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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가철학] 맥베스의 도가적 해석 평가B괜찮아요
    언론정보 2001-10666 이혜온0. 멕베스의 이야기는 한때 왕과 부하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던 장군인 멕베스가 자신의 주군 던컨을 살해하고 후에 권력을 다시 빼앗기고 파멸하는 이야기다. 극은 마녀들의 대화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멕베스를 만나러 가기로 하고는 고운 것은 더럽고 더러운 것은 곱다 라는 말을 셋이 함께 외친다. 멕베스는 왕에게 반역했던 코더 영주의 공격을 막아내고 돌아오던 중 마녀들을 만난다. 이 마녀들은 멕베스가 왕이 된다 라는 이상한 예언을 하고 사라지는데 이들은 멕베스를 코더 영주님, 장차 왕이 되실 분 이라며 환영한다. 처음에는 마녀의 예언에 놀라고 반신반의하던 멕베스는 자신이 글래미스 영주와 코더 영주가 된 사실을 알고 더욱 흔들린다. 마녀의 예언 중 두가지가 이루어졌으니 나머지 하나, 즉 왕이 되는 것도 맞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충직한 신하였던 멕베스의 마음속에서는 점점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자리잡아 가고 아내의 적극적인 설득에 힘입어 급기야는 왕을 살해하고 자신이 왕이 될 음모를 현실로 옮긴다. 맥베스가 왕의 살해를 생각하게 된 것은 마녀의 예언을 들은 후, 자신이 코더 영주가 된 사실을 알고 부터이다. 왜 내가 그런 유혹에 빠지게 되는 걸까? 그 무서운 환상에 머리칼은 곤두서고 -여기서 그 무서운 환상이란 왕을 살해하고자 하는 그 마음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왕좌를 탐내보지만 그러나 그는 만일 운명이 나를 왕이 되게 한다면 나는 가만 있어도 운명이 내게 왕관을 갖다 줄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맥베스의 부인은 그런 그를 나무라며 부당한 것을 얻기 위해선 마찬가지로 부당한 수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신들의 성으로 왕이 찾아온 날 밤, 결국 두 사람은 왕을 계획적으로 살해한다. 그리하야 결국 맥베스는 왕의 자리를 얻게 된다. 맥베스는 권력을 얻었으나 항상 불안해 하고 고통받는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근심이다. 왕을 죽이던 날부터 그는 환영을 보고 악몽을 꾸느라 잠을 자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잠을 죽였다. 마녀들의다. 계속해서 망령들을 보고, 더 무서운 환영들에 시달린다. 제 정신이 아닌 그는 신뢰할 만한 이들을 모두 잃게 된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도 환영을 보고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점점 인망을 잃게 된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인심은 사나워진다. 한편 앞서 왕의 죽음을 보고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튀지 않을까 도망친 바 있던 맬컴은 맥더프의 도움을 받아 맥베스에의 역습을 계획한다. 맥컴은 영국 왕의 지원을 얻어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향한다. 맥베스는 이미 신하들과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고, 그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이다. 맥베스의 부하들은 하나 둘 그를 배반하고 맬컴 측에 가담한다. 맥베스는 마녀들이 불러내어 준 망령들로부터 예언을 청해 자신의 승리가 확고함을 확인하지만 그 예언은 맥베스의 승리가 아닌 그의 몰락을 교묘한 방법으로 암시한 것이었다. 결국 맥베스의 부인은 광기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맥베스도 맥더프와 마지막 결투를 벌이던 중 그의 칼에 죽게 된다.1. 세익스피어가 멕베스를 집필 한 동기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멕베스는 물론 허구적인 스토리이지만 극 중 상황은 당시 상황을 어느정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전후의 영국 왕실은 극중 스코틀랜드 왕실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세익스피어는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권력 암투 극을 보여줌으로써 영국 왕실의 어두운 면을 은유하고 이를 비판하려 한 집필의도가 있었다고 추측된다. 실제로 연극을 상연할 때, 왕의 조상들의 환영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객 석 맨 앞에서 관람하던 당시 왕의 얼굴이 멕베스에게 비추어지도록 연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의도 역시 당시 영국 왕실을 연극상의 스코틀랜드 왕실과 동일시하여 당시 영국 왕실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었으리라고 본다. 에는 혈육을 죽여가면서까지 왕좌를 차지하던 당시 영국 왕들 의 권력욕과, 권력을 쥔 자들의 어두운 면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이 연극을 보고 당시 영국 왕들이, 귀족들은 어떠한 생각을 하였을까. 맥베스의 파국을 보면서 자신들의에 처할 수 있다. 낮과 밤이 계속해서 바뀌는 것처럼, 권력 역시 얻으면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멕베스와 그의 부인은 이러한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존재는 덜어내면 늘어나고, 늘여놓으면 줄어드는 것 (도덕경 42장) 임을 그들은 경계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낮은 밝음과 영광을, 밤은 어둠과 몰락을 상징한다. 멕베스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영광의 이면을 보지 못하는,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따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강하게 드러내주는 장치이다. 아내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멕베스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는 맥베스 자신의 행동의 결과이다. 누가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구려. 이젠 잠이 들지 못하리라. 멕베스는 잠을 죽여버렸다 라고...멕베스는 스스로 자신의 잠을 죽여버린 것이다. 멕베스의 아내는 환영을 보고 안절부절 못하는 남편을 염려하며 당신은 주무셔야 합니다. 생명에 필요한 자양분인 잠이 모자라십니다 라고 말한다. 잠은 낮이 있게 하는 자양분이다. 그러나 멕베스는 밤의 어두움만을 경계하였을 뿐, 자신의 잠을, 자신의 밤을 죽이고 만다.낮의 찬란한 영광스러움을 위해 멕베스는 밤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였지만 밤이 찾아오지 않을리 없는 것 처럼 그가 종국에는 파멸을 맞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모든 것은 이면을 가지고 있듯이, 밤 역시 어둠과 몰락의 순간만은 아니며 낮이 있어야 밤이 있고 밤이 있어야 낮이 있다. 멕베스는 어쩌면 영원한 낮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영영 깨지못할 밤으로의 완전한 몰락이었다. 남편에게 잠을 자기를 청하는 그의 부인 역시 낮과 밤의 혼미함에 의해 결국은 죽음에 이른다. 그녀는 점점 더 커지는 권력의 불안함 속에서 몽유병자가 되어 나타난다. 그녀는 깨어나지 못하고 미치광이가 된 상태로 죽는다. 그녀 역시 밤과 낮의 자연스러운 주기를 스스로 깨뜨리고 말았다. 권력의 변화 가능성을 알고 이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며, 영광됨과 오욕됨을 똑같이 포용해야 진정한 의미의 집권이 화나 소설이 좋다-환상과 동화의 세계같지 않은가!