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전강의紅衛兵 論爭에대해...?담당교수:?학과 :?학년:?학번 :?이름 :■차례/홍위병 논쟁에 대해...▶들어가며1. 文化大革命문화대혁명의 배경, 발단, 전개과정, 평가2. 紅衛兵홍위병의 발생배경, 활동과정, 쇠퇴3. 紅衛兵 論爭홍위병 논쟁의 발단 , 홍위병 논쟁의 파장과 경위4. 결론언론과 국가권력, 언론사 세무조사, 시민운동단체와 홍위병▶들어가며...?얼마 전 소설가 이문열씨가 시민운동단체를 홍위병과 같다 라는 발언으로 파문이 일었다. 우리나라에서 홍위병이 논쟁거리가 된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러한 홍위병 발언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에 대해, 또한 과연 그러한 발언이 옳고 그른 지의 여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홍위병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며, 홍위병이 어떤 사건과 계기를 통해 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씨의 홍위병 발언은 시민운동단체를 발끈하게 만들었으며 그에 따라 시민운동단체는 이문열씨의 작품을 반환하며, 장례식을 치르는 등 강경한 대응을 펼쳤다. 이 사건은 분명 시사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홍위병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홍위병을 알아보기에 앞서 홍위병이 등장하게된 배경인 문화대혁명을 살펴본 이후 중국에서의 홍위병의 성격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어째서 이문열씨의 발언이 그토록 시끄러운 파장을 가져왔는지에 대해 우리나라의 언론史에 대한 개괄적인 요약과 더불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 후에 시민운동단체를 홍위병 같다고 발언한 이문열씨의 발언의 옳고 그름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개진할 것이다.1.「 文化大革命 」 이란?1966년부터 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모택동(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으로써 모택동이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홍위병)운동을 일으키고, 그 힘을 빌려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한 일종의 권력투쟁이다.?문화대혁명의 배경문화대혁명의 배경은 19에 복귀한 후부터 문화대혁명의 정신은 여러 측면에서 공격받기 시작하였다. 모택동을 지지하는 세력은 이데올로기 계급투쟁 평등주의 배외주의를 강조한 반면, 주은래와 덩샤오핑을 지지한 세력은 경제성장 교육개혁 실용주의 외교노선을 주장하였다.말년에 모택동은 두 노선을 절충한 후계자를 물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1976년 9월 모택동이 사망하고, 화국봉(華國鋒)에 의해 모택동의 추종자인 4인방(四人幇:王洪文, 張春橋, 江靑, 姚文元) 세력이 축출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977년 8월 제11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그 종결이 선포되었다.?문화대혁명의 평가문화대혁명은 한때 만민평등과 조직타파를 부르짖은 인류역사상 위대한 실험이라고 극찬을 받았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문화대혁명의 餘毒은 아주 깊었다. 우선 黨政면에서 많은 정치위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실각 또는 강증되었으며 특히 實務派에 속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실각 숙청당하고 살해되었다. 또 중앙과 지방의 각계 지도적 인물의 희생된 숫자는 공식통계에서만도 70여만 명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외에도 관료, 지식인, 문화인, 교육자들이 당한 공포와 불안 좌천과 박해 등은 이루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또 열광적으로 모택동을 찬미하였던 홍위병의 청소년들도 문화대혁명 말기에는 오히려 害黨分子로 배척받았으므로 사회에 남았던 것은 오직 정치에 대한 불신, 불안, 공포가 문혁의 종식과 함께 끝나지 않고 이후에도 정치, 경제, 사회, 교육분야에 계속되어 亂動의 내면적 요인이 되었다. 실로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과 파괴가 중국의 근대화를 20년 내지 30년 후퇴시켰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주요한 요점에 대한 간략한 평가는 첫째, 잘못된 이론과 그 이론의 지도 하에 진행된 잘못된 실천이 전대미문의 사상적 혼란을 조성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믿음을 크게 약화시켰다. 둘째, 중국공산당의 조직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권기구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셋째, 국민경제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소집되어 모택동을 면접하였는데 많은 때에는 그 수효가 250만 명에 달하였으므로 수도 북경은 대자보, 슬로건, 모택동의 깃발과 초상화의 물결 속에 홍위병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홍위병은 소위 四舊(舊思想, 舊文化, 舊風俗, 舊慣習) 타파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古蹟, 遺物, 墓地등을 함부로 파괴하였으므로 일반 노동자와 농민들의 큰 반발을 초래하였다. 홍위병의 광란이 계속되자 實務派에서도 각급 지방조직을 통하여 역시 같은 홍위병을 조직하여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사회는 홍위병 광란이 계속되면서 상호간의 유혈충돌이 전국 각지에서 수없이 발생하였다. 마침내 黨政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사회는 극도의 혼란 , 불안, 무질서의 상태 속으로 전락되었으며 경제는 거의 파탄상태에 빠져버렸다. 전국에 걸쳐 촌락과 도시, 성 등의 기존 당 체제를 전복하였다. 그러나 이들 조직은 곧 자기들끼리 다투기 시작하였으며, 서로 자기들이야말로 모택동 사상의 진정한 대변자라고 주장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조직의 내분이 증가하는 한편, 산업생산이 중단되고 도시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모택동은 최후수단으로 그리고 그가 가장 꺼리고 있던 방법이었던 군의 개입을 결정하고 1967년 1월에 인민해방군의 개입을 요청하였다. 모택동의 요청에 의해 인민해방군은 중국전역에 출동하여 당과 정부 기능의 미비로 야기된 권력의 공백을 메꾸고 홍위병의 난동을 진압하였다. 이를 계기로 홍위병 운동은 점차적으로 쇠퇴하였다. 이와 같이 관제 홍위병의 동원과 광란에 의해 實務派를 제거 숙청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의 당권 장악은 바로 文化大革命이 외면적으로는 혁명이념파의 승리였고 그 승리에 의해 혁명은 종식되었다.?