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은 미국 중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가지고 있다. 36년간의 일본 식민지와 해방이후 분단이라는 우리의 역사적 흐름과 관련이 있다. 이는 대중음악에서도 마찬가지인데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로 대중음악이 시작된 이후 1930년대 일본의 엔카 스타일의 요나누키 단음계가 도입되었고 1935년 베니 굿맨의 공연을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스윙재즈의 영향으로 기존의 3박자체제에서 2박자 (또는 4박자 체제)가 확립된 트롯트가 폭발하게 된다. 이후 중일전쟁을 계기로 총독이 바뀌며 유행가 금지칙령에 의해 일본식군가가 주류를 이루었고 일본의 항복이후 이남에는 미국이 들어오며 GI문화가 등장하게 되었다.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놓이기까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이에 대한 대안이 무엇이었는지 서술하라.대중음악이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으로, 상품의 형태를 지니고 매스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는 음악이라 할 수 있겠다. 50년 정도 늦게 등장했지만 '세대'라는 개념도 대중음악에 있어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대중음악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한국 대중음악의 시작에는 크게 3가지의 의견이 있다. 1890년대의 '새야새야', 1921~1922년에 녹음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풍진 세월(희망가)', 그리고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이다. 새야새야는 동학이라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한국최초로 지역적 한계를 넘어 전국에서 불려졌지만 상품의 형태를 지니지 않은 민속음악에 가깝기 때문에, 이 풍진 세월은 상품의 형태는 있지만 시장이 형성되지 않아 진정한 대중음악의 시작으로 보기 어렵다. 가장 설득력을 갖는 것은 윤심덕의 사의 찬미이다. 임진왜란과 6.25가 피해간 땅 경상북도 풍기까지 소프트웨어인 음반과 하드웨어인 축음기 모두의 시장을 형성하며 전국적으로 큰 신드롬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대량생산 속에서 재현 불가능한 유일한 것-죽음- 에 열광하는 음악 외적인 사회적 신드롬에 의해 규정된 한국의 대중음악은 일본 제국주의 문화자본의 등장이었다. 윤심덕이 그의 정부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택했다는 동반자살이 자신들 나라의 경제를 위해 식민지 시장을 개척해야했던 일본에 의한 조작극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인 가운데 어쨌든 한국은 클래식의 테마를 편집한 사의 찬미를 통해 당시로선 너무나 생소했던 서양음악을 얼떨결에 받아들이게 되었다.1930년대는 일본의 엔카 스타일과 요나누키 단음계를 도입한 '황성옛터(황성의 적)', '타향살이'와 같은 노래들-트롯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요나누키 단음계란 라시도미파라와 같이 레와 솔이 빠진 음계로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 서구의 영향을 받아 체계가 잡힌 음계이다. 여기에 1935년 베니 굿맨의 공연 히트와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스윙재즈의 영향으로 기존 한국의 3박자 체제에서 2박자(또는 4박자)체제가 확립되었다. 트롯트는 선율과 박자 모두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2,3년에 걸쳐 절정기를 이루며 주류문화로 부상한다. 이 아이러니 드라마는 DJ의 18번이라는 목포의 눈물(300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명랑대첩 때 일본 수군 전멸시킬 때 군량미가 많은 것처럼 낱가리를 봉우리처럼 쌓은 것. 님은 잃어버린 조국, 망국을 상징한다고 하여 민족심을 자극하였다.) 등에서 잘 살펴볼 수 있는데 완벽한 엔카의 틀에도 불구하고 사랑노래이면서도 은유적으로 국가 사회상-식민 현실-을 반영하여 민족저항가라고 착각하게 만들었고 긴 생명력을 유지하게 되었다.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며 총독이 바뀌고 박정희가 세를 형성하여 전시체제로 개편됨에 따라 과거 지향적이고 감상적, 애상적인 트롯트가 유행가 금지칙령에 의해 핍박받고 일본식군가인 국민가요 개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장조이고 미래지향적인 국민가요는 이후 박정희의 군사정권인 60-70년대의 건전가요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우리의 해방은 불쑥 찾아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연합군에 항복함에 따른 것이었다. 