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소설 선독감수성의 혁명 김승옥, 그의 삶과 문학들어가며1960년대는 작가들에게 있어 가치관의 혼란을 준 시기였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대학생 시절이었을 4.19혁명 때, 그들은 그들의 이상을 위해 거리로 나갔다. 그러나 곧 이은 5.16 군사정변으로 작가들은 그들이 바라던 이상향이 멀어져만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고, 그것들의 해결 방향이 모색되던 시기는 1960년대 후반에나 가야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시대 상황이 어떤 작가의 특유의 감수성을 자극했으니, 그 인물이 바로 김승옥인 것이다.김승옥은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대학 시절, 교내 신문의 기자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동인지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신문사에 연재만화를 그려 학비에 보태기도 하였다. 또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으로 활약한다. 김승옥은 1962년, 단편 「생명연습」으로 등단한다. 그의 놀라운 문학적 소양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65년,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성취는 1960년대 전반부를 끝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단 수년간의 작품 활동만으로 4.19세대의 대표 작가로 떠오른 것이다.1. 작가론1) 저자 소개작가 김승옥에겐 언제나 천재라는 꼬리표와 함께 ‘전(前)소설가’라는 딱지가 붙어 다닌다. 그것은 어린 나이, 당시 한국 문단에 일대 바람을 일으켜서이기도 하고 시대의 아픔으로 인해 그 천재성을 너무 일찍 닫아버린 탓이기도 하다. 그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학창시절 동시, 콩트 등의 창작, 교지 편집, 학교 대표 배구선수, 학생회장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60년 서울 대학교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 교내 신문기자로 활동하였고 한국일보사가 발행하는 『서울경제신문』에 연재만화를 아르바이트로 그려 학비를 조달하는 등 만화와 그림에도 상당한 재주가 있었다. 그의 문학의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는 대학시절, 독문과의 이청준ㆍ김광규, 불문과의 김치수ㆍ김현, 미학과의 김면에 투영된 1960년대 사회의 풍속을 따라간다. 당시 문체 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식의 변모를 그린 작가라는 점에서 충분히 새로웠다.4.19 이후 쏟아져 들어온 여러 외국 문학들을 읽고 문화충격을 받은 김승옥은 특히 일본 번역물들을 읽고 ‘소설이야말로 가장 정확하게 자기의 세대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우리 시대의 삶을 써봐야겠다는 충동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데뷔작인「생명연습(生命演習)」이다. 「생명연습」은 시골 출신의 한 대학생이 겪는 서울 생활을 통해 소외의식을 그려내고 ‘극기’와 ‘자기세계’의 의미를 탐구한 작품으로 당시 세대에게 가장 큰 아픔인 6.25를 배경으로 한다. 6.25 후, 모든 것이 황폐화 되고 전통적인 가치가 상실된 현실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자기 인생을 개척해야 될지 몰라 허둥대고 있는 아이들과 같은 상태가 바로 6.25 후의 우리들 모습이라는 나름대로의 자각 밑에서, 여수의 한 가족을 통해 아버지 없는 세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또 내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자기 세계라는 것이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서 쓴 작품이 「무진기행」이다.) 젊음의 허약한 순수가 겪는 방황과 혼돈과 절망감이 무진의 안개처럼 막연한 분위기로 제시되어 있다.) 도덕의식의 진공상태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주인공은 자기세계 자체의 존재에 대한 검토한다.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서울의 달빛 0章」은 그가 20대에 절필을 하고 빈둥대고 있을 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던 이어령이 김승옥을 호텔에 감금하고 거의 반강제로 쓰게 한 작품이다. 