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표현주의Ⅰ. 추상표현주의란?추상표현주의란 용어는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에 대해서 사용했던 것으로, 평론가 ‘알프레드바’가 1929년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칸딘스키의 유동적인 초기 작품에 대해서, 형식적으로는 추상적이나 내용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이란 의미에서 추상표현주의이란 말을 썼다.추상표현주의는 194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미국의 뉴욕을 중심으로 한 미술운동이다. 추상표현주의는 단어 자체가 주는 의미처럼 자연을 재현하지 않고 예술가의 주관적 감정이나 본능적 욕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즉 내용은 표현적이고 형식은 추상적인 예술사조이다. 예를 들어 잭슨 폴락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추상표현주의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미술의 한 양식인 것이다.형식적으로 추상미술의 계보에 놓이지만 20세기 초반에 보이는 기하학적 추상과는 이질적인 것이다.Ⅱ. 발생배경사실 추상표현주의란 말은 1940년대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이전에도 존재하였다. 추상표현주의를 포괄적으로 해석하면 유럽의‘앵포르멜’ 앵포르멜(Informel)은 제2차 세계대전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전개된 추상표현주의 경향이다.특히 미국의 액션페인팅이 행위성을 강조한 것과는 유럽의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서정적 추상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유럽에서의 추상표현주의자로서는 장 포트리에, 장 뒤뷔페 등을 선구로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물감을 두껍게 발라 올린 화면을 긁거나 파는 것처럼 그렸다. 운동도 포함되고 더 넓게는 표현적인 느낌을 주는 추상 모두를 추상표현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추상표현주의라 하면 전후의 미국의 뉴욕화단에서 일어난 추상미술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1940년부터 1970년까지의 미술사는 미국이 주도하였다. 다른 영역에 있어서도 미국의 이미지는 거대했으며 그것은 2차대전이후까지 미술시장을 장악했던 파리와 그 주변의 유럽문화가 전쟁의 결과로 피폐로 상대화되었다.많은 유럽의 미술가들은 안전한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으며 미국에서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게 된다.미국은 전쟁을 통한 부와 내부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일차적인 경제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정책적으로 문화적인 후원을 통한 극복을 꾀한다.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써 연방 미술 정책 (Fedral Art Project)이 미술을 공동체의 일상생활과 통합시키기 위해 결성된다.벽화작업은 공공작업을 통한 노동의 수요와 미국적인 미술의 한 특징을 짓는 계기를 마련한다. 멕시코의 리베라 등이 추진한 벽화의 영향으로 큰 규모의 초대형회화의 캔버스가 생기는 계기가 된다.Ⅲ. 성격과 두 사조제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미국에서 나타난 추상표현주의의 이름만 보더라도 추상표현주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추상적인 면과 표현적인 면으로 말이다. 물론 미국 추상표현주의에는 이러한 관점이 맞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 두 가지 관점에서 보면 추상적인 면에서는 인간내면의 정신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미국 추상 표현주의는 회화에 있어 무의식성을 강조하며 이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으로 보여 진다. 즉, 미국 추상표현주의에서는 모든 의도를 배제한 자동 주의적(automatic) 기법을 통해 무의식을 형상화하려고 했다.또한 추상표현주의에서의 표현 양식으로 보면 크게 뜨거운 추상 계열의 액션 페인팅과 차가운 추상 계열의 색면 추상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뉜다.액션 페인팅은 순간의 행위를 통하여 나타난 우연성의 효과를 새로운 미의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려지는 이미지보다도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주장하여 격렬함이나 생명감의 긴장이 강조되었다.