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학기― 막심 고리키의 희곡《밑바닥(원제:밤주막)》과뮤지컬《밑바닥에서》를 통해서내가 본 러시아!▷ 제 출 일 : 2007년 6월 13일▷ 과 목 : 러시아 문화와 예술▷ 담당교수 : 교수님▶ 학 번 :▶ 학 과 :▶ 이 름 :― 러시아 문화를 체험하기 전처음에는 동대문에 있는 러시아 음식점에 가서 아직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러시아 음식을 먹어 보고 그 경험을 쓰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러시아 과제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정말 우연히 대학로에서 《밑바닥에서》라는 뮤지컬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에 그냥 지나쳤을 법한 그 포스터에서 “원안 막심 고리끼” 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막심 고리키의 원작인 희곡 《밑바닥》을 각색한 작품으로 러시아의 어느 허름한 선술집을 배경으로 하는 뮤지컬이었다. 2005년 6월 초연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진 꽤 유명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렇게 마음에 담아 둔 러시아 뮤지컬을 지난 일요일 보러 갔다.사실 뮤지컬을 보기 전 서점에서《밑바닥》이라는 책을 샀다. 이번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접할 기회가 다소 드문 러시아 문학을 본다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는데, 희곡을 읽어 본 것 역시 부끄럽지만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비교적 짧은 책이었는데 코스퇴료프, 바실리사, 크레시치, 메도베제프 등 눈에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희곡에 적응하는데 꽤 시간이 필요했다. 원래 계획은 희곡을 먼저 읽고 뮤지컬을 보면서 두 작품을 비교하는 것이었지만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뮤지컬을 먼저 봤기 때문에 조금 아쉬웠다.이번 보고서에서는 우선 이 작품을 쓴 막심 고리키에 대해 알아보고, 그의 희곡《밑바닥》에서의 내용과 나의 이해와 감상, 뮤지컬《밑바닥에서》의 내용과 나의 이해와 감상을 하겠다. 그리고 두 작품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느낀 러시아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막심 고리키와 그의 문학에 대해서막심 고리키, 그는 러시아 사람이며 「어머니」 니즈니의 노브고로드(Novgorod)에서 소목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고리키가 죽은 후에 그의 이름을 따서 “고리키 시(市)”가 되었다고 한다. 고리키는, 네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를 따라 외가로 갔는데, 그 곳에서 힘겨운 생애가 시작 된다. 학교 교육은 초등학교를 반년 정도 다닌 것으로 끝내고, 부두 노동자, 제빵 기술자, 기선의 접시닦이, 구두닦이, 뜨내기 연극단의 배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국내 각지를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면서 고리키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 사회의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 같다.그는 창고 인부가 되어 노동을 하면서 혁명적인 청년들의 학습 그루우프에 참가하게 되었고, 청년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작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노동자, 농민 속에서 선전활동을 하다가 1889년 체포되기도 하고, 이후 경찰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된다. 그는 1892년《마카르추드》를 시작으로 《첼카쉬》,《매의 노래》,《바다 제비의 노래》등 초기의 단편 작품을 썼다. 그리고 1906년《어머니》,《원수들》, 자전적 3부작인《유년시대》,《사람들 속에서》,《나의 대학》 등의 작품이 있다.“고리키”라는 이름은 그의 필명으로 러시아어로 “쓰라리다, 비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고리키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이며,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 서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크게 공헌한 작가” 라고 평가한다. 이는 ‘고리키’라는 이름과 또 실제 그의 삶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직접 겪은 체험이 문학 작품 속에 잘 반영된 것이다. 그의 고달픈 삶에서 우러나온 고난과 고통 속에서 러시아 민중과 빈민층의 삶을 누구보다 잘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희곡 《밑바닥》에서도 잘 드러난다.― 희곡 《밑바닥(밤 주막)》이 작품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붕괴된 제정 말기(19세기 말기)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전 4막의 희곡이다. 배고픔과 불황으로 토굴과 같은 서는 페페르)이라는 도둑이 있는데, 바실리사가 페펠을 좋아하면서 동생 나타샤를 학대하고, 나중에는 그녀의 질투로 페펠의 삶을 더욱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한다. 자물쇠장수 ‘크레시치’ 역시 토굴과 같은 지하실에 자리잡은 인물로 그에게는 병든 아내 ‘안나’가 있다. 계속 기침을 하며 아파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그는 아내의 병을 그대로 방치하고, 오히려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도박에 빠져있다. 특히 안나가 죽었을 때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 병 들어 힘들어 하는 기침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반가워했다. 또 다른 밑바닥을 살아가는 인물로 매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밤의 여인 ‘나스챠’가 등장한다. 그리고 만두장수 여인 ‘크바시냐’, 모자장수 ‘부부노프’, 부랑자 ‘사친’, 알코올 중독자 ‘배우’, 옛날의 ‘남작’, 순례자 ‘루카’ 등이 등장한다. 이들 인물들이 지하 숙소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삶만 봐도 고달프고 밑바닥인데, 몇몇의 사건을 겪으며 그들은 더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다시 떠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절망을 느끼게 한다.특히 작가 고리키의 생각이 반영된 인물로 ‘루카’는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밑바닥에 사는 이들에게 희망을 갖게 한다. 그는 아픈 안나를 위로하고 병이 나을 거라는 희망을 전하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한다. 또 배우에게 잊어버린 이름을 찾게 도와주고 무료로 술꾼을 치료하는 병원이 있다는 희망을 준다. 나스챠와의 대화에서는 매춘부인 그녀가 진실한 사랑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페펠과 부부노프에게 진실을 가르쳐준다.그가 사라졌을 때 사친은 그를 회상하며 “치아 없는 사람들을 위한 부드러운 빵같은 존재”였다고 이야기한다. 또 남작은 “종기에 고약같은 것”이었고, 크레시치는 “동정심이 많았다”고 말한다. 