-) 맥베스의 운명과 관련하여 마녀는 극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마녀가 들려준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에 의해 이 모든 불운은 시작되었고, 맥베스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점을 치러 갔을 때 마녀들이 보여준 환영은 맥베스가 뱅코에 이어 맥더프를 살해하기로 마음먹고 기어이 파국으로 치닫는데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마녀들의 계략에 빠져 맥베스가 파멸로 이르렀다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녀들은 1막에서 노래를 부른다. 운명을 조종하는 자매 셋이서 손에 손을 맞잡고 마음껏 돌자 얼핏 마녀들은 맥베스의 운명을 조종하고 장난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엄밀히 들여다보면 마녀들은 맥베스의 운명에 크게 개입하지 않고 있다. 맥베스가 파멸로 이른 사건의 첫 발단은 물론 마녀의 예언이었다. 마녀의 예언을 듣기전까지만 하더라도 맥베스는 흔들림없이 충직한 신하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마녀의 등장과 예언은 맥베스로 하여금 그 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내면의 권력욕을 부추김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맥베스의 이후 행동은 마녀들의 부추김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맥베스의 마음속에 있던 은밀한 마음을 끄집어내는 단초로 작용하였을 뿐이다. 모든 것은 스스로 행한 일이다. 두가지에 의해 그것은 확실해진다. 먼저 뱅코와의 태도의 비교이다. 사실 마녀의 예언으로 더욱 마음이 솔깃할 것은 뱅코여야 했다. 자신은 왕이 되지 못하나 자손은 왕이 되실 분이라니 일신의 영광보다야 대대손손의 영광스러움이 훨씬 보배롭지 않은가말이다. 그러나 뱅코는 마녀의 말에 흔들림이 없다. 그리고 이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맥베스가 코더 영주가 되었을 때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을 바로 떠올리며 그들의 예언이 들어맞았음을 신기하게 여기고 혼란스러움에 빠지게 되지만, 뱅코는 그렇지않다. 그들의 유혹은 참으로 중대한 순간에 우리를 배반할 것임을 알고 있기때문이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예언을 들었느냐 아니냐경계하라는 내용이었고 그 뒤의 두가지는 대담하고 단호하게 해석하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뱅코의 환영으로 머리칼에 피가 엉킨 뱅코가 자신을 보고 웃고 있으며 뱅코의 자손들이 자손 대대로 왕이 됨을 보여주는 환영이었다. 그러나 맥베스는 유독 이 마지막 환영은 강하게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더러운 마녀들 같으니! 왜 이런 것을 내게 보여주는가?...이젠 보기 싫다 맥베스는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암시하는 마지막 예언은 주목해서 보려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보고 싶은대로, 맥더프를 환영에서 발견하고 그를 대담하게 해치워야겠다는 애초의 결심만을 공고히할 뿐이었다. 마녀는 그의 운명의 결정적 개입자가 아니다. 따라서 마녀는 악한 존재도 아니고 선한 존재도 아니다. 다만 마녀는 맥베스를 지켜볼 분이다. 모든 그의 운명은 그 스스로의 탓이다.4. 아쉬운 현명함, 뱅코 맥베스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동료였던 뱅코는 오히려 현명한 태도를 보인다. 맥베스와 달리, 그는 자신의 자손이 왕위에 오르라는 마녀의 말을 듣고도 동요하지 않는다. 맥베스는 마녀들의 말을 듣고 그를 이루기 위한 억지스런 노력을 기울이지만 뱅코우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맥베스가 왕이 되었을 때 뱅코는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그렇다면, 네 경우 그것이 실현된 것을 보면 내가 받은 신탁 역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아닌가? 쉬, 입을 다물자. 그는 자신의 희망을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않고 아무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기다린다. 마녀들의 말대로 그는 맥베스보다 작지만 더욱 크신 분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뱅코는 맥베스에 의해서 죽게 된다. 권력에 눈이 먼 맥베스 옆에서 누군들 죽음에서 피해갈 수 있었겠느냐만은, 그래도 뱅코가 조금더 현명하게 행동했다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싶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뱅코에게 부족했던 점은 지나치게 현명했다 라는 점이다. 좀더 맥베스에게 우둔하게 보였던 들 맥베스의 칼날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빛을 부드럽게 하여 세상의 티끌과 함께 하라...그러한 까닭에.
    인문/어학| 2004.04.16| 5페이지| 1,000원| 조회(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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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여성학]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성폭력바라보기 평가A좋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마저도 아직 요원한)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성폭력바라보기 ,그리고 (미리 생각해보는) 그 한계어느덧 학내 사회에서는 신체적 접촉으로 인한 성폭력에서 여성비하적 언술행위가 있는 언어적 성폭력, 그리고 상황적 성폭력 에 이르기까지 성폭력의 범위가 확장되고있다. 그러나 사회적 분위기는 오히려 이전에 비해 퇴보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2004년 2월 서울행정법원은 여교사에게 술을 따르도록 강요한 교감의 행위에 대해 성희롱 결정처분을 취소하는 판결을 내린바 있다. 법원의 판결에 의하면 여교사에게 술을 따르도록 한 원고의 말에는 성적인 의미가 포함되어있지 않으며 성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하더라도 사회통념상 합리적인 사람 이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없이, 판결문이 근거로 들고 있는 사회통념은 남성위주사회의 관습적통념이고 합리적인 사람은 남성일 뿐이다. 성폭력 관련 법이 제정된지 10주년이 된 해, 성폭력의 개념을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보다 명확히 하고 확장해나아가야할 채비를 서둘러야 할 때 이런 판결이 나왔다는 것이 실로 화가 났다.성폭력관련법을 첫 레포트의 주제로 잡고 글을 쓰려고 하니 막막함이 밀려왔다. 관련법을 여성주의적 이론 을 바탕으로 분석해보려는 작업이 사치로 느껴질 만큼, 성폭력 관련법과 그 적용현실은 다양한 이론적 층위는 커녕 여성주의의 기초적 성과조차 반영되지 못한 열악한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앞날에 희망은 있다라고 믿음을 가지고(ㅜㅜ) 본 레포트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의 성폭력과 관련된 법률을 자유주의 페미니즘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러한 관점의 한계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서술하려한다.1. 보호 해야 할 여성: 정조개념은 과연 사라졌는가-현 성폭력특별법의 한계1)정조개념을 대체하는 성폭력 정의의 부재1995년, 여성단체 및 여성운동가들의 계속되는 지적을 수용하여 강간 및 추행에 관한 죄 로 그 제목이 개정되기까지 형법 제 32조의 제목은 정조에 관한 죄 였다. 강간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이는 여성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느끼게끔 종용함으로써 폭력의 본질을 은폐한다. 