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투자의이론과실제최인헌 교수님동국대학교 북한학과 19811269 김 기 훈 20117280 문 병 식목 차현대의 남북경협사업 추진경과 개성공단의 경제적 기대효과 개성공단 개발계획 개성공단의 투자환경 사업추진계획현대의 남북경협사업 추진경과남북경협사업 추진배경 개성공단사업 추진경과1. 남북경협사업 추진배경남북교류협력을 통한 경제발전1) 북측의 국토건설사업에 적극적 참여개성공업지구를 동북아경제 중심으로 개발2) 대륙의 천연자원 개발사업 참여3) 남북철도와 TCR/TSR 연결을 통한 동북아 물류사업4) 남북의 직접적인 통행, 통신, 통상을 통한 교류협력서울인천 국제공항개성평양원산강릉금강산신의주경부선경의선경원선동해선1) 북측의 국토건설사업에 적극적 참여TCR 연결TSR 연결1) 북측의 국토건설사업에 적극적 참여부산베이징하바로스크함부르크모스크바TSR 13,000 KmTCR 9,000 Km해상 19,000 Km7일평군 60Km/h9,000KmTCR10일평군 60Km/h13,000 KmTSR27일평군 30Km/h19,000 Km해상기간운행속도거리구분운송루트 비교 (예:부산~함부르크 )2) 남북철도와 TSR 및 TCR 연결사업을 통한 물류사업코빅스턴 가스전이르쿠츠크장춘심양사할린 가스전하바로스크블라디보스토크3) 대륙의 천연자원 개발사업 참여2. 남북경제협력의 거점 개발1) 개성지역을 반목과 긴장의 지역에서 경제 교류협력의 지역으로 전환남북접경지역 개발1) 동북아 및 유럽지역 으로의 육로수송의 관문 2) 남측과 북측의 상품 교역의 거점물류 및 상업교류의 거점으로 개발1) 남과 북이 공동으로 함께 경제발전 노력 2) 남과 북의 자유로운 생산활동이 보장되는 교류의 거점남북공동 경제개발의 거점으로 개발개성공업지구 (제조업)서울 (금융)인천 경제자유구역 (물류, IT)3.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형성에 기여4. 개성공단의 경제적 기대효과건설기간중 기대효과(1~8년차) : 남북이 비슷남 부가 가치북 외화 획득남부가가치액(8년간)고용창출(연평균)60억불62억불3만명남 부가 가치북 외화 획득남북 직접 고용부가가치액(연간)고용창출110억불20억불25만명건설완료후 기대효과(연간) : 남측이 기대효과 큼남 고용 파급36만명개성공단 개발계획개성공단의 입지여건 개성공단의 성격 사업규모 개성공단 개발계획1. 개성공단의 입지여건1. 개성공단의 입지여건개성공단의 위치도산업 주거, 상업, 유통, 위락, 관광이 자유로운 경제특구의 개념개성공단의 성격개성공단산업상업주거유통관광위락동북아 중심경제권으로 개발사람, 물자, 자본, 정보의 원활한 이동북측 주민의 고용기회 확대남측 기업의 국제경쟁력 확보3. 사업규모 (총 2,000만평)개성공단의 장래모습개발면적입주업체장래인구고용인구250,000 명450,000 명2000업체개성직할시 일원 2,000만평연생산액개성관광150억불연 150만명2,000만평 개발기준4. 개성공단 개발계획Ⅳ. 개성공단의 투자환경개성공업지구법 주요내용 투자환경 관리운영체계 기반시설의 확충1. 개성공업지구법 주요 내용남측 - 공업지구간 출입증만 소지하고 무비자 출입 출입, 세관, 검역절차 신속보장 (과학기술적 방법) 신고만으로 물자 반출입인원 및 물자 이동정해진 개발업자가 50년간 토지이용권 보유/개발 (연장 가능) 전력, 통신, 용수 등 하부구조 대상의 공동 혹은 양도/위탁방식 투자,건설 가능개발중앙 :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독자적, 통일적 사업지도) 지구 : 개성시 지도총국 (개발업자 추천인원으로 구성 원칙)행정관리체계국제적 무역, 공업, 상업, 금융, 관광지역 (공업지구는 공장, 상업, 생활, 관광지역으로 구분)성격주요내용구분분쟁해결 : 남북간 상사분쟁해결절차 또는 중재/재판절차 이용 개성공업지구 관련 남북간 기 합의내용은 이 법과 동일효력 보유기타개성시 역사유물/유적, 천연기념물 등 관광 가능 남측 및 해외동포, 외국인에 대한 불법 체포, 수색 금지 문화, 보건, 체육, 교육분야 생활편의 보장 우편, 전화, 팩스 등 통신수단 자유이용관광, 안전 및 생활편의- 자유로운 투자 및 기업설립 등 경제활동 보장 (고용, 토지이용, 세금분야 특혜보장) - 토지이용권, 건물 등 양도, 임대 및 투자재산 상속 가능 무관세 하부구조건설, 경공업, 첨단과학기술 부문 투자 특별 장려 기업소득세 14% (장려부문 10%) 북측 노동력 보장 (필요시 남측 및 외국인력 채용 가능) 시장가격 적용, 전환성외화/신용카드 사용, 자유로운 외화반출입투자 및 기업활동주 요 내 용구분2. 투 자 환 경* 토지이용기간은 50년 (연장가능) -토지이용권 및 건물소유권의 취득, 양도,임대,상속 가능* 무비자 출입 - 관리기관의 출입증명서 발급* 노동력 채용의 자율성과 유연성 보장 -노동력을 개별적으로 직접 고용 계약 - 최소한 중국, 동남아 수준의 기본노임 협의 - 기본노임을 기준하여 직종, 경력, 기능에 따라 경영자가 차등 지급 - 의료보험, 양로보험 등 사회보험료 가산* 무관세지역 보장기업소득세 : 경공업부문 등 10% - 국내 기업소득세율 : 23%~28%모든업종의 입주 가능 - 일부 금지업종 (건강상 장애업종, 환경침해 업종 등)* 지대내 통행, 신문, 방송, 통신 등 생활편의 보장3. 관 리 운 영 체 계개발업자기업의 창설 승인, 등록, 영업허가 건설허가 및 준공검사 토지이용권 및 건물, 시설물 등 등록 남측 - 지구간 출입인원/수송수단의 출입증 발급 하부구조시설관리 및 기타 중앙특구개발 지도총국 위임사항개성시 지도총국 -지대행정기관 -개발업자 추천 인원으로 구성-개성공업지구 전담 중앙지도기관 -관리기관의 사업 및 개발사업에 대한 지도 -개발사업계획의 승인 -공업지구 법규의 시행세칙 작성중앙특구개발 지도총국 (평양)개발사업계획 제출4. 기반시설의 확충철도도록전력통신가스용수경의선 철도연결공사 진행중 ('02.9.18 착공식)문산-개성간 도로연결공사중 (('02.9.18 착공식) )초기에는 남측에서 공급하되 점차적으로 자체 확충초기에는 남측에서 공급하되 점차적으로 자체 확충초기에는 남측에서 공급하되 점차적으로 자체 확충1단계는 월고저수지를 사용하고 추후 예성강 확보Ⅴ. 개성공단 개발계획공단 1단계 건설계획 유치업종 및 유치현황 사업추진일정1. 공단1단계 건설계획1단계 100만평에 대해서는 한국토지공사와 공동개발공사여건에 따라 3개 공구로 나누어 여건이 양호한 1공구 20만평을 우선 건설하여 2003년내 공장입주 및 제품생산 (조기착공 필요)분양가 절감을 위해 용수시설, 폐수처리장, 단지내 시설 등을 정부지원 요청폐수처리장 완공시까지는 폐수 미배출업종만 입주가능하므로 공사 조기발주 (설계시공에 2~3년)전력, 통신 등 외부기반시설 공사 조기발주 (기반시설공급자와 상업적방식으로 공급계약 추진)1 단 계 : 노동집약적 업종, 일반경공업 2, 3 단 계 : 기술집약적 경공업, 내륙형 중공업2. 유치업종 및 유치현황유치업종투자의향업체순공장용지 기준400만평신청면적-섬유,의류,신발 등 (420) -가방,완구,화학,신변장신구 등 (100) -전기/전자, 기계/금속 등 (230) -기타 (문구,안경,가발,식품 등) (150)900업체업 체 수비 고수 량구 분공단 1단계 1공구는 착공 1년 내에 단지조성 완공 *공단 2단계와 IT경공업공단은 컨소시엄으로 공동개발하여 8년내에 단지조성 완공 *생활구역 및 관광구역은 투자자를 유치하여 투자자 재량으로 시설 설치 및 운영3. 사업추진일정2000계100관광390확장예정지2002구역 생활 및 상업구역460개성시가지 판문생활구역생활 및 관광구역620IT경공업공단 확장예정지1302단계1001단계공업단지8년차7년차6년차5년차4년차3년차2년차1년차면적 (만평)구분범례: 단지조성 건축{nameOfApplication=Show}