우리는 민족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고 건국 준비위원회를 건설하여 친일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미군의 주둔으로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자신의 지배권을 세계로 뻗어나갈 걸을 계획하고 있던 미국은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전략적 요충지인 한반도에서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소련에게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하자고 제안한다. 우리민족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과 북을 갈라 분할 점령,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들어오는 날부터 자신들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을 확인시켰다. 환영하러 나갔던 민중들을 무참히 살해하면서 8월 15일 24시를 기해 38선 이남을 맥아더 점령 하에 두고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맥아더 포고령 제 1호(조선인민에게 고함), '한국을 점령한 점령군에 대한 적대 행위를 감행한 자에 대해서는 점령군의 군법회의에서 유죄로 판결할 것이며 군법회의 규정에 따라 사형 또는 그 밖의 형벌에 처할 것임'이라는 복종과 굴종만을 강요하는 포고문 등을 선포하고 미군정을 실시했다. 9월 8일 주한 점령군 사령관 하지가 이끄는 미군 제24군단 병력이 군사작전을 수행하듯 미 공군의 엄호와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 속에 입국하여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민중에게 '우리는 점령군의 자격으로 왔다. 즉각 해산하라'던 미군은 일본 총독부로부터 정식항복을 받고 중앙청 국기 게양대에서 침략자 일본의 상징인 일장기를 내리고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를 게양했다. 북에 주둔한 소련군과는 달리 민중들의 자주적인 정부를 세우려던 노력이 결집된 인민위원회를 해체시키며 진정한 자주 독립의 요구와 의지를 짓밟았다.
4장 문화적 곤경의 표현: 비극a015327 전자전기공학부 황라연서구와 중국의 비극론 비교(1)비극은 서구 문화의 문맥에서 세 층위의 의미를 포함1)극의 한 종류로서의 비극2)인간 삶의 비극성3)문화적 관념으로 비극성을 파악하는 비극의식고대 그리스부터 비극은 현실적 비극성과 문화적 비극의식을 가장 전형적으로 구현(2)중국에서는 현실적 비극성과 문화적 비극의식이 극으로 표현되지 않았다.=>중서의 비극론을 비교 할 때는 비극의식 의 차원에서 비교해야 한다.(3)화해: 문화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극치. 꿈과 희망으로 충만하게 한다.비극성: 가장 현실적인 극치. 보고 싶지 않은 일을 보여준다. 냉혹한 사실과 절망적인 고통모든 문화에는 화해와 현실적 비극성 존재하나 비극의식은 성숙한 문화에만 존재.비극 의식(1)도전과 응전1)도전: 인간의 생존이 근본적으로 위협을 받는다.응전: 생존의 근본적인 위협에 효과적으로 맞서 싸운다.2)토인비의 응전: 도전에 맞서는 것. 도전을 기회로 삼아 전진하는 것인류문명은 도전과 응전의 비극성 속에서 탄생3)비극의식의 형성: a.현실의 비극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도전이 비이성임과 응전이 초이성임을 정확히 감지하고 파악함으로써 형성b.이성이 전제. 이성적 파악에 실패했음에도 시대의 이성적사조로 종교적 파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할 때 탄생=>문예는 비극의식의 담지체가 되기에 가장 적합(논리적 연구대상도 신앙의 포용대상도 아니기 때문)(2)비극의식1)상반상생의 양극에 의해 구성1도전: 인류문화의 곤경을 폭로. 현존하는 것을 의심하고 캐묻는다. 진보를 추동하는 힘반철학(반이성, 반통일, 반논리)적. 반종교적(반신앙, 반통일, 반도덕)적2응전: 인류 문화의 곤경을 형식적, 정서적 차원에서 보완. 곤경을 감당할 수 있는 강인함. 문화적 생존력 보존. 철학과 종교에 대해 보완적2)얼핏 보아선 서구의 비극의식은 폭로에 치우치고 중국의 비극의식은 보완을 중시하는 듯.중서문화의 성격의 차이는 비극의식이 각문화속에서 일으키는 작용의 차이를 중심으로 중서 비극의식의 형태적 차이를 살펴야한다.(3)문화적 성격과 비극의식문화의 성격은 그 문화의 비극의식의 형태를 규정1서구: 강한 것은 절로 부러짐을 부른다. 끊임없는 소멸과 신생의 역사. 쌍방의 멸망-멸망에 대해 물으면서 끊임없이 발전. 진취성.2중국: 내륙형. 안정과 중화. 보존형 문화. 유연하며 내면적, 정감적-비가3형태, 특징, 내용, 정취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비극의식의 두 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각기 문화의 생장을 돕는다. 동형구조보존과 파멸(1)반항과 파멸셰익스피어, 실러 등에 나타난 삼단구조연인과 가족의 모순이 문화정신 가장 잘 반영1경계를 넘어서는 행위2철저한 반역3죽음으로 사랑을 지킴=>쌍방의 멸망; 더 높은 차원으로. 절대이념의 승리사랑의 추구는 파괴, 이상, 초월의 삼위일체(2)추구와 보존1)연인간의 거리가 문화정신 잘 반영2)구애양식: 겸가 양식1시경의 :그리움의 대상을 이상적인 존재로. 이상적인 존재를 만났지만 극복할 수 없는 장애a.구체적이면서도 아른거리는 목표b.지칠 줄 모르는 (초문화적인) 갈구c.극복할 수 없는 장애 =>중국적 비극 의식의 기본 양식사랑은 심층의 원초적 욕망과 최상의 삶의 이상을 하나로 융합, 최대의 활력과 격동, 파괴력과 이상주의정신, 초월성 간직2오행모델; 상생상극하는 동태의 평형구조 형성. 