이와는 대조적으로 색면 추상화가들은 전쟁의 허무감을 극복하기 위해 실존적 입장에서 좀더 근원적인 상징물이 필요함을 자각하여 우연과 임의보다는 그들의 철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단순하고 강렬한 색면 회화를 추구한다. 색면 회화는 원시미술과 마티스를 연상시키는 강렬하고 단순한 색채를 통하여 그들이 도달하고자한 숭고의 이미지를 넓은 색면 위에 나타내고 있다. 색면 추상 작가들은 넓으면 넓을수록 색채의 강도가 깊어진다고 믿고 큰 캔버스를 선택하였다. 액션 페인팅이 신체의 제스처를 가지고 우리를 회화의 세계로 인도하였다면 색면파 회화들은 우리를 명상의 세계로 인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거대한 색면으로 이루어진 캔버스를 가지고 지적으로 가득찬 사색을 유도한다.액션 페인팅 계열의 작가들이 거의 충동적일 만큼 즉흥적인 표현성에 의존하고 있었다면, 색면 추상화가들은 신비주의에 가까운 정신성에 의존했다. 이들의 양식이 어찌 보면 극단에서 극단을 오가는 것처럼 차이가 나긴 하지만, 소위 추상표현주의자들라고 불리는 사람들 모두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즉, 그들 모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그들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이었지 외부세계에 관심을 가져 사회적 주제를 선택하거나 주변세계를 찬양 또는 비판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잭슨 폴락은 '뿌리기'라는 자발적 표현 행위를 통하여 그의 무의식과 같은 내면세계를 드러내고자 했고, 라스코는 화면위에 부유하는 사각형을 통해 형이상학적 정신세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추상표현주의를 그들의 뒤를 잇는 60년대의 추상미술과 구별지어 주는 것이다.Ⅳ. 대표적인 작가1. 액션 페인팅1) 잭슨 폴록 ( Paul Jackson Pollock : 1912.1 ~ 1956.8 )초기의 작품들은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원초적 신화와의 관련성속에 모색되어 온 개인적 투쟁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원시미술은 미국인으로서의 지각과 주체성, 유럽에 대한 의식 사이의 결정적인 수단이자 요인이다.폴록의 작업 제작방식은 자유롭고 역동적인 행위로 1948년에 폴록은 뿌리기 그림들을 최초로 전시한다. 이 그림은 커다란 화폭을 바닥에 깔고 그 주위를 걸어다니면서 깡통의 물감을 붓거나 막대기에 묻힌 물감을 떨어드리는 것이다. 이때 화면에는 우연적인 요소들이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물감통으로부터 직접 바닥의 캔버스에 흘려 떨어지는 페인트는 즉시 색선이 되고 색반이 되어서 거미줄 망과도 같은 색의 장으로 변한다. 화면의 자국들은 화가의 움직임, 여러 방향에서 화면을 향해 다가와서 팔과 손목의 행위의 기록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시간에 행해진 행위 전체의 농축이자 정지화면이다. 두터운 물감층의 표면성은 이젤페인팅과 벽화의 한계를 넘어서며 자체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전통적 이젤 회화에 비해서 더욱 생생하고 개방적이며, 즉각적인 순수화면이 된다. 즉 고립된 완성도 없고 색채 대비에 따라 회화적으로 창조해야만 하는 회화공간도 없으며 다만 둔감한 물질적 대비나 시각적 착시에 의한 화면만이 있을 뿐이다. 캔버스는 단순히 주어진 용기로써가 아니라 통일성이 종래의 관념에 의해 강요되지 않고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개방된 장으로써 취급된다. 이러한 폴록이 갖는 공간 이념에 있어서 캔버스 위의 작업은 물감 이외에 모래, 석고, 유리에 금색 철망, 바늘, 조약돌, 조개껍질 등의 사용에서는 물리적인 힘을 억제시키고 이미지와 일체화시키고 있다.1947년과 1951년 사이에 제작된 폴록의 흘리기 수법의 그림들이 어떤 공통된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우연은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추상표현주의의 중요한 공헌 중의 하나이며, 초현실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길게 풀려 엉클어진 실타래와 같은 폴록의 쏟아붇기식 그림은 현대 회화의 방향을 변화시킨 많은 요소를 제공하였는데, 전면 균질회화-외관상 시작도 끝도 없어 보이는 그의 회화 개념-는 바로 캔버스의 한계로까지의 확장, 심지어는 그 너머로까지의 확장을 의미한다.2) 윌렘 드 쿠닝 (Willem de Kooning : 1904 ~ 1997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신의 윌렌 드 쿠닝은 1926년 미국에 건너가 잭슨 풀록과 더불어 추상표현주의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했다.윌렘 드 쿠닝은 1948년 흑백회화를 충격적으로 전시하여 등장하였다. 드 쿠닝은 자유롭고 거의 광란적인 붓질로써 격정적인 모습의 형상에 집중했다.1950년대 거칠고 강력한 화법을 통해 여성을 악마적, 성적 대상으로 재형상화한 연작을 통해 세계 미술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연작은 오만하고 비속한 여인을 그린다. 