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の宿から作 詩 : 阿 久 愁作 曲 : 小 林 亞 星歌 手 : 都 はるみあなた變りはないですか 日每寒さがつのります그대 변치않았나요 매일추위가 점점 더해져着てはもらえぬ セ-タ-を 寒さこらえて編んでます입으면 받을수 없는 세타를 추위를 참아내며 짜고 있어요女ごころの 未練でしょう あなたこいしい北の宿여자의 마음 미련이겠죠 당신 그리워요 북쪽의 집吹雪まじりに汽車の音 すすり泣くよにきこえます눈보라 속의 기차의 소리 흐느껴 우는듯이 들려오네요お酒ならべてただひとり 淚唄など歌います술을 나란에 놓고 오직 혼자서 눈물의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女ごころの 未練でしょう あなたこいしい北の宿여자의 마음 미련이겠죠 당신 그리워요 북쪽의 집あなた死んでもいいですか 胸がしんしん泣いてます당신 죽어도 좋은가요 가슴이 끊임없이 울고 있어요窓にうつして寢化粧を しても心は晴れません창문에 보면서 밤화장을 했지만 마음은 밝아지지 않네요女ごころの 未練でしょう あなたこいしい北の宿여자의 마음 미련이겠죠 당신 그리워요 북쪽의 집北の宿から는 미야코 하루미의 3대 히트곡이다. (大阪しぐれ-오사카의 가을비, 눈물의 연락선과 함께).일본에는 물론 외국에까지 유명한 지휘자인 岩城宏之는 일본의 3대 발명중의 하나가 엔카이며 그 대표로 이 노래를 추천했다. 그 이유는, 미야코 하루미는 이노래를 힘으로 부르지 않고 자연스럼 그 자체로 부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래 대단한 가창력으로 힘주어 부르는 미야코 하루미의 부드러운 창법의 노래이다.야도(宿)이라 함은 호텔이나 여관 또는 숙소라는 이야기로 우리의 집과는 다소 다른 의미이다. 여자주인공이 눈내리는 북쪽의 어느 온천가에 숙소를 잡아놓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쓸쓸한 심정이 녹아 있는 노래이다. 어두운 창에 반사되는 얼굴에 화장을 했지만 마음은 밝아지지 않네.. 화로불 앞에서 쉐타를 손으로 짜다가 문득 사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는 미야코하루미의 영상으로 노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이 노래는 1976년 12월에 발매가 되어 히트를 했다. 그 해 레코드 대상을 받은 노래이다. 그리하여 같은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미야코하루미가 이 영화에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는데....그 배역이 온천장 종업원이었다고 한다.都 はるみ소화 38년(1963년)제 14 회 콜롬비아 (주)(Columbia Pictures Corp) 전국 가요 콩쿠르(concours) 우승소화 39년「난처한다 것요」로 데뷔「안코춘은 사랑의 꽃」이 밀리언 셀러 기록.동곡으로 제 6회 일본 레코드 대상·신인상을 수상소화 40년「눈물의 연락선」이 2작품째의 밀리언 셀러로 되고,NHK 홍백 노래 자랑에 첫 출전소화 51년「북의 집에서 」로 ,일본 레코드 대상,일본 가요 대상을 수상소화 55년「오사카 오다 말다하는 비 」로 ,일본 레코드 대상·최우수 가창상을 수상.레코드 대상 사상처음으로 삼관왕 달성소화 59년 NHK 홍백 노래 자랑으로의 「부부판」을 마지막으로 은퇴소화 62년 음악 프로듀서 활동을 시작평성 2년(1990년) 가수 복귀NHK 홀에서 복귀 콘서트「오타루 운하·천년의 고도」(기획 원안·도시는 루미)발매전국 콘서트 투어를 시작(이후 매년 약70곳을 행하다)평성 3년 최초의 야외 콘서트(concert)쿠마노 모토미야 다이샤 철거지 대재원치바현 나리타시 삼리이군월드 뮤직의 세계적인 이벤트「WOMAD'91 요코하마」에 참가최초의 히나세 극장 공연「도시는 루미 롱 콘서트」평성 11년 도호 영화「빅쇼!하와이에 부르면」(16년만의 영화 출연)일본 무도관 콘서트(8년 연속)평성 12년 빙설 벌판」발매이즈 오오시마 야외 콘서트「산화」발매평성 14년 1/19 2002 전국 콘서트 투어 스타트((약 80곳)4/20 뉴 싱글「만추의 역」발매(통산 119장째)11/21 뉴 싱글「당신의 생명」임시 발매(통산 120장째)평성 15년 데뷔 40 주년을 맞이했습니다1/1 데뷔 40 주년 기념 싱글 제1탄 『무카시』발매(통산 121장째)1/8 일본 무도관에서의 콘서트4월 히나세 극장「도시는 루미 롱 콘서트」∼Vaya Con Dios∼(4/5∼4/29)비 내리는 영동교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마음그사람은 모를꺼야 모르실꺼야비에젖어 슬픔에 젖어 눈물에 젖어하염없이 걷고있네 밤비 내리는 영동교잊어야지 하면서도 못잊는 것은미련 미련 미련 때문인가봐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헤매도는 이마음그사람은 모를꺼야 모르실꺼야비에젖어 슬픔에 젖어 아픔에 젖어하염없이 헤매이네 밤비 내리는 영동교생각말자 하면서도 생각하는건미련 미련 미련 때문인가봐주현미(周 炫 美)데뷔 : 1984년 12월, 메들리 "쌍쌍파티"취입.'85년 3월, 첫 창작앨범인 1집 출반주요음반 : 1984년 12월- 메들리음반/[쌍쌍파티]1985년 3월- 비내리는 영동교1985년 11월- 울면서 후회하네1986년 8월- 첫정1986년 10월- 눈물의 부르스1988년 3월- 신사동 그사람1989년 2월- 짝사랑1990년 5월- 잠깐만1991년 4월- 추억으로 가는 당신1992년 4월- 또만났네요1993년 8월- 정으로 사는 세상2000년 8월- 러브레터2003년 6월- 정말 좋았네주요수상경력 :85년 KBS, MBC 여자신인 가수상 수상87년 KBS 가요대상 최고인기가수상 수상86~92년 MBC 10대 가수상 7회 수상88년 MBC 10대 가수가요제 최고인기가수상 수상,KBS 가요대상 수상, 한국일보사 골든디스크상 대상 수상86~90년 한국일보사 골든디스크상 수상2001년 KBS가요대상 올해의가수상 수상 외 다수히트곡 : '비내리는 영동교', '첫정', '짝사랑', '신사동 그사람','잠깐만', '러브레터' 외 다수80년대 중반에 트로트는 '전통가요'라는 극적인 전환의 계기를 포착한다 유행가, 뽕짝에 이은 이 세번째 프리즘을 통해 우리는 정치권력이 대중문화에 어떻게 개입함으로써 어떠한 대중조작을 기획하는지 알아채릴 수 있을 것이다 대중문화 지형도의 이와 같은 급격한 재편은 80년대 중반의 일련의 정치적 위기상황과 맞물려 기성세대의 반발을 가져왔고, 이들은 문화적 대안의 제시를 골똘히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하여 탄생된 조류가 바로 구관이 명관으로서의 트로트였으며 '전통가요'라는 정당성이 추가되었다.트로트의 뿌리에 잠복해 있는 역사적 상처는 슬쩍 건너뛴 가운데 '보통사람의 시대'에 걸맞는 '오랫동안 서민의 애환과 환희를 같이 해 온' 의미가 집중적으로 부각된다. KBS의 '가요무대'는 거의 하관(下棺)의 처지에 봉착한 잊혀진 스타들을 다시금 부활시켰으며, 새로운 세대의 계승자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권력의 막후 기획에 의해 트로트는 이렇게 극적으로 구조된다. 이 기획을 결정적으로 현실화한 이가 바로 그녀였다바로 일년전만 해도 시리즈 같은 통속적인 프로그램 밖에 없었던 그녀가 일거에 이미자의 대를 잇는 트로트의 여왕으로 부상하게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이 난국을 타개하는 대표적인 주자로서의 자격이 그녀에게 갖추어져 있었다. 