북한 영화와 문화 통합━━━━━━━━━━(통일학입문)‘03. 11. 12발표조원성 명학 번전 공김 응 서20011173신문방송학과문 병 식20117280북한학과김 선 아19713696북한학과윤 종 현19912016정치외교학과최 효 원19917436사회학과이 현 주20011371신문방송학과장 영 혜20312225생명자원과학대허 민 희20312227생명자원과학대목 차내 용■서 론■북 한 영 화 의 개 요■북 한 영 화 의 장 르■북 한 영 화 의 배 급, 상 영 관, 통 제 조 직 등■시기별로 살펴 본 북한 사회의 변화와영화 속의 모습 및 주요 영화■영 상 자 료■결 론북한영화와 문화통합━━━━━━━━━━■ 서 론 - 북한은 왜 영화를 필요로 하는가.영화란 미학적 탐구의 결과물일 뿐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행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영화는 하나의 분리된 체계가 아니라 한 사회 전체 문화의 내적 체계 속에서 제작되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즉 관객들은 다른 체험이나 인지를 통해 영화를 이해하며, 영화제작 주체들은 전형적인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문화내의 이용 가능한 재현관습들과 레퍼토리를 사용한다. 따라서 북한영화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북한의 역사, 북한사회의 총체적 문화원리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남한과 특수한 관계에 있는 북한사회 내에서 제작되고 소비되는 북한영화를 살펴봄으로써 북한의 사회, 문화의 전반적인 특징들을 읽어내고, 영화라는 문화산업이 담당하는 기능과 역할을 알아보고자 한다.영화는 일반대중을 상대로 호소력이 강하기 때문에 사회주의국가에서는 중요시하는 예술분야이다. 과거 레닌은 모든 예술 중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영화를 사회주의 이념의 도구로서 철저히 사용하였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후 영화는 사회주의 문화예술의 기본원칙으로 자리잡게 된다. 북한은 구소련의 이 같은 영화예술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영화를 주민들을 혁명화, 노동 계급화, 공산주의화하기 위한 사회교육 수단으로 철저히 이용하였다. 즉, 북한사회에서 영화제작이란 자기의 운명을 집단의 운명과 잘 나타나 있다.김정일은 기록영화의 형태와 종류에 대해서도 밝혀줌으로써 하위장르의 구분에 대한 기준을 제공하고 있다. 대략 6가지 정도의 세부장르가 제시되고 있는데, 첫째, 문헌영화, 혹은 영화문헌이다. 여기에는 다시 수령의 혁명활동 역사를 수록한 것, 고매한 덕성을 수록한 것, 현지지도와 대외활동을 수록한 것 등이 속한다. 둘째, 행사기록영화이다.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사건을 수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영화의 특징은 항상 취급되는 내용이 해당 행사에 관련하여 명백히 규정될 뿐 아니라 행사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데 있다“고 한다. 셋째, 주제기록영화이다. 이러한 영화는 대체적으로 인민들이 사회주의 천국인 북한에서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것을 보여주며 긍지와 보람을 노래하는 것들이다. 이 범주에는 ‘당의 로선과 정책, 그 정당성을 해설 선전’하는 영화들이 포함된다. 넷째, 대외선전용 기록영화이다. 이러한 영화의 기본 내용은 김일성 부자의 ‘영도와 현명성과 고매한 덕성을 소개, 선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섯째, 자료영화이다. 중요한 사건과 사실들을 수록하여 역사 자료를 남기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과 특성 때문에 ‘교재영화’로 불리기도 한다. 여섯째, 시보영화이다.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에서 벌어지는 생동한 투쟁 모습과 거대한 사회적 사변들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한마디로 ‘뉴스영화’를 뜻한다.예술영화일반적으로 라고 일컫는 북한의 는 예술·오락성 보다는 당이 정해준 주제에 얽매여 매우 단조롭고 도식적인 경향이 농후한 정치 선전·선동의 차원의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이러한 북한 예술영화의 주제는 대체로 김부자 우상화 및 충성심 제고, 주민노력 선동, 한·미 모략 비방, 인민군의 용감성 찬양 등 4~5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특히 이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 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김일성 우상화이며, 1980년대 이후에는 김정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영화도 많이 나오고 있다. 또한 북한영화는 "김일성 일대기" 등 대부대한 학습과 실효모임?실효투쟁을 적극 전개토록 지도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실효투쟁이란 영화감상 및 학습을 통해 배운 내용을 사업과 생활에 구현, 실제로 효력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벌이는 운동이다.북한이 이처럼 영화를 순회?상영하는데 그치지 않고 감상모임? 학습? 실효투쟁 등을 적극 전개하고 있는 것은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대부분이 金日成?金正日에게 충성을 바치는 인물이거나 남보다 앞장서서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한 인물, 그리고 철두철미한 남한과 미국에 적개심을 소유하고 있는 인물 등으로 묘사)을 본받아 ‘위대한 수령님을 위해, 당과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우는………’등의 묘사로 인간이 세뇌시키기 위함에서 라고 생각 된다. 북한은 이러한 영화 보급 사업 외에 주민들의 영화에 대한 관심제고와 유능한 영화 문학(시나리오)작가의 발굴 등을 목적으로 각종 영화 문학 현상 모집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연례적으로 개최하는 시나리오 현상모집은 일반 시나리오와 아동 문학으로 나뉘어 金日成의 생일인 4월 15일과 당 창건일인 10월 10일을 기념, 두 차례 실시되고 있다.주요 상영관우리는 영화를 보는 곳을 극장이라고 하지만 북한에서는 '영화관' 또는 '직관예술관' 이라고 한다. 북한 영화관은 다른 시설들과 마찬가지로 평양에 많이 있다. 평양에는 대동강, 동대원, 평양국제 등 16개 전용영화관이 있고 지방에는 시.군마다 1-4개의 영화관이 있다. 북한의 주민들에 대한 영화 보급은 주로 각지서 순회 상영하는 방법으로 실시하고 있으나, 각종 국제 행사시의 영화 감상회나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해서는 평야에 건립해둔 영화관을 활용하고 있다.낙원 영화관평양특별시 낙원거리에 있는 영화관. 