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서 론.본 론.초 기 국 가 단 계.고 구 려.백 제.신 라.고 대 국 가 단 계.고 구 려.백 제.신 라.통 일 신 라.결 론▶ 서 론고대국가는 원시동동체의 해체 결과로 발생한 계급관계 위에서 출현한 정치적 사회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모두 원시공동체에서 분화된 소국을 모태로 삼아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김언호 「한국사 -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한길사, 1995, p.60삼국이 생산력과 군사력에 기초하여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길은 대체로 두 방향에서 이루어 졌다. 하나는 국가 존립의 토대로서 토지와 인민이 결합된 통치영역을 확장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영역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국가의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이 두 요소는 서로를 전제조건으로 삼는 상호 보완관계에 있었으므로 삼국의 발전과정은 영역확장과 체제정비의 상승작용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삼국사회의 발전은 귀족중심의 합의체제를 거쳐 왕 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본 론- 초기국가 단계고구려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국은 BC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앞서 그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작은 제후국이었던 졸본부여를 요서지역에서 이주해 온 고구려인들이 통합하여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 이희정 「새로운 한국사」삼광, 1995, p.126고구려에는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권노부, 계루부 등의 5부의 행정조직이 있었는데, 각 행정구역의 우두머리를 대가라 하였고 그들을 총칭하여 제가라 불렀다. 대가의 밑에는 사가, 조의, 선인 등이 있었는데 대가는 그 명단을 왕에게 보고해야 했다.고구려는 영토를 확장하면서 새로 편입된 지역에 봉건제와 중앙집권제인 군현제를 병행해서 실시하였다.{) 위의 책, p.127고구려는 주변의 소국을 멸망시킨 후 그 지역의 통치자를 고구려의 귀족으로 받아들이고 왕·후·주 등의 작위를 내려 제후로 삼고 그 지역을 영지로 하여 제후국을 두기도 하고, 그 전의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적 조직체제를 가진 왕국은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즉 일원적 관료체계가 성립되면서 해체되었다.{) 김용두 「한국사 신강」교문사, 1998, p.32고구려는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고, 고국천왕에 이르러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제로 발전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광개토대왕비·장군총·왕릉을 보면 그 당시 왕권이 강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사회는 신분질서가 분명하여 왕족·왕비족·고추가 등을 비롯한 수상인 대대로 이하 10여 관등의 조직이 있었는데, 고구려 사회는 이들에 의하여 정치·경제·사회 등이 주도되었다. 고구려의 관등조직은 수서·당서·한원·삼국사기 등에서 보이는데 이를 정리 해보면 다음과 같은 12관등의 조직으로 볼 수 있다.{고구려 12관등1. 대대로2. 태대형3. 울절4. 태대사자5. 조의두대형6. 대사자7. 대형8. 수위사자9. 소사자10. 소형11. 제형12. 선인사실 각 사서마다 등급과 명칭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전체 등급에도 차이가 있다. 수사·구당서·신당서 고려전에는 12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주서 고려전에는 13등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명백히 관등이 아닌 욕살(褥薩)을 제외하면 12등이라 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 삼국의 정치와 사회 I-고구려」1996, p.158이 중 제5관등인 조의두태형 이상의 신분은 국가의 기밀사무에 참여하고 장군이 될 수 있는 고급관료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귀족들이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고구려의 관등에서 특색 있는 것은 형(兄)자와 사(使)자가 붙은 관직명이다. 형은 본래 연장자 또는 가부장적 족장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 사가 붙은 관직은 씨족원으로부터 등용되는 공부(貢賦)에 관한 임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김기흥 「한국사 개설」국사교재 연구회, 1998, p.58고구려의 중앙정치제도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으나, 다만 대대로가 수상으로서 국사를 총괄하였에 한번 세를 내고, 그것도 10명이 합하여 세포(細布) 한 필을 납부하였다는 유인(遊人)은 바로 일반농민보다 가난한 고용농민으로 짐작된다.{) 김기흥 「한국사 개설」국사교재 연구회, 1998, p.59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추수기에 걷어들이는 진대법이 행하여진 것도 이러한 빈민을 위한 정책이었을 것이다.백 제고이왕 대에 들어와서 백제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소국의 수장들은 자신들의 족적 기반을 해체 당하면서 점차 중앙 귀족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중앙 귀족화 된 세력들은 왕도의 일정한 지역에 편제되었는데 이렇게 편제된 귀족들의 정치적 거주지가 바로 부(部)이다.5부 체제의 성립으로 중앙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지배조직도 확대되었다. 그러한 지배조직의 확대 과정에서 관등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관등은 중앙 귀족세력들을 서열화하여 그들 상호간의 상하존비를 구별지어 주는 제도적 장치였다.사비천도를 계기로 성왕 대에 이르러 중앙 및 지방 통치조직을 비롯하여 국가체제 전반을 새로이 정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비된 관등제가 16관등제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 삼국의 정치와 사회 II-백제」1996, p.167성왕 대에 완비된 이 16관등제는 백제 말기에 오면서 대좌평과 같은 특진의 관등도 생기는 등 변화를 보였고, 또 의자왕이 왕의 서지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한 것 등 점차 파행적으로 운영되어진 것으로 추측된다.{백제 16관등1. 좌평자 복2. 달솔3. 은솔4. 덕솔5. 한솔6. 나솔7. 장덕8. 시덕9. 고덕10. 계덕11. 대덕비 복12. 문독13. 무독14. 좌군15. 진무16. 극우청 복16관등제에서 가장 중심이 된 것은 좌평이었다. 좌평은 1품으로써 최고의 관등이었고 동시에 귀족회의체의 의장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좌평의 정원은 처음에는 1명이었으나 후에 상좌평이 설치되면서 분화되기 시작하여 상·중·하좌평 등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정원도 5명으로 되었다. 