지금까지 홍위병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 대해 거시적으로 문화대혁명의 배경과 전개과정 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이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고, 또 문화대혁명이라는 대 사건에 홍위병이 어떠한 배경으로 등도함으로써 생기는 비극적 소모를 피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래도 간간 이 떠돌던 쿠데타 설은 그 잔여에너지의 작동을 느끼게 했다.92 년에 성립된 김영삼 정권은 처음 패퇴해 가는 세력의 구원투수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게 위장이었다 하더라도 이 정권보다는 대항 세력시절의 농축 에너지가 많이 희석되었을 것이라 여겨 다음 선택으로 삼았다.그리고 97년 이 정권이 출범했을 때 나는 10년의 세월을 믿었다. 그 완만한 변혁의 기간에 구체제의 잔여 에너지나 대항 세력 의 농축 에너지는 거의 소진되었거나 함께 만들 미래에의 이상으로 순화되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우리 사회는 더욱 분열되고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제는 모종의 머지 않은 폭발을 예감케까지 한다.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은 이번의 충돌이 바로 그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 .이 정권과 언론을 중심으로 방향을 달리하는 힘들이 급속하게 재편되고 결속되는 느낌을 떨쳐버 릴 수 없다.국세청이 언론기업의 탈세혐의를 검찰에 고발하는 것을 3개뿐인 방송사가 모두 생중계하고 종일 그 뉴스로 화면을 뒤덮는 걸 보면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나치의 대 국민 선전 선동을 연상시킨다. 그런가 하면 아직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 남은 상태에서 그걸 바로 여당의 정권 재창출 음모로 단정하고 사생결단으로 나오는 야당에서도 단순한 정략 이상 어떤 방향의 사회력 결집이 느껴진다. 어쩌면 지난 10년 우리 사회 는 순화되고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비극을 유예해온 것에 불과하지 않은 가 하는 두려운 자문(自問)이 일기도 한다.기관사들이여, 이제라도 급제동(急制動)을 걸어라. 브레이크를 밟아라. 늦었더라도 승객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하지만 굳이 두 기관차가 충돌로 승패를 가름해야 한다면 나는 언론쪽의 승리를 기원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권은 한 시대의 정치제도가 빚어낸 가변적 현상이지만 언론 은 제도 그 자체로서 영구적이기 때문이다. 언론이 없고 정부만 있는 사회보다는 정부 가 없고 언론만 있는 사회를 선택하겠다하방(下放)시켜 강제노역에 종사시키고, 대작 낙타상자 의 작가 라오쓰(老四)를 끌고 나가 사흘 뒤에 시체로 발견되게 했다.그 다음 요즘의 시민운동에서 이따금씩 홍위병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소수에 의한 다수 위장이다. 몇 명이 어떻게 모여 이루어진 단체인지 모르지만 만들어졌다 하면 그 즉시로 익명의 다수를 위장하고 대표성을 주장한다. 며칠 전 야당 당사 앞에서의 시위에서는 160여 개의 단체가 집결했다고 하는데 텔레비전 화면으로는 회장 부회장만 다 와도 그보다는 수가 많을 성싶었다.비전문적 정치논리에 의지한 전문성 억압도 홍위병식 특징이다. 지난번낙선운동은 특정한 정치인들만 겨냥했고, 어떤 안티운동은 특정 신문만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렇게 하기로 한다면 다른 분야인들 운동의 대상이 못될 까닭이 없다.대학에서 가르쳐서는 안될 교수를 내쫓는 운동, 노래 불러서는 안될 가수를 무대에 서지 못하게 하는 운동, 읽어서는 안될 책을 쓰는 작가로부터 몽매한 독자를 보호하기 위한 운동, 수구적인 감독에게는 영화 만들 기회를 주지 않기 운동 등은 어떤가.특히 안티운동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공격성과 파괴성도 우리에게 홍위병을 연상시킨다. 흑백논리에 바탕해서 그렇겠지만 그들은 공격 대상에게 반론이나 회복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특히 웹사이트에서 오가는 공방을 보고 있으면 공격성을 넘어 섬뜩한 살기(殺氣)까지 느껴진다. 따라서 그들의 생산물은 언제나 파괴와 부정이다. 창조와 통합은커녕 승인과 조화 같은 당연한 지향도 그들 속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마지막으로 요즘의 이런 저런 시민운동에서 홍위병을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자주 그들의 견해가 정부 혹은 정권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서 정부가 이미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따로 시민운동으로 옥상옥(屋上屋)을 세울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태연스레 정부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운동을 보게 되면 절로 어떤 이면적인 연계를 억측하게 된다.거기에다 그들을 더욱 불리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의 정치상황이다.아직껏 확고
중국고전강의禮와 無爲自然의 변질■차례/ 禮와 無爲自然의 변질▶들어가며...유가와 도가의 그릇된 수용과정에 초점, 방향제시1. 儒家(1) 禮 란 무엇인가? - 과거 전통사회에서의 예의 위치(2) 주대에 완성된 예의제도 - 周禮, 禮記, 儀禮, 禮樂(3) 변질 - 통치계급의 수단으로서의 예, 주노근성, 개인의 주체성 말살2. 道家(1) 무위 - 형이상학적, 고차원적인 정신적 질서 추구(2) 해탈의 도 - 자아와 의지, 욕구 소멸(3) 변질 - 아큐정전3. 결론내 자신에 잠재된 변질 요소, 내용정리▶들어가며...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의 차이에 대해서 하나하나 따져보는 작업은 그 범위가 매우 넓다. 필자가 주목한 점은 유가의 예 와 도가의 무위자연사상이 어떠한 형태로 변질되었는지에 대함이다.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이 부정적인 사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가운데 변질되고 왜곡된 점에 주목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의견을 개진해 나가려 한다. 중국민 나아가 동양문화권 사회에서 유가와 도가사상이 꼭 긍정적인 수단으로써 그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음에 초점을 맞춰보았다.1. 儒家(1) 禮 란 무엇인가?유학은 禮 개념으로부터 시작하여 공자사상의 중심인 仁에 이른다 하였다. 그렇다면 먼저 예가 무엇인지 전통사회의 예와 오늘날의 예 개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거 중국 전통사회에서의 예는 오늘날 예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먼저 오늘날의 예의 개념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보자면 오늘날의 예는 일상 생활 속의 기본적인 문명행위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사회 속에서의 예 개념은 이와는 다소 상이하다. 