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제도, 아직 남아있는 신분의 굴레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카스트에 따라 부모들이 중매하여 결혼을 시켰다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인도 뉴델리 북서쪽으로 200㎞ 떨어진 하리아나 주 자디 마을에서 1999년 12월 10일, 상류층 카스트인 브라만 계급의 처녀와 사랑에 빠졌던 천민 계급 청년이 형제 3명과 함께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청년과 사귄 처녀도 7개월 전 이미 자기 마을 주민들에게 ?가문에 먹칠을 했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파키스탄에서도 종종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결혼에 어려움을 겪는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발생한다. 사랑하는 남녀를 갈라놓으려는 이유는 대부분 카스트 문제다. 동일한 카스트라면 사촌과 결혼하는 근친혼도 마다하지 않지만 카스트를 뛰어넘어 연애를 했을 경우에는 뭇매에다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을 정도로 철저히 응징한다. 이런 이유로 현대판 로미오와줄리엣들은 사랑을 위해서 국경을 넘어 아예 국외 망명을 신청하기도 한다.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카스트에 따라 부모들이 중매하여 결혼을 시켰다. 조건에 알맞은 사윗감이나 며느릿감을 쉽게 찾을 수 없을 때는 카스트와 경제적 지위, 출생지, 가족, 수입, 직업, 교육정도, 거주지역 등 상세한 결혼 조건을 내건 신문 광고를 내어 알맞은 혼처를 구할 때까지 몇 년이라도 기다렸다. 그러나 25세 이상의 여성은 이미 ?노처녀?로 여겨져 혼처를 구하기가 어렵다. 몇 년 전에는 결혼 전망이 어두운 것을 비관하여 뭄바이 교외에 사는 세 자매가 음독 자살한 사건도 일어났다.최근 인도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카스트나 종교와 상관없는 자유연애, 자유결혼 바람이 일고 있다. 이는 영국의 식민 통치부터 시작하여 근대화와 더불어 인도 사회에서 카스트의 장벽이 낮추어져 왔으며,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의 의식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애인과 배우자를 구하는 ?인터넷 중매? 사이트가 젊은이들의 이용 증가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카스트, 종교 등의 조건을 불문하고 자유연애를 통해 자기가 선택한 배우자감과 연애 결혼하려는 신세대와, 여러 조건을 꼼꼼히 따져보고 중매하여 자식의 혼처를 정해 주려는 구세대간의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비록 완화되기는 했지만 카스트제도는 결혼에 대해서만큼 아직 엄격하여 여전히 젊은 연인들의 결혼을 제약하는 굴레다.인도 고유의 신분제, 카스트제도너는 상것?, 나는 양반?, 너는 농노?, 나는 영주?중세에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신분제가 엄격히 존재했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신분제는 타파되고 평등한 시민사회로 차츰 발전해간다.구두쟁이 일가족, 아들이 자라면 아버지처럼 구두쟁이가 될 것이다. 구두쟁이는 전통적으로 수드라 카스트에 해당하는 하층민이다.지구상에 아직까지 신분제가 남아 있는 곳은 인도를 비롯한 힌두문화권이다. 힌두교 전통에 따라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나눠진 네 가지 카스트는 직업과 가문에 따라 다시 수천 가지 하위카스트(Subcaste)로 세분되었다.그밖에 최하위 신분으로 어느 카스트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Untouchable)들이 있다. 이들과 닿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생각 때문에 불가촉천민이라고 하는데, 간디는 이들을 이라는 뜻의 이라고 바꿔 부르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핍박받아 왔다는 생각에 를 뜻하는 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카스트제도는 최근 조금씩 무디어가고 있으나 어느 누구도 쉽게 개혁하지 못하는, 지구상에 남아 있는 최후의 신분제도다.카스트제도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으로 구성된 인도사회를 통합하는 데 기여한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나 사회를 정체시키고 발전을 저해한 부정적인 면이 더 많다. 카스트제도권 안에서는 다른 카스트와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직업의 선택도 제한을 받는다. 전통 카스트 사회에서는 소속 카스트의 직업은 불변이어서 부친의 직업을 자식이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는 마치 조선시대의 천민층인 백정은 대대로 백정의 직업과 신분을 물려받았던 것과 흡사하다. 카스트가 다르면 함께 음식을 먹지도 않고 서로 마주 앉지도 않는다. 1920~30년대 이후 인도에 근대화가 진전되면서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많은 변화를 겪고 완화되었지만 폐쇄성이 짙은 사회집단에게 ― 따라서 도시보다는 시골 마을일수록 ― 카스트제도는 아직 엄연히 존재하며 신분의 장벽을 이루고 있다.