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꼭지’ 감상문‘달과 꼭지’는 지금까지 에로영화라고 하면 떠오르던 이미지들과는 많이 다른 영화인 것 같다. 우선 꼬마 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점부터 그렇다. 우리나라의 18세 이상 관람가 영화에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많은 비난을 받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성이 주로 어른들만의 것, 비밀스러운 것으로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꼬마가 이웃집 아줌마의 분수처럼 솟아나오는 젖을 받아 마시는 ‘달과 꼭지’를 엽기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성의 포괄적인 의미보다는 주로 외설적인 면, 쾌락추구로서의 성만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달과 꼭지’에서는 남녀의 육체적 쾌락으로서의 ‘성관계’가 전부가 아니다. 첫째로 이 영화는 생명을 길러내고 감싸 안는 어머니, 여성으로서의 성, 즉 생명으로 충만한 성의 신비하고 성스러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성의 성격은 ‘달과 꼭지’라는 영화의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달은 보호자로서의 어머니, 태양에 대비되는 여성적인 대상이다. 또한 차고 이지러짐과 달이 일으키는 밀물과 썰물은 생명의 성장과 인간내면의 변화를 상징한다. 테테는 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고, 언젠가 달에 이르는 상상을 한다. 테테는 달이 자신에게 에스트렐리타를 보내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달에 손이 닿을 정도로’ 높은 인간 탑 꼭대기에 올랐을 때, 테테는 어머니 품에 안겨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젖을 먹는다.어머니의 젖꼭지는 생명의 상징이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성장은 생명이 드러나는 한 형태이다. 테테가 탑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 에스트렐리타라는 자신만의 젖꼭지를 찾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성장을 이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생명의 순리이다. 아버지는 주의 깊게 테테의 이를 살펴보고 영화가 끝날 무렵에 테테에게는 새 이가 돋아나지만, 자기 나름의 경험과 세계를 통해 이뤄지는 아이의 성장은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테테를 길러낸 젖으로 새롭게 태어난 아기에게 계속해서 생명을 주고 있다.한편 테테는 아버지가 밤마다 어머니에게 젖을 채워준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아름다운 가슴, 젖꼭지는 성의 에로틱한 면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에로틱한 부분도 테테의 눈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는 성의 몇 가지 측면들 간의 균형을 유지하고, 또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매우 동화적이고 순수하게 표현하고 있다. 심지어 인생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조차도 테테의 관점에서 평화롭게 잠든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이 영화에서 플라멩코, 샹송과 함께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 니콜라 피오바니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음악으로 한층 살아나고 있다.두 번째, 가장 중요한 성의 측면으로 이 영화는 사랑, 조화, 화해를 다루고 있다. 그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미겔과 에스트렐리타, 그리고 모리스이다. 스페인 청년 미겔은 애절한 플라멩코 노래로 끈질긴 구애를 하고, 결국 에스트렐리타와 관계를 갖게 된다. 그리고 모리스는 자신이 성적으로 여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고통스럽게 묵인한다. 하지만 미겔의 사랑이 성적인 쾌락만을 목적으로 했다고 보긴 힘들다. 미겔과 에스트렐리타의 육체적인 관계는 친구를 잃은 그의 슬픔을 감싸 안고자 하는 에스트렐리타의 동정심이 없었다면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리스와 에스트렐리타의 사랑은 결국 이러한 육체적인 사랑을 뛰어넘는다. 에스트렐리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모리스는 에스트렐리타가 그렇게 하도록 놔둔 것을 미안해한다. 그리고 절대 서로를 떠나지 않겠다며 사랑을 확인한다.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은 모리스와 에스트렐리타의 사랑의 테마이기도 하지만, 국경과 제도, 갈등을 넘어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화합시키는 사랑의 상징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미겔과 에스트렐리타, 그리고 모리스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이들이 에스트렐리타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영화 ‘우주전쟁 (War of the Worlds)’ 감상문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War of the Worlds, 2005)』이다. 사실 감명 깊게 본 영화들이 너무 많아서 어떤 영화를 주제로 감상문을 써야 할까 많이 망설였는데, 대체로 내 성향이 SF영화에 기울어 있고, 내가 최고로 꼽는 영화들 중에 스필버그의 영화가 상당수 있으며, 또한 비교적 최근에 본 영화로서 그 감동과 충격이 아직 희미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이 영화를 선택했다. (사실 스필버그의 또 다른 영화인『쉰들러 리스트』와 이 영화를 두고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다.) 나는 이 영화를 개봉 당시인 2005년 여름 영화관에서 보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PC를 이용해 한 번 더 보았으며, DVD로 출시되었을 때 또 다시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상문을 쓰기 위해 네 번째로 보았다.