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쉰들러 리스트 보다도 '피아니스트'를 먼저 보았다. '피아니스트'에서의 그 참혹함과 고통을 고스란히 또 다시 느낄 수 있었지만 조금은 다른 시선에서 보았던 영화가 '쉰들러 리스트' 였다. 오스카 쉰들러는 실제 존재했던 인물로, 굉장히 모순적인 면을 갖고 있다. 결코 선인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한 독일인 사업가, 그것도 전쟁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했던 나치 당원이 1,100여명의 유대인을 가스실의 생지옥으로부터 구출했다는 거짓말 같은 실화는 그 자체로만 보아도 대단히 극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영화를 봤을 때, 오스카 쉰들러의 그러한 희생적인 면보다는 다른 면에서 크게 느낌이 왔다. 영화는 유태인들이 당시 어떠한 취급을 받았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더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관객에게 전하려 하고 있었다. 말로는 형언 할 수 없는 살인, 아니 사람을 죽인다기보다는 지천에 깔린 하찮은 물건 하나 부수듯이 사람의 머리를 꿰뚫는 총알들.쉰들러 리스트 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범한 가장 추악한 범죄들 중 하나인 유대인 학살을 소름끼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내었으며, 다시는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은 가치 있는 영화라고 극찬한다. 반면 이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쉰들러 리스트 가 유대인 학살을 다루면서 그 참혹했던 현실을 상업적으로 악용하려는 시도였다는 혹평을 한다. 하지만 난 여기서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상업적이어도 좋고 흥행을 목적으로 오로지 돈만 쫑는 영화이어도 좋으니 우리의 과거, 일제시대 생체실험을 실시했던 일본군 731부대가 저질렀던 천인공노할 만행과 종군위안부문제는 왜 이러한 매체(영화)로 왜 다루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미법무부의 일본인전범에 대한 입국금지조치와 관련, 미플로리다주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인권옹호단체 피억류자권리센터는 현재 생존해 있는 관련 구일본군이 2백명이라고 밝혔다. 피억류자제권리센터 헤어국장은 『전후 벌어진 도쿄재판에서 구일본군전범으로 5천명이 재판을 받았으나 인체실험을 행한 731부대와 종군위안부관계자는 포함되지 않았다』며『독일의 전범처리와 비교해 볼 때 구일본군전범에 대한 수사는 관대했다』고 지적했다. 구소련은 731부대로부터 세균폭탄 제조기술 정보를 입수해 2차대전 이후 본격적인 생물무기 개발에 이용했다는 것과, 당시 구원군이라 믿었던 미국은 생체실험에 대한 소중하고 대단한 정보를 제공 받는 조건으로 731부대의 전범들을 법정에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련의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분노와 함께 치욕감마저 드는 이유는 우리의 정부는 어떠한 노력도 어떠한 관심도 외면한 채, 어쩌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당시 사건들을 증언해주실만한 분들이 돌아가시기만을- 바라며 묻어둘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이란 게 부끄러웠으며 죽어간 영혼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감상문2004년 4월 28일 5번째이름: 배원영 (심리상담치료학과 4학년)영화 제목과 줄거리: 잔다르크1412년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다르크는 신부님께 고해성사하기를 제일 좋아하며 가축을 몰고 들판으로 나가 한가롭게 놀기 좋아하는 마음씨 착한 소녀였다. 어느 날 자신을 대신하여 친언니가 영국군에게 참혹하게 능욕을 당한 채 죽어가는 광경을 본 뒤로 잔다르크는 영국군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신께 다짐하고 예수님의 선혈(포도주)을 마시는데...나만의 영화 감상방법론잔다르크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어린시절 난 막연하게 잔다르크 같은 여인이 되고 싶었다. 나라를 구하고 처절하게 죽을 수 밖에 없었던...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지 않았는지 난 그 대단했던 여인에서 해가 지날수록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며 조금은 씁쓸하게 이 영화를 접했다.뤽베송의 잔다르크는 잔다르크라는 인물의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이는 프랑스의 입장에서 바라본 백년전쟁이어서인지 영국군이 언니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이라던지 마을에서의 학살등 다소 영화적인 요소가 강하게 느껴졌다.