어느 날 사친은 루카에게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라고 물었고 루카는 보다 좋은 것을 위해서 사람들은 살고 있는데, 노동하는 사람이든 농민들이든 나리들까지 기 전, 관객들의 웅성이는 소리와 밝은 목소리들 기대에 찬 모습들과 다르게 무대의 분위기는 음침했다. 시작 음악 역시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만큼 음산했다. 갑자기 조명이 꺼지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30초쯤 기차소리가 들리다가 무대 가운데의 식탁에서 앉은 누군가의 담뱃불이 켜지면서 극이 시작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주인공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고 자신의 위치에 서 있었나 보다. 그리고 곧 음악이 시작되면서 매춘부로 보이는 ‘나츠샤’라는 여자의 현란한 춤과 남자들이 술 마시는 모습, 춤을 추는 모습이 이어진다.이나 같은 내가 아는 러시아 소설에서 꼭 등장하는 것이 매춘부가 아닐까? 궁핍하고 먹고 살기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에서 여자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매춘이라는 마지막 선택이기 때문에 밑바닥의 인생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는 직업 같다. 《밑바닥에서》에도 등장하는 ‘나츠샤’는 사랑이 사치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사랑을 믿는다. 그녀는 몸을 팔아서 살지만 마음까지는 팔지 않은 여자로 현실을 더 비극적으로 그려낸다.희곡에서 순례자 루카가 등장 인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뮤지컬에서는 ‘나타샤’는 여자 희망을 전하는 긍정적인 인물로 나온다.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항상 웃고, 밝은 모습으로 고통받는 밑바닥의 인물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위로하는 유일한 희망이다. “블라디보스톡의 봄”이라는 고향의 노래를 부르며 밑바닥에서 봄을 꿈꾸게 하고, 기다리게 한다.또 뮤지컬에서는 술집 여주인이 바실리사가 아니라 ‘타냐’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서 원작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타냐를 언니로 알고 있는 병든 12살의 소녀 ‘안나’가 있는데, 사실 타냐는 미혼모로 안나가 엄마를 그리다가 자신의 약을 사러 간 타냐를 기다리며 죽고 만다. 그리고 타냐는 주인 없는 안나의 새 구두를 사 가지고 집에 돌아오지만 안나는 이미 죽고 없다. 실제 공연을 염두에 두고 대중적인 요소가 필요해서인지 관객의 감동이나 눈물 5년 동안을 감옥에서 보내다가 출옥한 인물이다. 그리고 뮤지컬도 페페르의 출옥을 축하하기 위한 술자리로 시작한다. 의도하지 않은 살인죄로 5년을 버리고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러다가 술집에서 새로 일하게 된 블라디보스톡에서 온 ‘나타샤’ 만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옛 애인 ‘바실리사’의 음모로 또 다시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한다.‘바실리사’는 희곡에서 페페르(페펠)가 나타샤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질투하는 인물로 비슷한 역할을 하는데, 뮤지컬에서는 페페르가 감옥에 간 사이 백작과 결혼하여 백작의 부인이 되면서 그를 배신한다. 가난한 삶이 싫어서 부를 쫓아 백작과 결혼하지만 백작한테 학대 당하며 사랑도 잃고 불운하게 살아가는 여인이다. 다시 페페르와 사랑을 이루려고 하지만 그가 나타샤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백작이 페페르에게 감사의 표시로 준 목걸이를 몰래 자신의 침대에 떨어뜨려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이 일로 칼을 들고 찾아온 백작과 페페르는 몸싸움을 하게 되고 실수로 그 칼은 백작의 가슴에 박히면서 또 다시 페페르를 살인자로 만들어 버린다.원작과 다르게 악역을 맡고 있는 ‘백작’은 자신의 아내 바실리사를 학대하고 하층민들을 무시하고 도박과 폭력의 부정적인 인물이다. 페페르를 죽이려다 오히려 자신이 죽게 된다. 인물 중에는 감초 역할을 하며 관객을 웃게 만드는 ‘사친’과 그의 조수가 등장한다.또 알코올 중독자로 나타샤가 이야기한 알코올 중독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 요양원이 없다는 편지를 받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배우’가 있다. 《밑바닥》에서도 등장하는 인물로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리고, 혼자서 알아듣기 힘든 말로 중얼거리는, 술에 인생을 맡겨버렸다. 나타샤가 고향에 돌아가면 꼭 가르쳐 주겠다는 무료 알코올 치료 시설에 희망을 갖지만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편지를 받고 목을 매고 자살한다. 특히 이 부분은 희곡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사람들이 어렴풋이나마 절망을 딪고 희망을 생각하려 할 때, 배우가 생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다.
♣ 매력적인 꽃 튤립을 이야기하며...튤립, 어렸을때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에버랜드 튤립축제를 갔던 기억이 난다. 빨간색 튤립만 있는 줄 알았던 나에게, 다양한 무늬와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색깔에 화려함까지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그러한 화려함속에는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동양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유럽의 세련되고 화사함에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한 튤립이라는 꽃을 아마도 그때의 정원 한가득 피어난 튤립축제 를 보고나서부터 인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서평과제로 주어진 목록에서 나는 처음부터 「튤립, 그 아름다움과 투기의 역사」라는 제목부터 끌리는 이 책에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된 사실인데, 신기하게도 튤립이 왠지 모를 단아함의 동양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정말 이 꽃은 네덜란드가 원산지가 아니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중앙 아시아에서 태어난 동양의 꽃{ 「튤립, 그 아름다움과 투기의 역사」 P.16이라고 한다.{네덜란드 어느 고장에 한 아름다운 소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라나,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아가씨였다. 그녀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는 세 사람의 청년이 있었다. 하나는 성주의 아들이고, 또 한 사람은 기사, 마지막 한 명은 장사꾼의 아들이었다. 이 세 사람은 처녀의 사랑을 얻고자 서로 제각기 맹세를 했다. "나와 결혼해 주면 왕관을 드리리다. "성주의 아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간청했다. 처녀는 그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네, 좋아요."이렇게 기꺼이 대답했다. "제 신부가 되어 준다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인 검을 드리겠소." 