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을 보고나서...중문일본 20012982 손경국'人生'은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였다. 거창하지 않게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져주는 영화여서 오히려 쉽게 볼 수 있었다. 중국의 공산화와 그 이후의 격동의 세월을 보내는 한 평범한 가족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진지하게 고민해볼 겨를도 없이 주변의 변화에 적응해 가는 아주 현실적인 삶을 그린 영화였다. 커다란 역사의 흐름과 자그마한 한 가족사가 같이 나왔다. 하나로 일치될 수 없는, 그러나 격동의 세월로부터 독립적일 수도 없는 한 가족의 삶...남자 주인공 부귀는 도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부인은 결국 딸과 뱃속의 아이와 함께 떠나간다. 그와 동시에 그는 도박으로 인한 빚 때문에 집을 잃고, 그 충격의 여파로 아버님마저 잃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전락했지만 이젠 성실한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떠났던 가족도 돌아온다. 춘생 등과 그림자극을 하던 부귀는 갑자기 들이닥친 공산군의 포로가 되고, 군인들에게 그림자극을 보여준다. 이제 그는 그림자극으로 공산혁명에 가담했다는 평가를 얻게 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곤 공산주의하의 세월을 살아가게 된다. 구장이라는 높은 직책으로 돌아온 춘생과의 만남은 아들의 무덤에서 이루어진다. 춘생의 차에 부귀의 아들 유경이 죽은 것이다. 벙어리가 되었던 하나 남은 딸에겐 행복한 인생이 주어질 듯했다. 하지만 아기를 낳던 중 그녀마저 죽게 된다. 남은 사람들은 슬픔을 극복하고 남겨진 사람들끼리의 행복을 찾아간다...이 영화를 보면 인생은 塞翁之馬라는 말이 생각난다. 도박을 해서 집을 잃었기 때문에 지주로 몰려 개죽음을 당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고, 자는 유경을 굳이 깨워서 학교에 보냈더니 차에 치어 죽었다. 의사들을 반동으로 몰아낸 젊은 학생들의 무지로 인하여 부귀의 딸 봉하는 아기를 낳다가 죽는다. 비상 사태를 대비해 데려온 나이 많은 의사는 만두를 먹다가 탈이 나고 게다가 물까지 주는 바람에 속에서 불어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진다. 그 의사만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더라면 봉하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주어지는 많은 결과들은 역시 많은 아쉬운 순간들을 갖고 있다. 그때 그렇게 하지만 않았더라면... 하지만,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다. 무심코 한 선택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아쉬움과 후회가 남을 뿐, 다시 선택할 기회는 결코 주어지는 법이 없다. 그렇게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인생은 흘러간다.인생은 그 어느 중국영화보다도 볼거리가 많은 영화라고 생각됐다. 국공내전에서부터 공산당의 승리, 이후 모택동 통치하의 중국을 그 주요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만큼, 인민공사나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과 같은 중국 근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대해서 보다 쉬운 이해를 도와주는 영화였다. 한 가족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또한 그렇지만, 중국의 모택동 통치시기의 대사건들(인민공사,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인민공사 단체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이나, 대약진운동을 위해 집에 가재도구까지 쇠붙이면 모두다 꺼내다 가져다 녹이는 모습 등등... 그렇게 열심히 충성했으면서도 수정주의자로 몰려 숙청 당하는 공산당 간부들의 모습들... 그리고, 권력투쟁에 불과했던 문화대혁명에 휘둘렸던 여러 홍위병들... 무수히 희생되었던 여러 지식인들, 학자들, 그리고 문화유산들...
〈모택동시기〉중국 공산당 성립 직후중국 공산당 설립 초기의 사업 중심은 도시였다. 도시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무장봉기를 하여 도시를 탈취하여 혁명의 중심으로 만든 후, 농촌지역으로 영향을 파급시키는 '도시 중심론'이 중국 공산당의 방침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이는 초기에 중국 공산당이 모델로 삼고 있었던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도시 노동자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모택동 등은 농촌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도시를 중심으로 한 중국 공산당의 혁명은 계속적으로 실패하여서 그들의 세력은 계속 약화 되었고 결국 '장정'을 감행하게 된다. 이 장정 도중의 '준의 회의'에서 모택동이 실권을 얻게 되어 이후 중국 정책은 도시 중심에서 농촌 중심이 되고 모택동은 문화 혁명시기까지 계속 영향을 끼치게 된다.모택동의 이론모택동은 농촌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토지혁명을 심화시켜 농촌을 혁명 근거지로 만들어 도시를 포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2) 그것은 중국인의 대부분이 농민이어서 러시아처럼 도시 노동자가 혁명의 중심 세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모택동은 소련의 공산주의 방식을 그대로 중국에 적용한 것이 아니고 마르크스 레닌 주의를 응용하여 중국에 맞는 혁명 방법을 개발해 낸 것이다. 그리고 농민이 혁명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농민의 지지를 얻어 내야 했는데 이를 위해 토지개혁이 실시 되었다. 