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 위대한 휴먼드라마나 훌륭한 영상이 돋보이는 영화들 또는 좀 더 현실적이고 무거운 주제의 영화들을 놔두고 굳이 이런 헐리우드의 여름용 블록버스터 영화, 작품성보다는 흥행성으로 널리 알려진 감독의 영화, 게다가 장르적 성격이 강한 SF영화인『우주전쟁』에 대한 감상문을 쓰기로 한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 반면 국내에서 이 영화가 혹독한 비난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영화에 대해서나 비판적인 시각은 있기 마련이지만 유난히『우주전쟁』에 대한 평가는 양극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중 ‘최악이다, 실망이다’라는 평이 더 많았다. 인터넷의 영화평은 물론이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이 영화에 대해 좋게 이야기 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악평을 듣는 것은, 마치 많은 사람들이 작품성 있고 진지한 예술영화를 지루해 하는 것처럼『우주전쟁』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했던 가벼운 오락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명작의 반열에 오를 정도는 못되더라도,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질 만한 충격과 깊은 인상을 줄 지하실에 숨는다. 어느새 레이는 아버지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딸을 지켜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을 자각하고 있지만, 절망적인 현실 앞에 어찌해야 할지를 모른다. 바깥세상이 점점 끔찍한 모습으로 뒤바뀌어 가던 어느 날, 그들의 은신처에 외계 로봇의 촉수가 들어와 탐색을 벌인다. 가까스로 발각되는 걸 모면한 그들 앞에 처음으로 기괴한 모습의 외계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제정신을 잃고 발광하는 바람에 자신과 딸의 생존에 위협이 되어버린 오길비를 레이는 자신의 손으로 살해한다. 그런 고투에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온 외계 촉수에 레이첼이 납치되고, 필사적으로 레이첼을 되찾으려던 레이마저도 로봇에게 포획되어버린다. 외계로봇에게 온몸의 피를 빨리게 될 절체절명의 순간, 레이는 기지를 발휘해 한 대의 외계로봇을 파괴시키며 탈출에 성공한다.드디어 목적지인 보스턴에 레이와 레이첼이 도착할 무렵, 외계인들은 예상치 못한 지구의 바이러스에 의해 죽어가고 있었다. 무력하기만 하던 인간의 군대에 의해 거대한 외계인의 병기가 쓰러지는 모습을 뒤로 하고, 레이는 마침내 전처가 머물고 있는 처가에 다다른다. 마침 아들 로비도 레이보다 한발 앞서 무사히 돌아와 있었다. 각자 재난을 헤쳐 나오며 심경의 많은 변화를 겪은 아버지와 아들은 뜨거운 유대감으로 서로를 깊게 포옹한다. 영화는 시작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을 관조하는 나레이션과 함께 끝이 난다.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스필버그가 내 오래된 악몽을 훔쳐가 영화로 만들었다’는 생각이었다. 어릴 적부터 창밖을 바라보며 몽상하거나, 실제로 꿈속에서 경험했던, 외계생물의 침략과 거대한 파괴자로부터 달아나는 악몽이 2시간 동안 생생하게 스크린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외계인의 침략이라는 테마를 다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다. 스필버그가 표현한 독특한 공포의 색채와 상황묘사가 내가 꿈꿨던 그것과 거의 같았던 것이다. 혼자 공상을 하면서 ‘내가 영화감독이나 만화가가 되면 이런 장면들을 그려볼 텐데’하고 생각했던 히 이 부분에서 그의 음성은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의 해설자의 것처럼 들린다. 실제로 다큐멘터리에나 나올법한 배경음악도 이러한 분위기에 한 목 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이뤄지는 두 번의 장면 전환, 즉 나뭇잎, 우주, 인간사회 세 장면간의 전환은 모두 동그란 원을 중심으로 일어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물방울이 지구가 되고, 지구가 신호등이 되는 시각적 유사 형태를 이용한 이러한 장면 전환의 기법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점에 붙잡아둠으로써 어느새 영화 속으로 빠르게 빠져들게 만든다. 게다가 초록, 파랑, 빨강이라는 강렬한 색상의 전환이 마치 최면술사가 라이터 불꽃을 가지고 최면을 거는 듯 몰입의 효과를 더하고 있다. SF라는 장르의 특성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적인 세계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게 만드는 영화초반의 이러한 ‘낯설게 하기’ 작업은 관객들이 공상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몰입시키게 만드는 데에 아주 효과적이다. 이 부분에서 외계인은 ‘우주 저 너머에서 질시의 눈으로 우리를 주시하던 막강하고 무자비한 지적 존재들이 지구 정복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는 나레이션을 통해 그 존재만이 언급될 뿐이지만, 이미 ‘낯설게 하기’의 최면상태에 빠진 관객들의 머릿속에 모건 프리먼의 설득력 있는 목소리가 일깨우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떠올려봤을, 그러나 너무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기에 항상 잊고 있었던 근원적인 불안 - 바로 외계의 낯선 존재에 대한 공포이다.이 영화에서 가장 특수효과가 많이 들어간 시퀀스라 할 수 있는 외계로봇 (원작 소설을 따라 이후 트라이포드라고 부르겠다.)의 첫 등장과 살상 장면은 스필버그, 그리고 그와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온 노련한 스탭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독특한 긴박감과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교차로 한 가운데의 땅이 마치 지하 핵실험을 하듯 꺼지면서 압도적인 크기의 트라이포드가 솟아나온다.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우주선이 아닌 우리 생활의 공간 한복판에서 불쑥 솟아나온 외계의 존재는 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뿌연 연기생각한다. 또한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을 이용해 관객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트라이포드의 실루엣에 집중시키는 구도 역시 효과적이었다.트라이포드가 레이저빔을 쏘기 위해 충전(?)을 하는 길지 않은 장면에선 트라이포드의 모습이 사람들 주변의 유리창을 통해 간접적으로 비춰진다. 사소한 장치이지만 이 또한 영화에 현실성을 더해 준다. 