중국 전통사회는 예의 문화, 예의 정치, 예의 역사를 구현한 사회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예의 제도가 그 사회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일상생활 속의 기본적 문명행위로 규정되는 오늘날의 예와는 달리 과거사회에서의 예는 인간 본능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즉, 예는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는 작용을 하며 사람의 주관적 욕구와 객관적 것처럼 仁의 실현도 마찬가지로 禮로써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2) 周代에 완성된 예의제도(周禮, 禮記, 儀禮, 禮樂)주례에는 상고 시기, 국가가 형성된 시기의 예의제도와 정치제도의 일치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국가의 제도 등 어느 영역을 막론하고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예의 기본 정신으로 꿰뚫고 있으니 즉 천지인륜과 상하존비의 우주질서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또한 예기에는 주례와 의례에 기초하여 예의 형식에 관한 규정을 이론적으로 해석 설명하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부딪히게 되는 예의 문제들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예의 제도 또한 심미적인 예술 정신을 함축하고 있었는데 예가 사람들의 경건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樂은 바로 이런 심정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즉, 예의 본질은 상하 귀천의 존비등급을 구별하는데 있으며, 樂의 정신은 각종 등급과 무리 사이의 관례를 조절하는데 있었다. 등급이 분명하면 사람들은 각기 공경하는 바가 있게 되며, 관계가 화순하면 사람들은 서로 친하고 서로 사랑하게 되니 예악이 구비되면 천하가 크게 다스려지게 된다고 생각했다.즉, 사람의 행위를 절제하는 작용으로 본다면 예는 일종의 외적 규정이다. 그것은 상하 등급과 순서에 따라서 사람들이 응당 이행하여야 할 사회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활동하는 행동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악은 예술적인 형식을 통하여 이런 예의 규정을 사람들의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자각의식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공자는 이러한 주대의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라고 하였다. 인의 중요한 개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성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 주대의 예로 돌아가는 것은 도덕성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논리적 설명이 가능하다. 후대의 중국민으로 대표되는 동양은 이러한 공자의 사상에 거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예 의 중시 성향은 적잖은 문제점을 지닌 채 변질되는 경향을 보인다.들을 먹고 먹히는 관계로 만들어 버린다. 예치의 변질 가운데 근대에 들어 중국 내 지식인들이 가장 염려하고 계몽하고자 애썼던 부분이 바로 예치로 말미암은 중국민의 주노근성이었다. 즉, 동일한 인격체 내에 주인근성과 노예근성이 모두 공존한다는 것으로 이와 같은 주노근성은 예치가 그 원인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꽤나 타당성이 있다. 예는 상하, 존비의 등급을 구별하는데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신하는 임금 앞에서는 奴에 해당하지만 가정에서는 主. 즉, 아버지, 가장으로써의 신분을 지닌다. 이처럼 노예의 신분에서 자신보다 낮은 계급에 대해서는 주인이 되거나 또는 그 반대상황에 만족하며 이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 것이 중국민에게 나타나는 근성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계급에 대해서는 노예의 근성이 발휘되고 자신보다 낮은 계급에 대해서는 주인의 근성이 발휘되는 것이 어떻게 부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 신하인 자신은 예가 강조하듯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계급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복종하였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계급에 대해서 또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였을 것이다. 예가 나타내는 바가 상하의 구별이고 그러한 상하의 구별 속에서 주종 관계의 설정이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당연한 모습이었음은 분명하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개인이 독립적 개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집단구성원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존재로써만 개인이 인식되고 나아가 개인은 집단의 역할, 즉 신분으로써 개개인의 이름이 규정되는 문제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치질서로 인한 주노근성이 근대, 나아가 현대에까지 지속된다는 사실에 그 문제점이 있는 것이며 모순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태도에 그 문제점이 있는 것이고, 모순이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중국 전통 역사 2000년간 예치는 줄곧 중국 전통사회를 유지시키는 근간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진대에 법치를 강조하였으나 그 로 무위에서야말로 완성이 있다 고 주장했다.이와 더불어 강의시간의 자료를 참고하면 무위는 차원 높은 정신적 경계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무위는 그 속에 자연이 포함되어 있다. 도가에서의 자연은 정신생활상의 관념으로 스스로 그러한,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정신의 독립이다. 정신이 독립해야 비로서 자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초월적 경계이다. 그래서 형식적, 외재적인 것을 없애려 하였고 이로부터 해방되어야 비로소 자연이라고 하였다. 도가는 이런 의미에서 무위를 말하였다. 이러한 형식적이고 외재적인 것에 대한 거부는 자연적, 자유자재 적인 것을 지향함으로 그 실마리를 풀어나가는데 따라서 이는 형이상학적 관념이며, 고차원적인 정신적 질서이다. 이러한 높은 정신적 승화를 일컬어 해탈 이라는 어휘로써 표현해 보고자 한다.(2) 解脫의 道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바 해탈의 방법은 한결 같이 바로 자아를 버리고, 의지를 버리고 욕구를 소멸하라는 것이다. 노자와 장자는 자연을 아주 숭상하지만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자연은 물리적인 자연계와는 다르다. 이와 같은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하기 위한 깨달음에 대해 장자는 장자의 첫 편인 소요유 에서 간략하나마 언급하고 있다. 장자는 鯤에서 鵬으로 변해 구만리 창공에 날아오르고 거침없이 드넓은 남해로 날아 완전히 협소한 한계를 초월한다는 우화를 말하고 있다. 장자는 자신의 의지와 욕구에 집착하면 자신의 시야를 제한할 수 있다며 이런 생활은 無知한 것이고 때문에 가소로운 것이기도 하다. 