초혼(初婚)에 실패한 친구의 이야기가 동기가 된 이 작품은 당시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던 천민자본주의를 잘 드러냈다. 친구의 실패담에서 작가는 우리 시대의 독특한 비극을 맛보았고 서로를 이해할 줄 모르는 부부를 통해 현대 문명 속에서 변질되어 가는 인간의 의식과 단절을 이야기한다.또 하나의 수상작인「서울, 1964년 겨울」은 젊은 김승옥의 총명한 감르지만 그의 아버지는 순천여순반란 사건 당시 사망했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의 여동생은 모자라는 젖에 굶주리다 세상을 떴다. 이러한 일들을 그의 심리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 그의 소설 대부분이 우울하고 그늘지고 시니컬하다. 전통적인 가치가 상실되어버린 우리 시대를 그는 소설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이야기하고 싶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2004년 서울의 거리는 어떤 모습일까?4) 김승옥,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가.나의 경우 소설이 잘 안 써지는 이유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털어 놓자면, 소설을 쓰는 동안 엄습해오는 비현실감 때문이다. 가령 아내가 현실적인 몸을 움직여서 현실적인 에너지를 소비하며 지어주는 현실적인 밥을 먹고 앉아서, 형체도 없고 있다고 믿기에도 답이 서지 않는 이미지를 펜으로 붙잡아보려고 허둥대는 내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며 내 자신이 한 개의 깃털처럼 가벼운 허깨비로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비현실감은 아직은 나로서는 견디기 힘들다. )당시 사상계가 주관하는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동인 문학상을 스물넷의 나이로 수상하여 이른바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오른 김승옥은 영화계에 뛰어들어 각색ㆍ각본 및, 감독 등 다양한 외도를 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문학이란 항상 자기표백(自己表白)의 수단)이었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 내면을 활자화하여 남에게 읽히고 돈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남의 시나리오를 각색하여 최소한 기능인으로서의 떳떳함을 느낄 수 있는 게 낫다고 고백한다. 천재라는 꼬리표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그는 소설을 쓰는 것이 잉크가 아닌 피로 찍어내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1981년 신의 계시를 받고 그의 작품에 목말라하는 수많은 독자들을 외면한 채 종교 활동에 몰두하던 그는 더이상 창작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소설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김승옥. 독특하고 세련된 문체와 젊은 감성, 도시의 감수성으로 한국 소설의 가능성을 잔뜩 넓혀 놓고 홀연히 ‘신화 속으로 잠적해버렸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극대화시켜 표현하고 있다.주인공의 무진 방문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남편의 승진 준비를 위한 아내의 권유로 윤희중이 무진에 내려간 첫 날 밤, 그를 방문한 무진에서 교사로 있는 고향 후배 박과 함께 고시에 합격해 세무서장으로 있는 중학교 동창 조가 마련한 자리에 간다. 그 술자리에서 박과 함께 중학교에 음악선생으로 근무하고 있는 하인숙이라는 여자가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것을 본다. 박은 한때 윤희중도 가지고 있던 순수함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인물이며, 조는 소위 천박한 현실주의자이며 속물이다. 박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속물들' 틈에서 천박한 유행가를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아 자리를 박차고 먼저 일어선다. 술자리가 파하고 윤희중이 하인숙을 바래다주는 길에 그 여자는 무진의 권태로운 삶에 숨막혀하며 윤희중에게 서울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하인숙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조와 가깝게 지내고, 윤희중과도 관계를 맺으며 무진에서 벗어나 서울에 가기를 희망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의식으로 진짜 속물도 되지 못하고 윤희중의 청년기와 마찬가지로 방황한다.