카스트제도의 유래와 정착라는 말은 포르투갈어 카스타(casta. 혈통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인이 인도의 신분제도를 보고 붙인 명칭이다. 고문헌에는 산스크리트어인, 바르나(varna)로 기록되어 있는데 바르나라는 말은 , 곧 피부색을 뜻한다.카스트제도는 기원전 1300년경, 고대 인도에서 인도-유럽 계통인 아리안족이 인도를 침입하여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정복하고 지배층으로 등장하면서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신분체계에서 비롯되었다. 라는 말에는 인도-유럽 계통으로서 흰 피부를 지닌 아리안족이 유색인종인 피지배층에 대한 우월감이 깔려있는 것이다.초기의 바르나(카스트) 체계는 자유민과 노예의 두 가지 바르나로 구분되었지만 그후 자유민 바르나 가운데 사제계급과 무사층이 분화했다. 이에 따라 브라만(사제)-크샤트리아(왕족, 무사)-바이샤(농민, 상인)-수드라(노동자, 노예로서 앞의 세 카스트에 봉사)의 네 등급 카스트가 성립했다. 그 외에 불가촉천민들은 네 카스트에 소속될 수 없는 ?아웃카스트?로서 자리매김되었다. 이들은 과거에 세력을 잃은 집단 또는 바라문교 세력권 밖에 있었다가 다시 편입된 부족집단 등이었다. 불가촉천민은 수공업에 종사하기도 하고 시체를 치우는 일 같이 일반인이 하지 않는 천한 일이나 부정(不淨)한 일을 도맡아 하는 최하위계급이므로 가장 부정한 자로 취급받았으며 거주와 직업 선택에 철저한 차별을 받았다.이후, 바라문교의 계급차별을 부정하는 불교가 일어나고 또한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인도 북서부가 침입당하여 새로운 지배층이 등장하면서 카스트제도의 서열에 대해서도 잠시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세력과 그리스인들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카스트는 인도에 뿌리내리게 된다.기원전 300~200년경에 집대성된 인도 최고(最古)의 법률서인 마누법전은 브라만(사제계급)을 중심으로 한 인도의 법질서를 규정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카스트제도를 합리화하는 흥미로운 신화가 전한다. 창조의 신 브라흐만이 사람을 창조할 때에 브라흐만의 입에서 브라만이 창조되었고, 그의 팔에서 크샤트리아가, 그의 대퇴부에서 바이샤가, 그의 발에서 수드라가 각각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각 카스트의 성격을 잘 반영하는 이 신화는 카스트제도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브라흐만이 네 카스트의 각각을 구별하여 창조하고 각 카스트에 고유한 사회적인 지위와 기능을 부여하여 사회질서의 유지를 꾀하였으므로 각 카스트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해야 하며 다른 카스트간의 결혼은 신의 뜻에 따른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마누법전에서는 ?타락해서 카스트를 오염시키는 자들이 태어나는 나라는 백성과 함께 금세 멸망한다?고 엄포를 놓음으로써 다른 카스트간의 통혼을 금했다.마누법전에서뿐 아니라 바라문교를 중심으로 인도 여러 종파가 통합된 힌두교의 교리 속에서 카스트는 더욱 고착된다. 힌두교에서는 사람은 영원히 반복되는 삶과 죽음과 재생의 윤회 속에 살고 있으며 개인은 전생의 응보(應報)로서 자기의 카스트를 타고난다고 설명한다. 카스트의 질서는 영원한 것으로, 현세에서 자기가 속한 카스트의 의무를 엄격히 지켜야 하며 소속 카스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중대한 죄악이 된다.카스트제도에 대한 역사적 저항과 변천지배층의 변화에 따라 인도에는 11세기 이후 이슬람교가 들어오고 15세기 이후 서구 열강의 진출로 기독교가 들어왔다. 그러나 힌두교의 강력한 문화적 흡수력으로 인해 신분제를 부정하는 이들 외래종교도 인도 문화 속에 포용되어 오히려 새로운 카스트를 형성하게 되었다.1997년 9월, 불가촉천민들과 상층 카스트계급 사병들의 충돌로 간밤에 아들을 잃은 불가촉천민 여인이 서럽게 통곡하고 있다.카스트에 반발하여 인도에서 일어난 종교는 기원전 6세기경의 불교와 자이나교, 16세기 나나크가 창설한 시크교가 대표적이다. 불교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13세기경 인도에서 세력을 잃었으나 자이나교는 인도 서부지역에서 존속되고 구자라트와 라자스탄에서 유력한 상인집단으로 성장했다. 시크 교도들도 오늘날까지 독자적인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데, 자이나교와 시크교도 역시 힌두교의 일파요, 새로운 카스트로서 취급받았다.1600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영국이 19세기 초 인도 전역을 식민통치하면서 상위 카스트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카스트제도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근대화가 진전되면서 도시가 발달하고 직업이 분화하자 전통적인 직업이 불필요해진 많은 인도인들이 도시로 모여들어 새로운 직업을 찾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하위카스트가 소멸하고 새로운 하위카스트가 생겨나는 등 카스트제도도 변화를 겪었다.