그림자, 반사되는 이미지의 유무는 종종 유령이나 허깨비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계속 같은 구도에서 이 가상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보다는 이러한 변화를 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더욱 자연스럽게 트라이포드의 영화 속 존재를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이윽고 무시무시한 푸른 광선이 뿜어져 나와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재로 만들기 시작한다. 아비규환이 펼쳐지는 가운데, 도망치는 주인공 주위로 사람들이 허망하게 죽어간다. 핸드 헬드와 트러킹 샷이 섞여 있는 이 부분은 장면 전환이 거의 없는 듯한 편집으로 그 긴박감과 몰입의 정도를 더하는데, 자세히 보면 누군가 카메라 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부분 같은 교묘한 지점에서 컷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마치 도망치는 주인공을 따라 카메라가 건물 안팎을 오가며 계속해서 찍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스필버그와 수차례 작업해 오면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하기도 한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는 도망치는 군중들의 눈높이에서, 혹은 그들의 발치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이 부분을 찍었다. 발치에서 올려다보며 찍은 컷은 화면 저쪽의 거대한 트라이포드를 보여주기 위함이고, 달아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촬영한 장면은 극도의 혼란과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만일 어중간한 높이에서 크레인을 사용해 이 장면을 표현했다면 마치 내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현장감이 줄어들었을 것이다.이 장면들을 포함한 영화 전반부에선 대체로 화면의 채도가 낮고 약간 푸른빛을 띤다. 흐린 날씨라는 설정 탓도 있겠지만, 이것은 CG를 비롯한 특수효과들을 화면에 효과적으로 융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스필 없는 허구가 아님을 보여준다. 실제로 지구가 외계인들에게 침공당한다면, 아니 당장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무자비한 죽음과 고통은 이렇게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또한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충격요법으로 영화는 또 한 번 관객들을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공포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트라이포드의 공격이 두 번째로 벌어지는 선착장에서부터 강 건너까지의 부분은 놀라운 장면들의 연속이다. 시간적 배경 덕택에 빛과 어둠의 도움을 받은 특수효과는 더욱 깊이를 갖고, 물 한가운데라는 공간적 배경으로 인해 아비규환의 현장감이 더욱 생생하다. 특히 내가 감격했던 것은 산 너머로부터 희미한 빛을 받으며 등장하는 트라이포드들의 연출이다.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 피난민이 모여 있는 선착장과 페리가 발하는 차가운 빛, 그 빛을 머금으며 흩날리는 물안개, 그리고 그 희미한 빛 속에 산 너머로 솟아오른 거대하고 기괴한 외계 보행병기의 그림자. 이 모든 것이 마치 내 머릿속에서부터 투영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예전부터 갖고 있던 이미지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트라이포드들의 나팔소리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화면과 잘 어울렸다. 또 한가지, 트라이포드가 비추는 세 갈래의 서치라이트(?)는 마치 수용소의 감시탑에서 비추는 탐색등처럼 긴장감을 유발시킨다.트라이포드가 물속에서 솟아오를 때는 그 모습이 가까이서 잡히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공포와 기괴함을 자아내는 부분은 저 멀리 있는 트라이포드들의 실루엣을 극단적인 롱샷으로 비춰줄 때이다. 단지 트라이포드들만 찍히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가까운 화면 앞쪽으로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위해 아우성을 치는 군중의 모습이 함께 보인다. 즉 카메라의 시점을 도망치는 군중들 중의 한 사람, 평범하고 겁에 질린 주인공의 시점으로 잡은 것이다. 이것은 그 어떤 살인마나 자연재해로부터의 도주와도 닮지 않은 형태의 긴박감, 숨 막히는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이 영화에서 트라이포드라는 존재가 주는 독특한 시각적 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였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초반 전장에서 막시무스장군을 치하하는 중후하고 자애로운 인상의 황제가 이책의 저자라는 사실을 책에 막시무스라는 낯익은 이름이 나오는것을 계기로 알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아들 코모두스에게 살해당하지만 실제로는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철인황제로 불렸는데, 이는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황제라는 뜻이다. 그는 스토아철학을 자신의 인생관으로 삼았으며 검소한 생활을 즐겼다. 로마의 신들을 믿고 기독교를 박해하였지만 기독교인들의 형을 집행함에 있어서 는 관대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선량한 황제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장군인 캇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했을때 황제는 오히려 캇를 용서할 기회를 잃은것에 대해 슬퍼했다고 한다.아우렐리우스 황제에 대한 위와같은 설명을 읽고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또한 책의 머릿글을 읽고 이 박애적인 황제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교훈적인 생활태도와 인품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가 전장에서 쓴 명상록을 읽고 알 수 있었다. 명상록의 교훈들은 주로 스토아철학을 배경으로 하고있다고 한다. 