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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정치] 러일전쟁과 조선의 몰락-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 서평-
    러·일 전쟁과 조선의 몰락-「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를 읽고-1. 서 론역사는 과거의 정치이고 정치는 현재의 역사이다. 특히 무정부적인 특징이 사라지지 않는 국제관계속에서 역사는 국가간의 정치에서 더 많은 교훈과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는 잊혀지거나 그 중요성이 상실된체 하나의 사건으로만 남겨질 경우가 많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는 그러한 잊혀진 혹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미미한 사건으로 치부되어온 러·일 전쟁을 재조명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또다른 통찰력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저자는 책에서 잊혀진 역사를 상기시키고 이를 통해 국가간의 정치에 있어서 전쟁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승리한 전쟁이지만 외교의 실패로, 국제체제의 성격을 내다보지 못한 정책결정자들의 뼈져린 후회를 지적하고, 반면 이러한 교훈을 통해 탈아시아적 강대국으로, 마키아벨리적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해나가는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한편 역사의 강력한 충고를 무시한체 명분론에 빠져 완벽한 고립정책을 추구하면서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꿈꾸던 조선은 결국 그들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거대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었고 이 또한 역사의 교훈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조선에 대해 동정의 손길을 보내는 국가는 없었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조선이 받았던 평가는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말로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본에 대항하여 조신인들을 위해 개입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어를 위해 한방도 날릴 수 없었다.......어떠한 국가도 자국의 이익과 관련되지 않은 조선인들을 위해 그들 스스로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것이라고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전쟁을 분석하는 일반이론에는 여러 가지 분석수준과 방법론이 존재한다. 구조적 현실주의로 대표되는 Waltz는 「Man, The State and War(1959)」에서 전쟁을 인간, 국가, 국제체계 차원으로 분석한 다음 국제체계차원의 분석이 가장다. 이처럼 세련된 지식의 선구자인 투키디데스의 방법론을 통해 바라본 러·일전쟁속에서 국가간의 정치를 이행함에 있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주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시사점들이 모두 조선의 몰락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아쉬움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아시아의 병자로 취급받았던 중국의 조공국가로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저자는 러·일전쟁을 분석함에 있어 먼저 동아시아 지역이 아닌 유럽의 세력균형을 다루고 있다. 다음으로 이러한 유럽의 세력균형 정책이 동양으로 전이되면서 동서양간의 문명의 충돌을 일으키면서 동양의 각 국가들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가 전개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투기디데스의 방법론에 따라 러·일전쟁을 분석하고, 마키아벨리적인 일본의 성장과 팽창과 함께 플라톤적인 조선의 몰락과정을 제시하고 있다.그리고 마지막에는 국제관계에 있어서 역사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외교정책 결정자들에게 깊은 통찰력을 제공하고자 한다.2. 비스마르크체제 붕괴와 세력균형의 동요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비엔나 협정을 계기로 유럽은 100년간의 평화시기를 보내게 되지만 진정한 의미의 평화는 아니었고 평화를 깨뜨리는 크고 작은 갈등과 전쟁은 내재해 있었다. 