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ychoanalytical Approach to Sons and LoversIn the very first class of Psychology and Literature, my professor asked, “Are you, who are sitting in this room, conscious or unconscious?”To this ambiguous question, almost all of the students answered, “I am conscious!” Now, do you, who are just starting to read my research paper, think you are conscious or unconscious? As I feel, you might be trying to read my face in order to see right answer. However, to answer, you need to read this paper carefully. Then, you will not only get the answer but also find the effects of psychoanalytic criticism.A famous 19th century psychologist, Sigmund Freud, asserted that the human psyche consists of consciousness and unconsciousness. Freud’s theories, which are derived from dichotomy of psyche as seen in dream analysis and other psychological studies, have influenced various parts of human life, and his ideas have contributed to field of literature. As a result of the impact, two new approaches, psycho realizes that his mother’s life pulses within him, and he walks forward to make his own future.One interesting fact is that Lawrence’s intention was to write Sons and Lovers not only as an autobiographical novel, but also as a kind of psychotherapeutic writing. The origin of psychoanalytic criticism is Freud’s “… therapeutic method designed to treat individual neuroses”(“Psychological” 311). Lawrence was influenced by August Strindberg, who is famous for his psychological writings, and Strindberg started to write a literary work for psychotherapy through writing (“D. H. Lawrence” 4). Alfred Brooth Kuttner also states this fact in writing, “the problem which Mr. Lawrence voices is the struggle of a man to emancipate himself from his maternal allegiance and to transfer his affections to a woman who stands outside of his family circle”(77-78). Accordingly, it is apparent that Lawrence wrote Sons and Lovers for his own psychotherapy to recover from his mother’s suffocating love and the re father as an ideal because he knows that mother loves a man like his father; the pattern applies to girls, too. In this course, the child tries to “eliminate the rival and celebrate a childish marriage with the parent of our choice”(Kuttner 91). Paul, as a representative of the Oedipus complex man, reveals this fact when he is fourteen. One day, Walter is hurt in the mine, so he enters the hospital, and Paul says, “I’m the man in the house”(Lawrence 88). His words directly show his desire to be the father in the house.However, the normal child soon recognizes the impossibility of marriage with a parent. Paul also knows that clearly, but Gertrude’s behavior to Paul is like a lover. For example, when mother and son visit Miriam’s farm for the first time, mother is self-conscious of Paul because of her age and the appearance of her dress. In response to his mother’s coyness, Paul consoles her and wishes his mother will remain young. Therefore, Paul struggles between his conscious role ass a “generous but unsatisfactory surrogate”(2). Paul satisfies his infantile need for love with Miriam because she resembles Paul’s mother in purity, intellectuality, and protectiveness; therefore, his mother feels her as a rival since Miriam can satisfy Paul because of her similar characteristics with Gertrude (Weiss 128).First, both women are pious, and they do not emphasize their sexuality. Moreover, their fondness for flowers because “…the flowers are used to project and explore the sexual conflict,” and their preference for the blossom over