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돌의 역사? 역사서에서의 근거? 온돌의 구조? 기후에 따른 온돌구조? 다양한 고래의 형태? 온돌의 재료? 끝으로매서운 바람에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날씨가 쌀쌀할 때 뭐니뭐니 해도 따끈하게 데워진 방바닥만한 것이 없다. 몸이 나릇나릇 해질 때까지 뜨끈한 온돌방에 엉덩이를 지지다(?)보면 추위와 함께 가끔씩 세상 근심사까지도 모두 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흔히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온돌에 누워있으면 ‘뼈 속까지 시원해진다’는 표현을 한다. 하긴 침대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요즘 세대들이라 하더라도 추운 겨울엔 뜨거운 구들장에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디밀게 되는 것이 사실. 과연 온돌엔 어떤 매력이 있길래 남녀 노소 누구에게나 이처럼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까?온돌은 돌 위에 흙을 덮어 방바닥을 만들고 아궁이의 불로 돌을 달구어 방을 따뜻하게 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난방형태다. 온돌의 돌과 흙이 가열되면 원적외선이 방사되는데, 원적외선은 체내에 흡수되어 체내 온도를 상승시키고, 땀과 각종 노폐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여 여러 가지 병을 치료하는데 도움을 준다.이를 온열요법(溫熱療法)이라 하는데, 온열에는 말초혈액순환의 개선, 신진대사의 촉진, 진통, 근긴장의 저하 등의 작용이 있어, 관절류머티즘, 신경통, 근육통 등 각종 만성염증과 피로회복에 매우 효과적이다. 아기를 낳은 산모가 여름에도 군불을 지핀 온돌방에 이불을 덮고 요양하는 것도 이러한 온돌의 효과를 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또한 온돌은 허리를 보호하고 자세를 교정시킨다. 척추는 우리 몸의 기둥 역할을 하는 것으로, 건강한 척추는 제 역할을 다하는 ‘기능적 단위’와 올바른 ‘척추 만곡’에 기인한다. 기능적 단위란 척추를 구성하는 뼈와 각각의 뼈를 연결하는 디스크라고 불리는 추간판의 총칭. 이는 체중 부하를 효과적으로 받아들이고 운동을 가능케 한다. 척추 만곡은 척추의 굽은 모양으로 수면중의 누운 자세에서도 정상적인 척추의 만곡을 유지시켜야만 기능적 단위와 주위 조직의 긴장을 풀고 ? 온돌의 역사예전 우리네 겨울 생활을 생각해보면, 땔감, 아궁이, 굴뚝, 아랫목 등이 연상된다. 한민족의 난방법이 바닥 난방인 온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돌을 순 우리말로 구들이라고 한다. 구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 선조의 지혜는 어떤 것일까.한민족의 전통문화와 주거방식은 구들이라 불리는 바닥 난방과 관 련이 깊다.겨울철 찬바람이 불어오면 따끈따끈한 아 랫목에 펼쳐둔 이불로 쏙 들어가던 기억이 난다. 따스한 방바닥에 몸을 대고 있으면 몸에 전해지는 열기가 정말 좋다. 나이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절절 끓는 아랫목에 허리를 지지시면서 “어구, 시원하다”는 말씀을 연신 내뱉으신다.요즘같은 때 더욱 정감있게 느껴지는 우리 네 안방의 이런 전경은 우리의 난방법이 바닥 난방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바닥 난방을 하는 방을 우리는 온돌방이라고 부른다. 온돌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알려져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리태니커 사전에 한국의 전통 난방법이라는 설명 의‘Ondol’이란 단어가 있을 정도다.백수가 신세지는 구들장 그러나 온돌은 식자들이 한자이름으로 기술한 것으로 순수 우리말로는 ‘구들’ 이라고 한다. 구들은 ‘구운 돌’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초가집이나 기와집 같은 우리의 옛날 집에서 사용되던 바닥난방시설 그 자체를 말하거나 이와 같은 난방법을 이용한 방바닥 또는 방을 통틀어 가리킨다.구들이 한민족의 생활에 얼마나 친밀했는지는 우리말의 여러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방이 어지러우면 “구들 좀 치워라”라고, 일자리를 잃고 놀고 있 는 사람에게 “요즈음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면 “구들방만 지키고 있지”라거 나 “매일 구들장만 지고 있는 신세지”라고 말한다.구들은 언제쯤 어디에서 발생한 것일까. 학자들은 구들의 시작이 인류가 불을 발견해서 이용한 불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한다. 원시인은 동굴이나 움막에서 음식을 요리하고 추위를 면하기 위해 한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그 주위에 돌을 세워 바람막이를 해 불을 오랫동안 보존해야만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자료를 근거로 구들학자들이 그 기원을 밝혀보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구들의 발생 시기를 밝히기 어렵다.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5만년 전일 것이라고 추측되는 회령 오동의 구석기 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로 추정되는 형태의 바닥과 벽이 발굴됨으로써 그 시기가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약 1백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황하 유역의 주구점 두개골 화석 유적에서 발굴된 바닥에 깔려있는 화원석 등으로 미뤄보아 구석기시대 혹한 지역인 중국 북부나 만주 지역에서 유동하던 원시인들에 의해 초기 구들이 발생됐으리라고 구들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역사서에서의 근거중국 고대기록에서 온돌에 관한 기사가 보이는 것은 《구당서(舊唐書)》가 가장 오래된 것인데, 여기에 기록된 고려(고구려를 말함)항에 보면 “겨울철에는 모두 긴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한다(冬月皆作長坑下然溫火亂取暖)”고 하였으며, 《신당서(新唐書)》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구려 외에 신라와 백제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는 그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고 하며, 신라에 관해서는 “겨울에는 부엌을 집안에 만들고 여름에는 음식을 얼음 위에 놓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것으로 백제에도 온돌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신라도 그 기록이 귀족계급의 생활을 말한 것으로 보아 서민층에 온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이 밖에 온돌에 관한 옛기록은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대금국지(大金國志)》 《고려도경》 등이 있고, 한국의 것으로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목은집(牧隱集)》 등이 있다.