그러나 성왕이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후 왕권이 크게 약화되고파견하여 직접 지배할 정도로 중앙의 지배체제가 정비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자연히 간접지배를 행할 수밖에 없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 삼국의 정치와 사회 III-신라」1996, p.161신라가 이와 같은 마립간 적인 지배체제를 벗어나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로의 전반적인 전환을 시도한 것은 지증왕과 법흥왕 대에 이르러서였다.고구려나 백제보다 씨족적 흔적이 강한 신라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완성시킨 법흥왕에 이르러 골품제도 17관등제 및 행정적인 관부제도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신라의 관등조직은 골품제도와 관련을 맺고 편성되어 진골은 제1관등인 이벌찬까지 승진할 수 있었지만, 6두품은 제6위 아찬까지, 5두품은 10위 대나마 까지, 4두품은 제12위 대사까지 밖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제한되어 있었다.신라의 관등 및 골품 조직표{중앙 관등명공 복골 품관 직관등관 등 명진골6두품5두품4두품영경대사사지사1이 벌 찬자색2이 찬3잡 찬4파 진 찬5대 아 찬6아 찬비색7일 길 찬8사 찬9급 벌 찬10대 나 마청색11나 마12대 사황색13사 지14길 사15대 오16소 오17조 위신라의 중앙정치제도는 고대국가로 발전함에 따라 점차 정비·확대되었다. 제일 먼저 법흥왕 3년(516) 병부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신라 초기에 대보(이벌찬·이찬)가 정무와 군사를 나누어 관장한 데서 알 수 있는바 군사기능의 중요성에서 나온 것이다.{) 김기흥 「한국사 개설」국사교재 연구회, 1998, p.62법흥왕 18년(531) 국사를 총괄하는 상대등이 설치된 것은 행정적인 기능보다도 진골귀족 출신의 대신인 대등들의 대표자로서 귀족사회를 주재하고 귀족사회를 대변하는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정무를 담당한 중앙관부가 설치되어 감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고, 여기서 귀족세력의 대표자인 상대등과 전제화된 왕권과의 조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진흥왕에 와서는 정무의 중심기관으로 품주가 설치되었는데, 국무가 복잡해짐에 따라 점차 여러 관부가 분화·중치 되었다.신라 정치의 주도권을 난을 계기로 실권을 장악한 후, 진덕여왕 5년 정치개혁으로 새로운 왕실의 등장 계기를 잡으면서 최초의 진골출신으로 왕으로 즉위하였다.{) 신형식 「신라사」이화여대 출판부, 1997, p.117신라 중대 무열왕계 직계왕통이 계속 집권하면서 상대등 세력을 약화시키고 전제왕권 강화에 힘썼고, 이 후 신문왕 대에 이르러 통일신라 지배체제가 완성된다.관료기구와 관료조직의 기본은 육전체제와 오등관제였다. 육전은 업무를 기본적으로 인사·조세·군사·교육·형벌·공사(工事)로 나눈 것이고, 오등은 관제의 등급을 영-경-대사-사지-사로 구분한 것이다. 조직의 기본 골격은 당의 제도를 수용하면서 신라의 특성을 살렸고, 모든 권한이 왕으로 일원화되어 있다.육전체제라고 하여 6개의 기구만 둔 것은 아니었다. 이를 골격으로 하여 다른 관부를 두고 업무를 분담 시켰다.통일신라의 주요 중앙기구{관 부 명업 무 내 용관 부 명업 무 내 용집 사 부국가기밀과 왕명출납사 정 부관리단속과 규찰병 부중앙과 지방의 군사관계예 작 부건물·도로의 수리 보수조 부공물과 부역선 부배의 제작과 수리창 부국가재정과 조세 징수영 객 부외교와 외국사신 접대예 부국가의례와 교육위 화 부관등과 인사승 부수레와 말 사육좌·우 이방부형벌 관련 업무여기서 나타난 특징으로는 먼저 공부에 해당하는 열작부를 설치하는 등 기술계통의 사무를 체계화 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로써 통일신라는 문화의 기반 확대를 위한 발판을 다지게 된다. 다음으로 사정부와 이방부의 기관의 설치 된 점이다. 중앙관리를 감찰하는 사정부와 형벌사무를 담당하는 이방부의 설치는 과거의 전통적인 정치체제로부터의 성격전환을 의미하고 있다.{) 이희정 「새로운 한국사」삼광, 1995, p.233그리고 육전 아래에 하급 관서를 두지 않고 모든 관부가 동등한 지위에서 업무를 관장하였다. 관부에 부(部) 부(府)라는 명칭이 있는데 부(部)는 부(府)보다 설치시가가 앞서고, 정치적 비중이 높은 관부로 보인다.관부개혁의 기본방향은 관료들의 권력집중을 막고 각 관료를 왕과 직p.41
. 서 론국가란 영토, 인구 및 주권을 갖고, 물리적 규제력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갖고 있는 정부를 통해 그의 국민에 대한 권위를 행사하는, 사회의 포괄적 정치조직을 말한다.{) 김우태 「정치학」영설출판사, 1995, p.57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에도 씨족이나 부족사회 등이 있었고, 이것들이 발전하여 국가가 출현한 만큼, 이들과 다른 국가라는 조직이 어느 때부터 성립된 것인지를 밝히는 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다. 영토가 있고 주민이 있으며 주권의 요소가 있다고 해도, 그 정도에 따라서는 국가라고 볼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되곤 한다.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고대의 국가 기원과 형성을 주의 깊게 다루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년 전 일이며 또한 그 결과 역시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한국사에서 국가의 기원문제를 해명하려고 시도할 때 하나의 이론만이 적용되고 그에 따라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뿐만 아니라 오류를 범하게 될 여지가 많다.여기에서는 주로 국가형성 과정에서 논의되고 있는 여러 이론들을 살펴보고 종합적 이해 및 사회발전단계 연구 상에 있어서 유효성 여부 등에 대한 간단한 검토를 해 보고자 한다.. 본 론. 국가 기원론. 신권설신의설이라고도 하는 이 설은 국가기원에 관한 가장 오래된 학설로 초기의 헤브라이 사람들은 신이 그들의 국가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으며,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하느님(God)이 아담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원죄에 대한 벌로서 인간에게 부과된 것이 지상국가라고 믿었다.. 자연설플라톤은 국가에 관한 논의를 목적론적인 정의를 가지고 시작한다. 즉 국가의 기능은 각 개인들이 혼자서는 충족을 해결할 수 없는 온갖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다.{) 민찬기 「고대국가의 기원에 관한 연구」강원대, 1991, p.6그러나 플라톤은 인류사에서 최초로 국가기원에 관한 확실한 이론을 제시해 주었으나 국가기원의 분석을 매우 철저하게는 하지 않았다.한편 국가가 왜 발생하고 또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국가의 본질이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고장했다. 즉 그들의 대표자가 되는 권리를 부여하기로 합의하고 계약함으로써 국가가 성립된다.로크 역시 자연상태에서 시작하나, 계약시 국가생활에 필요한 자연권의 일부만 군주에게 위양하고 생명권, 자유권 및 재산권은 개인이 유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루소의 자연상태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영속적인 시기로 표현된다. 그러나 무한히 많은 시일이 경과하면 전쟁상태를 가져오게 되며, 인류가 이러한 상태를 지양하고 자연상태에서 지녔던 자유, 평등을 회복하며, 사회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인간끼리의 결함에 의한 사회계약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국가기원의 원리라 하였다.{) 김규익 「J.J. Rousseau의 사회계약론」인하대, p.76. 국가형성과정에 대한 제이론국가의 기원이나 형성과정 연구에 있어서 우선 중요한 것은 국가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 것이냐의 문제가 따르지만, 어떠한 상황과 과정 속에서 무슨 이유로 인해 국가가 출현하게 되는가에 논의가 집중되고 있다.