약사 출신이라는 그의 엘리트적 전력과 심수봉과는 전혀 다른 해맑은 이미지가 트로트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지워 주었고, 애상적인 정조가 제거된 발성의 깨끗한 톤은 트로트 음악의 새로운 변형을 가능하게 했다80년대 중반, 거리든 차 안이든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던 흥겨운 메들리「쌍쌍파티」의 주인공으로 출발, 80년대 트로트의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한 그녀 자신도 당시 가수로서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그녀의 노래「비내리는 영동교」와「신사동 그사람」등은 한 잔 술과 함께 우울한 사회 분위기에 지친 서민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녀의 뒤를 이어 여고생 가수 문희옥이 등장했으며 트로트는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기도 했는데 동료가수 현철이 늦은 나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조성해 놓은 트로트 붐 덕택인 셈이다
'고(Go)'를 보고...가네시로 카즈키라는 재일 일본인 작가 김효진의12만부 이상 팔린 2000년 나오키 문학상 수상작을 한국의 스타맥스와 일본의 도에이 영화사가 공동 제작한 작품 GO. 재일한국인 청년이 겪게 되는 혼란스런 정체성을 자유로운 젊은이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유쾌하게 묘사하였다. 2001년 부산영화제에 출품되었고, 일본 영화 사상 최다 예매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국내 배우들이 카메오로 출연하여 왠지 더 가까운 느낌을 주고 있다. 기존의 한일 관계에 대한 무거운 접근 방식을 벗어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유쾌하고 간결한 접근 방식으로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유키사와 이사오 감독의 영화 는 가네시로 카즈키의 원작의 주요 주제를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면서 또한 그가 그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영상을 창조해냄으로서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되어 호평을 받을 만큼 영화의 높은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사실 영화 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고 우리의 현재, 앞으로의 미래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주는 영화다.나(스키하라/이정호: 쿠보즈카 요스케 분)는 태생이 꽤나 복잡한 고등학생이다. 초급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 열혈 마르크스 주의자로 조총련 활동을 한 아버지(수길: 야마자키 츠토무 분)덕분에 조총련계 초,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하와이를 가겠다는 아버지의 엉뚱한 발상으로 온 가족이 한국 국적으로 옮긴 후 내 나름의 뜻을 품고 일본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일본에 사는 사람이다. 물론 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몰랐었는데 나의 인생에서 아버지의 영향은 꽤나 많았었던 것 같다. 프로복서 출신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익힌 권투와 단련된 날렵한 몸은 학년이 바뀔 때마다 통과의례처럼 만나는 승부수에서 나를 백전백승의 용사로 만들어 주었다. 학교에 입학한 첫날부터 시작된 승부수는 본의아니게 민망할 정도의 엄청난 무용담이 되어 학교 안에서 전설처럼 되어버렸다. 물론 그렇게 만난 친구들이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내가 내려친 재떨이에 결국 코가 주저앉아 성형수술을 하게 된 후 여학생들에게 인기를 끌게 된 야쿠자의 아들 카토부터 전차와 목숨을 건 경주를 하는 '수퍼 그레이트 치킨 레이스'에서 이긴 타와케 선배 등 쟁쟁한 멤버들이지만 솔직히 선생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불량 학생인 것은 사실이다. 물론 내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일뿐이다. 늘 조용한 친구지만 나랑 있을 때 나누는 시시콜콜한 농담과 다양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내게 즐거움을 준다.운명은 영화처럼, 소설처럼 그렇게 시작되는가 보다. 갈까말까 망설이다가 간 가토의 생일 파티에서 일본 여학생 사쿠라이(시바사키 코우 분)와의 만남이 바로 그 운명이었다. 무조건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더니 내 우롱차를 허락도 없이 마시고, 내 마음을 읽은 듯이 지루한 파티장에서 날 데리고 나가버린 그녀. 그렇게 우리는 시작되었다. 그녀와의 어색한 데이트를 거듭할 수록 겉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사쿠라이와 첫 키스를 했다. 너무나 달콤한 순간. 하지만 처음으로 내 머리 속에 내가 재일교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그것 때문에 사랑을 잃을 수는 없다. 분명히 우리의 사랑은 아무런 모험없이 달콤하고 흥미진진할 뿐이었다. 하지만 모든게 이렇게 순조로웠던 것에 불안해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정일이 뜻밖의 전화 한 통화를 남기고 죽었다. 그리고 그녀와 드디어 첫 섹스를 하려는 찰나에 난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말해버렸다. 역시 예상하지 못한 나의 말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고, 날 떠났다. 짧은 기간동안 가장 소중한 친구와 여자친구를 동시에 잃어버리게 된 나는 오랫동안 방황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창밖에 내리는 눈을 보던 나에게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그렇다. 나와 그녀의 사랑은 다시 시작된 것이다. 나의 러브스토리는 끝나지 않았다.그러나 영화는 작가인 가네시로 카즈키가 작품의 구석구석의 페이지마다 강조한 "이 작품은 나의 연예이야기이다."에 입각해 만들어진 영화다. 