토지 개혁의 결과 많은 농민들이 자기의 땅을 가지게 되었고 그 농민들의 지지가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승리하게 되는 큰 원천이 되었다.중국 인민 공화국 성립 직후당시 중국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오랜 전쟁으로 생산 설비가 황폐해져 생산이 저하되어 있고 많은 실업자가 있었고, 산업구조의 기형성으로 국민 경제의 자립이 곤란했다.3) 이 시기에는 물가를 안정시키고 투기를 억제 하는 등 경제 회복에 주력했다. 1953년 제1차 5개년계획부터는 본격적인 사회주의 공업화를 추진하였는데, 첫째 자립적인 민족경제 건설, 둘째 중공업기반을 확립해서 서방측 공업동과 마찬가지로 등소평에게도 경제 발전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경제 발전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모택동과는 다른 중국식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중국은 마르크스주의 창시자들의 구상한 상황과도 다르고, 다른 사회 주의 국가와 실정이 같지 않으므로 책속의 이론이나 외국의 경험을 그대로 모방해서는 안 되고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를 중국의 실정에 결부시켜 중국식으로 사회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중국식 사회주의이고 이것의 중심이 되는 것이 경제 건설이다.8) 여기에 따라 우선 농업 부분의 경제 개혁이 시작되었다. 농업 부분에서는 농민의 단독경영이 인정되어 농업집단화가 막을 내렸으며 농민의 자류지, 부업, 자유시장이 확대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그 동안의 '자력갱생' 원칙에서 벗어나 외국의 원조, 차관, 투자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대외개방의 거점으로 경제 특구를 지정하여 외자와 기술 도입의 창구, 수출기지, 대외개방의 창 등의 모델로 삼았으며 점점 개방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이런 변화가 확산되면서 경제체제의 개혁이 불가파하게 되어 중국사회주의 경제는 새로이 '계획과 시장의 결합'을 지향하게 됐고, 그리하여 '시장'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1992년에는 다시 계획과 시장의 혼합체제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결정했다.9) 모택동은 시장자체를 자본주의라 하여 비난했으나 등소평 이후에는 중국식 사회주의란 명목하에 시장을 허용했으며 시장의 역할을 더욱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중국 경제 정책의 특징모택동과 등소평, 즉 문혁 이전과 최근의 경제 개방 정책을 비교해 보면 이런 여러한 다른 점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공통 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론이나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기 보다는 중국의 현실에 맞게 바꾸어서 적용된다. 모택동의 농민중심 혁명이라든지 등소평의 중국식 사회주의가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선성(先聖)이었다. 소평이라는 이름은 혁명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후 불려진 이름이다. 1920년 8월 등소평은 100여 명의 동지와 함께 근로학생이라는 신분으로 프랑스에 건너갔는데, 이 항해는 혁명가로서의 첫 출발이었다. 프랑스로 건너간 등소평은 빈곤과 불안정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러한 배경은 등소평이 정치에 투신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1921년 - 1924년 파리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4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6년 초에는 모스크바로 건너가 공산주의 대학에서 혁명이론과 실천을 배웠는데, 당시 이 대학에는 주1)유소기도 공부하고 있었다.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인 1927년 등소평은 중국으로 돌아왔다.1933년에는 당시 반주류였던 모택동을 지지하고 장정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 1949년 장강 도하작전과 남경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등소평은 이 16년 동안 군과 당에 이름을 떨치며 국가의 지도자가 될 자질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그는 중국의 대표적인 군인이자 정치가였다.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으며, 유소기와 함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등소평은 모택동의 노선에 정면으로 대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 등소평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 제2호로 비판받았으며, 홍위병으로부터 반모주자파의 수괴라는 이유로 실각하였다.그후 두 번에 걸친 모택동에게로의 편지와 총리 주은래의 추천 등을 계기로 1973년 3월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1975년 말부터 1976년 1월에 걸친 '등소평 우파 반격풍조'에 대한 비판투쟁과 4월 7일에 있은 제1차 천안문 사건의 배후조종 세력으로 지목되어 또다시 실각했다. 1976년 9월 모택동이 죽고 화국봉이 모택동 추종자 4인방을 숙청하는데 성공하자, 1977년 7월 당만 아니라 '대약진'은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철강증산운동을 동반했는데 '철은 국가'라는 사고방식 아래 대중 동원에 의해 철이 생산되었다. 1억에 가까운 농민이 철 생산을 위해 배치되어 식량 생산은 위기에 빠지고, 철을 생산하는 연료로 대량의 삼림이 체벌되었으며, 집집마다 냄비나 괭이까지 철의 생산을 위해 징수되었다. 