온돌의 유구(遺構)로서는 선사시대 조개무지발굴에서 발견된 웅기(雄基)의 주거지와 발해(渤海)에 있는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제5궁전지가 있다. 이와 같이 온돌은 삼국시대 이전에 한반도 북부 및 중국의 동북부지방에 거주하던 부여족 계통의 민족 사이에서 시작된 것 같다. 그것이 4∼5세기부터 심해진 북방계민족의 남하운동에 따라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실시되니 통일신라시대에 이름이 각각 다르다.이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온돌(溫)이라 쓰인 것을 실록(實錄)에서 볼 수 있으나, 같은 실록에서 연돌(烟)이라고 쓰인 곳도 있어 초기에는 온돌이라는 이름이 고정되지 않았으나 이것이 고정된 것은 북관기사(北關記事)가 씌어진 19세기 초 이후인 것 같다.? 온돌의 구조온돌은 방고래를 만들고 그 위에 구들장을 놓기 위한 흙 또는 돌로 쌓아올린 두덩을 만든다. 그 위에 두께 5∼8 cm의 판판한 화강암을 돌로 받쳐가며 일정한 높이로 놓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르고 아궁이에 불을 때서 그때까지 만든 부분을 건조시킨다. 그 후 새벽을 바른 다음 초배를 하고 다시 건조시킨 후 장판지를 바른 것이다. 아궁이에서 굴뚝에 이르는 방고래 형식에는 1로식 ·2로식 ·다주식 등이 있으며, 연기가 방고래 전체에 골고루 지나가도록 하고, 바닥은 아궁이에서 굴뚝으로 갈수록 약간 높게 만든다.따라서, 구들장 위에 바르는 진흙의 두께는 아궁이쪽이 두텁고 굴뚝 쪽은 얇게 되어 방바닥 전체가 골고루 따뜻하게 된다. 그러나 방고래의 길이가 너무 길면 불이 잘 들지 않고 연소하기 힘들다. 오늘날은 개량식 온돌로서 보일러를 설치하고 방바닥에 파이프를 매설하여 난방하거나, 연탄보일러로 온수를 순환시켜 난방하는 방식이 많이 보급되고 있다.장단점온돌은 한국의 독특한 난방법으로 열의 효율이 좋고 연료나 시설이 경제적이며, 고장이 별로 없을 뿐 아니라 구조체에 빈번한 손질이 필요하지 않다는 등의 장점이 있다. 그러나 열전도에 의한 난방이므로 방바닥면과 윗면의 온도차가 심하여 누워 있는 사람의 위생에 좋지 않으며,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방을 밀폐하므로 환기가 잘 되지 않고, 습기가 없어져 건조되기 쉬우며, 가열시간이 길고 온도조절이 어렵다는 등 단점도 있다.일반적으로 연탄을 연료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구조상의 부실과 사용상의 부주의로 인한 가스중독사고가 빈번하여 건축법(제56조 온돌의 구조 등)으로 온돌의 안전한 시공을 위한 시공자의 자격과 시공방법 등을 규제한다.? 기후에 따른 온돌구조 외가가 덜 춥고 따라서 위생적으로 구분해도 그 우위를 감당해 낼 수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서한여 온돌과 남한형 온돌에도 차이가 있는데 그 전형적인 차이는 서한형의 온돌이 연속구조를 하고 있는 데 비해 남한형의 온돌은 온돌방과 온돌방 사이에 마루를 놓은 단절구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집 구조가 직선으로 돼 있을 때 왼쪽이 부엌이요, 중간이 온돌방, 오른쪽이 온돌방 식으로 연속돼 있는 것이 서한형이요, 왼쪽 부엌 그 다음이 온돌, 그 다음이 마루, 그 다음이 온돌방 식으로 단절돼 있는 것이 남한형이다. 서한형의 온돌은 연속돼 있기에 비록 온돌과 온골과는 벽으로 차단돼 있지만 아궁이만은 단일항으로 연속돼 있다. 한 아궁이 불기로 두 방을 덥히는 경제적 구조라 할 수가 있다. 이에 비해 남한형은 마루가 방 사이를 차단하고 있기에 온돌방마다 아궁이가 따로따로 돼 있다. 압록강, 두만강 이북인 만주지방의 온돌구조는 북한형과 같으나, 북한형의 아궁이가 하나인 데 비해 아궁이가 세 개라는 삼면구조가 특색이랄 수 있다.1810년 기술된 것으로 보이는 서청의 를 보면 만주지방의 온돌은 다음과 같다. "옥내삼면에 아궁이가 있어 불 때어 방을 덥힌다. 땅 아래가 항상 언 채로 굳어 있기에 그렇게 해도 추위를 쫓을 수가 없다. 여름 삼복에도 하루 이틀 사이에 꼭 한 번씩은 불을 때지 않으면 허리병이 생기기에 이렇게 불을 때고 허리를 지지곤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친근한 몇 집이 한 방에 살며 손님이 와도 그 여러 가족 틈에서 기거침식을 같이 한다." 한 집에 복수 가족이 같이 산다는 것은 곧 혹한을 이겨낼 만한 에너지 부족에서 빚어진 현상일 것이다. 이 만주보다 남쪽인 북중국형 온돌은 앞서 카펜터 박사가 지적했듯이 북한형에 가깝다. 부엌과 방이 동일공간이란 점은 같으나 다른 것이 있다면 온돌방 전체에 아궁이가 들어가 있지 않고 그 절반만 온돌방이요 나머지 절반은 온돌방이 아닌 냉방이란 점이다. 이같이 동일공간의 온돌에 온냉 차이를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은 만주지방보다는 더 더운 날셈이다.
동양의 도와 지혜1. 사기(史記)의 구성;본기(本紀),표(表),서(書),세가(世家),열전(列傳)2. 갑골문에 대한 기본지식10만여조각. 3000-3500글자, 해독1300-1400, 중복제외시2000자10천간 12지지로 날짜기록, 1년은 12개월, 큰달 30, 작은달 293. 봉건제도; 가신에게의 토지분배를 통한 권력분배종법제도; 가정의 계승제도를 정치에 적용 천하를 가정화 시킴(장자상속)4. 제자백가의 기원; 정설은 없다여러사상가와 수많은 학파란 의미, 봉건제도의 붕괴로 관리들이 민중속으로 흩어짐->관리와 교사의 분리로인해 교사들에 의해 여러종류의 학파가 생김1. 논어의 ;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것 , 논어의 종류= 노론, 제론, 고론2. 인과 충서의 개념 및 관계; 인=사람을 사랑하는 것, 충서= 정성을 헤아림충서는 인을 달성하는 실천 공부이다3. 시인여기(視人如己); 남을 나와 같이 여기는 것, 추기급인(推己及人); 나를 미루어 남을 헤아림4. 맹자의 ‘인자(仁者) 인야(人也) 인자무적(仁者無敵)의 뜻‘인’이라는 것은 사람이 행하는 것이고, 인을 행하는 자는 적이 없다.5. 효의 문자상의 의미와 공자의 효의 의미;노(老)+자(子)=효(孝) 라는 회의자로 봉양이라는 의미->부모를 공경하라, 걱정을 끼치지마라, 원망하지 마라6. 부모유기질지우(父母唯其疾之憂)의 뜻과 의미; 부모는 오직 자식의 병을 근심한다->걱정을 끼치지 마라7. 정명론(定命論)의 개념; 대의 명분을 명확히 하라8.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臣父子)의 뜻과 의미; 그이름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9. 정자, 정야(政者.正也), 위정이덕(爲政以德)의 뜻과 의미;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 정치는 덕으로 하는 것이다.1. 맹자의 성(性); 인간 심성의 본질->도덕적 본성2. 성선설(性善說)의 뜻; 사람의 심성은 선하다3. 불인지심(不忍之心); 남의 고통을 보고 차마 견디지 못하는 마음사단지심(四端之心); 인(측은),의(수오),예(사양),지(시비)의 4가지 실마리의 마음4. 