여성단체 및 여성운동가들의 계속되는 지적의 결과, 정조라는 말은 법조문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성폭력이 과연 무엇을 침해하는 범죄인지에 대한 의미 규정-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성폭력에 있어서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 반영되지 않은채 다만 세부항목의 조합으로 제목만 개정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94년 제정된 성폭력특별법 역시 기존의 정조관념을 대체할만한 성폭력에 대한 새로운 개념규정 없이 형법 21장(성풍속에 관한 죄),32장(강간과 추행의 죄)등이 성폭력범죄 라고 나열식으로 정의하는데 그치고 있다.2)강간죄의 객체의 한정된 범위현재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라고 강간의 객체를 부녀 로 한정하고 있다. 부녀 에 대한 성기삽입 만을 강간으로 규정하고 있는 현재의 성폭력관련법은 여성의 재생산적 신체에 관한 죄라는 정조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1996년 4월 성전환자에 대한 납치 윤간사건에 대해 강간이 아닌 강제추행죄가 적용된 판결이 있었다. 재판부는 성전환자는 부녀로 볼 수 없기에 강간죄를 적용할 수 없고 그 근거는 성전환자가 임신 출산 기능이 없는 점, 성염색체나 본래의 성기구조, 여성으로서의 생식능력이 없는 점 을 들고 있다. 또한 성기삽입만을 강간으로 규정함으로써 동성에 의한 강간이나 성기삽입이 아닌 다른 변태적 행위까지도 상대적으로 형량이 낮은 강제추행에 속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이다. 성폭력과 강간의 문제를 부녀자에 대한 성기삽입이라는 임신과 관련된 문제로 한정짓는 것은 아직도 성폭력이 자기 몸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정조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2. 성폭력, 자유주의적 관점의 적극적 해석-여성의 시민권을 보장하라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현재 우리나라의 성폭력관련법은 성폭력에 대한 범위가 매우 협소하고 여성의 정조를 보호대상으로 여기는 기존 관념에서 여성의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문제로 재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시민권과 관련지어 성폭력을 서술하고 있는 아래 문단 전체는 배은경, 성폭력을 통해 본 여 성의 시민권 의 논의를 크게 참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직접 문장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요지를 빌려온 것이어서 각주를 어디에 달아야할지 잘 몰라서;;; 이렇게 제목위에 참고문헌을 달겠습니다.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많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아직 이러한 관점조차 부족하기 때문이다.1)자유주의 페미니즘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법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계몽주의에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 자유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시민권-정치적,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보장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과 참정권,교육권,노동권을 요구하였다. 초창기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은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어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동등한 재산권과 참정권등을 법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과연,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결과로 인해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시민권을 획득하는데 진정 성공하였는가?2)남성중심적인 시민권-남성신체의 자유시민권중에서도 특히 몸에 대한 권리로 좁혀 생각해볼 때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근대적 시민권의 주요개념 중 하나가 바로 신체의 자유 이지만 이것은 감금되지 않을 권리, 강제노동당하지 않을 권리등의 소극적 규정일 뿐이며 이는 남성 을 기준으로 한 시민권이기 때문이다. 억압과 폭력을 일상적으로 당하는 여성의 신체의 자유와 몸의 권리는 이러한 남성중심적 시민권 개념에 의하여 소외된다. 이러한 문제는 자유주의적 시민권의 개념 자체의 내적 모순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에서 존재 근거로 삼고 있는 개인이란 서구백인남성에 다름아니며 이들의 특수한 경험이 보편의 탈을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내재적 한계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근대성을 특징짓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이성이라는 개념이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특성을 지니는시민권을 복원하라-시민권의 재규정반성폭력운동과 그것의 제도적실현의 일환인 성폭력관련법은 시민권의 개념의 확장과 여성들이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나가기 위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는 작게는 신체적으로 폭력을 당하지 않을 권리, 원치않는 타인과의 접촉으로 인한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권리와 같은 성적인 자기 결정권의 문제로부터 강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길러진 수동성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여성들이 밤늦게 돌아다니거나 혼자 여행을 떠나기가 어려운 사회적 여건들은 이러한 수동성의 결과들중 하나다), 노동권, 학습권, 생활권을 모두 포함한다. (예컨대, 학교에서 교수들에 의해 자행되는 성폭력은 여성의 교육권과 생활권에 대한 침해이며 직장에서 여성들에게 차시중과 같은 부수적인 업무를 요구하는 것은 노둥권에 대한 박탈이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해석하자면, 성폭력은 흔히들 생각하듯이 개인간의 사적영역에서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성폭력은 공적영역에서의 여성의 삶까지도 침해하기에 반성폭력에 대한 요구는 여성의 보편적 시민권에 대한 요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폭력을 공적영역에서의 온전한 시민권의 획득 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는 점에서 이러한 논의를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발전적 연장선상에 위치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는 강간으로부터 여성을 보호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진정한 시민으로서 그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관점에서 성폭력이 문제되어야한다.3. 자유주의적 관점의 한계1)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에 있어서의 자유주의적 한계{) 성적 자기 결정권의 딜레마를 넘어서 , 대안원리를 고민하는 서울대 페미니스트 모임 imagine 2004년 봄호많은 여성들이 성적 자율성을 지닌 주체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성적 자기 결정권 개념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자칫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결과를 위험이 있다. 