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 정리‘대학’은 옛날 오늘날 대학에 해당하는 최고 고등 교육 기관 태학에서 미래의 통치자가 될 사람들을 상대로 정치의 기본 원칙을 가르친 교과서였다. 적어도 하은주시대 이래로는 학교 제도가 점점 구비되어 왕궁은 물론 수도 및 민간 마을에 이르기까지 학교가 없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여덟 살이 되면 통치자의 자제든 서민들의 자제든 모두 오늘날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에서 일상생활과 이에 필요한 예절 및 예법?음악?활쏘기?말타기?글쓰기?산수에 관한 글을 배우도록 했다. 그러나 열다섯 살이 되면서 이러한 소학 교육을 받은 이들 중에 왕자나 귀족 등 미래의 세습 통치자가 될 자녀나 민간인의 자제 가운데 똑똑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훌륭한 관료로 키우기 위해 태학에 들여보내 궁리하고, 정심하며, 수기하고, 치인하는 도를 가르쳤다. 그 교재가 바로 ‘대학’이었던 것이다.한편 ‘중용’은 원래 최고 통치자가 선정을 위해 자신을 수양하는 원리 원칙과 실천 방안을 제시한 교과서였다. 통치자의 언행 하나하나는 그 사람의 위치상 일정 정치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행복과 불행에 직결된다. 특히 군주 통치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때문에 유교는 무엇보다 통치자의 자기 수양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관건은 무엇을 어떻게 수양할 것인가이다. 이 때 제시되는 원리이자 기준이 ‘중용’이라는 실천 덕목이다. ‘중용’은 ‘어떤 사안에 대처함에 있어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함으로써 지나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현실이라는 것은 항상 유동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고, 유동적인 상태에서 그것도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게 ‘지나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상태’를 결과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내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중용’이라는 책은 이와 같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중용’이라는 윤리적 덕목에 대해 그것이 왜 정당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려운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일상 속에서 쉽게 실천될 수 있는 것일 수밖에 없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2. 구성과 내용1) ‘은 다음과 같다. 대인이 ‘대학’을 통해 궁극적으로는(1) 본인을 비롯한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회복하는 것(2) 정치를 통해 백성을 새로운 인간으로 육성하는 것(3) 그리하여 치자든 피치자든 간에 하나의 정치 공동체 구성원들을 지극히 선한상태, 곧 행복한 상태에 머물도록 좋음을 유지하는 것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이를 위한 실현 방법인 8조목은 다음과 같다.무엇보다는 첫째, 사물의 존재 이치를 먼저 알아야 한다. 따라서 만물의 존재 이치에 나아가는 격물의 단계가 필요하다. 둘째, 이에 대해 알아야 하는 치지의 단계가 요구된다. 셋째, 그 앎에 비추어 진실된 뜻을 갖추어야 하는 성의가 요구된다. 셋째, 그 앎에 비추어 진실된 뜻을 갖추어야 하는 성의가 요구된다. 넷째, 진실된 뜻에 맞는 마음을 바로 하여야 한다(정심). 다섯째, 마음을 바로 한 것은 몸을 바로 하는 것, 곧 수신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여섯째, 집안을 가지런히 해야 한다(제가). 일곱째, 이제는 국가를 다스리는 단계로 나아간다(치국). 마지막 여덟 번째, 일국의 치국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천하 제국의 치국 상태가 요구된다. 이것을 평천하라고 한다.이후 긴 전의 내용들은 경전에서 이3강령, 8조목과 관련된 내용들을 뽑아 이들의 논지를 더 부연 설명한 것이라고 보겠다.2) 중용의 구성과 내용이제 ‘중용’의 구성과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중용’은 심성론과 우주론의 관계 속에서 유교적인 인간 윤리 행위의 가능성을 밝힌 책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요와 순 등 성인들이 도통을 전수하면서 함께 가르침을 준 ‘중용’이라는 윤리의 구체적인 내용과 상황 등을 규명한 책이다.‘중용’의 구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법이 있으나 주희의 방식에 따르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에서 만물의 존재를 결정짓는 하나의 이치를 말하였고, 2장부터는 이 하나의 이치가 만사에 각각 적용되는 방식을, 마지막 장에서는 다시 온갖 현상들이 하나의 이치로 합쳐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 이를 뚜렷하게 증명할 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주자학적 유고에서 가장 중시하는 사서중에 두 책이나 차지하는 ‘대학’?‘중용’ 두 책은 원래 5경 가운데 하나인 ‘예기’속에 들어 있는 각각의 편명들이다. 그런데 이 ‘예기’라는 책은 공자가 강조하기도 한 책이지만 사실상 진시황에 의한 분서갱유로 대부분의 책들이 소실되었다가 한나라에 들어와서 유교가 공식 이데올로기로 채택되면서 다른 책들과 함께 ‘예기’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 수반된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보는 ‘예기’라는 책은 원래의 것이기 보다는 전국 시대부터 한나라 초에 이르는 시기에 재완성된 것으로 여러 유자들의 집체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 때는 ‘예기’ 전체에서 두 편을 차지하는 ‘대학’?‘중용’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어쨌든 두 책의 저술 시기에 대해 현재로서는 다음 세 가지 견해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진나라 말에서 한나라 초에 지식인들이 공유했던 시대적 과제로 통일 시대의 통치 철학을 강구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입각하여 유교도들이 내놓은 대응이었기에 진나라 말기 한나라 초기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시각이다. 둘째는, 공자 이후 맹자 이전에 저술되었다는 견해로서, ‘대학’?‘중용’의 저자로 공자의 제자인 증자와 손자인 자사를 제시하는 시각과 관련되어 있다. 셋째는, 두 책의 사용 용어와 내용을 중심으로 판단하건대 ‘중용’은 춘추 말에서 전국 시대 초에 저술된 데 반해 ‘대학’은 오히려 진나라 말기에서 한나라 초기에작성되었다고 보는 시각이다.그렇다면 처음에 주목받지 못하던 ‘대학’?‘중용’이 어떤 이유에서 사상사에서 부각되었던 것일까? ‘대학’?‘중용’이 사상사에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수당시대에 도교나 불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유교의 자기 극복책 모색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당시 도교와 불교가 성행하면서 그 장점만이 아니라 폐단이 만연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특히 도교나 불교의 탈공동체주의적 윤리관의 만연이 대표적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개교는 정치와 윤리의 분리를 부정한다. 소극적으로 부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양자의 균형적 통합을 추구한다. 즉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쥔 정치가라면 당연히 그에 걸 맞는 도덕성을 갖추고 있을 때 훌륭한 정치력도 나온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통령이 부정부패를 자행하면서 국민들에게 부정부패의 청산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정치가라면 단순한 정치가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적 자격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가라면 당연히 “누구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정신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수양할 것과 그리고 국민들을 다스릴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유교는 다른 어떤 점보다 정치가의 바로 이런 점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사유 체계이다. 