맹자의 성(性); 각종 존재가 갖는 특유한 본성,고자의 성(性);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자연 생명의 본능5. 음식남녀(飮食男女)의 의미; 식욕과 성욕->본능6. 민위중 사직차지 군위경(民爲重 社稷次之 君爲輕)의 뜻과 의미백성이 가장 중하고 국가가 다음 임금이 가장 가볍다.-> 인민을 위한 정치7. 혁명설의 의미; 덕성을 갖추지 못한 임금을 폐하는 이론적 배경8. 왕도정치; 인간의 본성(선)에 바탕을 둔 정치패도정치; 무력 강압에 의한 정치9. 사대; 사소와 짝이 되는 말로 평화적 외교관계를 설명사대주의; 대외 의존적 민족성 지칭1. 순자의 성의 개념;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본능(성은 악하다)2. 성악설(性惡說)의 뜻; 사람의 성은 태어날때부터 악하지만, 교화를 통해 선할수 있다3. 인지성악 기선자위야 (人之性惡 基善者僞也)의 뜻과 의미사람의 성은 악하다, 선한 것은 인위적 노력의 결과이다4. 화성기위(化性起僞)의 뜻과 가능근거성을 변화시켜 인위적 노력을 일으킴, 교화(사법과 예의)5. 맹자 ‘인개가이위요순(人皆可以僞堯舜);성에 선이 내재하여 확충공부를 통해 성인의 경지순자 ‘도지인개가이위우(塗之人皆可以僞禹);성은 악하므로 교화를 통해 성인의 경지1. 13경(經); 역경,서경,시경, 주례,의례,예기, 춘추좌씨전,춘추공양전,춘추곡양전, 논어,효경,이아, 맹자2. 대학(大學)의 뜻; 군자.대인의 정치이상을 밝힌책(대인의 학문)3. 3강령; 대학의 3가지 목표-재명명덕-밝은 덕성을 더 밝게 한다.(수기)재친민-백성을 친애함(치인)재지어지선-최고의 선에 머무른다.(도덕적 인간, 도덕적 국가)8조목; 대학의 이상에 도달하는 8가지 순서-격물(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연구), 치지(올바른 앎에 이름), 성의(뜻을 참되게 한 다.), 정심(마음을 바르게 한다), 수신(인격을 수양한다), 제가(가정을 가지런히 한 다), 치국(나라를 다스린다),평천하(천하를 평안케한다.)4. 대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 인격 수양을 하라, 덕성이 정치의 기본이다.1. 중용(中庸)의 뜻; 때에 알맞은 행동을 하는 것. 보편타당하며 항상 일정한 것2.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의 뜻천명을 성이라 하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 사람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닦는 것을 도라 한다.3. 성자 천지도, 성지자 인지도(誠者 天之道 誠之者 人之道)의 뜻과 의미참된 것은 하늘의 길이다. 참된 것을 참되게 하는 것은 사람의 길이다.->하늘의 뜻에 따라 참되게 살아야 한다.4. 중용이 말하고자 하는 것; 사람은 참된 하늘로부터 본성을 부여받았으므로 참되게 사는 것이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1. 주역(周易)의 뜻; 주나라의 변화에 관한 책2. 괘(卦)?; 점칠 때 사용하는 부호3. 팔괘의 이름과 그림; 건, 태, 리, 진, 손, 감, 간, 곤4. 주역은 64괘, 한괘는 6효, 모두384효로 구성되어 있다.5. 건괘의 괘풀이 글을 해석- 효풀이글건, 원사이점- 크게 형통하니 이롭다는 점이다.초구, 잠용물용- 아직 때가 아니니 사용하지 말라구이, 현용재전,이견대인- 용이 나타나니 대인의 도움을 받으면 이롭다구삼, 군자종일건건, 석척약, 려무구- 하루종일 삼가고, 저녁때까지 두려워한다면 근심이 있어도 허물이 없다.구사, 감약재연, 무구- 연뭇에서 뛰고 있으니 허물이 없다.구오, 비용재천, 이견대인- 용이 하늘을 날으니 대인을 만나면 이롭다.상구, 항용유회- 끝까지 날아간 용이니 후회가 있다.7.태극기가 의미하는 것; 하늘과 땅이 자리를 정하고,산과 물이 기를 통하며, 우레와 바람이 서로 근립하고, 물과 불이 서로 꺼리지 않는다.1. 양주가 말하고자 하는 것 두가지; 위아주의, 경물중생2. 도가의 불로장생술 3가지; 호흡법(축기법), 먹는법(식선법), 방중술1. 도(道)의 개념; 변화를 지배하는 법칙2. 도가도,비가도(道可道, 非可道)의 뜻과 의미;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경험계의 언어로 초월계의 도를 설명할 수 없다.3.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뜻과 의미;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4.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뜻;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함5. 대도폐, 유인의(大道廢, 有仁義)의 뜻과 의미; 큰 도가 무너지자 인과 의가 나타났다.->인과 의는 도덕이 타락한데서 생기는 현상절학무우(絶學無憂)의 뜻과 의미;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인위적인 것을....6. 노자가 말하는 인생태도;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낮추어라7.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뜻과 의미; 물보다 훌륭한 것은 없다. ->자신을 낮추어라8. 무위이치(無爲而治)의 뜻과 의미; 무위의 정치->다스리지 않는 정치9.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보이는 노자의 이상국가; 소국과민(小國寡民)-작은 나라 적은 백성1. 소요유편에서 장자가 말하는 것; 인간은 상대적 가치기준에 얽매여 자신을 구속한다.2. 소지불급대지(小知不及大知)의 뜻과 의미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인간은 상대적 가치기준에 따라 가치 판단한다3. 소요유편에 나오는 도가의 이상향; 무하유지향=광막지야->인위적인 것이 없는 마을4. 만물제동(萬物齊同)의 뜻과 가능근거; 초월(무위자연)의 경지->제물(만물을 동일하게여김)5. 호접몽에서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 가치의 대립을 하나로 보면 꿈도 현실이요, 인간도 나비로 물화된다.6. 시역피야, 피역시야(是亦彼也, 彼亦是也)의 뜻과 의미;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이 이것이다.-> 시비와 분별을 없앰7. 안시이처순(安時而處順)의 뜻; 살아있을때는 편안히 여기고, 죽음에 순응한다.8. 장자는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보았는가; 삶과 죽음은 하나다.9. 서산대사의 시;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연1. 명가(名家)의 개념; 절대적인 명과 상대적인 실의 본질 및 관계에 관심2. ‘불은 뜨겁지 않다(火不熱)‘를 주장한 사람과 이유;혜시->이름으로서의 불은 뜨겁지 않다.3. 흰말은 말이 아니다(白馬非馬)를 주장한 사람과 이유;공손룡->흰말(白馬)은 색깔과 동물을 더한 말(言)이므로 동물을 지칭하는 말(馬)과 다르다.