대약진정책의 이 같은 문제점은 주2)여산회의에서 팽덕회에 의해 비판받았다. 이로 인해 팽덕회는 모택동에 의해 실각하였다.구 소련이 60년 이래로 경제원조를 전면적으로 중단한 데다 중·소 관계가 악화된 점 등의 원인으로 대약진정책은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삼면홍기'는 결국 참담한 결과로 끝났다. 생태계의 파괴, 많은 이농민으로 인해 생산 능력이 격감하였고 1959년부터는 자연재해까지 발생하였다. 공식 통계로 2,000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개혁·개방 정책 후 경제체제개혁 연구소의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사한 사람만 4,000만 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주2) 여산회의 (廬山會議) : 1958년 8월 중국 장시성 북부 여산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8차 총회. 국방장관 팽덕회(彭德懷)는 소련으로부터 배울 것, 군대를 근대장비로 무장할 것 등을 주장하는 유무기론자로서 총참모장 황기성(黃克誠), 중앙정치국 후보인 장문천(張聞天) 등과 협력을 하며 대약진·인민공사·사회주의건설 총노선의 삼면홍기 정책을 비난하고 모택동의 독단전횡을 비판하였다. 모택동은 이에 반대하여 팽덕회를 해임하였다. 67년 8월 여산회의에서 '팽덕회 일파의 반당집단에 관한 결의'가 의결되어 이 회의의 내용이 밝혀졌다. (출처 : 두산 세계 대백과사전, 주식회사 두산동아)3. 주자파(走資派)의 집권대약진운동의 이 같은 실패로 인해 모택동이 2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조속히 체제를 정비하고 경제를 복구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때 등정한 것이 유소기와 등소평으로 대표되는 경제건설을 중시하는 실무적인 그룹이었다. 이 들은 생산활동의 동기와 조건은 모택동이 말하는총리 겸임), 77년 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주석, 군사위원회 주석, 당중앙당학교 교장 겸임 등으로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모택동의 신임을 받았고 문화대혁명을 지지하여 급속히 승진하였다. 실용주의정책을 견지하는 등소평 일파에 의해 실권을 잃었다가 92년에 당대표로 선출되었다.6. 등소평의 집권1978년 봄 중국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등소평 체제가 확립되고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되었다. 이 정책의 '개혁' 부분은 국내의 경제 체제를 개혁하는 것으로 종래의 중앙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의 방법을 도입하여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고, '개방'부분은 문호를 열어 자본주의 제국과 경제교류를 활성화해 자금을 도입하게 하는 것이다.그런데 이 같은 개방화 물결 속에서도 '시장경제'라는 용어는 사용할 수 없었다. 시장경제는 사유제나 자본주의에 연결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2년 가을, 제14회 당대회에서 처음으로 '시장경제'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시장경제'에 이르기까지의 용어 변천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982년, '계획경제를 중요시하고 시장조절을 보조수단으로 한다.'1987년, '공유제를 기초로 하는 계획적 상품경제', '계획과 시장이 내재적으로 통일된 체제'1989년 '계획경제와 시장조절을 연결시킨 경제체제'해외로부터의 자금 도입(직접투자·인수)이 실행에 옮겨졌다. 네 개의 경제특별구(현재는 5개구)와 14개의 개방도시를 중심으로 자금 도입이 활발해졌다.7. 사회주의 초급단계론과 연해지구 발전전략론1987년 가을 제13회 당대회에서 시장경제 추진파였던 주6)조자양이 당총서기로 취임하였다. 조자양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당의 기본방침으로 정하고 개혁의 근거와 구체적 시책을 명시화하였다. 그리고 '연해지구 발전전략론'을 제창하여 개방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지지했다.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이란 자연경제에서 상품경제로 이동하는 단계로써, 이 상황에 입각해 중국은 현대화 건설에 전력을 다해야 하며, 전면적인 개혁과 대외개방을 견지하고, 계획적인 다.
아편전쟁∼1940년까지의 중국사회배경중문일본 20013982 손경국·신해혁명 전후(19세기 말~1910년대)이 시기는 아편 전쟁에서 신해혁명 전후를 가리킨다. 중국은 아편 전쟁이후 큰 변화를 맞이했다. 중화사상이 붕괴되고 서양의 문물들이 급속도로 중국 사회에 밀려 들어왔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진보된 과학 기술과 사상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태평천국의 난, 양무운동, 변법 자강 운동, 의화단 운동등이 일어나 사회 전반이 극도로 혼란하고 국민의 생활은 아주 황폐해진다.이 시기에 서양을 배우기 위해 많은 지식인이 서양으로 유학을 떠나거나 서양의 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이들 지식인들은 서양에서는 이미 성립된 근대 국민국가의 모습을 보고는 그 당시 아직은 봉건주의에 놓여있고 더구나 극도로 혼란한 모국의 상황을 안타까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나라도 그런 국민국가를 이루기를 바라고 그러기 위한 방법을 여러 모로 모색한다. 그들은 당시의 청조 체제를 유지 한채로 개혁을 시도 하였다.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이는 양무(洋務)운동이나 강유웨이(康有爲)가 시도한 변법(變法) 운동등이 바로 그러한 노력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시의 체제가 다시 일어서기는 역부족이었다.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즉, 새로운 사회 체제를 위한 혁명이 필요하였다.