金日成이 지난 1975년 당 창건 30주년을 기념, 발기했다는 낙원 영화거리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한 영화관. 6백석 규모의 관람실 2개를 보유, 수용인원이 1천 2백 명인 2층 건물로 현대적 영사 설비들을 비치했으며 음향시스템도 양질인 것으로 선전 되고 있으나 어느 정도의 수준인 것인지하였는데, 이와 관련 '영화문학(시나리오) 창작사'를 발족하였다.1953년 7월 27일 휴전 직후 북한은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건설을 병행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모든 예술분야를 이 목표수행을 위한 선전, 선동에 적극 이용할 방침을 세웠다. 북한 당국은 영화가 특히 어떤 예술장르 보다도 대중침투력과 호소력이 강하다는 점을 착안, 주민들의 사상개조와 노력선동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할 방침을 굳혔다. 이와 같은 방침에 따라 1953년부터 1957년까지의 이른바 전후복구시기의 북한 영화는 영화촬영소의 복구건설, 시나리오작가, 영화배우, 촬영기술자 등 영화종사자들의 대열정비, 선진영화기술의 도입을 위한 영화전문가들의 소련, 중국 등 해외파견 등으로 정리 작업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1956년 4월 북한 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자가와 예술인들 속에 잔존하는 부르조아 미학사상의 잔재'를 청산하라는 문제가 제시된 뒤에는 모든 영화인들에 대한 '사상검토회'가 진행되었는데 남한출신영화인들이 대거 제거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이 시기에는 대외선전사업에서 영화예술의 역할을 높여 1959년에는 영화수출량 190%, 복사필름수 191%, 종목수에서 120% 성장하는 비약적 발전을 이룬다.북한영화사에서 이 시기는 몇 가지 점에서 의미있는 시기로 평가된다. 극영화의 다양화, 시보(뉴스영화)의 활성화, 항일빨치산 활동을 주제로 한 최초의 역사문헌영화의 제작, 최초의 과학영화 등장 등이다.표 3> 전후복구와 기초건설시기의 영화연 대영 화 제 목비 고1954빨치산 처녀예술영화1955아름다운 노래, 신혼부부예술영화강철, 김일성원수 항일유격전적지기록영화1956사도성 이야기, 행복의 길,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바다는 부른다에술영화1957어랑천, 산애, 어떻게 떨어져 살 수 있으랴, 끝나지 않은 전투에술영화평양은 일떠선다, 새조선, 탄맥기록영화1958위험한 순간, 꼬마선장, 어머니의 품, 달려라 소년호, 전우,그가 가는 길, 우리 사위, 우리 며느리에술영화중국인민지원군, 쇠물이 흐른다,. 203 ;「조선중앙년감 1992」, p. 220표 9> 김일성가계 우상 영화 (1976-1991)연 대영 화 제 목비 고1978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강반석 (김일성의 母)1984푸른소나무 (전,후편)김형직 (김일성의 父)1987여명 (전,후편)김형직 (김일성의 父)기다려다오김정숙 (김일성의 前妻)혁명전사 (전,후편)김철주 (김일성의 弟)1988영생 (전,후편)김철주 (김일성의 弟)출처 : 「조선중앙년감 1979」, pp. 291-292 ; 「조선중앙년감 1985」, p. 244 ; 「조선중앙년감1988」, p. 209; 「조선중앙년감 1989」, pp. 293-2941980년대 (후계체제의 공식화)이어 1980년 10월 10일 북한은 로동당 제6차 대회를 계기로 지난 70년대 초반부터 은밀히 획책해 온 김일성·김정일 부자 세습체제를 드디어 표면화했다. 이에 따라 모든 선전기관을 동원하여 김정일의 이른바 치적 선전을 대대적으로 펼치는 가운데 북한의 문학, 예술 특히 영화는 전적으로 김정일의 직접적인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이시기 영화들은 모두 김일성의 혁명역사와 그의 혈통미화를 다룬 '혁명전통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한편 1980년대의 북한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신상옥, 홍은희 부부가 강제납북되어 1986년 3월까지 북한에 억류, 김일성-김정일을 비롯한 지도층의 총애를 받으며 (1984), (1980), (1985) 등 10여편의 영화제작에 이용되다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극적 탈출에 성공하여 북한의 지도층과 영화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80년대에 작품의 주제나 소재에서는 특별한 변화는 보이지 않았으나, 大作(시리즈영화)의 제작과 외국과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대내외 영화제가 창설되었다는 것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대내적인 영화제로는 '조선영화축전'이 있다. 이 영화제는 1991년 2월 김정일의 49회 생일 행사 때부터 치러졌고, 이보다 먼저 생긴 국제영화제로 이른바 '평화영화제'가 있다. 정sp
Ⅳ . 남북 방송교류 활성화의 제약요소남북 방송교류 활성화에 제약요소는 남북한의 주변 정치적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법제적, 기술적, 방송제작 등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작용한다.첫째, 남북한의 방송교류는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북한의 방송개방에 대한 의지가 불확실하다. 인도적 지원사업이나 경제협력사업의 경우 과거에 비해 정치상황의 영향을 덜 받는 편이지만 언론사 방북취재, 방송교류사업은 남북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북한은 남북간의 방송교류와 협력이 북한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개방정책을 언제라도 후퇴시킬 수 있다. 우리 측의 북한 현지촬영 과정상의 통제 및 결과물에 대한 검열이 엄격한 것이 그 예다. 또한 북한의 개방정책은 남북간 경제협력에 초점을 두고있으므로 본격적인 방송교류 지연 우려 및 시기예측의 어려움이 존재한다.둘째, 기술적 측면에서 북한의 방송통신 인프라가 미흡하여 남북한 방송통신 격차가 크고 방송방식의 차이가 남북 방송교류에 제한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에서 자체 생산한 TV와 라디오의 채널은 고정되어 있으며, TV수상기 보급대수는 2백70만대(남한 1천4백87만대)로 대부분 북한산과 러시아산 흑백TV가 주종을 이루고 컬러수상기는 일제가주종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양지역은 10가구당 4대, 지방은 10가구당 1대 정도에 불과하며, 컬러TV수상기는 전체 수상기의 10% 정도로 추정된다. 송신시설은 국제통신연합(ITU)에 489개소로 등록되어 있으나 산악지형을 극복하기 위한 소출력 중계소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의 TV방식은 대남방송인 개성TV방송을 제외하고 조선중앙TV, 만수대TV, 평양교육문화TV 등 모두 PAL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남한의NTSC방식과 다르다. 