그리고 유교의 이러한 특성을 가장 체계적으로, 집약적으로 정리한 책이 바로 ‘대학’이다. 즉 정치가의 끊임없는 자기 성찰 위에 전개되는 자기 수양과 국민에의 행정의 겸비, 곧 수기와 치인의 겸비를 체계화시킨 책이 ‘대학’인 것이다.‘대학’이라는 책은 최고 고등 교육 기관인 대학에서 최고 학문인 대인, 곧 미래의 정치 지도자를 교육하기 위해 최고 학문인 대학, 곧 큰 학문을 교육하기 위한 텍스트이다. 이러한 텍스트 ‘대학’의 취지에 의하면 미래의 지도자를 교육하는 최고 고등 학문은 당연히 윤리학 및 정치학이며, 정치적 실천은 군자의 어떤 사업보다도 우월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유교 교육의 최대 목표는 당시 통치자이자 지도자인 군자 양성에 있었고, 군자는 지도자이므로 정치에의 종사야말로 그의 진정한 사명이다. 다시 말해서 군자 또는 대인의 학문은 궁극적으로 윤리학과 정치학의 성격을 동시에 띠어야 한다.근대의 등장 이래 정치와 윤리의 분리를 당연시해 왔다. 그러나 길어야 근대 등장의 3세기 만에, 짧으면 1세기 만에, ‘정치와 윤리’의 분리라는 테제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각종 인간의 소외, 부정부패의 만연 등의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대학’이 지향하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를 하는 자의 제1목표이고 정치학의 제1과제이다.‘신민’, 곧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정치구성원들의 마음을 밝고 새롭게 하여 새로운 인간형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다. 유교적 교의에 입각하면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만 현실의 욕심에 구애되어 나날이 새로워지는 의욕을 잃기 쉽다. 따라서 정치가라면 언제나 이상을 추구하며 사회의 문화 수준 향상과 인민의 생활수준 향상을 도모하고, 인민이 구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생각과 마음으로 각자의 직무에 임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제2목표이고 정치학의 제2과제이다.‘지어지선’, 곧 ‘지극한 선에 머문다’는 것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서 지극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상 국가나 이상 사회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사 이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라도 이를 위해 정치가가 부단히 정진하는 자세를 보유하는 것이 정치가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며 사명이다. 이 지극한 선, 곧 좋음의 상태를 향한 부단한 추구야말로 정치의 제3목표이자 정치학의 제3과제이고 뿐만 아니라 제1과제와 제2과제의 최종적인 목표이기도 하다.한편 ‘대학’에서는 이상에서 본 정치의 3대 목표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8조목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그것은 한 마디로 ‘수기치인’론으로 집약할 수 있겠다.옛날에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먼저 자기 나라를 다스렸다.자기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먼저 자기 집안을 가지런히 하였다.자기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자는 사람은먼저 자기 자신을 닦았다.자기 자신을 닦으려는 사람은먼저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하였다.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먼저 자기의 뜻을 진실되게 하였다.자기의 뜻을 진실되게 하려는 사람은먼저 자기의 앎을 이루었다.자기의 앎을 이루는 것은 만물의 이치를 깨닫는데 있다.만물의 존재 이치를 깨달은 뒤에야자기의 앎을 이룬다.앎을 이룬 뒤라야자기의 뜻이 진실되게 된 쉽다.
1. 기본 정리배경 : 중국 춘추 시대 주나라주제 : 무위자연의 깨달음과 도와 덕을 바탕으로 한 삶의 자세제재 : 사상원전 : 노자 도덕경연대 : 춘추 시대 말기작가 : 노자2. 구성과 내용1) 노자는 어떤 책일까?‘노자’ 또는 ‘도덕경’이라고 일컫는 책은 춘추 시대 말기 주나라 왕실 도서관에서 관장을 하던 이담이라는 사람이 남긴 것이다. 노자는 원래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것을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가치가 있다고 뒤쫓아 다니는 명예나 권력 혹은 재물에 대해 노자는 모두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럽고 또 주나라의 힘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나 은둔하고자 주나라 서쪽에 있는 함곡관으로 갔다.그 곳에는 국경을 지키고 있던 벼슬아치 윤회가 있었다. 윤회는 세상을 떠나려는 노자에게 간곡하게 청을 했다. 노자는 윤회의 청을 받아들여 상편과 하편으로 된 한 권의 책을 남겨 주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해지는 ‘노자’이다.‘노자’는 5천여 자로 씌어진 아주 짧은 책으로 흔히 ‘도덕경’이라고도 불린다. 그 이유는 상편은 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하편은 덕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훗날 학자들은 상편을 도경이라고 하고, 하편을 덕경이라 하기도 했다.‘노자’는 상편 37장, 하편 44장 합하여 8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마다 노자가 생각하는 이 세상의 이치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특히 격언처럼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교훈이나 깨달음을 짧고 간결하게 적어 놓고 있다.또한 각 장의 이야기들은 대구(짝을 맞춘 시의 글귀)와 각운(시구의 끝에 다는 운)이 잘 지켜져 있어 전체적으로 산문이라기보다 하나의 시처럼 숨쉬고 있다.그래서 ‘노자’는 마치 세상에 널리 알려진 속담과 격언을 하나로 모아 놓은 책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아주 깊으며 비유도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이렇게 ‘노자’가 짧고 간결하게 씌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이 시기에 살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씨 성은 전국 시대에 새로 생겨났기 때문에 노자의 성은 마땅히 노씨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이 시기의 사상가들은 모두 자기의 성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자, 묵자. 장자. 순자. 한비자 등이 그런데 노자 역시 이미 노자라고 불렀지 이자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다.노자가 살던 시대는 춘추 시대 말기이다. 춘추 시대는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76년까지를 말한다. 이것은 공자가 편찬한 ‘춘추’라는 책에서 따온 것으로 ‘춘추’가 바로 이 시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 475년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 각 지방에 자리잡고 있던 제후국들이 서로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던 시기를 전국 시대라고 한다.춘추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힘이 약해지고 제후국들 사이에 패권을 다투는 전쟁이 자주 일어난 시기였다. 주나라는 동주 시대와 서주 시대로 나뉜다. 