이러한 사회적 배경하에서 문학이라는 용어가 수입되었고 문학은 중국의 개량, 또는 혁명의 필요성을 다수의 이성과 감성에 호소하는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그 중에서도 토지소유제와 과거제도에 의해 청조 지배 체제에 편입되어 있던 사대부 계급을 변혁의 주체로 요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인, 재외 화교, 부농, 비밀 결사등을 새로운 주체로 인정할 것인가? 이 경우, 사대부 계급이 독점하고 있던 문언문을 대신하여 상인층의 이해를 얻기 쉬운 구어문을 채용해야 하는 것인가? 애당초 근대 유럽에 탄생한 국민 국가란 무엇이었던가? 등의 복잡한 논의 그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열정적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이 때 루쉰(魯迅)과 주작인(周作人)형에 대한 욕망등을 문학 속에 표현한다. 그리하여 문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안정의 기간은 정말 얼마되지 않았다. 시대의 상황은 문학인들을 다시 전투적으로 만들었다. 1930년대 초부터 일본이 차츰 차츰 중국내로 침략해 오고 있었고 현 정권에 강한 반발을 가지고 있었고 현 정권과는 이념이 전혀 다른 공산당 세력이 무수한 국민당의 공격을 받고도 점차 커져 가고 있었다. 나라 안팎으로 위협 요소가 존재 했던 것이다.그리고 이전부터 북벌중의 국민당의 반공 쿠데타, 일당 독재 체제등을 비판하는 글을 집필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가 일본이 만주 사변(1931년)을 일으켰을 때 거의 저항을 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만주에 상해로 도피해온 지식인들이 있었고 이들은 일본 침략하의 만주를 문학을 통해 묘사함으로서 현 국민당 정부의 일본에 대한 대처방식을 이전부터 불만이 많았던 사람들과 함께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국민당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고 안내양외(安內攘外)5)를 내세우며 일본에 대해서는 거의 손을 쓰지 않고 공산당 토벌에 만 매달린다. 이리하여 국민도 현 정권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항일을 하기를 국민당 정부에 바랬다. 이 때 공산당도 항일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 정부는 할 수 없이 국공합작을 통한 전면 할 일 태세에 돌입한다. 이 항일 전쟁시에 작가들은 문학이나 언론활동을 통해 외국에 중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 당시에 모택동이 연안에서 '문예강화(文藝講話)'6)를 발표했다. 이것은 문맹률이 높은 중국인데다 일본과의 전쟁이라는 상황 때문에 지식계급에서도 일정한 설득력을 지녔다.한편 항일 전쟁 중에도 국민당은 미.영.소로부터 많은 물자를 제공 받으면서도 일본과 싸우려하지 않고 오히려 합작협정을 맺은 공산당을 배후에서 공격한다. 국민당은 또한 부패가 점점 심해져 간다. 반면 공산당은 일본군에 훌륭히 맞서고 나름대로 자기의 세력도 넓히게 된다. 그리고 넝 유입의 증대와 은의 대량 유출은 경기침체와 정체(政體)의 위기를 가져왔기 때문에, 청조정부로 하여금 과감한 조치를 취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청 정부는 몇 차례의 금지령을 내렸으나 영국 상인들의 이익 추구 욕구와 중국 측 협력자들 때문에 효력이 없었다. 최종 적으로 1839년에 당시의 도광제(道光帝)는 임칙서(林則徐)라는 엄격한 도덕주의자를 광동에 내려보내 아편단속에 임하도록 명령하였다. 광동에 도착한 그는 중국 측 아편밀수업자들을 단속 처벌하는 한편으로, 영국의 무역감독관으로 하여금 영국상인 소유의 아편을 가져오게 하 여, 이를 몰수하여 태워버렸고, 대표적인 아편상인 덴트(Dent)를 감금하는 등, 강경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영국정부의 감독관인 엘리오트가 개입하게 됨으로써, 영국은 조공무역의 불평등과 부당함에 맞설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게 되었다.청 정부를 응징하기 위해 영국은 전쟁을 선포하였고(1839), 최신 장비를 갖춘 함대를 파견하였다. 청조에게 불행했던 일은 자신의 약점이었던 수군이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해군과 조우한 점이었다. 광주 부근의 삼원리(三元里)라는 향촌에서는 신사와 촌민들이 평영단(平英 團)을 조직하여 영국군과 교전하였고, 다른 지역에서도 지역민들이 자발적으로 침략군에 맞섰으나, 전력의 열세는 피할 수 없었으며, 결국 청조는 일방적으로 패배하여 영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아편전쟁의 결과는 남경조약(1842)으로 귀결되었다. 조약에는 광동 의 공행무역을 폐지하고, 광주, 복주, 하문, 영파, 상해의 5개항을 개항하고,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하고, 수출입 물품에 적정관세를 부가하고, 아편대금이 포함된 전비를 보상한다는 것 등이 들어 있었다. 다음 해에는 호문 추가조약이 체결되어 영사재판권을 인정하고 최혜국대우를 약속하였다.남경조약은 외견상 청국이 외국과 맺은 근대조약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불평등조약이었다. 영국인들은 개항장에서 치외법권을 가진 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으나, 청국은 문제가 촌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한 향용(鄕勇)과 청군의 공격도 태평천국 운동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태평천국 이외에도, 당시의 중국사회에는 대체로 비밀결사나 반기독교운동, 반지주투쟁, 또는 한족지배에 대한 소수 민족의 저항 등으로 민중들이 자신의 권익을 향상시키거나 외국의 침략에 대응하려고 노력하였다. 1854년에는 광동성에서 청조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왕국을 세 우기 위해, 진개(陳開)를 중심으로 한 천지회 집단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반란은 곧이어 전성에 있던 천지회의 호응을 얻으면서 큰 세력 을 떨쳤다. 