북한의 위성방송도 동일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북한의 방송·통신 설비 및 환경이 낙후되어 있으며 방송방식의 차이로 남북간 기술교류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셋째, 남북 방송교류 관련 법제 측면의 이런 문제를 인식해 대외판매 창구를 일원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최근 저작권법을 제정(2001. 4), 개인의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 보호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질서 참여 등 대외개방 의지를 시사한 바 있다. 그러나 저작권과 관련하여 남북간 구체적 합의가 이루어진 바는 없다.여섯째, 방송제작에 있어 현재 방송사의 북한취재가 사업의 형식으로 추진되고 있어 규모가 크고 제작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경향이 있다. 전체적으로 북한을 다루지 않고 취재내용의 일부만 포함시켜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므로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그리고 방송제작물에 대한 검열과 육로를 통한 장비반출에 대한 북한의 부정적 인식 등이 남북교류 활성화에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남북회담 취재 등을 통해 남북당국이 합의한 취재인력이 방북할 경우에는 촬영필름이나 방송내용에 대해 일체 간섭이나 검열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별적인 접촉을 통해 방북할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필름검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촬영원본을 가지고 나와서 서울에서 방송할 경우에는‘북의 존엄을 유린하는’방송내용이 있는지 원본의 검열을 요구한다. 실제로 북한은 MBC와 스포츠아트의 방북때 필름을 압수하여 재편집하거나 일부를 돌려주지 않은 전례가 있다.또한 북한은 판문점을 통한 장비반출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SNG 등 대형장비는 인천-남포간 항로를 통해 반출해야 한다. 장비반출을 위해서는 통일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같은 과정을 거칠 때 최소 1주일 이상의 시간과 많은 비용이 소요되며 운반중 장비가 파손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 남북관계가 더욱 진전되고 육로가 개통이 되어야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일곱째, 북한에 대한 우리 방송사의 보도태도가 남북 방송교류에 제약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북한 정치체제에 대한 한정된 정보원으로 인해 추측보도나 시나리오성 보도가 많다 는 점, 양극화된 보도태도, 일관성 없는 뉴스의 전개, 무분별한 상징적 첨가어의 사용, 희화적 표현이나 부적합한 영상, 부남북한 당사국이 아닌 제3국에서의 교류는 가급적 많이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와 같이 제 3지역에서 제 3의 조직을 통해서 시도해 보는 방송교류는 동서독의 직접 방송교류에 앞서 있었던 유러비젼(Eurovision)과 인터비젼(Intervision)을 통한 간접적 방송교류의 경우의 예를 보더라도 필요시된다.1991년 9월1일 북한의 중앙방송은 아시아 방송연맹(Asian Broadcasting Union: ABU)의 회원방송이 되었다. 남북한 방송은 아시아비젼에서 방송의 간접적 교류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EBU의 유러비젼과 OIRT의 인터비젼의 교류가 동서독의 방송교류의 전초 교류였던 것처럼 남북한 방송의 아시아비젼의 참여가 남북한 방송의 개방 및 교류의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6) 남북간의 상주 기자제도동서독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방송의 교류에 선행하여야 할 것은 상주기자제도 또는 기자의 교류제이다. 남북한에서 상대 측 기자들의 자유로운 취재활동이 보장된 다면 이를 통한 방송의 교류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7) 프로그램교환 기구 설치, 운영이는 북한에서 대남 선전용이 아닌 북한의 주민을 대상으로 방영하는 프로그램과 남한에서 남한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의 상호교환을 위해 판문점 등 공동관리구역 내에 별도의 장치나 기구를 설립하는 것을 의미한다.판문점 등 공동관리 구역 내에 TV Standard Converter(TV 방식변환장치)등 녹화된 테이프를 교환하거나 방영하기 위한 프로그램 교환기구를 설치, 운영해야 한다.(8) 북한의 텔레비젼, 라디오 시청취 개방북한의 TV를 시청하려면 TV컨버터를 사용, PAL방식을 NTSC방식으로 전환하면 가능하다. 현재 국내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 및 KBS, MBC 등 방송사에서 이같은 상이한 방송방식을 변조할 수 있는 TV컨버터 시설을 갖추고 있어 북한 TV가 개방될 경우 이를 수신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미 국내 방송사들은 남북 총리회담, 남북축구 등의 보도를 방송방식을 변조, 국내에서 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방송체제의 개방과 교류는 정치 및 군사정보체제의 개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방송의 개방과 교류는 보다 많은 논의와 여론을 수렴하여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방송의 남북교류를 위한 효율적 방안의 모색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되었다. 여기서는 기존에 논의되고 연구되었던 것들과 덧붙여 실현 가능한 또 다른 방안을 모색해보고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첫째, 휴전선의 경계지역을 따라 방송시설을 확충하여 가급적 많은 북한의 주민이 남한의 방송을 시청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즉 우리도 북한과 마찬가지로 PAL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송출하여 북한의 주민이 이를 시청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안은 또 다른 전파방해 등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남북의 화해 분위기를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둘째, 북한 측이 거부감없이 수용할 수 있는 중립적인 내용의 프로그램을 제작, 송출하는 방안이다. 서독의 ZDF가 중립적인 내용으로 양 사회체제에 대해 균형적인 시각에서 비판적인 고찰을 목적으로 한 Kennzeichen D 프로그램으로 동독 주민을 대상으로 방송하여 동독주민들로부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이런 유형의 프로그램을 제작, 송출하여 남북한 모든 시청자들에게 객관성과 신뢰성을 보여줄 수 있는 중립적인 내용의 프로그램을 제작, 송출해야 할 것이다.