그속에서도 독일의 통일이후 등장한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은 후반 1세기 동안의 평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국제체계에서 강대국의 지위로서 오스트리아가 사라지거나 오스트리아로부터 적대감을 받지 않도록 함으로써 오스트리아와 3제 동맹을 체결하는 등 우방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동방의 위기로 촉발된 흑해를 둘러싼 러시아와 영국-오스트리아간의 갈등을 베를린 회담으로 중재함으로써 갈등을 해소하는 정직한 중재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러시아는 비스마르크에 중재에 대해 불만족 하였지만 프랑스처럼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당시 세력균형에서 가장 두려워 한 것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연합이었으며 이를 못한체 팽창을 지향하는 빌헬름 2세에 의해 1890년 3월 철의 재상직을 실각하게 된다. 새로운 카이져는 식민지 정책을 원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해군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외교전략에 있어서 과거 비스마르크가 러시아와 프랑스를 격리시키기 위해 추진했던 러시아측과의 연합을 영국으로 선회하였다. 결국 신세대적 사고에 기반한 외교전략은 고립주의의 영국과 대동맹을 성사시키지 못한체 프랑스와 러시아간의 동맹조약이 공식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면서 갈등은 고조되었고, 이러한 갈등은 제국주의적 식민지 정책과 더불어 동아시아로 전이되게 된다.3. 동북아 조공체제의 붕괴와 갈등서양 열강이 전개되기 이전의 동북아 한·중·일은 중국을 중심으로하는 종주권체제였다. 여기서 일본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격리되어 있어 다소 자율적인 외교가 가능하여 일찌기 서구와 제한적인 무역을 하였지만, 서양 제국주의가 접근하던 이 시기에 전반적으로 3국은 쇄국정책을 유지하면서 각각의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보이게 된다.먼저 중국은 거부와 저항의 정책으로 충돌하였는데, 수천년간 문명의 중심국가로 자부하던 중국은 서양을 하나의 야만인으로 평가하면서 그들을 멀리하려고 하였다. 심지어 아편전쟁(1839∼1842년)의 결과로 영국과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서양 야만인들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는 바뀌지 않았고, 결국 애로우 선박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군사공격을 받은 후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과 1858년 5월 텐진조약을 맺게되고, 이후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자 텐진조약 개정을 요구하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가 베이징까지 진격하여 베이징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중국은 아시아의 병자(The sick man of Asia)로 전락하고 말았다.이러한 중국과 유사한 몰락과 함께 더욱 비참한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국가가 바로 조선이다. 조선은 자신들을 진정한 유교사상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보고 인간의 미덕을 추구하는 플라톤식 국가였다. 이러한 유교주의 국가의 국제관계는 중국 중심의 수직적 치를 인식함으로써 일본은 마키아벨리적인 근대 국가로 성장함은 물론 이후에는 제국주의로 치닫게 되었다.이러한 서양체제의 편입과정속에 조선을 사이에둔 중국과 일본의 갈등이라는 동북아 지역내 하위체제가 형성되면서 갈등은 곧 중(청)·일 전쟁으로 귀결된다. 임오군란으로 중국과 일본은 조선내 군대를 철수하기로 하는 텐진조약을 체결하지만, 갑신정변으로 양국의 군대가 다시 조선으로 진입하게 되면서 양국간의 갈등은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아시아의 병자로 전락한 중국은 이미 마키아벨리적 근대국가로 성장한 일본에게 승리할 수 없었으며,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조선의 완전한 독립과 자율성을 인정받는 한편, 요동반도 할양 및 전쟁 배상금을 받게 되었다.