성폭력이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임에도 그것이 간과되고 개하여 원치않는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있다라고 보며 이러한 관점은 여성들에게 강요된 동의를 읽어내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권력관계가 분명한 여-남의 경우 권력자의 요구를 쉽게 거절할 수 없는 문제라든가, 연애관계에서 스킨십을 원하는 남자친구에게 NO라고 말하는 것이 다만 여자답게 한번 튕겨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그러한 예 들이라 하겠다. 이렇듯 자율적 동의와 강요된 동의를 구분하기 힘든 상황에서 자유주의 해석틀 안에서의 개인의 자율성 이라는 것은 여성들로서는 애초에 도달할 수 없는 목표였던 셈이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자율적인 개인이 아닌/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자유주의적 개인과 개인의 자발성에 대한 강조는 여성에 대한 현실적 억압과 맥락은 보지 못한 채,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의지문제로 환원시킬 염려가 있다.2)법에 의한 해결이라는 자유주의적 한계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법과 제도에 의한 해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성폭력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그조차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매우 중요한 당면과제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다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모든 국민이 이미 평등하다고 가정된 자유주의 법 체계속에서 성폭력은 국민이외에 보호와 시혜를 필요로 하는 여성 이라는 범주를 새로이 창조할 때에만 법과 정책 속에 들어 갈 수 이었다. 법은 이미 남성들만을 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큰 문제는 법에 의한 성폭력 범위의 협소화문제이다. 지금까지의 법제정활동의 결과는 여성억압을 가시화하고 사회적 경각심을 환기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남성의 언어로 이루어진, 남성중심적인 법 운영안에서만 가능하다라는 한계가 있다. 국회에서 통과된 성폭력 특별법은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 라는 성폭력의 정의를 누락시키고 이를 성폭력 범죄 로 바꿈으로써 기존 형법상에 규정된 성범죄행위들을 단순히 나열해놓았다. 그리하여 지극히 극소수의 성폭력만이 가.236
    법학| 2004.04.16| 6페이지| 1,000원| 조회(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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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문] 나라야마부시코를 보고 평가A+최고예요
    비정한 자연의 법칙과 이에 대한 순응을 보며.언론정보 2001-10666 이혜온공동체 운동에 나름대로 관심이 있었다. 생태적인 소규모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자연을 거스르 지 않고, 물질보다는 마음을 중요시하는 삶이야말로 대안적인 삶의 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 자연 과 사람이 어우러진 생태적인 삶, 조화로운 삶. 얼마나 멋진가! 그러나 나라야마 부시코가 보여주 는 자연의 원리 란 내가 동경해오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따르는 자연의 원리란 너무나도 냉혹하고 비정한 것이었다. 어머니 대지 자연의 너그러움과 넉넉함은 한낱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 구적 개념이었는지도 모를일이다.1. 비정한 자연의 원리를 받아들이고 생존하라이 마을에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살아남기 위한 원칙들이다. 생산력이 발전하지 못한 이 마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것은 입을 줄이는 일이다. 그리고 입을 줄이기 위한 원 칙들이 엄격하게 지켜진다. 70세가 되는 노인을 나라야마 산에 버리고 와야하는 규범도 이 원칙에 서 비롯된 것이다. 더 이상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고 식량만 축내는 노인들은 남겨진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버려져야하는 존재다. 대를 이어야하는 장남과 차남, 그리고 내다팔수 있는 여자아이 를 빼고 사내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진다. 어린아이를 줄줄이 키우기에는 먹고 살 식량이 턱없 이 부족하다. 또한 입을 줄이는 것 외에 자신의 식량을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 따라서 식량을 도둑질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이다. 마을 사람들은 타인의 생산물을 훔친 아메야 일가를 생매 장시킴으로써 이 원칙을 관철시킨다.이렇듯 이 마을 사람들의 원칙은 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도덕원칙과는 완연히 다르다. 자식을 남의 논에 버리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부모를 버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 이 되는-타츠헤이의 아버지는 끝내 부모를 버리지 못해 마을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마을, 살려달 라고 발버둥치는 한 일가를 생매장시키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의 행위는서 방황하다 죽음으 로써 원칙을 지키지 못한 대가를 치른다. 두 번째는 이 영화에서 코믹한 에피소드를 구성하고 있 는 아라야시키 집안의 이야기다. 아라야시키 집안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범한 놈을 죽인 바 있 다. 그 아들은 아직 나라야마에 가기도 전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그러면서 죽기전에 자기가 아픈 것은 아버지에 의해 죽은 자의 한이 서려서라고, 그의 한을 풀기위해 모든 마을의 남자들과 하루밤을 보내라고 아내 오에이에게 유언을 한다. 사실 아녀자를 강간한 것은 응당 죄값을 치를 만한 범죄가 아니던가. 또한 자식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도 죄책감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죄인을 죽인 것에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다른 곳에서라면 비록 범인 을 죽인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살해했다는 데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수 도 있겠지만 이 마을은 그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마을이 아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강간한 자가 아닌 강간한 자를 살해한자가 죄인이 되어 용서를 구하게 된다. 여기에서 이 마을의 유일한 도덕 원칙은 다만 생존에 방해가 되는 것에 대해서만 관련되어 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또한 마을 남자들과 모두 성관계를 맺는 오에이가 리스케만은 건너뛴다는 상황설정으로 리스케가 얼마나 열등한 종자인지를 보여준다. 리스케는 열등한 종자이고 그럼으로 여자와 성관계를 맺을 수도 없고 따 라서 자신의 종자(?)