기원전 770년 주나라의 평왕 때 왕실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게다가 서쪽에 사는 이민족들이 쳐들어와 서울이었던 호경을 버리고 동쪽에 있던 낙읍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주 시대의 시작이며 각지방을 다스리던 제후국들이 저마다 주나라 왕의 깃발을 내걸고 다른 제후들에게 명령하기 시작했다.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에 노자는 태어났다. 노자는 초나라에서 태어났다고 사마천의 ‘사기’에서 밝히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진나라 고현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아들 영비가 결혼하게 되었다. 아내 윤씨는 임신을 했는데 81년이 지나도록 아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왼쪽 옆구리가 찢어지면서 아기가 땅에 툭 떨어졌다. 아기는 세상에 나왔는데도 울지 않았다.이 때 아홉 마리의 용이 땅에서 솟아올라 “깨끗한 물로 목욕시켜라”고 말하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용이 솟아오른 그 자리는 아홉 개의 우물로 변했다고 한다.아기는 목욕을 시켜 주자 벌떡 일어나 말하고 걸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자두나무를 가리켜 “이게 내 성이야”라고 했다. 자두를 의미도 알려졌으며, 특히 지금도 중국 산동 지방 곳곳에는 노자의 이 말이 사당과 묘석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한편 노자는 공자를 떠나보낸 후 기울어져가는 주나라를 떠나 서쪽으로 가려고 했다. 사람들이 서로 권력에 욕심을 내고 억지를 부리는 모습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노자는 벼슬을 버리고 자연적인 삶을 살려고 서쪽으로 떠날 결심을 했다. 어느 날 푸른 소를 타고 진나라와의 국경에 있는 요새 함곡관에 도착했을 때, 그 곳을 지키던 윤희가 노자에게 득도하는 비결을 남겨 달라고 요청했다. 노자는 여기서 ‘노자(도덕경)’를 남겨 주며 모든 사람들이 자연에 순응하는 무위의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하기 시작했다.‘사기’에 의하면 노자가 함곡관을 나선 이후로 그의 죽은 곳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또는 노자는 진나라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2) 노자는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나?(1) 노자의 도와 덕노자가 남긴 이야기의 중심은 한마디로 말해서 도로 이해할 수 있다. ‘노자’ 제 1장에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하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도는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노자가 밝힌 도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도는 우주 만물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물은 액체, 공기는 기체, 돌은 고체로서 이 세상에 있다. 이러한 것들에는 모둔 근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이다.도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것들의 모태, 즉 어머니이다. 어머니인 도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낳고 키우며 완성시키다가 마지막에는 반드시 원래의 장소로 되돌리는 역할을 한다.그런데 그 도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도는 우리가 눈, 귀, 감각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없음, 즉 무의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또 노자는 도와 덕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노자에 의하면 도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낳지만 덕은 이것들을 기르는 작용을 상에서 가장 큰 것이다.이렇게 노자는 도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고 밝힌다. 도는 (1)보이지 않으며, (2)들리지 않으며, (3)잡히지 않으며, (4)밝지도 않으며, (5)어둡지도 않다. (6)끝없이 이어지는 줄 과 같으며, (7)물건이 아니며, (8)어렴풋하지만, (9)영원한 성질을 갖고 있다.(2) 노자가 생각하는 무위자연노자 사상에서 또 하나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무위자연이다. 노자의 무위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노자가 생각하는 무에 대해 알아보자. 노자는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언제나 겉모습만 보지 않고 그 속에 있는 진짜의 모습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한 사람이다.노자가 보기에 겨울이 오면 대자연은 아주 쓸쓸하게 텅 비어 버린다. 무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봄이 오면 여지없이 땅으로부터 싹이 돋고 풀이 나온다.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대자연의 변화에 주목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자연에서 나오고 자연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밝혔다. 노자가 생각하기에 무는 유를 만드는 뿌리인 것이다.이러한 자연은 누군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억지가 없다. 자연처럼 억지가 없는 것에서 무위라는 말이 나왔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말하자면 무위도식의 무위가 아니다. 의도적이고 이기적이고 부자연스럽고 계산적이며 위선적인 모든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저절로 우러나오는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행동이 무위에 가깝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그것의 모범이 바로 우리가 숨쉬고 있는 대자연이며 또 대자연을 낳고 키우고 완성시키는 도인 것이다.사람이 자연과 도를 본받아 무위의 행동을 했을 때 모든 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특히 나라를 책임지고 백성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야 할 임금은 이러한 무위자연의 도에 입각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주장이다. 그런들이 다만 안으로 관찰하고 돌이켜 비추어서 사사로움을 없애고 욕심을 제거하면 저절로 알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이렇게 성인은 진실하고 선하고 참된 사람이며, 소박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다. 또한 말을 꾸미거나 자기 지식이 많다고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런 일은 교활한 사람이나 한다. 오직 대자연이 이 세상의 모든 것에게 자애를 베풀어 이로움만을 주고 자기 자신은 가지려 들지 않는 것처럼 성인은 오직 대자연의 도를 따르며 남에게 베풀기만 할 뿐 다투지 않는다.노자가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는 성인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다. (1)모든 것이 다하면 반드시 변하는 것을 아는 사람, (2)모든 것에 대해 항상 조심스럽게 대하는 사람, (3)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 (4)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고 언제나 도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 (5)검소하게 살아가는 사람, (6)텅 빈 골짜기처럼 겸손한 사람, (7)어떤 사람이든 버리지 않고 어떤 물건이든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4) 노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노자가 살던 춘추 시대 말기에는 정치를 하는 임금이나 대부들이 법령을 조령모개식으로 자주 바꾸고 백성들의 생화에 사사건건 명령하고 간섭하고 규제하기만 하던 시대였다. 전쟁은 끊이지를 않았고 백성들은 풀로 목숨을 이어 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노자의 정치 철학은 이러한 당시 상황을 비판하는 데에서 시작된다.노자는 기성 정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당시의 통치자들이 인위적으로 온갖 수단을 다 써서 백성들을 못살게 군다는 것을 ‘노자’에서 여러 번 지적했다. 노자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정치는 간섭하지 않는 작은 정부가 다스리는 정치이다. 나라가 크기도 조그마한 시골 마을처럼 아주 작은 것이 좋다고 했다.이것은 당시 각 제후국들이 자기 나라의 영토를 넓히는 데 혈안이 된 것에 대한 비판과도 통한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정치를 하는 자가 세금을 가혹하게 수탈하여 자기 배를 채우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이.