즉, 현 재일 한국인들이 처한 재일 사회의 냉혹하고 참혹한 현실은 철저히 배제된 채, 재일 청소년으로 대표되는 정일과 스기하라를 통해 그들의 눈에 비추어진 세계만을 그려내면서, 또한 그 속에서의 그들이 열망하는 세계, 그들이 현재 처해있는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서 주어진 환경에 억압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른들에 비해 그들의 노력을 통해 찬란한 희망이 남아있다는 것을 작가는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영화의 곳곳에서 현 재일 사회와 재일 한국인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아버지가 스기하라에게 건넸던 "NO soy coreano, ni soy japones, yo soy desarraigado(나는 한국사람도 아니고, 일본 사람도 아니며, 떠다니는 일개 부초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즉, 국적이란 것은 큰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람들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너무 암울하고 폐쇄적인 태도보다는 개척 적인 정신이 필요함을 가르치기 위해 아버지가 스기하라에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또한 셰익스피어의 에서 인용한 "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이란 문구이다. 이 문구는 이 영화에서 그리고 소설에서 가네시로 카즈키가 말하려는 것과 너무나도 일맥상통하는 말인 것 같다.그러나 영화의 속을 더듬어 보면 조금은 일본 사회를 되짚어 볼 수 있는 것 같다. 정일이 지하철역에서 같은 학교 여학생을 구하려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 장면.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정일은 도착하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서는 일본학교의 남학생 여럿이서 어떻게 하면 재일 조선인 여학생을 괴롭힐까 하는 방법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가, 한 일본 남학생이 정일의 학교 여학생에게 다가가 희롱을 하고 그 여학생을 정일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낸다. 정일은 정의감에 불타올라 일본 남학생에게 맞서지만, 일본 남학생이 무심코 휘두른 잭나이프에 목이 찔려 안타까운 죽음을 맞게 된다. 정일의 장례식 날, 정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스기하라와 그의 조총련계 시절 친구들은 정일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자는 문제에 대해 대립한다. 스기하라는 정일의 죽음이 헛되어서는 안되지만 정일이 역시 보복 같은 것은 결코 원치 않을 것이라며 반대하지만, 조총련계 아이들은 보복은 정일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긴다. 이는 통해 작가는 과거의 재일 사회에 물들어 버린 조총련계 아이들을 통해서 일본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심에 반해, 스기하라를 통해서 무조건적인 보복과 폭력보다는 근본적인 원인 해결과 대안을 모색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작가는 정일의 죽음을 통해 작가는 '무심코 휘두른 칼에 죽게되는 정일'로 대표되는 일본 사회의 현실을 그려낸 것 같다. 즉, 일본인들은 자기들과 겉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재인 한국인, 재일 조선인들을 괴롭히고, 그들은 그러한 괴롭힘 들은 꾹 참아내기만 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정일을 통해 작가는 일본인에 대하여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용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그리고, 일본의 엘리트. 고위계층으로 대표되는 사쿠라이의 아버지가 같은 아시아인인 중국인과 한국인을 그들의 피가 더럽다며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민족으로 결부시킨다는 그의 신조를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의 고위계층에서 자의적으로 그들의 기득권 유지와 확보를 위해 타민족의 인권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그들의 이득을 추구한다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스기하라와 사쿠라이의 첫 만남에서의 대화내용이다. 그 들의 첫 만남에서 서로 주고받았던 대화 중에서 사쿠라이가 스기하라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묻자, 스기하라는 ".....가능하면 일류대학에 들어가서, 가능하면 예쁜 마누라 얻고, 가능하면 귀여운 애를 둘쯤 낳고, 가능하면 도쿄에 단독주택을 지어서, 가능하면 정년 퇴직 후에는 바둑이나 두고, 가능하면 화창한 가을날에 마누라 손을 잡고, '당신이랑 평생을 같이 살 수 있어서 행복했어' 라고 말하면서 평화롭게 죽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을 테니까 다른 길을 걷겠지."라는 대답을 한다. 이것은 일본사회에서 재일 한국인이 처해있는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일본 사회에서 최대한 잘 되어 봐야 평범한 사람이 되고 대부분은 그 이하류의 사람밖에 되지 못하는 현실의 냉혹한 차별을 스기하라를 통해서 대변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비정규직에 관하여과 목 명 : 사회학의 이해강 사 명 : 김순영소속학과 : 기계설계·자동화공학부학 번 : 96102612성 명 : 문선중1. 비디오를 보고1984년부터 파견근로제를 시행해 왔다는 씨티은행. 내가 알기로는 파견근로제가 국회에 통과된 것이 김영삼정권 당시 아무도 모르는 한밤중에 통과된 것인데 그걸 1984년부터 시행해온 씨티은행은 김영삼을 능가하는 것인가? 내가 기억하기로 파견근로제에 대해 당시부터 노동조합들이 반대해온 걸로 알고 있다. 이러한 것은 파견근로제가 가지는 장점보다는 이로 인한 단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것을 시행해온 씨티은행,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해 싸움보다는 순응을 택한 우리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의 향상이라는 이유로 눈에 보이는 문제들을 무시하고 지나쳐가고 있다.난 언제나 사회학의 이해 강의가 여성학 강의로 치우쳐지지만 그러한 부분을 보다 배제하고 말하고 싶다. 물론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부당한 처우를 당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여성보다 남성이 가정을 위해 돈을 벌어와야 한다는 것이 크게 차지하기에 난 나와 같은 남성들에 관해 더 이야기하고 싶다. 