폴록의 회화가 고상한 추상의 고뇌라면 그는 속물적인 근성과 블랙 유머러스한 조소를 담은 형상적인 것을 담는다. 그에게서 형상은 이미 재현을 떠났으며 그는 인체에서 찾을 수 있는 격렬함과 폭력을 형상의 과정적인 붓질로 제시하는 것이다.인체를 무한한 변이가 가능한 구조 전체로 그는 추상과 비추상적인 작품을 번갈아 제작하며 회화적인 제한과 한계성을 유동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모든 작품에 생생한 표현과 자발성이 두드러지는 표현적인 강렬한 제스쳐가 있다.이후 그는 70년대 까지 분홍, 노랑, 파랑 등 특유의 화사한 색감을 바탕으로 물감을 기여 채색하는 파격적인 기법을 담은 추상화를 제작했다. 이를 놓고 평단에서는 ‘폭력적인 추상 액션 페인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윌렘 드 쿠닝은 1970년대까지 인물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동시대의 추상미술가 중에서 유일하게 인물을 작품의 주제로 끌어들였는데 처음에는 남성을, 나중에는 여성을, 주로 그렸다.
I. 입체주의의 발생배경1.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그 후14C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16C 에는 유럽전역으로 퍼진 르네상스는 학문 및 예술의 부활, 재생이라 할 만큼 유럽전역의 공감대를 가져왔다. 르네상스 당시의 미술은 일종의 과학과도 같아서 미술은 자연을 탐구하는 수단 이었고 그 결과인 발견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눈으로 관찰한 세계를 보다 과학적으로 나타내기를 원하였고 이에 ‘원근법’이 탄생하였다.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와 이어지는 시민사회의 등장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원근법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서 이성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가져주었다. 또한 원근법은 미술에 사실주의라는 패러다임의 숨결을 불어 넣었고 시점이라는 주관적 관점의 세계를 보편적 관점의 세계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 후 20C에 이르러 입체주의는 르네상스 이후 확고부동했던 단일 시점의 원근법에 의해 부여된 대상의 가짜 입체감을 해체시키고 그것을 이차원적 캔버스평면에 재구성함으로써 19C 사실주의 작품에서 보이는 문학적 암시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즉 순수한 시각성에 의한 회화의 자율성을 획득하려 했다. 여기서 입체주의란 20C초 야수파와 전후해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서 르네상스이후 서구의 회화를 지배해온 사실주의로부터 해방시킨 20C 미술의 중요한 미술운동을 말한다.2. 배경20C 이전까지의 미술은 사실에 입각한 개념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고자 하였는데 이는 표현대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미술의 양상, 조형적 성격이 달라졌다. 신고전주의에서 신화, 전설, 영웅, 귀족 등이 주제가 되었다면 쿠르베의 사실주의에서는 석공, 열차의 삼등칸 등의 서민들이 등장하였고, 현대미술의 시발점이 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Le Djeuner sur l’herbe] 이후 모네의 인상주의에서의 대상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20C를 넘어 미술의 본질은 표현이라는 전제하에 현대성이라는 초점으로 일정한 대상을 전제로 하지 않는 표현자체에 집중된다. 열려진 창문으로 보려했던 인상파와는 달리 보이는 자연과 무관 순수한 조형미술운동은 독일표현주의, 야수파 등으로 유럽 전역을 흔들었고 입체주의도 그러한 상황에서 출발하였다. 또한 1901년 막스 프랑크의 ‘양자이론’ 발표와 1905년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의 발표 등의 과학적 성과는 발명과 창조라는 과학의 중심과제와 성격을 같이하여 회화에서도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역할을 위하여 새로운 감각과 이의 실천을 위해서는 조형 내지는 건축가적인 안목과 분석력, 입체감에 대한 쇄신이 있어야 할 때라는 자극도 있었을 것이다.세잔느는 인상파가 부정한 고유색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물체의 색은 빛의 변화에 의해 다소 변화를 격지만 일정의 색채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즉 작품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려 했으며 인상파의 작품과 같이 데생과 색채를 분리하는 불안정한 태도보다는 모든 회화가 데생으로 뒷받침 된다고 생각하고 모든 사물의 기본적 형체를 규명하여 기본적 단순화한 형태를 조직화함으로써 영원히 불변하는 공간적인 입체적 자연상과 내면상을 표현하려고 했다. 