그러나 식민통치를 맡은 영국은 불간섭주의를 내세워 카스트제도의 개혁에 그다지 노력하지 않았고, 카스트간의 갈등을 통해 인도인들의 단합을 깨뜨려 반영(反英) 민족운동의 분열을 꾀하기도 했다. 이에 간디와 같은 인도 지도자들은 반식민주의와 함께 인간평등사상을 내세워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 폐지를 주장하였다. 1947년, 인도가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는 법률적으로 카스트에 따른 일체의 차별이 폐지되고 불가촉천민들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오늘날의 카스트제도상위 세 카스트인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계층은 힌두교에서 재생할 수 있다는 교리가 있어 ?재생족?이라 불린다. 이들 세 카스트 사이의 차별은 그리 심하지 않아서 전통적으로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로 구분하던 카스트는 최근 재생족-수드라-불가촉천민의 세 단계로 변모하였다.1950년에 공표된 인도 헌법에는 "모든 인도인은 카스트, 성별, 종교, 언어 등에 따라 차별을 받지 않는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1955년에 이르면 인도 정부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을 막기 위해 오히려 역차별정책을 시도하며 이들을 보호하는 데 주력해 왔다.
영화 아나스타샤에 나타난 시대적 배경니콜라이 2세의 짜르 즉위식이 성대하게 펼쳐지는 러시아 궁전,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 마리 황태후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손녀 아나스타샤에게 뮤직박스와 그것을 열 수 있는 꽃 모양의 열쇠 목걸이를 선물로 준다. "파리에서 함께 만나자"라는 글귀와 함께. 그러나 이 축하연을 끝으로 라스푸틴의 저주에 의해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하고 러시아의 마지막 공주 아나스탸샤는 행방불명이 된다.러시아 제국이 사라진 후로부터 10년의 세월이 지나고, 18세가 된 아나스타샤가는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린 채 아냐라는 이름을 가진 러시아 소녀로 성장한다. 아냐는 우연히 잘생긴 청년 드미트리와 만나게 되고, 아냐는 그와 함께 마리 황태후를 찾아가는 여정에 오른다.한편, 죽은 줄 알았던 아나스타샤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 라스푸틴은 아냐 일행을 쫓아 끊임엇이 방해하고 위험에 빠뜨린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냐와 드미트리는 용기와 지혜로서 이를 헤쳐내고 드디어 마리 황태후가 있는 파리에 도착한다.아냐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했던 처음 생각과는 달리 아냐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드미트리는 황태후와의 접견이 어려워지자, 황태후를 그들이 묵는 호텔로 납치해와 그가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던 뮤직박스를 보여준다. 뮤직박스를 보고 모든 기억을 떠올린 아냐는 뮤직박스의 곡조를 흥얼거리며 자신이 걸고 있던 "파리에서 함께 만나자"라는 글귀가 새겨진 목걸이로 뮤직박스를 열면서 자신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임을 증명하면서 드미트리와 키스를 한다.내용 자체는 단순한 헐리우드식의 동화적인 에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이 영화에 나타난 시대적 배경을 보자.여기에 나오는 아나스타샤라는 인물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사이에서 난 막내딸이다. 시대적 배경은 러시아 제국이 사라진 지 10년 후이다. 이 때는 이미 러시아 혁명의 주도자였던 레닌은 이미 사망하고, 스탈린이 그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되어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던 때였다. 따져보면 정확한 배경은 1927-29년이 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는 러시아도 세계 1차 대전을 끝낸지 10년이 지났으며, 세계는 가시적인 평화속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시대였다.■ 용 어 설 명1. 아나스타시야(Anastasiya Nikolayevna : 1901. 6. 18 - (?)1918. 7. 16/17)러시아의 황녀.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사이에서 난 막내딸이다.10월 혁명 뒤 볼셰비키들에 의해 감금당해 있던 지하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죽음을 당한 것 같다. 처형이 있은 뒤 외국에서 몇몇 여성들이 아나스타시야를 자칭하고 나타나 주기적으로 세인들의 억측과 소문의 대상이 되었다. 이 여인들은 저마다 처형을 모면하고 러시아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고 주장했으며, 일부는 스위스은행에 있는 로마노프 왕조의 재산 상속권을 주장하기도 했다.