또 태평천국이 남경에 도읍을 정하자, 상해 부근에 있던 천지회 계통의 소도회(小刀會) 집단도 1853년에 이에 호응하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상해 부근의 현성들을 일시 점령하였다.이에 비해 염(捻)집단은 황하와 양자강의 중간지대인 회하유역에서 활동한 빈농 중심의 백련교계 비밀결사로서, 태평천국의 영향을 받아 1853년부터 1868년까지 지속된 반란을 주도하였다. 이 지역은 농업에 불리한데다 행정력보다는 부호에 의한 지배가 압도적이었고, 대운하를 통한 소금밀매가 성행한 곳이었다. 또아리를 뜻하는 염들은 부상, 부농, 관청 등을 공격하면서 이에서 얻은 재물을 수호전 방식으로 빈민에게 나누어주던 향촌사회에 뿌리를 박은 조직이었다.이상의 비밀결사적 민중운동이 중국사회 자체가 안고 있는 사회 경 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 등의 문제에서 발단된 것이라고 한다면, 변경지역에 있던 소수민족의 반란은 대체로 한인과의 갈등 속에서 성장하였고, 1860년 이후 중국 사회에 만연하게 된 반기독교 사건들, 즉 교안(敎案)은 서구 침략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1854년에 중국 남서부의 운남에서 일어난 회족의 반란은 회족과 한 족과의 은광 쟁탈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뒤이은 56년의 반란에서 회족 전사 두문수는 운남의 성도인 대리를 새로운 회교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1854년에는 운남접경의 귀주에서 또 다른 소수민족인 묘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1862년에는 확산되었고 '부청멸양(扶淸滅洋)'이란 구호를 내걸고 천진과 북경으로 진출하면서(1900) 기독교도와 선교사들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였다.의화단의 북경 진출에 자극을 받은 서태후 일파 등 청 정부의 보수파 는 열강에게 선전포고를 하였으나, 오히려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 아, 독일,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8개 연합국은 자국 공사관 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공동 출병하여 북경을 점령하였고, 이에 따라 의화단 운동도 종결을 맞이하였다. 연합국의 무력에 굴복한 청 정부는 열강과 신축조약(1901)을 맺었으며, 이 속에는 의화단 책임자 처벌, 북경과 그 주위의 외국군 주둔 인정, 원금과 이자를 포함한 30년 간의 9억 8천만 량의 배상금 지불, 새로운 통상조약 체결 등이 들어 있었다.제국주의 국가들이 중국을 분할하지 않고 서태후 정권을 보존한 이유 는, 의화단 운동과 같은 민중 운동을 통제하기도 어렵거니와, 열강의 분할 쟁탈전으로 도래할 파국을 미연에 방지하는 안전판 구실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청조정권을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의화단 운동 은 제국주의의 중국과분을 방지하는 한편으로, 독자적인 힘으로 외세 침략에 대응할 수 없던 보수 정권의 기반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제국주의 국가의 중국 침략의 또 다른 상징은 조계지(租界地)의 설정에 있다. 조계지란 중국의 개항지에서 외국인이 행정, 경찰, 사법 등을 관할하는 지역으로서, 1845년에 상해에서 영국이 처음으로 설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조계지는 지조(地租)만을 중국에 지불할 뿐 사실 은 독립된 지역이었으며, 일국이 관할하는 전관지역과 복수가 관할하는 공동조계의 두 종류가 있는데, 특히 대표적인 상해의 조계지는 태평 천국 운동 시기에 안전지대였기 때문에, 외국자본이 집중되어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런 조계지는 청일전쟁 이후 증가하여, 영, 일, 러, 독, 오스리아, 이탈리아, 벨기에 등 각 국이 전 중국의 28개 지역에 조 계를 가질 만큼 양적으다.
제4장 자본주의와 민주주의Ⅰ.머리말슘페터는 1942년에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라는 저작을 출판하였다. 슘페터는 미래에는 자본주의가 쇠퇴하고 사회주의가 유력해질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는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에서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1946년에 출판된 제2판의 결론에서 소련이 사회주의와는 무관한 짜르전제적 유산이라고 보았고 사회주의의 미래를 소련의 미래와 동일시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오늘날에 집필한다면 그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밝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자의 관계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사회주의의 미래와 소련과 동구의 미래를 동일시하지 말 것을 당부했을 것이라고 믿는다.나는 경제학의 성격이 그것이 탄생하던 당시의 정치생활의 조건에 의해서 규정되었다고 믿는다. 전형적으로 경제학자들은 국가와 정치를 이차적 서비스기제라는 도구적 관점에서 파악한다.나는 정치가 사회적, 역사적 과정의 분석적 고려없이 순전히 도구적이고 경제환원론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경제와 정치는 인간사회의 문제를 가지고 반드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특히 민주주의는 목표와 실천과제를 제기한다. 사회개선을 위한 모든 이념을 발전시키지 않은 채, 우리의 생활은 개선될 수 없다. 경제학자들이 인정하기 싫더라도 이념들이 채택되고 실현되고 효과적일 때만 우리의 생활은 개선될 수 있다.이 글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현대문명의 제도를 해결하는 주요한 기제로서 등장한 시대에 있어서 서구세계의 정치와 경제의 상호작용을 다룰 것이다.