모든 물체를 구, 원추, 원통으로 다룬다는 것은 한 시점이 아니라 여러 각도에서 본다는 뜻이며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된 모든 요소는 2차원 평면 안에 재구성하여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세잔느의 조형 이념은 입체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입체주의의 형성기에 발견되는 이국적 소재, 원시미술은 세잔느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아프리카 니그로 조각에서 발견되는 단순화와 힘의 표현은 20C초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발표하기 전 1904년을 전후하여 드랭,마티스 블라맹크가 골동품으로서 니그로 가면을 인식하여 외관만 모방하였다면, 이에 반해 피카소는 조형적 본능의 원초적 표출을 재검토 하였다. 피카소의 생각은 이국적 정서라는 것은 서구미술의 2차원에서의 원근법과 니그로 조각에서 나타난 3차원의 결합에서 비롯하는 것이었고 결국 입체주의는 이 결합에서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II. 입체주의_Cubism1. 입체주의란?입체주의의 중심 사상석, 분해해서 그 각 단면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는 입체주의 작가들은 르네상스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한 순간적인 현실묘사를 지향하였다. 이 시도는 중기에 이르러 대상이 극도로 분할되어 나타났으며, 후기에는 풍부한 색채가 부활되어 기하학적인 색면과 대상의 환기력있는 요소와 결합하여 융합되었다. 또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1점 원근시점에서 벗어난 동시점, 즉 다시점의 작풍 태도였다. 이런 시도는 많은 비평가들에게서 인정을 받았는데, 화면의 평면화, 빛의 평등한 분산, 주제의 일관성 등으로 그 실천적 성과가 더욱 견고해지는 것을 보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예술론을 성공적인 시도로 받아들였던 것이다.2. 입체주의의 시기적 단계입체주의 운동은 시기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된다. 제1기는 초기 입체주의 (1907~1909), 제2기는 분석적 입체주의 (1910~1912), 제3기는 종합적 입체주의 (1913~1914)이다. 이 세 단계를 거치는 입체주의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의 두드러진 특성은 그 전개가 야수주의와는 정반대로 명석한 논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또한 바로 그 논리성이 입체주의 회화의 기본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입체주의는 하나의 집단적인 운동으로서는 1914년에 일단 막을 내린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때를 같이한다. 그리고 종전 후, 입체주의는 이 운동을 주도했거나 이에 호응했던 주요 화가들의 입에서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모두가 각각의 양식을 찾기 위해서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그들의 회화 양식을 추구했든지 입체주의적 체험이 그들의 밑거름이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1. 초기 입체주의 (1907~1909)‘자연을 원통형?구체?원추형에 의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색채 속의 면, 그 면을 정확히 파악할 것, 이러한 면을 조립하고 융합시킬 것, 그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서로 결합되도록 할 것’ - 세잔느1907년 ‘살롱 도톤느’ 에서는 그 전년에 사망한 입체주의 운무리하고 있었으므로, 초기 입체주의를 '세잔풍의 입체주의 라고도 한다. 입체주의 회화가 구체적인 형태로 등장하는 것은 1907년의 피카소의 이지만 ‘입체주의’ 라는 명칭은 1908년에 제작된 브라크의 풍경화에서 유래되었다. 브라크의 풍경화를 본 마티스가 이의 작품을 두고 ‘조그만 큐브의 축적‘ 과 같다고 평하였고 그 말을 되받아 어느 한 평론가가 ’브라크의 모든 것을 기하학적 도식, 입방체로 환원시키고 있다‘ 고 한 평문의 발단으로 입체주의라는 명칭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입체주의의 창시자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세잔느의 계열을 따른 새로운 화면구성을 의도하면서도 반드시 기교함을 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1907년 이미 피카소는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 에서 강한 데생풍의 명암을 없앤 수법으로 아프리카 흑인 조각에 가까운 인물표현을 시도하였는데, 브라크와의 교우가 시작된 것도 같은 해이다. [아비뇽의 처녀들] 은 입체주의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며 이 작품에서는 분석적 입체주의의 단초가 되는 복수시점과 촉각적 평면의 구성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2. 