일본의 국제평화 유지활동목차Ⅰ.일본의 패전과 평화 헌법1. 평화 헌법2. 미 일 안전보장 조약Ⅱ.신냉전체제와 일본1. 1970년대까지의 일본2. 1980년대의 일본3. 일본 군사대국화와 당시 국제 정세Ⅲ.냉전종결과 일본의 정치 군사 대국화1. 걸프전의 발발2. PKO법안3. 안보리 상임 이사국진입을 위한 노력Ⅳ.결론Ⅰ.일본의 패전과 평화 헌법1. 평화 헌법제 9조: 『국가의 주권 발동으러서 행하는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다른 국가와의 분쟁 해결 도구로서 행하는 것은 이를 영원히 포기하할 것. 육해공군 그밖의 전력의 유지는 이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 다카나 아키히코 [ 戰後 일본의 안보정책 ] 도서출판 중심, 2002년 p28전후 일본의 안보 정책은 평화 헌법이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일본은 태평양 전쟁의 패전과 함께 패전국의 위치로서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국제 사회에 신뢰를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미국이 요구한 전쟁포기 조항을 헌법에 삽입하였다.헌법에 이 조항을 삽입함으로써 일본은 천황을 전범으로부터 구해내고, 미국측에서는 천황의 존재로 점령행정을 용이하게 수행할수 있었다.군국주의가 패전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옴으로해서, 군사력에 의한 안전보장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위험한 것인가를 절감한 일본국민들은 이 법을 지지했다.이 평화 헌법은 '아시다 수정'을 통해서 『전쟁과 무력행사와 무력에 의한 위협을 포기한 것은 국제분쟁의 해결 수단의 경우 일 뿐 자위를 위한 전쟁과 무력행사는 이 조항에 의해서 포기되어진 것이 아니고 또한, 침략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는 경우의 전쟁도 이 항목 적용 이외의 것이다』) 다카나 아키히코 [ 戰後 일본의 안보정책 ] 도서출판 중심, 2002년 p33라는 것을 밝혔다.2. 미 일 안전보장조약) 다카나 아키히코 [ 戰後 일본의 안보정책 ] 도서출판 중심, 2002년 p37∼45미소 양국간의 냉전이 시작되고 한국 전쟁 발발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과의 강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격화되는 냉전속에서 일본내의 기지를 가능한 장기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하고 싶은 욕망과 일본을 서측 진영에 묶어두기 위해 조기 강화를 실현해야 한다는 상반된 두 가지를 1951년 체결된 미 ·일안전보장조약을 통해서 얻었다.이 조약은 미군의 주둔을 규정하고 일본 내의 기지를 제3국에 대여할 경우 미국의 동의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일본에 대규모 내란이나 소요가 발생하여 일본정부의 요청이 있거나 일본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있을 때 미군이 출동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으나 1960년 신조약에서는 일본 국내의 정치적 소요에 대한 미군의 개입가능성과 일본이 제3국에 기지를 대여할 경우 미국의 동의권을 필요로 한다는 조항이 삭제되었다.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자국의 안보비용을 미국에 전가시킴으로써 경제개발에 전념할 수 있었다Ⅱ.신냉전체제와 일본1. 1970년대까지의 일본) 길승흠 [ 현대일본정치론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년 p26870년대 말까지 일본은 저자세, 평화지향 국가였다. 그러한 일본이 1980년대에 들어와서부터는 정치, 군사대국화의 길을 걷게 된다.1970년대 말가지의 일본의 외교안보태세는 지극히 평화지향적이었다. 그것은 미점령기의 요시다 수상에 의한 요시다 노선으로 표현되는데, 그 내용으로첫째, 일본은 경제 부흥과 성장을 국가의 제1의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해서 친미노선을ㄹ 추구한다는 것과, 둘째는 겨제 부흥정책을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 군사태세는 저수준에 묶어두고 재무장 때문에 생길 수 있는 국론 분열을 피하겠다는 것이고, 세 번째로 일본의 안보는 미국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하고 미군의 일본 주둔을 허용하는 미일 안보조약에 의지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일본은 당시 미국 정부의 여러차례의 30-35만 병력 재무장화 압력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요시다 노선을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세 평화지향적인 노선은 70년대말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크게 두가지의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하나는 방위관계비의 GNP비율이 1955년 1.78%에서 1976년 0.84%까지 내려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69년 사또오 수상 시절에 채택된 전수방위 개념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자위대의 행동반경을 일본 영토에 국한시키겠다는 것이다.2. 1980년대 일본의 군사대국화) 길승흠 [ 현대일본정치론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년 p269-271일본은 미국과 함께 70년대 후반부터 도욱아에서 눈에 드러나게 나타나기 시작한 소련의 패권주의를 공동의 위기로 취급하고 종전과 달리 대미안보협조에 군사대국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재무장 압력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평화지향의 노선을 택하였던 50년대 전반기의 일본과는 대조적이다. 80년대의 일본의 군사대국화 노선은 크게 두가지 형태를 통해서 나타났다. 하나는 방위비 예산의 증가, 다른 하나는 자위대의 행동반경확대이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1978년 11월 미일 양국간에 합의를 통해서 이룩된 미일 안보협력을 위한 지침에 따라 실현되었다. 이지침은 제1항 전문에 관한 것, 제2항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취할 태세, 제3항 일본에 대한 무력공격이 있을 때 대처할 행동, 제 4항 일본이외의 극동사태로서 일본의 안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경우의 미일 사이의 협력에 관한 것이다.우선 일본은 제2항에 따라 방위비 증가에 적극적 태도를 취하였다. 일본의 방위관계비는 88년 세계 3위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80년대말 일본이 가지고 있는 군사력은 의외로 컸다. 한편 일본은 과거의 전수방위의 개념을 버리고 자위대의 행동반경도 1천해리 해역으로까지 확대시켰다. 일본은 지침의 제4항인 일본이외의 극동지역의 방위문제에 있어서도 대미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대표적 예로 일본이 스즈끼 수상이 81년 5월 미국을 방문하여 레이건 대통령에게 소위 1천해리,해역의 방위를 일본이 담당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그의 뒤를 이은 나까소네 수상은 83년 1월에 방미하여 이상의 사실을 재확인했다. 