윤희중은 이 세 사람을 조금씩 닮아 있다. 순진했던 과거의 모습이라든지 속되게 현실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박과, 서울에서의 삶은 현실에 타협하여 속물이 되어 있는 조와, 지금 무진에서의 모습은 순수와 속됨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하며 방황하는 하인숙과 닮아있다. ) 무진의 안개처럼 애매모호한 무진에서의 현재 윤희중의 내면 모습은 하인숙과 가장 닮아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인숙과 윤희중은 서로 통하고 동질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윤희중은 하인숙을 통해 지난날 무진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던 지난날의 자신을 만나게 되고,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해도 좋은 하인숙을 사랑하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인숙에 대한 사랑도 결국은 자기애의 발로이며,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그렇다면 윤희중은 범을 강하게 지배하던 과거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작가는 가장 순수해야할 사랑조차도 현실의 이해관계에 의해 변질되어 가는 부끄러운 당시의 모습을 걱정하며 지적하였던 것이다.윤희중은 그토록 서울에 대해 환멸을 느끼면서도 안정된 삶이 보장되어 있고, 자신의 정체를 감추며 살아갈 수 있는 서울의 힘에 이끌린다. 그래서 아내의 전보 한 통에 자신과 타협을 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만다. ‘원점 회귀의 구조’를 취하는 이 소설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다시 서울로 되돌아가면서 마무리된다. 서울로 되돌아가며 그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는 순수한 삶과 속된 삶 가운데서 격렬하게 벌인 전투가 아내의 전보 한 장에 의해 간단하게 순수함이 패배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본 팻말의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글마저도 자신의 속물적인 선택을 비난하는 것으로 느껴진다.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그가 다시는 무진을 찾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가 떠나고 난 뒤에도 무진에는 여전히 안개가 있을 것이며, 그는 또 언젠가 안개를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가 내면에 안개를 품고 있는 한 그는 무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그 때마다 반복될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하인숙에게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윤희중에게 서울로 계속 데려가 달라고 하던 하인숙이 마지막에는 서울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에서, 무진은 마냥 떠나기만 하는 곳이 아니며 어쩌면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그 여지를 남겨둔다. 바로 이 부분에서 윤희중이 결국은 순수와 인간미가 남아있는 무진으로 영원히 귀향할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준다. 이는 어쩌면 작가가 인간성 회복의 가능성을 미약하게나마 제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이 소설을 살펴본 결과 산업화되기 시작하면서 40여 년이 지나도록 우리의 사회는 외형적인 모습이 좀 바뀌었을 뿐, 윤희중을 비다.