명상록에는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는 몇가지 사고방식과 생활태도가 반복적으로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면서 나와있는데, 기본적인 명제는 '인간은 자신의 본성인 이성과, 그것을 심어준 자연의 본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는 주된 주장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 '자신의 운명에 순종할 것', '세속적인 명성과 육체적인 쾌락을 멀리할것'등이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내세와 전생, 업보라는 개념들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그것도 자연으로부터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이성의 지시에 따라 목표에 얼마나 정진하면서 살았느냐를 중요시 한다. 그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는지의 여부조차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보상을 위한 관문이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못박지 않고, 다만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자기가 나온곳으로 돌아가는 삶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삶은 죽음의 과정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사람이 얼마나 오래사느냐, 그가 죽은뒤 얼마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느냐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명상록의 전체에 걸쳐 그러한 명성의 덧없음을 과거의 유명인들의 예를 들어 여러번 강조한다. 죽음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것이며, 별것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만큼 아우렐리우스의 인생관은 죽음보다는 개인의 실천적 생활태도에 중점을 둔다. 물론 개인은 자신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며 특히 공동의 선과 사회적인 이익을 가져오는 일을 해야한다고 하는데, 이는 통치자로서의 아우렐리우스가 국민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던 점이었을 것이다. 삶의 모든 행위와 사고의 중심은 이성, 즉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고 이성은 외부의 그 어떤것으로부터도 해를입지 못한다는 주장이 강조되고 있다. 가령 개인의 인생에 큰 시련이 닥친다고 해도, 그 시련에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인간의 감각과 생각일뿐 인간의 본성에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장애물에 맞서서도 그것을 극복하여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데 이용할 수 있고 이렇게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수록 바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련이 자신의 본성을 해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것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한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숙명에 순응하는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우주가 자신에게 준 사명을 최선의 노력으로 다 하는 것만이 진정한 선이기 때문에 고통과 분노, 쾌락과 명예와 같은 세속적인 욕망의 감정들은 되도록 이면 멀리하고 태양의 광선처럼 '그냥 통과해버리는것'이 지혜로운 태도라고 한다.이 책의 구절들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급하게 책을 읽느라 충분히 생각하면서 읽지는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두고두고 다시 펼쳐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생활은 게으르고 안일하며 목표가 없다. 또한 나는 내가 살고있는 사회전체는 물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편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같은 사람은 지금 이순간 자살을 하는게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의하면 자연은 또한 이성을 간직한 인간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우주의 법칙에 순응하려는 의지를 갖고 실천하려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가 권하는 이상적인 삶의 자세는 그가 얘기하는 것처럼 쉽고 당연한 일은 물론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성과 본성에 따라 생활하려면 내 주위의 모든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지금 이순간 졸음이 오고 피곤한 것에서부터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가끔씩 느껴지는 무서운 허무까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이성으로 타이르며 오로지 영혼자체의 길을 가야만 한다. 말하자면 철저한 금욕과 평정심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런 경지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세를 향해 항상 마음을 두고 있기만 해도 나의 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올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피비린내나는 전장과 거대한 제국을 어깨에 짊어진 통치자로서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글에 쓰여진 것과 같은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명상록에는 전체적으로 비관적이고 종말론적인 체념의 정서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 책에는 죽음과 체념에 관한 것 말고도 수많은 삶의 지혜와 감동적인 말들이 담겨있다. 그런 교훈들이 나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앞으로도 그 교훈들을 마음속에 새겨두고싶다.