하지만 브레이브하트에 버금가는 중세전쟁의 장엄함과 처절함을 의상, 소품과 함께 잘 나타내 주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중반부까지의 전쟁장면은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탄성이 나오는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한데 중반부가 지나 잔다르크에게 양심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양심의 목소리는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살인을 했다. 전시였지만 분명 그건 살인이었고 살인이 신의계시라니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 제목과 줄거리: 벤허로마제국시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새총독이 부임해오고 호민관으로 벤허의 옛 친구 멧살라도 함께 부임해 온다. 유다벤허는 유태인으로 예루살렘 명문가의 아들이다.그러나 절친했던 옛날과는 달리 그들의 우정은 로마와 이스라엘이라는 적대적인 상황에 의해 산산히 부서진다. 벤허의 도움을 받아 로마에 반기를 든 유태인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처단하고 싶었던 멧살라에게 벤허의 거절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것이다.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는 날 축하 행진 중에 벤허의 여동생인 티르자의 실수로 기왓장이 행렬로 떨어져 총독이 낙마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일로 인해 멧살라는 벤허와 그의 어머니, 여동생을 잡아 들이고 재산을 몰수한 후 벤허는 로마 제독 아리우스의 배를 젓는 노예로 만든다어느날 해전이 일어나고 벤허는 사슬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해 준 아리우스를 구하게 된다.아리우스는 자기 목숨을 구해준 벤허를 양아들로 삼고 자유를 주고 로마에서 함께 살기를 권하지만 벤허는 멧살라에 대한 복수심을 안고 가족을 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데...나만의 영화 감상방법론감상문을 쓰기 전에 앞서 난 종교가 없음을 밝힌다.나에게 벤허란 영화는 아주 오래된 대작으로 크리스마스 특집극에 지나지 않았다한데 수업을 통해 다시 벤허를 보며 그 명성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로마 지배하에 있던 유태인의 생활과 로마 군대의 강인함,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생애가 절묘하게 조화되어있었으며 1959년 작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웅장한 스케일하며 소품, 배경음악..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영화가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이 영화에 대해 극찬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약간은 삐딱한 시선으로 지극히 개인전인 소견으로 작품을 이야기하자면...피도 눈물도 없고 승부욕으로만 가득 찬 로마인(멧살라), 순종적이면서도 의리있고 착하기만 한 -가족을 잃은 벤허에게 복수심을 거두라고 함- 유태인(에스더와 그의 아버지)...
제 7장 사랑과 결혼Ⅰ. 남녀의 사랑남녀의 사랑은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다문화적 맥락 내에서 학습되고 해석되기 때문에 각 사회는 그 사회에서 규정하는 독특한 사랑의 스크립트를 가지고 있다.1. 문화적 스크립트로서의 낭만적 사랑멜로 드라마의 사랑이야기는 항상 일정한 패턴을 지니고 있다멜로 드라마의 중요성은 그것이 낭만적이 사랑에 대한 전형적인 스크립트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스크립트란 기억을 위한 일종의 체제화 전력으로서 일상적인 어떤 이이나 사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신적 표상들이다. 남녀관계에 대한 스크립트, 전통적 데이트 스크립트 혹은 성행동 스크립트 등 많은 스크립트들이 존재한다.사회는 낭만적인 사랑을 보호하고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남녀가 결혼관계 내에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연적인 성행동보다는 애정이나 사랑 혹은 헌신을 바탕으로 하는 성행동을 사회는 더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성행동에 대해 대중매체들이 보이는 호의적 반응은 많은 젊은이들이 애정을 바탕으로 하기만 한다면, 혼전성교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게 한다.2. 사랑의 시작과 종결여성과 남성 중 누가 먼저 사랑을 시작하고 사랑을 끝내는가?