the fruit also imply their purity psychologically and physically (Kinkead-Weekes 105; Weiss 120). According to Weiss, Paul perceives Miriam’s purity as a mother image because Gertrude is spiritually and physically untouchable to him (120). Secondly, Gertrude is an intellectual woman who likes to read books in her spare time while Paul paints, and Miriam is eager to learn about the knowledge that is given in school because she did not get an edura lives separately from her husband, Baxter Dawes, because of his violence and the difference of their personalities. She tries to divorce Baxter, but her husband denies her demand and wants to be happy again with Clara. Therefore, Paul wants to rescue her from Baxter and from poverty. Moreover, Paul’s love for his mother began with his desire to rescue his mother from violent and ignorant father. Thus, Paul might feel the same sympathy for Clara that he has felt for his mother for a long time. Also, Clara is seven years older than Paul, and this also might be acceptable as a similarity with Gertrude in terms of age. As a mother figure, Clara leads Paul to sexual relationship naturally and also advises him to go back to Miriam because she knows that Miriam is the woman Paul really loves. However, Paul does not accomplish his relationship with Clara, either. Clara reunites with her husband.On the whole, Paul, who has been loved by his mother in a morbid and controlling way, fails in hi6
Sophocles' Oedipus The King-운명과 인간의 한계-Oedipus The King의 첫째 에피소드는 살인자들에 대한 저주와 그 처벌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선언으로 시작된다. 이 선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 대한 저주를 내리고 있는 첫 번째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사실 작품의 주된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아이러니가 곳곳에 내재함을 알 수 있다. "You have your eyes but you see not where you are/ in sin, nor where you live, nor whom you live with"에서 보여지듯 눈을 뜨고도 자신의 운명을 보지 못하는 오이디푸스, 맹인임에도 신탁의 예언이 옳음을 알고 있는 테레시아스의 대조적 모습 또한 아이러니컬하다(413-5). 셋째 에피소드에서 이오카스테는 코린트에서 온 사자에게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로 알려진 폴리부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이 소식에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예언이 빗나갔음을 기뻐하지만 결국 이는 다음에 일어날 비극적 효과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에 가해진 수수께끼를 결국 풀지 못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이런 작품의 아이러니가 결국 표현해내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작품의 구성을 잘 살펴보면 이 극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은 운명과 인간의 의지라는 양대 축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선 극의 시작에서의 오이디푸스의 외침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의 살인자를 저주하고 그를 꼭 잡아서 추방시키고야 말겠다고 모두에게 맹세한다. 그러나 그 저주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임은 곧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다.I beg you, since you've torn me frommy dreadful expectations and have comein a most noble spirit to a manthat has used you vilely-do a thing for me.(line 1430-4)구성상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사건의 전모가 읽는 사람에게는 극의 초반부에, 예언자에 의해서 아주 명료하게 제시된다는 점이다.In name he is a stranger among citizensbut soon he will be shown to be a citizenstrue native Theban, and he'll have no joyof the discovery: blindness for sightand beggary for riches his exchangehe shall go journeying to a foreign countrytapping his way before him with stick.(line 452-7)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과거와 아무런 연결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예언이 자신의 얘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의 범위 내에서 아주 합리적인 추론을 시도한다. 