무릎을 꿇고 구혼하는 기사의 용감한 모습에 처녀는 역시 자기도 모르게 "네, 좋아요." 이렇게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에게 승낙을 해 버린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매우 당황했다. 한 몸으로 어찌 두 사람에게 시집을 갈 수 있을까 하고... 그런데 장사꾼의 아들이 와서 역시 결혼을 다가 깜짝 놀랐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 얼굴은 숭고하리만큼 깨끗했다. 그들은 그 모습을 보자 똑같이 외쳤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나쁜 사람일 리가 없다!" 꽃의 여신 플로라는 처녀가 결코 남자를 속일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 다만 세상물정을 모르고 있었던 탓임을 알고, 이 처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그리하여 소녀의 아름다움을 인간세계에 알리고자 그녀를 생명이 있는 꽃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 처녀의 이름은 튤립이었고, 꽃은 왕관을 닮았으며, 잎은 칼 모양에 구근이 황금빛인 것은 그 때문이며, 이 꽃의 봉오리가 활짝 피지 않는 것은 처녀의 순결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영, 「꽃 이야기」, 지경사, 2001 (튤립에 얽힌 전설 요약)죽은 소녀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생명이 있는 꽃이 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튤립의 이야기가 네덜란드의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보겠다.영원한 바다, 그 바닷물을 밖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에 비옥한 농토를 만들어 낸 네덜란드 사람들, 자연과 싸워 땅의 반 이상을 새로 만들어 내고, 지도를 바꾸어 놓고, 또 바꾸어 가고 있는 곳이 네덜란드라는 나라이다. { 이원복,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 편」, 고려원미디어, 1993네덜란드가 세계역사에 등장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로 그 이전에는 영국과 마찬가지 로마의 지배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개의 부족형태 국가로 유지하여 오다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거쳐 에스파냐의 식민지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여 오고 있었다. 지금은 벨기에와 네덜란드라는 각기 다른 국가로서 나뉘어져 있었으나 1830년 벨기에가 독립을 선포한 이전에는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북부인 네덜란드는 주로 게르만계의 상업과 농업을 주로 하는 캘빈파의 신교도였으나 남부인 벨기에는 라틴계로서 목축과 모직물을 주로 하는 가톨릭계의 서로 다른 점을 가지고 있어 분리의 시발점이자 그 이유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독립은 100년간에 걸쳐 일어났던 종교전쟁과 밀접에 관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내용을 전개시켜 나갔기에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네덜란드 역사에 관한, 그리고 당시 17세기 튤립투기 에 관한 자료를 따로 찾아보고 공부했었다. 이번 리포트에서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지만, 내가 나름대로 연구했던 것을 최선을 다해 옮겨 보고자 한다.♣ 책 속에서의 튤립이야기와책 밖에서의 나의 생각처음 책을 읽기 전, 검은 책표지의 한 송이 연분홍빛 튤립의 모습은 단아함과 고귀함, 우아함 그 자체였다. 연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보다 더 세련된 꽃에서 나는 빛과 꽃잎의 모양은 새색시가 첫날밤을 맞이하듯 부끄럽고 수줍은 모습으로 피어있었다. 매혹적이기에 충분했다.그리고 책의 첫 장에서 그저 아름답기만한 이 튤립이라는 꽃 한 송이를 두고 엄청난 금액으로 거래되는 내용을 보았을때, 중앙아시아 고원지대에서 온 이방의 꽃 튤립에 대한 유럽인들의 낭만적인 감수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감탄했다.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서 작은 꽃 한 송이를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지불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물질적인 것보다 미적인 것에 더 관심을 두는 그들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반전이었다. 튤립열풍 은 튤립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네덜란드 전역을 떠들석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투기였다. 그리고 비로소 제목에서 튤립, 그 아름다움과 투기의 역사 라고 한 이유를 알게 되었고 탁월한 제목의 설정에 감탄했다.튤립은 중앙아시아의 고원지대에서 발원해서 16세기 오스만투르크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을 매료시키고, 이후 북유럽의 네덜란드로 건너가 투기열풍을 일으켰는데, 책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튤립이 네덜란드에서 튤립열풍 이 일어난 배경 뿐 아니라, 그 열풍 속에서 구근재배와 품종 발전에 힘썼던 식물학자들의 이야기까지 하고 있어 폭넓게 튤립에 관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책이 네덜란드의 경제적 문제 속에서 튤립의 투기에 대한 것 보다 그것의 역사적 (튤립열풍)가 퍼질 수 있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졌고, 30년 전쟁으로 강력한 경쟁자였던 동유럽의 직물산업이 붕괴되어 네덜란드 직물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었다. 당시 유럽국가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던 네덜란드인들은 앞다투어 교외에 대저택을 짓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만끽했고, 부에 취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신교의 칼뱅주의적 검약정신이 사라진지 오래였고, 소비 지향적인 국민이 되어갔다. 그런 그들은 과시욕을 드러내며 더 큰 부를 안겨줄 대상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튤립이었다. 꽃에 대한 네덜란드인들의 강한 애착은 지리적인 요인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그들은 국토가 좁은 탓에 대형 공원을 가꿀 수 없었다. 대신 앙증맞은 공원을 만들어 한가운데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심었는데, 이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 튤립이었다. 척박하고 모래가 많은 토양에서도 튤립은 잘 자랄 수 있었다.튤립은 16세기 중엽 터키 술레이만에 파견된 네덜란드 대사 오기에르 부스베크가 튤립뿌리를 처음으로 유럽에 전했다고 한다. 튤립이란 이름도 당시 터키인들이즐겨 쓰던 터번을 의미하는 튤리판에서 유래된 것이다. 1573년 부스베크는 당시 네덜란드 최고의 식물학자였던 카롤루스 크루시우스(튤립의 아버지로 불림)에게 튤립 한 뿌리를 선물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번식해 다시 여러 사람에게 배분했고, 자신이 집필한 에 기록했다. 