셋째, 북한에서 방영하는 북한주민 대상의 프로그램을 개방하는 방안이다. 사회 일각과 일부 연구에서는 북한이 계속 남북방송교류에 응하지 않을 경우 우리 측이 일방적으로 개방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방송의 개방은 북한 측이 북한의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에 대해서 해야지 개성에서 송출하는 선전용 방송에 대한 개방이 되어서는 않된다. 즉 우리와 동일방식으로 송출하는 개성방송의 내용에 보다는 우리와는 다른 방송방식인 PAL방식에 의해 송출되는 평양의 방송내용내에 북한사회에 대한 보다 심층적이고 전문적인 문화적 내용들이 요구되어짐을 뜻한다. 동서독의 경우 동독인들이 오랫동안의 서독 방송을 접촉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후에 이질적인 모습들이 눈에 띄어 갈등이 나타나 사회문제가 되었는데 남·북의 경우 그 이질적인 모습은 동·서독 보다 훨씬 클 가능성이 높다. 남북이 서로 선입견을 해소하고 본격적인 교류 때 발생할 사회문화적 충격을 완화하는 데에는 방송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맡은 바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한 선행조건으로서 방송이 방송 제작상의 이질화를 극복하고 방송 내용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그러한 환경조성은 방송의 남북교류가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틀과 공동의 기술적 기반설립, 협력과 교류의 제도화가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은 방송교류가 남북한의 통일에 미칠 중요성에 비해 이데올로기, 법적·제도적인 차이, 상이한 방송기술 등의 문제로 남북한 방송교류는 이제 시작단계라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남북관계에 대한 관련 법조항(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국가보안법, 특수자료취급지침 등)의 냉전적 부분의 개선 및 페지, 저작권문제, 방송소재의 다양화를 위한 방안 등이 필요하다. 제도화의 일환으로 남북방송교류위원회가 설치되어 산적되어 있는 남북 방송의 이질화극복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서 남북한의 차이를 의식, 일대일 식의 상호주의가 적용되기보다는 보다 순발력있는 대응이 필요하다. 특히 매체별로 남북한의 상이한 방송 방식을 극복하는 기술적 문제는 오늘날 급변하는 방송환경의 변화 속에서 꼭 해결해야 할 선행과제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단시일내에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의 민족동질성을 회복하는 틀로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이 중요할 것이다.< 참고 자료 >[ 남북교류협력실무안내 ] (2001) – 통일부[ 남북한 방송협력 사업을 위한 연구 ] (공동연구)- 남북회담사료(http://dialogue.unikorea.go.kr)[ 남북 방송교류정책
Ⅰ. 서론2000년 남북정상회담이후 남과 북은 평화적 공존을 통한 통일을 추구해 나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적, 자주적, 민족적-민주적으로 분단의 갈등과 적대성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한 통독 및 그 통일과정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적, 자주적 그리고 민주적-민족적 통일의 과정과 교류와 대화의 축적에 의한 적대관계의 점진적인 과정을 잘 나타내주기 때문이다.본 고에서는 특히 독일 통일과정에서의 언론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중점적으로 고찰한뒤 이것이 한반도의 통일에 주는 시사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물론 동서독의 여건과 남북한의 그것이 도식에 넣어서 해석할 정도로 동일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데올로기적 분단을 극복하는 기본과정은 우리의 그것과 동일한 구조이기 때문에 교훈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분단이 하루아침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있는 대화와 줄기찬 교류의 축적에 의해 극복되었고, 민주적 다원주의 사회를 추구한 서독의 민주적, 개방적 대동독정책에 의해 동독사회가 자유화함으로써 동서독이 통합되었기 때문에 서독사회의 통일이니셔티브는 남한의 정책당국과 언론기능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볼 수 있다.Ⅱ. 동·서독의 시기별 언론 정책1. 5·60년대 국제적 냉전기이시기 동서독은 양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적대성으로 인하여 그리고 그것을 강화하는 서독 기민당(아데나워 정권)의 대동독 적대정책과 울부리히트 동독 공산당 서기장의 제국주의 적대정책에 의하여 서로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였다.동독은 사회주의 정책에 의한 언론의 정책선전기구화와 적대 이데올로기 생산기구로 구조화하였고, 서방의 언론 생산물(신문, TV등)에 인민들이 접근하고 수용하는 행위를 엄격히 통제했다.반면 서독은 자유주의 언론정책을 기반으로 동독 및 사회주의 이념이나 언론 생산물의 주민접근과 수용을 오히려 장려하는 그래서 이데올로기 비판능력이나 국민의 정보선택권을 향상 시키는 민주적 정책을 고집한다. 서독내에서는 동·서독의 신문, 잡지, 출2. 70년대 데땅트 시기와 언론개방1969년 취임한 미국의 닉슨대통령은 소련과의 긴장완화를 통한 영원한 평화구조를 미국의 새로운 세계정책으로 취했으며, 소련의 브레즈네프 공산당서기장은 이를 적극 받아들여 화해의 분위기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1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서독의 브란트는 이러한 변화의 조류를 타고 동독에 대한 정책인 독일정책과 공산권전반에 대한 접근정책인 동방정책을 실시했다.{) 서병철 교수는 이시기 동독에 대한 정책인 독일정책과 공산권전반에 대한 접근정책인 동방정 책을 구별지으나, 정용길 교수는 서독의 대동독정책과 통일정책은 물론 대동독 유럽정책과 재 소정책을 모두 포함해 동방정책이라고 부른다. 『분단국 통일론』, (고려원, 1998), p161서독 사민당이 기민당을 대체해 집권하면서 추진된 동방정책은 6,70년대의 동서독의 기본관계인 「병존관계」를 정착시켰다. 즉 동방정책과 대동독 정책은 현국경의 인정 및 동독정권의 실제적 인정과 승인이 그 핵심이었다. 