라고 하였으며 오직 의지와 욕구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심신의 해방을 얻을 수 있으며 다른 하나의 새로운 우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노자 역시 의지와 욕구에 집착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인생은 물질에 의해 부림을 당하는 인생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사람의 의지와 욕구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객체에 개입할 때 생기는 정상적 반응이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객관 활동 또는 객관 사물에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의지와 욕구는 실제역으로 말하자면 도가 사상에서 주장하고 있는 주체욕구와 자아의 소멸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저해하며 생존조건을 개선하는데 있어 걸림돌이 됨과 동시에 생존상황을 변화 발전시키는데 있어 장애가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논리가 가능한 이유는 수용자가 도가 사상에서 언급하고 있는 해탈에 대해 그릇되고 잘못된 인식의 틀로 그것들을 받아들인 것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노신은 그의 작품 아큐정전에서 이와 같은 도가 사상에 대한 잘못되고 그릇된 인식의 틀 속에 빠진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대 중국민들의 사고체계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주인공 아큐라는 인물의 성격은 도가에서 주장하는 주체의식과 자아를 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그릇되게 인식한 인물이다. 그는 도가사상의 그릇된 인식으로 정신승리법(즉,마비)을 얻는 동시에 스스로를 기만하고 남을 속인다. 아큐의 일생은 철저하게 실패한 인생이었는데, 그가 조씨 나으리 에게 뺨 한대를 얻어맞을 때부터 그 후 형장에서 동그라미를 그리고 끌려나가는 것을 끝으로 할 때까지, 그는 일생동안 손해와 업신여김을 실컷 받았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것은 그는 조금도 이런 것들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매번 실제적인 실패를 그는 모두 심리적인 승리로 모두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실패할수록 더욱 성공한 것이고, 이것의 근원은 하나의 방법 정신승리법인 것이다. 한번은 아큐와 건달들이 다투게 되었는데 아큐는 변발을 잡혀 벽에 대 여섯 번이나 짓 찧였고, 건달들은 그제서야 승리를 얻은 것에 매우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돌아갔다. 아큐는 잠시 우두커니 서서 마음속으로 생각하길 자식놈에게 얻어맞은 걸로 치지. 요즘 세상은 돼먹지 않았어 그리고서야 만족해서 의기양양해 가버린다. 적수와 만났을 때, 힘이 딸려 패하게 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잠시의 패배는 결코 영원히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며, 희망적인 행위는 마땅히 실패를 교훈 삼고, 더욱더 분발하여 상대를 눕혀버릴 때까지 힘쓰는 것이다. 그러나 아큐는 더욱 분발하여 자신의 뜻을 파묻다.
목차1. 서론1) 시대적 배경2. 본론1) 무대 배경 - 사상과 관련하여2) 사상과 성격상의 특징3) 등장 인물 분석4) 의 제목에 대한 의미5) 사건 진행 과정6) 구운몽의 한계점3. 결론1) 구운몽의 문학적(文學的) 가치2) 구운몽의 문학사적(文學史的) 가치3) 작품의 의의1.서론작가 연구와, 구운몽 연구사와 관련된 서론에서의 통상적 논문 내용은 삭제했다. 대부분의 연구에서 그 내용이 상동하므로 강의 중 발표문을 통해 작가연구 및 연구사 부분은 대체하고자 하며, 발표문 내용과 비교 보다 심층적으로 다루고 싶은 부분들에 대해 첨가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내용의 방대함으로 관심 부분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을 시도하려 하였다.1) 시대적 배경문학작품은 그것을 산출해 낸 역사적, 사회적 요인들로부터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유교를 국교로 표방한 조선시대에는 종법(宗法)의 원칙이 중시되었고, 그것은 왕실 뿐 아니라 조선 전역에 광범위하게 보급되어갔다. 왕실의 정통성 문제나 왕위계승에 관련된 문제가 정국 변동에 영향을 미친 사례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서포가 활동한 현종 숙종때는 당쟁의 연속이었다. 당인들은 그들의 정치투쟁을 위하여 왕실의 예민한 문제들을 거리낌없이 폭로하였고, 이것을 이용 반대 당파를 파멸시킬 수 있었다. 숙종은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의도대로 개편하기 위했으며, 궁중 내부의 부당한 처분을 합리화하고, 반대파 저항을 해소하기 위해 당쟁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경종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숙종은 이미 정국개편을 의도하고 있었다. 그는 노론을 밀어내고 소론을 등용하였다. 숙종 후궁 장씨를 총애하게 되었고, 장씨의 오라비 장희재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장씨가 왕자 윤을 낳았다. 숙종은 윤을 원자로 책봉하였다. 이때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숙종대로 서인의 전횡을 누어 있는 금강경 한 구절은 이를 잘 보여준다. 에서 ‘공’사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곳은 육관대사가 성진에게 금강경 큰 법을 베풀어 깨닫게 하기 위해 꿈을 꾸게 한 부분이다.일체의 인위적인 법은 마치 꿈과 환영과 물거품과 그림자와 같은 것이니라.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은 것이어서 응당 이와 같이 볼지니라.에서 양소유가 전생의 팔선녀와 향략을 누리는 생활을 빼버리면 ‘공’사상의 강조도 빛을 보지 못하고 만다. 그러므로 이 공사상을 드러나게 하는데 도교는 매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서포는 양소유의 생활상을 ‘空卽是色’, ‘色卽是空’에서 ‘色’으로 보고, 성진은 ‘空’으로 대했던 것이다. 그의 스승 육관대사는 성진을 수제자로 키우기 위해 잠시 꿈속에서 허영되고 타락한 유가적인 생활을 경험하게 한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성진은 부귀영화가 덧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더욱 불도 정진에 전념하게 된다. ‘空’과 ‘色’은 서로 나눌 수 없는 관계이며, 이 두 세계가 서로 각기 떨어지게 되면 심각한 괴리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두 개념이 조합을 이룰 때는 불교도들은 극락왕생하게 되고, 유교도들은 천지조화에 참여하게 된다. 불교에서의 중도사상, 유교의 중용사상, 도가의 충기는 바로 이에 해당하는 사상인 것이다. 양소유의 생활상은 ‘色’적인 것이고 성진은 ‘空’적인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만물은 근본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 원리이듯 양소유는 이전의 성진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소설은 흥미위주로 쓰는 것이지만 은 서포가 윤씨를 위로하기 위한 단순한 의도에서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을 남해에서 쓴 것이 확실하다면 생애를 마무리 짓고 있는 육신의 소리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 나타난 양소유의 엽색적인 행각을 보면 부패한 양반 유가들의 생활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고 서포가 ‘色’?