씨티은행에서 자살했다는 남성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유난히 내게 더 다가왔던 이유는 아마 위에 이야기했던 것 때문일 것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등이 올라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성인남성은 반드시 직업이 있어야 하며 그 안에서 올바른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을 위해 임금을 벌어와야 한다. 아직까지 이러한 부분이 크게 남아있는 우리나라에서 그 남성은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 열심히 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그 스스로가 받아야했던 스트레스, 이는 그에게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었을 것이다. 씨티은행의 실적공개제에 의해 간부로서의 역할과 실적을 쌓기위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그에게 자살은 최고의 도피처였을 것이다. 이는 일본의 한 대학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안전망이 제거된 외줄타기에서 일부만이 안정되게 외줄타기를 성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농협을 보면 위에 내가 이야기한 것이 얼마나 여성에게 불리하게 적용되는지 알 수 있다. IMF당시 농협은 명예퇴직을 적용할 때 부부직원을 먼저 찾아내었다. 그리고 부부직원중 여성에게 권고사직을 요구하였다. 집안의 가장인 남성이 회사를 다니기위해 어쩔 수 없다라는 이유로. 그리고 이들을 계약직으로 채용하였다. 재채용된 이들은 같은 업무를 하면서도 정규직일 때 받던 자신들의 임금과는 현저히 차이가 나는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여성이라는 이유에게 시작된 것이며 이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뿌리깊은 男尊女卑 思想과 儒敎적 이유때문일 것이다. 사실대로 얘기해서 여자가 집에서 놀고 있는 것과 남자가 집에 놀고 있을 때 우리사회에세 누구를 질책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는 단번에 알 수 있다. 이게 결코 여성에게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남성은 강해야만 하며 집안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만 한다는 생각들이 같이 공존하기 때문이다.지금의 신자유시대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며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을 우리는 단지 두 개의 예인 씨티은행과 농협을 통해 알 수 있다. 끊임없는 경쟁, 그리고 해고에 대한 두려움. 모든 것은 시작은 신자유경쟁 노선을 기치로 내걸며 IMF를 넘는다는(?) 일념에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지금 이 사회의 모습이다.2. 비정규직이란?비정규직이란 정규직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도 정규 노동의 전형적인 특징을 벗어난 모든 고용형태를 의미한다는 식으로 가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정규직의 특성을 통해 고려해 볼 수 있다. 정규직의 특징은 무엇인가?일반적으로 들고 있는 것을 보면첫째, 기간을 정하지 않은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있으며 따라서 근로기준법 제30에 따라 사용자는 정당한 이유(노동자에게 중대한 징계사유가 있거나 정리해고의 요건을 충족한 경우)가 없는 한 해고할 수 없고 고용이 정년까지 보장이 된다. 이 것이 정규직 노동자의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할 는 것이다.넷째, 사용자와 위탁, 도급 등이 아닌 근로계약 을 체결하고 법적으로 근로기준법이 당연히 적용된다. 그리고 임금수준도 근속년수와 기술에 따라 통상 월급제로 지급되는 형태를 띤다.따라서 위와 같은 정규직 노동자의 특성에서 벗어나 근로계약기간이 정해진 단기근로(계약직, 임시직, 일용직), 근로계약을 맺은 사용자와 업무를 지시하는 사용주가 다른 파견노동, 소정근로시간이 짧은 단시간노동(물론 명목상 단시간 노동자라고 하더라도 근무시간이 정규직과 비슷한 경우가 많다), 위탁·도급계약을 체결하고 독립사업자처럼 되어 있는 특수고용형태 노동자 등이 비정규직의 대표적인 유형이라 할 수 있다.(다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부분 기간을 정한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점이 핵심적인 특징이다)·비정규 노동자 증가의 원인가) 신자유주의 고용 유연화 정책이 비정규직 증가의 근본적이면서도 직접적인 원인이다.- 노동 불안정화의 심화, 즉 비정규 노동자의 증대는 기술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전략 적·조직적 요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자본 축적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자본은 신자유주의로 무장하여 노동자에 대한 대대 적인 공세를 취하고 투쟁의 성과물을 빼앗아 가기 시작했다. 즉 노동자가 투쟁속에서 획득한 성과물에 대한 회수를 통한 이윤 증대로 자본 축적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본의 전략은 중층적·위계 적 원-하청 생산체계를 통한 간접고용과 노동력 사용의 유연화(임시, 일용, 계약, 단시간노동 등)를 통해 생산 비용과 임금비용을 절감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는 고용 유연화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자본은 노동자를 포섭-관리-배제층으로 나누어 노동자에 대한 지배와 통제력을 강화하고 있다. 즉 소수의 노동자만을 정규직으로 채용하여 자본에 협력하게 하는 포섭 노동자(골드칼라)와 일정한 수준의 배제된 노동 자(실업자), 자본의 필요시 고용했다가 언제 던지 해고 할 수 있는 관리하는 노동자(비정규직)로 나누어 노동 자 내부의 경쟁을비정규직이 채워졌다.- 비정규직의 증대가 노동조합의 투쟁력과 계급적 단결의 약화로 나타나자 자본은 노동자에 대한 통제와 지배 를 강화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회수를 위해 비정규직을 급속하게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비정규 토동자란 노동자 내부에서 상대적으로 고용, 임금, 노동조건, 삶 등이 정규직에 비해 열악하고, 불안정 상태가 심한 노동자 집단을 지칭하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불안정 상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임. 