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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문] 소설과 영화 평가D별로예요
    소설과 영화이미지란 생각과 느낌을 구체화하기 위한 가상적 영상을 의미한다. 슬프다, 기쁘다, 그립다, 귀엽다 등의 느낌이나 감각 혹은 마음의 작용 등은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는 있지만 그 있음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한편으로 나를 발견하면서 나와 세계를 소통하기 위함에 있다. 서로 통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 혹은 우리가 알지만 표현의 공유 수단을 갖지 못하여 소통할 수 없는 세계마저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물리적 어려움을 극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로 만들고 소통할 때 우리는 진실을 나눌 수 있다.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가상적인 영상을 만들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꾸미고, 그 영상을 매개로 하여 서로의 소통을 일궈내기 위하여 개발한 것이 이미지 기법이다. 즉 이미지란 우리의 행동과 생각, 감정, 욕망에 대하여 시간을 초월한 소통적 대화를 위한 매개 수단이다. 물론 이미지란 언어로서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원시적인 이미지 생산의 수단은 그림이었다. 오늘날 예술의 발달사는 어쩌면 이미지의 구체화를 위한 역사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야말로 추상과 구상을 결합하는 수단이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그 수단을 가장 치밀하게 기법화하여 언어로서 영상을 만들어 낸 이들은 시인들이다. 물론 화가들은 훨씬 실상적으로 이미지를 직접 이용한다. 이미지로서 소통을 하는 수단은 매우 빠르다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이 수단은 현상적이어서 고도의 형이상학이나 성찰을 담아내기에는 그 자체로는 역부족일 뿐만 아니라 성찰의 철학적 전개를 방해할 수도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음악이나 미술이 빠르게 감각을 움직이게 하여 느낌을 주는 데에 반해 철학적 기능이 약한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상대적으로 문학은 직접 감각을 이용하는 미술이나 음악과 달리 언어를 매체로 이용하기 때문에 가장 깊은 상상력과 철학적 탐구를 통하여 소통을 구체화할 수 있는 장르이다. 그런데 너무 이미지에일컫게 된다. 매체개념이 기술적 의미든 넓은 의미든 간에 매체에 의한 텍스트 생산이 다른 매체에 의한 생산물의 요소들과 결합되어 있을 때, 그 매체생산은 상호 매체적이 된다. 이러한 매체생산을 의미하는 상호 매체성이라는 개념은 1990년대부터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예술형식의 이질성을 드러내는 이러한 상호 매체성 개념은 문체사적으로 “차이의 형식”으로 특징지어진다. 말하자면 상호 매체성 미학이 야기시키는 변형은 어떤 예술형식이 다른 예술형식으로 전위되는 차이의 형식이며, 이러한 변형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호 매체성은 형식의 과정이다. 이 형식의 과정은 미학적 관점에서 의미나 이미지의 중단, 보충 또는 확장 등의 상호작용을 통해 매체의 차이가 움직이는 영역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 속에서 이미지 형식의 차이가 중요시되는 문학의 영화화의 경우를 보면, 문학은 영화형식의 매체이며 영화로 변형된 차이의 형식이 된다.문학과 영화에 관한 논쟁은 크게 보아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문화적 층위에서 볼 때 문학이나 연극이 기술적으로 생산되는 이미지보다는 더 우월하다는 것이다. 영화의 서술과정을 확장시키기 위해 초기 영화에서 문학의 서술방식을 도입했을 때, 작가나 문학 비평가들이 문학의 영화화가 문학을 통속화시킨다고 주장한 것이 이 근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점은 문학의 영화화가 원작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는 영화를 구조주의의 기호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영화도 문학과 같이 자연적 언어에서 파생된 ‘언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도 ‘영화언어’로서 특유의 서술구조를 지닌다는 관점이다. 셋째는 영화적 글쓰기에 관한 “프레시네마” 논쟁으로서 시네마토그래프 이전에 문학도 영화의 글쓰기와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학에서 많이 원용되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도 영화관과 같은 ‘거대한 암실’로 이해할 수 있다든지,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에네아스의 이미지 이야기가 이런 예에 속한다. 보토 슈트라우스의 단편 에네아스와 그의 이미지는 바로 이것에 관한사를 지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문학작품의 수용이론에서 논의하는 이른바 텍스트 의미의 빈 공간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의 영화화에서 수용과정보다는 변형과정이 부각된다.문학작품의 영화화의 역사는 영화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인 영화의 탄생으로 알려져 있는 1895년 직후 이미 문학작품을 영화로 옮긴 시도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당시의 영화 매체와 마찬가지로 기존 문화, 예술계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불만을 갖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우선 영화관의 정착과 영화기술의 발달로 요약될 수 있다. 초창기의 영화는 그 기술적인 수준에서 장터의 눈요기 감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선 한 편의 영화의 길이가 20m(=약 1분)를 넘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영화에 담을 수 있는 내용에 제약이 생기게 되었고, 이는 또한 상영 형식을 결정했다. 즉 한 번의 영화상영은 서로 내용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극히 짧은 볼거리들의 단순 나열이었다. 