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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명 조식
    Ⅰ. 서 론 - 성리학의 전개와 남명 조식의 위상Ⅱ. 남명 조식의 학문적 성향1. 문학과 철학의 부정2. 경(敬)과 의(義)의 강조3. 남명 조식의 출처(出處)관 - 경(敬)의 측면4. 남명 조식의 상소문 - 의(義)의 측면Ⅲ. 남명 조식에 대한 평가와 제자들1. 율곡의 남명에 대한 평가2. 퇴계의 남명에 대한 평가3. 남명의 제자들Ⅳ. 결 론Ⅰ. 서 론 - 성리학의 전개와 남명 조식의 위상성리학은 사대부의 학문이고 사대부는 그 학문을 바탕으로 과거시험을 거쳐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계층이다. 전 시대와 달리 사대부 계층은 농업생산력 발전을 토대로 한 자신들의 경제적 바탕 위에서 성장했으며 성리학은 이들 사대부가 지배계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즉 성리학의 '이'(理)는 만물의 근원성과 이법(理法)을 전제로 하여 '성'(性)과 동일시되는 것이므로 사대부들이 무한한 자유정신과 인간사회에 대한 책임을 자부하게 했다. 그 결과 성리학을 익힌 사대부는 '성'과 '이'의 개념을 통해 현실의 여러 관계를 좀더 근원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고려말에 성리학이 전파되어 신흥사대부 계층의 학문이 되고 그들의 사회개혁론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사대부 계층의 사회개혁론은 조선왕조 개창의 정치이념이 되었고 이후 성리학은 국가를 통치하는 기본원리가 되었다. 성리학 사상과의 접촉사실은 이미 고려 중기부터 나타나지만 본격적인 도입은 고려말에 안향이 원의 성리학을 소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뒤 이색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파되고 이숭인·정몽주·길재·정도전·권근 등 대표적인 신흥사대부들에 의해 새로운 사상체계 또는 실천철학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그러나 16세기초까지 조선에는 성리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국 성리학자들의 연구를 학습하고 이해하는 범위에 머물렀다. 다만 이 시기는 왕조교체의 사회적 변동기였으므로, 성리학이 구시대의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이념적 토대를 제공하는 현실적이고도 실천적인 기능을 했다는진행되었고,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치열한 학문적 논쟁들이 전개되면서 그 수준이 심화되었다. 그 결과 퇴계 이황의 주리론을 종지로 하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의 주기론을 핵심으로 하는 기호학파의 두 학맥이 형성되어 이후 조선 성리학계를 풍미했다.그러나 이러한 성리학적 흐름에서 퇴계와 함께 영남지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남명 조식은 쉽게 잊혀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남명 조식이 유학자로서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후세에 쉽게 잊혀진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 중 쉽게 꼽을 수 있는 것이 정치적 이유이다. 북인으로 분류된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의 활약을 통해 성장하여 광해군 때 집권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반정의 주축이 되었던 서인들은 그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인홍을 참형에 처하고 그의 스승인 남명의 학문에 대해서도 철저히 외면하였다. 이로 인해 남명의 학문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장되어 있다가 최근에 이르러 발굴되기 시작했다. 남명의 학문이 잊혀져 있었던 것인 이러한 정치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학문적 특성에 연유한 측면도 없지 않다.Ⅱ. 남명 조식의 학문적 성향1. 문학과 철학의 부정남명은 글이나 저술을 거의 거의 남기지 않았다. 당시 문학은 과거를 위한 도구이자 문인들의 교유 수단이었다. 그러나 남명은 문학을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도학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자신도 시를 페하다시피 했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시 짓는 것을 금지시켰다. 문학과 도학이 양립하기 힘들다는 점은 남명뿐만 아니라 퇴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도학의 흥취는 시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그 표현을 다듬고 고치는 작업은 도학의 본질에서 벗어나 남을 의식한 형식적인 행위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완물상지(玩物喪志)는 문학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도 마찬가지라고 남명은 생각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도학은 심신의 훈련을 통해 도를 실천해 나가는 일 이다. 중의 하나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들 수 있다. 퇴계와 고봉의 이러한 논쟁은 이 후 성리학의 완결성을 더해가며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처럼 성리에 대한 담론들은 그 시대의 하나의 기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을 바라보는 남명은 이와 같은 논변 자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누구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자신의 이론을 내 세우지 않은 채 그러한 철학적 논쟁의 의미와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남명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다.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 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도리어 남에게서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 에게까지 미치니, 아마도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 황폐하여 배우 러 찾어오는 사람이 드물지만, 선생 같은 분은 몸소 상등의 경지에 도달하 여 우러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 까. 