일반적으로 남성들은 성희롱하기를 즐기고 더 많이 성유희를 벌이지만, 진정한 사랑은 단지 한 번뿐이라고 생각한다.매력적인 여성들은 더 친절하고 따뜻하고 겸손하고 성적일 것이라는 후광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남성들은 매력적인 여성이 갖는 후광효과보다 매력적인 여성과 함께 있으면 그들의 지위가 높아진다는 것을 더 중요시한다.그러나 여성들은 남성과 데이트를 시작할 때 낭만적 애정대상이면서 동시에 유능한 공급자를 선택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남성이 갖는 신체적 지위를 높여 주지도 않는다.여성들은 스스로 돈을 벌지 못하고 생계를 유지할 힘이 부족하므로 파트너 선택시에 대단히 계산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러나 사랑이 진행됨에 따라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정서적으로 더 많이 그들의 사랑에 몰두하게 된다.사랑하는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식을 수 있고 더 많부분의 문화가 남성 중심의 성문화를 형성하고 있어 남녀의 성적 스크립트는 차이를 보인다.1) 여성의 성적 스크립트전통적인 여성의 성적 스크립트는 성행동보다는 성적 감정이나 사랑에 초점을 맞추므로 성욕은 평가절하된다.2) 남성의 성적 스크립트전통적인 남성의 스크립트는 성적 감정보다는 성행동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정욕이 과장된다.성적 관계맥락에서 활성화되는 여성과 남성의 성적 스크립트는 그 사회의 성역할 고정관념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 남성들은 여전히 성행동의 개시자이고 여성들은 조절자로 행동한다.2. 인간의 성욕남성과 여성은 모두 성욕을 지니고 있고 그들은 합법적 관계 내에서 성욕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자신이 성적 욕구를 지닌 존재라는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없다. 공식적인 성교육을 포함하는 성의 사회화 과정은 여성들이 성적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여성의 성적 스크립트를 내면화하게 된다. 여기서는 성욕에 대한 연구방법과 성욕에서의 성차를 논의하려고 한다.1) 성욕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5000명 이상의 남성과 거의 6000명에 가까운 여성들을 연구대상으로 1940년대에 수행된 킨제이 보고에 의하면, 미국 남성들 사이에서 자위행위와 이성간의 패팅은 거으 l보편적으로 이루어진다. 도한 미국 남성의 90%는 혼전성교에 가담하고 50%는 혼외 정사를 가지며 그리고 35% 정도는 동성애 경험을 갖는다고 하였다.하지만 연구대상들이 무선표본이 아니어서 얼마나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가가 의문시된다.1960년대에 이르러 의사인 마스터즈와 심리학자 존슨은 실험실에서 직접적 관찰방법을 사용하여 성적 각성의 생리를 연구하였다.그러나 마스터즈와 존슨도 백인 대학생과 환자 그리고 일반인 등 모두 지원자를 대상으로 연구하였기 때문에 표본의 대표성이 문제가 된다.대조적으로 한국에서의 성연구는 대단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한국여성학회가 1989년에 성을 주제로 하여 학술대회를 개최한 이후로 여성학자들은 성연구의 중요성은 물론 성에 마지막 단계인 해결단계 동안에도 나타난다. 해결단계 동안 신체는 각성 전 상태로 되돌아가고 근육긴장은 물론 혈액의 흐름도 정상상태로 회복된다. 남성들이 사정 후 일정시간 동안 다시 각성될 수 없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성들은 해결단계동안의 계속된 자극에 의해 중다의 오르가즘을 경험 할 수 가 있다.3. 신체적 매력과 성욕신체적 매력은 성적 관계에서 중요한 요인이다. 남성ㄷ르은 파트너의 신체적 특징을 강조하고 여성들은 개인적 특징을 강조하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체적 매력은 특히 남성의 성적 파트너나 배우가 선택시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한 연구에서 대학생들은 살찐 사람과 정상체중을 가진 사람에 대한 성적 측면을 평가하였다.결과 살찐 남성과 정상적 체중의 남성들 모두 동인한 성경험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살찐 여성들은 정상적 체중의 여성들보다 성적으로 덜 매력적이고 더 적은 호감을 갖는다고 보고하였다. 이 연구는 여성들의 성적 매력은 그들의신체적 매력에 기초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에 해당한다.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들 사이에서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의 열풍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Ⅲ. 