1. 기본정리로크는 1632년 8월 29일 영국의 서머셋 주의 링턴에서 시골 변호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양친은 모두 청교도였으며, 그런 이유로 로크 또한 청교도적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로크가 10살 되던 해인 1642년에 영국에서는 내란(청교도 혁명)이 발생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의회군에 가담하여 당시의 국왕이었던 찰스 1세의 가톨릭 정책에 대항하여 싸웠다.그는 활동적이고 다양한 관심과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즉 그는 학자였다가 의사가 되었고, 외교관, 공무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자가 집안에서 독서하고, 명상함, 지식인들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요컨대, 로크의 입장에 따르면 철학자가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키는 것은 경험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는 행위이며, 경험만이 어떤 사물에 대해 깨우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로크는 ‘인간오성론’에서 인간은 생래적 지식내지는 어떤 직관적 지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지식은 관찰, 성찰, 요컨대 경험을 통해 습득되며, 결코 절대적이지도 완전하지도 않다는 점이다.로크의 인생행로 및 이력에 관해 서술해 보자. 1646년 로크는 의회가 승리함으로써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입학하여 그리스 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1652년에는 옥스퍼드 대학 내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진학하였다. 로크는 이 대학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또한 이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660년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서 학생 지도교수로서 그리스 어를, 1662년에는 수사학을, 1663년에는 도덕 철학을 가르쳤다.로크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도 의학에 관심을 가졌고, 물리학에서 보일의 법칙을 발견한 로버트 보일과도 친교를 가졌다. 1654년에서 1668년까지 옥스퍼드 대학에 있었던 보일은 로크보다 5살이 많았으며, 로크는 보일의 경험론적 사유 방법과 과학적 관찰 방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로크는 1664년 옥스퍼드에서의 교수 생활을 그만두면, 거대한 상업 제국을 세계에 건설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찰스 2세의 가톨릭 정책에 반대하였고, 결국 1673년 12월, 대법관의 지위에서 파면당하고 말았다. 물론 로크 또한 서기직에서 사임하였다.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보면, 그가 살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동시에 그 자신이 국왕에 반대하는 정치 지도자와 긴밀한 친교가 그 자신의 정치사상 및 철학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로크는 샤프츠베리 백작의 정치 노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종교적 관용과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억압을 동시에 주장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입장을 ‘관용에 관한 논문’에서 분명하게 개진하였다. 즉 시민적 지배자의 모든 위임, 권력과 권위가 그에게 수여된 목적은 오로지 이것들을 사용하여 그가 책임지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 보존 및 평화를 위함에 있다. 시민적 지배자는 인간의 영혼이나 내세에 대해서가 아니라 현재 사회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권력을 부여 받았다. 따라서 어떠한 종교적 견해든 이로 인해 그 국가의 안전이 저해되지 않는 한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개진하고 있는 의견이 교황의 정부를 제외한 모든 다른 정부들을 절대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을 결코 베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크는 이러한 입장을 평생 동안 바꾸지 않았고, 가톨릭교도를 제외한 모든 종교적 분파들에게 (종교적)관용을 베풀 것을 주장했다.로크는 건강의 회복을 위해 1675년 말부터 1679년 4월까지 프랑스에서 체류하였다. 4월 말 혹은 5월 초에 영국으로 돌아왔고, 샤프츠베리 백작의 비서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 하지만 로크는 건강의 악화로 인해 비서직을 사임하고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으로 돌아가 정치 및 종교와 연관된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찰스 2세의심은 다양하여 교육, 경제, 신학에 관한 글들을 출간하였다. 로크의 말년은 평탄했다. 명예혁명이 성공한 결과, 그의 지인들이 학계와 정계에 포진하게 되었다. 1696년 로크는 무역 및 플랜테이션 위원회의 감독관이 되었지만, 건강사의 이유로 사임하고 커드워스 가의 프랜시스 경의 저택에서 여생을 보내었다. 1704년 10월 28일, 일생을 독신으로 지낸 로크는 마샴 부인이 성경을 낭독하는 가운데 조용히 자신의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2. 구성과 내용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로크의 ‘통치론’은 두 개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하나는 ‘로버트 필머 경과 그 추종자들의 잘못된 원칙들과 토대에 대한 지적과 반박’ 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제 1통치론’이며, 또 다른 하나는 ‘시민 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목적에 관한 논문’이라는 부제의 ‘제 2통치론’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제 1통치론’은 로버트 필머경의 ‘가부장권론’을 비판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다. 로버트 필머 경의 ‘가부장권론’은 ‘완권신수설’에 근거하여 전제 군주정을 옹호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왕권이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그 후계자들의 부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로크는 인간과 세계를 창조한 신은 인간에게 자기의 생존에 유익한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이성’과 ‘자기 보존’의 수단을 부여해 주었다고 반박하고 있다.본 글에서는 현대의 민주주의의 올바른 이해와 함께 민주주의 정치 원리를 독자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적인 의미를 충분하게 담고 있는 ‘제 2통치론’을 원문으로 선택하였고,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경우를 따라 ‘통치론’으로 하였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정치적 환경과 사건 및 변화들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로크는 생전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정치적 사건들을 몸소 체험하였다. 