삼가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말 줄입니다.{) 국역 남명집 135쪽2. 경(敬)과 의(義)의 강조이러한 철학적 논쟁을 부정한 대신 남명은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였다. 남명의 사상은 모두 사회적 실천에 귀결된다고 볼 수도 있으며 이는 유학이 갖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남명이 당시 주자학 일변도의 당시 학풍에서 벗어나 원시 유학에서 출발해 넓고 개방적인 학문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의 핵심 명제인 수기치인(修己治人) 이라는 것도 자신의 수양을 전제로 한 현실세계의 구제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실천 지향의 사상은 자신의 수양에 관련되는 것과 현실 세계의 구제에 관련되는 것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으며 남명이 말하는 경(敬) 과 의(義) 가 바로 그 두 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칼을 차고 다녔던 그는 칼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그러한 학문의 바탕 위에 인간에 대한 개념을 구축하고 모든 것의 중심 주체가 되는 자아를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앞서 말한 경(經)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닦아 자아의식을 키우면 자연스럽게 옳은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지고, 모든 변화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된다. 이렇게 밖으로 행동이 되어 나아가는 것이 남명이 말한 의(義)이다.3. 남명 조식의 출처(出處)관 - 경(敬)의 측명이러한 경(敬)과 의(義)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위해서는 남명의 출처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출처(出處)라는 것은 세상에 나아가서는 벼슬을 하여 경세치민(經世治民)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물러나 재야에 머물면서 정신적 지조를 지키고 후학을 가르쳐 올바른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유교의 정치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출처(出處)의 문제는 단순한 진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역사를 평가하는 가장 주요한 잣대로 기능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교의 가장 오래된 논쟁거리 중의 하나였다. 이는 서로 다른 삶의 조건과 시대적 상황 속에서 유학자들이 그들의 도를 실현해 나가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남명의 출처관이 기본적으로 유교의 전통적 출처관을 크게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출처관에는 극도로 엄격한 명분과 도덕적 판단이 거기에 자리하고 있다. 의와 명분에 추호라도 합당하지 않는 경우는 암혈에 굶어 죽더라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꼿꼿한 도학자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선비의 출사는 부귀를 보장한다. 탐욕과 교만 그리고 위선과 결합된 출사는 유학자들의 본래의 존재 이류를 상실시켜 버리기까지 한다. 이러한 점에서 출처는 유학자로서의 도심(道心)과 인욕(人慾)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접점이라고 볼 수 있으며 남명이 욕망에 대한 극기(克己)를 강조한 것도 이런 점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에 대한 극기는 군자의 도이며 남명이 말한 경(敬)을 지켜나가는 방법이다.4. 남명 조식의 상소남명은 그의 출처관에 의해 끝내 출사시 사회를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었으며 국왕과 관리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켜 주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조식이 명종 10년에 올린 을묘사직소(일명 단성소) 라는 상소문이다.전하의 나라 다스리는 일이 잘못되어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해가고, 천의 (天意)가 벌써 떠났으며 인심(人心)도 이미 이반 되었습니다. 비유하건대 마치 백 년 된 큰 나무가 그 속은 벌레가 다 파먹고 기름과 진액도 다 말 랐는데, 회오리 바람과 폭우가 언제 닥쳐올지를 알지 못한 데에까지 이른 것이 아득히 오래되었습니다.{) 『남명집』권2, 권인호(1995), 『조선중기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재인용 159p.당시 훈구 귀족과 외척의 결탁과 문정왕후 윤씨의 정치권력에 의해 정치불안이 고조되고 평민들이 도적으로 되거나 굶어죽는 왕조말기적인 사회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의 정치행사가 민중에 근본을 두지 못하여 민심과 천의가 떠났다고 직접 왕에게 상소함으로써 왕권과 왕위 자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러한 남명의 상소는 죽음을 무릅쓴 직언(直言)이었다. 이 상소문에는 이러한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와 국방에 대한 상황과 이유, 그리고 대처방안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남명은 방납의 폐해와 군역의 문란과 같은 내정을 바로잡음으로써 국방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조선이 문(文)에 치우친 나머지 무(武)에 소흘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문무를 겸비할 것을 주장한다.선조가 즉위하여 구언(求言) 하였을 때 남명이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라는 상소문에서는 서리 망국론을 말하고 있다. 16세기 들어 중앙과 지방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서리들이 관료들과 결탁하여 민중을 수탈하여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명의 상소문은 서리가 도적이 되어 무리를 이루어 나라를 결단내고 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단호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리들을 규찰하고 심문하여 죄를 논하고 그 예방을 애햐 할 사헌부나 형조 등 조정의 대신들까지도 이들과 결탁하여 민중을 도탄에 빠지갔다.