분석적 입체주의 (1910~1912)1910년을 전후하여 형체는 점차 세밀하게 결정화 되고, 사물은 현저하게 해체되어가는 분석적 입체주의의 시대가 온다. 또한 작품의 주제도 집이나 수목뿐만 아니라 과실, 술병, 컵 등의 정물적 모티프가 되고, 다시 기타, 만돌린, 바이올린 등의 악기가 등장하여 분해된 그들 형체가 전후좌우로 서로 뒤섞여지므로 마치 거울면의 난반사를 방불케 하는 시각적인 확대를 획득하는 것이 되었다. 피카소가 몇 개의 초상에서 실험을 한 것도 이 시기이며, 후안 그리스가 형체의 비구성을 주장하여 분석적인 그림으로 불린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분석적 입체주의에서의 물체는 일단 일상의 눈으로 보는 포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한 개의 바이올린을 이루는 세세한 오브제가 현재하고 있는 것이라면 보는 각도를 바꾸면 이것도 물체 그 자체의 탐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분석적 입체주의의 가장 큰다.3. 종합적 입체주의 (1912~1914)1912년 입체주의는 ‘종합적 입체주의 ’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분석적 입체주의가 자연히 화면구성에만 치중하여 물체가 지닌 리얼리티를 망각한 위기에서 비롯된 기법으로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가 강력한 무기가 된다. 즉 즉물적으로 신문지나 벽지, 담배갑이나 트럼럼프 등을 화면에 붙여가는 방법이며 최초의 파피에 콜레는 1912년 브라크에 의하여 응용되었다. 물론 입체주의의 파피에 콜레는 회화적인 의미에서의 테크닉이었으므로 그것으로 바로 화면에 현실감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화면에 있어서 이질적인 촉감이 처음에는 시각을 통하여 다음에는 보는 사람의 심리에 어떤 종류의 거스름으로서 작용한 것을 간과할 수 없으며 이것은 피카소가 말한 입체주의의 눈과 마음이 지각한 것을 표현하는 수단’임을 뒷받침 하고 있다. 면에 현실감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화면에 있어서 이질적인 촉감이 처음에는 시각을 통하여 다음에는 보는 사람의 심리에 어떤 종류의 거스름으로서 작용한 것을 간과할 수 없으며 이것은 피카소가 말한 입체주의의 눈과 마음이 지각한 것을 표현하는 수단 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후에 다다이즘은 더욱 철저한 콜라주를, 쉬르레알리스트는 포토몽타주를 펼치게 되나 그것도 입체주의의 현대적 발상의 하나였다. 입체주의의 종합적인 전람회는 1911년의 살롱 데장 데팡당에서 개최되었는데 당시 출품자에는 앞서 말한 4인 외에 들로네, 뒤샹, 비용, 로랑생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소박한 화가로서 알려진 H.루소의 작품에서도 입체주의적인 조형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입체주의의 색채 경시의 경향을 다시 문제 삼아 다채로운 색을 동시적인 존재로 바꾼 것이 들로네의 오르피즘이며 그의 이론이 마케, 마르케, 클레를 중심으로 한 청기사운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또 사람들 중에서는 J.그리스를 전형적인 입체주의 화가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종합적 입체주의로의 전환에 미친다.
환발해만경제권 발전에 따른한국과 주변국들의 자세건축학과20015530성치훈진주목걸이라고도 불리는 발해만 일대. 중국 국무원은 이 지역을 2000년대 경제 중심지역으로 결정하였으며 그 중심은 텐진시가 맡게 되었다. 1980년대 선전과 90년대 상하이 푸둥에 이은 중국의 세 번째 국가경제특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수도 베이징에서 100~200㎞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사실상 범수도권 개발을 본격화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실제로 앞으로 발해만 지역과 베이징이 경제적으로 상호 보완하게 될 것이며 실례로 일본 요코하마가 수도 도쿄의 배후도시로 경제적 보완 기능을 하는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장기적으로는 산둥성과 허베이성을 망라하는 범북부 경제개발권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선전을 중심으로 한 광둥 경제권과 상하이 중심의 화둥 경제권, 그리고 베이징과 톈진을 묶는 발해만 경제권을 만들어 전국을 세 개의 경제 축으로 운용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이 세 개의 경제 축 중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환발해만 경제권은 우리나라와 지리적 혹은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경제 발전? 