. 영 국, 플랑드르, 독일이 맺은 부빈동맹(1214년)에 저항함.1226-1270년 : 루이 9세(생 루이)의 통치와 함께 전제정치의 절정기. 프랑스 사회의 안정. 왕실의 행정기구와 정부 완성.1285-1314년 : 필립 4세 르 벨의 통치로 군주정치의 혁신. .
1. 개발 배경특정 application을 UNIX/LINUX와 Windows 상에서 클라이언트/서버 형태로 구현한다. 이 때 구현되는 서버와 클라이언트는 각각 서로 다른 플랫폼을 사용한다. 이때 가장 적합한 프로그램은 채팅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여 채팅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채팅 프로그램을 모르고서는 네트워크 프로그램을 말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C 언어로 네트워크 프로그래밍을 배웠기 때문에 이것을 JAVA로 확장 시켜 개발 해 봄으로 해서 C 언어뿐만이 아니라 여러 다른 언어를 만나도 서버/클라이언트 모델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당황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고 프로그래밍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언어를 JAVA로 선택하였다.2. Algorothm[ 채팅 시스템의 전체 구조 ]ServerChatServer 객체를 생성 하여 ServerSocket 생성과 Vector를 관리한다.Serversocket을 생성한다.socket 생성후 accept()로 접속을 대기 한다. 이때 port번호는 55091 이다.접속 클라이언트 객체를 생성하여 thread를 돌린다.Client 객체 생성시 먼저 메시지를 문자열 스트림으로 처리해서 버퍼에 입출력 할 수 있도록 객체를 생성하고 생성자를 호출한다.접속한 사용자의 id를 받아와 벡터에 저장한다.유저 id와 “ : ” 메시지를 한 줄씩 읽어 들여 모든 접속해있는 사용자들에게 보내준다.나갈 때는 사용자의 id를 받아와서 나갔다는 메시지를 출력하고 socket을 close해준다.Clientinterface구현 부분은 사용자가 메시지를 입력할 부분과 모든 사용자들이 입력한메시지를 볼 수 있는 부분으로 나눈다.- 사용자가 메시지를 입력하는 창은 아래쪽에 위치 시키고 모든 사용자들의 메시지를 볼 수 있는 부분은 가운데로 정렬시킨다.- client는 socket을 생성하고 자신의 id를 write하고 버퍼를 비워준다.- 이 때 IOException가 발생하면 " connected fail "를 출력해준다.- St 1(2) client 2(3) client 1 의 대화창client 2 의 대화창ServerSunOS 5.8login: cse96Password:Last login: Thu Jun 13 21:31:36 from 203.253.67.120Sun Microsystems Inc. SunOS 5.8 Generic February 2000H.U.F.S. Computer Science and Enginerring Solaris Server[cser:/export/home/cse96]cd np[cser:/export/home/cse96/np]cd pro[cser:/export/home/cse96/np/pro]cd b[cser:/export/home/cse96/np/pro/b]dirtotal 18drwxr-xr-x 2 cse96 512 Jun 13 19:10 .drwxr-xr-x 5 cse96 512 Jun 13 19:59 ..-rw-r--r-- 1 cse96 507 Jun 13 19:10 ChatClient$1.class-rw-r--r-- 1 cse96 755 Jun 13 19:10 ChatClient$SendMessage.class-rw-r--r-- 1 cse96 3286 Jun 13 19:10 ChatClient.class-rw-r--r-- 1 cse96 2873 Jun 13 19:10 ChatClient.java-rw-r--r-- 1 cse96 1862 Jun 13 23:23 ChatServer.class-rw-r--r-- 1 cse96 2703 Jun 13 23:23 ChatServer.java-rw-r--r-- 1 cse96 1839 Jun 13 23:23 Client.class[cser:/export/home/cse96/np/pro/b]javac ChatServer.java ( server compile[cser:/export/home/cse96/np/pro/b]javac ChatClient.java ( client compile[cser:/export/ho료후훗~! 님이 나가셨습니다 ( client 2 이 exit 입력하여 종료4. Conclusion이 프로젝트를 진행 하면서 socket programming를 확실히 이해 할 수 있게 되었으며, server / client model을 처음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compile은 되는데 runtime 시 알 수 없는 예외가 발생하면서 실행이 되지를 않아 얘를 먹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말끔히 해결을 하였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server를 UNIX에서 돌리고, client를 window에서 실행 시키는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그런데 server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ip 주소와 사용자 id를 프로그램을 수행시키는 것과 동시에 입력 창에 써 주워야 하기 때문에 실행은 도스에서 실행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일단 프로그램이 실행이 되면 채팅 창은 윈도우에서 실행이 되므로 단지 실행시켜주는 일만 도스에서 한다고 할 수 있다.이 프로젝트를 마무리 하면서 네트워크 프로그래밍 쪽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여러 가지 많은 option들을 추가해 나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네트워크 프로그래밍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이 프로젝트 주제를 선택했던 이유인 네트워크 프로그래밍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려던 것을 충족했다고 본다. 