이는 또한 영화관 형식도 결정했는데, 이러한 짧고 단순한 단편들의 나열은 한 장소에 끌어드릴 수 있는 관객의 수에 제약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당시의 영화관은 유랑극장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기술적인 발전(가령 Dreiflugelblende와 새로운 필름소재의 개발)이 이루어져 보다 긴 영화(약 200m)의 제작이 가능해지자, 이는 영화관의 정착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왜냐하면 대도시의 형성으로 인구가 밀집함으로써 떠돌면서 관객을 찾을 이유가 점차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대신 유랑극장 시절과는 다른 상업적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이미 이러한 단계 이전부터 문학과 영화의 상호 영향을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영화라고 하는 것이 당시의 문화계의 주도층에게 하나의 (예술적 잠재성을 갖는) 매체로서 의식되고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영화관의 정착 이후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선 보다 많은 수의 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포하고 있는 것은 여전하다.소설을 영화화함으로써 드러나는 한계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지닌 결점에도 요인이 있을 수 있고, 배우들의 연기나, 촬영에 관계되는 여러 기술적인 문제들, 혹은 감독의 연출력 등에서도 요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영화 장르 자체가 지닌 한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모든 메시지는 이미지에 실려 전달되는데, 순간적인 장면 변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투사하는 이미지에 개인과 사회의 복잡한 갈등 양상을 싣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결국 카메라가 아무리 뛰어난 영상미를 담아내고, 감독이나 시나리오작가가 깊은 통찰력을 지닌다 하더라도 이미지의 한계 자체를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소설에서는 언어의 추상적 속성으로 말미암아 주인공의 현실적 고뇌를 더 다각적으로 그려내는 상상력을 담을 수 있는 반면에,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이미지 매체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가상 현실 매체인 영화에서는 주체의 자기 탐구가 진정한 근원에 이를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문학작품을 각색해서 영화가 나올 때마다 지금도 찬반 양론이 분분하다. 소설이 영화로 재구성될 경우 우선 꼽을 수 있는 장점은 많은 대중이 짧은 시간에 위대한 작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원작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고취시키고 과거의 위대한 문학작품을 화면을 통해서 서적보다 빨리, 쉽게, 많은 사람에게 매개하는 영화는 심지어는 원작을 다시 읽어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한편 소설이 영화로 재탄생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단점으로서 자주 언급되는 사항은 문학작품이 지닌 예술적 가치를 질적으로 떨어뜨리거나 내용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이다영화가 얼마나 원작의 예술적 가치를 살리고 내용에 충실한가를 따지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감독이 어떤 의도를 갖고 소설을 전환시키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볼프강 가스트는 문학작품을 영화로 전환시키는 유형을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첫째 원전의 모티브만을 따올 뿐 인물구성이나 플롯은 독자적으로 만든 영화이다. 둘째 가장 흔히은 그라스의 장편소설을 읽어보지 못한 학습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먼저 소설을 꼼꼼히 읽고 작품의 시대사적 배경을 알아본 다음에 영화분석에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화분석에서는 소설의 미학적 장치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알레고리가 영상을 통해서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으며, 소설에서 주인공 오스카의 시점이 어떻게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점으로 대체되고 있는가가 핵심 쟁점이 될 수 있다.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은 주지하다시피 소설에서 주된 서술 매체가 문자인 반면 영화에서는 영상이미지라는 데서 비롯된다. 영화는 또 시간예술이라는 속성 때문에 소설보다 수용상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양자간의 차이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내러티브의 서술시점에 있다고 본다. 이 점은 영화 이론가 제임스 모나코도 일찍이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소설과 영화의 속성을 비교하면서 그 차이점으로 영화는 일반적으로 고정된 화자가 없기 때문에 소설보다 관객의 시점이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한다이렇게 볼 때 영화는 딱히 따로 설정된 해설자가 없는 경우 객관적 시점의 3인칭 소설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모나코의 말대로 관객은 전달자의 개입 없이 화면에 나타난 장면들을 직접 대하면서 임의로 관찰하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서도 자막이나 보이스 오버(voice-over)를 써서 화자가(Off-Erzahler)가 개입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 시점조정보다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는 수단으로 쓰일 때가 많다. 또 1인칭 화자가 나올 경우에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개연성을 높여주는 기능도 한다.소설 『양철북』도 1인칭 화자의 서술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야기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화자 오스카는 간호인이 마련해준 500매의 백지에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며 써 내려가는 것으로 시작되어 30세가 되는 현재로 돌아오는 데서 그친다. 영화 에서도 역시 1인칭 화자인 오스카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그런데 여기서.