◇ 이규보의 시 세계◇1. 들어가며......12032741 전성원2. 이규보의 생애(生涯)와 문학관(文學觀)..............12032727 방연지1) 이규보의 생애(生涯)2) 이규보의 문학관(文學觀)3) 이규보의 시관(詩觀)3. 젊은 시절의 이규보의 시 세계...12032748 허윤정1) 어릴 적부터 나타난 천재적인 시인의 면모2) 해좌칠현과의 접촉을 통한 비판적 안목의 형성3) 천마산 시절의 역사 인식과 창작4) 이규보에 관한 어용시비(御用是非)에 관한 소견5) 하급 벼슬생활 중의 이규보의 시세계6) 이규보의 젊은 시절의 시 세계에 관한 정리4. 인천 시기의 이규보.............12032712 김수희1) 계양(桂陽)시기의 이규보2) 강화(江華)시기의 이규보5. 이규보의 외교문서..............12032734 유석종1) 의의2) 당시의 역사적 상황3) 이규보가 활동한 시기4) 몽고의 요구와 이규보 외교의 성과5) 이규보의 외교 문서6) 정리6. 이규보의 산문..............12032718 문경연1) 시 평론집-백운소설2) 가전체 소설- 국선생전3) 설 - 슬견설, 이옥설4) 그 외의 각체(各體)7. 마치며1. 들어가며백운 이규보(李奎報). 고려 중기의 문인으로 그의 업적이나 그의 작품들은 현재까지도 많은 연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많은 시문학과 많은 작품들을 남겼으며, 당시의 외교문서들을 도맡아 담당했던 관리이기도 했다. 무신정권에 빌붙어 정권을 찬양하며 관직을 구걸하는 듯한 작품을 쓰기도 했으며, 몽고인들의 침략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며 머리를 공처럼 차고 놀겠다는 증오심 가득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농민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자신을 늙은 농부로 표현한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의 업적이나 생애에 형성과 사회비판적 안목을 키우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1170년 무신정변과 집권한 무리들의 횡포적 통치를 피하여 산중에 숨어살거나 방랑 생활을 한 이인로, 임춘, 오세재, 황보항, 조통, 이담지, 함순 등 ‘해좌칠현’)과의 접촉이었다. 이들은 무신정변으로 일조에 벼슬자리를 잃고 온 가족이 몰살되었거나 가산을 털리고 정처 없이 헤매는 신세가 된 불우한 문인들로서 불평, 불만에 차있었으며 당대 현실에 비판적으로 대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처지로 하여 생겨난 현실 비판의 지향을 자기들의 시 창작에 구현함으로써 이 시기 진보적 문학사조의 하나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규보는 젊은 나이로 이들과 자주 그들의 시 짓기 모임에 참가하였다. 이규보는 이렇게 젊어서부터 사회적 어려움이 많은 사람들과 사귀면서 당대 사회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으며 나라의 현실에 관심을 보이면서 창작적 재능을 꽃피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규보는 ‘해좌칠현’이 하는 일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으며 부단히 자기의 독자적인 창작세계를 개척하여 나갔다. ‘해좌칠현’의 무리와 더러 어울리기는 했지만, 거기에 가담하라는 제안을 받고서는 거절하는 뜻을 시로 읊었다.榮參竹下會(영참죽하회)영광되이 죽림이 모임에 참석하여快倒甕中春(쾌도옹중춘)통쾌히 동잇술 기울였네未識七賢中(미식칠현중)알지 못하겠네 칠현 가운데誰爲鑽核人(수위찬핵인)그 누가 오얏씨 뚫은 이기주의자이던고대나무 아래의 모임에 참여하는 영광을 차지하고서, 술을 함께 마셔 기쁘지만, 칠현 가운데서 누가 씨앗에 구멍을 뚫은 사람인가 알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 말은 중국의 죽림칠현 가운데서 인색한 사람이 있어, 자기 집의 좋은 오얏 씨앗을 다른 누가 가져다 심을까 염려해 모두 구멍을 뚫었다는 고사에 빗댄 것이다. 죽림칠현을 자처하는 무리가 마음속으로는 벼슬을 탐내면서 겉으로만 초탈한 듯이 행세하는 위장술을 빈정댄 말이다.3) 천마산 시절의 역사 인식과 창작젊은 시절에 이규보는 그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그 대 자기의 호를 는 부평부사의 관사였던 自娛堂 터가 있다. 이 곳은 이규보가 52세 때 桂陽都護府副使로 부임해 와서 《自娛堂記》를 지은 장소이다.이규보가 계양부사로 파견된 것은 己卯年(52세) 봄 탄핵을 당하여 면직되었기 때문이었다. 전년 12월 外方의 수령들 중에 八關賀表를 미처 올리지 못한 자들이 있자 이규보가 이를 문책하려 하였으나 相國)금의가 만류하여 중단했는데, 이때에 최충헌 이 사실을 알고 금의와 이규보를 탄핵하였다. 그 후 금의는 용서되고 이규보는 파직당했다가 4월에 외직인 桂陽都護府副使 兵馬鈐轄로 좌천되었다.)신진사인)으로서 진취적 기상과 포부를 펼치기 위해 최씨 무신정권에 적극 참여하였던 이규보로서는 뜻하지 않는 일로 벼슬길에서 낙마하여 서울을 떠나 지방수령으로 좌천하게 되자 큰 실망과 좌절을 겪게 된다.)失路忽從天上落 벼슬 길 잃으니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아登瀛?