초기 튤립은 귀족과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튤립이 처음 유럽에 꽃을 피운 곳도 고상한 꽃재배를 취미로 하던 당시 유럽 최고의 은행가인 푸거의 아우구스부르그 공원이었다.당시 네덜란드인들은 꽃의 색깔에 따라 튤립을 다양하게 분류했는데 위계서열에 따라 군계급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최상급 꽃은 앞에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줄무늬가 있어 황제 라고 불렀고, 이어 총독 과 제독 , 장군 순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1624년 황제튤립은 암스테르담 시내의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값에 거래 되었다고 한다. 가장 인기있는 최상 의 품종들 중에서 가장 가진 튤립이 보고 싶어 인터넷으로 찾아보았지만 그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새로운 무늬의 변종 튤립이 나오는 것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을때만 가능한데, 즉 병이 걸려야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번식이 힘들고 금방 사라지기 때문에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 이 때문에 더 희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인터넷을 통하여 머리속에 그려오던 붉은 분홍빛의 단아한 튤립의 모습이 아니라, 좀 더 세련되고 특이한 갖가지 무늬의 튤립 사진을 볼 수 있었다.튤립은 만개할 때까지 무늬나 색깔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 튤립투기를 더 극대화 해 주었는데, 튤립이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튤립이 아름답고 새로운 색깔과 모양을 내는 것은 바이러스의 감염 때문인데, 강렬하고 화려한 색깔을 띠는 것은 모자이크 바이러스때문이라 한다.) 이런 이유로 가난한 서민층까지도 일확천금을 꿈꾸며 튤립 구근에 모든 것을 걸었다. 네덜란드에서 튤립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프랑스인들도 한몫 챙기기 위해 1634년 파리 근교와 프랑스 북부에 튤립시장을 열었다. 이는 튤립열풍이 국제화되고 있음 의미한다.1636~1637년, 겨울에는 튤립뿌리들이 아늑한 땅 속에 묻혀 있어 거래가 성사되어도 사람들은 뿌리를 인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람거래 로 불린 튤립 선물거래가 나타났다. 파는 사람은 미래 일정시점에 정해진 종류의 튤립구근을 전달하기로 약속하고 사는 사람은 받을 권리를 갖으며, 결제시점이 되면 시가와 거래가 차이를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거래는 어음결제로 이루어졌고, 이 어음의 만기는 대부분 튤립구근을 캐는 다음해 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은 현금이 아니라 약속어음이었기 때문에 투기열풍이 끝나갈 무렵 눈에 보이지 않는 튤립구근은 돌고 돌아 실체가 없는 거래가 되어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기에도 튤립구근을 갖고 있지.
2004-1 Report? 제 출 일 : 2004. 5. 12 (수)? 과 목 명 : 서양여성사? 담당교수 : 안윤모 교수님마녀사냥― 대중들의 광기, 마녀사냥 ―? 학 번 : 20010036? 학 과 : 국어국문학과? 이 름 : 심선희마녀사냥 (Witch Hunt)Ⅰ. 대중의 광기와 마녀사냥여자대학에 다니면서 애써 패션 잡지나 방송 프로그램을 보지 않아도 그 해 계절마다의 유행을 알 수 있다. 청치마가 유행하면 다들 청치마에 검은색 반 양말을 신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은색의 굵은 링 귀걸이가 유행하면 사람들의 귀에는 링 귀걸이가 걸려 있다. 언젠가 드라마에서 백제의 공주로 등장한 성유리가 머리를 땋고 출연했다. 그 뒤 학교에서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머리를 땋은 많은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모방을 통해 집단 속에서 튀지 않으려고 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역사 속에도 대중의 모방취향이나 사회전체가 갑자기 한 가지 목적에 미친듯이 그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백만 명이 한꺼번에 어떤 것에 현혹되어 새로운 매력적인 것이 나타날 때까지 몰두한다. 14, 15세기 유럽에서는 2세기 반 동안 대중들이 무지와 악마의 공포에 사로잡혀 수십만 명을 ‘마녀사냥’이라는 구실 아래 학살했다. 사회의 혼란과 악마의 공포 속에서 대중은 불안한 심리를 해소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광적으로 마녀를 색출하고, 재판하고, 화형 시켰다. 그리고 그 희생양의 90%이상이 ‘여성’이었다. 마녀사냥이 행해졌던 중세 유럽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고, 마녀사냥의 시작과 전개, 처벌과 재판의 과정을 알아보겠다. 그리고 왜 여성이 마녀로 몰렸는가에 대한 마녀사냥의 진실을 밝히도록 하겠다.Ⅱ. 중세의 시대적 상황중세의 시대적 상황중세에 지속적으로 형성되어온 주제들이 있다. 당국과 일탈 세력간의 알력, 공동체와 개인주의간의 갈등, 물질주의와 정신주의 간의 대립, 그리고 성애주의와 금욕주의간의 긴장 등이 바로 그것 들이다. 이 양 극단 사이에서 영속적인 왕복 운동그의 하수인인 악마의 기능을 믿었던 사회이다. 중세 사회는 또한 기근, 역병, 폭풍우, 홍수, 흉작, 가축 폐사등과 같은 갑작스런 천재와 발기 불능, 불임, 사산, 유아 사망 등과 같은 빈발하는 가족 문제를 해명해주는 편리한 수단이었던 마법을 믿었던 사회이다. 분만시 유아가 사망하면 산파가 마법 혐의의 과녁이 되기 십상이었다. 까닭 모를 갑작스러운 죽음은 흔히 마법 탓으로 돌려졌고 사랑을 부추기거나 약화 시키고 건강을 회복하거나 악화시키는 일에 마녀의 도움이 적극적으로 추구되었다. 마녀가 이용하는 필수 도구는 연고며 물약이며 미약이며 주문이며 부적과 밀납상 등이었다. 서유럽의 마법은 다른 모든 마법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을 하나 갖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유럽에서 마녀는 사탄(마왕)의 시녀로 간주되었다는 점이다. 중세 말경에는 마녀가 기독교를 비난하고 자진하여 사탄을 섬기면서 마왕과 협정을 맺는 한결 같은 모습이 꾸준히 발전하였다. 마녀는 마왕과의 성교로써 이 협정을 조인하였다. 마녀들은 식인 행위와 성적 향연을 벌이고 기독교 의례를 불경스럽고도 어설프게 모방한 정규적인 마녀들의 야연(夜宴)에서 서로를 만났다. 마녀는 동물 모습을 한 하인들을 거느리고 날아다니는 힘을 향유하며 때로는 변신하는 능력도 갖고 있다. 마녀는 악을 수행하는 능력도 갖고 있다. 마녀는 악을 수행하는 능력을 받았다. 마녀는 기독교 세계의 토대를 붕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 세계적인 악마적 음모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마왕의 사주를 받은 마법은 따라서 기독교의 포괄적인 역상이요 대안적 신앙이었다. 사탄과 그의 악마들은 하느님과 그의 천사들의 대적자들이었다. 그들은 선보다는 악을 찬양하고 영보다는 육을 권장하였다. 기독교가 독신 생활을 가장 칭송한 반면 사탄 숭배자들은 난잡한 성을 찬양하였다. 그들의 의례는 기독교 제의를 어설프게 모방하였는데 기독교 상징을 공공연히 욕되게 하고 빵과 포도주에 어린이 유골제를 섞어 성체 변화의 교의를 조롱하였다. 살인이며 식인이며 근친상간이며 유아 살 조직이었다.도미니크 수도회 출신의 두 신학자 앙리 엥스티토리스와 자크 스프렝거는 오랫동안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단자 색출에 힘썼다. 그런데 이단자는 단지 종교적인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전염병으로 가축이나 사람이 죽는 일, 흉년과 자연재해가 모두 이단자 때문이라 여겨졌다. 