    인문/어학| 2003.06.06| 6페이지| 1,000원| 조회(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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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교붕괴의 원인과 대책
    Ⅰ. 서 론 - 교육의 장으로서 학교Ⅱ. 학교 붕괴의 개념과 실상Ⅲ. 기존 학교 붕괴의 원인에 대한 검토1. 지식기반 사회로의 전환2. 학생과 교사간의 세대 격차Ⅳ. 학교 붕괴의 원인 - 학교 현장을 중심으로1. 실패한 교원정책2. 교육재정의 감소Ⅴ. 학교 붕괴의 대책1. 교원의 전문성 신장2. 교육재정의 GNP 대비 6% 확보Ⅵ. 결 론 - 학교가 바로서야 교육이 바로선다.Ⅰ. 서 론 - 교육의 장으로서의 학교근대 학교가 발생한 이래 학교는 사회 발전에 지속적으로 공헌하며 발전해 왔다. 인류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과정에서도 학교는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우리 나라의 경우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며 한강의 기적이라는 세계가 놀랄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어 냈다. 이러한 사회 발전의 배경에 한국의 교육열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으며 그 교육열의 중심에 자리잡은 학교의 기능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회는 끊임없이 변해왔으며 최근의 그 변화 속도는 예전에 비해 훨씬 빨라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 역시 변화해야만 학교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 낼 수 있다. 몇 해 전에 있었던 학교 붕괴 라는 현상에 대한 논의도 이러한 학교의 기능과 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학교 붕괴에 논하기 전에 학교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학교는 말 그대로 교육이 행해지는 장소이다. 이러한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가르치는 교사 가 있어야 하며, 배우는 학생 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내용 이 있어야 한다. 이들 삼자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교육이 이루어지며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 것도 이러한 상호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육에 차질이 생겼다면 그것은 결국 교사의 차질, 아니면 학생의 차질, 그것도 아니면 내용의 차질, 또는 그 중 둘 또는 셋 모두의 차질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그러나 학교를 이러한 상호작용만으로는 파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 유행어처럼 번져 학교제도에 대한 문제와 대안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그러나 기존 학교제도에 대한 위기적 진단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1970년대부터 많은 학자들이 『학교는 죽었다』,『탈학교사회』와 같은 저술을 통해 학교 제도에 대한 비판을 가해왔으며 입시지옥 이나 주입식 교육 이라는 말로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그러나 학교 붕괴 현상을 통해 논의되는 문제 상황은 이전과 다른 측면이 있다. 한 연구조사는 학교 붕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즉, 중·고등학교 교사 87%와 학생의 71%가 자신들의 학교에 학교 붕괴가 실재한다고 답했고, 교사의 90%와 학생의 72%가 학교 붕괴는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읍·면 지역보다 도시학교에서, 인문계 보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사립보다 공립학교에서 그리고 성적이 낮은 학생들 사이에서 잠자기, 만화책 보기, 잡담 등 학교 붕괴 문제 행동이 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르치는 보람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 는 교사가 서울지역 80%, 공립학교 70%, 50세 이상 교사의 85%에 이르고 있다.{) 윤철경(1999), 학교붕괴 실태 및 대책 연구, 서울 : 한국청소년개발원이러한 조사가 얼마나 정확하게 조사했는가를 떠나서 이 정도의 결과가 나왔다면 현재 학교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학교 붕괴 현상은 교육의 전제가 되는 교사-학생간의 교호작용(transaction)의 부재 혹은 학교에서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학생에 대한 교사의 생활지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 으로 정의 내려지고 있다.{) 전종호, 학교 붕괴 현상의 실상과 대책 , 한일교육포럼, 1999. 11이는 교육의 장으로서 학교의 기능을 전혀 담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학교 붕괴 를 이해할 수 있다.그렇다면 이전부터 있어왔던 학교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최근에 들어 학교 붕괴 현상과 같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분명 이전의 문제와 차 지식이 경제적 가치 및 부의 주요 생산 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20세기 후반부터 일부 선진국에서 지식정보화 사회로 이행한 것을 출발로 1990년대에 들어 우리 나라도 지식정보화 사회의 대열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필연적으로 교육의 성격이나 기능의 변화를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는 정보가 과잉 생산될 뿐만 아니라, 지식이 신속하고 끊임없이 창출되어 정보와 지식을 잘 다루는 것이 교육의 관건이 된다.그러나 이러한 지식정보화 사회의 도래와 학교 붕괴와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새로운 지식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은 학문의 첨단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대학이나 대학원의 경우라면 계속 생성되고 변화하는 지식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학교 교육의 변화가 필요할 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대학의 교육인 것이다. 