似夢中遊 신선세계에서 놀던 일 꿈결 같도다一言見訊千金重 위로의 말 한마디 천금보다 더 중하고三黜忘懷萬事休) 세 번이나 쫓겨났으니 만사가 그만일세이처럼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듯 신선이 속세로 떨어진 듯, 만사가 끝났다하며 절망하였던 것이다.晩山烟瞑水漫漫 저문 산 어두운 연기에 물은 길기도 해灘險風狂得渡難 험한 여울 미친 바람에 건너기도 어렵구나命薄如今遭謫去 천박한 운명 이제 또 귀양살이 가는 길이지만尙難?却望長安) 그래도 장안을 향한 마음 버리기 어렵다오.좌천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치 귀양살이 하러 가는 길에 비유하는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처음부터 기대에 미흡한 외직 생활은 그에게 실의와 갈등을 불러왔다. 더구나 심적 동요를 일으키기 쉬운 晩春의 他關은 思家와 望闕을 조장한 것이었다. 이규보는 항상 중앙의 관직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실의감에 젖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婦去夫留是底由 아내 떠나고 남편은 머무르니 이 무슨 연유인가?無拘迫我如囚 너 나를 속박치 않건만 난 죄수 같구나舟將人遠心隨去 배는 가고 사람은 멀어지니 마음도 따라가고海送潮來淚共流 바다는 萬?靑烟起 일만 부엌 아침 저녁 푸른 연기 일어나네百官擁似拱辰星 옹위한 만조백관 별이 북신에 공읍하듯四城奔如朝海水 달려오는 백성들 물이 바다에 모여들듯鳳樓御宴不減前 대궐에서 베푼 잔치 전일에 손색없어萬妓盈庭獻娟媚) 뜰 가득한 기생들은 고운 자태 보이누나황폐해진 舊京은 다시 생각할 것도 없고 新都에 있는 궁궐의 화려함이 즐비하게 늘어선 기와집들이 보는 이를 흐뭇하게 한다고 하였다. 신용호는 개경의 繁榮은 지난 날의 꿈에 불과하니 황폐해진 그 땅을 다시 생각할 것도 없다면 오랑캐를 몰아내고 국토를 수복한 후 舊京으로 還都할 결의나 의지는 어디에서 찾아볼 것인가 라며 비난하고 있다.)遷都의 適宜性과 統治者에 대한 禮讚에만 급급한 나머지 두고 온 良民들이 겪을 困苦와 국가적인 羞恥에 대해서는 一言半句의 言及도 없어서 保護를 받지 못한 下層民들의 決死的인 抗戰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게 아닌가 하는 疑懼心마저 갖게 된다.그러나 몽고로 통하는 외교문서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당시의 상황)을 보면 그가 우국의 현실 속에서 얼마나 苦心하였는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시기의 그의 생애는 官運이 탁 트여 榮達을 누리고 있었으나 국가적 시련이 심화될수록 그만큼 그가 걸머져야 할 책임도 막중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 몽고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규보는 고려를 대변하는 입이었으며 그의 문장은 몽고족의 심금까지 울리는 바가 있어서 고려의 國體를 존속시킨 힘이 되었다고 한다.)게다가 내륙이 병화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외적들에 대한 적개심을 시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고 하였다.)北俗不習南 북쪽 풍속이 남쪽에 익숙치 못한데胡爲入炎洲 어찌하여 炎洲로 들어갔나忍令萬民食 차마 만민의 밥으로肥澤一邦? 한 나라의 원수를 살찌게 하랴?城雖首策 ?城이 비록 상책이지만淸野亦良籌 淸野도 좋은 계책이리라安得天上劒 어떻게 천상의 칼을 가져다가一時墮胡頭 단번에 오랑캐 머리를 자를고盡隨白刃落 시퍼런 칼날로 모조리 떨어뜨려跳轉如圓毬 둥근 공 차듯 굴려 버릴고不然大海水 아니면고려와의 외교관계를 끊어버린다. 6년 후 몽고는 고려 침공을 개시한다. 고려 조정은 강화로 천도한 후 몽고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약 40년 간(1231 ~ 1270)의 항전 끝에 고려는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고 몽고와 화의한다.3) 이규보가 활동한 시기이규보의 관직 경력은 그리 순탄한 편은 아니었다. 이규보가 외교 문서를 다루기 시작한 시기는 1231년 9월 산관으로 임명된 이후부터이다. 이듬해 이규보는 비서성 판사로 승진, 그때부터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각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몽고의 일차 칩입이 1231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규보가 외교한 주된 대상은 몽고라는 것을 알 수 있다.4) 몽고의 요구와 이규보 외교의 성과몽고의 요구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강동성의 거란군을 토벌한 이후부터 계속되었다. 