성에 대한 이중기준사회는 남성과 여성의 성행동에 대해 상이한 기준을 적용한다. 성에 대한 이중기준에 따라 남성은 결혼 전에도 혼전성교가 가능하고 결혼 후에도 아내외의여성과 성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들은 결혼전까지는 순결해야하고 결혼후에는 오로지 남편과의 성교만을 가능 하다는 것이다. 결혼 외에서의 남성의 성행동은 능력있는 남성의 자연스러운 특성으로 인식되었으나 여성들은 도덕적으로 나쁜 행동으로 평가되고 사회의지탄을 받았다.성욕에 대한 성차를 연구하기 위하여 실시한 올리비어와 하이드는 일시적 성에 대한 태도에서 큰차이를 발견하였다. 여성들은 사랑 때문에, 남성들은 신체적즐거움 때문에 성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남녀간에 성에 대한 이러한 차이는 성역할 사회화에 그 원인이 있다.성에 대한 이중기준에 의해 여성들이 성적 만족하게는 하였으나 행동규범에서는 차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모바트 연구에 가담한 남자대학생들은 성적으로 능동적인 남성들을 매력있는 남성으로 인식한 반면, 성적으로 능동적인 여성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매력이 없고 정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남자 대학생들은 남성들은 혼외 성관계를 가질 수 있으나 여성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다고 응답하였다. 한국의 대학생을 포함하여 20대부터 40대까지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남성들은 혼전 순결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에 찬성한 사람은 64.9%였고 반대로 여성에 대해서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67.5%에 이르러, 한국 남성들은 성에 대한 분명한 이중기준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었다.많은 사람들은 여성도 남성과 같이 성을 즐기고 성욕은 여성들의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아직도 이중기준에 사라진 것은 아니다.성자유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이와같은 성에 대한 이중기준은 수정된 이중기준이라고 불리어진다. 수정된 이중기준에 의하면 성이란 좋은것이고 누구나 성적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2. 이중기준에 기인된 성적 역기능여성들은 그들의성적 욕구를 억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학습한다.더욱이 여성들은 성교육을 통하여 자신이 성적 존재라는 것을 학습한 일도 없을 뿐 아니라 '좋은' 여성이기 위해서는 성적 욕구를 지니지 않아야 한다는 스크립트화된 메시지에 의해 죄책감에 빠지기 쉽다.남성은성적으로 능동적이고 여성은 성적으로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성에 대한 스크립트적 사고는 남성의 성적 요구에 대해 여성이 적절하게 저항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다.이와같은 부정직한 의사소통은 여성을 오히려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한다. 일부의 남성들은 그들의성적 요구를 진정으로 거부하는 데이트 파트너에게 강제적으로 성을 강요하고 강간을 블러 일으킬 수 있다.성에대한 이중기준은 이와같이 데이트 관계에서는 물론 결혼단 부부들 사이에서도 역기능을 초래한다. 특히 정숙한 아내를 기대하는 야 한다는 것이다.1.결혼풍속도의 변화사람들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한 세대 전과 비교하여 결혼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결혼연령과 결혼조건 그리고 결혼패턴에서는 큰 변화가 있다.1)초혼의연령 증가결혼하는 여성들의 연령이 지난 20년 동안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과 같이 한국 여성들의 초혼 연령도 매년 증가추세를 보인다.초혼연령의 증가는 그들의경험기회를 확대시킬 수 있으므로 중요한 영향을 준다. 우선 여성들은 전 세대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으면서 다양한 견해와 경험을 접할 수 있으며 더 나은 직업을 선택하는 여성들은 자신을 부양하고 독립적 삶을 살 수 있는 경험을 쌓을 수 있다.이와 같이 여성의 초혼연령 증가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유사한 결혼패턴을 갖게 하고 독립적 개체로서의 개인적 정체감을 확립할 수 있도록 돕는다.2) 결혼의 조건결혼의 조건이란 곧 배우자 선택의 조건을 의미한다. 여성들의 교육 정도가 높아지고 결혼에 대한의깃이 변화함에 따라 그들의 배우자선택의 조건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1) 교환으로서의 결혼배우자 선택과정에 일관성 있게 적용되는 원리는 교환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손해-이익의 계산에 의해 평가한다. 