또 성(性)에 대한 불행한 내용, 즉 성교불능, 남근탈락, 유산, 불임 등 이 모두 이단자의 탓으로 돌려졌다. 이때 종교적 이단자는 악마와 간통하고 온갖 해괴한 일을 벌이는 ‘마녀’와 동일시 돼서 불려졌다(당시 이단자로 색출된 사람들 중 남성도 있었지만 여성이 월등히 많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통칭해서 마녀라고 표현한다). 도미니크 신학자 두명은 자신들의 경험을 ‘마녀의 망치’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은 오랫동안 마녀사냥 지침서로 활용됐다. '마녀의 망치'는 오로지 마법의 단죄만을 목적으로 쓰여졌다. 일단 마녀로 낙인이 찍히면 법정은 피고에게 최소한의 동정을 보일 필요가 없다.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는 포기된 존재다. 마녀에 대한 체포가 이뤄지는 과정은 너무나 단순하다. 누군가의 고발이 있으면 또는 ‘세상의 소문’만으로 체포가 가능했다.Ⅲ. 마녀사냥1. 마녀재판의 시작과 전개원래 마녀는 마녀사냥이 있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마녀라기보다는 주술을 행하는 여자를 말하는 정도였다. 이들은 "신비적 직관에다가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병자를 고치거나 여성의 다산을 돕는다거나 또는 반대로 낙태를 시키는 일"을 하였다. 이것을 사람들의 일상요구에 응하여 존재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주술사들이 마녀로 낙인찍히고 이단으로 핍박받기 시작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때부터 마녀를 판별하는 지표와 기준이 생겨나고 이들을 집단적인 섹트로서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14세기를 대표하는 이단심문과 '베르나르 키'는 부부의 불화를 초래하고, 미래를 예언하며, 병을 고치는 자를 주의하라고 촉구하였다. 그 후 교황은 마녀를 최악의 이단으로 처벌하는 것을 이단 심문관에릴 지방의 약 200여 촌락에부터 15887년부터 이후 7년간 368의 마녀가 적발되어 화형 당하였다. 1590년 남독일의 소도시 네르도링켄에서 시장의 제안에 의하여 시의회는 거리를 나돌아 다니는 마녀를 철저히 일소하도록 결의하였다. 이후 3년간 32명의 마녀가 화형 또는 참수되었다. 1590년 소도시 에링켄에서 65명의 마녀가 처형되었고 1597년부터 1676년까지 197명의 마녀가 화형 당하였다. 소소크만텔 (승정령)에서는 1639년에2,428명, 1654년에는 102명이 처형되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 영토가 된 스타이엘마르크 지방에서 1564년부터 1748년까지 1,849명이 소추되어 1,16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나노수 지방에서는 1629년부터 이후 4년간 2255인이 마녀로 소추되었고 뷔르튄겐 지방에서는 1633년 이후 3년간 11명이 처형되었으며 제롯부르크에서는 1679년에 97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반베르크 승정령에서는 1627년 이후 4년간 화형 당한 마녀가 285명이었고 그 이후 30년에 걸쳐 이 재판소에 계류된 마녀재판은 900건을 넘었다. 이 승정령의 인구는 겨우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뷰르스부르크 승정령에서는 1623년부터 1631년간 화형 당한 마녀가 900명에 달하였다. 1627년부터 이후 년간 29회의 재판에서 화형 당한 157명의 희생자를 보면 잡다한 연령과 계급, 직업의 사람들이 혼재해 있었다. 시의회 의원, 고급관리 등의 부인, 시의회의원의 처자, 그 지방의 가장 아름다운 자녀 그룹, 8세, 9세, 12세의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루다에 살고 있는 바루다세르 후스라는 마녀재판관은 19년간 7백명의 마녀를 화형 시켰는데 자신의 일생동안 1천명을 처형하기를 소원하였다고 한다. 로트링겐에 살고 있던 니콜라스 레미라는 사람도 재직 15년간 화형 시킨 마녀가 9백명에 달했다고 한다.2. 마녀에 대한 처벌과 재판체포와 수사마녀는 먼저 풍문에 의해 적발되었다. 누구누구가 마녀라고 하는 소문이 나고 이들을 체포하고 이웃의 부합하는 입증되었을 때에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15-16세기경 로마법이 전래되면서 이른바 논리증거주의가 채용되었다. 요즘 사실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 해 서는 경험상 논리상 진실인 것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증거자료의 존재를 필요로 하였다. 1532년 제정되어 18세기말까지 독일 보통법이었던 가톨릭 형법의 증거원칙에 의하면 유죄의 증거로서 피고인의 자백 외에 2인의 증인의 증언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에 위하더라도 법률에 정하는 정도의 정황증거가 있는 경우에는 고문에 의한 자백이 허용되어 이것이 마녀의 양산에 별다른 통제가 될 수 없었다.고문위와 같이 고문은 거의 모든 마녀재판의 필수적인 한 요소로 등장한다. 마녀는 결국 고문의 소산이었다. 물론 희귀한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어떤 소녀는 자신이 마녀임을 아버지에게 자백하고 아버지가 딸을 신고하여 마녀재판에 등장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건에서 마녀들은 자신이 마녀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럴 경우 위에서 본 마녀의 징표들을 들이밀며 마녀라는 사실을 시인할 것을 강요한다. 그 강요의 수단이 바로 고문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행해진 고문은 그야말로 "인간의 지혜를 모두 동원하여 만든 것으로써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건강한 남자조차 견디기 어려운 정도의 고문이 연약한 여성에게 가해질 때 심문관이 요구하는 내용의 진술을 자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터이다.형량과 집행기독교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을 당시에는 신에 대한 반역이나 모독은 그 어떠한 범죄보다 중죄였다. 신의 적인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란 있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마법의 유형에 따라 달리 취급하였지만 나중에는 마녀라는 것 자체만으로 火刑, 斬首, 絞首(화형, 참수, 교수) 등의 엄벌을 받았다.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핀란드, 스페인 등지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을 1만 건 이상 분석한 로버트 무쳄블래드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마녀로 기소된 사람 가운데 거의 반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Ⅳ. 마녀사냥의 진실 - 왜 여성이 마녀로 몰렸는.
