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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진경문화와 영정조 문화
    조선후기 진경문화와 영?정조의 문화Ⅰ. 서론Ⅱ. 본론1. 眞景의 意味2. 眞景의 成立과 變遷3. 眞景山水畵와 眞景詩4. 眞景時代 佛敎의 振興과 佛敎文化의 發展5. 眞景時代의 白磁Ⅲ. 결론Ⅰ. 서론우리나라 전통문화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시기가 어떠한 시기일까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떠오르는 시기가 바로 영?정조 시기이다. 겸재의 진경산수화와 단원의 풍속화, 춘향가?심청가?흥보가 등의 판소리, 봉산탈춤?양주별산대 등의 탈춤, 서포 김만중의 국문소설, 사천 이병연의 진경시, 동국진체의 글씨 등을 비롯하여 음식?의복?역사?지리?의학 등 모든 분야에서 조선의 고유색을 표현해내고 있는 시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 고유문화를 진경문화라고 할 수 있다.)진경시대라는 것은 조선 왕조 후기 문화가 조선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난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문화절정기를 일컫는 문화사적인 시대 구분 명칭이다. 그 기간은 숙종대에서 정조대에 걸치는 대략 125년간이라 할 수 있는데 숙종 46년과 경종 4년의 50년 동안은 진경문화의 초창기라 할 수 있고, 영조 51년의 재위기간이 그 절정기이며 정조 24년은 쇠퇴기라 할 수 있다.)진경문화가 이 시대에 이르러 이처럼 난만한 꽃을 피워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문화의 뿌리가 되는 조선성리학이라는 고유이념이 이 시대에 이르러 완벽하게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었다.Ⅱ. 본론1. 眞景의 意味眞이라는 글자는 눈의 형상을 본떠 만든 것으로 이는 고대에는 눈이 곧 靈이고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중요시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것으로 진은 보는 것과 관련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진은 먼저 실질, 참됨, 순박함, 정미함, 바름, 정성에 이르는 것, 자연, 묘리, 천성, 본질, 근본을 나타낸다.景이란 일련의 대상들에 대한 모습 또는 경치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의미하는 경치나 京觀, 景光, 景色, 風景, 風光등이 그 예이다. 특히 회화의 견지에서 무한한 자연을 하나의 觀 을 통해 한정짓고, 그 시각으로 자연을 관찰하는 것이다.진경기 때문이었다.)이황은 조선성리학의 기틀을 세움으로써 이, 기를 우주자연, 인간 도리로 설명하는 대신 인간 존재에 치중하여 그에 가치를 두었다. 이황은 ‘主理論’, 즉 이의 작용성과 능동성을 강조하여 ‘理氣互發說’)을 주장했다.이황에 의한 이, 기는 이이에 의해 명료해 졌는데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된 경지에서 이가 기의 근본이고 이는 또한 기에 의지해야 한다는 ‘理通氣局說’)의 바당 하에 이, 기의 妙理를 체득할 것을 이야기했다.이이는 ‘主氣論’, 즉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을 주된 것으로 보아 ‘氣發理乘’을 주장했는데 삼라 만상의 생성의 결실은 창조적 운동을 본질로 하는 기의 활동이 먼저 일어남으로써 가능하고 이런 기의 운동이 혼란에 빠지지 않게 이가 탄다고 표현했다.이이의 이 새로운 학설은 成渾, 宋翼弼, 鄭澈, 辛應時등이 연합해 거대 학파를 형성하며 조선성리학의 기틀을 세웠고, 이들이 바로 서인들이며, 이후 조선시대 문화 전반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의 고유색을 드러내게 되었다.이렇게 체계화된 조선성리학이 조선 문화 곳곳에 퍼지면서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독창적 문화가 생겨났다. 두 차례의 난, 즉 丁卯(1627)?丙子(1636)호란을 겪고 인조가 청 태종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한 이후 조선은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안으로는 예치를 갖추고 밖으로는 북벌을 도모하며 조선이 명의 멸망이후 주자의 전통을 잇는다는 조선중화주의를 주창했다. 그 것에서 조선제일주의가 생겨나며 17세기말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진경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석봉 한호(石峯 韓濩)는 조선 고유 서체인 석봉체(石峯體)를 이루어 내고, 조선 고유화풍을 성리학의 화풍에 투영시킨 창강 조속(滄江 趙速)등이 그런 인물이었다. 창강은 우계 성혼의 제자인 풍옥헌 조수륜의 자제로 광해군 4년(1612) 김직재(金直哉) 무옥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옥사한 부친의 원수를 갚기위해 인전장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명리에 뜻이 없어 반정 성공 후에는 일체 벼슬길에서 물러나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화로榮?(1686~1761) : 畵?畵論이들이 전개한 진경산수의 화론과 진경시의 시론은 기본적으로 사실주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한 사실주의란 얼핏 예상되는 대상의 외형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아니었다. 하나의 대상에 즉하여 그 대상을 충실히 묘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는 점에서는 분명 사실성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결코 외형적 사실에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여기에서 훨씬 고차원의 예술을 전개하여 대상의 내면적 진실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감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경지까지 나아갔다.)1) 대상의 사실성 획득조선후기 진경산수와 진경시가 지향한 예술론은 첫째, 사실론의 기본자세라 할 대상의 사실성 획득에 있다. 무엇보다도 대상의 정확한 묘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는 이하곤의「南行集序」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내 일찍이 말하기를 시를 짓는 것은 화공의 사진(寫眞: 즉 초상화 그리는 것)하는 것과 같다. 한 획,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음이 없게 한 연후에야 가히 그 사람을 사(寫)했다. 한다. 다만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비록 단청(丹靑)의 공이 극에 달했다 해도 신정(神精)과 서로 통하지 않으니, 어찌 그 사람을 사했다 할 수 있겠는가.)이들의 사실론이 결국은 전신과 신운의 개념을 끌어들였지만 그래도 기본은 사실론에 있었음은 바로 이런 자세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2) 畵本과 格式에서 탈출모든 사실론이 대상의 사실성 획득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거의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경시와 진경산수의 이론가들이 그런 기본을 강조하고 확인해야만 했던 데에는 당시의 화풍과 시풍이 교과서적인 화본과 성률의 엄격한 격식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투적 격식으로 인한 병폐를 김창흡은 이렇게 지적하였다.