소유의 종말'소유의 종말'은 '정보화 시대'라고 불리는 21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의 새로운 성향과 그에 따른 인간 사회의 변화를 총체적으로 전망,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21세기를 '접속의 시대'라고 정의하고 있다. '접속'은 '소유'의 반대 개념인데, 상품과 재화를 교환하던 기존의 시장이 지식과 경험이 자유롭게 오고가는 네트워크 안에 형성된 시장에 밀려나면서,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의식도 상품을 사서 영원히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겠다는 소유욕구 보다는, 기업이 제공하는 다양한 문화적 체험과 서비스에 장기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구매함으로써 나날이 그 수명이 짧아지고 있는 상품들을 임대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된 주장이자 이 책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전제이다.접속의 시대에 일어나는 사회, 경제, 정치 등 각 분야의 변화와 대책들이 12개의 장들로 구성된 '소유의 종말'은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1부에서는 다가오는 접속의 시대에 대한 소개와 함께 접속의 시대가 기업의 마케팅, 운영 방식, 상품의 성격, 공급자와 사용자의 관계 등에 가져올 변화의 모습에 대해 여러 참고 문헌과 통계치의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으며, 2부에서는 문화산업이 가장 유망한 사업영역으로 부각될 접속의 시대에 문화의 지나친 상업화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문화 고갈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우려와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소유의 종말' 이라는 한국어 제목을 비롯해 1장에서 설명되고 있는 새로운 시대의 기업들에 대한 길잡이로서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들과, 접속의 시대로 가고 있는 세계적 추세의 실례들로 인해 자칫 이 책이 정보화 사회와 문화의 상업화를 긍정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2장에서 제시되고 있는 문화산업과 인간관계의 네트워크화가 가져올 폐해에 대한 진지한 우려와 그에 대한 문화주의적, 생태학적 대안들을 보면, 결과적으로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현재 거부할 수 없이 다가오고 있는 미래의 새로운 치열한 갈등을 겪을 것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만약 상업 영역이 우세해 진다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존재마저 상업화된 상품으로 사들이게 될 것이라고 한다.'시장이 네트워크에 밀리는 날'에서는 현대 과학 기술에 힘입어 새로운 시대에 중요한 상업 활동 영역으로 떠오를 사이버스페이스와,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질 네트워크 방식의 경제 활동에 대해 설명한다. 기존의 시장이 지리적 제약을 받던 것에 비해 사이버스페이스 상에서는 앞으로 점점 시장영역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될 정보, 지식, 경험 등의 자원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방식도 지리적 제약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여러 기업들이 이를 내다보고 온라인 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네트워크 경제에서 기업들은 여러 유형의 상호 관계를 통해 집단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상호 관계야 말로 네트워크 경제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트워크 경제의 발달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발전 속도가 점점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규모의 경제가 속도의 경제로 바뀌고 있다는 미래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이런 현상이 점점 짧아지는 제품의 기술적 수명과 주기를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빠르게 진화하는 제품에 의해 소비자의 관심도 점점 빠른 속도로 변화하게 된다. 그 결과 소비자는 소유를 포기하고 접속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2장에서는 접속의 시대에 기업들이 취해야 할 네트워크 형태의 경영 방식에 대한 내용이 주로 나오는데, 이러한 기업 관리 시스템을 오래 전부터 정착시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경우로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을 소개하고 있다. 산업 시대 식의 대량 생산으로 영화를 제작하던 할리우드의 영화사들이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자 '양보다 질'에 승부를 걸고 기존의 방식을 버리면서 취한 대안이 바로 유동적이고 유연한 행동에 유리한 전문적인 독립, 하청업체들과의 네트워크 형성이었다. 그 결과 할리우드 는 면에서 볼 때 드러나는 공급자의 사용자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제약을 분석한다. 맥도널드와 같은 체인점을 관리하는 기업에 대해 '햄버거를 파는 것보다 햄버거 매장을 파는 것이 더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점포와 본사의 계약 관계를 접속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에 비유한다. 햄버거를 판매하는 것은 점포지만, 점포가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본사가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 이미지, 브랜드에 접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본사에서는 점포운영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인점에서 파는 햄버거의 가격은 어딜 가나 똑같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무형 자산을 공급하는 기업이 접속 자에 대해 막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된 접속의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의 DNA 정보라는 지적재산을 대기업이 독점하게 되었을 경우 이것은 더욱 심각한 의미를 지닌다. 한사람 한사람의 유전정보를 지적 재산권의 형태로 소유한 채 돈을 받고 그것에 접속할 권리를 준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돈을 주고 공급받아야 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 공학 분야에 잠재된 수많은 지적 재산권들이 하나씩 기업에 의해 접속의 네트워크상에 올라가고 있으며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걱정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현재 사회에서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논의가 계속돼서 벌어지고 있다.'