국가형성과정에 대한 여러 이론들은 국가형성과정에 있어서의 주요 변수가 무엇이었는가의 시각에 따라서 내부 자체의 발전과정상의 결과였는가 아니면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었는가로 나뉘어지거나, 또는 국가의 발생이 사회적 갈등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협동 등의 통합에 의한 것인지 등의 다양한 학문적 흐름으로 분류된다.서비스(E.R. Service)는 국가기원에 관한 이론을 갈등이론과 통합이론으로 대별하고 또 개개의 이론들을 소항목으로 나누어 놓았다.{) 김정배 「한국 고대국가 기원과 형성」고려대, 1986, p.173여기서는 서비스의 분류법을 따라 각각의 범주 내에서 가장 주목되며 지금까지 논쟁점을 유발하고 있는 주요이론들을 중심으로 그 쟁점들을 살펴보겠다.. 갈등이론갈등이론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사회와 사회간의 서로의 갈등에 의한 대립, 투쟁, 정복,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설립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한 국가의 형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론들을 하나의 유형으로 분류한 것이다.- 오펜하이머(F. O다는 것이다.그러나 오펜하이머의 정복이론은 전원적 유목이 알려져 있지 않은 토착 아메리카에서의 국가 발생을 설명하는데는 어려움이 많다. 또한 전원적 유목이 고대의 초기국가들이 출현한 이후까지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입증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정복이론은 일부의 초기문명 지역에서는 그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할 지라도 모든 지역의 역사에 그대로 통용되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엥겔스(F. Engels)모건은 증가된 생산성이 점차 사유재산을 발생시키고, 경제적 계급을 형성시키며, 그리고 그것들이 곧 국가발생의 주요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엥겔스는 모건의 계급투쟁에 의한 국가기원론을 유물론적(唯物論的)으로 새롭게 정리한다.엥겔스의 견해에 의하면 국가는 씨족, 부족, 종족 등의 제단계를 거치면서 사회, 경제적 발전에 의해서 사유재산을 보호할 필요성이 생겨났을 때 발생하였다. 그리고 국가는 계급간의 대립을 억제할 필요로부터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이 계급들의 투쟁 그 자체 내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보통 가장 유력한 경제적 지배계급의 국가로 된다.엥겔스에 있어서 국가는 옛날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계급이 어떻게 발생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지배계급의 최종 우월성을 보증하기 위한 정치적 기구의 필요성으로 어떻게 국가권력이 발생했는지의 유물론적 국가기원론의 유형을 창출해 냈던 것이다.그러나 엥겔스의 이론에서는 국가로의 이행과정에 있어서 각 계급별 사회의 특징을 불명확하게 취급한 난점이 있다. 즉 씨족사회에서 직접 국가가 발생되었다고도 하며, 혹은 정복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국가가 발생되었다고도 한다.- 프리드(M. Fried)프리드는 이제까지의 국가기원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평등사회(Egalitarian Society)→서열사회(Ranked Society)→계층사회(Stratification Society)→국가(State) 등의 사회발전 모델을 제시하였다.{) 최몽룡 「한국 고대국가 형성론」서울대, 그 이후의 사회단계는 확연히 구분됨을 알 수 있지만, 서열사회와 계층사회, 그리고 계층사회와 국가의 차이점은 그것을 일정하게 구분되는 단계로서 설명하기에는 모호한 점이 많다. 그것은 용어 자체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서열과 계층의 구분의 문제에서도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웹스터 영한대사전」한영출판사, 1986. 통합이론통합이론에서의 국가의 형성은 전체적으로 볼 때 전쟁을 통한 정복과 강요된 종속에 의한 것이 아닌, 자연적 한계상황이나 인위적 한계상황에 처하여 하나의 강력한 통치집단에 종속되거나 구성원이 됨을 통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사회·정치적 기회와 안정을 얻기 위하여, 또한 그들에게 돌아올 거대한 이익을 얻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이전의 개별적 자치권을 포기하고 거대한 국가에 하나로 통합되는 것에서 비롯된다.{) 민찬기 「고대국가의 기원에 관한 연구」강원대, 1991, p.30∼31- 비트포겔(K. Wittfogel)비트포겔은 국가란 대규모 관개제도의 발전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조직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조직과 농업관개 형태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비트포겔의 수력관개이론은 관개가 별로 발달되지 못한 마야에서도 국가가 성립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나 멕시코 지역에서는 관개가 국가의 성립 이후에 본격화된다는 점에서 국가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의 일반화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최몽룡 「한국 고대국가 형성론」서울대, 1997, p.50∼51- 카네이로(R. Carneiro)카네이로의 한계이론은 농업생산지역이 생산이 불가능한 땅이나 사막, 산, 바다 등 자연적인 장애물로 둘러싸였을 때와 같은 환경적인 영역상의 한정이나 혹은 어떤 지역이 평화로운 확장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구가 조밀한 지역으로 둘러싸이는 것과 같은 사회적인 영역상의 한정이라는 구체적 조건과 인구압력이라는 구체적 조건이 전쟁을 통한 국가형성을 유도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가 반드시 그 지역 내에서 전쟁을 야기시키지 않고 전쟁과 국가형성간의 인과적 상관관계를 전단계와 비슷하며, 단지 그 수준면에서 농업과 공동재배 등의 더 큰 발전을 이루었을 뿐이다. 즉 부족사회는 단지 증대와 통합의 면에서만 군사회보다 발전한 것이다.군장사회는 일반적으로 인구밀도가 조밀하고, 생산력이 높다는 점과 부족사회와는 달리 사회, 경제, 종교적인 활동을 조정하는 기관의 출현으로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조직화되었다는 점 등에서 부족사회를 능가한다. 한편 이 사회에서는 전문화와 재분배가 사회적, 경제적으로 필요한 부분이 되어감에 따라 중앙집권화된 재분배자로서의 군장이라는 실체가 등장한다.그러나 군장사회는 관리와 통치의 문제를 중앙집권화 하였지만, 합법적인 권력에 의해 결정권을 인정받는 진정한 정부는 아니다. 따라서 군장사회의 성격을 정리하면, 군장사회는 가족적인 요소는 남아 있지만 불평등사회이며, 정부는 없으나 권위와 중앙집권화된 지배력을 갖고 있고, 개인의 사유재산이나 기업적 시장산업은 없으나 상품과 생산에 대한 불공평한 통제가 있다.서비스의 국가기원 발전단계에 있어서의 군장사회는 부족사회의 성격이 잔재하나 동시에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한편 이러한 군장사회들이 합법화된 힘을 지닌 관료사회의 출현에 의해 통합됨으로써 출현하는 것이 국가인데 군장사회에 있어서는 공적인 권력이 부재하여 평화와 내적 투쟁이 존속하는 반면, 국가에서는 사회통제 수단인 무력이 일정한 집단에 의해 독점되고, 또한 군장사회에서는 개인간에 등급이 지워지고 전체사회는 몇 개의 광범위한 계층으로 구분되나 이는 어디까지나 타부(Taboo)에 의한 사회적 신분의 차등에 그 기원을 두는 것이고 정치·경제적 계급분화에 있는 것은 아닌 반면 국가에서는 관료적 측면이 대두되면서 정치·경제적 계급이 분화된다.{) 민찬기 「고대국가의 기원에 관한 연구」강원대, 1991, p.40이상에서 볼 때 국가로 가는 과정에서 프리드는 계층화를 중요시하는 반면 서비스는 인물 지도력을 강조하고 있다.{) 김정배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고려대, 1986, p.184 용