내가 어리석어 백 가지 중에 아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오직 시도(詩道)에 30년을 마음 썼따. 처음에는 반드시 격을 높이 세우고 법을 옛 것에서 찾는 것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루한 풍습을 교정하였다. 수 있어서 외국문물과 국제정세에 신속하고 많은 정보를 갖게 되었다. 조선 문화 제일주의에 입각한 고립주의를 극복하는 노선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인식했을 것이다. 북벌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이미 중화문화로 탈바꿈한 청의 문물을 배워 조선의 폐쇄성에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식 하에 북학운동을 전개하게 이른 것이다.이들의 사상적 연원이 낙론에 있는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신체문은 전시대에 조선풍이라 비판받던 진경시 내지 사경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만 진경시가 조선 고유문화가 꽃피운 문학적 결실인 데 비하여 신체문은 조선 고유색을 계승하면서 북학의 영향으로 외부적 조건이 더하여진 것이다. 또한 전자가 운문 중심인데 대하여 후자는 산문이 중심인 점이 다르다.)결론적으로 북학파의 신체문은 내부적으로 기존의 낙론적 진경화풍의 전통을 계승하고 조선성리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투철한 자기인식에서 온 조선적 특수성이 중심축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5) 謙齋 鄭敾의 眞景山水畵겸재 정선은 우리나라 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화가로 화성(畵聖)의 칭호를 올려야 마땅한 인물이다.겸재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생하는 데 가장 알맞은 우리 고유 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산천을 소재로 그 회화미(繪畵美)를 발현해내는데 성공한 진경산수화의 대성자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우리 고유 산수화 양식인 진경산수화풍의 시조인 것이다.)정선은 현실적은 진경을 새롭고 독창적인 남종화법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나타난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은 조선 중기의 산수화풍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의 화풍 중 어떠한 요소는 전통적인 화풍을 토대로 변화된 것이었다.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은 크게 네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실경을 직접 보고 그리는 사생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 하였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구체적인 화풍과 수법의 문제를 어떻게 남종화풍을 토대로 진경산수화풍을 성립시켰고, 마침내 한국의 실경과 정서를 잘 표현해 낼 수 있있었다고 여겨진다.또한 정선이 금강전도에서구사한 여러 기법들도 평생동안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한가지로 유형화 또는 형식화된 소재와 화풍을 오랜 기간동안 유지한다는 것이 화가로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특징은 정선의 다른 주제와 소재를 다룬 작품들보고 유난히 금강산을 다룬 작품들에서 뚜렷이 나타난다.정선의 역대 기행록이나 기생시가 여행의 여정에 따라 소재를 취하며 지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여행의 여정에 따라 그림의 소재를 취하였다.조선중화사상이 팽배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조선 고유사상인 조선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이자 그 조선성리학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조선 고유색으 그림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그에 알맞은 우리 고유의 화법인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신사를 우리 고유의 회화미로 표현해내는 데 성공한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이자 대성자였다.그의 진경산수화풍은 이후 많은 사대부 화가들과 화원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쳐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우리 고유화법으로 표현해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우리 고유의 그림이 있음을 보여 주어 후손들에게 영원히 민족적 자부심과 자존심을 잃지 앓게 하였으니 마땅히 화성으로 추앙해야 할 인물이라 하겠다.)4. 眞景時代 佛敎의 振興과 佛敎文化의 發展조선 전기 이래로 시행된 지속적인 억불정책으로 사원의 운영은 매우 어려운 처지였고 공식 출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난 승려들의 괄목할 만한 활동 역시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러한 여건에서 임란을 겪게 된 사원은 막대한 외형적 피해를 입는 가운데서도 승려들이 국가적 위기를 이겨내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룸으로써 이제까지 저급한 사회신분으로 처우되던 승려들의 지위가 일약 국가로부터 공직 승인을 받는 지위로 격상하였다.진경시대 사원 중흥의 면모는 외형적인 데서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양란을 치르고 나서 산성 축조를 맡았던 팔도도총섭 벽암 각성은 완주 송광사(松廣寺)의 창건과 순천 화엄사 ? 하동 쌍계사의 재건을 지속적으였다.)
    인문/어학| 2009.01.31| 10페이지| 2,000원| 조회(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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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현대사]의열단과 조선의용대
    Ⅰ. 들어가며Ⅱ. 의열단1. 의열단의 창단과 배경1) 시기적 배경2) 노선적 배경(제목 검토필요)3) 의열단 창단2. 전기 : 폭렬 투쟁과 노선 변환 (1919~1925)1) 제 1차 국내 의거 추진에서 황포탄 의거2) 당시 의열단의 본거지가 북경이 된 이유3) 독립운동 자금 모금 계획과 김상옥 의거4) 제2차 국내 대의거 계획5) 단 본부의 이동6) 조선 혁명 선언 이후 의열단 운동7) 1923년의 활동8) 1924년의 동향9) 중국국민당 과의 접촉과 의미10) 의열단의 노선 변환11) 민중 운동 우위론의 제기2. 중기 : 혁명전선 정비기 (1926~1930)1) 1920년대 중반 민족혁명운동의 한ㆍ중 연대와 의열단① 배 경② 1920년대 중반 의열단의 활동과 의의2) 1920년대 후반기의 유일당촉성운동과 의열단① 배경② 의열단의 활동과 의의4. 후기 : 한중대일공동전선 활동과 민족혁명당 (1931~1935)1) 의열단의 한중대일공동전선 활동2) 의열단의 민족혁명운동론3) 1930년대 전반기의 민족전선 통일운동(통일동맹)4) 민족혁명당 창립과 의열단의 해체5. 의열단의 의의Ⅱ. 조선의용대1. 조선의용대의 창설1) 조선의용대의 창설 이전의 배경2) 조선의용대의 창설 당시의 배경3) 조선의용대의 창설2. 조선의용대의 독립운동1) 기관지 발간2) 공작활동① 대적선전공작② 대적전투③ 정보수집과 포로교육3) 조선혁명군 건설 계획4) 민족통일운동 인식5) 조선의용대의 해체3. 조선의용대의 의의와 한계Ⅰ. 마치며Ⅰ. 