그러나 요동반도내 뤼순항은 부동항으로 중국 베이양함대의 기지였을 뿐 아니라 만주와 베이징의 출입구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을 일본이 점령한데 대해 리시아는 우려하게 되었고, 프랑스·독일과의 3국동맹을 통해 일본의 요동반도 소유가 중국의 수도에 항시적인 위협이 되고 동시에 조선의 독립을 환상으로 만들 것이며 극동의 항시적인 위협이 되고 동시에 조선의 독립을 환상으로 만들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일본 정부가 요동반도의 소유를 포기할 것을 권고하였다. 정직한 중재자로서 서구열강의 3국간섭에 대해 일본내에서는 논쟁을 벌였으나 결국 강대국들의 권고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요동반도의 반환은 일본인들에게 치욕이었지만 그들은 오직 힘만이 정의로울 수 있으며 국가적 생존과 구원은 군사력과 저돌적인 민족주의를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3국간섭이후 일본은 중국보다 훨씬더 무서운 존재로서 러시아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러시아는 일본이 만주와 조선에서 자국의 이해에 분명한 위협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동북아의 하위체제는 일본과 러시아라는 새로운 대립구도로 전환하면서 또다른 갈등이 잉태되고 있었다.4. 러·일 전쟁의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저자는 전쟁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투키디데 러일간의 대결은 심각한 양극적 갈등구도가 되고 있었다. 둘째, 영일동맹체제의 수립과 러시아의 국제적 고립이다. 일본은 중일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3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였던 뼈져린 과거를 잊지 않았으며, 철저한 외교적 동맹의 필요성을 실감하였다. 따라서 1902년 맺어진 영일동맹은 러시가 프랑스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원조를 상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03년부터 논의된 영국과 프랑스간의 앙탕트는 러시아를 위한 프랑스의 어떠한 개입가능성도 사실상 제거된 것이었다. 영일동맹체제의 수립은 영국의 화려한 고립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고, 일본측에 유럽 타강대국의 개입에 대한 두려움없이 러시아에 전쟁을 시작하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셋째, 러시아의 시베리아 발전정책과 일본의 근대화이다. 러시아정부는 시베리아 경제개발을 통한 중앙의 권위를 강화하고 극동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전략적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부설하는 국가적 사업에 착수하였고, 일본은 급속한 근대화로 점증하는 국력에서 비롯 된 일본 지도자들의 자신감은 그들로 하여금 일본인들의 삶의 공간을 위해 보다 쉽게 러시아와의 전쟁을 길을 가게 했던 것이다.러일전쟁의 근인으로는 첫째, 중국내 의화단 사건과 러시아의 만주점령이다. 중국정부는 의화단 사변을 통해 외국인들을 중국땅에서 축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중국인들의 폭력적 노력은 수 많은 중국인들의 생명을 희생시켰을 뿐 아니라 오히려 러시아군의 만주 점령이라는 예상못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보호와 확장이라는 목적을 갖고 있어 만주로부터 완전한 군대의 철수는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결국 일본측에 전쟁의 결의를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러시아 짜르의 시대착오적 세계관과 일본 지도부의 세대교체이다.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스 2세는 민주화의 개혁을 요구하는 국내정치의 격변속에 독재체제만이 현상유지 수단으로 인식하였고, 이러한 국내적 갈등을 대외적 위협으로 해소하고자 극동에서 팽창주의적 강경노선인 소위 신노선을 추구하.
    독후감/창작| 2003.07.05| 6페이지| 1,000원| 조회(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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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정치] 이승만의 자주독립과 국제연맹 신탁론 평가A좋아요