를 재생산할 수도 없다.-리스케가 생애 딱 한번 관계를 맺는 여자는 (영화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더 이상 생식력이 없는 늙은 여자다- 이는 열등한 개체는 도태 되어 멸종된다는 자연의 법칙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강간을 당했다고 해 서 그 가족의 생존이 위협받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아라야시키 가족은,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강간이라는 상황에 살인이라는 오바액션 으로 대응하였던 것으로 그려진다. 세 번째 이야기 는 도둑질을 했다는 이유로 일가족 전체를 생매장 시키세가지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듯 이 마을에 서는 오로지 생존을 타인이 방해하는 경우에만 죄는 성립한다. 그 밖의 도덕원칙은 없다.3. 어질지 못한 자연에서 살아남기그러나 이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은 중요하지않은가 도덕성을 갖추어야 진정한 인간이다 라고 따 질 수는 없는 일이다. 자연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풀강아지와 같이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 狗.){) 노자, 도덕경 20장어질지 못한 자연에서 살아가기 위한 그들 나름의 원칙을 지금의 내가 어떻게 비판하겠는가. 자연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만 그 생명을 모두 소중하게 품어주는 것은 아니다. 살아남지 못한 개체는 가차없이 버려진다. 살아남으려면 어떠케든 스스로 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영화 초반에 토끼사냥장면은 냉정한 자연의 모습을 잘 암시한다. 힘겹게 힘겹게 토끼를 몰아 사냥에 성공하지 만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 토끼를 낚아채어 가 버린다. 힘들게 노력했다고 해서 자연은 너그러 이 봐주지 않는다. 자신의 몫을 찾는 것은, 살아남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점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의 원칙은 자연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일뿐이다.4. 인간적 인 다츠헤이, 자연의 원리를 따르다나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 내리기에 워낙에 익숙한 탓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비정한 원칙이 그들의 자연의 원칙 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도 거북스러웠다. 그리하여 나는 다만 원칙과 인정(人情) 사이에서 갈등하는 다츠헤이를 보면서 그 나마 감정이입의 대상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내적 갈등을 보면서, 그들의 이렇듯 비정하고 잔혹 한 생존의 원칙은 그들의 척박한 환경에서 어쩔수없이 비롯된 것일 거라고, 인간 본성 은 그리 잔 혹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위로를 찾았던 것이다. 다츠헤이는 마음이 여리다. 극중 인물중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가 바로 다츠헤이이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아버지를 닮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인정하지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마츠야를 심하게 벌하지만 그 렇다고 죽음으로 내몰지않고 살려둔다. 마을 사람들이 마츠야네 집안을 응징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래도 한식구인 마츠야를 어떻게 할 것인지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오린이 자신의 앞니를 일부러 깨뜨린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에도 다츠헤이는 나는 어머니 의 크고 튼튼한 이가 좋았다며 화를 낸다. 그리고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한사코 나라야마에 가겠 다는 오린앞에서 그는 미적미적한 태도를 보일뿐이다. 나라야마로 가는 산행에서도 그는 계속 주 저한다. 그러나 그도 점점 자연의 원칙에 순응해간다. 나라야마의 산행과정에서 외나무다리에서 그 는 처음에는 어머니 오린을 업고 그 길을 건너려고 한다. 그러나 외나무 다리는 둘이 함께 건널수 없다. 마츠헤이는 마타영감의 죽음과 오린의 죽음의 대비를 통해 자연의 원칙에 순응하는 것이 자 연의 이치임을 강하게 인지한다. 마타영감은 죽기 싫어 발버둥치면서 아들에 의해 밧줄로 칭칭감 겨져 나라야마에 끌려왔다. 계속 발버둥치던 그는 결국 나라야마에 이르지못한채 계곡아래로 추락 하여 비참하게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반면 한사코 나라야마에 올라 해골들과 아직 채 썩지않은 시체들 틈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던 어머니 오린의 모습은 지극히 평화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눈이 내린다. 성불한 듯 앉아있는 오린의 몸에 축복처럼 눈이 내린다. 타츠헤이는 그제서야 갈등에서 벗어나 마을로 돌아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녹인다. 그리고 그는 그제서야 어머니 오린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다츠헤이는 인정과 비정한 자연의 법칙사이에서 갈등하는 지 극히 인간적인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그 역시 자연의 법칙에 결국은 순응하게 됨으로써 자연의 법 칙을 다시금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관객들에게 주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5. 비정한 어머니 자연, 오린오린은 올 해 69세이다. 곧 70세를 맞이하는 그녀는 나라야마에 가겠노라는 결심을 밝힌다. 그러 나 그녀는 나라야부러진 이를 드러내보이며 웃는다. 그녀에게 있어서 나라야마행은 거역할수 없는, 더 정확히 말 하면 거역하는 것은 생각조차해본적 없을 정도로 내면화된 자연의 법칙이다. 어머니 하면 떠오르 는 것들, 자상함, 인내, 너그러움, 모든 것을 품어 안아줌, 생산, 풍요로움. 우리가 흔히 자연을 어 머니로 비유하는 것은 자연이 어머니처럼 풍요롭고 넉넉하고 모든 것을 품어안아준다 라고 생각하 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는 날 아침까지 밭에 씨를 뿌리고 며느리에게 고기잡는 법을 친절히 알려 주는 오린은 얼핏 보기에는 그러한 기존 이미지에 걸맞는 자상한 어머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매우 엄격하고 냉정하다. 생명을 주기도 하지만 쉽게 거두어가는 비정한 자연과 매우 닮았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자연의 법칙을 내재화한 인간이면서,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한다.그녀는 일도 잘 못하면서 먹기만 많이 먹는, 살아남을 자격이 없는 손자 며느리 마츠를 냉정하게 죽음으로 내몬다. 또한 아들 리스케가 성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여기저기 부탁하는 그녀의 모습은 얼핏 아들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모성으로 비추어질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욕을 해 결하지 못한 분노로 생산물 파손을 일삼는 아들로부터 입는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고 냉정하게 해 석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그녀의 준엄함은 나라야마 산행에서 절정에 이른다. 나라야 마의 산행은 매우 힘든 것이어서 아들 다츠헤이는 오린을 지게에 지고 힘겹게 힘겹게 산을 오른 다. 중간에 오린은 잠시 없어지고, 다츠헤이는 날지 못하는 새를 보듬어 하늘로 날려주면서 의미심 장한 미소를 띠운다. 나는 오린이 아들이 힘들 것을 염려하여 혼자서 안보이는 곳으로 간겄이겠거 니, 다츠헤이가 새를 날려보내는 장면은 어머니의 사려깊음을 깨달은 다츠헤이가 어머니를 보내드 리는 것처럼 새를 날려보내는 것이겠거니 하고 잠시나마 생각했더랬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 전반을 걸쳐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다시 나타난 오린의 클