들어가며우리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자주적인 민족운동이 아니 였나 반추해 본다. 독자적인 활동이었고 그들에 의해 많은 결과물이 생기진 않았지만 분명 자주적인 운동이자 민족을 위한 투쟁이었다는 데서 큰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여러 항일 단체들을 만들면서 국제적으로 소외 받고 일본의 문화정책 으로 인해 조선의 민족주의가 점점 말살되고 있을 때 그들은 친일인사를 한명이라도 더 암살하려고 노력했다. 이는?실로?놀라운 효과를 가졌으며 단원들은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성전기회사, 주요 간선 철도와 사이토 총독, 미즈노 정무총감, 마루야마 경무국장 등을 겨냥한 대규모의 암살 파괴 거사를 준비하였다. 2차 국내 적기관 및 용인 총공격 계획)이 되는 셈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바로 쿠츠크파의 고려공산당원과 그 계열 출신의 단원들이 주역을 맡은 점이다.단의 고문인 장건상은 1922년 5월 경에 거사 계획을 발안하였으며 김원봉과 함께 총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金始顯은 장건상과 함께 거사 계획을 논의하고 행동대장역을 맡았으며 현직 경부 黃鈺조차도 고려 공산당의 비밀 당원)이였다. 이 거사 계획이 입안된 시점이, 김시현이 1922년 1월 하순부터 2월초에 걸쳐 모스크바와 페트로 그라드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장건상이 1922년 5월 치타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연석회의에 각각 참석하고 돌아온 직후인 점이 흥미로운 바 있으나, 그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분명한 증거는 없다.여하튼, 이 거사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으나, 거사 직전에 일경에게 탄로가 났다.) 결국 가담자 18명 전원이 피검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거사 기도는 일제 식민 통치 당국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를 일본 언론계에서는 " 독립론자 중의 폭력 독립파와 공산주의ㆍ무정부주의자가 결합한 비타협적 最極左派(최극좌파)의 음모" "조선 독립 운동이 폭력파 전성의 제 1기, 만세 운동의 제2기, 실력 양성 운동의 제3기, 사회혁명 운동의 제 4기로 넘어가는 조짐" 이라는 논평을 가하며 경악을 감추지 못하였다.즉 일본 언론의 이러한 논평은 의열단과 공산당과의 결합에 주목한 가운데, 민족 독립 운동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혁명 운동 즉 민족혁명 운동적 성격을 강하게 띠어감을 의식하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실체는 공산당원들이 개별적으로 의열단에 합류하여 그 조직원으로서 행동한 것이지, 의열단이 전체 단의 차원에서 특정 정파의 공산당 조직과 일 대 일의 공식적인 관계로 합작한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5) 단 본부의 이동1923년에 들중 한인 독립운동의 여건을 크게 호전시키고 그 기반을 강화시켜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아울러 중국지역의 한국민족운동자 집단은 국공합작의 국민혁명운동 주도세력을 둘도 없는 제휴상대요 든든한 원군으로 삼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한ㆍ중 두 민족간에 혁명운동의 연대가 다져지고 제휴관계가 성립하게 된다면 그것은 동아시아 식민지ㆍ반식민지 민족운동진영의 국제적 연대를 다져줄 구심축이자, 반제를 공통의 이해로 하는 세계혁명운동의 큰 진전을 담보해줄 지렛대가 되기에 족한 것이었다.의열단 운동사의 전체 궤적이라는 맥락에 비추어보면, 그 중기 국면의 초입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조직체제를 일신하고 제2의 도약을 꾀하면서 활동의 무대를 넓혀간 때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보기에 따라서는 가시적인 성과도 별로 없이 시행착오격인 ‘고투와 좌절’의 행적으로만 점철된 시기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의열단이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던 중국혁명 정세의 급변전, 곧 ‘혁명과 반혁명의 드라마’가 의열단 활동의 폭을 넓혀준 만큼이나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② 1920년대 중반 의열단의 활동과 의의의열단은 1924년 말부터 1925년 상반기까지 사이에 조직세의 약화와 재정적 곤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상해에서 새로운 활로를 암중모색하고 있던 간부진과 단원 19명은 1925년 8월 중순에 광주로 단의 본거를 옮겨갔다. 핵심단원들은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 입교하여 혁명과정에 직접 투신할 채비를 갖추고 북상 후의 조직적 무장투쟁의 추동을 새 운동노선으로 설정하게 된다. 또한 5ㆍ30운동을 계기로 하여 반제 국민운동의 에너지가 분출하기 시작한 상황을 배경으로, 상해를 중심으로 한 중국지역의 한인 독립운동자들 사이에는 진영의 좌우익을 가릴 것 없이, 국민정부의 반제-반군벌 혁명운동의 완전한 성공이 한국독립의 길목이 된다는 인식, 따라서 혁명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하고도 바람직하다는 판단과 자진 참여하려는 결심이 점점 확산되고 일반적 정서로 되어갔다.선의용군의 성원이 됨으로써 독립운동의 중견간부로까지 성장한 자들도 있었다.의열단은 막 조성되기 시작하고 있던 한중대일공동전선 형성의 분위기를 적절히 활용하여 군사부문 중심의 시의성있는 합작활동 계획을 국민당에 제안함으로써, 중국측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경제적 지원을 얻게 되는 한편 재만 한인운동단체들의 무장투쟁을 간접적으로 고무하는 효과도 거두었다. 그리하여 의열단이 현실주의적 견지에서 국민당정부에 접근한 것은 의열단 자체에 큰 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주사변 발발 후에 본격화된 한중연합항일운동의 본보기 되었다.그러나 그 후에 전개된 의열단 활동의 실제적인 내역은 궁극적으로 민족혁명운동의 심화를 위한 거점 확보와 기반 구축으로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었다. ‘한중합작’은 그 열망을 보다 쉽게 현실화시키기 위한 수단적 ‘외피’의 의미가 컸다.2) 의열단의 민족혁명운동론의열단은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서의 조선 민중은 노예와도 같은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착취가 날로 심해져 혁명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의 장래를 타개해나갈 길이 없다고 보았다. 혁명은 조선 민중의 유일한 생존 방도인 동시에 그 생활 근저로부터 발로하는 요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의열단은 조선혁명의 궁극적인 목적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한국민족의 자유독립을 완성하는 데 있다고 보았으나 한편으로는 민족혁명 이상의 계급혁명이 있어야만 진정한 혁명이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이 시기의 의열단 지도부의 조선혁명론은 가급적 넓은 범위의 계급세력을 혁명운동의 대열에 동참시키고 가급적 넓은 범위의 국제적 우군을 확보하려는 정체노선과 궤를 같이한 것이다. 