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의 형성배경, 역할, 향후전망1. 유럽연합의 형성배경1940년대 말 이후 유럽통합에 대한 열정은 높아져갔다. 그러나, 각국마다 입장은 달랐다. 영국은 우선 거의 무관심했다. 그들은 미국과 영연방과 관계에 더 집중했으며, 단지 정부간 협력체 외에는 유럽통합에 무관심했다. 그들은 단지 협력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에 비해 독일은 유럽통합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서유럽으로 통합만이 독일의 주권을 회복하고, 이웃 국가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독일을 재건시킬 수 있다는 아데나워의 신념때문이었다. 프랑스는 처음부터 유럽통합을 주도했다. 프랑스는 유럽통합을 유럽 안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으며, 또한 독일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1940년대말에 성립된 유럽각의(The Council of Europe)와 유럽총회(European Assembly)는 초국가주의와 국가협력을 추구하는 국가간에 서로 다른 입장을 확인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이 두 기구는 제대로 운용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유럽의 장래모습에 대한 이해대립때문이었다. 대륙의 유럽주의자들은 영국과 타협할 자세는 되어 있었으나, 영국은 그럴 의사가 별로 없었다. 문제는 영국과 북유럽국가들이 단지 전통적인 정부간 협력의 형태만을 바라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베네룩스 3국들은 초국가적인 공동의 정치적 제도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국가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럽각의와 유럽총회는 조만간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취약성을 안고 있다고 하겠다.이에 대륙의 6개국은 실제적인 새로운 유럽통합의 길을 걷게된다. 1950년 5월 슈만플랜의 발표를 계기로 유럽통합 운동은 보다 협소한 부문에서 단지 6개국만이 참가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급진적인 이상보다 그들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실질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초국가주의 통합을 이루어내고자 하는 기능주의적인 통합방식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1) 슈망선언과 공동시장이라는 ECSC의 목표가 흔들리게 되었다. 그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초국가기구가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ECSC는 권위에 손상을 입게 되었고, 유럽통합이라는 이상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단일 경제부문에서 조차 행동을 조화시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었다. 1959년의 공동체 위기는 앞으로 계속 나타날, 그리고 제기될 유럽통합운동의 어려움의 전조였다.경제적 위기가 ECSC의 권위를 손상시켰지만, ECSC는 단순한 경제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정치통합을 실현하게 될 부문통합의 첫번째 구성단위였다. ECSC는 표면상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것을 달성하지는 않았다. 초국가주의 실현을 위한 여론을 조성하지도 않았으며, 각국 정부와 의회에 대해 명확한 권위를 확립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CSC는 유럽통합을 향한 기동력을 창출해냈고,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통합논쟁을 촉진시킬 수 있었다. 유럽재판소의 경우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래를 위한 기초를 탄탄히 잡아놓았으며, 여타 공동체의 발전을 자극했다.ECSC의 설립동기로서 중요한 사항은 회원국들 사이에 상호신뢰의 분위기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서독과 프랑스의 화해를 의미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특정문제들을 함께 토론하고 해결하며 협력을 강화하고, 이에 기반하여 다른 문제에도 협력을 확대하면서 점진적 통합을 이루는 기능주의적 방법이 모색되었다. ECSC의 공헌도는 무엇보다도 회원국들의 지도자들 사이에 상호 신뢰의 분위기를 확립한 데 있었다. 그 결과 많은 논쟁을 치루면서도 결코 공동체를 떠날 생각을 하는 지도자는 없었다.(2) 로마조약 - 유럽경제공동체(EEC) 창설(1957년)로마조약 입안자들이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던 유럽통합의 목표는 경제통합을 수단으로 한 정치통합 이었다. ECSC와 같은 부문별 접근방식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ECSC는 복합산업경제의 한 부문 인 석탄과 철강산업부문에서만 통합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타경제분야 안되는 정책이 되어버렸다. 1973년 이후, 확대된 공 동체 안에서, 특히 영국에 의해 공동농업정책의 존속 여부와 합리화 문제는 계속하여 심각한 논쟁의 주제가 된다.1965년의 위기가 공동체 내의 기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각국 정책 간의 협상과 타협을 통하여 타 결되었다는 점은 오랫동안 중대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집행위원회는 아직 각료이사회에 앞서 정책 시 행과 의제 제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갈수록 중요한 의제는 각국 정부에 의해 제기 되고 시행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은 집행위원회의 정치적 결정권이 매우 약해졌음을 의미한다.1967년 7월, ECSC, EEE, Euratom이 합병되어 유럽공동체(EC : European Communities)로 재편되면서 새로 구성된 집행위원회의 레이의장은 중재자로서 각국의 입장들을 타협시키고, 균형있게 조화시키며, 각국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책만을 수행하였다. 