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단히 거대하고 엄청난 일들이 많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당대의 가장 유명한 두 여성을 꼽으라면 측천무후와 양귀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둘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중국 대륙을 자기 손으로 뒤흔들었던 인물들 중에 한 사람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낮은 신분에서 황후 아니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었던 인물 측천무후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다.때는 649년 중국 당나라 시대에 태종이 황제로 있을 무렵, 태종의 병이 날로 악화되어 가던 어느 날, 황태자 이치{) 훗날의 고종(高宗)으로 중국 당(唐)나라 제3대 황제(재위 649∼683).태종의 9번째 아들로, 4세 때 진왕(晉王)으로 봉해졌으며, 16세 때 장자 승건태자(承乾太子)가 반역 죄로 폐위되자, 외척(外戚) 장손(長孫) 무기(無忌)의 후원과 인효(仁孝)가 높다는 평판을 받아 형들 을 제치고 황태자가 되었다.http://www.naver.com -백과사전는 태종이 와병 중인 취미궁으로 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취미궁으로 든 태자는 태종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아리따운 궁녀의 모습에 눈길이 멎었다. 이 궁녀가 바로 후에 중국 최초의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이다.성신황제(聖神皇帝) 측천무후, 즉 무측천(武則天: 624-705)의 본명은 무조(武照)이다.624년(唐 高組 武德 7년) 1월 23일 무측천은 수도 장안(長安)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수(隋) 양제(煬帝) 때 목재상이었는데 수양제의 대형 토목공사 덕택으로 거부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후에 당왕조의 신흥 귀족이 되었다.620년 무측천의 아버지는 본처가 병으로 사망하자 수왕조 때의 권세가 양달(楊達)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후 그들은 세 명의 딸을 낳았는데 그 중 두 번째 딸이 바로 무측천이다.무측천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담이 컸다. 일찍이 무측천의 아버지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무측천은 13∼14세 때 이미 많은 서적을 박람하여 견식을 넓히고 시사(詩詞)의 기초를 닦았을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636년(당 태종 貞觀 10년)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황후 장손씨(長孫氏)가 병사한 후, 그 이듬해에 태종은 무측천의 용모가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황궁으로 불러 재인(才人){) 才人 :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http://www.naver.com - 백과사전으로 삼았다. 이때 무측천은 불과 14세의 어린 나이였다고 한다. 무측천이 황궁에 들어온 후 태종은 그녀에게 무미(武媚) 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성격이 다소 거친데다 여자로서 애교를 부릴 줄 몰랐기에 좀처럼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그러다 649년(정관 22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황실의 법도에 따라 무측천은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가 비구니(比丘尼){) 출가하여 불교의 구족계(具足戒)인 348계(戒)를 받고 수행하는 여자 승려. 걸사녀(乞士女)라고도 함.출가한 여자가 사미니(沙彌尼) 생활을 거쳐 2년 동안의 시험기간인 식차마나(式叉摩那)로 있다가 평생 출가 ·수행할 수 있을 것이 인정되면 348계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이 구족계를 받으면 비구니가 된다.http://www.nate.com/네이트 백과사전가 되었다. 그 이듬해 태종의 기일에 황제가 된 고종 이치는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다가 홀로 쓸쓸히 지내는 무측천의 모습을 보고 옛정에 사로잡혔다. 이에 고종은 예교의 속박을 벗어 던지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데리고 들어갔다.무측천이 다시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데는 고종의 황후 왕씨(王氏)와 후궁 소숙비(蕭淑妃)의 사랑 다툼이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고종의 마음은 황후 왕씨의 라이벌이었던 소숙비에게 쏠려 있었는데, 황후 왕씨는 그러한 고종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 놓기 위하여 고종에게 무측천의 입궁을 적극 부추겼던 것이다. 이는 실로 고양이를 잡기 위해 범을 데리고 온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황후 왕씨의 보살핌 속에서 다시 황궁으로 들어가 무측천은 정성을 다해 황후 왕씨를 모셨으며 고종은 그러한 무측천을 더욱 좋아했다.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동시에 받으면서 무측천의 품계도 정이품 소의(昭儀)까지 올라갔다. 이로써 그녀는 9명의 빈(嬪)들 중에서 으뜸이 되었으니, 그녀의 위에는 황후와 4명의 비(妃)밖에 없었다.무측천이 다시 황궁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그의 나이 28세의 일이었다. 