그에 따라, 당시 일반화하고 있던 코민테른 극좌노선에 의하면 마땅히 배척하고 타격되어야만 할 대상이었던 민족주의자나 소시민계급만 아니라 반동세력으로 규정되고 있던 지주계급과 부르주아계급까지도 민족혁명의 전열에 가담할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 하여 그들과 제휴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이 파시스트 권력집단으로 낙인에” 이에 불만을 품은 특훈반 졸업생 35명을 포함한 49명의 당원이 6월 10일 민혁당을 탈퇴하였다고 한다.) 주요 역량이 이탈함으로써 민혁당은 큰 시련에 봉착하였다. 이처럼 어수선한 가운데 조선인 군사 대오 건립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조선인 군사대오 건립안은 1990년대 초까지의 연구에는 중일전쟁 발발 후 김원봉 등 조선인 측이 조선의용대 건립안을 중국 당국에 제출하였고 중국의 장개석이 이를 허가하여 의용대가 건립되었다는 식의 단편적인 서술로 처리되어왔다. 그러나 그후 의용대 건립과 관련된 중국 제2역사 당안관(?案館) 문서의 일부가 국내로 유입 ? 소개됨으로써) 의용대의 건립은 그렇게 간단하거나 순탄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당안관 문서에 따르면, 의용대 건립안은 조선인도 중국인도 아닌 제3자라 할 수 있는 일본인 아오야마 가쓰오(靑山和夫)가 작성하여 중국군 당국자에게 올렸고 중국군 최고 책임자 장개석이 이를 승인하였으며 이후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가 주관하여 의용대가 건립되었다는 것이다.일본인 靑山和夫의 손에 이곳 무한에서 작성되어 1938년 7월 3일 중국 당국자에게 전달되었다. 이 건립 안은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에게 전달되었고 장개석은 1938년 8월 12일에 해당 인원이 얼마나 되며 그들의 성분이 어떠한지를 먼저 조사하라는 지침을 군사위원회 정치부에 내렸다.)靑山和夫안의 내용은 건립될 부대의 성격과 관련하여 몇 가지로 나누어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째, 건립될 단체는 군사대오(軍隊)였다. 대원수를 100여명으로 상정하여 거기에 걸 맞는 복장과 무장을 갖추도록 하고 있다. 군대를 건립하려 했던 조선인 좌파 민족운동가 일반의 소망이 일단은 여기서 반영되고 있다.둘째, 건립될 의용군은 독립부대로서 독자적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분대 혹은 소대 단위로 분산하여 활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의용군 대원들은 중국 군대에 배속되어 활동하거나 혹은 중국인 전시 민간단체와 함께 활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점은 조선 민족혁명군을 건립하여 집단적 형태로 동북으
    인문/어학| 2006.11.14| 25페이지| 2,000원| 조회(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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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1525년 독일 농민전쟁
    『1525년 독일 농민전쟁』불교학전공 4학년 20110059홍승진목차Ⅰ. 들어가며Ⅱ. 독일 농민전쟁의 역사적 배경Ⅲ. 독일 농민전쟁의 전개과정Ⅳ. 독일 농민전쟁 전쟁인가? 봉기인가?Ⅴ. 독일농민전쟁과 동학농민전쟁Ⅵ. 마치며...Ⅶ. 참고문헌Ⅰ. 들어가며...역사적으로 종교는 기존의 사회체제와 질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많이 해왔으나 또 한편으로는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반란과 혁명을 고취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모든 반란과 혁명이 종교와 관련되어 있거나 종교가 반란과 혁명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 일어난 하층민의 봉기와 근대 시민혁명 중, 많은 사건이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1525년 한해에 절정에 이르고 좌절된 독일 농민전쟁)은 중세말기 독일에서 수없이 일어났던 농민봉기의 전통에 연속되어 있으면서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무엇이었다. 유럽사와 중세유럽사 개설서에 소개되고 있듯이 14세기 중반에 들이닥친 페스트와 여러 가지 형태미상의 疫病, 이에 따른 인구감소는 기존의 농업구조를 비롯하여 사회경제구조에 장기지속적인 변동을 초래하였다. 한편 이런 구조변동은 허다한 정치, 사회적 변동과 갈등을 동반하고 있었다. 14~·5세기 유럽전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대소의 농민봉기, 도시하층민의 봉기 및 심지어 敎會와 貴族層의 세계에서도 나타났던 갖가지 종류의 갈등과 투쟁은 당시사회가 처해있던 체제적 위기의 주된 발현 형태였다.16세기초에 발발한 독일 농민전쟁은 남서부독일과 중부독일을 주요 무대로 전개되었는데, 이 지역은 群小領主의 割據로 인한 특수한 지배구조와 함께 도시가 밀집되고, 이탈리아 무역을 비롯하여 농촌수공업, 광산업, 금융업을 중심으로 초기자본주의적 요소가 발달한 선진지역이었다. 무대가 되는 지역의 복잡한 정치적 지배구조, 新舊要素가 다양하게 얽혀있는 사회와 경제구조로 인하여 농민전쟁은 그 원인, 전개, 결과의 모든 국면에서 일괄적인 파악이인 칼 5세가 황제로 다스리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그가 당면한 세 가지 임무가 있었다. 첫째, 유럽을 지배하기 위한 프랑스와의 패권싸움이요, 둘째, 오스만 터키의 침략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을 보호하는 일이요, 셋째, 철저한 가톨릭 신자로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분쇄하고 로마교회의 단일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막기 위해 칼 5세와 동맹을 맺어 그에게 루터를 제거하고 종교개혁을 분쇄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나 칼은 프랑스와의 전쟁과 오스만 터키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 정신없어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였다.중세교회의 타락과 부패, 교회의 민중에 대한 가혹한 부담, 농민에 대한 봉건영주들의 착취와 탄압 등은 교회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영주들에 대한 반봉건적 혁명으로 나타났다. 농민전쟁 이전 이미 도시 노동자, 도시 수공업자, 농민들로 구성된 제3의 계층이 영주들과 성직자들에 대항하는 하나의 정치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제3의 피지배 계층이 농민전쟁의 주역이 되었다.처음 종교개혁의 성공은 독일농민전쟁에 고무적이었다.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루터의 95개 조항은 그 당시 봉건적 교황교회와 착취행위에 대한 저항이었다. 종교개혁과 농민전쟁은 다른 목표와 경향이 있음에도 “하나님의 정의”라는 표어에 걸맞게 하나의 일치점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간접적으로 농민반란의 혁명적 이념을 제공한 동기와 농민봉기의 개입요인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종교개혁은 다만 순수한 교회개혁으로만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 뭔쩌와 같이 농민전쟁과 관련하여 “세상의 변혁”을 도모 하였고 중세후기의 정치 사회적 개혁까지 목표했다.2. 경제적 상황중세 초기의 장원제도 아래서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다. 농민들은 소작인 내지는 농노 상태였고 가난하였다. 토지는 거의 귀족과 교회가 차지하였다. 농부들은 농노로서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에게 예속되어 착취를 당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전구제받지 못하고 착취만 당한다”라는 민중의 불평은 농민전쟁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3. 