즉 그는 1642년에 발생한 청교도혁명과 1688년의 명예혁명을 그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였다에서 인간들이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 상태로 그리고 모든 사람이 권력과 권한을 동등하게 가지고 있는 평등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로크가 상정하고 있는 자연 상태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전쟁 상태’가 아닌 평화로운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자연 상태가 결코 ‘방종의 상태’는 아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을 파괴할 수 없으며,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떠한 생명체도 죽일 수 없다. 자연 상태에서 실정법은 존재하지 않지만 자연법이 존재한다. 이 자연법은 모든 인간을 구속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법은 ‘이성’을 의미하며, 모든 인간에게 인간은 평등하고 독립적 존재인 까닭에, 어떤 사람도 타인의 생명, 자유 또는 자산에 해악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령하고 있다. 자연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연법의 집행자가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연법은 인간들 상호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의 행동을 규제 및 조정하는 하나의 준칙이다. 또한 자연 상태에서의 ‘자유’는 지상의 우월한 권력의 속박을 받지 않고, 오직 자연법만을 자기를 지배하는 삶의 준칙인 것이다.하지만 로크가 제 3장, 즉 ‘전쟁 상태에 관해’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해악을 가하고자 하거나 다른 인간을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 밑에 종속시키고자 할 경우, 하나의 전쟁 상태로 돌입하게 된다. 이 전쟁 상태는 한 인간을 노예 상태로 만들고자 하는 상태로서, 자연 상태에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유를 강탈하는 행위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전쟁 상태는 적대와 파괴의 상태를 의미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실정법이나 재판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전쟁 상태가 발생하면 무고한 자는 언제라도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상대방에 대해 살해할 권리를 가진다.로크는 제 5장에서 소유권의 발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로크에 따르면, 신은 인간들에게 이 세계를 공유물로 주었고, 동시에 이 공유물을 생활에 유재한다. 따라서 근면의 정도의 차이에 따라 상이한 비율의 재산을 소유하게 된다. 화폐의 사용은 사람들에게 재산을 지속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다시 말해, 부지런한 사람은 부지런히 노동을 하여 자신이 사용하고 남은 잉여물을 화폐로 교환하여 축적할 수 있었던 반면에, 게으른 사람은 노동을 행하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의 재산을 축적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에 차이가 발생하였고, 다른 사람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사람도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자연 상태는 단지 자연법만이 존재하는 까닭에 타인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자를 처벌할 수 있는 공통의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크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연 상태에는 세 가지 결함을 지니고 있다. 첫째, 자연 상태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를 해결할 공통의 척도로서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 승인 및 확정된 법이 없다. 둘째, 자연 상태에서는 법률에 의거하여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공정한 재판관이 없다. 셋째, 자연 상태에서는 정당한 판결을 지원하고 집행해야 할 ‘권력’이 없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자연 상태에서는 법률, 재판관, 집행 권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 자유, 자산들을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없고,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침해를 받을 위험성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완전한 자유와 자연법상의 모든 권리들을 간섭받지 않고 향유할 수 있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타인의 침해와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생명, 자유, 자산을 보존할 권력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연법을 위반할 경우에 대해 심판과 처벌을 할 수 있는 권력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이제 인간들은 서로 모여 자연 상태의 위험성을 극복하고, 나아가 안전한 생활을 보장 및 향유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고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즉 인간들은 생명, 자유, 자산이라는 자연권을 보다 안전하게 누리고, 그들 사이에 발생하는 분쟁을 판결 및 집행할 공통의 권력을 가!
1.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인가?사상적으로 종교적으로 중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제국으로 전파되어 공식 종교로 공인받고 국교화 된 크리스트교를 사상적으로 풀어낸 아우구스티누스 없이는 중세도, 크리스트교도 없었을 것이다. 중세를 이해하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알아야 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알려면 그의 삶을 알아야 한다. 사상가의 사상이란 그 삶으로부터 나와, 사상가의 여정을 모르고서는 사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더욱 그렇다. 다른 어느 사상가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삶과 사상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그의 삶이 곧 사상이요, 그의 사상이 곧 삶이라 할 수 있다. ‘고백론’ 안에서 우리는 삶에 녹아 있는 종교와 사상을 발견한다.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지방의 타가스테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파트리키우스로 당시 시의회의 일원이었고,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크리스트교인이었다. 그는 고향 카가스테와 인근 도시인 마다우라에서 초등 교육과 중등 교육을 받았고, 17세 때 북아프리카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인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마쳤다. 카가스테에서 초등 교육을 받고, 마다우라에서 라틴어와 문법을 공부하고, 카르타고에서는 수사학을 공부했다.카르타고는 대도시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지적인 성숙을 이루었지만, 정치와 교역의 중심지에서 물질주의와 환락에 빠져들었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여자를 만나 동거생활을 하게 되고,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갖는다. 