서비스 세상'에서는 모든 종류의 상품이 소유의 대상이 아닌 접속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서비스로 변해가고 있는 추세를 분석하고 있다. 지금까지 자기 자동차를 소유한다는 것은 개인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확인하는 하나의 방식 이였다. 소유는 곧 책임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자동차 마저 소유의 대상이 아닌 임대, 즉 서비스의 대상으로 바뀌고 있는 데에는, 짧아지는 신형 자동차 등장의 제품들 간에 뚜렷한 차이가 없어진 환경에서 한번 관계를 맺은 고객을 오랫동안 유지시키는 것이 기업들에게는 물건을 파는 것보다 더 중요해졌다.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여 고객과 오랜 시간 관계를 맺으면서 기업은 고객의 '평생 가치'를 측정하여 이익을 노린다. 말 그대로 한 고객에게서 평생동안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을 노리는 것이다. 고객의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하여 기업은 될 수 있는 한 다양한 종류의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한다. 예를 들어 자사의 제품에 비슷한 관심을 가진 고객들을 연결시켜 취미 공동체를 만들고 정기적인 집회, 고객과 기업 경영진과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기업과의 긴밀한 교류, 지원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기업이 고객의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리고 인간 관계의 상품화가 이뤄지는 시대에는 마케팅이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새로운 네트워크 경제에서는 마케팅이 가장 중심에 오며, 고객을 관리하는 것이 상업 활동의 중요한 목표가 된다고 한다. 고객과의 관계를 상품화하는 것은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궁극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고객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 점점 발을 들여놓는 기업에게 자신의 삶 자체를 맡겨버리다 보면 언젠가는 하나의 기업이 개인의 대리인으로 그의 일생을 기업의 네트워크에 속박해 버리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기업에 접속해 있느냐가 개인의 지위와 개성을 나타내는 시대가 온다면, 개인이 소유한 재산이 얼마나 되냐에 따라 그가 정의되어지고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욱 인간의 존재가치가 왜곡될지도 모른다.7장 '삶으로서의 접속'에서는 6장에서 설명된 것처럼 기업이 인간의 모든 시간을 상품화 시켜 버릴 때 개인과 공동체의 삶은 어떤 변화된 모습을 갖게 될 것인가를 예측해보고 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로 '생활 공간의 접속'을 통해 이뤄질 거주 환경의 변화를 들고 있다. '공동 관심 단지'라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동체는 여러 면에서 접속의 시대가 갖는 특징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서 정치영역과 함께 경제 영역에 포섭되어 상품화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산업 시대에 들어 물질이 풍부해졌을 때 문화는 물질적 가치만이 팽배한 세태를 경고하던 비판자로서의 역할을 한동안 했지만, 결국 상업적 영역으로 흡수되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문화적 기준을 전달하는 핵심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소비와 물질 문명에 대해 저항적이었던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대량 생산품이 흘러 넘치고 대중의 익명성 잠긴 세계에서 자기표현과 자기 실현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개인의 욕망에 호소했다. 그런데 이들이 추구한 개인적 욕망은 생산 중심의 소비가 소비 중심으로 변하는 과정의 경제에 자극을 주었다는 것이다. 즉, 기업가는 자본주의적 생활 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예술가가 썼던 저항적 가치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럼으로써 과거의 생산 지향 자본주의가 창조성, 자기 충족, 쾌락과 유희를 추구하는 욕망을 억눌렀던 것에 반해, 새로운 소비 지향 자본주의가 이 억눌린 심리적 욕구를 예술이라는 분출구를 통해 해방시켜 거대한 소비 문화를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비자 문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문화는 상품을 포장하는 기호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문화적으로 덧칠된 상품이나 서비스의 형태를 시장에서 손쉽게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예술과 예술가를 시장에 빼앗긴 문화는 공유하는 의미를 스스로 해석하고 생산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상품의 소비가 한계점에 이름으로써 새로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상품화 시켰던 문화적 기호와 예술적 의사 소통 형식에서 나아가 이제는 살아 있는 문화적 체험 그 자체를 상업화시키게 되었다. 살아있는 체험은 상품 구체화의 최종 단계이며 살아 있는 체험은 자본 순환에서 최종 상품이 되었다는 어떤 학자의 말은 문화 자본주의가 가져올 인간 관계의 엄청난 변화를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산업 경제에서 체험 경제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가르침2001130994곽대원'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몇 가지 다른 제목으로 꽤 오래 전부터 몇몇 출판사에서 내놓았던 책이다. 나는 초등학생 때 '아메리카 인디언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처음 접했다. 