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제와 정치간의, 즉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은 이 글의 주제가 될 것이다.Ⅱ.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강화한다허쉬맨은 1986년의 저작 『시장사회에 대한 상반된 견해들』에서 자본주의의 가치와 태도 및 도덕 그리고 이들이 게 물질적이고 경쟁적이고 부도덕하며 결국 자멸할 것이라는 19∼20세기 보수적 및 급진적 저술가들의 부정적 평가로 변화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우리의 주제와는 달리 허쉬맨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명백히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초기의 긍정적 관계와 후기의 부정적 관계를 동시에 인정하고 있다.슘페터는 1942년의 저작『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역사는 근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더불어 등장했고,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임을 명백히 입증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문명 이라는 독립된 장 전체에 걸쳐서 민주주의를 그 문명의 일환으로 다루었다. 또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를 지지해 왔다고 밝혔다. 민주주의적 방식은 자본주의형성의 정치적 도구였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부분적으로는 갈등적 관계에 놓여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상호 인과적인 관계에 있었고, 근대문명을 출현시키는데 상호공조를 이루었다.무어는 1966년의 저서『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에서 산업근 대화에서 세 가지 역사적 경로가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첫째로 영국과 프랑스 및 미국은 상업자본가들에 의한 농업부분의 지배와 전환을 동해서 19∼20세기에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건설하였다.둘째로 지주귀족이 상업계급으로 전환하였던 독일과 일본은 권위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산업화를 이루었고, 봉건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군부와 군주가 지배하게 되었다.셋째로 상업자본가가 산업화를 추진하기에는 너무 미약했던 러시아는 농민을 희생시키고 동원하는 혁명과정을 통해서 국가가 산업경제를 주도하는 공산주의의 권위주의적 동원체제를 수립하였다.미국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 달은 1990년에 그의 저작『혁명이후? 이상사회에서의 권위』의 신판에서 민주주의와 시장 이라는 새로운 장을 추가하였다. 서두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시장지향적 경제는 비록 충분한 것은 아닐지라도 민주주의제도에 필요한 것이다. 또한 국가소유의 명령경제체제는 권위주의적 정부에 필수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긴밀히 연계되1)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2)만일 자본주의 경제가 점층하는 국가통제에 놓여지게 된다면 일정한 정도에 이르러 민주정치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3)만일 사회주의 경제가 점층하는 시장력에 노출된다면 일정한 정도에 이르러 민주주의 발전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4)만일 자본주의 발전이 경제성장을 이룩하는데 성공한다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압력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긍정적 관계는 통계학적 연구에서도 입증된다. 러너와 도이취 및 립셍 등의 1950∼1960년대의 사회동원이론가들은 개인당 국민소득과 민주적 정치제도간의 밀접한 함수관계를 제시하였다. 경제발전수준은 교육정도, 매스미디어의 보급, 주체적 효능감과 같은 민주주의적 심리성향, 참여적열망과 기술 등과 밀접히 관련되어 이쓴 것으로 나타났다.지금까지 고찰했듯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간의 긍정적인 관계를 규명한 역사적이고 논리적이고 통계학적인 근거는 매우 많다.Ⅲ.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저해한다밀에게서 우리는 현존하는 사유적제도가 정의롭지 못하고, 자유시장이 파멸적일 정도로 경쟁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견해를 만나게 된다. 그는 경쟁이 완화된 사회주의적인 사회를 궁극적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와는 달리 그는 자본주의적 민주질서의 개선가능성을 철저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성립할 수 없고, 자본주의 하에서의 민주주의는 단지 자본계급만을 위한 민주주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만을 가중시킬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보장할 것이다. 일단 사회주의가 실현되면 기본적인 정치문제는 계급을 철폐함으로써 해결될 것이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경제적 생산양식과 이에 따른 계급구조였던 것이다.풀란차, 오페, 보비오, 하버마스 등에 있어서 자본주의적 민주국가는 명백히 자본주의계급의 국가라기 보다는 계급투쟁국가로 간주된다. 