그것은 완성도에 내가 초점을 맞췄던 것의 이유이다.5. Appendix. Source code list source(1) Server[cser:/export/home/cse96/np/pro/b]cat ChatServer.javaimport java.io.*;import java.net.*;import java.util.*;public class ChatServer {private ServerSocket serverSocket;private Socket socket;private Socket server;private Vector v = new Vector();public void message(String ;client.closeSocket();boolean b = v.remove(client);System.out.println( userId + " 님이 나가셨습니다. ");}public void setServerSocket(int port) {try {serverSocket = new ServerSocket(port);System.out.println( " 대기중 " );}catch(IOException e) {System.out.println( " 서버 소켓 생성 실패 " );}while(true) {try {socket = serverSocket.accept();Client client = new Client(socket, this);addClient(client);client.start();}catch( IOException e ) {System.out.println( "클라이언트 접속 실패 " );}}}public static void main(String args[]) {int port = 55091;ChatServer cs = new ChatServer();cs.setServerSocket(port);}}class Client extends Thread {private Socket server;private ChatServer cs;private BufferedReader br;private BufferedWriter bw;private String userId = "";public Client( Socket s, ChatServer cs ) {this.server = s;this.cs = cs;try {br = new BufferedReader( new InputStreamReader(server.getInputStream()));bw = new BufferedWriter( new OutputStreamWriter(server.getOutputStream()));userId = br.readLine();}catch (IOException e){}}n");bw.flush();}catch(IOException e) {}}public String getUserId() {return userId;}public void closeSocket() {try {br.close();bw.close();server.close();}catch(IOException e) {}}}(2) Client[cser:/export/home/cse96/np/pro/b]cat ChatClient.javaimport java.io.*;import java.net.*;import java.util.*;import java.awt.*;import java.awt.event.*;public class ChatClient extends Panel {private TextField tfMessage = new TextField();private TextArea taContent = new TextArea("Jabook Chatting! (나가시려면 'exit'를 쳐주세요)", 30, 50);private Socket client = null;private BufferedReader br = null;private BufferedWriter bw = null;public ChatClient(String ip, int port, String id) throws IOException {this.setLayout(new BorderLayout());this.add("Center", taContent);this.add("South", tfMessage);taContent.setEditable(false);tfMessage.addActionListener(new ActionListener() {public void actionPerformed(ActionEvent e) {tfMessage_actionPerformed(e);}});try {client = new Socket(ip, port);br = new BufferedReader(new InputStreas);
Ⅰ.서론요즘 한창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고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등 남북 화해 무드가 일어나면서 통일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고 있다. 이런 사회적인 현상과 맞물려서 통일 된지 10년이 된 독일의 통일을 한번 되짚어 보고 독일통일과 비교해서 우수한 정책을 받아들이고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나았던 일들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통일의 방향 등을 여러 자료들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겠다.Ⅱ.본론1. 독일통일의 요인첫째,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국제환경의 변화이다. 