    이승만의 자주독립과 국제연맹 신탁론1. 서 론2. 구한말 두 번의 전쟁과 대한의 자주독립3. 만국공법과 대외인식4. 對美 기대로의 전환과 국제연맹 신탁론5. 결 론1. 서 론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국부이면서도 민주주의 정치 발전을 저해하는 장기집권으로 인해 결국 4·19로 물러나면서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받는 지도자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성공한 외교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친미주의자, 미국일변도의 대미 의존외교로 인해 이후 한국의 지도자들이 미국에 편향된 외교정책을 추진할 수 밖에 없는 틀을 제공하였다는 비판도 있다.이승만이 재임기간중 미국중심의 외교정책을 구사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배경이 제시되고 있는데, 전후 미·소 냉전구도 하에서 파생된 구조적인 산물이었다는 평가도 있고, 고정휴는 이승만이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받고 옥중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인 선교사와 기독교 개화론자들의 영향을 받아 개화기시절부터 친미일변도적인 외교독립노선을 견지하였다고 주장한다) 고정휴, "개화기 이승만의 사상형성과 활동", 역사학보(1986).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지도자로서 이승만이 외교정책을 결정함에 있어 국제환경속에서 피할수 없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거나 미국신드롬에 빠져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이승만은 미국을 통해 한국의 안보를 보장받고 경제적으로 성장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실제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미국으로부터 칭찬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을 미국신화에 빠져있는 인물로 바라보기 보다는 철저한 국가이익을 고려한 외교가로서 당시 가장 적실성있는 대상국가로 미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한 철저한 반공노선을 .추진함으로써 미·소 냉전구도하에서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수 없도록 하면서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을 통한 안보고리를 만들어 건국 당시 당면과제였던 국가안보를 보장받을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이승만이 미국중심의 외교정책을 추진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떠한 대외인식을지 않은 것이었다고 보고 한국의 독립이 자주적이지 못하고 외세의 충돌에 의해 전개되고 있어 결국 한국이 독립을 영원히 상실될 것으로 우려하였다. 또한 자주독립국만이 공법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가 생긴다) 이승만, 「청일전긔」, 전쟁의 원인, p6고 인식한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만국공법하에서 한국이 자주독립하기 위해 국내적인 개화·개혁을 통한 자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1) 청일전쟁과 한국의 독립이승만은 청일전쟁의 원인으로 한국의 독립에 대한 양국의 갈등이 발단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일본이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대접하여 본래 자주하던 일본국과 평등으로 안다하여 청국의 간섭여부는 말할바 없었나니 이때가 조선의 독립권리를 사실상으로 회복하던 처음 일이었다'고 하여 강화도조약 체결을 공식적인 자주독립일로 이날을 경축해야한다고 한다) 이승만, "독립졍신", pp 149∼150.그러나 한국의 자주독립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중국은 한국에 대해 어려울때에는 독립국이라 하다가 편할때는 속국이라고 칭하였고, 일본은 여전히 한국을 독립국이라고 주장) 이승만, 위의 책, 갑오전 한·일·청 삼국의 관계, pp154∼158하였는데, 청국이 한국에 동학난을 진압하는 군사를 보내는 것에 대해 일본에 알리면서 한국을 속국이라고 명시하자 일본은 이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게 되었다. 