보통 그 나이의 여자라면 열 몇 살의 젊고 아름다운 다른 후궁들에 비해 신선미가 다소 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측천은 고종의 마음을 자기에게 잡아두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고종에게는 모두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뒤의 6명(4남 2녀)이 모두 무측천의 소생인 것을 보면 당시 무측천에 대한 고종의 총애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다.성격적으로 자존심이 강하여 다른 사람의 밑에 있지 못하였던 무측천의 최종 목표는 황후였다. 무측천은 자신의 위치가 탄탄해진 후에 본격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갖은 방법으로 환관과 궁녀들을 구슬리면서 이용하였다. 특히 황후나 소숙비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그들에게 황후와 소숙비의 행동을 감시하게 하였다.무측천은 일차적으로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찍어냈으며, 고종이 소숙비를 폐서인 시킨 후에는 곧바로 황후 왕씨에게 마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어느 날 무측천은 둘째 아이로 아주 귀여운 딸을 낳았다. 자녀가 없었던 황후 왕씨는 자주 찾아와서 이 딸애를 데리고 놀았는데, 고종이 올 때 쯤이면 분위기를 파악하고 먼저 나가곤 했다. 무측천은 황후 왕씨를 제거하는데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무측천은 황후 왕씨가 딸애를 보러 왔다가 먼저 나간 뒤에 자기의 딸애를 목졸라 죽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불로 덮어두었다. 이때 고종이 들어오자 그녀는 웃으면서 고종을 맞이하였고, 잠시 후 고종이 이불을 젖혀보니 이미 딸애는 죽어있었다. 깜짝 놀란 고종은 조금 전에 누가 이 방에 왔다 갔는지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조금 전에 이 방에 왔다 간 사람은 황후 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고종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후 왕씨를 폐위하기로 결심하였다.654년 겨울(고종 永徽 5년 10월 13일)에 고종은 마침내 황후 왕씨를 폐서인 시킨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로부터 6일 후인 1월 19일 무측천은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황후의 자리에 책봉되었다. 이 때가 그녀의 나이 31세 때이다.황후의 자리에 올라 측천무후가 된 그녀는 자파의 세력을 구축하는 데 열을 올리는 한편 정치에도 손을 뻗쳐 마침내 고종과 함께 수렴정치를 하게 되었다. 측천무후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강대해져 고종도 그 기세에 눌릴 지경이 되었다. 당시 황태자는 유씨(劉氏)소생의 이충(李忠)이었는데 측천무후는 이충을 폐하고 자신이 낳은 이홍(李弘)을 황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그녀는 이후 자기 마음대로 황태자를 몇 번이나 교체했다.674년 측천무후는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황제·황후의 칭호를 천황(天皇)·천후(天后)로 고쳤다. 이후 정치는 완전히 측천무후의 손으로 넘어가 고종은 아무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고종이 죽고 중종(中宗){) 당(唐)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683∼684, 705∼710).이름은 현(顯). 고종(高宗)의 제7자로, 어머니가 측천무후(則天武后)이다. 처음에는 영왕(英王)으로 봉해졌으나, 무후가 장회태자(章懷太子) 현(賢)을 폐한 뒤에 그를 황태자로 삼았다. 고종의 뒤를 이 어 즉위하였으나, 제위에 오른지 2개월 만에 무후가 폐위시켜 방주(房州:湖南省 房縣)로 유배된다.이 즉위하였다. 그러자 측천무후는 황태후가 되었다. 황태후가 된 측천무후는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로 집중시켜갔다.한편 중종이 즉위함으로써 황후가 된 중종의 처 위씨(韋氏)는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시어머니 측천무후가 정권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서 그녀의 자리를 늘 선망하고 있었다. 선망하던 황후의 자리에 오른 위황후는 자신의 친정 아버지를 문하시중의 요직에 기용하려 했다.그러자 측천무후는 크게 노했다. 이제 갓 황후의 자리에 오른 며느리가 친정의 영달을 생각하고 있는데 진노한 측천무후는 중종 부부를 용서하지 않고 쫓아내 버리고 고종의 여덟째 아들이 즉위하여 예종(睿宗)이 되었다. 그러나 예종도 역시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황제 노릇을 했을 뿐 정치는 모두 측천무후의 손에 의해 좌우되었다.결국 690년에 측천무후는 67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직접 올랐다. 그녀는 나라의 이름을 주(周 : 690∼705)로 고치고, 낙양을 신도(神都)라 일컬으면서 주도 그 곳에서 정무를 관장하였다. 이것으로 사실상 당왕조는 일단 단절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을 신성황제(神聖皇帝)라 일컫고 예종에게 자신의 성인 무씨를 내리고 황사(皇嗣)로 정했다. 이것을 무주혁명(武周革命)이라 부른다.이로써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스스로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던 측천무후는 구귀족에 대한 냉혹한 숙청을 서슴없이 감행했고, 과거 출신으로 능력은 있지만 보잘 것 없는 가문 사람들을 대거 관리로 등용함으로써, 황제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공적인 기능을 확대하여 국력을 신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