    인문/어학| 2004.05.25| 13페이지| 2,000원| 조회(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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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자연주의 정의와 세계에서의 자연주의
    자연주의 정의1.19세기 자연 과학의 발달로부터 영향을 받아 싹이 터 자라나게 된 문예사조입니다. 1850년대의 사실주의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하고 제시하는데 치중하였는데, 자연주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상을 자연 과학자 또는 박물학자와 같은 눈으로 분석·관찰하고 검토하고자 했어요.이 사조는 기계론적 결정론·적자 생존·자연 도태·생존 경쟁 등의 사상을 지닌 다윈의 진화론과, 텐느의 환경 결정론이 바탕 사상을 이룹니다. 이 사상들의 요점은 인간이란 유전적 요인이나 환경적 요인에 의해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어버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연주의 작가들이 즐겨 다루었던 인간상은 유전적으로 열등한 유전인자를 안고 태어나고 바람직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입니다. 태어나자마자 결정되어버린 이들의 운명에 의하여 결국 인간성이 파괴되고 결국 파멸해 가는 인간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어요.♠ 과학적 연구·실험적 추리에 의해 사회의 추악상과 암흑면을 주로 폭로♠ 대표 작가: 에밀 졸라(불효자식 같으니, 엄마를 왜 졸라), 모파상, 도데, 드라이저, 등2.1.자연주의의 개념자연주의(自然主義,naturalism)라는 용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용례도 다양하기 때문에 프로테우스적 성격을 가진다. 문학에서는 1870년 이후의 소설 및 연극의 지배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지만 「자연주의」는 문학에서보다 철학에 먼저 사용된 말이다.원래자연주의란 유물주의(唯物主義,materialism), 쾌락주의(快樂主義,epicureanism), 혹은 여러 형태의 세속주의(世俗主義,secularism)를 뜻하던 것으로서 고대 철학에서 사용되던 말이며, 이러한 본래의 의미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사상가 홀바하(1723-1789)는 "18세기의 자연주의는 인간을 가지(可知)적인 현상 세계, 즉 초경험적(超經驗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신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우주, 그 안에 홀로 생(生)을 영위해 가는 것으로 파악하는 하나의 철학 체계이다."라고계관, 역사관, 우주관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게 하였다.⑴산업주의적 사회 변동1800년 전후를 기해 정신사(精神史)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한 산업 분야에서도 큰 전환점이 이루어졌다. 1830년 처음으로 기차가 운행될 때에 Heine(1797-1856)는 "우리는 저 기차선로를 볼 때에 새로운 역사의 場으로 이끌려 가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고 갈파했다. 새로운 기술과 현대산업이 새로운 위력으로 인간 생활에 등장했다. 18세기에 특히 영국에서 인구가 급속히 팽창함으로써 새로운 생산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여러 가지 발명을 했다. 방적기와 증기기관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선 영국에서 먼저 산업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마련되었다.그리고 영국에서보다는 늦었지만 독일에서도 산업화가 점차 시작되었고 후에는 영국보다도 더욱 급속히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즉,1866년에 W. Siemens가 발전기를 제작함으로써 전기기술의 창안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G. Halske(1814-1890)와 더불어 뉴스를 전세계에 전파할 수 있는 전보기를 제작했다. 또한 화학자로서 F. Bayer(1825-1880)의 등장 또한 역사적이었다.이처럼 19세기의 사회 변동은 급진적이었다. 프랑스의 왕정 복고(1815-1830) 이후 8월 혁명(1830), 2월 혁명(1848),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1851), 보불 전쟁(1870), 미국의 남북 전쟁(1861-1865) 등의 정치적 변혁과 때를 같이 한 산업주의의 충격은 유럽과 미국 사회 전반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도시가 성장하고 공장이 잇달아 세워졌다. 가스와 전기 동력 자원이 개발되는가 하면 대륙 간 정기 기선이 운행되었다. 자본가와 중공업을 2대 지주로 한 제 2제정 시대는 부르주아의 전성기였고 인간의 소유욕이 극대화해 가는 시기였다. 