결국 한국에 청·일 양국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전쟁이 발생하였고 일본의 승리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이승만은 청일전쟁과 관련하여 세계 각국들이 '일본이 한국을 독립시킨 명분에 대해 그 의리를 칭찬한 반면 청국의 완고우준함을 비난하였다'고 하면서, 강화조약의 제1조에 청국이 대한을 확실한 자주독립국으로 밝히고 이전에 공물을 보내던 일을 폐지하도록 명시함으로써 이때부터 한국에 개화의 기초가 뿌리박혔으며 이후 '조선'을 '대한'으로 고치고 대청연호를 폐지하는 등 자의적 변혁을 추진하여 각국과 새로히 평등대우로 교섭이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것이 모두 청일전쟁의 효험이라고 보만은 일본이 동양에서 독권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개입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과거 우리가 우리의 직책을 못한탓도 있으며 지금 능히 직책을 맡아 수행할 사람이없기 때문에 불가불 한일 약조가 정한데로 시행하면서 차차 그 범위가 스스로 벗어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승만, 위의 책, 일본의 주의가 전과 같지 아니함, p224이승만은 한국의 독립문제를 놓고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개화에 성공한 일본을 보면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을사조약 체결이전까지는 대외적으로 개화하고 국내적으로 개혁하여 자강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으며, 한일조약 이후에는 외국의 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따라서 을사조약은 이승만의 국내개혁 중심의 독립노선이 대외지향적으로 변화되는 분기점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후 이승만이 조선의 자주독립에 가장 적절한 대상으로 어떠한 외세를 바라보았는지 주변국에 대한 대외인식을 통해 살펴보겠다.3. 만국공법과 대외인식1) 만국공법이승만은 서구 국제질서로 편입되는 당시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만국공법이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는 공법이 어느 나라가 홀로 세우거나 만국이 합하여 법관을 파견하여 정한 것은 아니지만 강대국들이 힘을 굽혀 준행하여 일부 강포한 나라가 잔약한 나라를 법외로 대접하고 욕심을 부리고져 할지라도 적은 나라가 능히 거절하여 받지 아니하는 권리가 있으니 이것이 공법의 힘이며, 설령 약소국은 무리함을 당하고도 거절하지 못할 경우면 각국이 시비하여 강한자로 하여금 무리함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또한 공법의 힘으로 공법의 힘이 이렇듯 장하다) 이승만, 위의 책, 백성이 열리지 못하면 나라를 보전치 못함, p33고 믿었다.또한 일부 강대한 나라들이 약한 국가에 대하여 공법에 벗어나는 불의를 행하는 국가가 있는데 이에 대해 어리석은 국가들은 자기들이 공법을 알지 못하여 남이 없이여겨 그렇게 하는줄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만국공법동방의 위급함을 초래하였다) 이승만, 「독립졍신」, 청국의 완고함, p128∼131는 것이다.중국에 대한 이승만의 부정적인 인식은 「청일전긔」에서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일본이 먼저 깨여 세상형편을 본즉 옛 법만 차리다가는 아세아가 모두 위태할 지경인데 청국은 점점 어두어 잔약하여 가며 아라사는 동으로 벗어나와 청국 북방으로 해마다 먹어 들어오며 이전에 소위 속국이라든 나라들을 30년내에 차례로 만에게 빼앗겨 섬나, 면전, 안남, 유구 여러나라를 다 잃어버리고 다만 대한 하나만 남았으니 종시 청국 속국이라하다가는 그도 또한 늬 손에 들어갈는지 모르는 바.....(미국이)조선과 통상하기전에 청국정부에 조선과 관계가 어떠한 것을 물었는데 그때 청국은 영국과 법국에게 난리를 격은후로 서양각국을 범같이 무서워하는터에 도 무슨사단이 생길가 두려워하여 당초에 조선은 청국과 상관이없다고 대답한지라 일본과 미국이 즉시 조선과 약조를 정하고 독립국으로 대접하여 공사를 파송하여 한성에 주차한지라 청국이 이뜻을 짐작하나 어리석은 생각에 겉으로는 속국이 아닌체하며 속으로만 속국으로 대접하려하여 황사림, 오장경, 원세개 등을 차례로 보내어 위엄을 보이며 은혜를 베풀어 민심을 얻으며 관인들을 체결하여 속으로 일으기를 우리가 세상에 강한대국이니 조선은 속국된직책만 잘 지키면 우리가 다 보호하여주마 하여 감히 조선 국태공을 위협으로 데려가니 무례함이 막심한지라.....갑오년에 이르러 동학란으로 인하여 속국을 보호한다하고 경솔히 동병을 하였다가 필경 이 봉변을 당하여 북경까지 위태할번하고야 비로소 독립을 허락한다고 하였으니 이 혼단을 비록 동학당이 내였다가 실상인즉 청국과 대한이 어두운 속으로 만들어 놓은지라) 이승만, 「청일전긔」, 전쟁의 원인, pp6∼8."