나이팅게일― 광명의 천사 The Lady with the Lamp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어린시절 나이팅게일의 전기를 읽었다면 누구나 한 번 쯤 나이팅게일과 같은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나 역시 병들고 아픈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백의의 천사’가 되고 싶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 환경 속에서 안식하지 않고 스스로 전쟁터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가 되고자했던 그 용기와 헌신, 삶이 위대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조사를 통해 그것은 나이팅게일이 이룬 것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알았다.Ⅰ. 역사적·사회적 배경1. 당시 영국 사회영국은 17세기 후반기부터 19세기 전반기까지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세계시장이 확대되어 수요가 증가됨에 따라 자본주의가 발달했다. 한편 정신적 세력의 부흥과 새로운 지식의 전개로 일상생활에도 변혁을 가져왔다.또한 1839년 선거법이 개정되고, 그 다음 해에는 노예폐지법에 의해 노예해방이 이루어졌으며 여성지도자들의 여성참정권을 위한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전형적인 중류계층 이상의 여성들은 교양을 위한 교육에 치중하였고 전문직업에는 사회적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부분의 직업여성들은 싼 임금으로 긴 노동 시간을 보내는 공장 노동인력에 종사했으며 중류계층 이상이나 귀족여성들은 문학, 예술, 어학, 교육을 받았다.1848년에는 런던에 퀸 여자대학(Queens' College)이 설립되었고, 여류문필가들이 사회악의 배격과 여성계몽을 위한 책을 썼다. 대체로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전형적인 중류계급 이상에서는 딸들에게 문학, 예술, 어학 등 교육을 많이 시켰으나 이것은 교양을 위한 교육이었고 전문직업 여성을 위한 터전은 아직 마련되지 못했다. 나이팅게일은 이러한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태어났다.2. 크리미아 전쟁 (Crimean War, 1853~1856)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사르여 힘의 열세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러시아함대는, 세바스토폴만에 자국 함정을 침몰시켜 항구를 폐쇄하였다. 한편 육상의 러시아군은 주민들의 지원 아래 진지를 구축하고 적의 포격에 맞서 장장 11개월간이나 버티어 요새를 지켜냈으나, 1855년 8월 말 연합군에게 세바스토폴의 남쪽을 점거당하고 북방으로 퇴각하였다.3) 결과 : 니콜라이 1세는 전쟁 중인 1855년 2월에 사망하였으며,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에서의 근본적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1856년 3월 파리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몰다비아에 다뉴브하구(河口)와 베사라비아의 일부를 양도하였고, 흑해에 함대를 배치할 수 있는 권리를 잃었다. 흑해는 중립이 선언되어 양(兩)해협은 통상상(通商上)의 자유항행은 인정되었으나, 군함의 통과는 일체 금지되었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패전을 계기로 근대화를 지향하는 운동이 일어나, 1861년의 농노해방을 비롯하여 일련의 개혁사업이 추진되었다.Ⅱ. 나이팅게일의 생애와 업적1. 나이팅게일의 출생과 어린시절1820년 5월 12일) “꽃의 도시”라고 불리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플로렌스에서 태어났으며 출생지명을 따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로 명명되었다. 나이팅게일은 명문의 집안으로 재력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윌리암 나이팅게일과 부자집 딸 패니 사이에서 둘째딸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그녀는 매우 높은 이상과 신사도를 중히 여기며 딸들의 교육에 관심이 지대한 부친으로부터 광범한 교육을 받았다. 부친으로부터 고전, 희랍어, 라틴어, 불어, 독어, 이태리어, 역사, 철학, 수학, 등을 수학하였다. 이때 교육은 그녀에게 있어 뛰어난 통찰력과 옳고 그름을 판단 할줄 아는 밝은 눈을 키워 주었다.그녀가 5세때 나이팅게일 일가는 영국에 돌아와 영국의 남부지방인 햄프셔의 엠블리 공원에 새 집을 짓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 곳에서 보내거나 북부 드비셔의 리허스트에 있는 옛집의 정서적 환경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였다. 매해 철마다 마차를 타고 런던을 방문하여 어린 숙녀들이 고급의 그녀에게 “간호라는 생활을 천직으로 느낀다면 나는 당신에게 간호사가 되라고 말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라고 말한 한 미국 의사와의 만남이 그녀가 간호사가 되기 위한 결심을 굳히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845년까지 그녀는 부드러움, 동정심, 선의, 인내 등이 간호사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전부로 믿었으나 질병에 이환된 가족들을 간호하면서 지식과 기술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이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정보 수집을 위해 병원과 건강시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1847년 로마 방문은 그에게 중대한 두 개의 경험을 갖게 하는 계기를 주었다. 그녀가 방문한 수도원 교회에서 깊은 영적 감화를 받고 깊은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개종하지 않고 전통에 의해 영국 국교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그녀의 두 번째 중요 경험은 후일 그녀의 생애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시드니 허버트 부처와의 만남이었다. 시드니 허버트를 통하여 크리미아 전지로 가게 되었고 그와의 의례적인 사귐에서 간호에 대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허버트 부처 친구들까지도 간호나 병원 개혁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그녀가 여러 해 동안 공중보건과 병원에 관한 자료를 모았고 이 정보를 그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여론을 일깨웠다. 이듬해 다시 한 번 애굽과 그리스로 갔으며 여행 도중 유럽 여러 나라의 병원을 방문하고 귀국 후 영국의 병원도 돌아보았다. 그녀는 영국 병원의 간호 상태에 불만족해 했으며 17세기 불란서의 성 빈센트 데폴이 경영한 자선 수녀단과 같은 단체가 영국에도 필요함을 알았다. 그녀는 교육받은 부인들이 간호사업을 위한 자선단체를 설립 할 것을 갈망하였다. 그녀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 사회개혁 운동에 이바지한 시버킹과 프라이 여사와 여집사 간호사업 지도자인 프리드너 목사의 업적을 알고 있었으며 그 곳에서 훈련 받기위해 카이저스베르트에 도착하여 8월의 2주간을 그 곳에 머물면서 간호 상황을 관찰하고 프리더너 목사의 계획과 853년 파리의 자선 간호단에서 견습은 나이팅게일 자신이 홍역에 걸리고 그의 할머니의 중병소식으로 1개월만에 끝났으며 귀국한 후에는 그 해 8월 런던가 1번지에 있는 부인병원의 원장겸 간호원장 직위를 맡게 되어 간호행정력을 발휘하였다. 간호 업계의 개척자이며, 조직과 개혁에 천재였던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란 직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33세였고 비로소17세기 이후 계속 준비 해 왔던 평생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부인병원에서 그녀가 이룩한 변혁과 행정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보다 큰 기관으로 가기로 열망했으며 1854년 왕립대학병원의 간호원장으로 초빙 받아 옮겨가기 위한 계획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크리미아 전쟁이 발발하였다.3. 