‘有’적인 생활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상호간의 유기적인 연결로 보아야 된다는 것을 ‘空’ 사상으로 나타낸 것이다.에서 삼교일치는 중도사상의 경지이다. 중도는 유교의 중 이러한 불일치는 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불교사상 그 자체가 아니라 불교사상에 의한 유교사상의 비판과 부정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은 인간의 근원적이고도 보편적인 욕구가 무엇인지를 시대적?사상적으로 추이에 밀착시켜 생동감 있게 반영하면서 이와 아울려 유교사상의 한계에서 오는 허무의식을 사상적 전환을 통해 극복하자는 의지를 보여준다.에 드러난 가장 큰 특징은 불교의 금욕주의와 유교의 도덕규범을 불합리하다고 규정하고 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선 주인공 양소유는 무엇보다 먼저 불교의 법도를 위반한 이단자이다. 그는 처음으로 팔선녀들을 만나본 날 밤 세상에 태어나 생활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며 자기가 믿어오던 불교의 도에 대하여서도 강한 의문을 품게 된다. 양소유가 천상에서 인간 세상으로 추방된 중요한 원인도 만나지 말아야 할 선녀들을 만나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고 마음속에 동요를 일으켜 불교의 교리를 어긴 데 있다. 인간 세상에 태어난 후 그는 전생에서 지은 ‘죄’를 씻기 위해 불교의 교리에 따라 뉘우치고 고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는 다른 유교의 교리대로 살아보려고 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그가 유교경전을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보러 서울로 가는 것만 가지고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교의 착실한 신봉자로도 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인간의 자유로운 생활과 구속 없는 사랑을 주장하고 있다. 양소유는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가는 초행길에 유교 도덕규범을 난폭하게 위반하고 선녀의 후신인 진채봉과 계섬월을 만나 사랑하게 된다. 양소유와 여러 여인들과의 자유로운 사랑관계를 통하여 본인들의 의사에 따르는 애정윤리의 우월성을 합리화하고 있다. 이것은 봉건적 혼인제도를 부정하고 인간들의 구속없는 애정윤리를 주장한 것이다.또한 이 작품에는 양소유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성격을 다면적으로 해명함으로써 장편소설 형식의 제반 특성을 만족하고 있다. 작품에서 양소유는 가정과 사회생활의 폭넓은 사건 속에서 다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성격은 진실한 가운데 그 ‘육(六)’이 가지는 의미가 따로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육관’이란 표현으로 상정될 수 있는 연관이 가능한 유일한 언어에 ‘육관음(六觀音)’이 있다. 더구나 이 석자는 순연히 불교의 용어이다. ‘육관음(六觀音)’이란 ‘육종관세음보살(六種觀世音菩薩)’의 줄임말이니, 그 여섯 형태의 관음(觀音)이란 다름 아니라 ‘대비관세음(大悲觀世音)’?‘대자관세음(大慈觀世音)’?‘사자무외관세음(獅子無畏觀世音)’?‘대광보조관세음(大光普照觀世音)’?‘천인장부관세음(天人丈夫觀世音)’?‘대범심원관세음(大梵深遠觀世音)’을 지칭한다. 이 보살들은 각각 도맡아 다스리는 역할이 있다. 그 역할과 기능이 그렇게 각각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여섯 관음이 한결같이 중생의 번뇌를 제도한다(즉 고통에서 건져 구한다)는 점에서 서로 한가지로 통한다.에서 불승(佛僧)으로 고매한 경지에 이른 육관대사는 불제자 성진의 세속적 큰 번뇌에서 건지어 제도한다. 그 덕이며, 그 고행은 육관음 보살다운 것이다. 에서 형상되고 있는 육관의 모습과 그 경계는 적어도 보살의 경지이거나 또는 그 이상이다. 이로써 ‘육관대사’의 명칭도 ‘육관음 보살’의 뜻을 살려 가차(假借)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③ 팔선녀팔선녀는 성진과 함께 남녀의 정욕을 탐하고 속세를 흠모하다 인생무상을 깨닫는 인물들이다. 작품 에서 이들의 역할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에 등장하는 팔선녀는 무속에까지 들어와 인간을 즐겁게 해주고 부귀영화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신이 되었다. 옆의 그림은 그네를 뛰며 놀기 위해 인간세상에 내려와 있는 여덟 명의 선녀들을 그렸다. 팔선녀는 극락세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온 것이다.팔선녀가 이생에서 환생한 각 인물을 성진과 만나는 순서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채봉 (秦彩鳳): 진어사의 딸. 양소유의 1첩.(淑人)진나라 사람으로 버드나무를 읊은 시(양류사)를 통해 양소유와 만남. 난리통에 헤어졌다가 나중에 궁중에서 난양공주의 시녀가 되어 다시 양소유와 재회바탕으로 조화로운 상하와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이 여덟 명은 각기 네 그룹으로 나뉘어서 유교의 덕목들을 상징하고 있다.첫 번째 - 정소저(제1부인), 난양공주(제2부인) 인덕(仁德)을 상징두 번째 - 진채봉(제3부인), 가춘운(제4부인) 신의(信義)를 상징세 번째 - 계섬월(제5부인), 적경홍(제6부인) 기예(技藝)를 상징네 번째 - 심요연(제7부인), 백능파(제8부인) 무용(武勇)을 상징제 1?2부인은 정실(正室)로서 다스리는 자의 도리를 나타내고, 제 3?4부인은 정실 부인을 모시는 사람들로서 신하의 도리를, 제 5?6부인은 기생 출신으로 노래와 춤 등의 예술적 재능을, 제 7?8부인은 빼어난 무예와 도술로 변방의 오랑캐를 물리친 무예와 용기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들 부인 여덟은 '유교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이상적인 덕목들'을 의미한다. 좀 거칠게 말하면, '인간 세상에서 흔히 추구되는 욕망이 형상화 된 것'이다. 이 '욕망'(덕목)을 양소유가 모두 거느리게 된다는 것은 유교 사회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계층의 도를 그가 구비했다는 말이고, 이들을 아무 갈등 없이 거느렸다는 것은 천하를 제대로 다스림, 즉 유교의 이상을 완벽하게 다 실현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물론 인물 묘사에 있어서 보다 고차원적인 표현 기교인 간접적 수법을 쓰지 못하고 인물의 외형 위주로 특별한 직접적인 방법을 썼다는 점과 ‘문장은 이 백 같고...’, ‘칼 쓰는 법이 귀신같아서...’, 등 매너리즘에 젖은 표현이 없지는 않으나 여타의 고대 소설에 견준다면 표현 기교 역시 뛰어나다 하겠다.이밖에도 서포(西浦)는 의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통하여 당시 사회의 모순성을 ‘아이러니칼’하게 폭로하여 이상적(理想的)인 세계를 구성하려는 욕망을 충분히 허구화(虛構化)하고 있다. 또한 은 고대소설의 커다란 결함인 ‘나레이션’의 조잡함과 심리적인 추리의 묘사 부족 등을 훌륭히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자못 문학적으로 근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의 구성에 있어 주목되는 것은 초시간 초림
