燕巖 朴趾源에 대하여Ⅰ.燕巖 朴趾源의 생애박지원은 영조 십삼년(1737) 사유의 둘째 아들로서 西門第에서 출생하였다. 字는 仲美, 號는 燕巖이다. 그의 가문은 명문 벌족으로서 이름이 있었으니, 그의 원조 상비는 고려말의 문호였고, 그의 六代組 동량은 선조때 문신으로써 判義禁府事를 지냈으며, 그 뒤 선조들도 대대로 대사헌, 판서, 참판 등의 관직을 지냈다.연암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5세까지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 16세 때 이보천의 딸과 결혼하고 처삼촌인 여목당 이양천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을 배웠는데 얼마 안되어 論說 한편을 지어 바치고 李校理를 놀라게 했다. 이후 3년간 發憤力學한 결과 학업이 大進하여 經史에 두루 통하고 천문지리와 兵農錢穀의 經世要務까지 講究하게 되어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벌써 당대 문단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홍대용과 더불어 태서의 지구 자전설을 주장하여 세인의 이목을 끌었고, 세정 북학의 사가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과 사우 관계를 맺고 그들의 경모를 받았다.연암은 장년이 되어서도 벼슬길에 들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는 고려때부터 과거로써 국가의 인재를 등용해왔기 때문에 관직에 뜻이 없어 간혹 과거를 포기한 인사도 없지는 않았으나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 과거 공부에 열중하면서 응시하고자 한 인사가 많았다. 연암은 34세때 監試를 수석으로 합격했으나 會試에는 답안지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과정록의 기록에 의하면 연암이 監試를 보기 전에도 몇 번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응시를 한 적은 있었으며 시험 답안에 古松과 老石을 그렸다고 한다. 이로서 연암은 시험에 응시는 했지만 시험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또 그의 장인도 응시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 것을 미루어 볼 때 벼슬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어찌 되었든, 그의 문집인 연암집 오권 팔장에 를 보면 당시 과장의 살벌한 장면을 말하면서 과거의 합격자가 겨우 20명인데 응시자는 수만이 되어 입장 할때 서로農·工·商의 고정된 신분체제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이런 현실적인 사회개혁적인 사상을 가지고 그는 당시의 통속적 관념체계와 신분적 권위의식의 개혁을 주장했다. 이런 부분은 그가 30대 중반 이전에 쓴 9편의 소설 - 2편은 焚失 -에서 찾아볼 수 있다.여러 방향으로 나눠 분류해 보면 다른 논의가 나올 수도 있지만, 일단 利用厚生의 實學思想과 社會改革 認識의 두 가지를 전제로 그의 문체와 문학 작품들을 분석해 보겠다.2. 박지원의 文學論과 文體1) 文學論 - 法古創新박지원의 작품은 당연히 한문작품이다.박지원의 문학에 일관된 논리로 작용하는 것은 法古創新의 문학론이다. 이 문학론은 박지원의 독창적인 견해라기 보다는 전통적인 문학론을 계승하여 새롭게 이론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지원 시대 이전에는 古와 今을 이분화하는 양분법을 일반화했다. 그런데 今은 비록 그 목표는 이념적인 古로 복귀하는 데 있으나 실제는 시간적인 것으로 파악되어 단순한 古의 연속에 불과한, 나빠져만 가는 상태로서의 今이었다. 여기에서 今을 경시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이것은 기존의 성리학자들의 입장이다. 이에 반해 박지원은 古今을 相對的인 개념으로 파악했다. 古 역시 그 시대에는 今일 뿐이고 지금 역시 古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시간에 대한 상대론적인 인식인 바, 이는 古를 가치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기존의 성리학자들이 古 - 서인 호론 계통의 성리학자들에게 있어서는 四書와 朱子의 주자대전과 이이의 조선성리학 관련 저서를 의미 - 를 본받지 않은 것은 모두 배척하는 입장에 대해 박지원은 반기를 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도 古를 중시하는 기존의 입장을 모두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는 法古創新의 논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法古(古)와 創新(今) 양자를 모두 부정하면서 法古로 이름되는 전통성과 創新이라 이름되는 창조성을 결합하려 하였다. 요컨대 문학은 당대 현실에 대응하여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지만, 마음대로 써내는 것과 구별하여 특정한 방향성, 규범성이 있어야, ‘廣文者傳’21-29세, ‘虞裳傳’은 30세 경, ‘易學大盜傳’과 ‘鳳山學者傳’은 30대 초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金英東 著 ‘朴趾源 小說硏究’에 따르면 ‘放瓊閣外傳’에 실린 9개의 작품을 4가지 분류로 나누고 있다. 