크리미아 전쟁에서 나이팅게일의 활약1854년 3월 크림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해 9월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크리미아에 상륙하였다. 영국군대는 러시아와 싸우기 위해 열정만 가지고 전투에 뛰어 들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자선 간호사단들이 있었지만 영국은 이에 대응할 만큼의 간호사들이 없었다. 수송수단의 부족으로 의료 장비는 가져갈 수가 없었다. 붕대도 부목도 마취제도 없었다. 땅바닥에 더러운 짚을 깔고 그 위에 부상병들을 눕혀 놓아, 많은 부상자들이 콜레라와 이질로 죽어갔다. 터키의 스쿠타리에 있는 큰 영국 군병원에는 침대도 부엌도 없었으며 물을 뜰 양동이나 컵조차 없었다. 게다가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기엔 의사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전쟁 중에 영국군 병사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상황에 대한 생생한 가사)가 실리자 영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자들은 프랑스 자선 수녀처럼 간호사로 봉사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서 나이팅게일도 즉시 3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3일 안에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떠날 것을 자원하였다. 한편 나이팅게일은 오래된 친구이자 그 당시 전쟁장관으로 있던 시드니 허버트(뒤에 허버트 경이 됨)로부터 좀더 큰 간호파견대를 차출하라는 공식적인 교섭을 받고 있었다. 터키 스쿠타리에 있는 야전병원의 내야 했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병동에서 보냈으며 그녀가 일일이 직접 돌보지 않은 환자는 거의 없었다. 저녁 8시 이후에는 그녀 자신 외에는 어떤 여자도 병동 출입을 못하게 하였으며, 야간 간호는 회복기에 있는 부상병인 임시 위생병이 맡았다. 그러면서도 매일 밤 그녀는 직접 회진을 돌면서 환자들을 돌봐주고 조언도 해주었는데, 병사들은 나이팅게일을 '등불을 든 여인'이라고 불렀다.그녀는 이질, 루머티즘, 성홍열 등 전시에 생기는 거의 모든 질병에 감염되었으며, 성홍열로 거의 죽을 뻔했고, 머리카락이 다 빠져 버렸다. 그녀는 병으로 쇠약하고 수척해졌지만, 1856년 7월 영국군이 터키에서 철수할 때까지 스쿠타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이팅게일은 스쿠타리에서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계속 안타까움을 갖고 있었으나, 그간의 업적으로 그녀는 영국에서 국가적 전쟁 영웅이 되었다.4. 크리미아 전쟁에서 돌아온 나이팅게일전쟁이 끝나고 마지막 환자가 야전병원을 떠나자 나이팅게일도 곧 영국으로 돌아갔다. 오랫동안 국민들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그녀는 공식적인 귀국선을 이용하지도 않고 모든 공식적인 환영회도 거부하였다. 귀국하자마자 그녀는 인기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이미지를 깨고 영국군의 보건과 생활환경 및 식사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와 같은 계획이 처음에는 잘 진행되었으나 곧 어려움에 부딪혔는데 당국자들은 그녀의 계획을 아량있게 검토하였으나 일을 추진할 만큼의 열의는 없었다.1856년 10월 나이팅게일은 빅토리아 여왕과 그 부군 콘서트 왕자 및 허버트의 후임인 팬뮤어 경 등과 오랫동안 면담을 나누었으며, 그 뒤 여왕과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 군대보건에 관한 왕립위원회의 설립을 팬뮤어로부터 약속받았다.1857년 5월에 군대보건에 관한 왕립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나이팅게일은 군진의학과 병원행정의 전분야에 관한 많은 양의 자료를 제출하였으며 수많은 믿을 만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뒤에 이 자료들을 모아 개인적으로 〈영국군의 보건과 능률 및 병원관리에 영달했다.
뉴스 모니터링- KBS 뉴스9 (2003.10.5) -▶ KBS 뉴스9 (10.5) 모니터링▷ 앵커 김철민과 노현정, 그리고 기자들을 대상. (인터뷰는 제외)▷ 온호흡은 “#~#”으로, 반호흡은 “/ ” 으로 표시.▷ 잘못된 발음, 주의할만한 발음인 경우, “밑줄 진하게” 표시.[뉴스 9] 청와대, `송두율 씨 한쪽에 발 너무 담가`⊙앵커: #청와대 유인태 정무수석이/ 송두율 교수는 북쪽에 너무 깊숙이 발을 담근⇒ ‘깊숙이’는 [깁쑤키]로 발음된다.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송 교수 신병처리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시점이어서/ 발언 배경이 주목됩니다.# #첫 소식 송현정 기자입니다.#⇒ 발언 배경이 주목된다고 할 때, ‘배:경’이라는 단어는 강조 할 만하다. 특히, ‘배:경’은 장음으로 길게 발음하면서 첫 음 ‘배’에 엑센트가 주어지는데, 앵커가 바르게 발음 하였다.⊙기자: #이런 가운데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은 경향신문과의 창간기념 토론회에서/ 송 교수 본인은 남과 북 사이의 경계인이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한쪽에 발을⇒ ‘토론회에서’를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고, [토론헤서]로 ‘토론’이라는 말만 정확하게 들리고, 나머지를 흘리듯이 발음해 버렸다. 또‘깊숙이’는 [깁쑤키]로 발음함이 옳은데, [깁쑤기]로 잘못된 발음을 했다. 송현정 기자의 말하기는 대체로 반호흡을 하지 않고, 온호흡으로 쉼없이 이어서 말하였는데, 때문에 부정확한 발음이 많이 보인다.깊숙이 담근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또 본인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국정원은 송 교수의 입국 이전부터 형사처벌을 배제할 수 없다는 방침을 거듭 밝혀왔었다⇒ ‘형사처벌’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원래 단음으로 발음되어야 할 [형사]를 [히응사처벌]라고 말했다.고도 말했습니다.# 문희상 비서실장도 송 교수는 대한민국이 그 동안 얼마나 바뀌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이 같은 입장은/ 법에 따른 처리 방침과 맞물려 송 교수에 대해/ 선처보다는 기소나 국외추방 등/ 강경처리가 불가피한 상황이 계자는 이와 관련해 조사과정에서의 변호인 입회는 아직 법적으로 보장돼 있지 않으며/ 초기 조사에서 변호인 입회를 허용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독일대사관측이/ 내일 송 교수의 검찰 재소⇒ ‘항의’에서 'ㅢ‘라는 이중모음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고, [항이]라고 했다. ’입회‘는 [이푀/이풰]로 발음된다. ’곤:란‘은 장음으로 잘 발음했다.환과 관련해/ 자국민 보호차원에서 이 문제를 공식 제기해 올 경우/ 자칫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KBS뉴스 김덕원입니다.#[뉴스 9]KBS 이사장, `기념회 요청으로 단순 동행`⊙앵커: #송 교수 입국에 적극 개입한 것으로 일부 언론에 보도된/ 이종수 KBS 이사장은 오늘 기자회견을 열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김정환 기자가 보도합니다.#⇒ ‘입국’은 [입꾹]으로 발음해야 한다.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에서 ‘전혀’와 ‘사실’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전혀’를 [즈언혀]로 장음으로 발음했고, ‘사:실’은 원래 장음으로 [사아실]이라고 제대로 발음했다.