이상에서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일본의 방위개념이 자국방위에서 지역방위로 확대되고 더 나아가서는 그 이상의 방위도 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미일간에 안보협조가 잘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3. 일본 군사대국화와 당시 국제 정세과거 미국의 재무장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저자세 평화지향적인 안보태세를 유지하던 일본이 1980년대에 들어와서 이상과 같이 군사대국화에 적극성을 보이게 된 것은 동북아에 새로 나타난 신냉전체제 때문이었다. 1974년 앙골라에 이어, 75년 베트남에 친소정권을 수립한 소련은 79년 아프카니스탄마저 친소화 시킨다. 당시 세계의 관심은 소련의 패권주의의 다음 대상지는 중동국가인 이란이 아니냐로 솔렸다. 이란은 산유국이였으므로 미국은 일본 요코스카 항구를 모항으로 하고 있는 제7함대의 전력을 상당부분 중동해역으로 이동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이 제7함대의 전력을 일본근해는 물론이고 서태평양, 인도양, 걸프만 등 넓은 해역에 분산배치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소련은 태평양 함대의 전력을 강화하고 있었다.새로 출범한 레이건 행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동북아 안보정책을 적극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에서는 레이건 행정부만이 아니라 의회 쪽도 몇차례에 걸쳐 청문회를 열어 1천해리 해역의 안보, 동해의 해역봉쇄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다. 따라서 일본은 대미 안보협조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Ⅲ.냉전종결과 일본의 정치 군사 대국화1. 걸프전의 발발1990년 8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냉전하에서는 초대국이 안보리에서 거부권 발동으로 인해 마비되었던 유엔의 국제질서 기능이 냉전종식과 함께 걸프전에서는 제대로 발휘되었다. 이로 인해 과거와 달리 국제 평화 유지에 대한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게 된다. 냉전 종결 때의 일본은, 전세계의 GNP의 15%를 점유하는, 세계 제2의 경제초대국이며, 그 경제를 살리는데 필요한 석유의 70%를 걸프지역에 의존했다.) 다카나 아키히코 [ 戰後 일본의 안보정책 ] 도서출판 중심, 2002년 p2981975년 이래의 주요국 G7 정상은 미국 유럽 일본의 3극으로써 구성되었으며, 그것은 석유위기를 극복하고, 국제경제를 조정하며, 냉전을 서방측의 승리로 이끄는데, 유엔 이상의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일본을 향한 국제 사회의 엄격한 시선은 큰 국제적 비중과 작은 책임감간의 괴리에 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걸프전 당시 일본은 130억달러에 달하는 재정지원과 약간의 문민활동을 전개했으나, 냉전후의 국제 위기에서 그 위상에 걸맞는 적절한 대응을 취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들어야했다.) 길승흠 [ 현대일본정치론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년 p2772. PKO협력 법안과 파병걸프전쟁에서 미국과 서구 각국은 유엔 다국적군의 활동에 대한 일본의 인적 기여를 요청하였으나 일본은 인적인 기여에 대한 준비는 물론, 갑작스런 국제 사태에 대응할 법적인 준비가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의 평화 헌법이 집단 안전보장에 대한 자위대의 참가를 허용하고 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한번 부결되었던‘국련평화협력법안’을 2차로 제출해 1992년 6월에 성립된 것이 바로 ‘PKO법안’이다.
서양건축사▷ 목 차 ◁■초기기독교 건축2●건축양식의 특성2●바실리카식 교회 (Basilican Church)2■비잔틴 건축6●건축양식의 특성6●교회건축7■사라센 건축8●건축양식의 특성9■로마네스크 건축11●건축양식의 특성12■고딕 건축15●건축양식의 특성16■르네상스 건축19●건축양식의 특성19?참고문헌22■ 초기기독교 건축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부터 로마네스크 양식이 시작된 9세기경사이에 기독교 건축에 집중되어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지역에서 전개된 기독교적 건축양식원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특별한 종류의 그리스도교 건축을 세울 의도는 없었다. 이들은 유태교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2가지 종류의 종교건물 형태를 알고 있었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신전이며 또 하나는 주일 평예배와 교육을 위한 모임장소로서 여러 도시에 세워져 있는 유태교회당 이었다. 313년후에 기념적인 그리스도교 건축이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자기들의 기념적 건축의 출발점으로 이교도적인 그리이스나 로마의 신전을 채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교회는 처음부터 신의 주거가 아니고 신을 믿는 사람의 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공공집회용 건물로 설계된 양식에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고대로마의 바실리카로 이중에서도 바실리카 울피아가 좋은 예이다. 즉, 그리스도교 건축의 근원은 종교적 이교도의 건축이 아닌 속세적 이교도 건축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식 교회인 직사각형의 건물형태에 관해서만은 특히 그러하다.● 건축양식의 특성? 재료 및 구조? 재료나 구조에 있어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지 못하여 로마의 건축양식을 계승? 로마에서 사용되었던 두 가지 구조방식을 지속적으로 사용? 기둥과 보에 의한 가구식구조? 기둥과 아치에 의한 아케이드 구법? 기독교 건축의 발달? 대부분의 건축활동이 기독교에 집중되어 교회, 세례당 등의 기독b, detail of 3rd [C.] panel, mid-4th century A.D.Sant' Apollinare Nuovo:interior, detail of N. wall of nave showing mosaic of the Three Magi, ca. first quarter of 6th centuryBaptistry of the Arians:interior, detail of dome mosaic of the Baptism of Christ, ca. 493-526 A.D.Baptistry of the Arians:exterior, view from E., ca.493-526 A.D.