사회적 상황중세 초기 사회제도는 봉건제도 아래 주로 세 신분으로 나뉘었다. 곧 영주와 기사계급과 농민들이다. 여기서 영주와 기사들은 지배계층이요, 농민들은 농노화된 피지배 계층이었다. 그 외에도 유대인들과 집시들이 최하층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십자군전쟁과 장기간의 국제전쟁으로 영주 및 기사계급이 몰락하였다. 특히 화약과 대포의 위력 앞에 칼과 창을 쓰는 기사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결국 몰락한 귀족이나 기사들은 도둑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중세의 봉건주의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십자군 전쟁 이후로 동 ? 서양의 상선 왕래로 무역이 활발하였고 상업과 금융업이 발달하여 개인적 ? 경쟁적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되었다. 상인들은 도시의 수공업자들을 지배하여 대자본가가 되었다. 결국 봉건사회의 몰락과 상업도시가 발전하게 되었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로웠다. 그리하여 상인, 무역업자, 금융업자등 영주나 로마교회와의 주종관계가 없는 제3의 도시 자유민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 돈과 신분의 고하를 좌우하게 된 것이다.그러나 농민들의 상태는 좋지 못하였다. 14세기 중엽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어 노동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었다. 따라서 농촌은 피폐하고 도시로의 이농현상이 늘었다. 옮겨간 도시에는 이농자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은 있었지만 상업과 공업에 관한 특권은 이들에게 없었다. 그래서 초기 무산자 계층이 도시에서 형성되었다. 도시로 이주한 농민들은 피지배자로 신분적 예속을 강요당하였다. 그 결과 도시의 폭동은 세 그룹의 집단자들, 즉 1)정치적 ? 경제적 힘을 상실하고 관료체제나 군대조직에서도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던 일부 몰락한 귀족들, 2)경작지 분할로 가난하게 되고 봉건적 조세부담과 부역 때문에 고통당한 농민들, 3)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해 온 사람과 사회적으로 몰락한 수공업자들로 구성된 도시의 빈민들에 의해 발생하곤 하였다.농민전쟁이 일어날 당시 독일 농민들은 짐 나르여한 농민들은 분드슈를 깃발에 그리거나 장대에 매달고 나왔고, 이후 분드슈 봉기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분드슈 봉기는 프리치라느 ㄴ전설적인 지도자의 주도하여 1493년, 1502년, 1513년, 1517년에 라인강 상류지역을 중심으로 시도되었으나,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사전누설로 인하여 번번히 불발로 끝났다. 그는 계속 피해다니면서 신의 정의, 신법의 원칙 등에 기초하여 봉건 부과조의 폐지, 수도원 재산의 몰수 등을 주장하였다. 1524년 흑산림지대에 나타났다는 것을 끝으로 그대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불쌍한 콘라드 봉기는 1514년에 발발했는데, 'Armer Conard(불쌍한 콘라드)'라는 말은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어려운 농민 전반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낭비벽이 유독 심했던 뷔르템베르크 고이 울리하는 그의 낭비벽으로 인한 재정적자를 메우려고 새로운 세를 그 지방에 부과했는데, 그 지역 농민들이 이에 반반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가 확산되어 도시 수공업자들도 가담하자 뷔르템베르크 영방의회는 도시 수공업자들의 불만을 들어주믕로써 농민과 도시 수공업자를 분리하였고, 이어 울리히 공은 농민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2. 1525년 독일 농민정쟁)1524년 흑산림지대에서 봉기의 서주가 울렸고, 본격적 봉기는 1525년초 상부 슈바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봉기는 상부 슈바벤 농민들이 작성한 12개조와 함께 프랑켄, 튀링켄, 엘자스. 서부 오스트리아 등으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1525년 봉기에서 특이한 것은 농민들이 다른 지역의 농민단과 연합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봉기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겠다.① 흑산지역 봉기1525년 독일농민전쟁의 봉화를 올린 라인강 상류지역의 흑산림 봉기는 처음에는 흉년으로 인한 지대 거부운동에서 시작하였다. 그런데 용병 출신 뮐러를 지도자로 삼고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의 공화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신법을 봉기의 근거로 삼으면서, 봉기는 이전의 봉기와는 다른 양적 ? 질적 변화를 겪었다.봉기가 확 것은, 농민들이 점령했던 영주의 성이나 수도원을 다시 납부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이 영주에게 가서 농민들의 불만을 들어주도록 중재하겠다는 것이었다. 결코 유리한 조건이 아니었지만 슈바벤의 가장 강력한 농민단은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않고 해산하였다. 반면 강공과 회유책에 의해 슈바벤 지역을 평정한 트룩세스는 이제 자유롭게 용병할 수 있게 되었다.③ 프랑켄, 뷔르템베르크 지역 봉기1525년 이전에도 봉기가 반발했던 이 지역에서의 봉기는 상부 슈바벤 봉기가 전파된 3월 중순부터 시작되었는데, 상부 슈바벤지역보다 더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반 성직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뷔르쯔부르크 주교령의 남부지역을 거의 장악한 타우버계곡 농민단은 귀족이나 성직자의 특권 폐지, 봉건적 부과조의 폐지 등 다른 지역의 봉기보다 훨신 더 과격한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과격성은 실제 행동에서 더 명확히 드러난다. 프랑켄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3월 25일에 조직덴 오덴발트 농민단의 경우, 농민단의 수는 6천 명쯤 되었고 그 지도자는 농노 출신의 로바흐였다. 로바흐는 귀족 출신의 노련한 군인가이어의 도움을 받아 소총과 대포로 무장을 하고 바인스부르크 성을 공략한 후, 그곳을 지키던 귀족 기사들은 살해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귀족을 살해하거나 수도원을 철저히 약탈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이들의 과격한 행동은 귀족이나 성직자들에게 봉기 농민의 잔인성에 대한 선전관리로 사용되었다.로바흐가 이끌과 있던 농민단은 프랑켄의 대부분을 장악하였고, 이 지역 봉기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하일브론에서는 농민의회가 소집되어 법률가 히플러의 지도하에 새로운 조문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슈바벤에서 북진해오는 트록세스의 슈바벤 동맹군에게 패하여 지도자들은 화형당하고 농민의회는 해산되었다.이외에도 튀링겐 지역, 엘자스 지역, 서부 오스트리아지역 등이 있다.Ⅳ. 독일 농민전쟁 전쟁인가? 봉기인가?1300년 이후 유럽 지역에 걸쳐 일련의 농민봉기가 발생했다. 1320년대의 플랑드르 지방 농민아니다.