그러나 계급 사회가 무너진 산업주의 사회에서 하층 계급의 지위 상승욕과 불안, 일확천금의 꿈과 몸부림이 소용돌이 쳤고 이 시대 작가의 눈에는 이러한 하 자연주의자에게 있어서 가치란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윤리의 성립에는 의식과 자기 결정력 곧 인격이 요구되는데, 자연주의자들은 의식과 자기 결정력은 인간과 함께 생긴 것이므로 윤리도 인간과 함께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우주에 새겨진 자연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연주의자에게 윤리는 자율적, 상황적인 것으로서, 사상적, 신학적 평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⑹정치적 배경자연주의는 1870년 이후의 소설이나 연극의 지배적 경향을 가리킨다. 1870년대는 프랑스의 제 3공화국시대이다. 제 3공화국의 정치적 상황은 자연주의의 발전에 적합한 시기이고 또 사실상 졸라의 이론과 제 3 공화국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졸라는 「공화국과 문학(1879)」이라는 소책자에서, 공화국에 대하여 그와 그의 친구들의 문학에 호의를 가지도록 요구한다.이 문제의 해결은 매우 중요하다. 사견에 의하면 공화국 그 자체의 존재가 여기에 달려 있 다. 우리들의 방법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에 의하여 공화국의 존재가 결정된다. 자연주의가 아니면 공화국은 멸망할 것이다.그 이유로서 졸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분석이나 실험을 존중하는 과학적 내지 자연주의적 공화국만이 근대 국가를 조직할 수 있 다.테느의 영향 밑에 자유정치학파가 형성된 당시에 있어서는(1874) 이러한 관념 연합은 당연한 것이다.자연주의는 제 3공화국의 기반이 잡힐 무렵에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다. 1820년대에는 노만 주의가 왕당파였던 것같이 1880년대에는 자연주의가 공화파가 되는 것이다. 상원은 공화파가 차지하고 라 마르세즈의 국가가 다시 울리기 시작하며 선거에 의하여 새 정치가들이 등장한다. 급진사회당이 결성되고 조금 뒤에는 사회당이 나타난다. 졸라는 자신이 공화파임을 되풀이해서 말한다. 그의 소설 「목로 술집(1877)」과 「나나(1879)」는 자연주의를 공화주의의 이론으로 구체화하여 제시한 것이다.5.자연주의 문학의 특색⑴과학적이다.과학적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것을 뜻한다. 작가는 자신을 작품 위에 주도했다. 졸라의 「테레즈 라캥」은 story-telling의 기술만큼 오래되었음이 틀림없는 그 구성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테레즈와 로랑 사이의 간통 이야기이다. 「테레즈 라캥」의 originality는 예외 없는 물질 성을 다루는 데 있다. 졸라는 「루공 마카르」에서도 「테레즈 라캥」의 태도를 견지해 나아가려고 하였다. 「루공 마카르」란 1871년부터 1893년 사이에 쓰여진 일련의 소설 20개에 붙여진 집합적 제목이다. 이들 소설은 개별적으로 완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서로 관련되어 있다. 그 연관성은 연작의 부제에 의해서 시사되어 있다.그러나 졸라의 이론들 중 부도덕성, 형식의 소홀, 예술과 과학의 동일시 등은 비난을 받고 있다. 졸라를 중심으로 한 자연주의자들은 도덕의 기준에서 초월하고 있다. 그들은 선악의 판단에서 벗어나 중립적 태도를 취했으며 과학자, 의사와 같은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기에 영혼도 자유의사도 없으며 오직 신경조직과 피에 의해서 그리고 성격이 아니라 기질에 의해서 움직이는 생물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으로는 명확하지만 여러 가지 난점을 안고 있다.제재와 방법만을 중시하면 형식의 소홀은 불가피한 일이다. 형식의 소홀은 소설을 예술로 보지 않은 그의 반상식적 태도에 근거하고 있다.예술과 과학의 동일시도 큰 문제점이다. 창조적인 예술과 사실의 분석인 과학과의 동일시는 분명히 이론적 모순을 내포한다. 그러나, 졸라의 "예술 작품이란 어떤 기질을 통하여 보여지는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말은 그의 이론이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폭넓은 주관성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졸라가 자신의 과학적 한계를 스스로 깨닫고 이를 넘어서려는 희망을 보여준 것으로 생각된다.메당의 그룹은 졸라가 주도한 그룹이다. 메당의 그룹에 속한 모파상은 플로베르의 제자이다. 모파상의 전 작품은 그의 인생의 여러 시기에 있어서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과학을 믿고 진보를 부정하지 않지만 인생의 의미분열이 독일 자연주의의 발전을 저해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분열의 시기를 통해서 그 이론과 작품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독일 자연주의는 內外의 두 측면에서 그 특성을 볼 수 있다. 곧 외부의 영향과 국내적 원인이다. 