즉 배우자 선택은 최상의 이익을 얻을 구 있고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교환은 공평성을 전제로 한다. 교환의 대상은 눈에 보이는 자원만이 아니라 추상적 특성도 함께 포함한다. 보통 여성들은 자신의 외모나 신체적 매력을 남성의 경제적 안정성 혹은 사회적 지위와 교환하려고 한다. 우리는 자주 결혼의 조건으로 사랑을 내세우나 배우자의 선택에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교환이 이루어진다.여성의 교육정도가 높아지고 평등주의적 성역할이 점차 확산됨에 따라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파트너로서 생활하고 동반자로서의남편을 원한다. 많은 취업한 서구의 여성들은 남성이 갖는 경제력이나 보호자로서의 역할보다는 남성의 애정이나 표현성을 그들이 갖는 자원과교환하기를 원한다.(2)결혼 경사도결혼경사도
무신론자의 관점에서의 종교*목차*p1 한국 불교와 전통 윤리p2~3 불교의 역사 & 질문p4 기독교란 & 기독교의 역사p5 기독교의 발전과 전개 / 1.고대기독교p6 2.중세기독교p7 3.분열 이후의 동방 기독교의 역사p8~12 4.분열이후의 서방 기독교의 역사p13 천주교란 & 천주교의 역사 / 1.고대, 2.중세, 3.근세p14 한국 천주교의 역사 / 1.배경, 2.과정, 3.박해의원인, 4.격동기p15~16 5.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 (1945∼1992) 6. 4대교리와 7성서p17 종교의 기원에 관한 견해한국 불교와 전통 윤리근본적으로 한국 불교에서 원래의 불교가 가졌던 요소들을 모두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불교가 한국에 도입된 이래로, 얼마나 한국화 되었든지 간에 상관없이, 불교는 한반도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그 불교 자체의 완성된 근본 원리와 이에 수반하는 윤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불교의 한국화는 불교의 근본원리와 윤리들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 문화적으로 형태만 변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어떤 컵이 있을 때 얼마나 채울 수 있는가는 그 컵에 얼마나 많은 공간이 남았는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화된 불교 교리나 윤리들은 한국의 전통윤리를 나타냄은 물론, 역설적으로 말해 불교가 얼마나 한국의 문화에 동화되었는가를 나타내주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불교의 역사불교의 기초가 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직접 제자들을 지도하셨던 45년의 시기다.이 시기를 불교 중에서는 가장 근본에 해당한다해서 근본불교라고 한다.다음으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약 백년동안의 불교를 원시불교라 한다.이 백년간의 세월 속에서는 비교적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의 불교 모습이 잘 지켜지고 있다.부처님이 계실 때와 별로 달라진 것 없이 그 원초성과 원시성이 보존되어 있던 불교이기 때문에 원시 불교라 한다원시 불교 다음에 약 삼백년간의 불교 역사는 많은 부파와 분파가 나타난 불교 역사였다.이리하여 불교의 갈래는 약 20여개의 는 데 큰 도움이 된다.기독교가 성립되던 당시 세계는 로마제국에 의해 정치적인 통일이 이루어졌던 시대였다. 이러한 로마의 정치적 예속이라는 상황은 초기 기독교의 형성과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로마제국이 정치적 통일의 이념으로 삼았던 것은 다름 아닌 헬레니즘 문화였다. 한편 예수시대에는 로마제국 안의 모든 대도시에 상당수의 유대인 공동사회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보통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 불리며 기독교사상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사도행전은 이 디아스포라 유대교가 기독교적 가르침의 최초의 전달자로서 초기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들 가운데는 헬라 문화와의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며 특히 알렉산드리아는 이 같은 헬라화의 중심지였다.초기 기독교가 조직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로마의 법률과 제도의 요소가 상당히 수용되기도 하였다. 