중앙집중적인 초기 그리스도교 건물형태인 martyrium 역시 고대로마에서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황제의 영묘로서 이중 스팔라토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궁전에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따라서 2가지 건물형태가 생겨나게 되었다. 하나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식 교회로서 제단을 위한 앱스가 한쪽 끝에 부착되어 있는 직사각형의 건물로 되어 있으며, 형태상으로 볼때 통로로서 해석되는 직선에 기초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마르티리움으로서 원형의 건물로 되어 있으며, 형태상으로 볼때 중심으로 해석되는 점에 기초하고 있다. 이 두가지 건물형태는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적응되고 결합되어지고 있다. 통로로 해석되는 직선과 중심으로 해석되는 점을 형태와 주요소로 취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인들은 이 2가지의 기본적인 실존적 의미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덧붙이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고대의 그리이스 건축으로부터, 특히 동적인 성격과 인간적인 척도에 대한 감각과 같은 몇가지 장점들을 취하였다.그리스도교 건축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식 교회로부터 발전하여 중세와 르네상스시대를 통해 서양건축의 역사를 주도하며 남부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바로크 교회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끝을 맺게 된다. 이 남부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바로크 건축의 좋은 예로는 피어젠하일리겐 성당을 들 수 있다.Sant' Apoll] Church of the Katholikon (ca.1021);[R.] Church of the Theotokos (ca. 1040), view from E.Hosios Loukas Monastery: Phocis, GreeceChurch of the Katholikon, view from E., ca. 1021Hosios Loukas Monastery: Phocis, GreeceChurch of the Katholikon, interior view towards E. showing dome and apse with mosaics, ca. 1021■ 사라센 건축아라비야 유목민인 사라센족에 의해 정복된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스페인등을 포함한 사라센제국에서 회교를 배경으로 하여 7세기경부터 17세기경까지 회교사원인 모스크에 집중되어 전개된 회교중심의 건축양식원래 이슬람교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시각적 예술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모하메드 사후 50년간, 이슬람교도의 기도장소는 종교적 목적으로 그들이 빼앗은 교회나, 페르시아의 기둥으로 된 홀이나, 심지어 울타리나 개천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모양의 장소 등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즉흥적인 이슬람교 사원의 한가지 공통적인 요소는 qibla라는 것으로, 이것은 신자들이 기도중에 향하는 방향이다. 즉 메카를 향하는 면에 열주랑을 놓거나 아니면 단순히 입구를 반대편 쪽으로놓는 것 등에 의해서 메카를 향하는 면지 강조되어야 했다.일단 이슬람교도들이 정복지에서 기반을 튼튼히 닦고나자, 코란에 사치와 방종을 하지 말라고 써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건물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자기들이 정복한 비이슬람교도들의조상들의 힘을 크기와 화려함에 있어 능가함으로써 그들의 힘을 시각적으로 상징화하고자 하는 욕망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초기의 몇몇 이슬람교 사원의 거대한 크기는 그 건물이 한 도시의 모든 이슬람교도를 전부 수용하고자 의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도시에서는 때때로 이슬람교신도의 수가 (Courtyard of the Lions), view from SE., 14th century■ 로마네스크 건축게르만 민족에 의한 프랑크 왕국이 동유럽을 지배한 8세기말부터 고딕양식이 발생된 13세기초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유럽에서 교회건축에 집중되어 전개된 건축양식으로, 교회건축의 초기양식인 초기기독교 양식으로부터 완성양식인 고딕양식에 이르기까지 과도기적인 건축양식로마네스크란 단어는 로마 건축의 특성을 띤 건물을 지칭하기 위해 19세기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완벽한 고딕 양식으로 발전해가는 과도기적인 것으로 생각었다. 오늘날 건축사학가들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그 자체로 충분히 성숙한 양식으로 보고 있으며 고딕에 앞선 불완전한 양식이라고 보고 있지 않다.제비(Zevo, 1957)에 의하면 로마네스크 건축은 건축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다고 한다. 그는 건축적 공간을 이해하는데는 근본적으로 2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표면 혹은 표피로서 기하하적으로 이해하는 방법", "부재, 구조적인 선형요소, 골조 등으로서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방법". 서양건축은 외관의 관점에서 기하하적으로 생각되어져 왔었다. 로마네스크와 그 후의 시대에서는 공간을 나타내는 모델로 평평한 카드보드들만을 가지고는 충분치 않게 되었다. 즉 이들을 3차원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연결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피부의 표면이 뼈를 갖는 근유체계로 전환되어지게 된다.또한 로마네스크 시대에 네이브 부분의 평평한 목조 천장이 조적조의 볼트구조로 바뀌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볼때 로마네스크 건축의 중심문제는 중앙의 네이브부분에 빛이 들어올 수 있게 해주는 조적 볼트구조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시에 새로 개발되어진 3차원적 기둥간격 단위가 고려된 것이었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은 로마네스크의 교차 그로인 볼트로, 이는 '4분볼트'로 불리워지며 4개의 만곡된 면으로 이루어진다. 교차 볼트는 2개의 배럴 볼트를 직각으로 교차시킴으 1115-1135Abbey Church, Cluny:S. transept ("Tower of the Blessed Water"), view from NW., 1088-1118St.