독일통일은 처음부터 유럽이라는 곳 속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 각 국이 독일통일에 우호적이지 않고서는 통일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것은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성격과도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또한 반도라는 특수한 지리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또한 그 주변에는 중국 , 일본 , 러시아 등 이 있으며 이들 나라들 또한 자기들 나라의 이익에 우선해 우리나라의 통일문제를 바라보고 있고 미국의 견제 또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현 상황 또한 통일전의 독일과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의 국제적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정책과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동구 공산권 국가, 특히 헝가리의 국경 개방은 동독의 민주혁명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미국의 역할을 들 수 있다. 미국은 시종일관 독일통일을 지지함으로써 유럽 및 인접국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사실로 봤을 때 우리나라 또한 주변 열강들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둘째, 동독주민들의 민주혁명과 조속한 통일결정을 들 수 있다. 동독주민들은 서독으로의 탈출과 반정부 시위를 통해 동독정부를 압박했으며,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조속한 통일의 길을 선택했다. 독일통일의 실질적인 원동력은 동독주민들에게서 나왔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통일로 가기 위해선 외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국민들의 힘으로 이루어 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다.셋째, 분단 40년 간 동서독은 정치적으로 분단되어 있었지만 경제·사회적으로는 한 번도 교류가 끊어진 일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이제야 겨우 남북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회적 분위기를 계속 꾸준히 이어가야지 조급하게 서둘러선 안될 것이다.넷째, 서독 체제의 우월성을 들 수 있다. 서독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법치주의 국가로서 확실하게 자리잡았으며,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와 사회복지를 적절히 결합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국가가 되었다. 이는 동독주민을 끌어들이는 강한 흡인력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또한 현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계속적으로 꾸준히 북한 주민들이 알 수 있게 알려 주민들의 체제변화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게 필요 할 것이다.다섯째, 독일의 연방국가 적 전통을 들 수 있다. 독일은 역사적으로 지방분권국가였기 때문에 지방정부가 연방정부에 가입하거나 탈퇴하는 경험을 많이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서독 기본법에도 동독지역의 연방가입이 가능하도록 그 길을 열어 두었다. 우리나라의 통일방안에도 연방제와 같은 것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하지만 이런 독일의 통일에서 우리는 참고하고 도입해야 할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실질적으로 독일통일 10년이 되는 지금 독일은 통일에 따른 부작용이랄까? 부담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경제적인 면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2. 베를린 장벽 붕괴 후 10년 - 통일 독일의 경제독일 통일 10년이 되는 지금 독일은 동독지역의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실로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동독 지역은 아직 자생적인 경제 성장의 단계에는 접어들지 못하고 있으며, 서독 지역 경제 역시 통일 비용의 후유증과 세계 경제의 금융 위기로 인해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ⅰ) 막대한 통일 비용의 소요최근 독일 통일의 부정적 징후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구 동독의 붕괴, 늘어가는 도산 기업, 막대한 재정 및 국제수지 적자, 증가하는 실업자 수, 쌓여 가는 지원 프로그램들 그리고 정체된 경제 성장 등이 그렇다. 통독 이후 신 독일연방인 구 동독 지역에 지원된 1조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독일의 통일 방식이 적절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것은 당초 여러 기관에서 추계한 금액보다 적게는 2배 많게는 4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이처럼 당초의 예상을 뛰어넘는 정부의 재정적 지원은 동독 지역 경제의 재건을 위한 구조 조정의 깊이와 이를 위한 재정 부담의 범위가 통일 초기 상당히 과소 평가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 지역의 경제성장률은 기대에 못 미치고 있으며, 엄청난 재정적 부담은 서독 지역의 경제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러한 결과는 기본적으로 계획경제체제를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기존의 경제 질서를 한계적으로 조정, 보완하는 작업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틀을 짜야 하는 작업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수행되었던 경제 정책에도 상당한 실수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나라가 통일을 한 후에 나타나게될 일인지도 모른다. 