그러나 초·중·고등학교의 경우 그러한 지식의 첨단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초적인 지식의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지식정보 사회의 도래로 이러한 전체적인 지식의 성격과 내용이 변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기초지식까지, 그것도 아이들이 그러한 지식을 거부하고 학교를 붕괴시킬 만큼 변했다고 볼 수 없다.우리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워야 할 지식 을 학교가 아닌 학원이나 과외를 통해 배운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지 않고 교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학생들도 모두 학원에 가서 학교에서 배워야 할 지식들 을 배우고 있다. 어떻게 보며 그러한 지식을 배우는데 더욱 열심인지도 모른다. 학교 붕괴는 지식정보화 사회의 도래로 인한 지식의 성격 변화로만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측면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다음으로 학교 붕괴의 원인으로 많이 드는 것이 교사와 학생간의 세대 차이다. 흔히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들이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교사 세대와 학생 세대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바로 학교 붕괴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없다.교들의 학생들과 교사와의 세대 차이가 크게 다르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원의 경우 강사들과 학생들 사이의 세대 차이가 학교 교사들과의 세대차이가 크게 다르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학원에서는 학교에서와 같은 붕괴 현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학교 붕괴와 세대 차이가 직접적 관련성이 없음을 보여준다.오히려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통해 이 두 상이한 세대-교사와 학생-가 교차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학교의 세 가지 요소 중의 하나인 교육 내용이 학생과 교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교사와 학생은 교과를 통해 서로의 세대를 초월하여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것이다.Ⅳ. 학교 붕괴의 원인 - 학교 현장을 중심으로우리는 그 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오던 학교 문제가 그 도를 넘어서 학교 붕괴 까지 이르게 된 시기가 1999년 후반기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정부는 교육 개혁 이라는 이름 하에 많은 교육 정책들은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정책들이 과연 교육 개혁 을 위해 합당한 것들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사회적 반응들은 대체로 회의적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들이 교육 현장과는 아무런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이루어졌다는데 있다.이러한 과정에서 학교 현장의 목소리들은 철저히 무시되었으며 교육의 주체인 교사들이 교육 개혁 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교사가 흔들리면 교육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교사-학생-내용, 이 삼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몇몇 교사의 촌지 문제를 마치 모든 교사의 악덕인양 촌지 교사를 처벌한다는 내용의 정책은 교사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교사의 체벌을 일률적으로 금지하였다가 나중에는 체벌을 부분적으로 허용하되 체벌에 사용되는 매의 규격까지 일일이 통제함으로써 교사는 더 이상 교육의 주체로서 역할을 담당하기보다는 객체로 전락해 버렸다. 이러한 정책들 중에서 교사들에게 가장행하게 되었으며 그 일환으로 교원 정년 단축 안을 발표하였다. 정부는 그 주된 이유로 원로 교원들의 조기 퇴직에 따른 인건비 절감이 가능하고 교원의 세대 교체로 침체된 교단을 활성화시킬 수 있으며, 교직의 만성적인 인사 적체를 해소할 수 있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고령 교사보다 젊은 교사를 선호한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웠다.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교육을 교육 자체의 논리가 아닌 경제적 논리로 이해하고 있다. 교원 정년단축은 교직이 더 이상 성직(聖職)이 아닌 다른 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직장인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고령의 교사는 무능하고 나태하며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을 사회적으로 팽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년 단축에 대한 일선 교사나 교직 단체 등이 강력하게 반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4일간의 입법 예고기간만으로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교사들의 의견을 무시해 버렸다. 교사들을 단지 자신의 밥그릇이나 지키려고 투쟁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국가를 위해 묵묵히 희생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사들은 심한 무기력함과 자괴감을 느끼고 좌절했다. 이렇게 좌절한 교사들에게 교육을 제대로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교육은 다른 분야와 달리 특수성이 매우 강한 분야이다. 교원의 정년 단축이 얼마간의 예산 절감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사의 사기를 저하시켜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에서 파급되는 결과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다음으로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공교육의 실패로 볼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학교 붕괴 는 교육의 붕괴가 아니라 공교육의 붕괴로 볼 수 있다. 열악한 학교 환경이나 과밀 학급은 학생들로 학교를 떠나서 학원이나 과외에 매달리게 하는 주요 요인이다. 심지어 학교를 해체하자는 해체론자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공교육 붕괴의 가장 큰 원인은 교육 재정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학급당 학생 수 감축과 교재 개발 교육 기자재의 구입 등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많은 예산이 투입되지 않는다면 학교 교육은 퇴보할 수밖에 없999