내 나름대로 기준을 설정해서 분류해보고자 노력도 해봤지만 힘든 부분이 있어서 이 분류법을 借用하기로 한다.●主題를 앞세운 小說① 馬駔傳이 작품의 비판대상은 ‘권세, 명예, 이익’을 좇아 벗을 사귀는 양반들의 태도다. 이를 위해 연암은 비렁뱅이 세 사람의 우정에 관한 논의를 제시하고, ‘馬駔之術’과 ‘君子之交’를 대립구조로 설정했다. 구체적 내용보다 “忠과 義라고 하는 것은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의 常事이나 부귀한 이에겐 논할 것이 못될 뿐이다”라는 말에 이 작품의 성격이 드러난다.② 穢德先生傳이 작품은 서울 장안의 인분을 퍼서 나르는 엄행수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해서 엮은 작품이다. 엄행수가 인분을 퍼서 성문 밖의 논밭을 기름지게 만드니 농사도 잘 되고, 돈도 벌고, 그야말로 일석삼조인 것이라며 연암은 엄행수를 누구보다 덕행이 있다 해서 穢德先生이라고 칭한다.●主人公의 逸話를 모은 小說① 閔翁傳閔翁傳은 金神仙傳, 虞裳傳과 함께 1인칭 소설이라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후반기 소설들인 이 3편이 모두 1인칭 소설임을 감안하면 박지원이 대체로 ‘누구에게 들었다’ 식의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이 소설에는 상당한 사실성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 소설은 주인공 민영감같은 志士가 뜻을 펼치지 못했음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 주내용이다. 인재등용의 문제는 虞裳傳과 許生傳 등에서 추구하는 주제와 연관돼 있다.② 廣文者傳이 작품은 거지 광문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으로서 그 핵심은 거지 신분인 광문이 차츰 사회적으로 사대부 양반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특히, 사대부들과 교분을 맺으며 ‘너’, ‘나’ 하며 술마시고 노래하며 사는 모습은 당시 양반의 지위에 대한 추측을 가능케 한다.●單一構成으로 單一主題를 추구한 小說①兩班傳兩班傳은 이 논평을 삽입하였으니,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③審勢編(심세편)조선 사람의 五妄(오망)과 중국 사람의 三難(삼난)을 역설하였다. 역시 北學(북학)에 대한 예리한 이론이다.④玉匣夜話(옥갑야화)一齋本(일재본)에는 進德齋夜話(진덕재야화)로 되어 있다. 홍순언, 정세태에 대한 기록도 재미있는 일이거니와, 특히 허생전 한 편은 연암소설 중에서 가장 득의작이다. 연암은 일생을 통하여 그 笑罵(소매)와 悲咤(비타)의 일체를 모두 이 한편에 붙여서 유감 없이 표현하였던 것이다.3) 烈女咸陽朴氏傳이 작품은 57세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앞에서 논의한 7개의 傳 작품들이 대개 30대 중반까지의 작품이라고 볼 때 대략 20년의 시간 공백이 있다. 열하일기 속에 포함된 것들은 이미 종전의 7개 傳과는 그 맥을 달리한다고 볼 때, 열녀함양박씨전은 의외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따로 분리해서 논해보기로 한다.※七傳과 ‘열녀함양박씨전’ 비교도입부전개부종결부가계인정기술행적사후 및 후손관계①馬駔傳△○○○②穢德先生傳△○○③閔翁傳△○○○○④廣文者傳△○○⑤兩班傳△○○⑥金神仙傳△○○○⑦虞裳傳△○○△○⑧朴氏傳●●●●●●열녀함양박씨전은 초기 七傳에 비해 事實性과 관련된 모든 요소들을 구비했다. 이것은 朴氏의 實傳임을 밝히기 위한 연암의 의도적 배려로 풀이된다. 또, 박씨의 실제 사건의 기술에 있어서도 七傳의 順行的 구성을 지양하고 근대소설의 분석적 구성을 취함으로써 사건에 대한 흥미나 烈行의 진상을 부각하는 데 성공했다. 종결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작품의 표면적 구조는 박씨의 烈節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되도록 짜여져 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烈節을 비판하고 守節의 아픔을 드러내고 있다. 문장은 대화체를 구사했고, 사실을 서술하는 記事 위주의 간접묘사를 유지하였으며 수사법상의 풍자적 기법은 한층 더 강화됐다.이 작품은 박지원 소설의 예외에 속하는 경우로, 박지원 문학이 어디까지 뻗어나갔는지에 대한 추측을 가능케 한다.4) 燕巖의 詩世界연암 박지원에게 있어 詩 세계는 사상과 함께 생각해볼 때 아쉬움이 남는 일이지만, 19세기 말까지도 주류는 한문학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며, 한문문학 안에서 새로운 언어 표현의 가능성을 따지면서 法古創新이라는 창작의 정신과 창작 이론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것에서 연암의 문학사적인 의의와 위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의 여러 작품들은 기존의 傳과 야담을 기반으로 해서 한문소설이 발전된 성과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다시 그 어느쪽에서도 찾을 수 없는 기발한 구상을 작품마다 특이하게 갖추고 있다. 그래서 한문소설의 수법과 사상을 결정적으로 발전시킨 의의를 가지며 국문소설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독자의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하기보다는 농축되어 있는 표현의 숨은 뜻을 캐도록 유도하는 점에서 국문소설과는 다른 한문소설 특유의 성향을 아주 잘 살리고 있다.