즉 테이레시아스와 크레온이 서로 공모하여 자신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그러나 오이디푸스의 전모를 알고 있는 관객들은 그 자신은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오이디푸스의 이러한, 사실상 불합리한 추론의 비극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작품이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즉 오이디푸스가 점점 더 사실을 향해 나아갈수록 더욱 강하게 경험된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자의 얘기가 자신의 얘기가 아님을 확증하려고 그 사건의 관련자들을 소환하고, 또 그들의 증언에서 한 때 일말의 안도감을 얻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또 자신의 얘기였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증명되는 악순환을 경험한다. 이러한 극의 전개 구조는 우리에게 운명이란 것의 엄격함과 냉혹성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그러나 운명이 그의 작품에서 오직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비극의 영웅, 즉 이 비극의 진정한 주인공은 운명에 휘말리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는 인물인 것이다. 운명을 인간이 받아들여야만 입장은 ‘비극'이라 불리는 많은 작품을 양산해 냈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비극은 인간이 노출되어 있는 어둡고 예견할 수 없는 운명과 그것에 저항하여 싸우려는 인간의 몸부림 사이의 팽팽한 긴장에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분명 이러한 노력은 쓸데없는 것이 될 소지가 크다. 이러한 노력들은 주인공을 더욱 큰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고 그를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인간은 무릎을 꿇으면 안 된다. 그가 진정으로 비극적인 주인공일 수 있는 것은 운명 앞에서 단호한 결정을 회피하고 연약한 태도로 일관해 버리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독자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단호한 결정은 물론 운명의 엄청난 힘 앞에선 무력하다. 그러나 그러한 패배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위대성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가 만든 비극의 주인공답게, 보통사람들의 수준을 넘어서는 뛰어나고도 불굴의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 운명의 그물은 그를 점점 강하게 죄어온다. 그는 만약 운명을 알고 싶다는 그의 호기심을 조금만 억누른다면 마지막 순간의 재앙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재의 평온을 희생하면서도, 즉 단순하고 평온한 생존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운명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비극의 영웅, 오이디푸스인 것이다. 결국 소포클레스가 '비극‘ 이라는 형식을 빌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상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운명이란 것에 대한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거대하고 거역할 수 없는 힘과 맞서서라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진정 용기 있고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었음을 우린 읽어낼 수 있다.Oedipus The King은 왕이라는 영광된 자리에서 추락하여 비참하게 파멸한 오이디푸스라는 한 인간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과오를 범하고 결함을 지닌 인간이지만 극에서는 그가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이 묘사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라는 예언을 듣고 이 끔찍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I fledto somewhere I should not see unfulfilledthe infamies told in that dreadful oracle.And as I Journeyed I came to the placewhere, as you say, this king met with his death.(line 796-9)그러나 운명이라는 것은 사람이 벗어나고자 한다고 피해가지 않는다. 여기서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내부적 의지와 운명을 결정짓는 외부적 힘이 대립하게 된다. 이 비극에서 외부로부터 오는, 즉 신이 결정하는 운명은 인간의 힘을 초월하며,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 밖의 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이 운명이란 것도 결국은 인간을 통해 발현된다는 것이다.오이디푸스의 추락에 운명만이 그 결정요소는 아니다. 자신의 성급한 성격이 결함으로 작용하면서 그의 추락에 한 몫을 담당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르는 채 친아버지를 살해하고 친어머니와 결혼한다. 이런 상황 설정은 운명이었을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노함을 억눌렀다면 피할 수도 있었던 좁은 길에서의 살인을 저질렀고, 라이오스 살해자에 대한 그의 격렬한 저주는 나중에 상황을 악화 시켰으며, 너무 오만했기에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사건의 전말을 끝까지 추적했고, 원래 자신의 친우였던 크레온에게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오이디푸스는 자신에 대해 너무 자신만만하여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성급하게 판단하고 행동에 옮겼다. 