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론인류역사이래 가부장제야말로 온 세계에 편재하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의 경우는 남성이 대를 잇는 주체이며 사회활동의 주역이라는 유교적 남성중심주의 사상이 가부장제를 한층 심화시켰다. 요즘들어 남녀평등이 실현되었다고 보지만, 여성들의 지위향상은 제도적, 사회통념상, 또는 우리의 고정관념으로 봐서도 아직 먼 거리에 있다고 보인다. 여성의 활동이 제약된 가부장제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여성작가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현재 그들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반성해보고자 한다.Ⅱ. 본론한국 사회 안에서 근대적 여권의식의 태동은 이미 17C의 실학운동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나와 있지만 19C 중엽의 동학의 창도를 거쳐 형성된 평등한 인간관 안에 여성을 포함시켜 보다 폭넓은 사회적 기반을 이룰 수 있게 된 시기는 아무래도 근대 초기의 역사적 시점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즉, 근대 초기란 역사적 변혁기에 여성들의 사회적 각성이 증대되고,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 세대가 배출되면서 여러 사회활동과 문화예술 활동이 여성에게도 할애되기 시작한 시기라는 것이다.여성을 자주적·인격적 존재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천주교와 동학이 몰고 온 개화세력이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이후부터였다.천주교는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해방 사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특히 부계중심의 가족제도와 내외법으로 소외된 여성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동학 역시 대외적으로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외치고 대내적으로는 민중의식의 고양과 함께 빈부귀천, 남존여비에 항거하는 반유교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여성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물론 천주교나 동학운동에 여성 지위향상을 위한 조직적인 노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개항후 신교의 포교는 신교육을 통해 여성 개화에 뚜렷한 계기를 만들었으며, 동학운동은 반유교적 개화의식과 애국애족 사상을 고취함으로써 근대 여성해방운동의 정서적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 문학이 개체가 중심이 되는 문학이라는 점에서 전근대문학과 구별된다면, 고백체 문학은 바로 그러한 근대성의 특징을 담고있는 양식이며, 이점에서 사소설의 근대적 의미를 규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작품으로서 그녀의 예술세계에 대해 좀 더 고찰해보자.데뷔작인 〈의심의 소녀〉는 1917년 최남선의 청춘 11월호에 게재되었으며,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에게 죽음과 굴욕을 강요하는 불합리한 부부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가희엄마는 남성사회의 횡포 즉, 남성들의 여성편력에 희생되는 희생양으로서 표현되어지고 있는데, 그녀의 자살은 패배라기 보다는 다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반항을 표현한 것이라 해석되어진다.〈탄실이와 주영이〉에서 김명순은 자신의 호 탄실(彈實)을 사용함으로서 작품안에 자신을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에서 김명순은 "내가 성장하는 나라는 약하고 무식함으로 역사적으로 남에게 이겨본 적이 별로 없었고 늘 강한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 경우에서 벗어나야겠다. 벗어나야겠다. 남의 나라 처녀가 다섯자를 배우고 노는 동안에 나는 놀지 않고 열두 자를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말한다.) "탄실이와 주영이".조선일보.1924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 할 것은 불합리한 가족제도의 모순을 파헤쳐 새로운 여성의식을 일깨운 것이라 하겠다.〈돌아다 볼 때〉에서는 주인공 류소연과 송효순을 등장시켜 구여성을 이미 처로 두고 있는 유부남과 신여성의 만남이라는 전형적인 인물유형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관계인 두 사람이 사실 부당한 제도의 희생자들이며, 순교자들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랑은 "서로의 사랑이 공명하는 것"이라 표현되고 있다.네. 소연씨. 사람이 사랑을 구한다거나 잃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 사랑을 가지고 어떤 대상으로 하여금 그것을 눈 깨우게 되어서 결국 분명한 생활 의식을 가지는 데 애가 없는 결혼은 부덕이다" 라고 말하면서, 자유로운 근대적 주체인 두 남녀의 만남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혜석과 김원주 역시 엘렌케이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자유로운 연애가 곧 개인의 해방이요. 이를 깨달은 자가 신여성인 셈이다.김명순은 자유연애를 극도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거의 모든 소설에 유부남-처녀, 유부녀-미혼남, 유부남-유부녀의 사랑관계를 등장시켰다. 탄실을 비롯한 그 당시 신여성들의 생각에 연애감정 없는 결혼은 매음에 다름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강조가 김명순 더 나아가 신여성에 대한 비판을 "성적담론"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꺼리를 제공한 것이다.봉건제적 가족에 대한 이같은 도전은 추상적이고 지엽적인(중산층에 기반한)현실 파악에 기반한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지만, "문학"이라는 당시의 파급적인 동일기제를 통해 주장한 것이기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일제말기 봉건제 사회는 김명순에 대해 "방탕하다"는 낙인으로 맞섰다. 