북학파를 대표하는 한 사람의 실학자로서 당시의 성리학이 지나치게 관념적인 학문으로 흐르는 것을 대담하게 비판하며 空論보다는 實用을 강조했던 태도 역시 연암의 문학적 인식과도 상관이 있음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는 경색된 사고방식의 허점을 풍자하는 의 경우가 좋은 예일 것이다. 견문한 바를 일기 형식으로 적을 따름이라는 구실을 내세워놓고, 그 속의 뜻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문장을 이룩했으며, 문학 갈래에 관한 상식적인 구분의 한계를 넘어서서 허상이 아닌 실상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방법이 무엇인가를 다각도로 시험했다. 는 단순한 견문기가 아니고 복합적인 구성과 심각한 주제를 가진 다면적인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까지 글 종류를 나누어놓았던 기준을 무너뜨렸으며, 오늘날의 분석방법마저 겉돌게 하고 있기도 하다.또한 연암은 시간적, 공간적 상대주의를 표방하면서 모방을 거부하고 ‘자기 시대의 문학’을 강조했다. 이는 17세기 이후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실학자들 사이에서 중국이 모든 기준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관점의 상대화 논리가 마련된 것과 같은 선상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즉, 글의 대상을 주체원
제 1 부 성장, 수학, 방랑기제 1 장 가문과 성장 과정1. 명문 풍산 홍씨가의 장손홍명희는 1888년 7월 3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홍범식과 은진 송씨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의 조선사회는 1876년의 개항과 임오군란, 갑신정변등이 계속 일어나는 어지러운 형국이었으며 혼란으로 근대국가 수립의 과제속에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벽초의 부친인 홍범식은 1910년 금산 군수로서 경술국치를 당해 부분 끝에 자결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로 인한 충격으로 평생에 걸쳐 영향을 받게 된다.2. 괴산 인산리의 생가이곳은 홍명희의 고조 홍정주의 생존시인 19세기 중엽부터 자리잡았던 것 같다. 홍명희는 주로 서울에서 생활을 했으나 식민지시기의 서울 생활에 지쳐 자주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1998년 제월대 관장에 벽초 홍명희 문학비가 세워지기도 했다.3. 신동의 유소년 시절홍명희의 생모 송씨는 세살되던 때에 세상을 떠났고 이등해 한양 조씨를 맞아 그 사이에 성희, 도희, 교희 세 아들과 인희, 숙희 두 딸을 두었다. 이후 성희는 홍명희와 의기가 투합하여 많은 사회활동을 함께 하였다. 주로 증조모의 사랑 속에 유년 시절 자라나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한학수업을 받기 시작했는데 비상한 기억력과 뛰어난 文才를 드러냈다. 열한살 무렵부터는 중국소설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4. 조혼과 득남열세살 되던 1900년 참판 민영만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는 당시의 관습에 따른 조혼이었는데, 매우 총명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이후 홍명희가 유학으로 신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민씨와 평생 의좋은 부부생활을 했다고 하며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도 부인을 아끼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16세 때 장남 기문을 낳았는데 이후 망발로 형제와 같은 부자로서 부자간에 담배도 마주 피고 술도 같이 먹는다 는 이야깃거리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후 아버지 홍명희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한다. 그 후 차남 기무와 삼남 기하가 태어났고 기하는 돌이 갓 지난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제 2 장 학업 : 서울과있기도 했으며 벽초는 여기서 최초의 사회활동이자 문필활동으로서 주목된다. 대한흥학회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학보 발간 사업이었는데, 벽초는 이곳에 여러 종류의 글들을 실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논설인 은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략을 앞두고도 민지가 발달하지 못해 지극히 위태로운 지경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그 원인이 역사적으로는 당쟁에 있고, 그 잔재인 지방열을 타파하고 대동단결해야 함을 역설하기도 하였다.6. 