독일의 경우처럼 누구도 정확하게 통일 후 얼마의 통일비용이 들어가게 될지 정확하게 예언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근접한 선을 예상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일비용과 통일 후에 일어나 경제적인 파급효과 등에 상당히 정밀한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이 정책적으로 우선 해결되지 않고 서둘러 통일하는 것에만 급급하게 된다면 우리 또한 독일처럼 과오를 범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경제는 또다시 상당한 위기에 빠질 것이다.이쯤에서 우리가 독일의 통일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3. 독일 통일의 교훈독일 통일이 한반도에 주는 교훈은 크게 통일이 되는 과정에서 주는 교훈과 통일된 후에 주는 교훈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통일이 되는 과정에서 주는 교훈을 몇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독일인들은 감정보다는 이성에 따라 실리를 추구한다. 독일은 구 서독과 구 동독 어느 곳을 막론하고 통일에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않았다. 통일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크게 나타내지 않고 내적으로만 추진하였다. 구 동서독간에 정치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을 때도 그들은 그들의 교류에 큰 지장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동서독기본조약까지 체결하여 사실상의 갈등 구조를 깨고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한 협조와 신뢰의 바탕이 결국은 베를린 장벽을 헐게 만들었고, 통일까지 이루어냈다. 이에 비하여 한반도는 아주 다르다. 강대국에 의해 한반도가 점령당하고 남과 북으로 분단된 날부터 오늘까지 한반도 전역에서는 통일을 요구하며 외치는 소리가 매우 높다. 통일은 어려운 것이라고 표현하거나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비애국자로 낙인찍힐 만큼 통일에 집착하고 있다. 즉 , 독일인들이 이성을 쫓았다면 한국인들은 감정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통일에 대한 이성적인 노력들을 하고 그것들이 실천으로 옮겨지고 있는 지금은 전과는 많이 달라진 상태로 통일에 한발짝 더 다가서는 기틀을 마련하고있다고 볼 수 있다.둘째, 독일인들은 이데올로기보다는 민족을 더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반도가 아직도 냉전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갈등과 대립 상태에 있는 것은 민족의 이익보다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이 이데올로기보다는 민족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구 동서독간에 교류·협력한 데 반해, 남북한은 반대로 민족보다는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은 한반도를 공산화 통일시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한국은 그것을 막고 현 체제의 유지에 신경을 쏟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현재에 와서는 정상회담 등으로 인해서 많이 바뀌어 가는 과정인 것 같다.셋째, 독일 정치 지도자들의 통일에 대한 의지와 실천도 배울 만한 일이다. 구 서독의 브란트가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각오로 동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구 동독을 교류와 협력의 마당으로 끌어들였던 것과 같이, 남북한 정치 지도자들도 더욱 각오를 다져 일을 추진해야 되겟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현 남북한의 정치에서 정치 지도자의 역할과 비중이 크다는 것을 감안할 때, 남북한 정치 지도자들의 의지가 한반도 문제 해결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다음은 독일이 통일된 후에 나타난 문제와 독일인들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느냐에 대해서도 우리는 교훈을 삼아야 한다. 즉, 독일에는 통일된 후 많은 부작용이 나타났고 또 이른바 통일 비용도 많이 들게 되었다. 이처럼 통일은 단순히 ‘민족’이니 ‘하나’니 또는 ‘소원’이니 하는 구호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일됨으로써 빚어지는 일자리 부족, 생활 공간의 협소화, 교통비, 교육비, 세금 인상의 부담 등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이 ‘현실’로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독일은 통일된 후 경제적인 문제로만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다. 통일은 ‘환상’이 아니고, 바로 지금의 내 신분과 생활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변화를 주는 일이라는 것을 통일된 독일에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