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재판에 대해(1) 서론역사는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식과 직접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한다. 그런 이유에서 역사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역사라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사실로서만 이해하려는 단편적인 생각을 가지기 쉽다. 우리에게 역사라는 것은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며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시대적 배경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는지 마녀 재판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한다.마녀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마녀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이 공포를 지니고 있었으나 마녀 재판을 통해 처음으로 처형이 시작된 것은 중세유럽에서부터였다. 처형이 시작되고 재판을 통해 마녀라는 죄명아래 처형된 마녀의 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대략 50만 명에서 100만 명이라는 추정만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엄청난 사건은 시간이 지난 현대에 이르러서도 유사한 경우가 많으며 인간의 이성이 마비된 채 사회의 힘에 의해 개인이 희생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2) 마녀 재판의 시작원래 마녀는 마녀재판이 있기 전부터 존재하였다. 이들은 신비적인 직관과 의학적 지식을 통해 병자를 고치는 주술적인 사람이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지속되었으나 14세기에 이르러 전반적으로 마녀로 낙인찍히고 이단으로 몰리기 시작하였다.그 전 카톨릭의 박해는 1233년 이단 심문소를 설립한 뒤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래를 예측하고 병을 고치며 부부의 불화를 초래하는 사람”을 마녀로 규정하고 주의 할 것을 촉구했다. 교황 또한 이단을 처벌하는데 목표를 두고 마녀에 대한 공통의 특징, 그 식별방법들을 연구하도록 하였다.1484년 12월 5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의 칙서는 마녀의 존재를 공인하고 그들을 엄단하겠다고 선언한 최초의 문서였고 그 뒤 칙서는 마녀사냥의 헌장이 되었다.“최근 우리들 귀에는 참으로 가슴아픈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마인츠, 콸튼, 잘츠부르크, 레이멘 등 북부 독일 지역 교구들에서 다른 지방이나 도시에서와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마녀와 관련된 서적이 많이 출판되었으며 당시의 형법이 마법사를 엄하게 처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로써 마녀의 존재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마녀를 적발, 추궁하는 것은 관리와 주민의 신성한 의무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마녀 박해시대의 배경이 된 것이다.(3) 마녀의 개념과 특징일반적으로 마녀는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원망과 저주를 받는다. 마녀는 다음과 같은 해악을 끼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① 동물과 사람을 죽거나 아프게 하는 일② 생식적 무능을 초래하는 일③ 농작물을 해치는 일④ 태풍을 불러오고 홍수와 가뭄을 초래하는 일⑤ 버터, 치즈, 맥주의 제조과정에 개입하는 일사람들은 위와 같은 행동을 하는 마녀에게 다음과 같은 죄목을 적용하여 처형하였다.- 악마와 계약을 맺은 죄.-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 죄.- 불법적인 악마연회에 참석한 죄.- 악마의 꽁무니에 입맞춘 죄.- 얼음같이 차디찬 성기(性器)를 지닌 남성 악마 ‘인큐비’ (Incubi)와 성교한 죄- 여성 악마인 ‘서큐비’ (Succubi)와 성교한 죄- 악마에게 예배한 죄.그리고 죄목은 추상적이고 황당한 것에서 점차 현실적인 영역으로 옮아갔다.『이웃의 암소를 죽인 죄, 우박을 불러온 죄, 농작물을 망친 죄, 아이들을 유괴하여 잡아먹은 죄.』마녀를 식별하는 방법으로써 첫 번째는 눈물의 결여를 통해 악마와의 계약을 판별하였다.악마와 마녀는 ‘피의 계약서’를 만들면서 악마는 마녀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주고 마녀는 생애를 통하여 악마에게 복종할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방법은 물에 의한 실험이었다. 마녀로 지목된 자를 무거운 바위에 매달아 강이나 늪, 운하에 던져 보는 방법이다. 물위에 떠오르면 악마와 교접한 근거가 되었고 빠져 죽으면 결백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세 번째 방법은 마녀 용의자의 몸무게를 달아 몸이 가벼우면 마녀로 결론 지었다.네덜란드의 한 소도시에서는 마녀의 몸무게를 25㎏으로 규정했다. 1782년 헝가리 어느 지방에서는 이러한 저울시녀를 가장 많이 사용된 방법은 소문과 이웃의 증언이었다. 누군가가 마녀라는 소문이 돌면 즉각 조사가 실시되고 강압적인 신문과 고문 등을 통해서 거짓된 증언을 하게 한다. 어떤 사람도 처음부터 스스로 마녀라고 자백하는 경우는 없다. 이를 통해서 재판이 이루어지며 고문 등에 의한 거짓된 자백은 자유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자백으로 간주되어 버린다.과거 성아우구스티투스는 고문에 의해 죄인으로부터 참된 자백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바보 같은 것 이라고 단정하였다. 384년 로마의 교회회의에서 공식적으로 고문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고문을 금지한 기독교가 고문을 부활시킨 역사적 역설의 주인이 된 것이다.