그 당시 어떻게 해서 읽게되었는지는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책은 우리 집의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문학수업시간에 이 책을 읽기로 해서 찾아봤더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다시 사게 된 이 책의 새로운 제목이 바로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다. 10여 년 전 읽었던 것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거의 이 책을 처음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에서 사라진 부분들도 많겠지만, 초등학생 이였을 때에 비해 대학생이 된 지금 내가 책을 좀 더 꼼꼼히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렸을 때 이 책을 아주 엉터리로 읽었던 것도 아니다. 깊은 인상을 남긴 이 책은 그 당시 읽었던 어느 책들보다도 특별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세계 명작이나 고전 같은 유명한 책들이 주는 웅장하고 애틋한 감동과는 다르게 소박하지만 마음에 깊이 다가서는 감동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혀 지루하지 않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책이 그 당시 내 나이와 비슷했던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표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이 책이 나에게 한가지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작은 나무가 고아원의 목사에게 매를 맞는 장면이 나온다. 등에 피가 날 정도로 매를 맞으면서도 인디언 소년은 울지 않는데, 그 '비결'은 할머니가 가르쳐 주신 '인디언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 방법' 덕분이다. '몸의 마음을 잠재우고 영혼의 마음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고 고통을 바라보라' 는 이 가르침에 따라 작은 나무는 기절할 때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수많은 지혜롭고 현명한 교훈들 중에서 하필 이 한 구절에 대끼면서도 그에 반응해 고통스러워하지는 않게 된다. 작은 나무의 할머니는 이것을 '마음의 영혼이 몸에서 잠시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인데,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그것은 신기한 초능력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고통을 바라본다'는 말은 마치 주문처럼 느껴졌다.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이 주문의 효력을 한 친구에게 가르쳐주었다. 얼마 뒤 그 친구는 나에게 '네가 말한 대로 맞는 것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더니 안 아프더라' 고 말했다. 이 친구는 내가 말한 '고통'을 '자신이 맞고 있는 장면'으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자기만의 비법을 터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특별한 기억이 얼마전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때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통해 이 책과 그 등장인물들을 떠올릴 때면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서 신비한 편안함과 포근함이 느껴진다. 마치 주인공인 체로키 소년의 보금자리인 아늑한 산골짜기와 자연이 그대로 내 마음속에 옮겨져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해졌다고 믿는다. 이제 이 책을 새롭게 읽으면서 깨닫고 느낀 것들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야겠다.주인공 작은 나무는 5살도 안 되었을 때 고아가 된다. 그런 작은 나무를 산 속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맡아 보살피게 된다. 첫인상이 키가 2미터에 달하고 말이 거의 없는 할아버지였음에도 작은 나무는 할아버지의 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고 한다. 왜 다른 친척들을 놔두고 할아버지에게 매달린 것일까? 아마도 다른 친척들이 작은 나무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서로 챙길 것을 챙기기에 바쁜 모습들을 보면서, 비록 어린 아이였지만 작은 나무도 그들이 별로 믿음직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작은 나무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는 불행을 겪은 아이다. 소설 전체에 걸쳐 대체로 화목하고 밝은 분위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그러한 사실을 . 할머니는 작은 나무에게 '과거를 알라'는 가르침과 함께 '눈물의 여로' 와 같이 인디언들이 겪었던 비극적인 고난의 역사와 그 속에서도 꿋꿋이 영혼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 그리고 작은 나무의 증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얼마나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맺어져 지금의 작은 나무가 있게 되었는지를 말씀해 주신다. 고아원으로 떠나는 작은 나무에게 할머니는 '체로키들이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맺어줬다는 것을 잊지 말라' 는 말을 한다. 자신의 뿌리를 잊지 말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뜻이다. 작은 나무는 현실에 동요하지 않고 인생을 바라보는 법을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는 동안 배운 것이다. 할머니는 항상 작은 나무의 마음에 따뜻함과 현명함을 주는 여러 교훈들을 이야기로 들려주며 때로는 자연과의 교감을 노래한 시를 들려주기도 한다. 작은 나무가 처음 산에 왔을 때, 낯선 환경과 부모님이 돌아가신 슬픔과 두려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를 따뜻하고 축복 어린 노래로 감싸준 것은 바로 할머니였다. '사랑'에 대한 이 책의 교훈은 다른 많은 소설에서 들려주는 그 어떤 것들보다도 지혜롭고 감동적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진정한 사랑은 바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난무한다. 