    인문/어학| 2006.10.19| 9페이지| 1,500원| 조회(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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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유럽중심주의
    고대 그리스시대에 대한 유럽중심주의적인 시각에 대한 비판적 검토《목 차》Ⅰ. 緖論Ⅱ. 本論1. 유럽중심주의란?2. 유럽중심주의와 역사학자들(1) 헤겔 - 역사는 자유 이념의 발현(2) 칼막스와 유럽중심주의(3) 막스 베버와 합리성3. 유럽중심주의가 가져다준 폐해(1) 은폐, 과장, 합리화(2) 불균형한 세계사4.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5. 『블랙 아테나』의 논쟁과 아프리카 ? 아시아적 뿌리를 찾아.......(1) 버널의 논점(2) 『블랙 아테나』의 비판과 반론(3) 『블랙 아테나』의 논쟁성과6. 고고학과 유럽중심주의(1) 고고학과 유럽중심주의 관계7. 유럽중심적인 헬레니즘 역사(1) 페리클레스로 이상화한 아테네 사회(2) 근대인이 이상화한 그리스(3) 헬레니즘문화가 가진 인종주의 의식8. 헬레니즘의 극복을 위한 대안(1) 헬레니즘 이데올로기의 바른 인식(2) 날조된 역사를 바로잡아야...Ⅲ. 結論Ⅰ. 緖論유럽중심주의적 시각은 우리가 배우는 중 ? 고등 교육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사’라는 과목을 배우면서 유럽중심의 역사에만 치중할 뿐이지 그 외 국가들의 역사는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이 현 교육계의 실정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서구의 역사를 세계사로 인식하는 태도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나는 지난학기에 ‘정치외교학과’에 개설된 「비교체제론」이라는 강좌를 수강했다. 그 수업에선 이매뉴엘 월러스타인(I. Wallerstein)이라는 학자가 저술한 『근대 세계체제』에 대해서 배웠다. 그 수업에서도 역시 느낄 수 있었던 것 서구중심의 역사적 서술이었다. 그는 종속이론에서 출발하여 세계체제론을 발전시켰는데, 16세기 이래부터 유럽 경제가 세계 경제의 중심이었다는 주장이다. 유럽을 제외한 그 외 지역들을 주변부로 인식하면서, 유럽의 경제적 우위를 내세우고 있다. 이는 유럽경제가 존재했기에 세계의 경제가 유지 되었다는 그들의 독단적 생각에서 비롯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반면, 1987년 미국 코넬대학교의 정치학과 교수인 ‘마틴 버넬(M. Ber보여주었다. 여기서 오리엔탈리즘은 “오리엔트를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위압하기 위한 양식”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명백해진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항 대립은 정상과 비정상, 우월과 평등, 강자와 약자, 성인과 유아, 합리성과 비합리성, 선진과 후진 그리고 마침내 문명과 야만 등으로 형태를 달리하며 재생산 된다).오리엔탈리즘적 생각으로 동양을 이해하려한 맑스의 유물사관에 의해서 거룩한 메소포타미아나 인도의 문명들은 유럽에 문명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고 가치 없고, 볼품없는 문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맑스의 사상이 전 세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이 사실이고, 많은 지배적 이론을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3) 막스 베버와 합리성베버는 사회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독일의 역사학자 이기도 하였다.그는 유럽의 합리성과 비유럽의 비합리성, 전통성을 대비시켜 비유럽 세계의 후진성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그는 근대 유럽이 역사상의 모든 사회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사회이며 유럽은 이런 합리적 경향을 고대 그리스로부터 발전시켜왔다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유럽은 그런 싹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그런 합리성에 대한 선택은 유럽 인들의 자유 의지의 결과로, 유럽 인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반면, 동양인들은 고대부터 초월적 종교, 미신 등에 매몰되어 자의식을 갖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는 서양과는 다른 비합리적인 사회와 정치 경제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이런 차이의 원인을 관개를 하는 수리 문명과 관련되는 동방적 전제론에 근거를 두었다.베버의 주장은 온통 유럽 문명에 대한 찬양으로 뒤덮여 있으나 이런 주장들이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이 잘못된 분석 방법과 잘못된 정보, 무지, 편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아시아에 대해 매우 많이 아는 척해도 아는 것은 별로 없다.)3. 유럽중심주의가 가져다준 폐해(1) 은폐, 과장, 합리화서양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유럽의 우월을 설명하는주의를 깨우치는데 일조하고 조금이나 그들의 양심을 믿을 뿐이다.5. 『블랙 아테나』의 논쟁과 아프리카 ? 아시아적 뿌리를 찾아.......1987년 미국의 코넬 대학 교수인 마틴 버널(M. Bernal)은 『블랙 아테나』라는 책을 써서 일대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은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고대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이 검은 피부를 가진 것처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제목은 아테나 여신의 신격이 이집트에서 왔다는 것을 암시하려고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이다).이 책의 주제는 고대 그리스에 대한 이집트와 페니키아인의 영향을 다루고 있다. 기원전 3000년기(2999~3000) 이래 이집트 문명과 페니키아 문명이 그리스 문명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집트는 한때 그리스 반도를 일부 식민지화하기도 했고 언어와 제도 등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페니키아도 여러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이런 주장은 그리스 문명의 자생적은 발전을 받아들여왔던 기존학설에 도전하는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근대 헬레니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그런 외부의 공헌을 인정했는데 19세기의 근대 유럽인들이 인종주의적 입장에서 그것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그리스 문명을 순수하게 토착적인 백인 문명으로 설정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이집트와 그리스의 관련성을 주장한 것이 그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아프리카중심주의를 주장하는 흑인 학자를 사이에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임스(G. G. M. James)나 디옵(C. A. Diop))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이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이집트 문명이 흑인 문명이라는 것, 고대 그리스 문명의 발전은 이집트의 문화 유산을 도둑질한 결과라는 것, 이런 사실을 서양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종주의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들의 주장이 학계에서 거의 무시된 것은 논리적인 취약점에도 일부 이유가 있으나 주된 것은 이들이 흑인 학자들이기 때문이었다.반면 버널의 주장이 즉각적으로 가 ‘인간 정신의 특유하고 개인적인 표명으로서의 유럽 문명을 기초 짓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유럽 세계와 이집트, 인도, 중국을 구분하는 이 특별한 에너지, 독립성, 창의성이 이미 유럽의 청동기시대부터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유럽의 청동기 시대 금속 노동자는 자유로워서 어느 후원자나 부족 사회에 묶여 있지 않았다. 그들은 국제 시장은 아니라 해도 여러 부족을 위해 생산했기 때문이다. 반면 오리엔트의 금속 노동자는 특정한 종족에 묶여 있었고 따라서 자유로운 표현이나 창의성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크레타 문명을 이집트 문명, 나아가 전체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비교했다.