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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이슬람과 서구문명 평가B괜찮아요
    서 론2001.9.11 유례없는 테러 사건이 있었다. 지상최대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신화가 무너졌다. 냉전시대 이후 세계질서를 주름잡던 미국이 심장부를 강타당했다.그후 7개월 동안 미국은 반테러 전쟁을 준비,실행 아프가니스탄 전지역에 걸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반테러 전쟁이란 명분아래 수많은 아프간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아프간을 비롯한 중동의 여러나라들은 지하드코란에서는 성전을 다음의3가지로 묘사된다고 설명한다.자기 자신을 정복하고 유혹을 자제하는 것, 욕심을 버리고 사랑을 베푸는 것, 알라의 적에 대항하여 자신과 재산을 바쳐 이슬람이 승리하도록 하는것.를 외치며 반미감정을 드높히고 있다. 이 사건에선 부시와 빈 라덴의 대결구도에서 미국과 중동지역, 더 나아가선 서방의 기독교문화와 중동의 이슬람문화의 대결이란 문명충돌로 번져나갔다.우린 반테러전쟁을 단순히 21세기의 새로운 전쟁이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닌 반사회단체의 소멸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그런데 테러란 저간에 규정되어져 온 일반적인 테러리즘의 정의는“현존하는 정부 또는 정치제를를 전복하거나 변화시키는 등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목적으로 공포와 위협을 통해 무고한 시민이나 비전투원에게 하는 폭력행위”로 규정한다.그러나 현재 미국의 테러 참사를 통해서 자행된 테러행위는 오히려 종교와 문명의 영역을 침범하는 의미에서 개념상의 그 범위가 훨씬 넓게 나타난다.그렇다면 테러의 원인을 잠깐 집고 넘어가보자.미국테러참사에서 보면 테러의 주모자인 빈라덴의 주장은 미국의 패권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만이 세계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떠오름으로써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맞게 세계질서를 재편성하려 하였다. 그로인한 반발과 반항의 표출로 볼 수 있다.세계화로 인한 서방국가들의 약소국가들에 대한 자신들의 질서를 강요하고있다.국제적 민주화의 대열에서 소외되는 민족과 나라가 초강대국인 미국에 테러를 저지르른 집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다음엔 자원,군사적,경제력의 집중에서 비롯된 불균형에서 오는 문제로 사회현상에 대한 문화론적접근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았다.문화에 대한 기호학적 시각첫째. 사회관계나 상호작용이 사회행위자들사이에 동일한 가치체계의 존재를 전제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거츠가 간파한 대로, 다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간의 행위들을 납득하는 데 사용하는 일종의 ‘의미의 코드’의 공유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둘째. ‘의미의 코드’로서 문화는 한 사회의 역사를 통하여 다듬어지는 역사의 산물임과 동시에 고도의 추상적 구성물이므로 사회변동,혁신,역사적 단절 등의 충격을 견뎌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와, 같은 역사적 변화와 위기에 고유의 의미를 부여하는 등 사회변동 과정에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문화에 대한 역사적 정의가 수반하는 역사주의의 위험을 배제하였다.셋째. 문화에 대한 기호학적 정의는 문화와 행태를 뚜렷이 구별하여 문화를 행태의 구조화에 원리를 제공하는 일종의 문법과 같은 것으로 파악하여 마치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지극히 다양한 스타일의 화법을 구사할수 있듯이 한 사회 안에서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와 서로 다른 다수의 행태의 패턴들이 양립.공존할수 있는 것이라고 인식함으로써 문화에 대한 행태주의적 정의의 오류를 해소하였다.일반적으로 정치에 대한 문화론적 접근은 각국의 구체적 역사에 대한 비교분석을 통하여 특수성에 대한 ‘개별화의 지식’을 얻고자한다.종래의 비교정치학이 기능즈의적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서구의 것을 표준으로 하는 정치체계의 보편성에 대한 ‘일반화의 지식’의 추구에 치우쳐왔다는 비판 (Badie의 1990.22-28)을 감안할 때 그리고 제3세계를 위시한 현실세계에서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각국 정치체계의 지울 수 없는 독자성을 놓고 볼 때 정치에 대한 문화론적 접근이라는 새로운 시도의 학문적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1)[이슬람과 기독교의 비교]일반적으로 종교는 인간실존의 궁극적인 문제들에 관한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믿음의 체계로서 인간과 사회와 세계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Robertiation)의 방식으로 설정한다”(Badie1983,81)공동체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신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 그리고 교회와 제국과 같이 이질적인 공동체의 병존.중첩이 가능한 것으로 보는 기독교와는 달리 이슬람의 경우 움마(umma)라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만을 인정한다 (Badie 1986,32~41)이렇듯 인간에게 유일하고 정당한 공동체로 인식되는 움마는 무슬림(모슬렘)들의 신앙공동체임과 동시에 정치공동체이며 경제공동체이면서 군사공동체인 것으로 이슬람의 단원론적 문화 코드가 여실히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기독교의 경우 정치가 종교와 구분되고 르네상스 이래 경제가 정치로부터 구분되는 등 인간활동의 분화가 계속 진행되어 왔으나 이슬람의 경우 오늘날 중동의 여러 나라 사태에서 보듯이 종교적 열성이 정치적.군사적.과격행동으로 표출되는 등 인간행동에 있어 종류의 혼동이 지속되는 것이다.모든 정치체계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둘러싼 공방은 고도의 상징적 차원을 수반하는 과정이므로 그 사회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정치적 범주는 바로 권력의 정당성을 둘러싼 문제이다.