1221년 몽고의 사신 자고여가 전달한 요구는 다음과 같다 - )달피(獺皮) 1만 령(領), 세주(細紬) 3천 필, 면자(綿子) 1만 근(?), 용단묵(龍團墨) 1천 정(丁), 붓(筆) 2백 관(管), 종이 10만 장(張), 자초(紫草) 5근, 홍화(紅花), 남순(藍荀), 주홍(朱紅) 각 50 근, 자황(雌黃), 광칠(光漆), 동유(桐油) 각 10 근. 4개월 후 몽고에서 다른 사신이 오자 당시 집권자 최우는 )“전번에 온 사신도 아직 응접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더군다나 뒤에 온 자이겠는가? 동북면 병마사로 하여금 위로하고 달래어서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겠다.” 고 하였다. 이후 몽고 사신들의 공물 요구는 계속되었고, 고려에서는 사신 영접에도 급급했다. 그러던 중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변에서 피살된다. 몽고는 즉각 고려와 외교 관계를 중지하고, 급기야 침공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침공 이후 고려는 한편으로는 항전하면서 한편으로는 엄청난 양의 공물을 통해 화의를 요청한다. 이규보가 대몽(對蒙) 외교문서를 작성한 시기는 몽고의 살리타가 고려를 침공한 해부터이다. 1233년 이규보의 진정서(陳情書)는 몽고 황제를 감동시켜 몽고군이 철수하기에 이른다. 물론 몽고가 이다.
이규보의 산문 세계목차1. 들어가며2. 발(跋)ㆍ서(序) - 東國諸賢書訣評論序, 新集御醫撮要方序, 全州牧新?東坡文集跋尾3. 부(賦) - 畏賦, 陶?賦, 夢悲賦4. 시화(詩話) - 白雲小說5. 설(說) - ?犬說, 理屋說6. 서(書) - 奇吳東閣世文論潮水書7. 기(記) - ?菓記, 四可齋記8. 논(論)ㆍ문답(文答)9. 마치며1. 들어가며지난 번 발제에서는 이규보의 산문을 교과서 위주로 다루어 양적인 측면에서나 질적인 측면에서 발전적이지 못 했던 아쉬움이 남았다. 이규보는 고려 중기 역사적인 격동기를 살면서 누구보다도 앞서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인 현실에 주목하고 변전(變轉)하는 시대상황과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을 문학적인 여과과정을 통하여 구현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던 지식인이었다. 수천편의 시문 이외에도 수백편의 산문들을 남겼다. 이번 과제에서 그의 산문을 더 깊이 다루고 그의 현실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통해 그와 대화하는 기회를 가져보도록 하겠다.한문학에는 발(跋), 서(序), 부(賦), 논(論), 서(書), 기(記), 의(議), 문답(問答) 등 여러 가지 양식(樣式)들이 있다. 여러 가지 주제의 산문들을 문학 양식에 따라 간략히 분류해 보도록 하겠다.2. 발(跋)ㆍ서(序)발(跋)ㆍ서(序)는 대체로 책을 다 지은 후에 책을 지은 연유나 감회를 간략하게 적는 것을 말한다. 이규보는 발ㆍ서양식을 통해 사건의 상세한 경위와 그 성격을 밝히기를 좋아하였고, 아울러 그것을 비평적 시각으로 해석ㆍ평가하는 일을 즐겼으며, 그것이 문인이 해야 할 소임임을 자각하고 중시하였다.‘우리나라 여러 현인의 글씨를 평한 데 대한 서(東國諸賢書訣評論序)’에서는 옛 문인들의 서체에 대한 평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가 우리나라에서 제일인자로 꼽은 사람은 바로 김생(金生)이다. 왕희지의 서체와 비슷하고 신비로운 서체를 가진 김생을 신품(新品)의 으뜸으로 꼽고 있다. 김생의 글씨는 송나라 조정 제현들도 착각할 정도로 왕희지의 글씨와 비슷한데아침이슬이 맺히고 안개가 일어나며, 성난 는 그는 두려움은 임금의 위엄도, 호랑이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나라고 어찌 두려움이 없겠는가? 내가 두렵게 여기는 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네. 턱 위 코 아래 마치 문처럼 열렸다 닫혔다 하며 이와 입술이 있는 곳이 입인데 음식도 여기를 통하여 들어가고 지껄이는 말도 이곳에서 나오니 없어서는 안 될 곳이지만 도한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자리네. 옛날 금함구(金緘口))란 명문을 거울삼을 만하고 원속이(垣屬耳))란 시도 눈여겨봐야 할 것이네.질항아리 부에서는 자신이 가진 질항아리를 소재로 재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질항이리는 사용하기 쉽고, 깨져도 아깝지 않고, 채우기 쉽기 때문에 항상 술을 가득 채울 수 있다. 이러한 실용성뿐만 아니라 또한 넘치게 되면 금방 넘어지는 것을 들어 분수에 맞지 않는 과함을 경계한다.어찌 금으로 만든 그릇이라야만 보배로 여기랴. 비록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추하지 않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서 한 손에 들기 알맞고 값도 매우 싸서 구하기 쉽다. 