즉 전체 노동자의 불안정화가 심화되고 있으며, 정규직 내부 에서도 중소기업(하청업체)의 정규직은 대기업(원청)의 정규직보다 불안정 상태가 심함- 비정규직은 다음의 3가지△고용불안의 제도적(고용계약형태)항상화△고용계약 관계의 이중적 형성 및 은폐△노동시간 사용의 제한]중에서 어느 한 경우에만 해당하더라도 임금 등의 제반 노동조건이 기술과 기업내의근속 년 수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각종 차별로 인해 이중적인 착취와 수탈을 당하는 노동자 집단임3. 비정규직의 형태{분류기준종류유 형(명칭)고용기간임시고용임시직계약직일용직촉탁사원인턴사원노동시간단시간단시간(파트타임)아르바이트고용주체간접고용파견사내 하청용 역특수고용개인도급재택근로가내근로기타외국인산업연수생불법취업자공공근로공공근로· 비정규 노동자 증가현황(정부 발표 임시·일용직 기준)가. 한국의 노동시장은 경직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이 유연화 된 것이 문제이다.이미 70년대부터 40%를 유지하였다.{년*************995비정규직 비율40%35.7%45.8%41.9%나. IMF사태를 겪어면서 비정규 노동자는 급증하였으며 2000년에는 50%를 넘어섰다.{년1997199819992000비정규직 비율45.9%47.0%51.7%53%· 비정규 노동자예4. 비정규직에 관련하여 기업, 정규직, 비정규직의 장단점{기업장점·낮은 비용으로 근로자 고용·경기변동에 따른 고용조정의 탄력성 제공·계약갱신거부를 통한 자유로운 해고,·고용의 간접화·고용관계의 은폐··일자리상실 위협을 통한 비용절감의 경기근로계약의 엄격한 규제, 위반시의 고용관계에 대한 명시를 사용자의 경제적 유인을 없애는 방향이다. 다음으로 아무리 훌륭한 법이 있어도 현실에서 규범력이 없다면 허울뿐일 것이다.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조직하여 또는 비정규직들만의 독자 노조를 설립하여 집단적인 교섭을 통해 위와 같이 확대된 노동보호규정들이 현실에서 실질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행 집단적 노사관계법 개선이 필요하고 조직화 사업에 힘써야 한다.아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안을 담았다..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정규직과 같은 임금을 보장해야 합니다.임신출산으로 생긴 결원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 임시직, 계약직 노동자를 채용하지 못 하게 법으로 규제해야 합니다..독립사업자 형태의 특수고용계약직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해야 합니다..단시간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조항을 신설해야 합니다..근로기준법을 위반하거나 상습적으로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하는 기업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법의 실효성을 높여야 합니다.비정규직과 영세사업장 모든 노동자에게 4대 사회보험을 전면 적용해야 합니다..비인간적인 중간착취제도인 파견법을 철폐하고 불법도급, 용역을 근절해야 합니다.·예1) 미국 UPS사에 대한 팀스터(Teamster) 노조의 파업비정규직 노동자 운동의 가장 으뜸가는 사례는 전술한 미국 UPS사에 대한 팀스터(Teamster) 노조의 파업일 것이다. UPS사는 200개 나라에서 영업을 하며 전세계에서 34,00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UPS사는 1996년 10억 달러의 이윤을 낸 크고 강력한 전지구적 다국적 기업이다. 하지만 UPS사의 모든 것은 불확실한 파트타임, 저임금 노동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UPS는 프랑스에서 프로스트 파슬 서비스를 매입한 이후 수백 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UPS사의 직원들은 지속적으로 파트타임 노동자로 전환되고 있었으며, 영국의 UPS사에서 파트타임 일자리의 비율은 몇 년 사이에 6%에서 30%로 증가다.
최고수준의 중국 역사 문화 답사기삼국지의 영웅-제갈공명, 그리고 유비科目名 : 世界文明의 理解講師名 : 김유리提出日 : 2002年 10月 25日 金曜日提出者 : 文善中學 番 : 96102612學 科 : 機械設計·自動化工學部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은 후한 말 어지러운 세상을 살며, 한나라 황실에 의한 천하 재통일을 구상하고 황실의 후예라고 자칭하던 무장 유비(劉備)를 보좌하여 삼국시대라는 한 시대를 탄생시킨 대정치가이다. 비록 천하통일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제시한 천하 삼분 계획으로 위(魏)·촉(蜀)·오(吳) 삼국이 정립하는 시대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중국 역사상 한 획을 그은 것으로 제갈공명의 능력을 알게 해준다.전한의 원제(재위 기원전 48∼기원전 33)때 강직하기로 유명한 사예교위(도지사겸 경찰청장)였던 제갈풍의 후손인 제갈량은 181년, 당시 서주에 속하던 낭야국 양도현(현 산동성 기남현부근)에서 태어났다.공명은 주나라의 관중과 연나라의 악의를 자신과 비교헹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공명의 허풍으로 여겼으나 공명의 학우들인 최주평, 서원직, 석광원, 맹공위등은 자부심이 강한 공명을 관중과 악위에 버금하는 대업을 이룩할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방덕공은 이러한 공명을 승천할 때를 기다리는 용이라 하여 '와룡'이라고 불렀다. 연못속에 잠겨있는 용도 구름을 만나지 못하면 승천할 수 없는법이지만 '삼고초려'로 공명을 군사를 맞이하러 온 장군 유비는 승천할 수 있게 기회를 가져다 준 구름이었다.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유비가 47세, 공명이 27세였던 207년이었다.유비는 관우를 비롯한 수많은 부장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뛰어난 막료가 없었기 때문에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채 곧잘 고배를 맛보아야 했다. 그러던 유비가 신야에 주둔하고 있을 때 관직을 얻고자 하는 찾아온 서서에게 공명을 추천받았다고 하는데, 다른 책에서는 공명이나 사사의 스승격인 사마덕조가 추천했다고도 한다. 서서의 진언에 따라 융중을 세 번이나 찾아가(이로 인해 삼고초려(三顧草廬 형주를 잃은 뒤에는 촉으로부터 북쪽 방면으로 정벌하는 방법밖에 취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대륙의 절반을 손에 넣고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위나라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거기에 촉은 수비하기에는 용이하나 공격하기에는 그 지형이 적당치 않았다. 227년 3월에 북방 정벌군을 한중으로 옮기며 공명은 그 유명한 출사표를 20세인 후주 유선에게 올렸다. 