노래 가사나 드라마의 대사는 물론이고,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연인들끼리도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주고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쉽게 얘기하는 사랑한다는 말은 어떨 때는, 아니 대부분의 경우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하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사실 나 자신이 겪는 얘기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사랑해'라는 말이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 주던가?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았다. 아직 우리는 서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마음 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로 마음이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를 유지할 수침이나 세상 만물은 다 서로 의지해서 살아간다는 부처의 가르침도 결국은 작은 나무의 증조할아버지와 그의 친구 '너구리 잭'에 관한 이야기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자신만의 비밀 장소를 만들었다고 고백하는 작은 나무에게 할머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마음' 에 대해 이야기 해주신다. 그것은 '몸의 마음' 과 ' 영혼의 마음' 이다. 생존, 생활을 위해 필요한 마음이 몸의 마음이라면, 영혼의 마음은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하는데 필요한 것인데, 사람들이 물질에 욕심을 부릴수록 몸의 마음은 점점 줄어들어서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에도 죽기 전의 줄어든 영혼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영혼의 마음이 작은 사람은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작은 나무의 할머니는 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한 생각으로 남을 이용하고 해쳐서 자기 이익을 늘릴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영혼의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버렸으며, 그런 사람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솔직히 나 또한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아니, 나를 비롯해 현대인들은 거의 모두가 반쯤 죽어있는 사람들이다. 현대에는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사회적인 성공, 부를 위해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사는 사람이 존경받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은 패기가 없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치부해버리는 현대 사회에서 영혼의 마음을 살찌울 여유를 가진 사람들은 부랑자 아니면 돈이 많은 부자, 아니면 '도인'이나 '기인'들일 것이다. 나 자신만 하더라도, 영혼이나 정신적인 삶에 대해서는 떠올릴 새도 없이 꽉 막힌 답답한 삶을 살고 있다. 학교, 가족, 직장, 그 밖의 인생 스케쥴에서 적어도 내 의지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이 그저 훤히 내다보이는 앞만 바라보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남들처럼 늙고 병들어 죽을 것이다. 살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데도결국 남들과 크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마치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바보와 비슷하다. 하지만 '삶이란 뭔가?'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와 같은 문구들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어도 지금까지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던 내가, 언제부터인지 스스로 그런 의문을 느끼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차피 죽을 인생들인데 나는, 그리고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걸까? 그것도 절대로 기쁘기만 한 삶이 아닌 것을..' 이런 식의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잠시 후엔 걷잡을 수 없는 절망과 허무가 찾아온다. 노인이 된다는 것, 죽는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두려워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우울한 기분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내가 그런 고민과 두려움을 얘기할 때마다 '특별히 힘든 일도 없는 놈이 배부른 소리'하는 것이라고 친구들은 얘기하지만,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내 마음의 영혼에 대한 배려를 할 '여유'가 없는 것 같다. 안타깝지만 정말로, 현대인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왜 사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 이유도 혹시 내 영혼의 마음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에 나오는 작은 나무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 속 생활을 읽으면서 그들이 부럽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들의 생활이 물질적으로는 비록 풍족하진 못하지만 영적으로는 도시의 어떤 현대인들보다도 풍요롭고 평화로와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큰 근심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 이들의 삶을 보면서 나의 의문을 조금 바꿔볼 수 있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서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말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체로키 인디언들의 대답은 '욕심 없이,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이다. 작은 나무를 데리고 처음 산에 올라간 할아버지는 함정에 빠진 여러 마리의 칠면조 중에서 가장 볼품없는 두 마리만을 가져가면서 작은 나무에게 자연의 이치를 가르쳐준다. 그 핵심은 '필요한 만큼만 소유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