이런 성격은 결국 그를 너무도 빨리 파멸로 몰아넣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그의 성격적 결함은 사실 나쁜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일을 서둘렀던 것이 아니라 왕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백성들의 문제를 최대한 빨리 해결코자 했었다. 그의 성급함에 진실과 백성을 위한 열정이 뒤섞여 있음이 보여 지기도 하는데, 백성들이 역병으로 죽어가자 그가 모두의드러난다.이 작품에서 끊임없이 이야기 되는 것은 인간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는 외부적 힘이다. 코러스는 계속하여 운명의 힘 앞에 오만한 자는 결국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If a man walks with haughtinessof hand or word and gives no heedto Justice and the shrines of Godsdespises-may an evil doomsmite him for his ill-starred pride of heart!-(line 884-8)인간으로써의 본연의 모습을 인정하는 겸허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갓난 자식을 버려 예정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노력,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고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기 위해 코린트를 떠나는 오이디푸스의 노력,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아내서 테바이를 역병으로부터 구하려는 오이디푸스의 노력 등은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확실한 운명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오이디푸스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항상 운명에 순종해야 하며, 운명을 피하려고 해도 결국은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표현되고 있을 뿐, 사실 왜 별 잘못 없는 오이디푸스에게 가혹한 운명이 주어지는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테바이에 도는 역병은 신이 내린 벌로 묘사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결국 오이디푸스는 비참한 형상이 되어 추방당하지만 그를 신뢰했고 동경했던 시민들 누구도 오이디푸스가 왜 이런 가혹한 운명에 처해야 하는지 한탄하거나 하지 않는다. 아마도 시민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부당하기만한 운명이 신의 뜻이고 어쩔 수 없는 섭리라고 인정하고 살아가는 듯하다. 이 작품은 이렇게 운명이라는 외부의 절대적 힘이 인간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이끄는 모습을 통해 불안감을 주면서.
The metaphysics of Milton's divorce tracts밀턴의 이혼에 대한 산문을 기독교인의 자유, 의지의 자유 그리고 교회 통치권에 관한 그의 생각을 재 정의하는 중요한 작업으로만 보아왔으나 이 산문들은 De Doctrina Christiana와 Paradise Lost에서 보여 지는 일원론(monism)이 아직 충분히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초기의 의견으로 밀턴이 실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밀턴은 당 시대에 혼자서 영혼과 육체의 상호관계를 면밀히 분석하고 부부가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화합이 필수적임을 주장하였다. 이런 독창적 주장은 밀턴과 비슷한 이혼관을 보이는 Martin Bucer가 쓴 저서의 필요한 부분을 초역해서 밀턴 자신의 이혼론의 정당성을 입증한다. 전통적인 심신 이원론과 일원론은 밀턴의 이혼 산문에서 병치되고 보류되면서 긴장이 예견되고, 추상적인 체계사이의 부조화는 산문의 화합을 깨드리려고 위협한다. 밀턴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결혼에서 정신보다 육체를 우선시하는 오류를 나타내기위해 이원론을 불러낸다. 그는 이상적인 성적세계의 가능성을 독실한 신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일원론을 도입한다. 추상적 논의의 일관성에 실패로 보이는 것은 오류로부터 진실을 분리하려는 전략이다.이혼론에는 몸/영혼, 유죄/무죄, 필요/면제, 불평하는 돼지/온화한 영혼 등의 이분법이 증식한다. 결혼과 이혼에 관해 논하면서 밀턴은 결합과 분리에 의지한다. 결혼론자 밀턴은 몸과 영혼을 하나의 본체로 결합시키고 교리?윤리의 위반을 과오의 한 측면으로 간주한다. 이혼론자로서 밀턴은 세계를 온화, 현명, 그리고 일원적 개인들로 한정짓고 그들을 무질서한 이원론의 혼돈과 따로 떼어두면서 Paradise Lost나 Doctrine and Discipline의 신처럼 분리의 명령을 창안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 단계에서 밀턴과 그의 신 사이에 이혼 창조자로서 거리를 나타내고 산문의 급진적 불안정성의 씨앗이 놓인다. 이원론은 몸과 마음의 내적 대립이 일원론의 보존에 재 불감증과 친족과계에만 이혼을 인정한 정전과 영국 국교회 법에서 규정된 마음과 몸 사이의 우선권의 전환을 주장한다. 밀턴은 결혼과 모든 인간사회는 육체에서보다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물이나 짐승적인 만남의 종류가 될 것이라고 비판하며 마음에 결합을 몸의 아래에 놓는 정의를 비난한다. 신체적 욕구가 우리를 내부의 예속이나 필요로 넘기고 사랑이 부재한 성적 의무는 짐승 같은 필요이다. 밀턴이 성적욕망에서 인식한 자유의 상실에 대한 그의 염려는 성서해석의 특징을 설명한다. 원문(text)밖에서 해석하기보다는 안에서 읽으려한다. 가장 명백한 예는 Paul의 “it is better to marry to be aflame with passion"에서 신체적 욕망의 허가를 적당한 대화하는 영혼과의 결합을 위한 이성적 불타오름의 언급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밀턴은 신방에 듦으로서 결혼을 완료한다는 건전함의 가능성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마음과 사람이 적절히 행복한 곳에는 신체 기쁨의 불완전함이 함께 할 것이다. 