사상적 번민과 민족의식점차 학업에 열의를 잃고 사상적인 번민에 빠지다가 1910년 봄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이는 신경쇠약이 유일한 원인이었는데, 계속적인 자연주의 계통의 문학서적 탐독으로 뒤는게 일종의 사춘기를 맞게 된 것으로 보이며, 탐독했던 바이런, 일본 자연주의 작가 작품의 영향으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더욱 큰 원인은 고국의 암울한 정세와 그로 인한 민족적 울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일본에서 겪은 민족적 차별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것으로 보이며 민족적 모욕감을 예민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의 5년간 유학생활은 여러모로 충격적인 체험이었으며 그로 하여금 생활과 의식의 양면에서 지난 시절과는 지극히 대척적인 세계로까지 나아가게 했던 듯하다. 그러나 중도 귀국한 그에게는 향후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제 3 장 중도 귀국과 부친의 순국1. 소년 지와 초기 문학 활동귀국하여 당시 러시아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해보려고 러시아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무렵 최남선의 권유로 몇 편의 번역문을 지에 개제하였다. 20호에 실린 산문시 은 폴란드의 시인 니에모예프스키의 시를 번역, 소개한 것인데 벽초의 심경을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신문학 초기의 우리말 문체로서는 유려한 예술적 표현을 성취하고 있다. 일역되어 있는 것을 다시 옮기는 것이기는 했지만 문학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의역을 시도하였고 전통적인 율격의 구속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나름의 내재율을 성취하고 있 기록은 이광수의 지산외유일지에 나와 있기도 한다. 그 생활상을 보면 중국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이 본격화되기 이전 모색기에 처한 망명 지식인들의 고뇌와 방황을 여실하게 그려보이고 있다 하겠다.4. 싱가포르로의 항해1914년 상하이를 떠나 남양으로 향하였다. 이후 3년간 남양 을 방랑했다고 한다. 당시 함께 했던 사람은 지산 정원택, 단정 김진용, 동성 김덕진 등이었다고 하며 자금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까 싶은 기대에서 떠났던 것 같다.5. 남양에서 보낸 3 년이들은 아마도 상하이시절 신아동제사와 관련이 있꺼나 개인적으로 교분이 있던 중국인들을 통해 동남아시아의 화교들과 일정한 연계를 가지면서 그들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고 지낸 듯 싶다. 당시 조선인들로서는 가보기 힘든 남양에서의 방랑체험은 홍명희의 안목을 넓혀주었을 것이며 내면적 성장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6. 귀국 전후1917년 12월 11일 홍명희 등은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상하이로 향하였다. 그후 수개월 동안 상하이에 체류하다가 1918년 북경으로 가서 중국에 온 정원택과 해후하였다. 이곳에서 를 집필중이던 단재 신채호를 만나게 된다. 이후 정원택을 따라 펑톈에 간 홍명희는 동생 홍성희를 만나게 되고 1918년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집에 돌아와 주로 장남인 기문의 교육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이며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민족해방운동 대열에 뛰어들게 되어 오랜 수학과 방랑기를 마치고 본격적인 사회활동기로 접어드는 제 2단계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제 2 부 식민지 시기제 1 장 3.1 운동1. 괴산 만세시위 주도와 최초의 옥고32세 되던 1919년 3월 향리 괴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면서부터 민족해방운동의 도정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된다. 3.1 운동의 지도자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일제 관헌에 자수하여 모두 연행되고 말았지만 파고다 공원에서의 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촉발된 민중의 반일감정은 자연발생적인 전국적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홍명희 일가는 가희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경쟁하면서 이른바 3대 민족지 정립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당시 시대일보는 발행 부수가 동아일보를 능가했따고 한다. 시대일보는 이후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고, 1926년 8월부터 휴간한 끝에 폐간되고 말았다. 이후 홍명희는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는데 신간회 창립과 관련된 논의가 계속되어 학교일에 전념할 수 없게 된다.3. 