-Sernin, Toulouse:exterior, octagonal crossing tower, view from SE. (tower added ca. 1250; spire added 1478)La Madeleine, Vezelay:interior, nave, view towards E., ca. 1120-1132La Madeleine, Vezelay:interior, nave, view towards E. showing vaulting and R. arcade with sculpted capitals, ca. 1120-1132La Madeleine, Vezelay:interior, detail of nave arcade with sculpted capital of "The Mystic Mill," ca. 2nd quarter 12th centurySan Miniato al Monte, Florence:W. facade, completed 1062Baptistry, Pisa:exterior, view from NW., 1153-1265■ 고딕건축13세기초 프랑스에서 발생되어 르네상스 건축이 발생된 15세기까지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중북부 유럽에서 전개된 중세의 건축양식으로 초기 기독교 시대, 로마네스크 시대에 걸쳐 형성된 중세 교회건축을 완성하므로서 역사상 종교건축의 최절정기를 이룸회화나 조각같은 다른 시각예술의 맥락에서 볼 때 건축적인 실체가 가장 주도적인 것으로 여기에서인식될 수 있다. 로마네스크시대에는 3가지 건물형태 - 수도원 교회, 순례 교회, 제국 교회 - 로 특징지워지는 반면 고딕시대에는 한 가지 주된 형태만이 발전되었는데 이것이 도시 성당이다. 성당은 '작품'으로서의 건축이며 도시 성당은 '작업'으로서의 건축 혹은 배경적 건축이다.고딕양식의 특징은 포인티드 아치, 감소
부산의 앞으로의 발전방향과 그 전망 및 제안목 차제목 및 목차 1■ 문화도시 2■ 영화도시 3■ 관광도시 5■ 컨벤션도시 7■ 동북아물류중심도시 7■ 부산의 문제점 8■ 21세기 부산의 전략 9■ 도시공간 10참고 12우리는 현재 지역간 격차의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어느 나라라도 지역간의 격차는 존재한다. 격차는 현실에서 불가피 측면도 있지만 우리 나라의 지역격차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엄정한 비판과 반성이 필요한데 단지 지리적 차이로 인해 특정 지역의 기업과 주민에게 이익을 주거나 불이익을 주는 정도가 크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며 특정 지역(예를 들면 수도권) 기업이 생산의 통제권을 중앙집권화된 체제속에 거의 반 영구적으로 누리고 있다면, 그래서 여타지역에 대한 지배를 행사하고 있고 지배나 통제가 내재적 능력만으로 벗어나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부산은 이제 서울과 대칭되는 도시 개념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중심도시로 탈바꿈해 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 시민, 기업, 지방자치단체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지방중심의 경제활성화는 요원한 상황이고.주요 정책결정 과정에서 중추적 기능은 여전히 중앙정부에 집중돼 있고, 기업활동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규제가 여전한 실정이다. 현실적으로 부산과 서울 간에 존재하는 엄연한 격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산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우선순위 선정 등의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그로므로 부산의 발전방향을 문화,영화,관광,컨벤션,동북아물류중심 도시건설로 정하고 집중 육성해야 한다.■ 문화도시"문화는 더이상 권력의 장식물이 아니다.문화,그 자체가 권력이 되는 시대다".이 말은 이제 상식처럼 들린다.그만큼 세상은 변했고 문화를 보는 눈도 달라졌다. 지금 세계의 도시들이 새삼 문화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문화를 도시재건의 지렛대로 삼고자하는 것이다. 파리 베를린 로마 베니국제적인 문화축제도 이런 틀 아래서 짜여지고 추진될 때 균형적인 발전은 물론 행정의 효율을 높이고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전략수립과 실천은 문화행정 전문인력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관심도 비전도 낮은 관료가 문화를 이끄는 현실에서 관객마케팅 예술경영 등은 공염불에 그치기 십상이다. 문화행정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그들을 현장에 투입할 때 부산문화는 변화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시설늘리기나 일회성 축제의 남발로 예산을 소진하는 관행도 문제.문화부문 예산이 확충되는 추세이지만 80% 이상이 시설운영과 확충,일회성축제에 쓰이다보니 운영인력이나 프로그램,문예창작 지원을 위한 재원은 늘 부족하다.■ 영화도시부산시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하며 영상산업을 핵심 전략산업으로 선정하고 의욕적으로 사업계획을 추진하고 있다.사실 영상산업은 부산만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중요한 기간사업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영상물이 단지 오락물이 아닌 문화상품으로 인식되면서 주변적 상업자본 수준의 제작 형태를 벗어나 금융 및 산업자본의 참여를 통해 한국영화의 제작비 규모는 상대적으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또한 새로운 미디어 매체의 출현으로 영상산업은 고부가가치의 중요한 컨텐츠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하지만 제반 환경이 부산시에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외적인 팽창에 비해 각 분야에 대한 전문가들의 질적 불균형에 의한 기형적인 발전 형태를 갖고 있고,서울 중심의 지역적 편중 또한 문제점으로 나타난다.또한 외형적으로 볼 때도 현재 부산은 국제영화제 이외에 특별한 영상산업 발전의 단초를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아니 못했다고 하겠다.그러나 지난해말 부산영상위원회(Pusan Film Commission)의 발족은 이러한 부산시 영상산업의 미래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하겠다. 그 첫번째 이유는 서울에 모든 인적 물적 재원이 집중된 영상산업에 있어 다른 지자체들이 대부분 무원칙하고 시장성을 고려하지않은 하드 웨어에 대한 투자를 성급히 진행함으로 해서 그 실효성에 지방자치단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영상산업을 지자체 발전의 한 목표로 삼고 있는 실정이다.그만큼 선점 전략에서 뒤처질 뿐만 아니라 치열한 경쟁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영상산업의 기반시설 마련 재원을 상당수 국고에 의존해야 하는 부산시로서는 큰 어려움이 아닐 수 없다.영상산업 발전의 한 단초를 제시한 부산국제영화제를 예로 들어보자.