국가는 이제 자율적이거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것으로 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조직화된 자본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 민주주의 원칙을 위반하는 경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정치문제가 압력단체간의 투쟁에 의해서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처리되는 나라들과 상황들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다는 주장에는 반대했다. 그에 따르면 정치지도자들의 선택과 공공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모든 성인들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참여한다는 의미에서의 완전한 민주주의란 현대의 유권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비추어 불가능하다.현실적으로 가능한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경쟁하고 있는 지도자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거나 정치적 결정과정에서 일정한 방안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가능하다.비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들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친화성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선행조건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달은 현대 미국의 민주주의가 지나치게 무원칙적이고, 시민들간의 자원의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위협받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달은 현대민주주의에서의 분배원칙과 정치경제체제의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다.달은 1989년의 저작『민주주의와 그 비평』에서 민주주의의 세 번째 단계로의 발전은 그 목표를 경제질서의 민주화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대기업의 문제점에 대해서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종업원들에 의한 조합적 통제이다. 이렇게 재편된 경제는 민주적 경쟁의 기반이 되는 다원주의를 파괴하지 않고서도 정치적 자원의 분배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린브럼의 결론은 거대한 개인기업이 민주주의의 이론과 이상에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했듯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신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슘페터와 달 및 린브럼을 위시한 많은 자본주의적 정치이론가들까지도 현대자본주의는 대기업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민주주의를 왜곡시키고 있다는데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Ⅳ.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저해한다경제학의 지배적인 전통중의 하나는 스미스에 따르면 좋은 정부는 국방과 국내질서만을 담당하는 작은 정부였다. 특히 경제영역에서 정부가 해야할 중요한 일은 개인과 재산을 보호하고 경제활동의 기준과 규칙을 세우고 집행하는 것이었다.프리드만에 있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은 현대민주국가에게 부과된 복지책임이다. 그는 경제와 정치간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부가 수행해야할 기능들을 제시하면서, 현대복지국가가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데 실패해왔다고 지적하였다.사적 영역에 대한 국가개입의 점층현상은 마침내 민주정부와 시장경제를 전체주의적 괴물로 전환시킬 것이며, 자유와 생산성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프리드만은 결론지었다.민주정치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경제분석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올슨의 1982년의 저작『민족들의 흥망』이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부정적 관계를 강조하였다. 이에 따르면 안정된 사회에서의 개인과 기업의 형태는 경제를 비효율화시키고, 정치를 통제하기 어렵게 만드는 음모적이고 연합적인 로비단체들의 형성을 불가피하게 초래한다.특수한 이익단체들을 강화시키는 민주사회의 속성이 자본주의를 저해한다는 올슨의 이론에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험적인 조사연구는 그 보다 훨씬 복잡한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특수이익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 특수이익단체들의 성장을 규제할 수 있는 충분한 권위를 가진 민주국가를 강조한 것은 역섧적인 주장이고 하겠다.Ⅴ.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강화한다사회적 조건, 역사적 요인, 정치적 과정과 결정은 다양한 형태의 복지국가를 만들어 냈다. 미국에서는 남성의 선거권이 일찍이 확립된 후 토지사용과 중학교까지의 교육이 무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기회 균등의 복지국가가 수립되었다. 영국에서는 남성선거권과 의회정치가 일찍이 실시되었고 로이드 조지는 제1차대전 직전에 복지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가 선거제와 의회 정치를 연기하는 대가로 복지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렇듯 민주화와실이다.