기독교 문화가 정치의 영역을 종교와 구분되는 본질적으로 인간적이며 자율적인 공간으로 보아 고유의 정당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정치에 대한 평가, 토론, 및 비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반하여 이슬람의 의미의 체계는 종교적인 것 이외의 현실 정치질서에 대한 그 어떤 정당성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권력의 정당화뿐 아니라 권력에 대한 저항도 매우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또 한 서양의 기독교사회가 중세 이래 권력의 위임과 대의제도를 발전시켜 권력의 정당성에대한 공방을 일찍 제도화하는데 성공하여 오늘날 서양사회의 ‘정치권 안에’ 다양한 토론과 비판이 가능한 통로가 마련되어 소위 활발한‘요구의 문화’가 꽃필수 있었던 데 반하여 권한의 위임이라는 개념이 결여된 이슬람사회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도전을 위한 그 어떤 장치도 마련하지 못하여 권력에 대한 저항은 대게 제도화된 ‘정치권 밖에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1아주 폭력적인데 서구는 이와 결부시켜 원리주의 시초로 보았던 것이다.이슬람은 가톨릭 교황처럼 구심점이 없어 이슬람법학자(울라마)들 사이에 자유롭게 토론이 이뤄졌다. 사안이 생기면 학자들이 자기 견해(파투아)를 낸다. 그런 것들이 모여 큰 길이 보인다. 그게 정통이다. 순니파에선 크게 4대 법학파가 있는데, 학파에 따라 법원을 무얼 쓰느냐가 서로 다르다. 원리주의는 코란과 순나, 이즈마(합의), 키에야스(유추) 등의 법원 중 코란과 순나를 많이 쓴다. 서구에서는 시아파를 급진적 원리주의로, 순니파를 모더니스트로 등치하는 시각이 많다.무하마드가 632년 6월 8일 메디나에서 갑자기 죽었을 때 무슬림 사회는 커다란 지도력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무하마드는 후계자 지명에 대해 어떤 지침도 남기지 않았다. 무하마드가 마지막 예언자(prophet)였으므로 새로운 지도자는 '예언자' 라고 불릴 수 없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알라로부터 새로운 계시가 올 수 없었고, 무슬림은 코란과 하디스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무하마드의 장례가 준비되던 때 매우 중요한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슬람교가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므로 초기의 무슬림 사회에서는 종교와 정치간의 구분이 없었고, 각 지역의 세속 정부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메카에 있는 무슬림과 메디나에 있는 무슬림간의 싸움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두 그룹 모두 자신들이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하게 된다.메카의 무슬림들은 무하마드와 가장 친하고 가장 신뢰받는 친구인 아부 바크르를 선택했다. 그는 칼리팟 라술 알라(하나님의 사자의 후계자)라는 이름을 얻었고, 첫번째 칼리프가 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이슬람교의 수니파가 지지하는 철학이 되었다.한편 메디나의 무슬림들은 무하마드가 자신의 사위인 알리를 후계자로 남겼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무하마드의 딸인 파티마와 결혼한 알리는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알리와 그의 지지자들은 바크르의 후계자 임명에 반대하였고 결국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한후 사라에게 성령이 부여되어 이삭이 태어넜다. 이삭은 유대 민족의 조상으로 후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켰으며. 이스마일은 아랍 민족의 조상으로 무함마드를 탄생 시켰다.이런 역사적 유사성을 가진 두 민족이 갈등을 겪게 된 원인은 바로 서구 기독교가 제공하였다. 기원전 7세기에 앗시리아로부터 영토를 빼앗긴 뒤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독립국을 건설할때까지 유대 민족은 2000년간 유랑생활을 해왔다. 그들이 유랑생활을 하며 박해,고문,차별을 받았던 지역은 기독교권 유럽이었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부터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유럽에서 유대인은 악마와 동일시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유대인의 위상을 향상되었으나, 유럽 기독교인의 반 유대감정은 뿌리 깊게 박혀있엇따. 유대인들은 14세기에 발생한 페스트의 원인으로 간주되어 대거 학살당했으며, 마녀사냥의 1차 희생양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유럽의 편견은 히틀러의 대학살과 러시아 황제의 폭탄 테러 사건으로 점점 증폭되어 1894년 프랑스의 드레퓌시 대위 사건으로 정점에 달했다. 이런 일련의 반 유대인 감정으로 유대인들은 1897년 스위스에서 세계유대인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여기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시오니즘이 채택되었다. 당시 유럽의 상황에서 유대 국가 수립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유대인들에게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당시 아랍세계를 지배했던 오스만 터키는 독일에 가담하여 영국을 위협하였다. 영국은 1915년 아랍 민족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아랍 민족이 이슬람 국가로서 영국에 지하드를 선포한 상태에서 종교적으로 영국을 지원하기란 힘든상황이었다. 이에 영국은 독립국가의 보장이라는 약속으로 아랍민족을 전쟁에 끌어들였으며,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파견하여 남부 전선에서 승리하였다.한편 영국은 중부 전선에서 독일을 공략하기 위해 유대인들도 끌어들였으며,4)
    사회과학| 2002.11.17| 14페이지| 1,000원| 조회(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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