-목 차-● 들어가며● 분쟁의 서막1. 팔레스타인은 어떤 지역인가2. 유대인, 아랍인, 팔레스타인3. 분쟁의 시작● 팔레스타인 분쟁1. 이스라엘의 건국2. 제1차 중동전쟁3. 제2차 중동전쟁4. 제3차 중동전쟁5. 제4차 중동전쟁● 레바논 내전1. 현대 레바논의 시작2. 1958년 레바논 폭동3. PLO와 레바논 내전의 시작4. 내전의 진행5. 끝나지 않은 내전● 평화를 위한 노력1.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 (캠프 데이비드 협정)2. 마드리드 중동 평화회담3. 오슬로 평화 원칙 선언4. 와이리버 협정5. 캠프데이비드 II6. 협상의 특징● 인티파다 (Intifada 팔레스타인 민중봉기)1. 제 1차 인티파다2. 제 2차 인티파다● 전망 및 해결1. 핵심쟁점2. 최근정세3. 분쟁의 해결 및 결론●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우리의 생각● 보충자료1.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2. 지도● 들어가며2000년 9월 발생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이하 이-팔) 유혈 충돌 사태, 그리고 올 2월 이스라엘 총선에서 강경파인 아리엘 샤론의 수상 당선 후 불안정의 평화 상태였던 중동 지역에 또다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또한 9월 11일 테러 참사와 관계하여 중동 지역 국가들은 그 근본 원인이 미국의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에 있다는 인식을 저변에 갖고 있다.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중동{) 중동이라는 용어는 본래 19세기 영국에서 극동과 유럽의 중간 지역을 지칭하기 위해서 생겨난 지 역적, 지리적 개념이다.(이때는 근동) 1902년 미국의 해양 전략가인 알프레드 T. 마한 (Alfred Thayer Mahan)이 중동이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설정된 중동지역은 아라비아반도 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이라크, 이란의 아시아 대륙부, 남으로는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이집트를 지 나 수단까지, 서로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북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 이북의 지역, 북으로는 요르단, 이스라엘, 레바논을 거쳐 시리아, 터기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관이나 연구소이라고 설득하고 다녔다. 그러한 그의 노력의 결과, 1917년에 영국의 외상이었던 밸포어 경이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 건설을 추진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선언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밸포어 선언이다. 이로써 시오니즘이 유태인들만의 구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적인 인식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후세인-맥마흔 서한은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왕복 10차례에 걸쳐 교환되었다. 당시 밸포어 선언이 이뤄졌으나, 사실 당시 영국이 더욱 비중을 두고 있던 것은 아랍권이었다. 영국은 독일의 세력 봉쇄를 위해 범아랍국과 손을 잡고 있었다. 터키가 물러나면 아랍권에게 중동의 지배권을 나누어 주겠다며 독일과 터키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만들라는 협약을 한 것이다.사이크스-피코 협정은 1916년 5월 영국과 프랑스가 아라비아 민족 지역의 분할을 결정한 비밀협정이다. 프랑스는 시리아·레바논을, 영국은 이라크·요르단을 세력범위로 하고, 러시아에게도 터키의 동부지방을 주며, 팔레스타인은 공동관리로 한다는 내용이었다.결국 영국의 전시외교 가 만들어 낸 이 세가지 협정들은 영국이 1차대전의 승리를 위해 유대계와 아랍을 이용한 것다. 결국 이 협정들은 당사자 간에 이해가 상충되므로 상호모순적일 수밖에 없었고, 힘의 논리 가 강하게 작용한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례가 되었으며 아랍을 오늘날과 같이 갈기갈기 찢어놓은 결과를 낳았다.3 유대인들의 밀입국 러시1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 영국이 중동지역 분할건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자 시오니스트 지도부들은 더 이상 영국을 믿지 않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만의 만의 힘으로 팔레스타인을 차지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밀입국이다. 기록상으로 1918년부터 1936년 사이에 무려 15만 명의 유대인들이 밀입국하게 되는데 그들은 키부츠란 작은 단위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길도 넓히고 상점도 세웠다. 이런 활동의 뒷바라지는 시오니스트 총회 모금으로 충당되었다. 한편 이주해간 유대인들은 원주민인 아랍인들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팔레스타인 문제는 전체 아랍문제이면서 지역문제라는 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민족 주의는 민족국가 건설 이라는 하나의 의식으로 이스라엘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집단적인 친화력, 동질성, 정의감으로 나타나는 공동체 인식의 민족적 정통성에서 찾을 수 있다. 원래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인종, 언어, 종교적 의미보다는 이스람교라는 종교에서 민족성과 역사성을 찾았다. 이는 아랍민족주의의 한 일부분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민족의식은 그 자체가 아랍민족의식이다. 그러나 아랍과 이스라엘의 투쟁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계속적으 로 소외됨으로써 더 이상 주변 아랍국가들에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각인되면 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문제는 자신들에게 달려있다는 관념에서 그들은 자국 건설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발전한 것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라고 볼 수 있다.를 각성시키고 이스라엘을 타도하여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제2차 중동전은 미국과 소련에 있어 대중동 진출의 경쟁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철수함에 따라 새로운 힘의 공백상태가 초래되었으며, 미국과 소련의 진출이 치열해진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아랍의 보수세력, 그리고 산유국과의 접근을 통해 중동 지역에 진출하고자 했으며, 소련은 주로 공화국인 아랍의 혁신세력에 손을 뻗치게 된다. 미국의 현대무기가 서독을 통해 이스라엘에 공급 되었으며 소련의 대규모 군사와 경제적 원조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등에 제공되었다.3. 제3차 중동전쟁 (1967, 6월전쟁, 6일전쟁)1 전쟁의 원인과 전개제3차 중동전의 원초적 동기는 시리아와 이스라엘간의 빈번한 충돌에서 찾을 수 있다. 