    교육학| 2003.06.06| 6페이지| 1,000원| 조회(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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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육사] 미군정기한국교육-오천석을 중심으로 평가A좋아요
    {목 차Ⅰ. 서 론1. 연구의 목적 및 의의2. 연구 문제 및 연구 방법Ⅱ. 해방 후 한국의 교육 상황1. 일제 식민지의 교육 잔재2. 미군정의 교육 방침Ⅲ. 천원 오천석의 교육 상황 인식 및 활동1. 오천석의 생애2. 오천석의 교육 현실에 대한 인식3. 오천석의 교육 활동4. 오천석의 한계Ⅳ. 결 론참고 문현Ⅰ. 서 론1. 연구의 목적 및 의의20세기 우리 역사는 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어 왔다. 서구 열강의 한반도 침탈에 이은 일제 식민 지배, 그리고 해방이후 찾아든 분단과 한국전쟁은 우리 역사를 심하게 왜곡시켜 왔다. 이러한 왜곡은 정치·경제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 졌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왜곡된 양상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 분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일제시대 당시의 학교 규율이 아직까지 우리 학교 현장 속에 남아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조회, 종례나 권위주의적 교사의 모습은 일제시대 칼을 차고 교실에 들어왔던 교사의 모습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일제 식민지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서 우리 사회를 왜곡시키는 현상은 일제 식민지의 부당함과 이 후 계속되는 냉전 대립의 국제 정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그러나 문제를 이처럼 단순화하기 이전에 그러한 식민지 잔재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역사에서 흔히 무시되어온 미군정기 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의 설립만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사이 역동의 시기에 국제 정세와 이에 대응하는 우리 태도에 주목해야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해방이후 일제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 민족이 기울였을 노력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여러 방면에서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리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3년간의 해방 공간 은 우리의 뜻과 의지대로 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변화그의 성장 배경과 그가 받은 교육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이상과 같은 연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전의 선행 연구 검토와 문헌연구 방법을 이용할 것이다. 오천석에 대한 연구뿐만이 아니라 그가 직접 저술한 자서전과 문집을 참고할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 발간된 신문의 기사도 함께 참고로 할 것이다.Ⅱ. 해방 후 한국의 교육 상황1. 일제 식민지의 교육잔재일제시대 조선의 교육은 식민지 지배의 수단으로 체계화된 측면이 강하였다. 식민지 교육의 이념으로 내선일체, 황국 신민화와 같은 정책 슬로건을 내세웠으며 이와 함께 동화주의 교육을 진행시켰다. 이는 한민족의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고 일본의 언어와 문화를 강제로 주입시켜 한민족의 주체성을 상실케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일제의 교육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조선의 교육이 일제의 의도대로 이루어 진 것은 아니지만 교육의 구조에 미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제도적인 측면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여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하여 학교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일본은 복선제를 택하였다. 이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한다는 그 자체의 목적도 있지만 이러한 차별로 인해 조선인이 일본인을 동경하게 하여 동화정책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는 의도도 숨겨져 있다. 또한 조선인들에게 중등교육 진출 기회를 차단함으로써 교육내용의 저급화를 유도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조선의 우민화 정책과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교원 양성의 경우에도 철저한 동화주의 교육의 실시로 교사들이 식민지화의 첨단에서 활동하도록 계획하고 지도하였다. 그리고 전체적인 양상에서 볼 때 일제 식민지 교육은 중앙집권적이고 획일적인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정치성과 이데올로기의 침투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은 해방이후 극복되어야할 일제의 잔재로 인식되었으며 민족 문화에 기반을 둔 교육, 그리고 민주적 교육이 그 대안으로 등장하게 되었다.2. 미군정의 교육방침당시 미군정의 대한정책은반하는 과목은 교수하거나 실습하지 아닐할 것제 6 조 교사모든 조선소학교 교사는 최근 학무과에 즉시 통보하고 1945년 9월 24일 월요일일에 교훈을 시작할 준비를 할 것. 기타 조선인 교사는 1945년 9월 24일과 29일 사이에 최근 학무과에 등록할 것.제 7 조 학교건물모든 학교건물로 미군육군이 점령한 것은 제외하고 현금 교육이외의 목적에 사용하는하는 것은 즉시 인도, 청소, 정돈하여 학교로 사용할 수 있게 할 것{) 군정청법령집, 서울:도서출판 민족문화, 1986이상과 같은 법령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민족과 종교에 따른 차별을 철폐시킨다는 점에서 일제식민시대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교수용어를 조선어로 규정한 것이다. 