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자신을 애나 앤더슨이라고 했던 여성이었다(감정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그는 프란지스카 샨스코프스키라는 폴란드인이라고 함). 그녀는 1968년 미국의 역사학교수 J. E. 매너헌과 결혼했으며 말년에는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살다가 1984년 2월 12일 죽었다. 1970년까지 그녀는 로마노프 왕조의 법적 재산 상속자로 인정받고자 했으나, 그해 서독 법원은 그녀의 소송을 최종 기각하고 러시아 황실의 남은 재산을 메클렌부르크 공작부인에게 넘겨주었다.그녀의 생존설을 소재로 프랑스의 마르셀 모레트(1909~72)가 〈아나스타시야 Anastasia〉라는 희곡을 썼고 이것이 1954년 초연되었다. 1956년 미국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잉그리드 버그만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2. 로마노프 왕조 (Romanov dynasty)1613년부터 1917년 2월 혁명 전까지 러시아를 다스린 왕조.1917년 3월 15일(구력 3. 2), 니콜라이 2세는 동생 미하일에게 양위했으나 다음날 미하일은 왕위를 거부했다. 니콜라이와 그의 직계 가족은 1918년 7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처형되었다. 나머지 로마노프 일가도 국외로 도피하거나 처형당했다.3. 러시아 혁명 (Russian Revolution)20세기의 세계사에서 가장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갖는 사회변혁.1905년과 1917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났으며 통상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면 1917년의 혁명을 가리키기도 한다.1905년의 혁명러시아 제국의 정치?사회 체제에 대한 불만은 1905년 이전 몇 년 동안, 특히 굴욕적인 러일전쟁(1904~05)이후 다양한 사회단체의 시위로 폭발했다. 그들의 항거는 자유주의적 의사개진으로부터 파업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양상을 띠었으며, 학생소요와 테러범들의 암살이 포함되었다. '해방동맹'과 연계되어 있었던 이러한 시도들은 '피의 일요일' (1905. 1. 22)에 동궁(冬宮) 앞 광장에 집결해 있던 평화로운 시위군중들을 제국 군대가 무차별 살상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총파업이 수도와 산업 중심지에서 뒤따라 일어났으며, 2월에 니콜라이 황제가 정부의 자문기관으로서 의회의 설립을 약속했지만, 이러한 제안은 파업중인 노동자와 농민, 심지어 젬스트보(지방자치적 농민공동체)의 자유주의자들이나, 4월경에 제헌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진보적 전문 직업인들조차 만족시키지 못했다.폭동은 비러시아 지역, 특히 폴란드, 핀란드, 발트해 연안지방, 그루지야 등으로 확산되어갔으며 민족주의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반혁명세력인 '검은 백인단'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는데,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습격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군대 또한 폭동에 가담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변에 주둔한 부대들이 반기를 들었다. 6월에는 오데사 항에 정박중이던 전함 '포툐킨호'에서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자문의회의 선거절차를 알리는 8월 6일자 정부포고문은 더욱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9월 1개월 간 가중된 폭동은 10월과 11월 사이에 극도로 악화되었다. 10월 7일에 시작된 철도파업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총파업으로 발전되었다. 파업위원회의 구실을 한 '소비에트'는 이바노보보스네센스크에서 최초로 결성되었다. 초기에 총파업을 주도한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였으나 사회민주주의자들, 특히 멘셰비키가 가담하자 혁명정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소비에트는 모스크바?오데사 등 러시아 내 여러 도시로 급속히 파급되어갔다.니콜라이는 엄청난 규모의 파업에 당면하자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 그는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의 자문을 받아 헌법제정과 의회(두마)의 창설을 약속하는 '10월선언'을 발표했다. 비테는 새로운 각료회의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의회 혹은 공화국에 대한 급진 반대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혁명지도자들은 타협을 거절했으며 심지어 자유주의자들조차 비테의 내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일부 온건파는 만족스러워했으며, 10월 선언을 승리로 받아들인 많은 노동자들은 작업대로 복귀했다. 