공명은 한중분지의 양평관에 거점을 두고 북방 정벌 준비에 착수했다.227년(위나라의 태화 원년) 6월 공명이 한중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위나라의 조예는 조조의 큰 신뢰를 받았던 표기장군 중달 사마의를 형주와 예에 주둔시켜 오의 진출에 대비하는 한편, 조조의 사위 하후무를 장안에 주둔시켜 촉의 진출에 대비하였다. 사마의는 완성에 주둔하자마자, 위에 반기를 들고 촉에 투항하려던 신성태수 맹달을 죽였다. 이로 인해 맹달을 설득하던 공명의 북방정벌 작전의 첫 전투에서 사마의에게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맹달의 실패로 북벌 전략의 재검토가 불가피해진 공명은 한중에서 작전회의를 열어 228년 봄 드디어 북방정벌을 개시하였다. 우선 공명은 조운등의 별동대를 포사도로 파견하는 한편 촉의 군사가 미현을 점령하려 한다는 정보를 위나라에 흘려, 적을 교란시키기 위한 양동작전을 전개하여 주력군을 이끌고 기산으로 출격했다. 2년정도의 훈력은 쌓은 촉의 군대를 이끌고 기산에 도착한 공명은 그 북쪽의 서현성을 전진기점으로 삼아 주둔하며 선봉부대를 천수를 건너 가정으로 진출시켰다. 가정은 농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곳으로, 예로부터 농서와 관중을 잇는 도로의 농서쪽 출입구로 요충지였다. 이 전략상의 요충지인 가정을 점거하여 농서를 탈환하기 위해 진격해 올 위나라 군대를 격퇴하는 것이 선봉부대의 임무였다. 선봉부대의 파견이 결정되었을 때 사람들은 위연이나 오의같은 노련한 대장들이 될거라 생각했지만 죽은 유비조차 탁상공론만 할 줄 안다며 주요요직을 주지 말라던 마속에게 중요한 임무를 가진 선봉부대의 지휘권을 주었다. 그러나 마속은쳐 만반의 준비를 갖춘 공명은 234년에 마침내 10만대군을 이끌고 진령북쪽 기슭의 오장원으로 출격하였다. 군량미문제에 신경을 쓴 공명이 관중평야로 출병하였고 이를 예상한 사마의는 무공 부근에서 전군을 이끌고 위수를 건너 강을 등지고 포진하였다. 그 사이 공명이 동쪽의 손권에게 공동 작전을 전개하도록 요청하고 5월에 손권이 10만대군을 일으켰으나 손권은 합비에서 후퇴하고 말았으며 이로인해 동서 두방향에서 위를 협공하려던 공명의 작전구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위의 명제는 공명의 오장원 출격에 맞서 출병하려는 사마의에게 지구전방침을 명령했으며 사마의는 공명의 여러 가지 술책에도 넘어가지 않고 버티었다. 사마의가 지구전을 고집함에 따라 공명측 군사의 피로는 누적되었다. 거기에 공명의 왼팔과 오른팔로 공명을 보필해야 할 대장 위연과 長史(문관)양의 대립을 일삼았으며 공명은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살펴야만 하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끝내 양군이 대치한지 1백여 일이 지난 8월 어느날 군중에서 공명은 병으로 사망했다. 그때 공명의 나이는 53세로 유비의 부름을 받아 그의 군사가 된지 27년째 되는 해였다.유선은 공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칙을 내리는 동시에 그에게 '승상무향후(丞相武鄕侯)'의 관인(官印)과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아로 인해 사람들은 공명을 제갈무후라고 부르게 되었다.촉의 군사장군으로서 공명의 한계가 있음을 본인도 알고 있었을테지만 마치 뭔가에 홀린 듯이 북방 정벌에 얽매였던 그의 고충스러운 심정은 대륙서남쪽의 견고한 요충지에 둘러싸인 촉에 언제까지나 안주하고 있다가는 우세한 중원의 군대에게 제압당하고 말 것이라는 초조함 때문이었다. 공명이 북방정벌에 나선 또하나의 이유는 유능한 선비들을 촉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한나라가 재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천하에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패할대로 부패한 후한말기의 조정은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했으며, '황적의 난'이후 서북의 군벌 동탁이 정권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군벌이 황실을 옹위이에 필요한 경비는 중산군의 장세평과 소쌍이라는 대상이 유비의 남다른 모습을 보고 지원해주었다. 이때 모집한 젊은이중에 그의 심복이 되는 장비와 관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군사는 고작 2,3백명 정도뿐인 아주 미미한 숫자였다. 아무튼 유비는 교위 추정의 부하로 전투에 참가해 그 공훈으로 안희현의 위(현재의 경찰서장직)에 발탁되었다.황건의 난이 어느정도 평정하자 상벌을 재심사하라는 칙령이 내려졌고 안희현에도 독우(순찰관)가 찾아왔으나 유비의 회견요청을 거절했다. 유비는 이에 불한당처럼 태수의 명이라는 거짓으로 독우를 붙잡아 200대나 때리고 도망갔다. 그러나 황건의 난이 아직 완전히 제압되지 않아 다시 의용군에 참가해 하비근처의 황건적 토벌에서 공훈을 세우고 하밀현의 승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고당현의 위가되고 다시 현령으로 승진했지만, 이번에는 황건적과 싸우다가 패배하여 중랑장에 임명되어 북쪽 변방을 지키는 공손찬이 있는 곳으로 달아났다. 이때가 187년이었다.189년 동탁이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위하여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고, 이에 190년 동부의 각 주군의 장관들이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하였다. 이에 동탁이 어린 헌제를 끌고 서쪽 장안으로 피신했다. 이에 연합군은 와해대었고 후한 왕조는 완전히 통제력을 상실했고 주군의 장관이나 실력자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어 군웅이 할거하는 상태에 빠졌다. 이런 군웅들 가운데 원소와 조조가 두드러졌다. 원소는 공손찬이 세력권이던 청주의 자사 전해를 공격했다. 이에 공손찬은 유비를 별부사마로 임명하여 전해로 파견했으며 이게 유비의 재출발 계기였다. 유비는 원소와 싸워 여러 차례 공적을 세웠으며 그 공훈으로 평원군의 상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유비는 명장관으로 능력을 발휘해 치안회복과 민생 안전에 주력을 다하며 겸허한 태도를 보여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다.이후 공손찬의 요청에 따라 전해와 함께 동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제에 주둔했다. 이때 조조가 세력확대를 꾀하여 서주로 군대를 출동시켰으며고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처럼 유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빈틈없고 약삭빠른 조치를 취하는 사람이었다.건안 5년(200) 조조는 유비를 공격했지만 어이없이 패배하고 조조는 유비를 직접 토벌하러 나섰다. 이 전투에서 유비는 또다시 패배하여 처자식과 부하를 내팽개친채 달아났으며 관우도 항복하고 말았다. 