마음과 몸의 주장을 재 정돈하려는 시도로서 시작되는 것은 몸으로부터 피난처럼 보이게 되고 관능성의 부인으로 보이게 된다.이런 성에대한 이원론적 공격에도 불구하고 간단하고 더 균형 잡힌 시각의 불완전한 증거를 볼 수 있다. 밀턴은 독실한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성적 해방의 필요를 인정하고 독신 삶에 비상식적인 공경을 하는 St. Augustin과 다른 신부들을 비난한다. 그는 성직자에 어울리는 독신 생활을 악마적인 죄와 인간 본성에의 모욕이라고 부른다. 적절한 마음의 결합은 더 나은 성생활로 연결될 수 있다고 제시하며 생식의 행동은 즐거운 대화로 소중히 하고 격려되지 않는 한 곧 스스로 싫증나게 하고 경멸하게 한다고 지적한다.산문의 성 활동에 관한 관점들의 대립은 모순을 폭로하지 않고 두 종류의 독자에게 이야기하기로 한 밀턴의 결정으로 귀결된다. 이미 The Reason of Church Government에서 그의 독자를 욕망이 오염된 사람과 품위 삶을 영위하지 않는 일원론자들이다. 밀턴은 그의 반대자들에게 결혼이 생식보다 지적 교의를 위해 만들어졌다면 신이 아담에게 남자 동료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밀턴의 시각에서 이러한 관점은 신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잘못된 분리이다. 그는 Tetrachordon에서 그의 이혼에 관한 관점을 반대하는 이러한 오류의 이원론자 본질을 극단적인 이원주의적 그노시스주의(Gnositic)라고 생략적으로 제시한다.예수의 간음 경우를 제외한 이혼의 금지는 밀턴이 지적하듯 바리세사람에게만 내려진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신명기의 이혼에 대한 율법을 부인들과 사소한 이유로 이혼하려고 잘못 해석한 바리세인들은 그들의 사악한 삶에 따라 대답 받았다는 것이다. 바리세 사람들이 극도의 죄를 저질렀듯이 그들에게도 극단의 제한이 주어진 것이다. 예수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에는 두 부류의 청자가 있다. 갈릴리 산의 시험하는 바리세인들과 성령에 의해 교육된 현명하고 독실한 신자이다. 밀턴 또한 두 독자에게 쓴다. 그는 예수처럼 극단에는 지나친 것을 부과한다. 그러나 지각이 있는 독자들에게 밀턴은 짧게 성 행위의 독실한 기쁨의 암시를 제공한다. 추상적 논의의 용어로서 혼란되고 제 정돈된 이원론의 두 과도함 사이의 완벽한 매개는 일원론이다. 육체와 정신의 분해는 잘못된 의식을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밀턴은 그의 주장을 이원론에서 확고히 하기 위해 예수를 모방한다. 이원론자의 죽은 신체는 바리세인들의 죽은 문자에 해당한다. 성서의 어의가 재앙 없이는 자애의 영혼으로부터 분리 될 수 없듯이 육체와 영혼도 분리될 수 없다. 1643년에서 5년의 산문에서 성숙한 밀턴의 일원론이 초기단계에 있다.Monism and Metaphor일원론자와 이원론자의 관점 사이의 전쟁에서 밀턴의 비유는 몸과 정신의 불분해성을 지적하고 심신을 분리해 몸에 우위를 부여하려는 사람들을 동물화 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밀턴은 Colasterion에서 그의 반대자들은 돼지나 괴물 잡종으로 비유한다. Tetrachordon에서는 개,리고 몸이 정신과 분리되어 여겨진다면 몸은 죽고 영혼이 없는 것이다. 밀턴은 짐승 같은 성격묘사를 하면서 단순한 신체는 동물 이하의 것이라고 말한다. Tetrachordon에서도 정신은 신체를 능가하고 육체의 인간은 당나귀보다 뛰어나다고 표현한다. 동물은 아직 살아있는 존재기에 스스로 완전하다. 그러나 정신없는 육체는 단순히 지각없는 몸통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원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De Doctrina Christiana에 나오는 일원론에 대한 명확한 언급을 보면 몸이 단순히 육체적 덩어리에 불과한 곳에서 영혼은 정신이나 중요하고 예민한 이차적 기능을 의미한다. 밀턴은 또 인간이란 몸과 영혼이라는 다른 별개의 요소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인간은 정신이고 정신은 인간이라고 말한다. 신체는 다른 말로 살아있고 지각하고 이성적인 개인적 본체이다. 여기서 밀턴은 일원론자의 인간 본성 개념을 이원론적 색체의 단어로 말하려는 노력을 한다.Fallon의 초점은 아내가 가진 공허의 베일로서의 이미지에 맞춰진다. 이런 이미지는 이혼론에서 내면이 없는 외면만을 가진 은유로 나타난다. 은유는 우리에게 비유적인 형태의 추상적 함축을 강조한다. 만약 신체적 기호가 은유에서 실체가 없이 인식되는 것을 지적한다면 일원론자 관점에서 모든 대상은 형이상학적이다. 왜냐면 외부적 현시와 내부적 중요성은 분리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밀턴의 내부가 공허한 외부의 비유는 이원론 문제에 일원론자 관점을 포함한다. 생명력 없는 마음은 마음이 아니다. 몸을 인식할 수는 있으나 공허함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의 결합 없는 결혼은 표면적 결혼생활의 빈 껍질이고 결혼의 단순한 몸통일 뿐이다. 베일, 껍질, 몸통은 또 다시 이원론을 공격하는 비유라기보다는 이원론자의 비유로 보인다. 그러나 외부와 내부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일원론자 밀턴은 천국 안에서(paradise within)에서 Paradise Lost를 강조하는 데서 근거가 있다.Lady Anne Conway라는 철학자는 밀턴의 일원론과 비슷한e and Discipline에서 잘못과 관습(Error and Culture)의 비유로 나타난다. 관습은 단순한 표면이나 용모이고 잘못은 머리가 없는 맹목적이고 음흉한 육체이다. 이는 Spencer의 Orgoglio를 연상시킨다. 부풀고 텅빈 공기주머니, 내부의 본질이 없는 형태인 False Florimell이다. 잘못된 결혼처럼 그 괴물은 가장 비실제적인 無와 망령, 공포의 단순한 장난감 일뿐 본질이 없다. 다른 주목할 만한 이혼론에서의 이미지는 Jupiter에 의해 Ixion에게 주어진 구름이다. 이원론자의 분리된 빈 껍질과 단단한 껍질의 뒤에 남겨진 영혼처럼 Ixion에게 주어진 구름은 잘못된 결혼의 비실제적인 가치 없는 것이고 환영일 뿐이다. 환영과 내부와 외부의 상반된 이미지 속에서 밀턴은 내면과 외면이 서로 빠져 나올 수 없게 속해있다는 진리를 구성한다. 진리는 살아있는 외부의 견고한 내부로서 진실이 무형이라는 것이다. 진실은 태양 광선처럼 외부의 어떤 손길에 의해서도 고형물이 될 수 없으며 무형의 본질인 육체의 내부는 동시에 신체이고, 이원론자에 의해 소중히 여겨지는 분리는 문자의 상징적인 유기적 조직 속에서 무효화된다. 