그러니 개진다 한들 뭐 그리 아까워할 것이 있겠는가. …(중략)… 재물에 눈이 먼 저 소인들은 두소)와 같이 좁은 재주와 기량으로써 끝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 쌓기만 하고 남에게 베풀 줄은 모르면서 오히려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이 자그마한 그릇은 쉽게 차서 금방 넘어진다. 나는 이 대문에 늘 이 항아리를 옆에 두고 너무 많이 차서 넘치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면서 타고난 분수에 맞추어 한평생을 보낸다면 몸도 온전하고 복도 제대로 받을 것이다.슬픈 꿈에 대한 부는 작가는 꿈에서 아름다운 여인들과 금술잔에 술을 따라 마시며 부귀영화 속에 살다가 밤이 깊어질 즈음에 정신을 잃는다. 잠에서 깨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 헤매던 중 한때 그처럼 부귀영화를 누렸을 귀공자의 무덤을 보고 상념에 젖다 꿈에서 깬다.무덤가에 쓰러져 있는 비석을 보았더니 그도 한때 부귀영화를 누렸던 귀공자였다. 노래와 춤을 즐기던 고래 등 같은 집은 누구에게 물란 타고난 것이어서 배워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재주다 없는 사람은 글 다듬는 것을 능사(能事)로 여기고 뜻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개 글을 깎고 다듬어 구절을 아름답게 하면 분명히 아름답게 되기는 하나 거기에 깊은 뜻이 들어있지 않으면 처음에는 볼 만하나, 음미해 보면 맛이 없어져 버린다. ……남이 자기의 시를 보고 결점을 말해 줄 때 기쁜 것이나 문제될 만한 것이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 마음이 원래대로 행할 것이다. 굳이 임금이 충신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자기 잘못을 모르는 것 같이 남의 충고의 소리를 듣기 싫어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대개 시가 되면 반복하여 보되, 자기 시가 아니라 다른 사람 및 평생에 몹시 미워하는 사람의 시를 보고 결점을 잘 찾아내듯이 하고 결점이 하나도 없도록 해서 비로소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우선 첫 번째 “옛 사람들의 ~ ‘귀신을 수레에 하나 가득 실은 체(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스스로 우러나와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공연히 유명한 사람의 이름이나 주체성과 창조성이 결여된 태도임을 지적한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옛 사람들의 뜻과 심정을 ~ ‘어설픈 도둑이 쉽사리 잡히는 체(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다.” 라고 하는 것은 옛 글을 근거도 밝히지 않고, 표절하거나 모방한 원뜻조차 제대로 소화를 못하면서 인용하는 것은 섣부른 도둑과 같다는 의미이다. 세 번째로 “근거 없이 어려운 일을 글로 다루는 것은 ‘센 활을 당기지 못하는 체(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다.”라고 하는 것은 시에는 운이 필요하지만 무리한 운을 억지로 써서 능력 밖의 글을 쓰려고 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응용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글을 쓰자는 의미이다. 네 번째 “자기 재주를 측량해 보지도 않고 ~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체(음주과량체飮酒過量體)’다.”라는 것은 자기 재주를 과신해서 기교를 많이 부리는 것은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서 정신을 못 차리듯, 의미 없이 미사여구만 나열한 경우로 압운을 지나치게 써서 고고한 시(詩)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그 다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들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을 튼 공적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학자들은 모두들 그를 유학에 통달한 대학자로 여긴다. …… 나는 일찍부터 중국 사람들은 포용력이 넓어서 외국 사람의 글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다고 생각해왔다. 최치원의 글을 사책에 실었을 뿐 아니라 그 문집이 세상에 전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더욱 고맙게 여겼다. 