고도성장세중국은 1993년 상반기에는 경제성장률이 13.9%, 공업생산량이 25.1%상승하였다. IMF 보고서에 따르면 1993년도 세계경제성장률은 2%로 예측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1%~2%, 동유럽과 구소련은 각각 -2%, -11%의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고, 대다수 개발도상국의 경기침체가 계속될 반면에 동남아시아의 일부 국가들만이 성장추세를 유지할 것이며, 그 중에서도 중국의 성장률이 가장 높을 것이라고 한다.? 호전된 경제효율1993년 상반기에는 공업생산의 증가와 함께 공업기업의 경제효율이 이전보다 다소 향상되었다. 국유기업의 손실범위는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1.7% 축소되었으며, 공업기업의 효율은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17.56% 상승했다. 시장가격화로 인한 제품가격상승, 세율인하에 따르는 이윤증가, 대은 기간보다 23.2%증가한 406.9달러였다. 일부 외환지불이 필요없는 수입분을 제외할 경우 1993년 상반기의 무역수지는 25억 달러의 흑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삼자기업의 대외무역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93년 상반기 삼자기업의 수출입총액은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49.8%증가한 246.4억 달러이며, 그 중에서 수입은 58.8%, 수출은 37%증가했다. 삼자기업이 전체 수출입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1.7%로 수출역군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고 있다. 한편, 고도성장세가 지속되고 투자환경이 개선되면서 1993년 상반기에는 대중국 외국인 투자의 투자건수와 투자액이 급증했다. 통계에 따르면 상반기 정부가 허가한 외국인 투자는 4만 3,632건, 투자계약총액은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234% 증가한 587.6억 달러, 실질투자액은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318% 증가한 100억 달러라고 한다. 주요 투자국의 경우 1년 사이에 대중국투자가 2배 ~ 10배 급증했다. 전년도 같은 기간과 비교하여 각국의 대중국투자 증가 상황을 보면 캐나다의 경우 12배가 증가했으며, 대만은 5.7배, 영국과 독일은 5배, 홍콩은 3배, 미국과 한국은 2배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추세를 통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중국시장과 중국경제발전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직소득의 향상1993년 상반기에는 소비자물가가 10.5% 상승했으나 주민의 화폐소득이 물가상승률을 초과하여 주민의 실질소득이 향상했다. 도시민의 경우, 화폐소득이 28% 증가하여 물가상승요인을 감안한 실질소득은 17.5% 증가했으며, 농촌주민의 경우 화폐소득이 14%증가해 실질소득은 4% 증가했다. 실질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도시 및 농촌주민의 저축이 대폭 증가했는데, 1993년 6월 말 은행의 개인예금 잔액이 인민폐 1조 2,789억 원으로 반년동안 인민폐1,244억 원의 개인예금이 증가했다.? 발해만 경제권에 속한 지역들의 분석1. 산둥 성? 일반개황환발해만 산동반도 지역에 속하는 산둥성은 황해에: 29.7억 달러 (대중국 투자의 27.8%)2. 톈진 시? 일반개황톈진시는 화북평원 동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보하이(渤海)와 인접, 북으로는 옌산(燕山)과 근접해 있다. GDP 2,932억 위안(전국 GDP의 2.2%, 전국 21위), 1인당GDP : 31,550위안(3,810 달러, 3위), 교역규모 432.5억 달러(수출 205억 달러, 수입 228억 달러)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주요산업으로는 자동차 및 기계설비, 마이크로전자와 통신설비, 해양화학공업과 석유화학, 고품질강관을 중점으로 하는 4대 지주산업을 형성하고 있고 상업, 무역, 금융, 보험, 교통운수, 부동산 등 3차산업 발달하였다. 경제기술개발구와 하이테크개발구, 그리고 보세구로 지정을 받았다. 2004년 천진시의 경제성장률은 15.7% 성장하여 1984년 이후 최고치 기록하고 있으며 교역규모로는 432.5억 달러로 중국 전체 교역액의 3.7%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의 31개 성급 행정구역중 7위를 차지하고 있다. ? 한국과의 관계2004년 천진시의 대한국 교역액은 69.7억 달러로 산동성 전체 교역액의 18.3%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은 천진시의 1위 교역대상국이다. 2004년 천진시의 대한국 수출액은 16.7억 달러로 천진시 수출의 8.1%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은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산동성의 4위 수출시장이 되고 있다. 또한 2004년 천진시의 對한국 수입액은 53억 달러로 천진시 수입의 23.3%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은 천진시의 1위 수입대상국이다.? 