이런 은유에서 우리는 밀턴인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추론적으로 보여줄 일원론을 향한 직관적 작업을 볼 수 있다.조화로운 결혼에서 성적관계는 Doctrine and Discipline의 진실의 비유에서처럼 내부와 외부의 이음새 없는 상호침투를 포함한다. 온화한 영혼은 생식적 결함을 우위에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양 있는 이원론자보자 더 훌륭한 친밀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결합은 은유적인 것 이상이다. 밀턴은 Tetrachordon에서 마음의 결합은 몸의 결합보다 더 가깝고 숭고한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의 결합은 신체의 진정한 결합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조화로운 부부의 아이는 합치의 영혼이고 껍질을 채우는 영혼은 공허한 결혼 생활의 몸통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이 영혼은 Doctrine 았다.
Salman Rushdie's Midnight's Children: 역사와 개인Salman Rushdie의 Midnight's Children은 인도 이슬람교도 집안 출신 Saleem Sinai의 집안 내력과 삶을 통해 격변기의 인도 역사에서 개인과 구성원들이 휩쓸리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살림의 외조부의 삶에서부터 주인공의 아들의 탄생까지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영국 식민통치하에 있던 인도에서 독립 후의 정치 혼란기까지 역사라는 거시적인 시점에서 그려진다. 살림의 일인칭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작품은 역사적 측면에서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이지만, 개인적 측면에서는 예언과 저주에 좌우된다는 점에서 신비적이고(mysterious) 주관적이다. 역사에 휘말리는 개인의 삶을 이야기 하는 이 작품에서 이러한 서술적 특징은 역사라는 객관적인 큰 흐름에 개인의 주관적 감성은 개입할 여지가 없음을 시사하는 요소로 사용된다.살림의 외조부 Aadam Aziz는 독일이라는 1세계 유럽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온 상류층으로 인도가 영국의 지배아래에 있던 시절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통치아래 있던 그 시절 유럽에서 유학한 그는 하층민 사공 Tai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1세계의 지식을 배워왔다는 사실은 부러움을 사는 일이지만 그것은 신분적 차이를 강조하는 요소가 되며 동시에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였기에 영국의 입장에 설수 있다는 점에서 거리낌을 낳는다. 그러나 그는 영국이 식민통치기간에 행한 폭력의 희생물이었으며 그들의 잔학한 총기난사에 다친 인도인을 치료하는 인도인이다. 인도의 상류층임은 분명하지만 그의 위치는 자신이 속한 인도의 전통과 자신이 외부에서 배워 온 새로운 가치사이에서 주변 인물들과 갈등하는 존재이다. 그가 결혼생활에서 부인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전통문화와 새로운 문화의 충돌하는 지점에서 부부가 대립했기 때문이다.Aadam Aziz의 딸인 Amina Sinai와 남편 Ahmed Sinai는 전 세대가 겪었던 역사적 흐름을 이어받아 살아간다. 전통과 새로운 문물사이에서 대립하지는 않지만 영국통치에서 인도로 정권이 이양되는 시기를 살아가는 그들은 부모세대와는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그들이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곳에서 구입한 Methwold는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영국의 폐허로 그려진다. 영국지배층이 인도를 떠나면서 집안을 그대로 보전해 달라는 요구는 식민통치가 없어져도 그 영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인도의 모습을 예견하는 듯 하다. 그들을 위기로 모는 주체는 이제 인도정부이다. 독립 후 인도는 다양한 종교와 정치적 이유로 분할되는데 그 기준은 언어에 따른다. 종교만큼이나 다양한 언어를 가진 인도가 하나의 국가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정치권력으로 그려진다. 인도는 힌두교인들을 중심으로 파키스탄은 이슬람교도를 중심으로 분할된다. 이제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삶의 기반인 고장을 떠나 종교적 이유로 다른 나라로 이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떠나지 않은 이슬람교도들을 몰아내기 위해 인도정부는 무슬림 재산 동결을 실시한다. 법적 대응으로 권리를 찾은 시나이부부는 그러나 가족사적 문제와 전쟁 때문에 결국 파키스탄으로 이주하게 된다.시나이부부의 아들 Saleem Sinai는 기구한 출생 때문에 평생 마음에 부담과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바로 그 순간인 자정에 태어나 “기이하게 역사에 묶이게 되었고 그 결과 그의 운명은 뗄 수 없게 조국의 운명에 메이게 된다(mysteriously handcuffed to history, my destinies indissolubly chained to those of my country:3).” 인도인들은 독립의 순간을 낡은 것으로부터 나와 새로운 것으로 들어오고 한 국가의 정신이 할 말을 찾은 날로서 이제 “불운의 시대(period of ill-fortune:130)”는 끝났다고 말한다. 이런 역사적으로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에 태어난 “살림의 삶은 인도 자신의 삶의 거울이 되는(it[your life] will be, in a sense, the mirror of our own:139)역사적 새 인물로서 사명을 부여받게 된다. 살림의 삶은 대략적으로 인도의 운명과 유사성을 보인다. 기대했던 아기의 탄생은 아버지가 발가락을 다치는 불운과 함께 시작되는데 이는 독립이후 혼란과 폭력으로 점철되는 인도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는 Mary Pereira의 고의에 의해 시나이 집안 아이가 아니라 Wee Willie Winkie의 아이로서 "영국계 인도인(Anglo Indian:131)”이다. 