입센, 톨스토이(1828-1910),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등의 영향이 크지만 특히 프랑스의 졸라의 영향은 지대하다. 졸라에 대한 독일의 반응은, 처음에는 영국에서와 같이 그 부도덕성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1880년 이후에는 졸라의 지지자들이 증가한다. 또한 독일 자연주의는 독일적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독일의 사실주의는 소설보다 시에 더 중점을 두어 "시적 사실주의"라 한다. 그래서 독일 자연주의자들은 사실주의를 뛰어 넘어 1848년의 혁명에 앞질러 일어난 청년독일파, 특히 1770년의 Strum und Drang에서 그 사상적 근원을 찾는다. 문학적 혁신의 목표를 과거의 전통에서 찾은 점에서 독일 자연주의는 독일의 애국적 정열과 결부되어 있다.독일 자연주의는 연극과 서정시에서도 활기를 띤다. 하우프트만의 첫 자연주의 희곡 「해 뜨기 전」에는 간통, 과음, 배신 등 자연주의 문학의 일반적인 제재가 취택되어 있다.A. 홀츠가 주도한 자연주의 서정시 운동은 독일 자연주의의 한 특색에 속한다. 그의 시는 "부드럽고 우아한 언어, 음악의 전통을 고의적으로 깨뜨리는 깔쑥깔쑥하고 율동적인 운문"을 사용했다. 독일의 자연주의 서정시는 그 이전 "청년독일파"나 "질풍 노도"의 사상이 거둔 성과에 비견되는 독일 문학 쇄신 운동을 목표로 했다. 그 결과 자주 과장된 애국적 열광 같은 기질이 표현되어 자연주의의 과학적 냉정성에 위화감을 불러 일으켰다.독일 자연주의의 현저한 특징은 형식과 언어에 대한 강조이다. 프랑스와 미국의 자연주의가 내용, 즉 외부의 힘으로 좌우되는 인간 운명의 묘사에 전념하여 형식과 언어에 소홀히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리하여, 독일의 자연주의는 소설에서조차 연극적 경향을 보인다.독일의 자연주의는 독일인의 었다.
    인문/어학| 2003.04.20| 14페이지| 1,500원| 조회(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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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노벨상 수상 문학
    20세기 마지막 노벨 문학상 수상자 -[양철북]의 저자 독일 작가 권터 그라스(G.Grass)만장일치로 수상자 선정해잊혀진 역사의 얼굴 쾌활한 블랙 우화로 잘 그려내,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유명20세기 마지막 노벨문학상은 우리에게 『양철북』의 저자로 잘 알려진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Guenter Grass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 이유를 "그는 잊혀진 역사의 얼굴을 유쾌한 블랙 우화로 잘 그려내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로써 독일은 '베를린 천도의 해'를 맞아 1972년 하인리히 뵐(1917-1985) 이후 27년만에 11번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뤼벡 근교 작은 도시 벨렌도르프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수상소식을 접한 그라스는 "기쁘고 자부심을 느낀다. 나는 지난번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하인리히 뵐이 무슨 말을 할까에 대해 즉흥적으로 자문했었다. 그도 아마 이에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이 상은 나에겐 하나의 큰 만족이다"라고 그의 수상 소감을 피력한 바 있다.노벨문학상이 금년에 9월 30일 전격적으로 발표된 것은 지금까지 매년 10월 전반부 목요일에 발표된 관례를 깬 것이다. 이러한 전격적인 발표는 70년대 이후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거론되었던 그라스가 금년엔 지난 9월 단 두 차례의 한림원 회합을 거친 후 만장일치로 수상자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귄터 그라스는 1927년 10월 16일 단치히(현재 폴란드의 그다니스크)에서 태어났다. 궁핍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후, 그는 17세 때인 고등학교 시절에 징집되어 독일 방위군에서 복무하다가 부상을 입고 미군 포로가 되었다. 석방된 뒤 그는 잡부와 석공으로 일하다가 조각가가 되기 위해 뒤셀도르프의 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52년에 베를린의 미술학교로 옮겨 조각가로서의 수업을 마쳤다. 이때부터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그후 약 4년 동안 파리에서 조각과 그래픽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소설을 썼다.그는 58년에 '47 그룹 상'을 수상했으며, 59년엔 '게오르크 뷔히너 상', '폰타네 상', '테오도르 호이스 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그리고 이 해에 발표된 『양철북』으로써 그는 단번에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의 『양철북』은 79년 쇨렌도르프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기도 했으며, 한국에서도 상영된 바 있다.