對천진시 투자 및 對한국 수출입2005년 4월말 현재 한국의 천진시에 대한 투자 건수는 1,088건으로 대중 투자의 8.9%, 투자액은 12억 달러로 동 10.3% 차지하고 있으며 투자업종으로는 천진시 투자 건수의 88.7%, 투자액의 95.2%가 제조업이며, 제조업중에서는 전자통신 업종이 절대적인 비중 (투자건수의 55.8%, 투자액의 60.2%)을 차지하고 있다. 천진시의 對한국 주요 수출품목은 전자부품 나 최근 수년간 10% 이상의 고성장 지속(전국 14위)을 하고 있다. 이는 요녕성이 1980~90년대 동북지역의 ‘상대적 정체’ 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국가급개발구 4개, 성급 개발구 13개(국가급 고신기술개발구 3개 성급 고신기술개발구 2개)를 보유, 발전이 지속될 전망이다. ? 한국과의 관계2003년 요녕성의 對한국 교역액은 33.9억 달러로 요녕성 전체 교역액의 12.7%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은 요녕성의 2위 교역대상국이다. 요녕성의 대한국 수출액은 15.6억 달러로 요녕성 수출의 10.7%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은 일본, 미국에 이어 요녕성의 3위 수출시장이 되었다. 요녕성의 대한국 수입액은 18.3억 달러로 요녕성 수입의 15.3%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은 요녕성의 2위 수입대상국이다. 요녕성의 對한국 주요 수출제품으로는 철강 원자재 및 중간재, 의류 등 소비재, 농산물 등이 있으며 對한국 주요 수입제품으로는 전기전자제품, 석유화학제품, 생산용 중간재 등이다.? 한국의 對요녕성 투자2004년 말 현재 한국의 요녕성에 대한 투자 건수는 1,685건으로 대중 투자의 14.8%, 투자액은 9.4억 달러로 동 8.8%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의 對요녕성 투자 업종은 제조업(76.7%), 건설업(11.7%), 도소매업(4.7%), 서비스업(2.6%)등의 순이다.? 발해만 경제권의 분석?배경상하이 출신인 장쩌민(江澤民) 주석 시절 경제개발은 상하이와 선전을 포함한 남부지방에 집중됐다. 그 결과 지난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창장(長江) 삼각지 일대의 산업생산액은 국내총생산(GDP)의 18%를 차지를 차지했다. 반면 베이징(北京)을 포함한 범발해만 지역은 10.3%에 불과하다. 선전을 중심으로 한 주장(珠江) 삼각지 일대는 인구가 수도권보다 적으면서도 GDP 점유율은 9.9%로 비슷하다. 이 때문에 북부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톈진 출신인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 산둥성 지난(濟南) 출신인 자칭린(賈0억원)까지 늘려 지역 개발자금으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외국인 투자현재 중국에 대한 외국인투자는 전반적으로 감소하고 있지만 천진시는 오히려 제조업과 서비스 분야의 대형 프로젝트에 대한 외국인투자가 활발한 흥미로운 소식이 있다. 현재 천진시의 외국인투자 계약금액은 전년 동기대비 20.0% 증가한 42.5억 달러(실제금액 18.8억 달러, 전년대비 28.6% 증가)에 달했고 새로 설립한 외국인투자 기업수는 전년 동기대비 13.6% 증가한 727개에 달하였다. 현재 천진시의 외국인투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1) 투자금액이 500만 달러 이상인 프로젝트가 208개로써 전체 계약금액의 65.8%(27.9억 달러)에 달하여 대형 프로젝트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2) 부동산·유통업 등 서비스산업에 대한 투자가 계약금액 기준으로 전년 동기대비 53.9% 증가한 17.5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에 달하였다.(3) 외국인기업의 자본금 증자확대가 외국인투자의 중요한 형식으로 되면서 431개 외국인기업의 증자금액이 13.5억 달러에 달하였다. 또한, 외국인투자는 천진시의 향후 개발유망지인 濱海新區에 집중되었는데 올해 그 비중은 전체 계약금 기준으로 69.5%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발해만 지구의 한국 기업구분건수비중(%)금액(백만달러)비중(%)발해만지역32848.6411.962.6산동성20730.7289.043.9천진시659.662.59.5북경시405.949.47.51993년 6월 말 현재 허가?신고수리 기준.자료 : 한국은행, 김태홍(1994)한국 기업들은 90년대까지 본국과 가까운 이 지역에 주로 투자하였으나 최근 몇 년 동안 중국의 경제 중심이 남부로 옮겨 가면서 후의 기업들은 선전과 상하이지역으로 몰렸다. 현재 이곳에는 3000여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으나 삼성과 LG 등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 중소기업이다. 1987년까지 산동성에는 한건의 한국기업투자도 없었으나, 1988년초 중앙정부의 새 정책 비준 이후, 1988년에 3건이 발생한 이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