카르타고에서 그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접하는데, 이를 통하여 그는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철학에 관심을 두었다. 이때 그는 진리를 찾는 심정으로 성경을 읽었지만, 이해의 폭을 더 넓히지 못하고 포기한다. 지속하는 지적인 호기심의 자리를 파고든 것은 당시 지중해 연안에 유행하던 마니교 사상이었다. 진리를 추구하고, 선과 악의 근원에 관심을 두었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밟고 있었다. 선과 악의 영원한 싸움의 원인과 그 해결에 대한 답을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서 찾지 못했다.당시 밀라노 교회의 감독은 암브로시우스로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신앙과 이성의 관계설정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알려면 먼저 믿어야 한다.”는 새로운 지평이 그에게 제시되었다. 여기에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도 한몫을 했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신학자의 평가이다. 운명의 도시 밀라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접하는데, 이를 통해서 그는 악의 근원에 대한 마니교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크리스트교 신앙의 합리적 근거를 알게 된다. 마니교에서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크리스트교로 오는 통로가 형성된 셈이었다. 드디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지식 차원에서 많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그동안 이해되지 않은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으나, 아직 신앙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의지적 결단이라는 한계에 봉착했다.머리의 지식 차원의 신앙이 가슴으로 내려와 살아 있는 삶 속의 신앙으로 변화해야 하는 과제를 온몸으로 떠안은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야말로 당대의 고민하는 지식인의 상징이라 하겠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떠안고 무겁게 살아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느 날 자기 집 정원의 무화과나무 아래 주저앉아 서럽게 운다. 머리로만 이해되는 억눌린 신앙의 분출이자 아우성이었을 것이다. 그때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다는 기도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 언제까지입니까? 당신은 영원히 나에게 진노하시렵니까? 나의 이전의 죄를 기억지 마옵소서 ……. 또 내일, 내일입니까? 왜 지금이 아닙니까?”이때 이웃집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노래의 가사대로 옆에 있던 성경을 펴 들고 읽은 내용이 바로 ‘로마서’ 13장 13~14절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의 계기가 된 구정이다. “낮처럼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의 감독이 되어 북아프리카 교회를 관리하고 크리스트교 신앙과 교리를 수호하고 해석하려고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많은 종교 회의를 주도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의 많은 이단론과 맞서서 크리스트교의 정통 교리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도나투스 논쟁과 펠라기우스 논쟁이 대표적으로 도나투스 논쟁은 광신적이고 순결성을 강조하는 종파로서 세례를 주는 자가 순결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주장으로 교회를 분열시켰고, 펠라기우스 논쟁은 자유 의지와 은총의 문제로서 인간이 이미 창조 때 받은 능력으로 자신이 자신을 구원할 자유 의지가 있다는 내용으로 크리스트교의 구원론에 정면 도전했던 종파였다. 이들에 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내놓는데, 이를 통해서 후대의 교회론과 은총론, 예정론 등이 정통 크리스트교의 교리로 자리 잡는다.이 와중에 에스파냐를 통해 침입해 북아프리카를 황폐하게 했던 반달족이 드디어 430년 히포에 이르러 히포 시를 포위하여 완전히 봉쇄했다. 반달족이 히포를 포위한 지 3개월 만인 430년 8월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숨을 거둔다. 반달족의 공격으로 히포 시의 대부분은 불탔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와 도서관은 화마를 비켜 나가 그의 저서 등 많은 자료가 온전하게 지금까지 전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고백론’ 1권 1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 잘 드러나 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하셨으므로, 당신 안에 안식할 때까지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가 특별한 이유는 위대한 성인이 되기 전에 대단한 죄인이었다는 바로 그 점이다.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선 위대성이기에 더 감동을 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2살이 될 때까지 죄 속에 빠져 살았고, 크리스트교 진리에 대한 지적인 확신이 선 이후에조차, 성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신앙으로 가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모든 내용을 매우 암울하게 써 내려가, 청년기에 자신이 가졌을 좋은 점이 독작에게는 는 언제나 착하고 순한 아들이었다. 죽음에 임하여, 모니카는 생전에 그가 자신에게 어떤 거친 말도 한 적이 없음을 증언하는데,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고백한 대로 자신의 엄청난 죄가 어떤 것이든 간에, 이는 사실임이 확실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본질적으로 신실한 사람이었음은 일정기간 함께 살았던 동거녀에 대한 성실성과 그녀가 낳은 아들 아데오다투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친구를 사귀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물론 이것은 위험성을 내포한 것으로, 어린 시절에 친구들에 휩쓸려 과수원에서 배를 훔치는 상황에 직면하고, 청소년기에는 단순히 친구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지었다고 자랑스럽게 고백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적 면모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 일관된 사상을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마니교에 빠지는 이유도 마니교로부터 나와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크리스트교로 오는 이유도 같다. 자신의 삶에서 인식되는 선과 악의 근원을 알려는 지적인 여정이 그의 행로에 압축되어 있다. 인간 인식의 근원으로서의 이성과 감정의 상태라고 보는 신앙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에게서 의지적 결단이 신앙의 열쇠라는 결정적인 말을 듣고, 이 말이 계기가 되어 회심으로 이어지면서 크리스트교와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다.2.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고백록’을 썼는가?‘고백록’이라는 제목을 통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를 자서전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고백록’은 통상적인 자서전이 아니다. 물론 자신의 삶의 여정이 일부시간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실제로 시기적으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공간이 그리 면밀하게 구분되지도 않는 자신의 기억을 따라 시간과 공간이 앞뒤로 움직이면서 중요한 사건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생각을 따라서 서술하는 일종의 ‘의식의 흐름’기법이라 볼 수도 있다. 