이렇게 고문과 거짓된 증언을 통해 이루어진 마녀의 양산은 어떠한 이유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사회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중세 시대는 사회적으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에서는 사회적 위기에 빠진 책임을 다른 곳으로 전가시키고자 하였다. 교회와 국가, 성직자와 귀족들의 정치적 무능과 도덕적 타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파하기 힘든 적 즉, 악마로부터 대중을 보호해 주는 위대한 보호자’로 변신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고통 당하고 소외된 대중은 풍수해와 경제적 궁핍을 성직자나 탐욕스러운 귀족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가상적인 악마를 저주하게 된 것이다.두 번째 이유는 탐욕스러운 이단심문관들이나 형리들에 의한 것이다. 이들은 급료는 마녀의 머리 수를 기준으로 지불하였다. 따라서 부와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더 많은 마녀를 찾아내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이유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법정에서 유죄를 확보하기 위해 교묘한 고문과 심문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 예로 그들은 자신이 업무를 매우 능률적이고 성실한 직공으로 인식하였으며 스페인의 이단심문소장은 재직 18년 동안 10만 220명을 화형에 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인간으로서의 이성마저도 잊어버린 이단심문관이나 형리들이 오히려 악마가 들은 독일의 법률가 아그리파폰 네테스하임, 예수회 신부이자 신학교수였던 프리드리히 후안 슈페, 법학교수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공을 세운 인물은 크리스챤 토마지우스였다. 그는 1701년 ‘마법의 죄’라는 책을 간행하여 마녀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종래의 학설을 집대성하였다.이전 학자들의 견해는 악마의 원조자가 박해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익명으로 하였다. 하지만 토마지우스는 합리적 시대정신의 선두에서 이전 학자들의 견해를 수용하여 책을 간행한 것이다. 그 뒤로 18세기가 지나면서 마녀라는 올가미를 씌워 고문하고 화형에 처하는 마녀사냥은 자취를 감추었다. 1749년 뷰르소부르크 1건, 1751년 아인팅겐 1건, 1775년 켐텐 1건의 마녀재판이 있었고 그 뒤로는 1782년 스위스의 게랄스라는 지방에서 아인나 켈티라는 마녀가 고문 끝에 참수형에 처해진 것을 끝으로 마녀재판은 유럽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5) 미국 뉴잉글랜드의 마녀재판신대륙에서의 생활은 개척자의 일상활동을 모두 미신적 환경으로 인식하였다. 이미 유럽에서는 과학적인 사고가 유행하였지만 이곳은 전혀 파급되지 않았다. 유럽에서 세분화된 마녀, 주술사, ‘백색마녀’ 등의 구별은 신대륙에서는 “악의 어둠 속에서 일하기로 선택된 사람”으로 단순화하였고, 마녀에 대한 형벌은 가혹했지만 처형 훨씬 더 신중하였다. 신대륙에서는 인구밀도가 희박하였기 때문에 인명을 허무하게 살상하는 것은 사회적 경제적 낭비로 간주된 것이다.미국 식민지의 초기 법률은 마녀에게 사형이 부과 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마녀로 사형 당한 사람은 모두 36명이었고 그중 24명이 1692년 한해 살렘에서 처형되었다. 마녀재판이 성행한 뉴잉글랜드 지방은 청교도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한 곳으로서 일체감을 가지고 있었다. 보스턴의 가장 유명한 성직자 ‘코튼 마더라’는 마녀가 악의 사신이며 하느님과 선택된 인종, 청교도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보내진 것이라고 강연하고 다녔다. 마녀소동은 이러한 사적 사건이다. 어느 역사학자가 말했듯이 역사는 반복된다라고 말을 했다. 실제적으로 현재에 마녀재판과 같은 일이 다시금 벌어지고 있다. 바로 우리 나라에서...‘국가안보법 재판’은 5백여 년 전의 마녀재판과 아주 흡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 첫 번째로 ‘중죄의식’과 공정절차의 실종을 들 수 있다. 국가보안법 사건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으며 그에 따라 사건은 중죄로 인정되었고 특별취급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피고인보호 장치는 인정하지 않았다. 마녀재판 또한 중죄로 취급받았으며 일반 사건에서 허용되지 않는 고문이 가해졌다. 국가보안법과 마녀재판은 체제자체를 부정하고 전복하려한다는 측면에서 중죄로 인식되어 대량의 희생자와 극단적인 피해를 초래하였으며 정당한 재판절차마저 무시하는 근거와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유사성은 고문의 상용이다. 마녀재판에서 마녀라고 고백한 사람들은 대부분 엄청난 고문에 의해 거짓진술 된 것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거짓된 자백을 하기까지 엄청난 고문을 한 것이다. 국가보안법 사건 또한 마찬가지였다. 간첩사건이나 조직사건이 발생하면 고문을 통한 거짓된 자백을 받아내고 가족과 동료들은 연쇄적으로 구속된다. 이러한 면을 볼 때 너무나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탐욕적인 기술자로서의 고문수사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고문을 통해 마녀나 빨갱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물질적 이득과 승진 등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희생을 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법정에서 유죄를 확보하기 위해 교묘한 고문과 심문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고문전문가는 ‘이근안’이다. 그는 일제시대부터 시작하여 5공시대에 까지 고문을 자행한 유명한 인물이다. 남민전 사건, 김성학 사건, 반제동맹당 사건 등에서 고문기술자로 등장했다. 그 뒤 피해자들로부터 고발을 당했지만 당국의 무성의로 10년간이나 검거할 수 없다가 최근에서야 본인의 자수로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