『양철북』에서는 192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독일의 일그러진 역사가 주인공인 난쟁이 오스카 마체라트에 의해서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는 세 살된 그의 생일날 의도적으로 계단에서 떨어져 성장을 중단하기로 결심하고 양철북을 잡게된다. 외견상으로 보아 그는 94cm의 난쟁이에 불과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태어날 때부터 성인의 지성을 갖추고 있다.이 소설은 52년에 오스카가 정신병 요양소에 들어가 그의 가족의 역사, 자신의 고독한 학교시절, 단치히의 소시민적 세계, 전쟁과 전후시대를 이른바 '개구리시점視點'(Forschperspektive)으로 회상한 자서전적인 장편 소설이다. '조감鳥瞰적 시점'(Vogelperspektive)의 반대 개념인 '개구리 시점'은 우물안 개구리처럼 위를 보는 좁은 시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한다면, 난쟁이인 오스카가 정상적인 사람들의 세계를 좁은 시야로 위를 쳐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비정상적인 난쟁이의 눈에 비친 정상적인 사람들의 세계가 더욱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이 그로테스크하다. 그라스는 어린애와 같은 작은 키 때문에 성인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하고, 성인의 지성을 가졌기 때문에 어린이 세계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인공 오스카의 비인습적인 역할을 통해 도덕적, 종교적, 성적 터부를 무너뜨리고, 비뚫어진 그의 시각을 통해 전쟁과 전후시대의 독일의 현실을 희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단치히 3부작'이라 불리워지는 『양철북』(59년),『고양이와 쥐』(61년), 『개들의 시절』(63년) 외에도 그는 물고기를 화자로 등장시킨 『넙치』(79년)에서도 인간사회를 비판적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주요 작품들로서는 『달팽이의 일기』(72년), 『텔그테에서의 만남』(79년), 『암쥐』(86년), 『무당개구리의 울음』(92년), 『광야』(95년), 『나의 세기世紀』(99년) 등이 있다.작가 귄터 그라스는 '행동하는 지성인' 혹은 '비판적인 지성인'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그는 60년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독일사회민주당SPD'에 가입하여 '핵무기 반대' 등을 외치며 빌리 브란트 수상의 재선을 위한 시민운동을 이끌기도 했으며, 나아가 수상선거 때마다 헬무트 콜의 낙선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그리고 그는 90년 독일의 통일이 동독인들의 정서를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동독인들은 정치적으로 얽매인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이젠 돈에 얽매이게 되었다"는 그의 비판의 목소리는 "구동독에 대한 환상에서 나온 말재주"에 불과하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국내외에서 많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다.그리고 그의 장편 소설 『광야』에서 그는 구동독 출신의 사환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나치시대와 동독시대 그리고 독일통일의 과정에서 구동독인이 어떻게 소외받으며 살아왔었는지를 통하게 꼬집고 있다. 그리고 금년에 출간된 『나의 세기』에는 1901년부터 100년 동안 독일 역사에서 주요 사건들이 100가지의 에피소드들로써 표현되어 있다. 이 『나의 세기』는 새로운 세기와 새 천년을 맞고 있는 현 시점에 가장 시의적절한 귄터 그라스의 작품이 되리라 기대한다.류종영(독문)교수귄터 그라스 Guenter Grass1927년 10월 16일 단찌히에서 폴란드계 독일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빈곤 속에서 성장하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소집되어 독일 방위군에서 복무하다가 부상을 입고 미군 포로가 되었다. 귀환 후에는 잡부와 석공으로 일하다가 조각가가 되기 위해 뒤셀도르프의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재즈 악단의 단원이 되기도 하였다. 1952년에 베를린의 미술학교로 옮겨 조각가로서의 수업을 끝마쳤다.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1954년에는 방송국의 상을 받았다. 56년에 최초의 시집
    인문/어학| 2001.11.14| 12페이지| 1,500원| 조회(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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