이와 같은 동독 국가의 인정은 동독으로 하여금 서독과 적재자가 아닌 동등한 파트너 의식을 갖게 하였고, 같은 민족으로서 서독이 동독 주민과 겨레에 대한 경제협조나 불행제거 노력에 동독이 긍정적 반응을 보임으로서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동서독 기본조약은 협력 이 그 기본정신이고, 서로 돕는다는 것이 전제되어있었기 때문에 인적, 물적교류와 문화적, 언론적 교섭은 필연적 결과로서 활성화하게 된다.2 동독의 언론정책 변혁동독의 정권이 올브리히트에서 호네커로 이양된 후 조성된 양독간의 정치적인 화해무드는 미디어정책에 반영되어 동독미디어정책을 바꾸는데 전환점이 되었다. 1973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9차 회의석상에서 호네커서기장은 우리 인민은 누구든지 자기 기호에 따라 자유로이 방송을 청취하고 시청할 수 있으며, 수신기 채널 선택권을 가질수 있다 는 방송선언을 하게된다. 동서독에서 동서독 방송경쟁과 교환시청취가 가능해 것이다.전파를 통한 공중전의 양상에서 저널리스트의 교환 및 상주를 통한 지간 동서독의 언론정책」,『저널리즘』, 한국기자협회, 1990, 봄여름호 pp75~76ⅰ)타국가 언론기관 동독 상주통신원의 활동에 대한 1969년 11월 7일의 규정ⅱ)저널리스트의 직업적 행위가능성에 대한 1972년 11월 8일의 서신교환ⅲ)동독에서 타국가의 언론기관과 그 통신원 활동에 대한 1973년 2월 21일의 규정ⅳ)동독에서 타국가의 언론기관과 그 통신원 활동에 대한 1973년 2월 21일의 규정에 대한 1979년 4월 11일의 시행령위와 같은 법제적뒷받침은 동서독간에 설치된 커뮤니케이션 통로에 메시지가 흐르도록 문을 열어 제치는 중요한 미디어 정책적 논거점으로 작용했다. 법제에 의해 변화된 미디어 정책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다음과 같다.·동서독 정부의 상주기자제 도입·동독정부가 허가없이 동독주민이 서독방송 프로그램을 하도록 허락·동독정부의 사회주의국가들과 프로그램 교류 및 서독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로그램 방영이러한 정책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ⅱ,ⅲ,ⅳ 의 법제적 조항은 서독기자들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동서독간의 정치적 긴장을 유발시켰다. 동독주재 외국기자들의 활동에 대한 제재조치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뉴스잡지 슈피겔 지에 취했던 동독사무소의 폐쇄조치로 , 이는 슈피겔 이 동독 주무관청의 감정을 상하게하는 보도를 했다는 이유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그리고 ARD-TV특파원이었던 로타뤼베는 베를린 장벽 탈출자에 대한 사살을 토끼사냥에 비유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Gerhard Dambmann, 「독일통일과 언론의 역할」, 『독일통일과 언론』, 한국언론연구원, 1990, p13이외에 라이프찌히 박람회에 대한 서독기자의 취재불가 조치와 허가되지 않은 서독기자와의 인터뷰에 응했던 키나스에 대한 반국가선동죄 적용은 미디어에 의해 일어난 정치적 갈등의 중요사례가 되고 있다.미디어 정책 차원에서의 갈등적 상호교류는 초기의 임의적인 법적용을 통하여 발생되었고 저널리스트의 활동을 위축시켰지만 서독정부는 동독에 대한 경제정책의 신축적 운용 이에 크게 고무된 동서독 관계는 공존과 공영의 confederation적 관계"로 규정된다. 경제적 원조와 양독 무역량의 증대는 정치, 경제 외적인 문화교류의 필수적인 동반관계로 발전하였다.{) 황인석, 『통일과정에서 방송의 역할과 과제』,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19991 방송통일협정1987년 5월 6일 서독 공영방송의 가장 큰 방송사로서 서독방송을 실제 대표할 수 있는 ARD와 동독 국영방송인 DDR-TV사이에 방송협정이 체결됨으로서 사실상의 방송통일 협정이 조인되었다. 동서독 양 방송사 간에 상호프로그램의 교환, 구매방영하고, 특파원을 교환 상주시키고 상주에 따르는 편의와 서비스를 서로 제공하며 프로그램을 공동 제작하여 방송인들의 실무적 차원의 상호방문과 유인물을 교환제공하고, 행사를 공동주관하며 참여하는 등 포괄적인 자유교류가 공식 합의됨으로서 방송의 수혜자들인 동서독 국민들간에는 실제 정신적, 문화적, 언론적 통일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적-언론적 동서독 접촉교류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했으며, 동시에 특히 동독의 경우 서독의 정치, 사회, 이데올로기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동독주민들이 동서독의 미디어를 함께 수용함으로써 사회주의 낙원 으로서의 동독의 신화와 이데올로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집단적으로 성찰하게 된 것이다.2 뉴포럼 운동과 민중시위 확산후일 동독 미디어 전문가들이 술회했듯 동독 주민의 의식개혁은 동서독 미디어 교환과 통일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동독체제가 개혁만 되고 민주화만 되면 서독으로 구태여 넘어가지 않겠다 는 80년대 후기적 민중의식이 형성되었다.{) 황인석, 위의글 p34적어도 서독에서처럼 동독내에서도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고 자유로이 다양한 가치와 이념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동독의 정치제제가 변화해야겠다는 것이 기존 일당독재의 동독 사회 변혁운동으로 확산된 것이다. 그 변혁 주도세력이 뉴포럼 이었고, 그것은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의 가치판단적 변화운동이 아니라 스템이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로서 민주적 가치를 실현이 높이 평가되고, 동독의 일당 독재언론은 그 구조가 기저에서부터 해체되어야 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3 민중시위의 확산과 언론법 제정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이 대규모 민중시위는 폭넓은 개혁외에 무엇보다도 국가와 동독 공산당에 의한 언론통제, 지배, 감찰로부터 자유로운 언론을 요구하였다. 이 민중시위는 장기간동안 간과되어온 언론인의 의미, 편향된 정보제공 및 여론조작, 사건은폐 등과 관련하여 언론의 자유를 새로운 동독건설을 위한 기본적 전제조건으로 부상시켰으며, 전국적으로 이러한 요구를 확산시킨 불씨가 되었다. 89년 12월 4일 베를린 민중시위는 언론의 자유, 의견형성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새로운 사회주의적 법치국가 형성에 토래를 두어 새롭게 변화되는 동독의 정치적 변혁의 대전제 조건으로 응집하였다. 89년 가을에 발생한 동독의 정치적 변화는 자유언론, 제한되지 않는 다원적 정보제공, 검열제도의 폐지를 중요한 요구사항으로 출발했던 것이다.이 요구는 11월 2일 호이징거 법무장관으로 하여금 언론법 제정을 위한 정부 위원회 발족을 역설케했으며, 다음과 같은 중대한 정치적 표명을 하게했다.모든 사회영역에서 추진되고 있는 변화의 틀 속에서, 또한 보다 진보된 사회주의가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에서 이제는 모든 것들이 더 이상 각료회의에서만 의결되어서는 안되고 인민회의, 동독국회에 의해 의결되어야 한다.언론법 입안에 대한 의회차원의 해결에 대한 정부의 이러한 촉구는 동독 사상 최초가 되는 공개적인 미디어 정책으로 간주되고 있다.Ⅲ. 서독방송이 동독인들에게 끼친 영향서독의 방송은 인쇄출판물에 비해 상당한 이점이 있었다. 방송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동독의 경계를 넘어 동독인들에게 직접 전달될 수있었다. 게르하르트 하프만은 어떤 다른 정보매체보다도 TV가 독일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Gerhard Dambmann, 위의 책 p8동독과 서독의 긴 경계선은 서독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