시리아의 바아스당은 가장 강력한 반유대주의 및 반서구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1966년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은 시리아는 대이스라엘 강경책을 더욱 촉진시켰다. 당시 시리아-종결되었다.1943년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로부터 독립하여 레바논 공화국이 되었다. 마론파기독교 지도자 알-쿠리와 순니파 무슬림 지도자 알-술간의 불문협정(Unwritten Agreement)인 국민헌장은 현대레바논 정치의 초석이 된 종파간의 약속이다.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두 종파간의 합의는 마론파 기독교인의 경우 전통적인 프랑스에 대한 종속관계를 탈피할 것을 약속하고 무슬림들은 시리아 혹은 주변 아랍국가와 통합을 포기한다는 정신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국민헌장은 1932년 인구조사의 종파별 비율을 권력배분에 적용하였다. 국민헌장에서 두 종파는 마론파에 대통령직, 순니파에 수상직, 그리고 각 종파 비율에 따라 의회의석, 각료와 공무원 임용을 배분하는데 합의함으로써 종파적 권력의 균형을 통하여 사회안정과 조화를 유지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2. 1958년 레바논 폭동1957년 당시 레바논의 샤문 대통령은 미국의 반소정책에 협력하는 국가에 원조를 제공한다는 아이젠하워 독트린에 의한 경제, 군사적 원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 조치에 무슬림들은 반발하였고, 여기다가 수에즈 동란에서 이집트의 성공은 레바논 안에 반제국주의와 아랍통일의 기운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1957년 7월의 총선거에서 샤문정부의 대대적인 선거간섭이 행하여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은 결국 1958년 레바논 각 도시에서 대대적인 반정부운동이 일어나게 만들었으며, 민족주의자들이 샤문을 대통령으로 하는 친서방정권의 총사퇴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레바논은 내란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동년 6월 11일에는 국제연합감시단이 파견되었다. 그 동안 키프로스의 영국군의 증강. 미국 6함대의 지중해에의 출동, 프랑스 함대의 레바논 앞바다에의 진발 등 일촉즉발의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동년 7월 15일 바그다드조약의 요충인 이라크에서 친 아랍 민족주의 군사 쿠데타 성공과 이라크 왕정의 붕괴가 일어나자 샤문 대통령은 미국의 개입을 요청하였고, 미 해병대 1만 명이 레바논에 상륙함으로써 레바논의 반담 (1991)1991년 10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알궁에서 미국과 소련의 주도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간에 최초로 다자간 평화협상이 개최되었다. 동 회담은 사상최초로 이스라엘과 아랍제국들의 대표들이 대좌했다는 데에 그 큰 의의가 있었다. 동 회담 이후 미국과 소련 등지에서 수차례 개별회담이 개최됨으로써 중동지역의 분쟁해결에 밝은 전망이 기대된 바 있으나, 기대만큼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3. 오슬로(Oslo) 평화원칙 선언(워싱턴 평화협정)1 오슬로 협정의 배경이-팔 두 민족이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였던 화해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1980년대 말부터 전개되어 온 세계정세의 변화와 이로 인한 중동지역의 질서개편에 힘입은바 크다. 즉 구소련의 붕괴, 그리고 그로 인한 미-소 양극의 냉전 체제의 와해, 걸프전으로 인한 이라크의 군사적인 몰락과 중동지역 질서의 재편 등이 중동평화의 점화에 기여한 요소들이다.이스라엘과 PLO내부의 변화 역시 두 민족의 화해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구소련에서의 유대인의 대대적인 유입, 인티파다(대봉기)와 테러로 인한 잦은 유혈사태, 부도상태에 다다른 PLO의 재정적인 곤경, 그리고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로 인한 팔레스타인 민족의 위기감등이 두 민족을 화해의장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두 민족의 대표들은 1993년 여름 유럽의 도시를 전전하며 비밀협상을 갖게 된다. 이 협상의 열매로서 1993년 8월 29일 오슬로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안이 합의되었고 곧 이어 아라파트 의장은 라빈 총리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PLO가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하고 두 민족의 공존과 평화를 추구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서로 이름조차 꺼내기 싫어하던 라빈 전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은 악수하고 합의된 자치 원칙 선언서에 서명함으로 서 두 민족간 화해의 물꼬를 텄다.2 오슬로 I (1993, 협정안-팔레스타인 자치 이행에 관한 원칙선언)1993년 9월 이스라엘 내각은 이스라엘정부와 PLO의장 아라파트의 대리인들이 합의한 팔레스타인 자치 관련 협정 초안을 승인하였
13 -서 론이라크의 기습적인 쿠웨이트 침공으로 촉발된 페르시아만 전쟁은 전 세계인의 우려를 불식하고, 단 38일간의 항공전과 5일간의 지상전이라는 최단기간 내에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다국적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 최초의 전쟁으로서 유엔의 의결 하에 수행된 전쟁이며 다국적 국가가 전비를 지원한 전쟁이었다. 페르시아만 전쟁이 후 구소련이 붕괴되고, 단극체제가 성립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이 전쟁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하지만 지금까지 이 전쟁을 미국의 입장에서 평가해온 것이 서방을 비롯한 미국의 우방국가의 현실이다. 여기에서는 서방국가의 입장뿐만 아니라 아랍권 국가의 입장에서 이 전쟁을 재조명하고 전쟁 이후의 힘의 구조, 원인, 전쟁의 영향 등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본 론. 페르시아만 전쟁의 발발원인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합병하는 동시에 중동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모든 문제와 갈등, 그리고 대립의 모순구조가 일시에 분출됐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입의 배경에는 아랍민족의 강한 민족의식, 그리고 이에 근거한 이라크의 경제적 위기를 모면 방편으로, 또한 세력균형의 부재 상태 등이 그러한 배경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페르시아만 전쟁은 미국이나 이라크의 입장 또한 각 국의 입장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이 전쟁의 본질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세계 경제의 원동력인 석유를 둘러싼 이권 다툼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전부터 7대 석유 메이저를 통해 누려온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고 있고, 이라크는 석유를 전 아랍의 소유로 하여 제국주의의 침탈을 없애자고 주장하고 있다.쿠웨이트 정권과 이라크 집권 바아스 당의 성격미국의 전쟁 행위의 정당성을 찾는 쿠웨이트 정권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아는 것은 전쟁의 성격을 규정짓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쿠웨이트 정권은 매우 취약한 토대를 갖고 있었다. 