많은 다른 고백록과는 달리, 시도인 셈이다. 성경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역사를 알도록 기술한 것처럼, 자기를 통해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가 어떻게 작동하고 드러나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인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록했다. ‘고백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느님 당신의 위대함은 찬양받을 만하십니다.” 이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치부까지 포함한 모든 기록을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에로의 찬양으로 인도하려는 사례로, 제물로 바친 셈이다.둘째, 그는 교회의 감독으로 봉직하면서 교회에 들어와 교인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고 훈련할 의무가 있었다. 크리스트교가 공인받기 이전에 교회에 다닌 것은 곧 크리스트교인이라는 사실과 일치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가 로마에서 국교화하면서 모든 기득권을 누리자, 이제 로마 시민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곧 크리스트교인이 된다. 자신의 의지적 결단이 내려지기 이전에, 이미 크리스트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트교인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인이 된다는 사실에는 모든 개별 인간의 자유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는 가슴 저리게 경험했다. 이 상황에서 참다운 크리스트교인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가에 대한 체계적 교육과 훈련이 필요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에 비추어 은총의 인지와 의지적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통해서 명목상의 모든 크리스트교인들에게 죄에 대한 내면적 결단, 회심의 경험이 없이는 진정한 크리스트교인이 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말한다.셋째, 이제 크리스트교인이 된 교인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박해받던 시절의 크리스트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 시대였다. 의지적 결단으로 크리스트교인을 선택했다면, 크리스트교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교인의 당연한 의무인데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침서가 아직 부족했던 상황에서 ‘고백록’은 크리스트교인의 삶에 대된다.
1. 루소의 생애프랑스의 사상가이자 근대 철학과 정치의 비판자인 루소(1712~1778)는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유럽에서 뛰어난 사상가와 저술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정치와 도덕 철학에서 중요한 저술을 남긴 저술가일 뿐만 아니라 작곡가, 음악비평가, 소설가, 식물학자이기도 했다.우리는 여기서 슬픔, 번민, 고독을 가슴 속에 품고 방랑 생활을 하면서 평생을 불행한 삶과 대면해야 했던 한 위대한 철학자의 생애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루소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이전의 철학자들보다 더 잘 접할 수 있다. 루소는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기록한 ‘고백론’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그는 ‘한 인간을 완전히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 주기를 원하며, ‘그 사람은 바로 나’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생활 속에서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을 자기 성찰적 관점에서 잘 기록하고 있다.루소는 1712년 6월 28일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삭 루소는 프랑스계 스위스 인으로 시계 수리공이었다. 시계 수리공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 쉬잔느 베르나르는 루소가 태어난 지 9일 만에 3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이른 사망으로 어머니에 대한 정도 느끼지 못한 채 루소는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루소가 직접 회고하고 있는 것처럼 어머니의 죽음은 그가 자신의 생애에서 직면해야 했던 ‘수많은 불행 중에 최초’의 불행이었다.루소는 13세가 되던 해에 동판공의 도제 생활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이 생활에 전혀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하여 16세에 그는 결국 제네바를 떠나 모험과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단지 방랑 생활의 시작을 예고하는 시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큰 영향을 미쳤던 바랑 부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바랑 부인의 도움을 받아 샹베리에 정착을 할 수 있었고, 동시에 지식을 향한 욕구를 상당 부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약 10년 정도계약론’(1762), ‘에밀’(1762)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신엘로이즈’는 연애 소설로서 1761년 출간하여 1800년까지 72판을 발간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루소의 생활은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1762년 파리의 고등법원은 ‘에밀’에 기록된 종교적 내용과 관련하여 이 서적을 판매 금지시키는 동시에 루소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루소는 제네바로 도망가야 했는데, 제네바의 정부 또한 ‘에밀’에 대해 판매 금지 조치를 내렸기에 그곳에도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프러시아 왕의 영지 모티에로 도망가야 했다. 그는 여기서 조지 키스 총독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그의 이러한 망명 생활은 ‘고백록’이 완성되는 시점인 1770년이 되어서야 끝나게 된다. 1762년에는 루소가 처음으로 여성에 대한 따뜻한 정을 느꼈던 바랑 부인이 죽기도 했다.여기서 루소가 도피 생활 중에 겪은 하나의 일화를 들어보기로 하자.루소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생피에르 섬으로 도망갔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거기에 사는 주민들은 루소의 사상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떠돌아다니는 루소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들은 루소에게 돌팔매질을 가하며 그를 박해했던 것이다. 루소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사상은 곧 민중을 위한 것임에도 민중에게 배신당했다는 느낌은 그를 매우 괴롭혔다. 이러한 사건을 몸소 체험하면서 루소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다진다. “나 자신뿐! 나는 내 마음의 느낌을 알고, 인간을 알고 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그의 신념은 더욱 더 견실하게 자리 잡았던 것이다.1766년 1월 루소는 데이비드 흄과 함께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간다. 하지만 그는 흄과 다툰 나머지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여전히 그의 경제적 생활은 황폐했다. 