결국 로마제국과 헬라 문명은 새로운 종교의 확산을 위한 통로를 제공하였지만 바로 그 점에서 부정적인 요인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은 특히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인을 받게 된 이후에 기독교 예배가 황실의 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결과 일반회중은 예배에 있어 보다 수동적인 역할로 밀려난 일이나, 이른바 '어용 신학(OFFICIAL THEOLOGY)의 출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초기 기독교는 유대사적 입장에서 볼 때 유대교의 한 종말론적 종파에 불과했다. 기독교가 보편의 메시지를 주장하였던 것은 '헬라 문화 내지 철학과의 만남을 통해서 구체화 되었던 것이다. 결국 역사적 기독교는 유대 문화와 헬라 문화라는 두 가지의 극히 다른 문화체계의 만남 속에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기독교의 발전과 전개1.고대기독교기독교는 나름의 세계성과 보편성을 확보해 가는 과정 속에서 로마 제국과 헬라 문화 및 여러 이교적 문화와의 갈등 혹은 만남의 과정을 겪었다. 로마 제국과 헬라 문화는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전파의 무대가 되었으며, 또한 이 통로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로마 제이러한 논쟁들은 중세적 분위기 속에서 태동된 것이기는 하지만, 고대 기독교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동방 기독교와 서방 기독교의 갈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여러 종교회의의 가르침은 동·서방 제국의 영내에 있던 교회들에 의해서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제국의 바깥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제국의 바깥에서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해나간 일군의 기독교로는 페르시아 기독교, 아르메니아 기독교, 이디오피아 기독교, 콥트 기독교 등이 있다. 이러한 기독교들이 다양한 성격을 띄게 됨으로써 동·서방 기독교의 반목은 날로 심화되었고 이는 전통을 내세우는 비잔틴제국과 신흥 프랑크 왕국 사이의 정치적 경쟁과 아울러 동방과 서방 사이의 뿌리깊은 불신이 분쟁을 더욱 부채질하는 요소가 되었다. 마침내 최종적인 분열은 11세기에 일어났다. 교황이 남부 이탈리아의 희랍인들에게 라틴 관습을 강요하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세룰라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라틴 교회들을 폐쇄하였다.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훔베르트 추기경이 콘스탄티노플로 왔지만, 훔베르트와 미카엘 세룰라리우스는 서로를 저주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결국 1054년 6월 16일 총대주교가 성찬식을 거행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훔베르트 추기경은 성 소피아 성당 제단에 '교황의 이름으로 '이단자' 미카엘 세룰라리우스 및 그를 추종하는 모든 자들을 파문한다.' 라고 파문칙서를 놓았다.그리하여 동방과 서방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상호 저주는 1965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와 동방 정교회의 정교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1054년의 파문 처벌을 폐지함에 이르러서야 기각되었다.3.분열 이후의 동방 기독교의 역사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동·서방 기독교의 분열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기원후 처음 몇세기 동안 발생한 동·서방 기독교의 갈등관계가 중세시대까지 계속되면서 점점 악화되어 폭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몇 세기에 걸친 동·서방 기독교의 합동 시도가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서 사건에서부터였다. '가톨릭'이라는 명칭은 본래 '모든 곳에 있는' 혹은 '보편적인'이란 뜻을 가진 희랍어 '가톨리코스'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원은 오직 단 하나의 기독교에만 존재하던 초대 기독교까지 소급한다. 이러한 초기의 단일성 안에는 다양성이 감춰져 있었으며 그 다양성은 결국 4세기 이후부터 계속된 교회의 분열 낳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교회가 '가톨리코스'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오늘날도 기독교의 3대 주류 가운데에서 가장 큰 덩어리를 형성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은 엄격한 중앙집권적 구조, 교리의 통일성, 전례의 균일성, 전통과 성례에 대한 의존, 교계제도와 성직자의 위계, 성직자와 평신도의 분명한 구분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명칭은 1529년에 개최된 신성로마제국의 쉬파이어 제2차 회의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가중된 황실로부터의 위협으로 인해 그 때까지 상당히 온건한 입장을 취하던 많은 영주들이 열렬한 가톨릭 진영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그 결과1521년 루터를 소환했던 보름스제국의회의 칙령이 재승인되었다. 