1. 5月 5日 端午·단오의 어원단오는 일명 수릿날[戌衣日·水瀨日],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번째를 뜻하고, '오(午)'는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초닷새'를 뜻한다. 중오는 오(五)의 수가 겹치는 5월 5일을 뜻하는 것으로 양기가 왕성한 날로 풀이된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따르면 홀수[奇數]를 '양(陽)의 수' 라 하고, 짝수[隅數]를 음(陰)의 수 라 하여 '양의 수'를 길수(吉數)로 여겼다. 예컨대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설(1월1일) 삼짇날(3월 3 일)·칠석(7월 7일)·중구(9월 9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속절은 '양수(陽數)'를 '길수(吉數)'로 여기는 기수민속(奇數民俗)들이다. 이러한 기수민속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단오를 속된 이름으로 수릿날이라 한다. 술의(戌衣)란 것은 우리 나라 말의 수레다. 이날 쑥잎을 따다가 짓이겨 멥쌀 가루 속에 넣고 녹색이 나도록 반죽을 하여 떡을 만든다. 그 떡의 모양을 수레 바퀴 모양으로 만들어 먹는다. 그러므로 수렛날(술의 날)이라고 한다.·단오의 유래단오는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때 유래되었다고 한다. 굴원신하가 있었는데 충직고결하고 문장이 뛰어나 초 회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굴원의 벼슬이 높아지자 간신들이 시기하여 참소를 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그를 내치자 굴원은 「이소(離騷)」란 글을 지어 임금이 깨닫기를 빌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초 회왕이 죽고 양왕(襄王)이 즉위하여 굴원을 귀양보냈다. 그래서 비분강개하여 글로 심회를 풀다가 5월 5일에 멱락수에 몸을 던져 세상을 하직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가 죽은 날인 5월 5일에 대나무통에 쌀을 넣어 그 물에 던져 제사지냄으로써 그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이것이 단오 명절의 유래이다.또한, 그를 작은 배로 구한다는 뜻의 놀이로서 일종의 보트경기인 용선경도(龍船競渡)가 현대에 까지 전해지고 있다.·단오의 풍습-단오절은 경향 각지에서 단오 차례(茶禮)를 올리석전(石戰)·씨름·그네뛰기 등 각종 승부나 놀이가 해하여 지는 한편, 단오굿이 행해진다.참고로 단오굿에는 강원도 강릉의 단오굿, 경남 영산의 문호장(文戶長)굿, 경북 자인의 한 장군제(韓將軍祭), 경남 고성의 성황제(城隍祭)가 있다.-단오부적(端午符籍)단오날 각 가정에서 불길한 것을 제거(除去)하는 뜻에서 주사(朱砂)로 벽사문( 邪文)을 써서 문기둥에 붙이는 부적을 말한다. 일명 천중부적(天中符籍)이라고 하다. 조선 말까지의 풍속으로 관상감(觀象監)에서는 해마다 단오날에 이를 박아서 궐내에 올리었는데 이것을 문기둥에 붙었다. 『동국세시기』에 부적의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이 있다.부적에는 5월 5일 천중절(天中節), 위로는 하늘의 녹을, 아래로는 땅의 복을 얻어, 치우(蚩尤)의 신(神)의 구리머리, 쇠 이마, 붉은 입, 붉은 혀의 사백사병(四百四病)을 한꺼번에 없어져라. 빨리빨리 법대로 시행하라. 라 하였다. 이것은 한나라 제도에 도인(桃印)으로 악귀(惡鬼)를 제거한다는 단오의 옛 제도에서 온 것이다. 이 부적을 5월 5일에 붙이는 까닭은 이날이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하여 액을 물리치는데 알맞은 날로 믿었기 때문이다..참고五月 五日 天中之節 上得天祿 下得之福 蚩尤之神 銅頭鐵額 赤口赤舌 四百四病 一時消滅 急急如法令2. 십일(十日)5월 10일은 태종대왕이 돌아가신 날이다. 이날이면 매년 비가 오는데 이 비를 태종우라 한다. 태종은 재위 22년(왕위 18년, 상왕 4년, 도합22년)동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지런하시어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게으름이 없으셨다. 대정하는 날에도 은하수를 보고 날이 가문 것을 걱정하면서 내 마땅히 옥황상제님께 빌어 한바탕 비가 오게 하여 우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리라 고 하였다. 그 후 철의에서 나오자마자 하늘은 한바탕 비를 내리 퍼부었다. 그 후부터 매양 태종의 기일이 되면 꼭 비가 내렸다고 한다.3. 망종(芒種)-소만(小滿)과 하지(夏至) 사이에 드는 절기로, 24절기 가운데 아홉째에 해당한다. 양력 5월중이다. 하지 때는 일년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길므로, 북반구의 지표면은 태양으로부터 가장 많은 열을 받는다. 그리고 이 열이 쌓여서 하지 이후에는 기온이 상승하여 몹시 더워진다.-중국에서는 하지 15일간을 5일씩 끊어서 3후(候)로 나눠서, 1후(候)때는 사슴의 뿔이 떨어지고, 2후(候)매미가 울기 시작하며, 3후(候) 반하(半夏)의 알이 생긴다고 했다.장마와 가뭄대비도 해야 하는 만큼 이때는 일년중 추수와 더불어 가장 바쁜때이다. 메밀파종, 누에치기, 감자캐기, 고추밭매기, 마늘캐기 및 건조, 보리수확 및 타작, 보리수매, 모내기, 모낸 논 웃비료치기, 제초제 살포 등이다. 그루갈이용 늦콩심기, 또 대마수확이 이루어진다. 대마를 하는 농가는 모내기보다 더 바빠 대마철은 아예 잠을 못 잔다고 한다.-남부지방 농촌에서는 단오를 전후하여 시작된 모심기가 하지 이전이면 모두 끝난다. 강원도지역에서는 파삭한 햇감자를 캐어 쪄먹거나 갈아서 감자전을 부쳐 먹는다.-옛날 농촌에서는 흔히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다.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서는 하지까지 기다려도 비가 오지 않을 때 이장이 제관이 되어 용소(龍沼)에 가서 기우제를 지낸다. 제물로는 개나 돼지 또는 소를 잡아 그 머리만 물 속에 넣는다. 그러면 용신(龍神)이 그 부정함을 노하여 비를 내려 씻어내린다고 믿는다. 머리만남기고 나머지는 삶아서 기우제에 참가한 사람들이 함께 먹는다. 충청북도 중원군 엄정면목계리의 경우, 이장이 제관이 되어 한강지류의 소(沼) 속에 있는 용바위에서 소를 잡아 용바위에 피를 칠하고 소머리만 소속에 넣는다. 이때 흔히 키로 물을 까불어서 비가 내리는듯한 유사주술적인 동작도 한다.·단오장(端午粧)나쁜 귀신을 쫓는다는 뜻에서 행하던 여자들의 치장을 말한다. 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으며 붉고 푸른 새 옷을 입으며, 머리에 창포뿌리를 깎아 수(壽)자나 복(福)자를 새겨 붉은 물을 들인 비녀를 만들어 꽂았다. 이렇게 붉은 때문이다.5월5일 천중절에 위로는 하늘의 녹을 받고 아래로는 땅의 복을 얻어, 치우(蚩尤)의 신의 구리머리·쇠 이마·붉은 입·붉은 혀의 사백사병이 일시에 없어져라 빨리빨리 법대로 시행하라 -『동국세시기』·단오부채조선시대에 단오날 공조(工曹)에서 만든 부채를 임금에게 진상하였는데 이 부채를 단오선이라 한다. 공조란 공부(工部)에 속하는 기관으로 모든 생산물을 담당하던 기관이었다. 조선 말까지 행해진 풍속이다. 임금은 부채를 재상과 그 아래부서의 신하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부채의 용도로는 바람을 일으키는 용도 외에 항상 지니고 다니게 됨에 따라 장신구적 패물로 발전하였다.·단오첩단오 날에 신하들이 단오절을 축하하여 궁중에 올리는 첩자(帖字)로써 이 풍속 역시 조선조 말까지 내려오던 풍속이다. 이날은 여러 신하들이 첩자를 지어 올리어 대궐 각 전(殿)의 기둥에 붙였다. 첩자는 단오절을 축하하는 축시(祝詩)를 말한다.·단오제5월 5일 단오날에 행해지는 제의(祭儀)로써 궁중에서도 단오제를 지냈다고 한다. 쑥을 넣어 만든 떡으로 차례를 지내는 것이 상례였다. 이를 단오고사라고도 하며 성묘를 가기도 하는데, 상중인 경우에는 차례와 성묘를 하지 않는다. 