이것은 반대파의 제휴를 해체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약화시키기에 충분했다.11월말 정부는 소비에트 의장이며 멘셰비키인 흐루스탈레프 노사르를 체포하고, 12월 3일에는 소비에트 건물을 점거하고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는 새로운 총파업이 무르익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무력충돌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다. 일부 악법을 철폐함으로써 핀란드는 질서를 회복했지만 폴란드, 발트 해 연안지역, 그루지야에는 특별원정부대가 파견되어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감행했다. 1906년초 정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군대의 통제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으며 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1905년의 봉기는 전제정치를 민주공화정으로 대체하지 못했고, 제헌의회 소집에도 실패했으며, 혁명의 지도자들은 거의 체포되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로 하여금 광범위한 개혁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실은 헌법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제정된 '기본법'(1906) 및 합법적인 정치활동과 정당활동의 발전을 촉진시킨 의회의 창설이었다.4. 라스푸틴 (Grigory Yefimovich Rasputin)1872(?) 러시아 시베리아 튜멘 근처 포크로프스코예~1916. 12. 30(구력 12. 17)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시베리아 태생의 농부, 신비주의자.혈우병(血友病)을 앓고 있던 러시아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의 병세를 호전시켜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의 궁정에서 총애를 받으며 세력을 휘둘렀다.농부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노비흐는 학교를 다니기는 했지만 글을 몰랐으며 방탕한 생활로 인해 러시아 말로 '방탕한 사람'이란 뜻의 라스푸틴이란 성(姓)을 가지게 되었다. 18세 때에 개종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침내는 베르호투레에 있는 수도원으로 가 그곳에서 흘리스트(고행자) 종파를 알게 되었다. 그는 흘리스트 신앙을 왜곡해 인간은 '신성한 냉정함'을 느낄 때 신에게 가장 가까이 갈 수 있으며 이 상태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랫동안의 방탕 뒤에 느끼는 성적 소진(性的消盡)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세웠다. 그는 수도사가 되지 않고 포크로프스코예로 돌아왔으며, 19세 때 프로스코비아 표도로브나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결혼생활도 그를 붙잡아두지는 못했다. 그는 집을 떠나 그리스의 아토스 산, 예루살렘 등지를 떠돌며 농민들의 헌금으로 생활했고, 환자를 고치고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으로 영적 지도자(starets)라는 명성을 얻었다.
Harry S. Truman(1945∼1948 / 1948 ∼ 1953 : 연임)■ 중요사건Ⅰ. 베를린 봉쇄와 공수 (Berlin Blockade and Airlift)가. 사건의 발단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를린은 남부(미국), 서부(영국), 서북부(프랑스), 동부(소련) 의 4개 지구로 분할·점령되었고, 이의 공동관리를 위해 연합국의 베를린통치기구(AlliedKommandatura)가 구성되었다. 이와 함께 베를린을 제외한 전 독일도 4개국에 의해 분 할·점령되었고 독일에 대한 공동관리를 위해 연합국공동관리위원회(Allied Control Council)가 설치되었다.1948년 3월 서유럽 강대국들은 독일 내의 자신들 관할구역을 통합해 단일한 경제단위 를 만들기로 했다. 소련 대표는 이에 항의하여 1948년 3월 20일 연합국공동관리위원회 에서 탈퇴했다. 또한 서독 전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베를린에도 새로운 독일 마르크 화 (貨)가 도입되었는데 이 조치가 동독의 통화를 위협한다고 본 소련 점령군은 베를린과 서독을 잇는 모든 철도·도로·수로를 차단하기 시작했다.나. 사건의 경과1948년 6월 24일 소련은 4대 강국의 베를린 행정위원회가 폐지되었으며 서유럽 연합 국은 더 이상 베를린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6월 26일 미국과 영국은 항공편으로 베를린 시에 생필품들을 공급하기 시작했으며, 크게 줄어든 서베를린 산업 수출품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거꾸로 공수했다. 7월 중순에 이르러 동독 주둔 소련 점령 군은 40개 사단으로 늘어났으나 연합국 주둔군은 8개 사단에 불과했다. 7월말까지 3개 편대의 미국 전략폭격기가 영국군을 증강시키기 위해 파견되었다.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절박하리만큼 연료와 전력이 부족했지만 공수작전은 11개월 동안 서베를린을 살려주 었으며 마침내 1949년 5월 12일 소련이 봉쇄를 풀었다. 