이명은은 〈흘러간 여인상〉에서 김명순이 현실에서도 사랑을 갈구하느라 방탕했음을 여러 장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다."김명순은 일찍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불행한 소녀 시절을 보내다가 당시 동향인이며 평양의 부호 화백인 김유방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이화학당을 다니며 문학에 전념한 것인데, 그가 외로운 환경에서 발견한 것이 문학이요 그 보호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 김유방이었다. 이러한 문학소녀와 처자가 있는 김유방은 끝내 동거생활까지 했었다. 김명순은 김유방에게 순수한 사랑을 바쳤으나 김유방은 자유주의자요 한 여성에게 자기의 생활을 전부 바치는 남성이 아니었다. 이렇게 배신을 당한 김명순은 동경여자전문학교에 입학했고 김유방의 부탁을 받고 동경에서 그를 도와준 임노원과 친숙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나, 이때부터 김명순은 그의 사랑을 충족시켜줄 상대자를 찾아 헤매게 되었고 귀국한 후 남성 문인들과 어울려 방종한 생활을 계속 하다가 사생아까지 낳고..."또한 김동인은 김연실 즉 김명순을 서구적 자유주의 사상을 아무 비판없 주목을 받았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해 줄 것을 다짐해달라는 약속도 그러하거니와 신혼여행으로 전 애인 최승구의 무덤에 찾아가 남편과 함께 비석을 세운 것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화가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으며 개인전람회까지 개최한 나혜석은 이 시기 인생의 황금기를 맞는다. 매번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것은 물론 여성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하고 파격적인 글들을 발표하여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나혜석의 황금기는 1927년 유럽여행(구미만유)을 떠나면서 절정에 달한다. 일본 외무성의 관례에 의해 떠나게 된 이 여행에서 나혜석은 개인적으로 두가지 큰 사건에 맞닥뜨린다. 하나는 예술의 본 고장인 프랑스 등지에서 피카소, 마티스, 드랭 등 뛰어난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목격한 일이고(이때 그는 "마치 명태알 한 뭉텅이가 있다면, 대가의 그림은 그 뭉텅이만하고 자기라는 것은 그 중에 한 알만한 것 같았다"라고 고백한다), 다른 하나는 나중에 김우영과의 이혼으로까지 이어지는 최린과의 연애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이후 나혜석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유럽에서 맛보았던 자유로운 생활과 돌아온 고국에서의 갑갑한 삶의 괴리는 나혜석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컸다. 또한 최린과의 연애 사실이 공개되면서 이혼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최린 제소등의 여러 사건으로 나혜석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가족들로부터, 전 남편과 자식들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나혜석은 1948년 12월10일 추운 겨울날 행려병자로 죽는다. 이는 눈 감겨주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이었다. 주요작품으로는 〈경희〉,〈어머니와딸〉,시〈인형의가〉,수필〈모된감상기〉가있다.그녀의 대표작〈경희〉에서는 강요된 결혼을 거절하며 정체성을 확립하는 여대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줄거리를 최소화 시켜 보면 경희가 아버지에게 혼인을 종용받여준다.이 몸에 비단 치마를 늘이고 이 머리에 비추옥잠을 꽂아볼까 대갓댁 맏며느리 얼마나 위엄스러울까? 새애기 새색시 놀음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시부모의 사랑인들 얼마나 많을까, 지금 이렇게 천동이던 몸이 얼마나 귀염을 받을까, 친척인들 오죽 부러워하고 우러러볼까? 잘못하였다. 아아 잘못하였다. 왜, 아버지가 "정하자"하실 때에 "네"하지를 못하고 "안돼요"했나. 아아 왜 그랬나.경희가 지나고 있는 안일에 대한 유혹을 내적 독백으로 전달하고 있는 이런 부분들 때문에 경희가 보다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로 독자들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해방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을 만큼 작은 부분, 공부를 마칠 때까지 결혼하지 않겠다는 자유를 얻어내려는 어려움과 고민을 여성이 아닌 성이 알 수 있을까?이런 고뇌를 통해 경희가 획득한 성의 정체성은 여성의 인간선언이다.먹고만 살다 죽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금수이지요. 보리밥이라도 제 노력으로 제 밥을 제가 먹는 것이 사람인 줄 압니다. 조상이 벌어 놓은 밥 그것을 그대로 받은 남편의 그 밥을 또 그대로 얻어먹고 있는 것은 우리 집 개나 일반이지요.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이철원 김부인의 딸보다 먼저 하느님의 딸이다. 여하튼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의 형상이다.이 인용에서 우리는 성의 정체성 확립이 그동안 흔히 주장되어 왔듯이 편협한 성적 평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희는 여성억압의 원인이 경제적 의존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노동의 의의를 발견하고 있다. 경희 신분 요건에서는 하지 않아도 되는 잡다한 집안일을 솔선해서 하고 거기에서 기쁨을 찾아내는 경희의 태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밥을 먹는 것이 팔자 좋은 여성으로 인정되던 시대의 사회의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경희의 인식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 노력으로 제 밥을 제가 먹어야만 사람이라는 인간론에 이른다. 노동하는 인간론이 당시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