모든 추구가 성공될 수 없는 비극의식 조식의 ;장애는 신과 인간세계의 다름도연명의 ;예구애는 예를 뛰어넘어 갈구.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가진 파괴성, 초월성의 일면이상적인 님의 이미지가 구애자에게 향하는 반작용. 이상화하는 님(예)에 부합되고자 노력, 예로 돌아오면 자신이 갈구했던 것은 사실 추구해서는 안 되는 일=>모순이 전개되면서 하나의 순환 구조. 목표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포기할 수 도 없는 상황. 안타까운 비애.3목표의 퇴각; 일방이 물러남으로 인해 이강 추구의 초월성이 문화적 이상-예-로 전환3)피추구 양식:양식1모순 충돌;사랑과 예의 모순=>예의 굴복고명의 ;효와 충의 모순2심층구조: 주인공들은 모두 무력하고 모순적=>진퇴양난의 모순 속에서 개인의 욕망을 천지 법칙에 의거한 예 에 복속시킴으로써 분쟁을 없애고 안정국면으로 나아갔음. 복종 역시 비극적3애정 비극의 문화정신서구(헤겔)-문제는 쌍방의 단편성을 드러내어 새로운 사고를 얻는 것. 절대이념은 쌍방의 멸망 속에서 승리하며 문화적 간극은 새로운 차원으로 매워진다.중국-감정을 마음의 한구석에 묶어 둠으로써 예가 유지되게끔 한다. 이런 감정이 슬픔으로 변하여 눈물이 될 때 문화적 예의 완전성과 신성함을 손상시키지 않는다.예의 수호와 진리의 추구비극성은 문화적 곤경을 폭로하며, 곤경은 상이한 반응을 낳을 수 있다. 비극의식은 곤경을 폭로하면서도 곤경을 보완함으로써 그 문화가 생존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서구-비극의식의 폭로적 기능 이용. 고통과 실패 파멸을 감수하더라도 진리를 추구. 보완방식은 파멸 속에서 재사유하고 부정을 통해 다시 나아가는 것중국-곤경을 폭로하면서도 예를 파괴하지 않는 것. 예를 수호하고 예의 신성성 유지. 보완 방식은 파멸과 보존(1)파멸과 숭고군신관계의 곤경; 황제를 신격화하고 군권을 절대화. 재능 있고 덕을 갖춘 선비가 어리석고 무능한 왕을 만나면 문화적 곤경 진리추구와 예의 수호 사이에서 굴원의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예의 수호1구애자(굴원)와 이상(아름다운 정치), 장애물(왕)사이 변형-님이 그다지 이상적이지 않다.아름다운 정치의 추구는 곧 왕에 대한 추구. 추구의 대상이 아름다운 정치에서 왕으로 바뀌었으므로 님의 이미지 역시 바뀐 것. 다른 나라에 가서 재능을 펼쳐야겠다는 생각 부정=>굴원의 내적 모순-왕에 대한 충성과 원망의 모순-이 장애물의 변형으로 반영2심리적 치환 ;왕이 장애물임에도 왕에게 가는 길에 장애물이 있다고 상정, 왕에 대한 욕망을 소인배와 간신들에 대한 원망으로 치환=>와의 신성성과 충의 합리성 보호. 정당한 원망의 발산 대상을 갖게 해 거리낌 없이 간신들을 견책.=>충신 대 간신의 대립구조 마련3; 조정내부의 충신 대 간신의 투쟁. 여타비극과 같이 대단원의 승리로 장식되나 극 전체는 시체위에 시체가 쌓여가는 과정으로 충신 대 간신의 대립이 지닌 비장함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박완서)'을 읽고처음 이 소설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과연 이 소설의 제목이 뜻하는 것은 무엇 일까' 였다. 그전에 읽은 소설들-방황하는 내국인, 회색 눈사람, 아름다운 얼굴 등-은 어쨌든 그 내적인 의미는 처음에 잘 모를지라도 그 표면적인 사전적인 의미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제목부터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종 지니인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게으르기도 한 나는 사전을 찾기 보다 그냥 그런 물음을 가진 채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안에 소설에 대한 설명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런 나의 물음은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풀리지 않았다. 전화를 하는 대화체의 문장들... 흔히 -특히 중,고등학교 시절- 소설을 이야기할 땐 '시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소설은 1인칭 관찰자니 주인공이니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니. 그런 것들은 아주 중요하게 배우고 시험에 꼭 등장하곤 했었다. 주인공의 독백이나 제3자인 어떤 화자의 설명에 가끔 등장하는 대화...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그 대화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전부였다. 그것도 한 사람만의 말들. 반대편에서 전화받는 사람의 반응도 생각도 하는 말도 한 사람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해주었다.작품의 화자는 회갑을 넘긴 여자이다. 증조모님 제사를 잊은 화자를 탓하기 위해 손위 동서가 건 전화내용이 이 소설의 내용인 것이다.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대학생 아들을 잃고 친구와 가족과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그녀. 그녀가 손위 동서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들에 걸었던 자신의 삶,아들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실을 주절이 주절이 늘어 놓는다. 