⊙기자: #이종수 KBS 이사장은/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의 요청으로/ 독일의 송두율 교수를 방문했다고 밝혔습니다.#⇒ ‘기념사업회의’의 ‘의’를 정확하게 발음하지 않고, 바로 넘어가버렸다. [요청]으로 단음으로 발음된다. ‘방:문’은 장음인데, 단음 [방문핻따고]로 말했다.⊙기자: #이 이사장은 송 교수와 만나서 거리낄 것이 없다면 귀국해도 좋다는 의사⇒ ‘이 이사장’(성이 이씨인 이사장)이라는 의미로 말하기 위해서는 ‘이’와 ‘이사장’사이를 반호흡으로 잠깐 끊어주어야 하는데, 연결해서 발음해 버림으로써 ‘이:사장’(이씨 성을 가진 사장)이 되어버렸다.를 표했지만/ 초청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로 경청하는 입장이었다고 밝혔습니다.# #또 송 교수가 받고 있는 혐의 사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으며/ 귀국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국내 사정만 설명했다고 말했습니다.#⇒ ‘혐의’는 [혀믜/혀미]로 발음한다. ‘여:부’는 장음으.# #반면 통합신당은/ 매카시즘적 정치공세를 중단하라며/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이어서/ 대립각이 커지고 있습니다.# #정치권 밖에서는 이 같은 논란을/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 #민언련은 특히/ 한나라당이 KBS 국감현장에서/ 근거도 없는 간첩연루설을 들고 나온 것을/ 대표적인 색깔론 공세로 꼽고 이념공세에 편승한 KBS 흔들기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남은 국정감사와 정기국회/ 그리고 내년 총선까지 색깔공방이 계속될지/ 국정표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KBS뉴스 엄경철입니다.#⇒ ‘대응한다’에서의 ‘대:응’이나, ‘정기국회’에서의 ‘정:기’, ‘계속될지’의 ‘계:속’과 같은 장음의 발음을 정확하게 구사하는데 있어 놀랐다. 다만 ‘색깔론 공세로 꼽고’에서 발음이 꼬이면서 [꼬꼬]로 발음한 것이 아쉽다.[뉴스 9]편법 미국 영주권 보장 못 받는다⊙앵커: # 국 영주권을 갖고 있으면서 한국에 더 오랫동안 체류하는 분들에게/달갑지 않은 소식입니다.# #미 이민당국이 이런 외국인들의 영주권을 박탈하고 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강선규 특파원입니다.#⇒ ‘영주권’은 ‘영:주-권’으로 [이응주권] 바르게 발음했다.⊙기자: #이민법에는 미국 밖에 나가 있는 기간이 1년이 채 안 되더라도/ 상대적으로 외국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을 경우/ 미국에 살 의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 영주권을 박탈할 수 있습니다.#⇒ 호흡이 달리면서 ‘1년이 채’를 [일레인채]로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를 정도로 혀가 꼬인 발음을 해버렸다.⊙기자: #이 같은 이유로 공항에서 곧바로 영주권을 압수당하고/ 추방재판에 넘겨지는 한국인들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영주권이 박탈돼 추방되면/ 향후 10년 동안/ 미국에 재입국할 수 없습니다.#[뉴스 9]가을 영그는 들녘, 나들이 차량 정체⊙앵커: #태풍으로 인한 피해의 흔적들이 아직 다 치유되지는 않았지만/ 가을이 영그는 들녘의 모습은 풍성해 보입니다.# #이소정 기자가 항공헬기에서/ 무르익고 있는 가을의 모습길게 발음해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다. 또 ‘정상’은 단음인데, [저엉상]으로 장음화했다. ‘탄:성’은 장음으로 바르게 발음했다.다.# #오대산을 물들인 단풍의 물결은/ 백두대간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설악산과 오대산 일대는 오늘 하루 2만여 명의 등산객들이 몰렸습니다.# #징검다리 연휴 마지막 날,/ 전국의 고속도로는 귀경차량으로 오후부터 심한 정체에 시달렸습니다.# #KBS뉴스 이소정입니다.#⇒ ‘오:후’는 ‘오:전’과 마찬가지로 장음으로 길게 발음해야 한다. ‘정체’는 단음인데 [저엉체]로 강조를 하면서 장음처럼 발음했다.[뉴스 9]기업체 77%, `채용 계획 없다`⊙앵커: #노동부는 상용근로자가 5명 이상인 전산업 4400여 개 표본사업체를 대상으로/ 올해 4/4분기 고용 동향을 조사한 결과/ 채용계획이 없는 업체가 전체의 66%,/ 확정하지 못한 업체가 11%로 나타났다고 밝혔습니다.#⊙앵커: #일본 대학생이 가장 선망하는 직장 가운데 하나인 소니가/ 30살 이상을 대상으로 명예퇴직신청을 받기로 했다고/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했습니다.# #이는 중국, 한국 등 외국 기업과의 가격경쟁에서 밀려/ 사업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라고 요미우리신문은 분석했습니다.#⇒ ‘대:학생’과 ‘선:망하는’ 장음을 정확히 발음하고, 긴 문장을 짧은 호흡에도 부드럽고 안정되게 말했다. 긴 호흡이 존경스럽다.⊙앵커: #경찰청은 서울 시내 의류상인 연쇄강도 사건과 관련해/ 전국 경찰에 새벽시장 주변 순찰활동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청은‘에서의 ’경:찰‘의 장음 발음과 ’사:건‘의 장음을 제대로 발음했다.⊙앵커: #이 준 전 삼풍백화점 회장이 어제 오전 81살로 별세했습니다.# #이 전 회장은 지난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를 초래한 책임으로/ 7년 6개월 동안 복역하면서/ 지병인 당뇨에 고혈압과 심장병까지 겹쳐/ 지난 4월 출소한 뒤 계속 입원치료를 받아왔습니다.#⇒ ‘겹쳐’를 [겁쳐]로 발음했다.[뉴스 9]주 5일제, 종교계가로 발음했다.⊙기자: 주5일근무 시대에 종교계는 신앙과 여가 사이에서 절충점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KBS뉴스 김준호입니다.[뉴스 9]최태원, 11년 선수생활 마감한다⊙앵커: #한편 SK구단은 오늘/ 국내 프로야구 연속 출장기록 보유자인/ 최태원 선수가/ 지난 2일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가 끝난 뒤/ 은퇴 의사를 밝혔다고 발표했습니다.⇒ ‘정규리그’에서 ‘정:규’는 장음으로 [즈엉규]라고 발음했고, ‘경:기’ 역시 장음으로 발음했다. 그런데 ‘의:사’의 경우 장음임에도 불구하고 단음으로 발음했다.[뉴스 9]득점 단독 선두⊙앵커: #삼성하우젠 프로축구 K리그에서 성남의 김도훈이 해트트릭으로 한 시즌 최다골 타이기록을 세우면서/ 득점 단독선두에 나섰습니다.# #이진석 기자가 보도합니다.#⇒ ‘득점 단독선수’ 라는 음절 하나하나를 끊어 말했는데, 강조의 의미가 있다.⊙기자: #먹이를 포착한 맹수처럼/ 김도훈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김도훈은 전반 13분 이성남의 패스를 받아/ 시즌 19호골을 터뜨렸습니다.# #후반 27분에는 패널티킥 골./ 31분에는 헤딩골로/ 시즌 두번째 해트트릭을 완성했습니다.# #단숨에 시즌 21호 골을 기록한 김도훈은 2위 그룹과 두 골차로/ 득점 단독 선두에 나섰고/ 94년 윤상철이 세웠던/ 한 시즌 최다골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습니다.# #김도훈의 맹활약으로 성남은 안양을 5:1로 꺾고/ 3년 연속 우승을 굳혀갔습니다.#⊙기자: #전북은 시즌 19호 골을 터뜨린 마그노의 활약으로/ 부천을 3:2로 꺾고 5위로 올라섰습니다.# #수원은 나드손과 우르모브, 이병근의 연속골로/ 부산을 3:0으로 이겼습니다.# #대전과 울산은 1:1로 비겼고/ 전남은 광주를 1:0으로,/ 포항도 대구를 1:0으로 물리쳤습니다.# #KBS뉴스 이진석입니다.#[뉴스 9]김병현, 관중 야유에 과민반응⊙앵커: #미국 프로야구 보스턴의 김병현이 오클랜드와의 디비전시리즈 3차전에 앞서/ 선수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홈 관중들의 야유를 받자/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올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