    독후감/창작| 2003.11.12| 5페이지| 1,000원| 조회(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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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한페미니즘 평가D별로예요
    제대로 된 페미니즘이란. -을 읽고2001-10666 언론정보 이혜온1. 나는 페미니스트인가: 페미니즘에 대한 명쾌한 정의.내가 좋아했던 한 여가수가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페미니스트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적이 있다. 그녀는 단지 페미니스트 라는 단어가 풍기는 이미지, -‘남성들이 꺼려하는, 까탈스러운 이미지’, 남성을 적대시하고 그들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전투적인 이미지가 싫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하더라도 그녀의 발언은 너무 안타까웠다. 페미니즘에 대한 온갖 편견이 판치는 현실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라는 언급은 그 편견에 선언적으로 저항한다는 차원에서도 몹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작 나 자신은 남들앞에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라고 대답하기가 민망했더랬다. 대학에 들어와서 접하게 된 무수히 많은 담론 중 페미니즘에 가장 관심이 가긴 하였지만[그것은 아마도 나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여성이라는 성정체성이 줄곧 나의 관심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 나름의 정의조차 아직 정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뭣도 모르면서 페미니즘을 말하고 다닐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성세미나를 진행하다보면 종종 남성들을 탓하게 되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남성과 여성의 전선을 긋고 남성이 지나치게 독점해온 권리를 여성들도 나누어 가지게 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아니었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플러스가 되는 운동일 것이다 라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했다. 은 나의 막연한 생각을 명쾌하게 정리해주었다. FEMINISM IS FOR EVERYBODY.사전에 나와있는 정의에 따르면 페미니즘: 남녀동권주의, 여권확장운동, 여성해방론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주의 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페미니즘을 여성만을 위한 것, 기존의 남성들의 권리를 여성들도 나누어가지기 위한 것으로 고립시키기 쉽다. 페미니즘은 반(反)남성주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성들, 그리고 그러한 남성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는 많은 여성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벨훅스가 명시한 명제-‘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다’. 이 당연한 명제로부터, 페미니즘은 기존의 편견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나가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 명쾌한 정의만 알았더라도 그 여가수도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터인데. 페미니즘을 제대로 정의내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2. 중산층 인텔리 여성의 ‘그’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계급투쟁.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김규항의 ‘그 페미니즘’ 칼럼. 그 글에서 그는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의 페미니즘을 주류페미니즘이라 칭하며 못마땅한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다. 내가 느낀 문제는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로 주류 페미니즘=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의 페미니즘 이라는 그의 규정, 오늘날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속단하기에 앞서 과연 그는 현존하는 다양한 페미니즘 운동을 제대로 알고자 노력이나 했던것일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느낀 그를 탓할 수 만은 없다. 훅스가 지적하듯이, 페미니즘 초창기부터 개혁주의적 페미니스트와 혁명주의적 페미니스트 들은 운동의 비전이 달랐고 강조하는 바도 달랐다. 개혁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이 현존구조 속에서 남자들과의 평등을 추구하고자 했다면 혁명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현존하는 구조를 수정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구조자체를 변형시키고자 했으며 가부장제를 종식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가부장적 매스미디어는 이들의 혁명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사람들 이미지 속에는 개혁적 페미니스트들의 모습, ‘남자들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모습만이 남았다. 김규항이 역시 가부장적 언론. 가부장적 사회가 조장한 이미지에 의한 편견의 희생양인 셈이다.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편견을 바로잡으려면, 페미니즘의 운동성을 ‘제대로’ 알려내기 위한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주류페미니즘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서 나에게 두 번째로 남는 물음은,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의 페미니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였다. 나 역시 중산층 인텔리-인텔리는 아니지만 인텔리 계층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서울대학교 학생으로서-여성의 한사람으로서 김규항의 글은 나와는 상관없는 누군가를 비판하고 있다고 넘길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운동은 자신이 느끼는 현실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이 자신들이 느끼기에 절박한 문제-어떤 이에게는 여성 참여의 정치를 실현시키는 문제가 가장 절박한 문제일 것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일터에서 남성들과의 평등의 문제일 것이다-라면 이것을 이미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욕심이라고, 부차적인 운동이라고 가치절하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계급의 여성들, 다른 처지에 있는 여성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연대하지 않는 다면 그 페미니즘은 운동성을 잃고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훅스도 이 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라이프 스타일로서의 페미니즘은 다양한 페미니즘 버전이 있을수 있다는 개념을 낳았다. 