이처럼 중국은 서양세력을 의식하여 서양과 통상관계를 맺는 과정에 한국이 독립국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음에도 여전히 속국으로 대우하는 우를 범하였고, 한편으로 한국은 중국이 자기의 몸을 부지하기 어려워 애쓸 동안에 따라서지 못하는 강대국인 동시에 서양세력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해주고 발전시켜줄 수 있는 외세로 보여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다른 흑심을 품고 있느냐의 문제보다는 일본을 유일한 희망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그(일본) 정부에 일정한 주의가 대한을 이롭고져 하는지 해롭고져 하는지 우리가 알기도 어렵거니와 실상인즉 그다지 알려고 할 것도 없으니 이는 일본이 설령 우리를 아무리 해코져 할지라도 우리가 잘만하면 세상에 공론이 자제하니 그 해를 받지 않을 것이오) 이승만, 위의 책, 일본백성의 주의, p239"러시아는 이승만에게 영토적 야심으로 충만한 제국주의 국가로 인식되어져 있다. 특히 투옥되기 이전부터 이승만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 정치활동에 참여하면서 아관파천이후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개입에 대해 비난하였다.이승만은 러시아를 '흑해 문제문제로 터키와 전쟁을 일으켜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흑해 진출권을 확보하지만 서양각국이 일제히 간섭하여 러시아가 흑해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약조(베를린회담)하게 되었고, 결국 서쪽 진출이 좌절되자 시베리아 횡단철로를 건설하는 등 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됨으로써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는 나라'로 보았다) 이승만, 위의 책, 아라사 정치내력, pp135∼137.「독립졍신」에서 볼수 있는 이승만의 대외인식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두고 벌어지는 한국의 정세위주로 집필됨에 따라 청·일·아 3국에 대해 중심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예외적으로 미국의 독립내력에 대해서 장문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한국의 자주독립과 정치개혁을 위한 사례로서 인용된 것으로 그의 대미인식을 도출해 내기는 어려우며, 다만 「청일전긔」에서 '미국은 세계에 남의 권리를 빼앗지도 않을뿐더러 남의 권리를 보호하여 주기를 의리로 아는) 이승만, 「청일전긔」, 전쟁의 원인, p6' 우호적인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이승만은 개혁과 수구로 갈등하던 개화기 당시에 개혁을 추구한 진보주의자로서 일단 한국의 자주독립에 외세의 힘이 불가피함을 인식한 말았다.
    사회과학| 2003.07.05| 11페이지| 1,000원| 조회(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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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정치] 북한 경제체제의 변화 가능성과 한계
    〈기말 REPORT〉北韓 經濟體制의 變化 可能性과 限界과 목 : 북한사회변동론담당교수 : 김 병 조 교수님제 출 자 : 대 위 강 동 구제 출 일 : 02. 7. 1 (월)【 目 次 】第 Ⅰ章. 序 論 1第 1節. 問題 提起 및 硏究 目的 1第 2節. 硏究 範圍 및 構成 2第 Ⅱ章. 分析을 위한 理論的 考察 3第 1節. 旣存硏究 檢討 3第 2節. 北韓 經濟體制 評價를 위한 分析의 틀 4第 Ⅲ章. 北韓 經濟體制 診斷과 變化要因 分析 7第 1節. 北韓 經濟發展 過程과 危機의 展開 71. 북한의 경제발전 과정 72. 북한 경제체제 위기의 전개 8第 2節. 北韓 經濟體制變化의 診斷 101. 계획경제의 위축 102. 사유제로의 이행과 시장 경제의 확산 103. 온정주의의 포기 114. 외연적 성장의 한계 11第 3節. 北韓 經濟體制 變化要因 分析 121. 본질적 요인 122. 직접적 요인 12第 Ⅳ章. 北韓 經濟體制 變化 可能性과 限界 13第 1節. 北韓 經濟體制 變化의 肯定的 要素와 否定的 要素 131. 긍정적 요소 132. 부정적 요소 13第 2節. 北韓 經濟體制 變化 方向 141. 개방의 수준 142. 개혁의 수준 15第 3節. 北韓 經濟體制 變化의 限界 161. 러시아와 동구 및 베트남의 체제전환과정 비교 162. 중국형 경제발전 전략의 북한 적용의 한계 17第 Ⅴ章. 結 論 18參考 文獻 20第 Ⅰ章. 序 論第 1節. 問題 提起 및 硏究 目的북한은 2001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국가 경제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1월 4일자 『로동신문』에서 '새로운 관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의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북한은 2001년 『로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3개지의 신년 공동사설에서 "21세기에 상응한 국가 경제력을 다져 나가는 것보다 더 중대한 과제는 없다"라며 경제매진에 힘쓸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자력갱생', '자립적 민족경제' 등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종석, "2001년 북한 신년 공동사설 분석 : 특징 전였다. 3장에서는 북한의 경제발전 과정과 경제위기의 전개를 살펴본 후, 북한의 경제체제 변화를 진단하고 변화요인을 분석하였다. 