공수작전은 9월 30일까지 계속 되어 총비용 2억 2,400만 달러에 232만 3,738t의 식량과 연료, 기계 및 기타 지하는 데 있다”고 밝 혔다.그 날 안전보장이사회는 찬성 7, 반대 1, 기권 2, 결석 1로 유엔 회원국들이 동 지역 에서의 군사적 공격을 격퇴시키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6월 27일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와 회원국이 제공하려는 원조형식에 관하여 보고해 줄 것을 요구한 6월 29일의 유엔 사 무총장 서한에 대한 회원국들의 반응은 신속하였고, 압도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한편, 미국과 관계 회원국들은 즉각적으로 동 결의에 따랐으며,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영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프랑스 ·캐나다·남아프리카공화국·터키·타이·그리스·네덜란드·콜롬비아·에티오피아·필 리핀·벨기에·룩셈부르크 등 16개국이 육·해·공군의 병력과 장비를 지원하였으며, 그 밖에 많은 나라들도 각종의 경제적·인도적 지원을 한국에 제공하였다.그 후 같은 해 9월 16일의 인천상륙작전을 전환점으로 하여 전세를 반전시킨 유엔군 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 10월에는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에는 북한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38선이 돌파된 후인 1951년 1월 4일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서울을 철수하게 되어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 일대 로 고착되었다.1951년 2월 1일 유엔 총회는 중공을 침략자로 규탄하고 한반도에서의 중공군의 즉각적 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앞의 6월 25일의 결의와 6월 27일의 결의에 소 련은 결석했으며, 공산측은 결석을 거부권의 행사라고 주장하여 앞의 결의는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엔의 관행상 결석은 거부권행사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 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이에, 1951년 2월 1일 총회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평화를 위한 단결’결의에 의거 중공은 한국의 침략자라는 결의를 채택하고, 이어 5월 18일에는 동 결의 제6항에 의거 부과된‘집단적 조치위원회(Collective성공가. 사건의 발단미국사회가 195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무관심, 안일한 개인주의, 인종분쟁 등 국내문제의 수렁에 싶이 빠져 있는 동안 소련의 군사과학은 계속 발전을 거듭하여 인공 위성의 발사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나. 사건의 경과소련은 1957년 10월 4일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Sputnik) 1호의 발사를 성공시킨다. 이는 군사적으로 제공권 장악에서 한 차원 더 앞선 우주권의 장악을 의미 하였다. 소련의 스푸트니크(Sputnik) 1호에 놀란 미국의회는 부랴부랴 국방교육법 (National Defense Education Act)를 제정, 머리좋은 고교생, 대학생들에게 정학금을지 급하고 각종 연구소에 연구비를 지급하여 과학교육 진흥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이 혜택을 받는 과학자들에게는 공산주의를 배척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케하는 등 국가의식의 고조가 의도적으로 강조되었다.다. 사건의 국제적 영향스푸트니크의 후광을 입은 소련과 공산권 국가들은 서방 세계에 대하여 일제히 공세 를 취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신생국가들에게 막대한 경제원조를 제공했고 중공은 금문 도, 마조도에 포격을 개시했다. 후르시쵸프(Nikita Khrushchev)소련수상은 동독시민들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베를린 비무장안을 내놓았고 쿠바에서는 혁명 적인 카스트로정권이 수립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말대로 바야흐로 공산권은 서 방측에 대하여 "전면적인 냉전(total cold war)"를 선포하고 나선 것이다.John F. Kennedy(1961∼1963)■ 중요사건Ⅰ.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가. 사건의 발단1960년 5월 소련 무기로 쿠바를 방위한다는 약속을 했던 소련의 니키타 S. 