정치는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페미니즘에서 제거되고 있었다.’ 중산층 여성들의 페미니즘, 노동자 여성들의 페미니즘이 각기 다른 버전으로 존재하는것이어서는 분명 안될일이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운동. 인종과 계급을 넘어서서, 타자를 지배하지 않으면서 자기 실현과 성공을 이룰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내는 운동’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계급 문제나 인종문제가 페미니즘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될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계급문제나 인종문제를 주변적 문제로 치부하는 것 역시 진정한 페미니즘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가진 자의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를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만이 진정한 페미니스트이다.3. 페미니즘 남성성: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그 대안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논의는 젠더개념과 함께 더욱 발전하게 된 페미니즘의 오랜 주제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격적 특성들이 나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인가, 아니면 여성으로서 길들여진 정체성인가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였다. 나는 캐롤 길리건 식의 분류로 구분해보자면, 정의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에서 보살핌의 윤리의 도덕발달체계를 지녔다. 문제는, 이것이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어쩔수없이’ 선택한-선택되어진-특성들이라면 나는 이것을 깨닫고 분연히 나자신의 본래 고유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여성적 특성들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일련의 문화적 페미니즘의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남녀간의 차이를 본질화시켜서, 가부장제가 만든 남성성과 여성성의 허구를 깨지 못하고 오히려 고착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하는가. 훅스는 ‘페미니스트 남성성‘ 장에서 페미니즘은 이제 반(反)남성주의를 넘어서 가부장제가 남성에게서 모종의 권리를 박탈하면서 성차별적 남성성을 부과한다는, 그리하여 남성역시 피해자라는 인식까지 포괄하게 되었으나 대안적 남성성이 어떤것인지를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가부장적 남성성에 대하여 대안으로 내놓은 것은 더 많이 여성화된 남성의 비전이었으며 이는 성차별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어서 성차별적 발상에 대한 대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지배의 문화는 자기 존중감에 해악을 끼친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지배에서 비롯하는 존재감각이 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요구되는 남성성의 버전은, 자기라는 독특한 존재에 대한 존중과 자기애가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여성성의 대안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아서 아쉬웠으나 남성성의 대안이 그에 대한 암시를 던져준다고 생각한다. 성별 논리가 아닌, 지배의 문화 속에서 약자의 위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자기라는 독특한 존재에 대한 존중과 자기애가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것. 그것은 남성뿐 아닌 여성의, 모든 인간의 정체성의 핵심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몹시 추상적인 언어이기도 하다. 우리 현실에거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날 것인지에 대한 좀 더 명확한 비전이 필요하다. 그래야 나같이 고민하는 여성(혹은 남성들)에게 빛이 되는 페미니즘이 될 수 있을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과학| 2003.06.05| 4페이지| 1,000원| 조회(1,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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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치의 의의 혹은 비판 2001-10666 언론정보 이헤온키치란 무엇이며 어떤 배경에서 출현하였는가, 키치의 특징은 무엇이고 우리 실생활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발표를 통해 잘 제시된 바 있다. 따라서 이 글은 키치의 기본적인 설명에 관해서는 다시한번 짧게 언급하고, 주로 키치가 현대예술이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키치의 가치평가도 이에 따라 행해질수 있을 것이다-에 관하여 보충하는 방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려 한다.1. 키치의 어원, 정의 키치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한 마디로 정의내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키치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도 진흙을 문대며 논다 라는 독일어 동사 kitchen에서 유래했다는 이론, 값싸게 만들다 라는 메클렌 부르크 방언 verkitschen에서 유래했다는 이론, 건방지고 우쭐대는 것 을 의미하는 러시아 동사 keetcheetsa에서 유래했다는 이론 등 매우 다양한 이론이 있다. 조금씩 의미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진지함과는 거리를 갖는 가볍고 부정적인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키치의 정의가 속악한 것, 가짜 또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이비 등을 뜻하는 미술 용어 라고 정의되어 있지만 사실 키치라는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이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키치는 진품적 가치나 효과를 모방하는 태도와 그 산물로서 예술. 더 넓은 의미로 아브라함 몰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이 사물과 맺는 관계방식 으로까지 그 의미는 확장될 수 있다.2.키치의 배경 키치는 산업혁명의 산물이다. 새로운 도시 대중은 소비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소비에 적합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도록 사회에 압력을 가하였다. 새로운 시장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상품이 고안되었다. 