또한 단오는 여름축제의 하나로써 이날은 성장의례(成長儀禮)인 석전(石戰)·씨름 ·그네뛰기 등 각종 승부나 놀이가 행해지기도 하였다.·단오물단오일에 비가 오면 곡식과 채소가 잘되지 않는다고 한다. 반대로 전라남도에서는 단오에 비가 오리를 기다리며, 이 때 오는 비를 「단오물」이라 한다.·물맞이삭신 아픈 사람이나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사람, 속병 있는 사람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약수터에 가서 약물을 마시며 그 물에 몸을 씻는 풍속이 5월에 있다. 만일 동네에 상사(喪事)나 산고가 들면 마을이 깨끗하지 않다고 해서 삼간다. 물맞이 하러 갈 때에는 몸을 정결하게 해야 영험이 있다고 믿는다. 전남지방에서는 5월에 한창 물이 올라있는 소나무의 소나무껍질물 먹기를 즐긴다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생키물 마신다」라고 한다.·동물잎을 따서 잡티가 들어가지 않게 잘 다듬은 다음, 백반가루와 함께 놓고 찧어 손가락위에 바르고 봉숭아 잎을 대고 싸서 실로 동여매고 하룻밤을 지낸다. 다음날 풀어보면 빨갛게 물이 들어있다.·대추나무 시집 보내기『동국세시기』에는 단오일 정오에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를 한다고 했다.대추나무를 시집보내는 것은 단오날 정오가 마땅하다. 단오날 도끼로 여러 과일나무의 가지를 쳐 내려야 과일이 많이 달린다. 라고 하여 대추나무 시집보내기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금기5월5일은 부부가 함께 잠자지 않는다. 이 날은 만물의 모든 기운이 치솟아 오르는 혈기왕성한 때이므로 부부관계를 하는 것은 위험하며, 이 날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에게 해롭다 하여 내버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편싸움5월 단오에는 두 편이나 서너 편으로 나뉘어 편싸움을 하는데, 전투적이고 위험하기 때문에 남성에 의해서 주로 행하여졌다. 편싸움에는 석전(石戰)과 씨름이 있다.1)석전(石戰)고구려 사람들은 굳건한 체력과 전투적인 기질을 높이기 위해 이 놀이를 행했다고 전해진다. 석전은 청소년층이 중심이 되어 마을단위로 대항전을 벌이는 것으로서 서로 돌을 던져 승패를 겨루는 상무적이기는 하나 사람이 다치고 심지어 죽기도 하는등 매우 위험한 경기이다.‘나라 풍속에 단오날에는 큰 길거리에 모여 각기 편을 지어 깨진 기와조각이나 짧은 막대기를 서로 던지거나 치면서 싸운다. 이를 석전이라 한다.’라는 『고려사』 신우전의 기록이 전해진다. 석전을 하다가 머리에 돌을 맞아 상처가 나는 것을 훈장처럼 여겼으며 자기 아들이 싸움에 패하여 동망하여 오면 부모들은 대문도 열어주지 않고 꾸짖어 되돌아가 싸우게 했다고 한다. 이는 석전은 일종의 성장의례의 하나로써 역할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선조 말기까지 행해졌으나 일제 하에서 금지되어 그 이후부터 볼 수 없게 되었다.2)씨름장정이나 소년들이 잔디밭이나 모래 위에서 서로의 힘을 겨루는 놀이로 지금도 곳곳에서 씨름대회가 열리고 있다. 삼국시대때는 이 날 씨름에 장원한 사 한다.
.들어가며삼국유사와 그리스 로마신화에 드러난 여성상에 대한 접근은 고대 동·서양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접근일 것이다. 문학과 역사에 대한 구분이 모호했던 고대의 세계에서 삼국유사와 그리스 로마신화는 역사라는 서술양식과 더불어 문학이었다. 문학은 그 문학이 쓰여진 시기의 시대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담고 있다. 따라서 문학을 통해 작품이 창작된 당시의 사회상(여성상을 포함한)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의 여성상이 두 문학작품 속에 어떻게 발현되었는지에 대해 초점을 두기보다는 이러한 두 문학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여성상에 대해, 또는 그 속에 나타난 성 이데올로기에 대해 대조보다는 비교로써 각각의 작품을 어떻게 현재적 관점에서, 또는 페미니즘 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에 초점을 두었다.『삼국유사』의 「주몽신화」작품줄거리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성은 고씨(高氏)요 이름은 주몽이다. 이보다 앞서, 북부여 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피해 가고, 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그 때 한 여자를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만나 물으니, "나는 하백의 딸로 이름은 유화다. 동생들과 놀러 나왔다가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를 만나 웅신산 밑 압록 가의 집에서 같이 살았는데, 그는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부모가 중매 없이 남을 따라 간 것을 책망하여 여기에 귀양보냈다."고 하였다.금와가 이상히 여겨 유화를 집에 두었더니 햇빛이 비쳐 몸을 피해도 쫓아가며 비추었다. 이로 해서 잉태(孕胎)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왕이 버려서 개, 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으며, 길에 버리면 소나 말이 피해 가고, 들에 버리면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 왕이 깨뜨리려 해도 깨어지지 않으니 도로 어미에게 주었다. 어미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기골(氣骨)이 영특하고 기이하여 7세에 벌써 보통 사람과 다르게 뛰어났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百發百中)하였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기 있었는데, 주몽과 같이 놀면 그 재주가 늘 따라가지 못하였다.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하되 "주몽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니, 만약 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했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은 좋은 말을 알아보고 조금씩 먹여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니, 왕은 살찐 것을 타고 여윈 것은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의 어미가 왕의 다른 아들들이 여러 장수와 함께 주몽을 장차 해치려 함을 알고,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하니, 너의 재주와 모략으로 어디로 간들 좋지 않겠는가, 속히 일을 꾸며라. 하였다. 이에 주몽이 세 사람의 벗과 엄수에 이르러 고하되,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다. 오늘 도망하고 있는데 뒤쫓는 자가 따라오니 어찌하겠는가? 하니, 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주었다. 주몽이 건너자 다리는 사라지고 쫓아오는 군사들은 건너지 못하였다.졸본 주에 이르러 도읍(都邑)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위에 초막을 짓고 국호(國號)를 고구려라 하였다. 고씨로 성을 삼았으니, 그 때 나이 12세였다.삼국유사의 주몽신화에 나타난 유화라는 여성은 아들 주몽을 위해 헌신하는 모성이 강한 여성으로써 주몽신화의 주변적 인물에 불과하다. 