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교회의 삼위일체 논쟁★ 목 차 ★1. 서론2. 삼위일체론의 사상적 배경⑴ 로고스(Logos) 논쟁⑵ 에비온(Ebion) 학파⑶ 靈智主義(Gnosticism)⑷ 모나키안주의(Monarchianism)3. 삼위일체론의 경향⑴ 동질론적 삼위일체⑵ 이질론적 반삼위일체4. 삼위일체 교리 성립⑴ 니케아 회의⑵ 콘스탄티노플 회의5. 세계사 교과서 분석6. 결론1. 서론초기 교회의 신앙 형성 과정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가 누구이며, 성령은 누구인가, 그리고 삼위의 통일성과 개체성 즉 삼위일체란 무엇인가였다.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형이상학적, 철학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심각한 질문들이다. 다시 말해서 삼위일체에 대해 아는 것은 단순히 '교리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삶의 '활성화'에 있다고 할 것이다.여기서는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삼위일체 논쟁의 사상적 배경, 삼위일체에 관한 많은 주장들, 이단을 정죄하고 교리적 전통을 정립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종교회의 등을 알아봄으로써 과연 삼위일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에 도달해 보고자 한다.2. 삼위일체론의 사상적 배경⑴ 로고스 논쟁 -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는가?고대에는 종교적 전통을 존중하였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 전통에 위배되는 아주 낯선 교리를 전파했는데, 이것은 그 당대의 문화에 심각한 걸림돌이 되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요1:14). 물론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유대교적 신앙을 이어받았는데, 문제는 그 창조주가 '성육신'(incarnation)을 통하여 인생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데 있다.희랍철학가들은 초월적 신(神)이 직접적으로 물질계에 관여할 수 없다고 하여 이 사상을 배척하였다. 또 영지주의자들은 영(靈) 만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물질 세계는 부패되어 있기 때문에 신이 물질적인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단지 인간처럼 보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중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로고스'라는 사상을 발전시켜 순교자 저스틴은 '로고스 기독론'(Logos Christology)을 주창하였다. 그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을 유지하면서 신적 대행자 로서의 로고스가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는 성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할 '로고스' 즉 예수님을 낳으셨기 때문에(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로고스'는 성부에게 종속되며, 성부 다음으로 가장 큰 권세를 지니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이러한 로고스 개념은 헬라적 사고의식에 젖은 오리겐에게 혼동을 일으켰다. 오리겐은 삼위간의 통일성을 말하기 위해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니케아 신조에 좋은 영향을 끼쳤지만, 삼위간의 구별성의 문제에서 혼선을 빚었다. 오리겐은 '성자의 영원한 발출'(eternal generation of the S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성자는 성부로부터 파생된 신 즉 제 2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성부가 곧 성자라는 형태론적 군주신론을 비난했지만, '로고스'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이론을 근거로 성부가 성자보다 더 높고 성자는 성령보다 더 높다는 「등급을 가진 삼위일체」를 주장하였다. 그는 오직 성부만이 '참된 하나님'(God)이며 성자는 '신'(god-第二神)이라고 하였다. 이 사상은 더욱 진전하여 오직 성부만이 참 하나님이고 성자와 성령은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 이단이 출현하게 되었다.⑵ 에비온(Ebion) 학파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은 다신론에 반대하여 처음부터 유일신론 자체를 신봉했다. 특히 에비온의 유대학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써 유대인의 전통은 그대로 계승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들의 조직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의 율법을 강요하고자 했던 흐름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교리적 특징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침례(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그에게 내려옴으로써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운명하신 그리스도는 신성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 그리스도라는 주장을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대적 경향은 곧 세계를 지은이와 참 하나님과의 구별을 둔 것-, 셋째 가현설(假現設) - 대속자에게 있는 인간적 요소는 단지 사람을 속이는 외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요컨대 정통교회와 영지주의자들의 공통되는 신조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었지만, 영지주의자의 이원론은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이 되었다는 어떠한 신조도 배격하였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태도는 교회에 큰 위협이 됨과 동시에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즉 교회에서는 영지주의의 그리스도 가현설(假現設) 등에 대한 방어를 위해 삼위일체설을 정립시켰다.⑷ 모나키안주의(Monarchianism)모나키안주의 즉 단일신론(單一神論)은 A.D. 2∼3세기에 발생한 사상으로서 그 어원 'Monarkhia'는 한 군주의 독재를 의미하므로 동방에서는 단일신론, 서방에서는 r군주신론이 발생하였다. 