이에 루터란 영주들이 공식적 항의문을 제출했으며, 이에 따라 '프로테스탄트', 즉 '저항하는 이들 혹은 항의하는 이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서방 기독교는 이렇듯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두 주류로 나뉘어 전개되었기 때문에 서방 기독교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개관할 때는 종교개혁 사건을 기점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종교개혁사건은 더 이상 서구 세계에 통일된 크리스텐돔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샤늘마뉴와 그 후계자들의 통치에 의해 이루어진 서방제국의 통일성은 카롤링거제국의 쇠퇴로 인해 다시금 무너지게 되었다. 노스맨으로 불렸던 스칸디나비아인과 마자르족의 침략으로 제국의 권위는 약화되었으며, 상대적으로 교황권은 강화되었다. 교황권이 일시적으로 강세를 보이면서 교황좌를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지는 등 교황제도가 타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상 있다. 칼빈은 주로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벌였으며 칼빈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예정설과 직업소명설에 있었다. 예정론은 루터란들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었지만 기독교가 진전하면서 칼빈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편 종교개혁운동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에서도 일어났다. 17세기 초까지 대영제국은 잉글랜드의 튜도르가와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가로 분리되었는데 종교개혁 역시 양국에서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영국의 종교정책은 정치적 환경의 추이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534년 로마와의 최종적 결렬을 선언하였다. 의회는 국왕은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하였다. 1554년의 가톨릭 복고를 거쳐 정권에 오른 엘리자베스는 프로테스탄틔 동조적이었으나 신학적으로 포용정책을 사용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존 녹스였다. 후에 녹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이러한 종교개혁이후 서방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사와 프로테스탄티즘사로 나뉘어 발전하게 된다. 먼저 로마 가톨릭사를 살펴 보면 유럽 전역을 휩쓴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으로 하여금 내적 반성을 경험하도록 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가톨릭의 개혁운동은 '반동종교개혁'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가톨릭의 개혁운동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공격에 대한 반작용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적극적인 가톨릭 재건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16세기의 가톨릭 개혁운동의 핵심은 '성경'에 있었으며, 크게 두 가지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가톨릭사 전체를 통해서 계속되어온 개혁운동의 하나인 수도회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다른 하나는 교회의 제도적 차원 혹은 교회의 제도적 차원 혹은 교황의 주도 아래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이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 가운데 16세기의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자 한 전형적인 형태는 예수회이다. 교회적 차원에서 개혁은 트렌트 공의회를 통해서 이루어 졌다. 루터 및 다른 여러 개혁가들이 기독교권 전체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