아들에게 헤어나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동창의 집으로 이끈다. 동창은 교통사고로 뇌와 척추를 다치고 하반신이 마비된 데다 치매까지 겪는 아들과 단 둘이 살고 있다.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한 지 오래됐다. 동창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아들에게 라고 부르고, 그녀가 사간 깡통 파인애플을 아들의 입에 넣어 주며 라고 말한다. 동창은 아들을 공기 굴리듯 굴린다. 욕창이 생길까 봐 하루에도 여러 번 하는 일이란다. . 악담도 지나치다. 그런데 웬걸. 환자를 도우려 그녀가 손을 내밀자 이상한 괴성을 지른다.갑자기 난폭해져 미친 듯이 군다. 그러자 동창은 라며 그녀가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악만 남은 동창의 얼굴에 씩씩하고도 부드러운 자애를 그녀는 비로소 알게 된다.처음의 내용은 이런 저런 일상의 대화였다. 잊어버린 제사 이야기, 자신의 건망증-집 전화번호를 잊은 이야기-... 그러던 중 작가는 화자의 아픔의 이유를 조금씩 풀어놓기 시작한다. 7년 전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죽음. 딸의 입을 빌어 나오는 그리고 소설이 진행될 동안 화자의 말을 통해 나오는 아들에 대한 슬픔은 다른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거리마저 두게 될 정도의 엄청난 것이었다. '온 세상을 다 주고 싶은', '전무후무한 하나뿐인, 아무하고도 비교할 수 없이 잘난' 그의 큰아들 창환. 80년대에 대학에 들어가 소위 운동권으로 여러 데모에 참가하다가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백만 학도의 횃불'이다. 그 아들의 죽음은 그 자신은 열사로, 화자인 그의 어머니는 장한 어머니로 만들어 버렸지만 화자에게 의미없는 것들이다. 동창과 그 아들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그리고 우리에게 던져 주는 메세지는 '최소한도의 삶의 조건에서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나은 것'이고, 그러하기에 '어떤 지상의 고통도 죽음을 통한 생이별보다는 견딜 만하다'는 것이다.화자는 우리에게 '죽음까지 횃불로 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깜깜한' '참 모진 세상'을 살아 냈다 싶으면서도 우리가 '그 모진 세상을 다 살아 내긴 한 것'인지 묻고 있다. 이와 함께 삶의 의미도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하나. 모성에 대해..화자는 이 세상을 모진 세상 또는 독한 세상이었다며 어찌 그리 모질고 독한지, 다 살아 낸 것인지 중간 부분과 마지막 즈음, 두 번에 걸쳐 질문하고 있다. 아들의 죽음이 어쩌다 일어난 사고가 아닌 분단이란 우리 현실, 그 현실을 잘 이용한 권력과 그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움직임 속에서 일어난, 세상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독하고 모진 세상 속에서 희생되어가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많이 변한 세상 속에서도 아직도 자기 가족도 맘대로 못 만나고 때론 다치고 숨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아직은 그 모진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고 또 있기에 언젠가는 그러한 모진 세상이 끝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삶의 질도 훨씬 나아지겠지.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어쩔 수 없는 흐름 속에서 희생당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혹시 자신의 잘못으로 다치거나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도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또 다른 삶의 질에 대해서.. 글 속의 동창과 그의 아들의 모습에서 보듯이 정말 안 좋은 상황이라도 최악의 삶의 조건 속에서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는 것. 삶의 질이 소중하다고 다들 이야기하지만 그 전엔 꼭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선행되어야하며 그 생명이 없을 시엔 삶의 수준, 질도 논할 수 없다는 것. 당연하지만 가끔은 잊고 있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제목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이리저리 정보의 바다를 헤매다가 발견한 글 제목이 있다. 대화체의 문장이라 술술 읽어 내려가긴 했는데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보고서는 어떻게 써야할지 감이 안 잡히던 중 정말 밝은 횃불처럼. '나의 가장 나중 지닌 것'. 이로써 제목에 대한 1차적 궁금증은 풀렸지만 다시 새로운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의 가장 나중에 지닌 것은 무엇일까..그리고 '나'는 누구를 뜻하는 말일까.여기에 그 글은 이런 설명을 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