그는 악보를 베끼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저술 활동은 게을리하지 않았다.1770년 이후 루소는 ‘자연은 인간을 행복하고 선하게 만들었지만 사회가 인간을 타락시키고 불행하게 만든다’ 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폐단과 타락의 경향제11장다양한 입법 체계정치체의 멸망제12장법률의 분류주권의 유지 방법(1)제13장주권의 유지 방법(2)제14장주권의 유지 방법(3)제15장대의원 또는 대표자제16장정부의 수립은 계약이 아니다제17장정부의 수립제18장정부의 월권을 방지하는 방법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1권에서는 주로 최초의 사회, 사회 계약, 사회 상태의 발생에 관해 분석하고 있으며, 제2권에서는 주권의 성격, 일반 의지와 인민의 관계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제3권에서는 우선 정부 일반에 관해 언급하고 있으며, 그런 다음 정부 형태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정부의 형태로는 민주정, 귀족정, 군주정, 그리고 혼합 정부 형태를 들고 있으며, 동시에 각각의 국가는 자신의 환경에 따라 적합한 정부 형태를 가질 수 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주권의 유지 방법과 정부의 권한 남용을 방지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제4권에서는 일반 의지란 파괴될 수 없는 의지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투표, 선거, 그리고 역사적 실례로서 로마의 호민관 제도 등에 관해 분석하고 있다. 결론에서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논의한 모든 내용들은 ‘정치적 권리의 참된 원리’를 수립하고, 이 원리를 토대로 국가 건설을 모색하고자 했음을 짤막하게 지적하고 있다.3. ‘사회계약론’의 문제의식 : ‘자연 상태의 선함’과 ‘사회 상태의 선함’의 상실루소의 정치사상에 대한 문제 제기는 ‘사회계약론’의 제 1권 제 1장에서 진술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인간은 도처에서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에서 출발한다. 즉, “인간은 자연적인 섬함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사회에서 타락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루소 정치사상의 대명제를 형성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신과 타인에게 선한 존재이다. 인간이 자신에게 선한 이유는 자신과 일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며, 타인에게 선한 이유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자하는 자연적 욕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연인은 자유롭게 태어나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안하고 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의 제 1권 제 4장 ‘노예 상태’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인간이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격,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포기는 인간의 본성에 위배된다. 인간의 의지로부터 자유를 완전히 빼앗는 것은 그의 행위에서 도덕성을 완전히 빼앗는 것과 같다.이처럼 루소의 정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곧 ‘자유’이다. 그가 말하는 ‘자유’ 개념은 곧 ‘자유’ 이다. 그가 말하는 ‘자유’ 개념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능력’으로 권리, 의무, 도덕성, 정치권력의 정당성과 같은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계약론’은 자연 상태의 ‘자연적 자유’를 어떠한 방식을 통해 정치 사회, 곧 국가 속에서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 다시 말해 각자는 모든 인간을 결합하면서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고, 이전과 같이 자유로운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 제기에 대한 답을 사회 계약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그리하여 루소는 “구성원 전체의 공동의 힘으로 각자의 신체와 재산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개인은 전체에 결합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고, 이전과 다름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하나의 결합 형태를 발견하는 것” 이라고 사회 계약의 근본 문제를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신체와 모든 힘을 공동의 것으로 하여 일반 의지의 최고 지도 아래 위임하고, 우리가 각 구성원을 전체 가운데 불가분한 하나의 부분으로 받아들인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는 곧 사회 계약이 ‘일반 의지’의 표현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이제 우리는 ‘자유’, ‘일반 의지’, 그리고 ‘주권’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계약론’을 살펴보자. 왜냐하면 이들 개념들은 이 책의 핵심 내용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4. ‘사회계약론’의 내용 :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1) ‘사회계약론’과 ‘자유’먼저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사회 계약에 의한 국가 및 사회 상태의 형성에 점을 알게 된다. …인간이 사회 계약으로 인해 상실하는 것은 그의 자연적 자유, 그리고 그의 마음을 끌고 그가 획득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무제한적 권리이고, 반면에 획득하는 것은 사회적 자유 시민으로서의 자유,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이다. …우리는 개인의 힘 이외에는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 자연적 자유와 일반 의지에 따라 제한받고 있는 사회적 자유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이러한 의미에서 사회 계약으로 인해 발생하는 자유인 시민적 자유는 ‘정당화된 억압의 형태’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루소는 사회계약으로 인해 자연적 평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에 의해 인간들에게 주어진 육체적 불평등 대신 도덕적이고 법률적인 평등을 제공해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을 통해 인간이 체력이나 재능에 있어서는 불평등할 수 있지만, 계약과 권리에 입각하여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회 계약을 통해 전쟁 상태에 있던 자연인은 자연적 자유를 포기한 대가로 시민적 혹은 정치적 자유를 획득한다. 시민적 혹은 정치적 자유는 정치 사회에서 이성을 가진 시민이 누리는 절대적 자유이다.그러나 이러한 사회 계약이 일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루소의 사회 계약은 항상 일반 의지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렇다면 일반 의지란 무엇인가?2)사회 계약과 일반 의지루소는 ‘사회계약론’의 제 2권에서 제 1장 ‘주권은 양도될 수 없다’, 그리고 제 2장 ‘주권은 분할될 수 없다’라는 제목으로 주권의 성격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제 1장 ‘주권은 양도될 수 없다’에서 루소는 “주권은 일반 의지의 행사일 뿐 결코 양도될 수 없으며”, “일반 의지만이 공공의 복지라는 국가 설립의 목적에 따라 국가의 모든 힘을 지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들의 이해관계의 대립을 이유로 사회 건설이 필요한 것이라면, 이들 이해관계의 일치가 사회 건설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서로 대립되는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