집행위원회는 아직도 초국가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어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잠재력을 현실적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원 동력이 좀처럼 찾아지지 않았다. 특히 정치적인 결정을 요하는 문제에는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 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공동체가 신속하고 합리적인 미래 지향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점점 EC내에서 정부간 협조주의가 중요한 성격으로 부각되었다. 프랑스 대통령 퐁피두는 6개국의 정기적인 정상회담을 제안하였다(후주37). 그 첫 회담이 1969년 12월, 헤이그에서 얼렸다. 이 회담을 통해 회원국 확대를 위한 길이 열리게 되었고, 공동체의 정책 발전에 대한 지침이 확립되었으며, 궁극적 목표 인 정치통합에 대한 신념이 재확인되었다. 정부수반들의 회동과 합의를 통하여 공동체의 앞길에 청신호가 주어졌다는 것은 EC를 이끌어 가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한 것이었으며, 1970년대에 전개될 새로운 의사결정 방법에 대한 전조를 보여주게 되었에 남북유럽간 경제적 균형 문제를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결과를 낳 았다. 그리스의 가입신청은 매우 순조로운 편이었는데, 갓 태어난 그리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그 리스행정부가 매우 열광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EC도 동의하였다. 이것은 스페인과 포루투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스페인과 포루투칼의 가입에 대해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대립하였다. 영국은 EC를 12개국으로 확대 하면서 시장도 넓히고 프랑스의 주도권 약화를 노렸고, 프랑스는 공동체의 첫번재 확장을 마무리부터 짓자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1982년에 시행된 개정 예산 체계를 도입하기 위해 1980년 5월에 체결된 협 약과 영국의 EC예산 기여에 대한 영국 및 여타 EC 회원국들 사이의 격렬한 논쟁이 조속히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EC 확장으로 인해 프랑스 농업에 야기될 문제점에 대한 걱정이 지스카르 데스텡의 담화문 뒤에 숨어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예처럼, 스페인과 포루투칼도 막 태어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프랑스도 그들의 가입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85년, 스페인과 포루투칼은 EC 가입조약에 서명하였다.(5) 정치통합의 추구1970년대에 들어 EC의 활동은 경직되었다. 세계 경제는 전반적으로 불경기였으며, EC의 각 회원국 은 인플레이션과 실업의 증가에 따라 장기적인 경제불황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부딪혀 EC는 정치적 협력을 더욱 긴밀히 하게 되었다. EC의 확대로 의사결정이 어려워지고 어두운 경제 여건을 고 려해 볼 때 특히 EPC에서와 같은 그들의 단결력은 매우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EMS 제도 자체는 정치적 대의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EMS는 정치협력의 궁극적 지향점이 었고, 따라서 EC는 정치적 통합의 개념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국제적 차원에서 EC는 꾸준히 위상을 신 장시켜 나갔다. 즉, EC는 다른 국가들과 공식적 관계를 체결하고, EPC를 통해서 중요한 활동을 수행하 며 성장을 거듭하였다. 그 실례로 유럽 안보EP의 요구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고, 유럽연합 계획 을 진전시키지도 못했다. 통합단일시장의 실현과정에서 드러난 맣은 결점으로 인해 SEA에 대한 비판 의 소리가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EA는 1980년대에 유럽통합의 진전을 위해 중심기관이 된 유럽이사회가 채택하고 그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SEA와 EC를 위해 쟈크들로르는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주요 반대자는 영국이었다. 그러나 대처의 영국은 드골의 프랑스가 아니었다. 이미 통합을 막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SEA의 성공을 위한 새로운 방안이 모색되었고, 1991년 EMU와 정치협력에 관한 새로운 협정이 마스트리히트 유럽이사회에 서 최종적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다. 파리조약(ECSC창설조약), 로마조약, 그리고 SEA를 하나로 묶어 개정·보완하는 단일조약이 탄생되었다. 그것이 바로 '유럽연합에 관한 조약 Treaty on European Union'인 마스트리히트조약이다.2. 유럽연합의 역할(1) 유럽연합의 공동정책들1> 공동농업정책 Common Agricultural Policy오늘날까지도 유럽건설의 한 초석을 형성하고 있는 공동농업정책은 유럽공동체의 가장 통합된 저액이자 완정된 정책이다. 하지만 공동농업정책은 공동체 예산의 약 65%를 차지하는 가장 값비싼 정책이기도 하다. 시장정책과 농업구조정책을 근간으로 하는 공동농업정책은 세 가지 원칙, 즉 시장의 단일화, 공동체 농산물 호혜 그리고 재정연대감 위에 그 기반을 두고 있어서, 농업생산력증대와 식용 농산물에 대한 비축의 안전보장에 기여해 왔다.농업종사자들의 생활수준과 수입이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른 점, 구조적 잉여 농산물(우유, 버터, 포도주, 설탕), 공동체 고유 재정원보다 빠르게 증가하는 농산품 통화보상액(MCA) 등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공동농업정책은 초창기부터 회원국들사이에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일대 개혁이 요청되고 있다.- 6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