이러한 유화라는 여성을 새로운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한 김혜순의 「柳花」라는 시를 통해 그 작품 속 유화라는 여성을 어떻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 개인적 감상을 토대로 하여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 보았다.柳花(유화)바람도 없는데 능수버들 이파리 하나가 흔들려, 능수버들 이파리 두 개가 흔들려. 능수버들 이파리 세 개가 흔들려. 능수버들 이파리 네 개가 흔들려. 바람도 없는데 능수버들 한 그루 요란하게 흔들려. 아무도 없는 강가에 능수버드나무 가득 차서 마구 흔들려.저 멀리 몽골 초원쯤에서 그가 오고 있어, 그의 말 발굽 소리가 내 머리카락 끝을 잘게 잘게 흔들어. 나는 눈을 뜨고 기도를 드려. 내 마음을 용서하소서. 기도를 하면서도 벌벌 떠는, 와들와들 떠는 능수도록 능수버들을 응시하고 있어능수버들 이파리는 바닷속의 날치떼 같아. 그들은 번쩍여. 능수버들의 몸통쯤으로 벼락이 지나가고 있어. 누가 마른하늘과 능수버들 이파리들을 용접하고 있나봐. 사방으로 터지는 초록. 초록 불꽃이 허물어지고 있어, 초록으로 끓는 용광로를 엎은 것 같아.막아주소서. 나는 크게, 더 크게 중얼거려. 초록색 섬광 한닢이 두 눈에 붙어버렸나봐. 나는 눈뜬 봉사야. 말발굽 소리는 크게, 점점 크게 들려. 말 탄 그가 강을 건너고 있어. 마음이 윙윙 소리를 내도록 나는 전력을 다해 기도해. 이젠 소리치면 기도해. 제발, 제발 막아주소서.능수버들이 펄쩍펄쩍 뛰고 있어. 내 발 밑에는 시퍼런 강물. 나는 낭떠러지 위에서 중얼거려. 내 두눈에서 녹즙이 쏟아져. 채찍이 휙휙 말 옆구리에 닿는 소리. 초록 비늘이 사방에서 튀고 있어. 나는 대낮을 지나 저녁이 되도록 저 건너 능수버들만 쏘아보고 있어. 중얼거리고 있어.강 아래 한 여자가 양말을 벗고 있어. 양말은 너무 길어 벗어도 벗어도 다 벗을 수 없어. 여자의 머리칼은 모두 타오르는 능수버들잎이야. 갑자기 여자가 고개를 돌려. 갑자기 햇빛도 고개를 돌려. 그러더니 여자가 기나긴 혀로 나를 낼름 삼켜버렸어. 초록으로 캄캄하게 어지러운 중에 빛으로 만든 알 하나가 눈 속을 빙빙 돌고 있어. 여기가 어디야? 내가 초록 말을 타고 강바닥을 달리고 있어.페미니즘 관련시는 탈중심의 중심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이미 많이 기울어진 중심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조금은 과도하게나마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큰 무게를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시는 일견 과격하거나 혹은 전투적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선이 남성성 내지는 여성성의 스테레오 타입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남성성에 대한 저항의 무기로써 남성성의 일반적인 특성을 빌리게 되는 모순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과도기적 상황은 조금 안타까운 감이 없지 않다.개인적으로 여성의 시는 여성적 특성에서 나온 언어로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성성에 비이성), 부드러움(혹은 나약함), 포용심(혹은 비굴함), 혹은 순수함(혹은 순진함)의 언어로 쓰여져 여성을 주체적 자아로 상승시켜야 비로소 진정한 여성시가 될 것이다.流花, 『삼국유사』중 주몽신화 편에서 하백의 딸로 능수버들 우거진 강가에 소풍 나갔다가, 자신을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소개하는 말 탄 남자에게 유혹당해, 웅신산 아래 압록가 집안에서 사통한 후 남자가 떠나 버리자 중매 없이 혼인한 것을 책망하는 부모에게도 버림받아 태백산에 유배당하는‘힘없는’여자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시 기득권이었던 남성적 시각에서의 기술이고, 시인은 그녀의 육체의 시각으로 새롭게 기술(시쓰기)해내고 있다. 여자의 풀어헤친 머리카락과 닮은 능수버들에 유화와 자신을 집어넣고 멀리 몽골 초원쯤에서 오고 있는 말 탄 남자(해모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녀를 데려다 먹여주고 키워주는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즉 능수버들의 흔들림에 화답해줄 이성일 뿐이다. 욕망에 환장한 미친년의 풀어헤친 머리카락 같은 능수버들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육체가 내뿜는 열정과 내밀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흔들린다. 바람이 불어야만 꼭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김선우, 「얼레지」부분)라고 김선우 시인이 말했듯이 바람도 없는데 능수버들 한 그루 요란하게 흔들 리고 있는 것은 기존의 남성에 의한 반응으로서의 욕망이 여성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몸짓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시적 자아의 관심은 저 멀리 몽고 초원쯤에서 내려오고 있는 말탄 사내라기 보다는 초록 불꽃을 내며 스스로 내밀하게 타오르고 있는 능수버들 에 가 있는 듯 하다. 그리하여 말탄 사내의 역할은‘신화의 유화’가 그러하듯 주변인물에 불과하고 중심인물은 시적자아와 능수버들 이 된다. 남자주인공을 사이에 두고 진부한 삼류 신파극을 벌리려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에 자극되어 가는 시적 자아의 내밀한 곳새로운 극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남성중심의 사유가 쌓아올린 신화라는 제단을 내리고 다시 새로운 사유의 신화를 쌓아내고자 하는 언어는 해모수에서 주몽으로 이어지는 신화의 징검다리에 불과하던 유화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격상시키고자 하고 있다. 단순히 주몽의 분만도구가 아니라 그녀가 주체가 되어 햇볕을 삼켜 주몽이 들어있는 알을 만들어 내는 창조자가 된다. 말 탄 남자와의 사통의 언급도 없이, 바람도 없이 그저 속에서 흔들려 잉태한 알의 이미지는‘내가 초록 말을 타고 강바닥을 달리고 있어’ 라고 내뱉고 있는 것을 보면, 주몽신화와 달리 이 작품에서 그녀가 새로운 신화의 주인공이, 인생의 주체적 자아가 되었음은 확실한 것 같다.『그리스로마신화』의 헤라와 이오작품 줄거리헤라는 어느 날, 하늘이 어두운 것을 보고 남편 제우스가 자신이 하는 일을 감추려 하고 있음을 눈치챈다. 그리고 구름을 걷어 제우스와 한 아름다운 암송아지가 강기슭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헤라는 남편이 바람을 피고 있는 것임을 알아채고 제우스에게 그 송아지를 선물하라고 하였다. 그는 싫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헤라가 의심을 할 것이므로 이를 승낙하고 헤라는 그 송아지를 100개의 눈이 달린 아르고스에게 주어 감시하게 한다. 이오는 아르고스에게 풀어달라고 애원했으나 그것은 소 울음에 불과하였고, 아버지와 자매들도 그녀를 보면 아름다운 소라고 감탄할 뿐이었다. 후에 이오의 아버지 이나코스가 그녀를 알아보나 아르고스는 그를 내쫓았다. 제우스는 자신의 연인이 겪는 고통을 볼 수 없어 헤르메스에게 아르고스를 퇴치하도록 명령했다. 헤르메스는 아르고스의 곁에서 이야기를 하고 피리로 은은한 곡을 불며 아르고스의 눈을 전부 감기게 하여 그를 재웠다. 그 뒤, 헤르메스는 그의 목을 치고 헤라는 그의 눈들을 빼어 자신의 공작 꼬리 장식으로 삼았다. 그러나 헤라의 복수심은 멈추지 않고 이오를 괴롭히기 위해 그녀에게 등에를 보냈다. 등에는 이오를 계속 쫓아다니며 괴롭혔고, 제우스가 이오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함으로써 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