라는 논문에 드러난 그린버그의 설명에 따르면 참된 문화의 가치에는 무감각하면서도 특정한 문화만이 제공할 수 있는 오락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겨난 대용문화가 곧 키치 인 것이다.3.키치의 특징 키치의 특징으로는 부적합성-기존 사물의 고유한 기능 거부, 축적-한 사물에 의미없이 최대한 많은 기능이나 특성 담기, 공감각의 원리-최대한 다양한 감각 만족시키기, 중용-모든 것의 가운데적 성격을 띠며 따라서 모든 사물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 쾌적-표준적이고 안락한 생활에의 추구, 자기기만-모조품으로 진품 대체하기, 왜곡된 감상적 성격-과도하거나 미숙한 정서 표현의 자극 등을 꼽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키치의 특성을 파악함으로써 귀납적인 방법으로 키치의 본질을 추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4.팝아트와 키치. 키치와 캠프 키치가 소비사회의 특징적인 문화적 현상 이라고 본다면 과연 현대예술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키치 자체는 예술의 한 유형이 아니다. 그러나 키치는 예술을 포함할 수 있다. 키치는 예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모든 예술이 키치라거나 모든 키치는 예술이라는 뜻이 아니라 키치와 예술은 서로 부분집합을 가질수 있다는 의미이다. 키치적 산물이 전략적으로 이용된 대표적인 예가 바로 팝아트이다. 추상표현주의가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뉴욕에서 팝아트는 이와 가장 반대에 위치한 대중적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예술의 순수주의에 대해서 비평을 가한다. 로즈메리 람버트는 60년대에 들어 화가들은 추상표현주의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들은 영화기법, 텔레비전 광고, 신문과 잡지를 이용하여 일상사물들의 이미지를 표출하는 방법을 고안하였고 이것이 팝아트 라고 팝아트를 정의하고 있는데 여기서 일상사물의 이미지 라는 것이 바로 통속적인 대중문화의 산물, 키치 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팝아트의 작품들이 대중적 소재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예술과 대중의 삶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팝아트의 일차적 관심은 대중문화로부터 차용된 이미지를 통해 예술을 비평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팝아트는 키치적 소재를 차용하여 이를 고급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팝아트 역시 예술계가 예술로 인정한 예술 이라는 점에서-뒤샹의 변기는 고급예술을 부정하는 냉소주의적 행위였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도 다른 예술처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팝아트를 고급예술로 분류하고자 한다.그러나 둘사이에 존재하는 외형적으로 유사한 이미지와 달리, 팝아트와 키치는 그 본질에 있어서 다른 맥락을 갖고 있다. 키치의 주된 동인은 고급문화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그것의 가치를 모방 하는 심리이다. 즉 이는 위에서 아래로의 흐름이다. 반면 팝아트는 추상표현주의와 순수주의에 대한 비평적 노력의 일환으로 대중문화의 키치적인 이미지를 차용 하는 통속적인 대중문화를 소재로 고급문화를 비판하는 아래에서 위로의 흐름이다. 팝아트에는 기존 예술에 대한 비평적 전략이 숨어있는 반면, 키치는 위에 도달하지 못한 결여를 실제적 가치의 모방을 통한 위안으로 보상받으려고 하는 전략과 관계된다. 이에 팝아트에는 키치보다는 캠프적 여유 가 존재한다. 캠프에는 키치가 가지는 사회적 환상이라든지 즐기는 대상에 대한 존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스타일을 즐길 뿐이다{) 캠프는 나쁜 취미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반면 키치는 그것을 포함한다 라고 주장하는 마크부스의 언급은 키치와 캠프의 이러한 차이를 잘 드러내준다.따라서 팝아트는 키치적이라기보다는 캠프적 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르지 않을까 생각한다.발표자들은 키치와 키치를 사용한 예술을 구분지었다. 그리고 팝아트의 경우에서처럼, 비판적인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키치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키치의 의의를 찾고 있다. 그러나 팝아트가 사용한 것은 키치적인 형식, 키치적인 이미지일뿐 키치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심리와 태도를 포함한 키치 그 자체 는 아니다. 따라서 나는 키치를 이용한 예술이 가치있다 라는 점이 키치 그 자체가 긍정적 의의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5. 키치와 상업성 키치 라 불리우는 예술에 대해 예술비평이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키치는 곧 조악한 예술,나쁜 예술과 동격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윤리적인 평가가 개입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키치란 예술적인 기교나 형식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슈트라우스의 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 이 작품은 일관성, 힘, 통일성 및 정교함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가장 훌륭한 기술과 결합되어 있다...그리고 바로 이러한 달콤한 오르가즘을 위하여 성욕을 일으키는 모든 환상적인 장치들이 요구되고 있다... K.해리스 재인용즉 키치란 부적절한 기술과는 무관한 것이다. 물론 기술적으로 열등한 키치도 많이 있지만, 기술적으로 우수한 키치도 자주 볼수 있기 때문이다. 가 키치적 이라고 평가된다면 그 이유는 기술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 작품이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는 점, 작품 대상을 추구한다기보다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점, 본래 욕구의 대상이었던 것을 단순히 욕구를 자극하기 위한 기회로 변형시키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키치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인간의 욕구와 그것의 충족과 관련있다. 상업주의를 그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키치가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는 창조적 작품이 아닌 단지 제품 혹은 상품일 뿐이며, 예술계의 권위를 이용해서 욕구(소비적욕구)를 부추기는 것 일뿐이라는 비판은 피할수 없는 결과이다. 발표조에서는 키치가 자본주의 소비지향적인 사회에서 헤어나올수는 없겠지만 비판은 가능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자본주의 적이고 상업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줄수 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으며-현재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현실을 비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자기만족에 그치는 냉소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키치에 가해지는 일련의 비판들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예체능| 2003.06.05| 3페이지| 1,000원| 조회(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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