즉, 독립이후 인도의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가 인도혈통이아니라 영국계라는 사실은 이미 독립이후 인도의 국가가 순수 인도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 영국지배의 흔적과 토대의 연장선이라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또한 그의 이런 운명성이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의 개입 없이 역사라는 큰 수레바퀴와 탄생이라는 수동적인 사건에서 살림이 단지 감당해야만 할 것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와 사회에 휩쓸리는 개인의 운명을 잘 대변한다.독립 후 인도 정부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고투했듯이 살림도 과거 대중과 계급, 자본과 노동, 그들과 우리라는 이분법과는 다른 “제 삼의 원칙이 되어 그 양자의 모순을 보다 상태로 만들어야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한밤의 아이들이 탄생의 약속을 지킬 수 있기 때문(must be a third principle, we must be the force which drives between the horns of the dilemma; for only by being other, by being new, can we fulfill the promise of our birth:292)”이라고 새로운 노력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와 운명이 바뀌어 가난과 빈곤에서 자란 Shiva는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은 물질이며 인간마저도 또 다른 종류의 물질에 불과하다고 살림의 의견을 부정해버린다. 조화와 화합으로 상징되는 회의(conference)의 공동체를 통해 제삼의 길을 모색하는 살림과 인도정부는 그것이 동시에 내재한 신분적 경제적 정치적 모순과 문제점들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이 포기되어 진다.결국 자치에 맡겨진 인도는 국토 분할과 전쟁으로 얼룩져간다. 인간을 위한 종교가 그들에게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해 성스런 전쟁(holy war)가 되지만 살림은 이 전쟁에 내재한 모순을 “한번의 최후 희생으로서 인간이 그들의 모든 죄악을 보상받을 수 있는 이 성스러운 전쟁이란 얼마나 끔직한 것인가(What a thing this holy war is, in which with one supreme sacrifice men may atone for all their evils!:389)”라고 꼬집는다. 전쟁 상황에서 사람들은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의 전쟁경과 발표를 믿지 못한다. 왜냐면 그들은 엄밀히 한 국민이었으며 함께 영국의 식민주의에 저항했던 한 민족이기 때문에 계속되는 전쟁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분할시킨 종교나 정치의 영역에서 아노미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한 상황은 독립 후 인도의 미래와 동일시되는 운명을 타고난 살림에게는 더 치명적이다. 그는 인도의 운명과 미래를 대변하지만 종교적 이유로 파키스탄으로 이주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인도인이면서 인도인이 아니고 파키스탄인 이면서 파키스탄인이 아니다.The terrible fatalism which had overcome me of late had taken onan even more terrible form; drowning in the disintegration of family,of both countries to which I had belonged, of everything which cansanely be called real, lost in the sorrow of my filthy unrequited love,(390)살림은 부모에게서도 친아들이 아닌 바뀐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버림받고 친척들에게서도 진정한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가 여동생이지만 엄밀히 남인 Jamila를 사랑하지만 이룰 수 없는 위치에 놓인다. 이런 그의 처지는 인도에서도 파키스탄에도 속하지 못하는 현실로 이어진다. 결국 살림은 아들이면서도 아들이 아니고 인도인이면서도 인도인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가족사와 전쟁 상황에서 이중으로 고통 받고 혼란을 겪는다. 이는 “과거와 가족에 대한 거부(rejection of past-and-family:404)”로 이어진다.이제 그에게 특별한 출생 때문에 한밤의 아이들로서 역사적 역할을 감당하고 지지하려는 오래된 결심도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사라지게 된다. 그는 “도대체 출생의 예언 따위의 사건들 때문에 언어분쟁과 네루 이후의 인물과 내 가족을 말살시켜버린 성급한 혁명과 폭탄들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Why, owing to accidents of birth prophecy etcetera, must I be responsible for language riots and after-Nehru-who, for pepperpot-revolutions and bombs which annihilated my family?:440)”라고 자신의 운명에 절규한다. 개인으로서 “역사의 짐(burden of history)"을 감당하기에 살림은 연약하고 왜소한 존재였던 것이다(440). 결국 살림은 전쟁 후 인도에서 머물던 외삼촌의 집에서 쫓겨나 “가족적 연줄을 끊긴 채 메리 페레이라의 범죄로 인해 그토록 오랫동안 빼앗겼던 가난과 궁핍의 진정한 유산으로 되돌아오게(deprived of family ties, returned at last to that true inheritance of poverty and destination of which I had been cheated for so long by the crime of Mar Pereira:455) 된다.”