< 김일성 유일체제 >20117280 북한학과 3학년 문병식* 들어가며1. 유일체제- 유일체제의 개념 및 특징2. 김일성 유일체제의 형성(1) 한국전쟁에서 8월 종파사건까지(2) 60년대 반종파 투쟁과 유일체제 구축(3) 이론적 기초가. 혁명적 수령관나. 사회정치적 생명체론다. 유일체제와 주체사상* 나오며* 참고문헌* 들어가며북한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는 다른 독특한 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런 북한체제의 특징을 이해하지 않으면 북한 사회가 움직이는 시스템을 알 수 없다. 이는 북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독특한 체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사고방시과 행동양식에 우리와는 다른, 그들 나름의 잣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독특한 북한체제의 특징은 바로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최고지도자의 절대권력이 행사되는 유일체제라는 점이다. 현재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선로동당 총비서로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당·정·군 등 모든 권력의 정점에 서 있다. 유일체제는 고도의 동원체제이며 이것을 이용해 투쟁과 승리를 고취시킨다. 또한 북한은 각 분야에서 수령숭배정책을 펴고 있다. 최고지도자와 대중의 일체감을 확보함으로써 '저항없는 개인숭배 시스템'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1. 유일체제- 유일체제의 개념 및 특징북한체제는 마치 종교와도 같은 절대적 유일체제의 특징을 갖고 있다. 유일지도체계는 오늘날 북한사회 조직운용의 기본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수령을 중심으로 전체사회가 전일적인 하나의 틀로 편재되어 있으며 자신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체계까지 갖추고 있는 지도체계이다. 그 특징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권력의 1인 집중이 어느 체제보다도 강도 높게 나타난다. 이 체제는 “수령의 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여 혁명과 건설을 수행하며 수령의 사상과 명령, 지시에 따라 전당, 전민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체제” 로서 이 체제의 정점은 수령이다.둘째, 동원화되고 군사화된 사회체계돌린 김일성은 전쟁이 장기화의 조짐을 보이는 여유를 틈타 당 조직에 관심을 갖고 당 체제 정비에 나서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당 조직을 관장해오던 허가이와 부딪치게 되었다.허가이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서 구역당 비서까지 역임한 거물로 입북 후 노동당 창당의 산파역을 담당하였으며 당무에 경험이 없는 김일성이 당 조직을 허가이에게 맡겨 당을 실질적으로 이끌면서 '당 박사'로 불릴 정도로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런 그도 1951년 11월 제 4차 전원회의에서 당 조직사업에 책벌주의 와 관문주의 를 범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당 조직부장에서 내각 농업담당 부수상으로 밀려났다. 1952년 초에는 허가이에게 평양 근처 순안저수지 개수공사를 완수하라는 과업이 떨어졌지만, 자재와 인력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완수하지 못하면서 다시금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1953년 3월 당정치위원회 회의에서 허가이는 김일성이 농민들의 양곡을 강제수매할 것을 주장하자 다시 한번 김일성과 부딪쳤다. 이로 인해 결국 1952년 말부터 시작된 남로당계의 정부전복사건에 연루됨으로써 막다른 상황으로 몰렸고 1953년 7월 갑자기 당국에 의해 자살한 것으로 발표되었다.6·25 전쟁 과정에서 벌어진 북한 지도부 내의가장 극적인 사건은 남로당계의 몰락이었다. 6·25 전쟁은 당시 조선노동당의 1·2인자이면서 내각 수상과 부수상 및 외무상으로 있던 김일성과 박헌영이 이른바 남조선해방의 이름 아래 일으킨 전쟁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의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1951년 7월부터 휴전논의가 시작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북한 지도부 내에서는 자연스럽게 패전에 대한 책임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로부터 김일성과 박헌영은 자주 마찰을 빚게 되었으며 1952년 12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 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박헌영과 남로당 세력을 염두에 둔 심사의 일단을 당내 '종파주의 잔재'와 '자유주의 경향'에 대해 경고함으로 표출하였다. 이 회의를 전후해 박헌영과 수하의 남로당계 주요 간부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또한 이 회의 당내 주류인 김일성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되었고 이로 인하여 1956년 8월의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였다.김일성 반세기 집권사에서 최대의 위기로 일컬어지는 '8월 종파사건'은 스탈린 사망과 흐루시초프의 등장 및 그의 스탈린 비판 으로부터 발단된다. 이는 전후 권력기반이 강화되는 추세에 어느 정도 비례해 그 강도를 더해 가던 김일성에 대한 개인 숭배의 경향이 다소 주춤해지고, 당을 정점으로 하는 집체적 지도의 의미가 강조되었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당권의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소외그룹이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을 계기로 김일성의 리더십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김일성파는 처음에는 당내외 분위기를 의식해 표면상 이들의 주의주장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부수상 최창익을 비롯한 연안파 인물들과 부수상 박창옥 등 소련파 일부가 연대하고, 사태의 추이를 보아 조선의용군 출신의 장평산 등 연안파 군부인물들이 가세한다는 계획 아래 연합전선을 형성해 김일성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고 나섰다. 