출간동아일보에 학예란을 신설하면서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과학의 민중화를 목표로 제시하면서 세계에서 서로 경쟁하며 우리의 민족적 발전을 촉진해야한다는 것을 학예란의 임무로 삼았다. 여기에 학창산화가 실렸으며 그 내용은 자연과학에 대한 항목이 압도적이었으며, 언어학과 언어사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과 지식이 있었다. 는 이처럼 계몽적인 성격의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기도 하며 홍명희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을 적잖이 포함하고 있다. 남녀평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제 3 장 사상, 문예 운동1. 신사상 연구회, 화요회, 정우회1920년대 부르주아 민족운동인 일제하에서의 실력양성과 자치를 추구하는 민족개량주의 노선과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절대 독립론을 견지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으로 분화되어갔다. 한편 이와 같은 부르주아 민족운동과는 별도로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보급되었는데 이는 러시아혁명의 성공과 국내 노동자, 농민운동의 고양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홍명희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고 20년대 무렵 민족해방운동의 한 돌파구로서 사회주의 사상에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리기 시작했으며 급진적 지식인들의 사상당체인 신사상 연구회와 화요회, 정우회에 참여하여 주요 회원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다만 대부분의 회원들이 운동단체나 지하 전위조직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비해 사회주의 사상을 이론적으로 탐구하는데 주력한 소수회원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사상 연구회는 이후 화요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맑스주의 행동단체로 성격을 바꾸었고,25년에 화요회의 주도하에 북풍회의 가담으로 조선 공산당이 결히 세력을 뻗친 조직기에 해당하고 2기는 본부 간부진이 좌경한 시기이며 3기는 집행부가 자치운동론자들과 제휴하려하여 급진 회원들로부터 공격을 받던 시기이다. 홍명희는 1기 신간회를 이끈 가장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실제 신간회를 이끌었던 것은 총무간사회였고 여기의 족직부 총무간사인 홍명희는 다른 부서의 총무간사들과도 절친한 관계였기에 더욱 의욕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여성운동의 단일 전선인 근우회가 있었는데, 홍명희는 여성운동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하였다. 요컨데 남녀평등과 여성의 지위향상이 시급함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민족해방운동과 결부시키고자 하는 논리에서 홍명희의 사상적 지향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신간회는 창립 이래 전국 각 지역에서 급속한 조직 확대를 이룩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본부 차원에서는 애초에 의도했던 비타협적 정치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대체로 지회 차원의 활동을 지원해주는 데 머무르고 있었다. 조선 공산당 검거사건과 조선일보 정간사건을 계기로 신간회 본부가 온건 노선을 걷게 된 것은 본부와 지회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신간회 활동을 전반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3. 복대표대회, 민중대회사건, 해소29년 2월 창립 2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정기대회를 개최하고자 했으나 일제가 금지하였고, 규약 개정과 간부 개선이 불가피한 시점이었기에 약식의 복대표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복대표대회 이후 간부진용이 새롭게 정비되어 종전에 비해 적극적인 활동이 전개되었고 가장 괄목할 만한 활동은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반일시위로 확대하기 위해 민중대회를 추진했던 일이다. 이는 신간회의 활동 전체를 통틀어 비타협적 정치투쟁이라는 본연의 목표에 가장 근접한 활동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내외정세의 변화와 민중대회 사건에서 보여준 일제의 탄압을 의식하여 온건한 노선을 취하게 되고 가장 세력이 컸던 경성지회의 반발과 공격으로 결과적으로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하게 되기도 했다.4. 신간그룹, 조선공산당과의 관계일제 관헌자료에 따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