올해로 5회째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가 국내외의 관심을 끌며 성공한 영화제로 평가받자 부천,전주,울산 등 다른 지자체에서도 유사 국제영화제를 개최하거나 개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이들 지자체는 부족한 재원을 국고로 충당하기위해 정부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한정된 재원을 가진 정부는 형평성상 파이를 각기 나눠먹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판단할 것이다.그런 만큼 부산국제영화제에 지원되는 연간 국고 지원금 10억원이 삭감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엄청난 재원이 소요되는 영상산업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부산시는 이를 감안,단기적으로는 하드 웨어보다는 소프트 웨어 구축에 집중한뒤 중장기적으로 하드 웨어 구축에 나선다는 복안이다. 이를 위해 영화 후반작업시설들이 들어서는 영상벤처센터 건립을 비롯해 국제영상기자재 박람회 개최,영화관련 캐릭터 상품개발,부산영상문화(박물)관 설치,영화촌 건립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다.하지만 이들이 실현되기까지는 엄청난 물적 토대 마련의 어려움으로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경우에 따라 아이디어 수준에 그치고 말는지도 모른다.부산시 문화예술과 김광회계장은 "부산시는 2000년을 국제적인 영상 영화도시 비전 추진의 원년으로 삼고 다양한 구상을 하고 있다"며 "그러나 인적,물적 인프라의 한계 때문에 실천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지난해 부산대 신문방송학과가 부산시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부산시민들은 영화산업이 부산의 중심적 사업의 하나가 돼야 한다(59.1%)고 생각하거나 부산시에서 영화산업을 육성하기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해 각종 문화. 예술 이벤트와 관광 상품을 연계시키고 전통 민속 공연. 나이트 투어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셋째, 먹거리 부족도 문제다. 외래 관광객이 여행 중 입맛에 맞는 먹거리를 발견하고 맛보는 것은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부산지역의 경우 관광식당 11곳,전문식당 19곳이 등록돼 있으나 특색있는 전통음식 개발이 부족하거나 가이드들의 안내가 부족한 실정이다.씨푸드(Sea Food)상품 체험코스의 개발을 통해 부산의 특성을 살린 새로운 먹거리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나가야 한다.넷째는 즐길거리 부족도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 요즘의 관광행태는 보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해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그러나 위락.놀이시설이나 카지노,야간 여흥 시설 등 부산은 즐길거리의 제공이라는 측면에서 낙제점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카지노업 신규설치와 해양스포츠 체험코스 개발,관광객 전용 골프장 확충 등이 필요한 현안사업으로 꼽힌다.다섯째,관광 및 쇼핑상품 낙후성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관광객 쇼핑의 대부분이 이뤄지는 면세점과의 경쟁에서 백화점은 단순한 세일즈만으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또 재래시장들은 대부분 노후한 시설과 접근성이 좋지 못해 관광상품으로서의 기능이 취약한 편이다. 이 때문에 관광과 쇼핑을 하나로 묶은 패키지 상품의 개발이 필요하며 이벤트를 통한 접근기회 확대를 노려야 한다는 관광업계 내부의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관광업계와 부산시는 일본과 함께 중국이 향후 10년 내 일본 수준의 관광시장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고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부산시가 동구 초량동에 상해거리를 조성하고 향후 부산의 "차이나타운"으로 만들기로 한 것도 이같은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여행업계에서는 중국이 한국을 여행자유화지역으로 지정했음에도 관광목적으로 한국을 여행하고자 할 경우 중국 지방정부의 허가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원성이 높다.이마저도 어렵게 여권을 발급받아 주중 한국대사관에 비자신청을 하아 중심항이라는 거대한 꿈을 담은 가덕도 부산신항만이 첫 삽을 뜬 것은 지난 97년 10월31일.한국의 21세기를 새롭게 여는 대역사는 이렇게 부산과 경남의 접경지대에서 시작됐다. 안벽 연장 7.5km에 23개 선석으로 구성될 부산신항은 20피트 컨테이너를 기준으로 연간 5백85만개를 처리하는 국내 최대 컨테이너 전용 터미널. 자성대. 신선대. 감만부두 등을 모두 합쳐 부산항 전체 컨테이너부두가 12개 선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부산신항의 규모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부산신항이 웅대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는 시기는 최소한 오는 2011년 이후. 이에앞서 오는 2006년이면 일부 선석의 개장으로 초대형 선박들의 입출항을 구경할 수 있게 된다. 부산신항이 부산.경남지역에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국가사업이라는 점에서 국민 모두에게 대역사로 주목받고 있지만 지역에서 갖는 의미는 더욱 깊다."동남권 광역개발"이라는 부산.경남지역의 꿈이 부산신항에서 싹을 틔워야 하기 때문이다.이는 더이상 서울 찬가만을 부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남권은 물론 세계를 향하는 국내의 거점이 된다는 의미에서 "포털 사이트"라는 비유가 더욱 어울린다.부산신항은 그만큼 서울의 영향권을 벗어나 독립된 동남경제권을 구축하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지금까지 자본과 인재가 행정도시인 서울로 몰렸다면 앞으로는 물류도시인 부산.경남권에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는 것이다.국내 기업이 하나같이 수출입에 가장 적합한 임항도시 부산을 등지고 서울로 간 이유를 뒤집어 살펴보면 이유는 더욱 명확해진다. 정부의 특혜 하나에 기업의 흥망이 결정된 과거와 달리 현재 전세계적으로 파급되고 있는 규제철폐 움직임은 기업으로 하여금 행정도시가 아닌 물류도시를 선호하게 할 것이다.기업의 국적이 따로 없는 시대.돈에 이름표가 없듯이 세계 자본의 월경은 이미 지난 세기의 말부터 자유롭게 시작됐다. 특히 IMF시대를 거치면서 이같은 경향은 더욱 심화하고 있다. 이는 동북아의 물류중심지를 꿈꾸는 부산신항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