그런데 「문예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의 전기를 두지 않았으니, 나는 그 의도를 모르겠다. …… 만약 외국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지(志)에는 써야 할것이다. 「번진호용열전(藩鎭虎勇列傳)」같은 데는 이정기(李正己)나,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도무 고구려 사람인데도 각각 그 전을 만들고 사실을 기록했는데, 무슨 까닭으로 「문예열전(文藝列傳)」에서만 최치원의 전기를 만들지 않았는가? 내가 개인적인 의견으로 추측해 보건대, 옛사람들은 문장에서 서로 시기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인이란 신분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사들을 압도했음에랴? 만일 전기를 마련하여 그의 사적을 있는 그대로 쓴다면, 그들의 자부심에 먹칠이 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나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다.”최지원이 당나라에 가서 명성을 얻었어도 끝내 그 나라의 문인일 수 없음을 지적하며, 중국 사람들이 최치원의 재주를 충분히 인정해주지 않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있다.이규보 자신의 일화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는 특징은 시에 대한 자부심과 시를 지을 때의 감흥이다.“… 나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중략)…중요한 것들은 간추려 외워 적시에 응용할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혹시 종이와 붓을 가지고 풍월을 읊게 되면 아무리 1백여 운에 이르는 장편(長篇)ㆍ거제(巨題)라 할지라도 마구 내려 써서 붓이 멈추지 하고 대들었다.나는 좀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무릇 피(血)와 기운(氣)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벌레,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큰 놈과 작은 놈만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 즉,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큰 놈과 작은 놈을 적절히 대조한 것이지 당신을 놀려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십시오.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나머지는 아프지 않습니까? 한 몸에 붙어 있는 큰 지절과 작은 부분이 골고루 피와 고기가 있으니 그 아픔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물러가서 눈 감고 고요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하여 달팽이의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大鵬)과 동일시하도록 해 보십시오. 연후에 나는 당신과 도를 이야기하겠습니다.슬견설은 이(蝨)나 개(犬) 등의 사소한 제재를 문학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세상사 모든 일에 사로잡히지 말고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어렵고도 중요한 인이라는 깨우침을 알리는 글이다. 사소한 사물에 교훈적 의미를 덧붙이는 필자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으며, 일상적인 일에서 철학적 사유를 하는 지은이의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개를 죽이는 것은 참혹하며 이를 죽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손(客)에게 큰 놈이나 작은 놈이나 죽기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선입견을 버리고 사물의 본질을 올바로 보자는 교훈을 주고 있다. 마지막에 ‘달팽이의 뿔을 쇠뿔로 보고, 메추리를 대붕과 동일시하도록 해 보십시오.’라고 이야기하며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이옥설(理屋說)≫◎ 내용보기행랑채가 퇴락하여 지탱할 수 없게끔 된 것이 세 칸이었다. 나는 마지못하여 이를 모두 수리하였다. 그런데 그 중의 두 칸은 장마에 비가 샌 지가 오래 되었으나,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가 손을 대지 못 했던 것이고, 나머지 한 칸은 비를 한 번 맞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