조조에게 인덕또는 인각적인 매력을 갖추고 있는 유비는 경계할 대상이었기에 과감한 결단력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소패를 빠져나온 유비는 청주의 원담에게 갔다 원소에게 의탁했으며 이로부터 한달이 지나자 그의 흩어졌던 병사들이 유비밑으로 돌아왔다.원소와 조조가 관도에서 전투를 벌일 때 유비는 원소밑에서 가담하여 싸우고 있었다. 유비는 여러 현의 지원을 받으며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조조의 사촌 조인에게 패하여 다시 원소에게 돌아갔다. 유비는 이후 원소와 결별하여 여남에서 수천명의 군사를 모았고 조조는 원소의 물자품 기지를 공격해 원소의 맥을 끊은뒤 통쾌한 승리를 거뒀다. 건안 6년(201년) 조조는 여남군에 자리잡은 유비를 공격했으며 이에 유비는 의용군에 가담한지 17년, 41세가 되던 해에 형주의 유표에게 의지하게 되었다.형주는 장강중류지역에 남북으로 걸친 광대한 주로 형주의 영주 유표는 호족들과 결탁하여 군소호족들을 평정하고 원술과 손견의 침공을 격퇴하였으나 유표는 학자다운 풍모를 가진 교양인이었기에 적극성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유비에게 신야의 성을 거처로 내주고 군대도 증강시켜 주었다. 그러나 유표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유비밑으로 들어가자 이에 경계를 품은 유표는 박망으로 진출시키고 여러 가지 분쟁을 해결하게했다. 유비는 이를 해결하며 대체로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건안 6년(201)부터 13년까지 7년동안이나 신야에서 평화롭게 머물렀다. 북방평정에 정신없었던 조조가 남쪽의 형주로 군대를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생활은 무척 평화로왔지만 유비는 이 생활이 오래되자 무척이나 무언가를 허전해했다. 이때 굵어진 허벅지를 보고 한 말이 비리육생이라는켰다.
여성의 평등과 목 명 : 사회학의 이해강 사 명 : 김순영소속학과 : 기계설계·자동화공학부학 번 : 96102612성 명 : 문선중1. 세계최고의 복지국가 스웨덴1. 일반적인 상황약 900만의 인구규모가 적은 나라로 평등지향적인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회민주주의가 강력한 힘을 가진 사회민주당이 장기간 집권하여 전후의 복지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하고 이 과정에서 대폭 확대된 공공부문에 여성인력이 대거 투입되어 여성의 취업이 급격히 높아졌다. 또한 상당히 일찍부터 남녀평등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재산상속에서의 남녀평등권이 1845년부터 인정되고 있으며 여성의 대학입학 허용이 1874년부터 인정되었다. 거기에 여성의 참정권은, 지방선거는 1908년부터 국정선거는 1921년부터 인정 되었다.스웨덴은 여성의 취업률이 남성의 취업률에 육박할 정도로 높다. 생산활동연령인 20∼66세의 여성의 81%(남성은 1992년 86%임)가 취업을 하고 있어 노동력 인구중 여성의 비율이 1993년 현재 세나라 모두 49%에 달하고 있다. 이처럼 여성노동력의 비중이 커지자 자연히 보육제도의 확충과 충실화에 노력하여 가정과 직업의 양립을 가능하게 하는 지원체제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공적인 보육시설의 정비와 육아휴직제도의 도입이 중요정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 결과 3∼6세까지의 유아중에 공적인 비용으로 보육되는(가정보육을 포함) 비율이 1992년 현재 79%의 높은 수준이다. 그리고 7∼10세까지의 아동의 공적비용에 의한 보육(가정보육 포함)의 이용율도 1992년 현재 40%에 이른다.복지국가 형성에 따라 공공부문이 확대되어 이 부문에서 여성노동력의 큰 부문을 흡수하여 공공부문의 여성노동력의 최대고용주가 되고 있다. 즉 여성피용자의 58%(남성피용자 25%)가 공공부문에서 일하고 있는데 특히 복지나 교육의 업종에서 다수의 여성이 일하고 있다. 여성 피용자 수는 1965년에서 1992년 사이에 1.7배가 증가하였고 그중 98%가 공공부문에서 일하고 있다. 물론 남녀근로자 사의 해소 등을 위한 적극적 조치 의무·10인 이상 고용하는 고용주의 「평등계획」, 작성의무 및 옴부즈맨이 계획서 제출요구가 있을때는 제출할 의무·구체적인 차별금지 및 간접차별금지 규정·고용주에 의한 성희롱의 금지·고용주의 성차별에 대한 입증책임·성차별 분쟁 해결을 담당하는 노동재판소등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다.3. 평등정책담당 정부기구국회의원중 42.7%(1998), 각료중 50%(1998)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세계최고의 평균지수를 나타내는 스웨덴은 1979년 제정된 「남녀평등법」에 의하여 「평등위원회」와 「평등옴부즈맨」을 설치하여 평등법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하여 철저한 감독을 하게 된다.그러나 이웃나라 노르웨이보다 적극적인 평등추진이 안되고 있다는 불만과 우려를 하게 된 여성들은 1991년과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평등법을 개정토록 영향력을 미쳐 새로 정비된 「평등법」을 근거로 세게 최고의 남녀평등과 복지제도를 자랑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 법의 정신에 따라 정부는 1988년과 1991년, 1994년 3차례에 걸쳐 「1990년대 중반까지 달성하여할 남녀평등과 정책에 관한 정부제안서」라는 「국가합동계획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이 계획에 따른 평등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이 「행동계획」에 의하면 5년 동안에 「교육에서의 평등」,「가정에서의 평등」,「여성의 영향력」등 5개 부문으로 나누고 구체적인 수치목표와 계획추진 시간를 정하여 실천에 노력했다.특히 1994년에 제출한 3번째의 정부제안서에는 남녀평등실현의 목표를 「권한의 분담 및 책임의 분담」에 두고 다음의 6가지로 정리하였다.·권력의 영향력이 배분되는 남녀평등·경제적 독립을 획득할 가능성 있는 남녀평등·창업, 고용조건, 직업생활의 조건등 직업상의 능력향상이 가능한 남녀평등·교육에 대한 액세스의 남녀평등·가사, 육아에 대한 책임분담의 남녀평등·Genden에 대한 특유한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및 권력의 경제력의 배분문제를 가정책임의 공동분담과 함께 남녀평등정책의 진정한 과제로 인식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실천할과하였으며 1950년대에는 여성의 공장노동 임금은 평균하여 남성의 임금보다 30%나 낮았다.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서 여성의 직장진출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사회적인 의식의 변화, 국가졍제의 발전에 의한 Public Sector의 확대로 발생한 노동력부족에다 1971년의 세제개혁으로 부부의 소득합산 방식에서 부부개별 납부방식으로 전환되어 여성의 직장참여를 더욱 더 부추기게 되었다.