흐루시초 프 서기장은 소련이 쿠바에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설치한다 해도 미국이 아무런 방해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62년 7월 미국은 소련이 쿠바로 미사일을 수 송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월많은 비전투 군사요원들을 파견했다. 1962년말, 남베트남 주둔 미군 고문단의 수는 900명(1960)에서 1만 1,000명으로 늘어났고, 케네디는 만약 적으로 부터 공격을 받으면 전투를 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디엠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그 의 군대 안에서도 커져가 디엠은 1963년 11월 1일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에서 마침내 암 살되었다. 미국 정부는 그에게 실망하고 있었으며 사전에 쿠데타에 관해 알고 있었다. 디엠이 죽은 뒤 여러 내각이 계속 바뀌었고, 남베트남이 이처럼 정치적 수렁에 빠져 있 는 동안 베트콩의 활동은 더욱 거세져갔다. 8월 북베트남의 초계정 수척이 통킹 만에서 미군 구축함 매독스호에 사격을 가했다는 보고를 들은 존슨 대통령은 이에 대한 보복으 로 미해군 비행기들에게 북베트남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나. 사건의 경과미국 의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에게 "공격을 격퇴하고……더이상의 공격을 방지 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통킹 만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통킹 만 결의안은 사실상 대통령에게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 록 하는 공식적인 권한을 부여해주었다.1965년 이후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개입은 (1964년까지 남베트남에 3만 5,000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베트콩의 세력강화와 40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서도 베트콩 을 진압하지 못하는 남베트남 정부군의 무능 때문에 급속하게 규모가 커졌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공격 혹은 전복에 맞서 싸우는 데 미국의 도움에 의존하거나 의존할지 모르는 다른 맹방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점 더 전쟁에 깊이 개입해 들어갔다.베트콩 군대는 갈수록 많은 농촌지역을 장악해갔고, 공산주의자들의 승리는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존슨 대통령은 미국이 남베트남을 지킨다는 약속을 하고 군대를 더 파 견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1965년말에 18만 명의 미군이 윌리엄 C. 웨스트모얼랜드 장 군로부터의 미군의 점 진적 철수는 이전에 공표한 대로 진행되었으나, 평화회담은 여전히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었다.1971년말 남베트남군은 여전히 미국 공군의 지원에 의존했지만, 지상에서의 모든 전 투의 작전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남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은 약 16만 명으로 줄어들었 다. 1972년 3월 북베트남군은 비무장지대로 쳐들어와 쾅트리 성(省)을 점령했다. 닉슨 대통령은 하이퐁을 비롯한 북베트남의 다른 주요항구에 기뢰를 부설하고 북베트남에 대 한 집중적인 폭격을 퍼부을 것을 명령했다. 평화회담은 7월에 다시 시작되었으나 12월 중순 양측이 각각 상대방에게 약속을 위반했다고 비난함으로써 대화가 중단되었다. 하 노이와 북베트남의 도시들은 그 후 11일 동안 미군의 집중 폭격을 받았다.파리에서는 다시 회담이 시작되었고, 1973년 1월 27일 마침내 남베트남 공산주의 세 력, 북베트남, 남베트남, 미국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졌다. 8월 들어 미국 의회는 인도차 이나에서 더이상의 미군의 전투를 금지했다. 1973년말 남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은 거의 사라졌다.그러나 정전 협정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계속되었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각각 상 대방이 정전협정을 수없이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 수는 과거 어느 때에 못지 않게 많았다. 1974년 남베트남은 더이상 방어할 수 없는 변경 지역을 포기하 기 시작했고, 베트콩은 여러 지방 도시들을 점령했다. 1975년 1월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북베트남군이 푸오클롱 성을 공격하자 남베트남 정부군은 후퇴했다. 예상치 못하던 남베트남 정부군의 푸오클롱 성 포기는 북베트남군으로 하여금 남베트남 에 대한 총공세를 결행할 수 있는 때가 왔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에 북베트남군은 중부 고원지대에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고, 남베트남 정부군은 3월 이 지역을 포기했다. 그 리고 나서 티우 대통령은 쾅트리·위에 시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남베트남 군은 해안 도시들을 하나씩 포기하더니 4월초에는 남베트남의 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