이는 해방 이후 당연한 일이나 조선어로 된 교재가 준비될 때까지 외국어로 된 교재를 사용한 점은 암묵적으로 일본어 교재의 사용을 허용함으로써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조선의 이익에 반하는 교과목을 가르치지 못할 것을 규정하고 있으나 이 역시 일본어 교재를 잠정적으로 허용함으로 인해 피상적인 규정에 그칠 우려를 안고 있었다.미군정은 일제식민지기 교육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방침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침이 실질적인 식민지 잔재의 발견과 축출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1945년 9월 22일 군정청에서 교육방침을 발표한 내용에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있다.교육상 유의할 사항6. 교육을 실천적으로 하여 공리공론에 떨어지지 말도록 하고, 생활의 실제에 적합한 지식 기능을 반복 연습케 하여 응용자재케 하고, 근로를 애호하고 흥업치산의 지조를 굳게 할 것.이 방침의 후반부의 진술을 살펴보면 그것이 일제식민지 시대의 학과지도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교육행정 공무원의 직위 역시 일제가 사용하던 식 그대로 3등급화 하여 사용하였으며 교과서 부족으로 일제시대 교과서의 사용을 허용하였다.미군정의 교육 정책의이 반드시 미국의 의도대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당시 교육에는 일반 민중의 의지도 반영되었을 것이며 미군정에 참여한 한국인의 의지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특히 오천석은 미군정의 교육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한 명이다. 여기에서는 오천석의 생애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고 그가 바라본 교육과 그에 대한 대응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Ⅲ. 천원 오천석의 교육 상황 인식 및 활동1. 오천석의 생애천원 오천석은 1901년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감리교 목사인 오기선의 아들로 태어났나 4, 5세 때부터 부친이 세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목사인 부친의 임지가 정해지면 부친을 따라 이동하며 공부를 해야 했다. 이러한 환경은 오히려 오천석이 보다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 1909년 부친의 임지가 일본 동경으로 정해지자 천원 오천석은 청산 학원 중학부에서 동경 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부친의 후광으로 인해 유학 생활도 어렵지 않게 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 시절 주요섭, 주요한, 김동인과 같이 친교를 맺게 되며 춘원 이광수와도 가깝게 지낸다. 오천석은 장차 미국 유학 길에 오를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이 때부터이다.오천석은 동경 유학생들로 조직된 학우회 대회에서「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러나 직접 관련이 없어 훈방되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던 중 부친이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열리는 감리교 전체 총회에 학국의 대표단으로 참가하게 된다. 이 때 코넬대학의 학장과 만나 아들의 유학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오천석은 다시 미국으로 유학 길을 오르게 된다. 코넬대학에서 오천석은 교육학을 전공으로 선택한다. 코넬대학에서 학부과정을 마친 다음 노드웨스턴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다. 이러한 과정 중에 그는 존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 을 읽고 감동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듀이가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는다.컬럼비아 대학에서 오천석은 듀이의 사상에 처럼 유학생활을 통해 오천석은 민주주의 이념과 민주교육에 대한 사상을 배워왔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후에 그가 군정청에서 한국 교육을 입안하고 교육 운동을 하는데 많은 영향을 준다.2. 오천석의 교육 현실에 대한 인식오천석이 파악하기에 당시 교육 현실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봉건적인 폐습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에 의해 생긴 식민지 문화이다. 봉건적 폐습에 젖은 것이 바로 전통교육으로 선현에게서 진리를 추구하려는 보수주의와 일치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보수주의는 주자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여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또한 사대적이고 회고적이며 권위적인 봉건적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고 보고 있다. 더욱이 과거제도로 인해 교육은 시험을 준비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보고 옛 교육을 청산 제일 대상으로 보고 있다.다음으로 이러한 전통 교육에 일제 식민지 교육은 더욱 많은 문제를 파행시켰다고 오천석은 파악하고 있다. 즉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친일본적인 사상에 빠지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오천석은 일제에 의해 왜곡된 한국 교육이 패망한 일본 보다 더욱 일제 잔재를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지금으로부터 5년 후, 혹은 10년 후 우리 나라와 일본을 비겨볼 때 이 땅에 오히려 구 일본적인 것이 한층 더 많이 남아 있음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오천석, 민주주의 교육의 건설, 민주교육을 지향하며 , 광명출판사, 1975천원 오천석에게 있어 일제잔재와 전통교육을 별로 구별하지 않는 것으로써 전통의 거부는 바로 일제 잔재의 청산이었고 새교육 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통교육과 일제잔재가 남긴 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을 하려는 것이 새교육이었다.보다 구체적인 과제로 오천석은 고등교육의 비체계성을 들고 있다. 해방 당시 조선에는 23개의 전문학교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하 고등교육이 일본의 식민지 체것이다.