4장에서는 북한 경제체제 변화의 가능성을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로 구분하여 살펴보고 변화의 방향을 대외 개방과 대내 개혁의 수준에서 살펴본 후, 중국형 개방·개방 전략을 모델로 북한 경제체제 변화의 한계를 짚어 보았다. 끝으로 5장에서는 연구에서 얻어진 결과를 종합하고 향후 북한 경제체제 변화의 함의를 살펴보고자 한다.第 Ⅱ章. 分析을 위한 理論的 考察第 1節. 旣存硏究 檢討북한의 체제 변화와 관련한 기존의 연구들은 크게 경험적 접근과 규범적 접근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김연철은 북한 변화론과 관련, 붕괴의 예언, 혹은 운명론적 붕괴의 불가피성을 논하는 연구를 규범적 접근으로, 변화의 구체적인 실상에 대한 평가 및 분석에 관한 연구를 경험적 접근으로 구분한다.이는 다시 ① 대북 정책에 입각한 북한 경제체제 붕괴 또는 변화의 구조적 불가피성에 관한 연구) 김연철, "북한의 배급제 위기와 시장개혁 전망", 세미나 자료, (삼성경제연구소, 1997). ; 김영윤, "임동원 특보 방북이후의 남북교류협력의 현황과 정책적, 법제도적 과제," 세미나 자료, (아시아사회과학연구원, 2002). ; 정성장, 위의 글.② 북한 현실 진단 차원에서의 점진적 시장화 가능성에 관한 연구) 정세진, "북한의 경제체제 변화와 점진적 시장화 가능성," 21세기 정치학회보, 1999. ; 이영훈, 위의 글.③ 북한의 개혁·개방을 염두에 둔 중국형 경제발전 전략 모델 적용에 관한 연구) 서진영, "북한의 중국식 개혁·개방 전망," 제22차 통일전략포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2001). ; 양운철, 위의 글.로 구분된다.먼저 북한 경제체제 붕괴 또는 변화의 구조적 불가피성을 논한 연구들은 정부의 대북정책 방향을 제시하는데 도움이 되는 장점을 가지는 반면, 북한 경제체제 변화를 정확하게 진단하지 않고 남한의 입장에서 평가하는 점과 향후 북한의 변화 방향에 대한, 더 나아가 국유기업하에서 국가와 지배인, 종업원간의 이해와 갈등에 따른 문제점(정보의 비대칭 ⇒ 비용과대 및 생산량 축소 보고 ⇒ 감시감독 비용증가)을 해결하기 위해 경영에 대한 자율권을 부정하고 중앙집권적 경제관리를 강화하는 미시경영 메카니즘이 요구되었다.이러한 자립적 계획경제체제는 산업구조의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경제주체들의 인센티브를 떨어뜨림으로써 생산의 비효율성을 낳게 된다. 이들의 결과 대부분의 생산물들이 수요에 비해 과소 공급되는 부족의 경제현상을 보이게 된다. 북한의 경우 이상의 요인들로 인해 식량, 에너지, 원자재, 생필품 등에서 극심한 부족경제의 현상을 보이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요인들이 해체되거나 전환되는 현상을 북한의 경제체제 변화의 평가 기준으로 설정할 수 있다.그러나 코르나이의 이론은 자원제약하의 경제주체들이 최적화 행위를 도출해내는 신고전파의 방법론처럼, 연성제약(soft budget constraint)하에서 경제주체들의 경제행위 결과로서 부족경제의 현상을 도출해 내고 있다. 즉 미시 경제적 관점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국가의 거시경제정책, 더 아나가 국가의 경제정책 전반을 인도하는 경제발전 전략 또는 노선 차원에서의 부족경제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러한 점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다른 경로를 거치는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우 - 나아가 북한의 경우 - 국가 주도적인 체제변화의 경우에 적용하는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국가의 경제전략 또는 노선을 비롯하여 거기경제정책을 포괄하여 부족의 경제를 설명할 수 있는 경제체계를 설정해야 한다.) 이영훈, 앞의 글, p. 12.코르나이의 이론은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 적용 가능한 일반 진술의 발견이 목적') Kornai, Janos, "The Socialist System - The Political Economy of Communism". (Oxford : Claremont Press, 1992), p. 5.이므로 북한 경제체제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로 유지한 채 기술적·노력적 차원에서만 내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식량난 해결에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당분간 북한의 식량문제는 지속될 것을 전망되고 있다.