쿠웨이트 인구 중에서 쿠웨이트인은 40%에 불과했고 나머지 40%는 요르단, 팔레스타인, 파키스탄 등 기타 아시아 노동개입의 길을 열었다. 전쟁은 결국 1988년 UN 안보리 결의에 의해 종전된다. 히마바야시 마사오 외 「전후세계사 : 1945∼1995」역사교양사, 1998, p.334으로 인해 쿠웨이트에 갚아야 할 부채의 액수만도 2백억 달러나 되었던 것이다. 또 전후 복구사업에 필요한 자금도 무려 1천억 달러에 이르고 있는 등 경제적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라크의 주 수입원인 석유가격이 사담 후세인이 보기에는 너무나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무렵, 석유가격이 배럴당 1달러 떨어질 경우 이라크의 국고수입은 연간 10억 달러나 감소하는 실정이었다. 당시 이라크는 사우디와 쿠웨이트, UAE 등에 유가 하락의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쿠웨이트를 점령함으로써 중동사태를 촉발, 유가상승을 노렸던 것이다.둘째, 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측면에서도 볼 수 있다. 쿠웨이트를 차지하여 석유를 증산하고,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정복한 다음 두 국가의 석유자원을 후세인 영향하에 두려는 의도이다. 이렇게 될 경우 세계 석유의 절반을 차지하는 셈이 되며, 이는 곧 세계경제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과 같다는 계산이 나온다. 즉, 쿠웨이트를 침공한 다음 친미국가인 사우디를 공략함으로서 아랍진영의 반미 감정을 부추긴다면 실현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셋째, 경제적인 이유로 국경부근의 루메일라 유전 문제이다. 이라크는 이 유전을 자국의 소유라고 했지만 쿠웨이트는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오히려 이라크가 불법 도굴했다며 24억 달러의 배상금을 내놓으라고 주장했다. 이라크는 이에 협상결렬 이틀만에 공격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가진다.넷째, 부비안 섬 문제이다. 이 섬은 해상진출의 출입구 역할을 하는 지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란과 전쟁을 치른 이라크는 바다로 가는 진입로인 페르시아만의 출입구를 확보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직결되었다. 즉, 인도적 차원뿐만 아니라 경제·안보전략적 가치에 따라 미국의 개입이 정해졌다.. 페르시아만전쟁의 전개과정이라크는 1990년 8월 2일 새벽 2시를 기해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였는데, 공화국수비대 3개 사단을 선봉으로 병력 10만 명, 구소련제 전차 300대 이상, 헬기 300대 등이 사막의 경계선을 넘어 쿠웨이트를 순식간에 점령하였다. 이러한 이라크의 침공은 세계적 냉전이 종식되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상황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국제사회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은 이라크의 무력침공을 국제사회의 평화와 페르시아만 지역의 안정에 대한 전면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유엔의 결의 아래 다국적군을 구성하여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축출하기 위한 공세를 전개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은 1991년 1월 17일 새벽 2시 38분 이른바 사막의 폭풍작전을 개시한 이래 2월 23일 지상전을 포함한 전면전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이라크가 2월 28일 유엔 안보리가 채택한 결의안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로 함으로써 걸프전은 작전 개시 100시간만에 종결되게 되었다. 이로써 이라크의 쿠웨이트 국경지역에 대한 영유권 요구는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http://kida.re.kr 한국국방연구원 세계분쟁 데이터베이스, 「46. 이라크-쿠웨이트 국경분쟁」(업데이트: 2002.7). 페르시아만 전쟁 이후90년대 페르시아만 전쟁 이후의 미국의 입장(對 이라크)미국의 입장에서는 다국적군을 결집, 전쟁을 주도적으로 수행했고, 군사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차후 중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제시한 전후 '중동 신질서안'의 골자는 아랍-이스라엘의 분쟁, 지역안보, 군축, 경제 등 4분야에서 미국이 중심적 역할을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아랍-이스라엘의 분쟁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다각도의 노력과 이를 위해 주변국간의 이해의 폭을 넓혀간다는 구상이다. 항구적인 평화보다는 대립구도 속에서 모종의 돌파구를 찾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지역및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다국적군, 아랍연합군의 귀추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10월 8일에는 이스라엘 점령 하 동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시위군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아랍 세계에 반 이스라엘, 반미감정이 고조된 결과, 미 부시정권이 이라크와 타협을 구해야 하는 문제가 가장 절박한 것이 되었었다.중동의 장기적인 안정화를 희망하는 미국에게 있어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가능하면 시리아와도 제휴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들 제국의 지도자는 미국의 압력에 의해 이라크가 약화되는 것을 원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을 전면적으로 신뢰하고 있지는 않은 데다가, 아랍 세계에 반미 분위기가 높아져서 자신들이 곤경에 처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짙어졌다.페르시아만 위기 후 각 국가의 독자적인 이해관계나 목표에 기초한 동향을 살펴보면,. 친미 구조에서 안정된 성향을 보이는 이집트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행동을 주저하고 있던 다수의 아랍제국을 통합하여 사우디아라비아 방위의 아랍 연합군의 파병을 승인하고, 국제적 반 이라크 전선의 결성조건을 구성한 것은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이었다. 이스라엘과 단독 평화를 맺었기 때문에 아랍연맹으로부터 추방되었던 이집트는 카사블랑카 아랍 수뇌회의에서 아랍세계로의 복귀를 달성했다. 그 후 이집트의 정책은 어떤 아랍국가와도 가능한 한 대립을 피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서서히 아랍세계에서 이집트의 지위를 향상시키자는 것이었다. 원래 이집트는 이란과 싸우는 이라크를 지원하고 시리아와는 계속 대립해 왔는데 페르시아만 전쟁을 겪던 당시 시리아와의 관계도 대폭 개선되었다.이스라엘과의 정상적 관계와 미국의 지원이 모두 필요했던 무바라크는 아랍제국의 어느 국가와도 충돌하게 되는 사태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경우에 이집트는 아랍제국과의 연대와 미국-이스라엘과의 협력 사이에서 곤경에 빠지고 다시 아랍세계에서 고립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이라크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한편으로는 같은 아랍그를 칭찬했으며 게리 국방차관으로 하여금 다마스커스를 방문케하여 관계 강화에 힘쓴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아사드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략을 집중 비난하고 외국 군대의 페르시아만 진출에 대한 비판을 일단 보류한다는 방침을 굳혔다.. 