“Lycidas”의 화자: “I“에서 “Human Being”으로Milton의 "Lycidas"는 목가적 애가(pastoral elegy)로서 그의 친구 Edward King의 죽음을 애도하고 인간 삶의 유한성(mortality)에 대한 고찰이다. 많은 연구에서 지적되었듯이 Milton은 친구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다. 이 점검은 시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검토일 뿐만 아니라 유한성을 지닌 인류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개인의 애가에서 전 인류적 주제로 확장되는 데는 비평가 Fish가 지적하듯, 화자가 I에서 시작하지만 작품의 중간에 시 속에 숨었다 다시 드러나기를 반복하고 결국 익명(anonymity)으로 숨어버림으로서 달성된다."Lycidas"속 화자는 목가적 애가를 통해 친구의 죽음을 비탄하는 관례적(conventional) 형식을 취하려한다. 여기에서 목가적 애가란 복잡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죽음이라는 현실상황에 대해 슬픔을 토로하고 자연의 공감과 애도로 이어져 위로하는 형식이다. 전통적 비가는 죽은 이가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Milton의 “Lycidas”는 죽음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에 관례적인 목가적 애가의 형식과 내용을 담으면서도 그 범주에 귀속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화자는 목가적 애시의 관례를 넘어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 혹은 지식에 특권을 부여하여 실패한 목가적 비가 관례들의 잔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승시키려한다(Fish 325). 화자는 목가적 애시의 관례들을 그대로 작품에 적용시키면서 그들이 사용하는 애도의 어리석음과 무능력함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The willows and the hazel copses greenShall now no more be seen,Fanning their joyous leaves to thy soft lays.(line 42-4)에서 보여 지듯 자연은 인간의 죽음을 탄식할 수 없는 존재로서 자연의 애도란 있을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이 시행은 화자가 목가적 애시에 포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확립시킨다. 결국 목가적 애시가 죽음을 애도할 수 없고, 화자의 선견보다 아래에 위치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Orpheus로 대변되는 Lycidas의 죽음에 Muse도 속수무책이었고 파도의 요정들이나 바다의 신이 죽음의 근본적 원인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비탄만 하는 목가적 애시가 현실의 공격에 맞서기엔 부적절 하다는 한계성을 공고히 한다.Lycidas의 죽음의 원인을 탐구하면서 결론짓는 “It was that fatal and perfidious bark,"에서 죽음의 원인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받아들여야할 운명으로서 고통과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확장된다(line 100). 또한 화자의 우월성을 뒷받침하는 죽음에 대한 인식은 “그대들이 애도하는 Lycidas는 죽은 것이 아니기에(For Lycidas your sorrow is not dead: line 165)"라는 구절로 연결된다. Phoebus의 목소리로 그려지는 명성에 대한 대답은 현실이 아닌 사후의 하늘에서 보답 받을 수 있다는 종말론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Phoebus의 말이 시 속 화자가 말을 기억해서 전하고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에 대한 화자의 인식을 증명하기 위해 화자의 서술이라는 방식으로 쓰였으므로 Phoebus의 말일 지라도 화자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요소로 작용한다.“Fame is no plant that grows on mortal soil,Nor in the glistering foilSet off to th' world, nor in broad rumor lies,But lives and spreads aloft by those pure eyes,And perfect witness of all-judging Jove;As he pronounces lastly on each deed,Of so much fame in heaven expect thy meed“.(line 78-84)여기에서 Lycidas를 포함한 화자, Milton, 인류는 죽음으로서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의 세계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논의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런 진리 폭로 뒤에도 화자가 작품 속에 숨는 것이 아니라, Fish가 지적하듯 시 행에서 화자의 존재가 모호해졌다 다시 드러나는 과정에서 점차 화자가 시 속에서 사라져가게 된다. 예를 들면,Let our frail thought dally with false surmise.Ay me! whilst thee the shores and sounding seasWash far away, where thy bones are hurled,(line 153-5)에서 비록 우리의 덧없는 생각이라고 하지만 이는 다음 시행들과 함께 관례(convention)의 실패로 인지된다. 즉, 화자는 시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전통적인 인식들을 비난하고 있을 뿐이다.그러나 “Weep no more, woeful shepherds, weep no more,/ For Lycidas your sorrow is not dead,"에서 지상에는 정의나 의미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연적 현상을 떠나 신이 내린 영광의 계시(revelation)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한다. 여기에서 화자는 "I"에서 보편적 인류의 시각으로 완벽히 전치된다. 즉, 처음에는 덧없는 한 죽음의 묘사로 시작되지만 죽음의 의미를 인식해가는 전 인류적 고찰로 종결된다. ”Lyciad는 큰 보상을 받아 해변의 수호신이(Lycidas [...] art the genius of the shore,/ In thy large recompense: line 181-3)“ 되었기에 더 이상 Lycidas의 죽음을 애도하는 목가적 애가가 효과적이지 못함을 공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