〈표 Ⅲ-1〉연도별 북한식량 부족량 및 외부 도입량 (단위 : 만 톤)연 도1992199319941995199619971998199920002001수요량5765695*************1551518529공급량*************45369349389422395부족량1**************************34도입량83109*************107--※ 자료 : 통일부.(2) 에너지난북한이 겪고 있는 에너지난은 외화난과 맞물려 원유도입의 감소, 석탄 생산량의 감소에서 근본적으로 비롯된다. 북한의 공업구조가 에너지 다소비형인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석탄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는 산업생산력을 떨어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북한은 자립경제 노선에 따라 풍부한 석탄 매장량을 기반으로 한 석탄 중심의 에너지 공업체계를 발전시켜 왔으나 경제 침체와 더불어 채탄장비의 노후화, 탄광의 심부화, 신규설비의 미도입, 자재의 공급애로 등으로 80년대 중반부터 에너지난을 경험하게 되었다.북한의 전력생산 구조가 수력 대 화력의 비율이 6:4로 수력의 비중이 높지만, 석탄 생산량의 감소는 화력발전이 정상적으로 가동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고 또한 저열탄의 사용은 화력발전소의 효율성을 크게 격감시켰다.수력발전소의 경우도 대부분의 시설이 노후되고 최근에는 이상 기후로 댐의 담수율이 낮아 정상적인 전력생산을 어렵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들어 전력난 해소를 위해 북한은 다양한 시설적·기술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기존 발전소들의 노후화된 송배전시설과 더불어 대대적인 시설대체, 보수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외부와의 본격적인 경협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전력난은 구조적인 문제로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판단된다.(3) 원자재난북한 산업시설의 가동률을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 중의 하나는 원부자재의 부족도서 북한은 90년대 들어와 중앙에서 하던 배급을 각 도군(道郡) 단위에서 독자적으로 해결할 것을 기본방향으로 삼고 있으며 북한정부차원에서 식량구입을 위해 지방당국과 중국·러시아와의 직접적인 물물교환을 허용하는 등 지방단위의 자립적인 식량문제 해결 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일부지역에서는 "3개월은 국가에서, 3개월은 수입양곡으로, 3개월은 직장 자체 해결, 나머지 3개월은 개인이 자체조달"하도록 방침을 정하기도 했다. ; 정세진, 앞의 글, p. 439에서 재인용.사회주의 체제의 장점이자 핵심을 이루는 중앙배급제도의 마비는 결국 '온정주의'의 포기를 의미한다고 하겠다.4. 외연적 성장의 한계〈표 Ⅲ-2〉에서 보는 것처럼 북한은 1980년대 말부터 10년 간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1999년 중 식량생산증가와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확대 등에 힘입어 다소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산업의 기본인 에너지와 전력의 부족, 외화와 원자재의 부족은 당연 공장 가동률의 저하를 초래하였고 연쇄적 결과로 잠재실업의 확대를 가져왔다.자본제약의 경제, 이데올로기적 우월성에서 출발한 북한의 경제체제는 경제성장률 추이, 재정추이, 공장 가동률 등을 종합해 보면, 이미 실제투자(actual investment)가 요구되는 투자(required investment)를 훨씬 밑도는 외연적 성장의 한계에 직면한 것으로 진단할 수 있다.〈표 Ⅲ-2〉남북한의 경제성장률 추이(%)연 도1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199819992000북 한- 3.7- 3.5- 6.0- 4.2- 2.1- 4.1- 3.6- 6.3- 1.16.21.3남 한9.09.25.45.58.38.96.85.0- 6.710.78.8※ 자료 : 통일부.第 3節. 北韓 經濟體制 變化要因 分析북한의 경제체제가 위기에 봉착한 원인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안고 있는 체제 자체의 구조적 모순이 본질적 요인이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의 전반적 붕괴 및 체제전환과 중국의 경제개혁에 다른 대외무역방식의 있다.
    사회과학| 2003.07.05| 22페이지| 1,000원| 조회(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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