    교육학| 2002.12.25| 8페이지| 1,000원| 조회(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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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주의] 통일을 항한 민족주의
    목 차Ⅰ. 기(起) - 민족주의란 무엇인가?Ⅱ. 승(承) - 한국 민족주의의 전개과정1. 구한말 민족주의의 시작2. 일제시대의 민족주의3. 해방 후 민족주의Ⅲ. 전(傳)- 분단시대의 민족주의Ⅳ. 결(結) - 통일을 향한 민족주의Ⅰ. 기(起) - 민족주의란 무엇인가?인류의 역사상 출현했던 많은 이념들 중에 민족주의만큼이나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외부적 형태나 영향을 논하기 전에 민족주의라는 자체의 개념에 대한 명확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들이 자신이 구상하는 나름의 민족주의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과연 이처럼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녀옴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가 명확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우리는 흔히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국민주권과 자유, 시민적 평등의 원리가 확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 개념이 형성되었다는 데는 모두들 동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까지 영향을 주어 민족주의의 발전에도 기여했음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는 발생과 동시에 변형되기 시작했다. 1870년대 제국주의가 등장과 함께 침략적 민족주의로 변형되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식민지 국가에서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정반대의 형태의 민족주의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민족주의에 대한 개념적 합의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지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민족주의가 사회적·경제적·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민족주의는 지구상의 각 민족이 겪은 역사적 경험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민족주의는 역사적 현상으로 시간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새로운 민족주의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전에 존재하던 민족주의를 계승하여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키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우리의 과거 역사 속에서도 민족주의는 중요한 의미를 지녀왔으며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변천해 왜곡과 시련을 겪어 왔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민족 통일이 단순한 구호나 염원으로 끝나지 않고 실천으로 나가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상황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에 맞는 형태로 민족주의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과거 우리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발생하고 변천해온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Ⅱ. 승(承) - 한국 민족주의의 전개과정한국에서 민족의식이 언제부터 싹트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삼국시대로부터라고 한다. 이는 삼국시대에 민족의식이 유달리 강했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통일이나 고려의 건국이 이러한 민족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데에 대하여도 커다란 이론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의식이 민족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부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봉건사회의 해체와 붕괴과정에서 시작되었으며 외세에 대한 반침략적 항쟁적 성격을 갖고 출발하였다.1. 구한말 민족주의의 시작구한말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민족주의의 맹아를 찾아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근대적 민족주의가 발생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세계 제국주의 열강과의 접촉과 압력으로 볼 수 있다. 구한말의 봉건사회는 봉건왕조를 정점으로 중층적으로 얽혀진 토지소유 아래 지주와 봉건 국가에 예속된 존재로서의 농민,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계층 간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순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이라는 외부적 충격에 첨예화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계층마다 다른 방식을 택한다. 이것이 구한말 한국사회가 갖는 민족주의의 다양한 형태인 것이다.1876년의 강화도 조약에 의해 조선은 자본주의와의 최초의 연관을 맺게된다. 그리고 이후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은 더욱 가속화되며 1882년 '조청상민 수륙무역 장정'으로 외국인의 내륙침투가 허용되면서 조선의 상인과 농민들은 몰락하기 시작하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위로부터의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지주적 민족주의 운동, 그리고 일부 중간층과 결합된 지배계급이 추진하고 형식에 있어서 진보고 봉건제의 재편성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민족적 대응은 외세의 침략 하에 민족적 위기의식을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 힘으로 맞서는 한편으로 서구 열강에 저항하기 위한 논리를 정립해 갔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 척화비의 건립 그리고 1, 2차에 거친 의병봉기 등이 바로 이러한 지주적 민족주의 형태의 대응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밑으로부터의 민중적 대응으로 구한말 농민봉기를 들 수 있다. 봉건적 계급구조의 모순에 대항하기 전국 각처에서 임술민란과 같은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봉기는 지역의 범위를 넘어 횡적으로 결합시켜주는 사상적 계기가 부재했다. 