즉 하나님은 절대 군주적 절대자이기 때문에 예수를 본래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며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단일이기 때문에 영원한 그의 아들은 세상에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일반적으로 모나키안 주의는 두 가지 형식 즉 동적(動的) 모나키안주의와 양태론적(樣態論的) 모나키안주의로 나뉜다. 동적 모나키안주의는 인간 예수 안에서 비인격적인 신적 힘이 역사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가 되었다는 조류이다. 동적 모나키안주의보다 수적으로 더 우세했던 양태론적 모나키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성자·성령 등 다른 형태로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이교도의 다신론을 언제나 대해야 하는 이들에게 신의 일체론을 긍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양태론적 모나키안주의는 가장 유명한 대표자의 이름을 따서 사벨리우스주의라 불리기도 한다.3. 삼위일체의 경향⑴ 동질론적 삼위일체동질론적 삼위일체는 논쟁 과정에서 야기된 종교회의와 공의회를 통해 정통으로 인정된 유형으로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아다나시우스, 어거스틴, 일반교부들, 중세 신학자 그리고 종교 개 생각으로 신앙하였으며, 아버지의 아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고 하나님의 영은 그들 속에 임하여 이것으로 하나님은 실질상 그들과 함께 계신 것으로 알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용납하시고 그의 영을 통하여 자기를 사람에게 나타내시며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것이 곧 초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설이었다.㈁ 터툴리안터툴리안은 「프락세아스 논박」(Against Praxeas)에서 양태론적 군주신론을 공격하였다. 동적 군주신론은 성자를 성부에 종속시킴으로 성자의 신성을 부정하는 반면, 양태론적 군주신론은 성부가 곧 성자라고 함으로 성자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이었다. 군주신론자들은 한 분 하나님을 말하는데 아들의 신성을 부인하는 측과 아들의 인성을 부인하는 측으로 나누어져 있으므로, 터툴리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다 같이 인정하면서도 서로 다르다는 점을 밝혀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법률적인 용어인 '본질'(substance)과 '개체'(person)를 사용하였다. 본질이란 몇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는 토지(물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성부·성자·성령이 신성을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삼위간의 통일성이 있다. 동시에 개체라는 단어는 하나의 토지에 대하여 소유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는 한사람 한사람의 법적인 사람을 뜻하며, 이 단어를 사용하여 삼위간의 구별성을 말하였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인 면에서 하나이며 개체적인 면에서 하나가 아니다. 터툴리안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삼위의 개체적인 기능을 강조하여 '한 본질 세 개체'를 완성하였다. 여기서 터툴리안은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는 최초의 신학자가 되었다.⑵ 이질론적 반삼위일체론이는 정통 동질론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반대자들에 의해 제기된 유형이다. 이러한 견해는 영지주의에 의해 이원론적 개념과 그리스도에 대한 가현설로 주장되었고 3세기 경 사벨리우스에 의해 성부·성자·성령은 단일 인격적인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세가지 방법에 불과하다고 의하면 하나님은 가장 높은 실체이며, 나누어지거나 전달될 수 없는 실체로 인하여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물들의 교통을 위해서는 중간존재를 통한 중재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아리우스는 중간존재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아들' '로고스'라 불렀다. 그러나 이 '아들' 혹은 '로고스'는 하나님과 동질로서의 독생자(獨生子)가 아니라 하나님의 최초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지혜와 이성을 지닌 창조 가운데 처음 태어난 자라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피조물인 '중간존재'로 이해하고 성령 또한 성부와 다른 피조물로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성을 고수하고자 하였다.㈁ 사벨리우스주의사벨리우스는 양태론의 대표자로, 성자와 성령의 위치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는데 즉 성부·성자·성령은 하나이며 이들은 한 하나님을 가리키는 세 명칭일 뿐으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그의 표현 양태를 나타낸 것일 뿐이라 하였다.성부로서는 구약의 법률을 주셨고 성자로서는 성육하셨으며 성령으로서는 사도들에게 영감을 주셨는데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그 역할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는 것과 같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벨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수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는 명제를 너무 철저히 지키려다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말살시키고 말았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이러한 동질론과 이질론은 아리우스주의 논쟁으로 발전되다가 마침내는 니케아 회의를 통해 동질론적 삼위일체론이 기독교의 정통 삼위일체론으로 확립되게 되었다.4. 삼위일체 교리 성립⑴ 니케아 회의점점 극열해져가는 삼위일체 논쟁으로 마침내 교회의 분열이 초래되었다. 교회 분열에 위협을 느낀 콘스탄틴은 아리우스 문제 뿐만 아니라 기타 의견의 일치를 요하는 몇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A. D. 325년 6월에 니케아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주의는 배격되었고, 아다나시우스)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는 A.D.295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였다. 아리우스 논쟁의 초기에없다."