페르시아만 전쟁이 한국에 미친 영향정치적 시각페르시아만 전쟁은 미국이 아랍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 유지하려는 데 대한 이라크의 민족적 차원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의 개전의 명분이 불투명해 지게 하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에도 역시 파병을 요청했는데 집권층은 다음과 같이 파병의 당위성을 말했다.첫째, 6. 25 당시 UN등 자유우방의 도움을 받았기에 빚을 갚아야 한다.둘째, 국제사회의 고립을 피하고 새로운 세계질서에 참여하자.셋째, 주한미군의 철수와 미국의 경제적 보복을 피해야 한다.페르시아만 전쟁의 파병은 월남전에서의 것과 같이 미국에 의한 경제적 보상이 전제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남한 집권층이 페르시아만 전쟁과 관련하여 북의 남침 위협을 유포, 위기의식을 배가시킴으로써 안보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세계의 관심과 이목이 중동지역에 집중되었을 때, 북한이 제 2전선을 형성 도발한 가능성이 있다는 국방부의 발표가 그것이다. 페르시아만 전쟁의 당사자와 합동군사 훈련은 한반도 내 극도의 긴장강화를 예상하게 한다. 그리고 집권층은 파병문제까지도 북의 남침위협과 연관지으려 하였다. 미국과 다자간의 협력이 무위로 끝날 경우 이는 곧 동북아 및 한반도 지역에서의 미국의 지위에서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올 수 있고 이는 곧 북의 남침으로 이어진다는 논리이다. 즉, 한반도처럼 전쟁 상존 지역에서 국방 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해 볼 때 북한이 남침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그러면 북의 남침 위협의 유포는 무엇을 의도한 것인가.남한 집권층은 정권강화의 계기로 이를 이용,
5 -서 론로크(John Locke)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로서, 계몽 철학 및 경험론 철학의 원조라 일컬어진다. 법·정치 사상에서는 사회 계약설을 취하였는데, 그는 정치사상에 관해 사유하도록 자신에게 최초로 영향을 미치고 영감을 주었던 사람이 홉스(Thomas Hobbes)였다는 사실을 언제나 부인했다.) 폴 스트래던 저, 곽노완 옮김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창시자 로크」펀앤런북스, 1997, p.53로크는 국민 주권과 저항권을 인정하고, 대표제에 의한 민주주의, 3권 분립, 이성적인 법에 따른 통치와 개인의 자유, 인권과의 양립 등을 강조하였다. 그의 정치 사상은 명예 혁명을 대변하고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독립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서유럽 민주주의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본 론. 시대적 배경로크의 정치사상은 그가 경험한 영국의 정치사회와 역사적 상황을 통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크가 경험한 17세기 영국의 상황은 봉건사회에서 근대 시민사회로 전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청교도 혁명과 왕정 복고기를 거쳐 입헌군주제의 기초가 확립된 명예혁명으로 시민혁명기를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헌빈 「John Locke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원광대 교육대학원, 1991, p.5왕정 복고와 명예혁명기의 정치상황은 영국의 근대 시민 정치이론의 확립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영국의 근대 시민 정치이론의 형성에 있어서도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로크의 정치이론은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형성되었고, 이 결과로 확립된 근대 시민정치를 정당화 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다.. 로크의 정치사상로크의 정치사상은 앞에서와 같은 시대적 배경 하에 홉스의 군주권 옹호론의 비판을 통해 그의 이론을 전개시켰다. 로크는 자연상태와 사회계약의 이론은 이미 홉스가 전개한 이론의 방식을 따라가면서도 궁극적으로 동의에 의한 정부의 이론을 주장함으로써 홉스가 주장한 법을 초월한 군주를 부정했다.) 위의 책, p.1150대 후반의 로크는 1689년 최초로 자신의uman Understanding)'은 인간의 앎의 성격과 한계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인데, 이 책은 정치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브라이언 레드테드 저, 황주홍 옮김 「서양정치사상-플라톤에서 아렌트까지」문학과 지성사, 1993, p.165여기서는 '정부에 관한 두 논고'와 '관용론' 두 저작을 바탕으로, 이와 같이 하여 성립한 로크의 시민 정치이론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자연상태) 자연상태란 권위를 가진 공동의 재판관이 없는 경우로서 사회형성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정종호 「신세대를 위한 정치사회사상의 이해」청목출판사, 1999, p.234및 자연법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상호 독립적이다. 따라서 자연상태는 만인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상태로서 여기는 자연법의 구속을 받아 자연법을 준수하고 이성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평화스러운 상태이다. 바꿔 말하면 자연상태에 있어서는 만인은 자유를 평등하게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로크는 자연법, 즉 인간 이성의 사용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고 인간의 행동을 다스리는 어떤 자연의 법칙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꼭 같은 정도로 적용되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근본적인 평등을 보장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레온 P. 바라다트 저, 신복룡 외 옮김 「현대정치사상」평민사, 1985, p.52로크는 자연법은 시민사회에 있어서도 유효하다고 하여 시민법의 법으로서 효력을 갖는 것은 자연법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로크가 자연상태를 전정치적인 상태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정인흥 「정치사상가 평전」박영사, 1976, p.246홉스처럼 자연법을 실정법의 대치물로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이의 전제조건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헌빈 「John Locke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원광대 교육대학원, 1991, p.13자연법은 이성의 법칙으로서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이며, 동시에 인간과 인간사이에 존재하는 생활의 규율로서 신의 법칙이자 신의 의지인 것이다.로크에 있어서 자연법은 본질적으로 통치자를 그것에 의하여 규제되는 상대적 자연법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기준이 된 자율적·절대적 자연법이었다.