별 근거도 없이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유럽과 오리엔트 문화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차일드는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고고학자로 고고학에서 진화론이나 인종주의를 가급적 배제하려고 애쓴 인물임에도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1)그리스 고고학의 이데올로기그리스의 고고학은 다른 나라의 고고학과는 성격이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이 그리스 사람이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 사람이거나 미국인들이고,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가 그리스의 역사적 정체성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된 이유는 18세기 후반 이후 유럽에서 그리스 열풍이 불며 그리스 문명을 근대 유럽 문명의 원류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 고고학도 역사학과 마찬가지로‘유럽성’을 이해하기 위한 유럽 인들의 거대한 작업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그리스 고고학은 역사학에 의해 형성된 그리스의 이상화 된 상을 물적인 증거를 통해 확인만 해주면 되는 기능에 제한되었다. 그러니 객관적인 고고학이 불가능한 것은 당연했다. 고고학이 역사학의 시녀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역사학을 통해 드러내려 한 헬레니즘의 시녀가 되었다.그런 점에서 그리스 고고학은 과거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편취된 고고학이다. 유럽인에서도 이집트나 북아프리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따라서 누비아보다도 이른 시기에. 철기 문화가 따로 발전했다는 것이다.아프리카 문화를 다른 문명과 비교하지 말고 아프리카의 문맥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서양적인 관점에서 보는 실패한 문화가 아니라 인류 문화의 다른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6) 유럽중심적 고고학에서의 탈피탈과정주의적 고고학의 발전은 종족고학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이 고고학의 일반 법칙을 부인하고 개별 종족적 문화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름대로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다른 지역의 고고학을 유럽중심주의적인 일반 법칙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이다.지나 200년에 걸쳐 유럽 고고학이 쌓아놓은 업적은 아직도 대중적으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영국의 스톤헨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어느 교과서에나 다 소개되고 있다. 또 그 용도에 대한 분분한 해석이 끊임없이 서양의 언론을 장식한다. 또 프랑스 구석기 시대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나 스페인의 라스코 동굴 벽화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으로 취급을 받아 해마다 많은 사람이 찾지만 다른 유럽의 중요한 유적은 이름조차 못 들어 본 것이 허다하다.최근 아프리카의 고고학 연구가 진전되며 아프리카 선사 문화의 풍요함이 드러나고 있다. 아프리카의 암각화나 동굴 벽화들은 유럽의 것보다 더 풍부하고 그림도 더 화려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누구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그러나 서구인들은 걸프전에서의 메소포타미아문명의 파괴와 재침공 시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이 약탈당하는데 수수방관 했으며, 유수한 문화유산이 손실되거나 없어졌다. 이라크 문명을 서양 문명의 원류로 생각하면서도 큰 애착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리스의 문화유산이었다면 당연히 태도는 달랐을 것이다).7. 유럽중심적인 헬레니즘 역사고대 그리스 인들은 자신들 종족의 이름을 헬레네스(Hellenes)라고 불렀다. 그들의 조상인다).
    인문/어학| 2006.07.26| 21페이지| 2,500원| 조회(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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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사]변방출신 장수 이성계 평가A+최고예요
    이성계,변방출신 장수로서 새 왕조를 세운 인물1. 조선 건국과 이성계이성계(李成桂1335~1408년)가 조선왕조의 첫 임금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이성계가 어느 정도의 구실을 했는지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 밀려나 있다. 정도전은 얼마나 원대한 구상 아래 조선 건국을 추진하고 새 왕조의 틀을 짰으며, 뒤에 태종이 된 이방원은 왜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 했는가 따위가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아온 것에 비해, 이성계의 경우는 다만 조선의 태조라는 사실이 강조되었을 뿐이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을 쥔 뒤 그가 조선 건국 과정에서 한 일은 무엇인지는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를 못했고, 그가 왜 조선의 태조가 되었을까, 무슨 까닭으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성계라는 함경도 변방 출신 장수가 새 왕조의 첫 임금이 되었을 까? 에 대해서조차 눈길을 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조선 건국은 분명 이성계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성계가 있었기에 조선 건국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성계가 조선 건국 과정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까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1) 겸손한 이성계사료로 말미암아 이성계는 대단히 겸손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이성계가 왕이 된 뒤에도 이색(李穡)을 형님 모시듯이 대하였다는 것이나, 한여름 더운 날 점심 무렵에 몰려든 신료들이 즉위하시라고 간청하는 것을 자신은 덕이 부족하다며 굳이 사양하다가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마지못해 즉위하겠다고 수락하였다는 것, 즉위 의례를 거행하는데 차마 어좌에 나아가 앉지 못하고 기둥 안에 서서 하례를 받았다는 것 따위가 모두 그의 겸손을 알리는 일화들로 전해지고 있다. 이성계에게 겸양의 미덕이 없지는 않았을 터이나, 이와 같은 기록에서의 겸양하는 자세는 의도된 듯한 인상이 강하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무렵까지의 자신만만한 청년 장교 또는 무예가 뛰어난 장수의 모습이 조선시대를 보는 관점은 크게 나누어 중세사회로 보는 것과 근세사회로 보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정치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주로 근세사회로 보는 관점에 서 있으며, 양반 관료가 주도하는 사회였다는 것이 그 골자를 이룬다. 따라서 학자들의 관심이 국왕보다 양반관료에 치우치기 쉽다. 여기에 더해 문헌 고증을 매우 중요시하는 경향으로부터 당시의 기록을 절대시하는 문제가 겹쳐져 작용하게 되었다. 올바른 문헌 고증은 엄격한 사료 비판을 전제로 하지만, 그 전제 조건을 충실히 이행하기보다는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매달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왕보다도 양반관료를 중시하는 편향성은 이제 서서히 극복되어 가고 있지만, 흔히 말하는 ‘사회 지도자 계층’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풍토와 맞물려서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에서 한 역할이 덜 주목된 근본적 이유는 여기에 있는 셈이다.2. 여진족 무사들의 존경을 받는 장수(1)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주장이성계와 관련하여 오랜 동안 논란이 된 것으로 그가 혹 여진족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있다. 기록으로만 본다면 고려 사람인 것이 확실하다. 이성계 가문의 내력은 『태조실록』과 『용비어천가』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이에 따르면 그는 그 연원이 신라 말엽까지 올라가는 유서 깊은 가문의 후손이다. 