이 시점에서 김일성이 사회주의 국가들간의 친선과 경제협력의 목적을 갖고 약 50일간의 장기 외유에 오르자 이 틈을 이용해 조직적이고 구체적으로 거사계획이 추진되었으나 계획단계에서 기밀이 누설되어 김일성파에 반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결국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비판의 선봉에 섰던 서휘, 윤공흠, 김강, 이필규 등이 중국으로 망명함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에게 최대 위기로 기록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김일성파는 내부 결속을 다지고 김일성의 일인지배체제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반종파투쟁'은 북한사회에서 김일성 비판세력을 거의 완전하게 일소시키면서 명실상부한 김일성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를 확립시켰고, 북한 정치과정에서 당내 활력이 될 수 있는 건전한 의미의 다원적 요소까지도 완전히 소멸시켰다. 결과적으로 반종파투쟁은 당내 정치과정의 역동성 탈각과 경직화를 낳은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할권이 갈등과 분열에 휩싸이면서 이런 분위기는 더욱 확산되었다.김일성이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투쟁역사의 전통을 강조한 의도는 사대주의·교조주의 타파를 구실로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력강화를 도모하자는 데 있었으나 민족문화와 역사성에 대한 강조는 김일성이 의도한 범위를 넘어서기 시작하였고, 종국에는 김일성 개인 숭배운동과 부딪치게 되는데, 이런 흐름을 주도한 세력이 박금철, 이효순, 김도만 등 이른바 갑산파 인물들이었다.1960년대 중반을 전후해 북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제도 수립 이후 혁명과 건설에서 제기되는 일련의 이론 문제들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이 과도기문제, 사회주의하에서의 정치도덕적 자극과 물질적 자극의 상호관계문제, 경제발전의 속도와 균형문제 등이었는데, 이런 논쟁의 이면에도 갑산파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들 갑산파 인물들과 그 추종세력들은 우연찮게도 대부분 노동당의 사상·선전부문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로부터 김일성 개인 숭배운동과 당의 공식적인 사상문화정책 사이에 혼선과 모순이 야기되고 있었다. 김일성 개인 숭배운동과 이 개인 숭배운동의 물줄기에 저항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마주치면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1960년대 후반의 갑산파 숙청이었다.갑산파 숙청은 1967년 5월 초 당중앙위원회 제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 정치위원 겸 조직담당 비서 박금철, 정치위원 겸 대남담당 비서 이효순, 사상담당 비서 김도만, 국제부장 박용국, 등을 비롯한 그 추종자 수십 명이 사상검토 끝에 모두 숙청되었다. 이는 갑산파 인물들이 김일성의 과장된 빨치산투쟁과 그것을 근거로 한 무분별한 우상화추세에 저항하다가 정치적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북한이 긴박하였던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전면에 노출되면서 김일성을 비롯한 노동당 지도부가 느낀 위기의식과 그로부터의 대응의 성격도 일부 띠고 있었다.갑산파 숙청이 갖는 의미는 김일성 숙청의 칼날이 범 빨치산계로 분류되는 갑산파에숭배운동과 유일사상체계 확립운동을 주도하고 조장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던 것이다.1960년대 말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숙청으로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일성 유일체제가 뿌리내리기 시작하고 , 이에 편승해 세습승계의 윤곽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제 북한에서 김일성의 존재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라는 특정한 직책의 범위를 넘어 당과 국가, 사회 전반을 지도하는 '위대한 수령'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의지와 영향력도 제도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관철될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3) 이론적 기초가. 혁명적 수령관북한에서는 모든 공동체윤리의 기초에는 최고지도자를 의미하는 ‘수령’이 결부되어 있다. 사회주의 사상은 곧 ‘수령의 혁명사상’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북한의 공동체 윤리와 수령개념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바로 이 ‘수령’이 ‘혁명투쟁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 북한이 제시하고 있는 관점이 혁명적 수령관이다.인민대중은 역사의 주체지만 그들 스스로 역사의 자주적인 주체로 되는 것은 아니며 “오직 노동계급의 탁월한 수령의 영도 밑에 하나로 통일 단결될 때 사회를 변혁하고 자연을 개조하는 혁명의 자주적인 주체로 된다”는 것이다.수령의 지위는 “인민대중의 최고 뇌수이며 통일단결의 중심이며 자주성을 위한 혁명투쟁의 최고 영도자” 로 규정된다. 다시말해 수령은 ‘인민대중의 이익의 최고 대표자, 체현자’로도 표현된다. 이와 함께 수령의 역할은 “인민대중에게 혁명투쟁의 앞길을 밝혀”주는 것으로 규정된다. 즉,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요구와 이해 관계를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는 최대공약수는 인민의 이익의 최고 체현자인 수령, 대중의 최고 뇌수인 수령만이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나. 사회정치적 생명체론북한이 다른 사회와 구별되는 또다른 독특한 사회운용논리와 도덕률을 가지고 있다. 예컨데,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 ‘혁명적 동지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의 이면에는 이론적으로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이라는 틀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