소유권정부의 목적은 인간의 제자연권을 보존하는 것이며, 이들 권리는 자연상태하의 인간에게 속하는 것인데 그 가운데 로크가 최대의 관심을 둔 것은 소유권이었다. 또한 사회가 사유재산권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제한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회가 이러한 권리를 규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 까닭은 사회와 정부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그 어떤 권리보다 우선하는 재산의 사유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지 세이빈·토마스 솔슨 「정치사상사2」한길사, 1983, p.680로크는 소유권을 자연권으로 보았으며, 그 권리는 인가 자신의 노동에 의해 재산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의 자연권은 생명·자유·재산의 권리를 의미하였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소유권이었다.) 정인흥 「정치사상가 평전」박영사, 1976, p.257이러한 소유권은 정부에 대한 불가침의 권리와 요구인 것이다.로크에 의하면 신은 인간에게 그의 생존의 유지와 안락을 위하여 이 세계를 공유물로서 부여하였다. 이 공유물이 각자의 생존보존에 이용되기 위해서는 그 이용되는 공유물의 일부분이 각자의 소유물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적 소유권을 정당화시켜 주는 결정적 척도는 자연자원과 혼합된 인간의 노동이다. 즉 노동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로크의 소유권에는 한계가 있다. 그에 의하면, 사물이 손상되기 이전에 생활의 어떤 편익을 위하여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한, 누구나 자기의 노동에 의해서 소유권을 설정해도 무방하지만, 이 범위를 초과할 때 그에 대한 배분을 초과하는 셈이며 그것은 타인의 것으로 된다.) 노동을 통하여 나의 것으로 만든 바로 그것만이 진정한 나의 소유이다. 그 이상의 재물을 획득하는 것은 제한시킬 필요가 있다고 로크는 생각하였다. 우도 틸 저, 이남석 옮김, 「로크」한길사, 1998, p.147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소유물을 그것않았다. 자연상태에 있어서 화폐의 사용이 사실상 암묵의 동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근거라 하여 화폐형태에 의한 재산의 축적과 그 귀결로서의 불평등을 정당화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의 소유권론은 소유의 근거를 한편으로는 노동과 생존의 필요에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폐의 발명과 교환경제의 성립에 둠으로써 소유의 획득·증대·불평 등을 정당화하였다. 따라서 로크의 소유권이론은 재산의 획득·증대의 자유를 추구한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의 요청에 부응한 결과가 되었다.사회계약론사회는 시민의 자유와 정직한 근로의 산물을 보호하고 소유의 교환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과 그 준수의 강제기관으로서의 정부의 설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회계약론은 이러한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서 제시된 것이다.로크에 의하면 자연상태는 다음과 같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정헌빈 「John Locke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원광대 교육대학원, 1991, p.19첫째, 자연법은 이성있는 동물로서의 인간에 있어서는 자명한 것이기는 하나 이해관계 등으로 말미암아 자연법이 침해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둘째, 자연상태에서는 대립이 있는 경우 그것을 재판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셋째, 자연상태 하의 인간은 완전히 자유이며 평등하다는 데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자연법의 집행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강력하지 못하다.이와 같은 점에서 자연권이 확보되지 않고 혼란상태로 떨어지게 하는 위험과 불편을 없애기 위해 자연상태에서 사회계약으로 정치적 권력이 존재하는 정치사회를 성립시킨 것이다.로크에 있어 공동사회를 형성하는 계약 또는 동의는 다수결에 의해 가능해 지는 것이다. 공동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각개인의 동의에 의하는 것이었으나 하나의 단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그 단체는 보다 더 큰 편의, 즉 힘이 이끌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데서 다수결로 가능하다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자연법과 이성의 법에 의한다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 즉 로크에게는 다수가 폭군화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지 세이빈·토마스 솔슨 「정치사상사2」한길사, 1983, p.686로크의 사회계약은 공동사회에 속하지 않은 자에 의한 침해에 대해서 보다 더 확고한 안전성을 보장받음으로써 서로 안락하고 안정된 평화로운 생활을 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사회나 정치는 자연법이나 자연권을 침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사회계약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권리도 창조하는 것이 아니며 그 권리는 또한 어떠한 범위를 제외하고는, 즉 자연권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범위를 넘어서는 규제 받지도 않는 것이었다.한편 로크의 이론에 따르면 필연적으로 권리는 이를 양도할 때까지는 개인의 수중에만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개인권의 양도가 사회에 대해서나 정부에 대해서나 다같이 조건부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조지 세이빈 저, 성유보·차남희 역 「정치사상사」을유문화사, 1980, p.263통치기구론로크에 의하면 시민정부의 통치는 절대군주 체제는 불가하다. 절대군주 체제하에서는 시민사회·정치사회·국가사회 형성의 목적인 개인 재산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절대군주제는 입법권이나 행정권이 모두 절대군자 한 사람에게 장악되어 시민정부적 통치형태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이수윤 「정치사상사-정치사와 정치사상과 역사철학의 통일」법문사, 1999, p.624다시 말해서 정치권력은 최고권인 입법권과 집행권, 동맹권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입법가가 동시에 집행자가 될 때 그 입법가는 절대적인 지배자로 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입법권과 집행권을 분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다 마타오 저, 정달현 옮김 「로크의 삶과 철학」이문출판사, 1998, p.132입법권이 비록 하나의 공동사회에서의 최고권력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국민이 신탁한 것이며 공동사회의 보전을 위하여 신탁한 입법권을 신탁에 위배되지 않도록 행사하는 한에 있어서의 최고권력이다. 국민은 사회계약을 맺음에 있어서도 신탁에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