즉 문헌기록으로는 이성계는 분명 고려의 주요 가문에 드는 전주 이씨의 후손이라는 점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 문헌 기록이 모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사실을 곧이곧대로 기록했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 약점이다. 그의 가문의 내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때부터로, 이로부터 약 15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두만강 하류 유역에서 함흥과 삼척 지방까지 여러 곳을 이동하며 토호 세력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생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함흥 이북 지역에는 고려 사람들보다도 여진족이 더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그리고 여진족은 생활에서 농경보다도 原景)등이 여진족 족장 출신으로 이성계의 부하 장수가 되어 고려에서 고위 관직에 오르고 조선의 개국공신에도 오른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처럼 그의 부하가 된 여진족 족장 소속 병사들이 모두 이성계의 부하가 되어, 크고 작은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들이 이성계가 혹 여진족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인 것이다.)(2) 이성계가 고려 사람이라는 증거와 화려한 전적들앞서 발힌 내용처럼 이성계가 고려 사람이 아니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이성계가 고려 말엽 공민왕 때부터 관직 생활을 하는 모습이나 혼인 관계를 맺은 양상 등을 보면, 당시 사회에서 이성계를 여진족으로 취급한 자취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이성계는 1356년(공민왕 5년) 고려의 수도 개경에 모습을 처음 드러냈다. 이 해는 공민왕이 기철 일당을 숙청하고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어 있던 함경도 일대를 다시 고려의 영토로 확보하는 등의 반원개혁이 단행된 때로 잘 알려져 있는데, 바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성계의 아버지인 환조 이자춘(桓祖 李子春)이 공을 세운 덕에 개경에 살면서 하급 무관으로 벼슬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부친의 사망함에 따라 동북면(東北面) 천호(千戶)의 지위를 세습한 데 이어, 1361년에 벌써 장수의 반열에 들어섰다. 1362년 정월에 홍건적을 점령하고 있던 개경을 탈환하는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성을 뛰어넘어 공을 세움으로써 그의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려왕조를 위해 이성계가 세운 전공은 실로 혁혁하다고 이를 만한 것이었다. 북부 지역에서의 전투에서 세운 전공으로 북원을 지탱하고 있던 장수인 나가추가 거느리고 침입한 수만 명의 군대, 북원 황제의 명령에 따라 공민왕을 폐위시키겠다고 침입한 군대, 여진족 족장 호발도의 군대 등을 물리친 것, 이성계의 외종사촌인 삼선과 삼개 형재가 여진족을 동원해 점령했던 함흥 지역을 탈환한 것 등이 있다. 중부 및 남부 지역에서 세운 전공은 모두 왜구를 물리친 것인데, 최영이 황해도에서 개경으로 향하는 도 내륙을 횡횅한 뒤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이 동안 상주, 경산, 진주 등지가 피해를 입었고, 이들을 막다 전사한 장수도 여럿이었다. 이에 왕명을 받아 이성계가 여러 장수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급히 파견되어 이두란의 도움으로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왜구를 전멸 시켰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화약무기를 실전에 사용한 최무선의 공으로 알려져 있으나, 거꾸로 훨씬 큰 공을 세운 이성계의 전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이성계는 지혜로운 장수라기보다는 용맹한 장수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나운 장수는 아니었으며, 부하들을 보살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적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에 대해서 정확히 예측할 줄 아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으며, 적의 장수가 능력이 뛰어난 경우에는 항복을 받아 자기 부하로 삼는 것을 즐겼다. 따라서 전투 때에는 최고 지휘관이 되어서도 선봉에 서는 일이 많았고, 활 솜씨를 과시하여 적장의 기를 꺾어 놓는 것을 즐겼다. 이러한 면모는 그의 얼굴 모습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데 가장 큰 특징은 매부리코였는데, 전체적인 인상이 날카롭고 용맹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성계의 말타는 재주와 활 쏘는 능력은 『용비어천가』를 들춰 보면 곳곳에서 발결할 수 있다.)이성계가 운봉의 지리산 자락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에는 이미 장수로서는 최고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물론 이성계보다 서열이 높은 장수가 여럿 있었으나, 국왕이 10명이 넘는 많은 장수를 거느리고 지휘하는 총사령관 직책을 맡긴 장수는 최영과 이성계 둘 뿐이었다. 이성계가 이 같은 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분명 고려 사람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3. 정치적 성장을 위하여이성계가 당대의 뛰어난 명장이었다고는 하나, 권력의 중심에 발을 디디기는 쉽지 않았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명망이 쌓이고 승진이 이루어지는 것과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는 그가 이름 없는 함경도 변방 토호 출신의 무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이 딸을 첩으로 내줄 정도로 미약하지도 않았다. 신청 강씨는 대표적 부원 권문세족의 하나였으며, 강윤성의 형제와 친척 중에는 재상이 여럿 배출되어 있었다. 뒷날 이성계가 조선의 왕이 된 뒤,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된 둘째 부인 소생 막낸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여기에는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둘째 부인이 세운 공이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이 유력하다. 말하자면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정계에 뿌리를 내리는 데에는 둘째 부인 집안의 후원이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그 밖에도 두 명의 부인을 맞아 아들 8명, 딸 3명을 낳았는데, 모두 명망높은 권문세족 가문의 딸들과 짝을 지어주었다.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을 공양와의 동생인 왕우의 딸에게 장가들인 것을 본다면 이성계는 정말 정치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는 이미 이성계가 정치권력을 장악한 뒤로서, 사실 공양와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이성계의 사돈 즉 방번의 장인의 형이었다는 데에 있었다.이러한 점으로 보면, 이성계는 군대와 전투밖에 모르는 군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처음부터 정치권력에 야심을 갖고 개경에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 때 이후의 고려 사회는 국제질서가 큰 변화를 일으키는 가운데 국내 정치세력의 부침도 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성계도 차츰 정치적 야심을 기르게 되었을 것이다. 꽉 짜여져 안정된 사회라면 변방 출신 장수가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혼돈은 그에게 기회가 될 수 있었고, 그는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명성을 세우고 혼인관계를 통해 기존 정치세력과 유대관계를 맺음으로써 정치적 기반을 다져나갔던 것이다.4. 위화도 회군의 진실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하여 요동 공벌 논의가 일어나게 된 것은 그 사이에 명과 고려의 관계는 반드시 원만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북원의 장수 나가추가 요동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에 명이 고려에 큰 압
    인문/어학| 2006.07.24| 6페이지| 1,000원| 조회(1,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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