그리고 Public Sector의 확대에 의한 복지제도의 충실한 시행은 동시에 가사와 육아등 여성의 가정 일의 부담을 덜어주어 다수의 여성들이 직장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하였다. 취업여성의 증가에 따라서 이들을 둘러싼 환셩의 정비도 이루어져 나가는 가운데 1978년에는 남녀평등위원회에서 「노동에서의 남녀평등이라는 제목의 조사보고서가 의회에 제출되었다.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1979년에 「남녀평등옴브즈만」의 설치등을 규정하는 「노동활동상의 남녀평등에 관한 법률(Lagom Jamstalldhet mellan Kvinnor Och Man arbestslivet : 1979년 법령전서 제1118호)」이 제정되어 1980년 7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그후 1980년대를 통하여 일하는 여성의 비율은 계속 올라가게 되었다.스웨덴의 노동시장성이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여성의 노동참가율은 1980년에 75.2%였던 것이 1990년에는 82.6%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임금도 1973년에는 63%∼84%였던 것이 1989년에는 74%∼90%까지 올라갔다. 1988년에는 20세에서 64세까지의 전일근무제 근로여성은 남성의 78%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이 법률의 시행으로 노동에 있어서의 남녀평등의 수준은 전체적으로 향상하였으며 또한 남녀평등옴브즈만의 설치는 이 법률의 최대 성과의 하나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스웨덴 국내에서는 노동시장에서 남성과 여성의 현실적인 상황은 아직도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면, 남성과 여성의 직업은 서로 너무 편중되어 있으며 대부 금지·임금차별에 대한 제소의 가능성·성희롱에 대한 금지의 명시·직접차별 뿐 아니라 간접차별도 금지·평등계획 작성을 사용자의 의무로 할것·평등옴브즈만의 감독범위 확대등이 새로운 법률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이러한 것들을 모두 포함시키려면 현행 법률의 일부개정에 그쳐서는 안되며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제안을 심의한 결과 1991년에 법안이 마련되어 1992년 1월 1일부터 시행되는 새로운 법이 성립되었는데 이 신법 「남녀평등법(Jamstalldhestslag:1991년 법령전서 제433호)」의 시행과 함께 구법은 폐지되었다.그후에 또 1993년 1월에는 남녀간의 임금격차에 관한 조사보고서인 「임금격차와 임금차별:노동시장에서의 여성과 남성」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 보고서에서는 남녀간의 임금격차 원인으로 남녀의 노동시간의 차이 및 업무의 질적 차이등을 제기하면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임금의 격차가 1∼8%나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남녀간의 동일노동 및 동일가치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남녀평등법에 고용자의 임금격차에 관한 조사를 해마다 실시할 의무를 부가시키는 대책이 제안되고 있다.이 임금 격차에 관한 조사의 조항을 포함시킨 남녀평등법의 개정은 1994년 5월에 성립되어 동년 7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2) 남녀평등법(Jamstalldhestslag)의 내용신법은 새로운 규정을 포함하여 구법을 강화시킨 것이지만 이 법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전체적으로는 구법과 비슷한 것이다. 법률은 그 내용에서 두 개의 중요한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전반에서는 사용자에게 직장에서의 평등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하고 후반에서는 사용자에게 성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다만 신규채용이나 승진, 훈련등을 다루게 될 때 사용자가 차별시정을 위하여 일반의 성의 응모자나 피용자를 우선하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제9조, 제16조) 그리고 개개의 경우에 각 피용자나 구직자가 차별행위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법인 헌법의 경우 1980년의 개정에서 가족생활의 양성평등을 조문화하였으며 1985년에는 UN의 여성차별철폐협약의 가입으로 세계무대에서도 뒤지지않는 남녀평등제도를 갖추기 시작했다.1987년의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1989년의 모자복지법 제정 및 남녀고용평등법의 개정으로 동일임금 규정삽입, 1981년 영유아보육법의 개정, 1994년 성폭력특별법 제정, 1995년 공무원임용시험령 개정에 의한 여성채용목표제를 채택하였다. 1995년 여성발전 기본법을 제정, 그 내용에 여성발전기금을 정부예산에서 출연토록 하는 규정을 두었으며, 개인적인 문제를 법정까지 끌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미루면서 논란이 거듭되던 가정폭력방지법도 1997년 11월에 제정, 1998년 7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가게 되어 제도상으로는 선진국 수준에 접근한 진보적인 평등법체제를 갖추어 나가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여성이 정치세계에 직접 참여하여 정책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조직적인 힘은 매우 미약하다. 세계의회연맹(IPU)이 해마다 조사 집계하여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1998년 현재 세계 163개국 조사대상국 중에서 우리나라는 여성의원 점유율이 3.7%(11명)으로 130위로 세계 여성의원의 점유율 13.2%(1998년 말)에 크게 미치지 못할뿐 아니라 제1위(스웨덴 42.7%), 2위(노르웨이 36.4%), 3위(핀란드 33.5%)에 비하여 그 비율과 수가 부끄러울 정도이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지만 '98년에 치러진 지방의원 선거에서도 여성의 당선율과 당선자 수는 너무나도 미약하여 우리나라가 과연 남녀평등의 정치발전을 이룩해 나갈 수 있는 나라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광역의회의 여성점유율은 5.8%(총인원 41명), 기초의회는 1.6%(총인원 56명)에 불과해 여성들의 큰 자각과 적극적인 행동의 분발이 요구된다.1. 여성정책 담당기구(1) 국회 여성특별 위원회1994년 6월 24일 국회에서 의결된 여성특별위원회는 20여명의 남녀국회의원으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