아동발달과 육아감상문, 가사분업의 문제사회가 많은 변화를 하면서 현대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많이 올라갔습니다. 예전의 여성의 지위는 객관적으로 봐서 남성보다 많이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예전의 우리사회는 가부장적인 요소가 많았고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대사회는 여성도 바깥일을 많이 하는 맞벌이 집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여성이 자신의 일을 가지게 되면서 힘든 집안 일을 혼자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비디오 시청을 하는 도중에 가정의 일을 도와주는 많은 남편들이 나왔습니다. 그 남편들은 아내의 의견을 생각하고 아내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남편들이었습니다. 그 남편들은 가정을 위해,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 또한 아내를 존중해 주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정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을 위한 것이 바로 자신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안정되고 가정으로부터 힘을 받아야 직장에 나가서도 열심히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 가족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직장에서의 일에만 신경을 쓰는 남편들은 모든 것이 다 가정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남편들에게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주말에 쉬면 직장에서의 일은 그만 생각하고 가족과 함께 즐거운 주말을 보내며 가족에게도 신경을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자신에게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것은 상상만 해도 행복한 일입니다. 또 귀여운 아들, 딸과 같이 놀아주고 애들을 보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비디오를 보면서 저는 직장에서 일만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 같으면 직장에서도 집 생각만 하게될 것 같습니다.그리고 현대사회에서는 맞벌이 부부가 많은데 그런 집에서는 남편이 가사 일을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오는 것처럼 여성들도 자신들의 직장에서 힘들게 일했을 것입니다. 그런 여성들에게 집에 와서 모든 가사 일을 또 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성들은 점점 지쳐 갈 것이고 가정의 불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저희 집에서도 아버지 어머니 모두 각자의 일을 가지고 계신데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오시는 어머니를 아버지께서는 매일 가사 일을 분담하여 도와드립니다. 어머니께서 빨래를 하시면 아버지는 그것을 널고, 어머니께서 요리를 하시면 아버지께서는 설거지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두 분은 매우 사이가 좋으십니다. 일을 나눠하면 힘도 덜 들게 될 것이고 그러면 서로에게 불만은 없어질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평등하고 서로를 존중한다면 사랑이 더 깊어질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 반드시 남편은 가사 일을 분담하고 가정의 일을 아내와 나누어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저 역시 나중에 만약 결혼을 하게된다면 가사 일을 당연히 분담할 것이며 비디오 속의 다른 남편들처럼 아내와 자식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부터 어머니의 집안 일을 조금 더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근대에 나타난 가정과 일터의 분리는 생산노동과 가사노동의 구분을 가져왔다. 생필품이 가정 내에서 생산되던 가내생산체계와는 달리 화폐로 재화를 구매해야 생존이 가능케 되자 공장에서의 노동만이 노동이고 화폐와 교환되지 않은 가사노동은 노동으로 여기지 않게 됐다.성별 분업이 강화된 사회에서 이제 남성의 직업 노동은 중요한 것으로 여성의 일은 일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게 됐다. 이것은 남성의 가치와 여성의 가치를 차등화하는 것을 강화했다. 근대 사회에 처음 등장한 전업 주부는 노동하지 않는 존재로, 의존적인 존재로 인식됐다.전업 주부는 사실상 중산층에게서나 가능한 삶의 방식이지만 이것은 여성다움의 표준이 되었다. 이제 여성다움은 노동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구성되었다. 근대에 새롭게 구성된 여성다움은 여성들의 몸과 욕망을 구성하는 권력 장치로 작동한다.여성의 취업과 사회활동에 대한 욕구가 늘면서 성별 분업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남녀의 권력 차이를 미화하는 낭만적 사랑의 각본이 평등한 사랑 기획으로 변화되지 않아서 남녀 사이의 친밀함은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는 것 같다. 지금의 핵가족 제도 속에서 남녀 평등을 바라는 것은 어려운지 모른다.사랑 속에 들어 있는 성별 위계를 해체하는 것은 권력관계가 매력의 기반이던 이성애 관계를 불안정하게 할 수 있다. 평등해지지 않으면 사랑과 싸움이 동시에 시작되는 것을 막을 수 없기에 평등화 전략을 피할 수도 없다. 권력 장치로서의 사랑의 욕망을 해체하는 것은 가족과 성에서 근간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뒤흔든다. 더 좋은, 더 많은 사랑을 위한 가장 용기 있는 모험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