바로 이러한 사상적 계기 또는 조직적 매체로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이 동학이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척왜·척양이라는 반침략, 그리고 봉건제의 개혁을 위한 반봉건적인 요구를 제시하는 동학 농민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민부를 축척한 중간층 그리고 진보적 관료와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적 민족주의 흐름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독립협회나 만민 공동회를 통해 서구 열강의 조선침략에 반대하는 일, 무책임한 봉건 지배자의 책임을 추궁하는 일 등을 통해 최초의 대중적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그러나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아직 미숙한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민족주의는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세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에서 생겨났다. 따라서 부분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지만 전민족적인 차원에서 민족주의가 발현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지주적 민족주의의 경우 외세에 대응하기 위한 민족적 이데올로기나 민족 정책을 가지고 있었으면 밑으로부터의 민중적 민족주의는 민중봉기라는 정치투쟁의 최고의 형태까지 이르면서도 민족적 이데올로기나 민족 정책이 뚜렷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지주적 민족주의와 이에 결합된 농민의 저항은 우리 역사에서 좀 더 높은 차원의 민족주의 운동을 낳는 중요한 기반으로 역사 속에서 계승된다.2. 일제시대의 민족주의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침탈되어 때 각처의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켜 무력으로 항쟁하였다. 일본은 러·일 전쟁중인 1904년 6월 한국의 황무지를 개척한다 하여 일본인의 한 개인 명의로 그 개척권을 한국정부에 요구하였다. 이 사실이 국민에게 알려지자 맹렬한 반대여론이 일어났으며 특히 이권을 저지하기 위하여 보안회라는 단체가 조직되어 일종의 국민운동까지 일어났다. 그리하여 일본인의 황무지 개척권의 요구는 광범위한 반대여론으로 말미암아 일단 철회되기도 하였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고 일제를 배격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전개되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각처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는가 하면 일제의 탄압에 맞선 민족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승려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항일운동은 1919년 3·1운동으로 그 절정에 달한다.비록 3·1운동이 기대한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적 억압과 수탈에 대항하기 위해 전민족적 힘을 하나로 수렴한 최초의 운동이었다는데 그 의미를 진다. 그러나 이러한 3·1운동은 추상적인 민족적 요구를 표현한 것으로 광범위한 민족구성원의 구체적 요구와 민족국가의 내일에 대한 구상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3·1운동 이후 다시 민족주의는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되었으나 이는 신간회를 통해 다시 한번 통합되게 된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우파로서 식민지 동조세력으로 되는 구 지주 계급의 일부와 중소민족자본가,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여성운동가를 등을 민족주의 운동에 결속시킨다. 이를 통해 그들은 반제국주의·반일에 의한 민족 해방의 실현과 반봉건에 의한 낡은 제도의 청산으로 민중의 민주주의적 권리들을 확보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이러한 신간회는 해체되었으나 긔 민족주의적 운동은 노동, 농민 운동으로 계승되었다.3. 해방 후 민족주의일본의 제국주의의 한국 지배는 8·15 광복을 맞이하여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광복을 맞이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진정한 민족 해방과 민주주의를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광복과 동시에 남북이 분단되어 외세가 개입함으로써 구체화되지 못했다. 분단으로 인해 미·소 두 강대국이 우리의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미국은 일제 식민지기의 민족주의 운동의 주류였던 민중적 민족주의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다. 오히려 식민지 지배에 동조한 세력들을 다시 정치권에 끌어들여 식민지기 민족주의를 계승해오던 세력을 소외시켰다. 또한 민족주의 세력들 또한 이를 하나로 결집시킬 구심점을 갖지 못한 채 개별적으로 존재하여 그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해방 후 통일된 민족국가 형성을 위한 민족주의적 지향은 남북분단의 고착화로 인해 좌절되고 결국에는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게 된다. 이는 다시 한번 민족주의 운동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밑으로의 문중의 생활상의 요구는 안보나 반공이라는 이름 밑에 압살되고 민족국가의 정치철학에 좀더 독자적인 민중적인 것을 의도하는 움직임을 보이면 좌경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진정한 민족해방에 의한 내재적인 민족적 요구는 더 이상 표출되지 못하고 그간에 일어났던 반민중적으로 진행되었던 모든 것만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이로 인해 1950년대 민족주의는 일부 진보적인 민족적 지식인에게서 기반을 가질 뿐 광범위한 민중적 기반을 가질 수 없게된다.그러나 한 민족의 역사에서 민족적 요구와 자주적 민족국가에 대한 욕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외부의 탄압에 의해 잠시 표출이 억압되어 있었을 뿐 항상 내재해 있어서 언제고 다시 표출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1960년 4·19 민주혁명이 바로 내재되어 있던 민족주의가 다시 전면적으로 표출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 형성에 대한 요구를 자립경제·민족통일·민족자결의 확립과 외부적 간섭의 배제로서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4·19의 민주적 변혁은 5·16에 의해 부정된다. 그런나 5 · 16은 4 · 19에 의해 의해 이미 거대한 흐름으로 등장한 민중된다.
    인문/어학| 2002.11.29| 5페이지| 1,000원| 조회(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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