동양사회경제사 -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제 5 장】 20세기 초의 농업 : '농민의 궁핍화' 문제역사교육학과 19713287권 소 정많은 학자들은 1930년대 전후의 중국 농촌의 경제는 몰락했고, 농민들의 생활 또한 최저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 정도의 궁핍화 과정을 겪고 있다고 보고 있다.중국의 농민이 궁핍화를 겪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크게 착취학파(농민의 궁핍화가 지주계급과 제국주의 열강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토지가 평등하게 분배되고 제국주의가 제거되어야 한다고 봄)와 인구기술학파(농민의 궁핍화가 이용 가능한 자원에 비해 인구가 지나치게 많고 비과학적인 농업기술 때문에 발생하며 이는 농민이 새로운 영농기술을 받아들여 생산성을 개선시킴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봄)로 나뉜다.▶ 증가하는 소작비율 - 착취학파의 주장착취학파는 농지의 소유권이 극소수 지주의 수중에 집중되어 대다수의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빈부의 격차가 확대되어 갔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이들은 이 시기 증가하기 시작한 농민들의 상품작물 생산에 따른 농업의 상업화 또한 영세한 농민들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지주제는 당시에 광범한 현상이 아니었다. 당시 토지에 투자해서 나오는 이익이 작았고(2∼5%), 소작인들의 항조, 공산당의 위협, 토지세 상승 등의 요인으로 1920∼30년대에 토지 투자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시의 산업이나 증권, 은행예금 등이 더 많은 이익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1930년대 중국의 소작비율이 높기는 했지만, 이것은 더 이상 중국에 있어 새로운 문제도 아니고 커져 가는 문제도 아니었다. 따라서 소작비율의 증가로 농민의 궁핍화를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인구 과잉 - 인구기술학파의 주장20세기 농민의 궁핍화를 인구 과잉 때문으로 보는 시각에는 인구의 증가가 일반적으로 식량 공급의 증가 속도를 앞지르는 경향이 있다는 맬서스학파의 견해가 전제되어 있다. 인구기술학파는 인구압력과 제한된 식량 공급 때문에 인구가 기아선상으로 떨어진다고 확신하고 있다. 경제사학자 토니나, 포이어워커는 1932년에 중국의 인구가 현존의 자원으로 부양하기에는 너무 많아 중국의 궁핍화가 초래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인구가 가능한 식량 공급 수준 이상으로 증가하면 기아, 질병, 전쟁 등의 원인으로 줄어들게 된다는 맬서스 학파의 이론에 따르면, 중국인의 1인당 식량 소비량이 최저생계수준 이하로 떨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중국이 인구 과잉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견해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중국의 인구는 1873년부터 1953년 사이에 연평균 0.5∼0.7%의 인구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또한 1930∼70년대 사이에 중국인의 평균수명이 30세 가량 연장되었음에도 이 기간동안에 식량의 분배량 이나 평균 소비량에 있어 괄목할 만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전 시대의 높은 사망률이 열악한 위생상태와 원시적인 의료 때문임을 알 수 있다.1949년 이후 국가에서 실시한 '전염병 퇴치운동'으로 기생충이나 전염병이 없어져 87년까지 중국의 인구가 10억을 넘어선 것을 보면, 1949년 이전의 높은 사망률은 전염병 등의 요인에 의한 것이지 식량 부족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단지 인구압력은 중국인들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려 1930년대 농촌 사람들의 주식은 옥수수, 감자, 기장 등이었다. 이는 증가하는 인구가 국가의 식량 생산을 늘리는 데에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농업의 상업화중국 농민은 당연히 자신의 식량 대부분을 재배했지만 약간이라도 잉여물이 생기면 시장에 내다 팔았고 경지 일부를 땅콩, 마름, 수박같이 판매를 위한 작물재배에 할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16세기에 이미 차, 생사, 면화와 같은 상품작물을 특화해 생산하고 있었다. 그 결과 명말청초에는 지역간의 교역이 번성했다. 하지만 농가 생산량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상품작물의 비율은 매우 작았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농촌시장은 광범해 졌고, 도시의 증가, 값싼 교통수단(철도), 외국의 수요 증대에 자극 받아 농민들은 상품작물(대두·땅콩·담배·채종·팜유)을 생산해 냈다.정상적인 환경에서라면, 농민은 작물의 특화와 농업의 상업화에 따라서 많은 이익을 얻었을 테지만, 이러한 시장생산을 위한 작물특화에는 위험이 뒤따랐다. 생존을 위한 생산을 그만두고 상품작물 생산에 집중한 농가는 시장의 힘(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좌우되었다.특히 영세한 농가는 시장의 불안정성에 민감했다. 이들은 주식곡물의 생산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곡의 생산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상품작물을 심어야 했다. 하지만, 상품작물을 생산하는 데에는 지력 유지(비료)를 위해 주곡생산에서 보다 많은 자본이 필요했다. 게다가 상품작물 재배로 바꾼 경지의 지대는 증가하기 마련이므로 흉작, 가격의 하락, 시장의 두절이 발생할 경우, 그 위험성은 자급작물을 재배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이처럼 시장을 위한 생산이 가져오는 위험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양잠업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경제불황이 바로 그것인데, 이 불황의 첫째 요인은 중국의 제품이 품질을 유지하지 못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것이었다. 또한 인조견이나 나일론과의 경쟁, 외국의 침략, 경제공황 등으로 인해 성장해 오던 비단 생산지의 농가수입은 격감했다.1930년대 양잠농가 들이 그러했듯이 작물의 상업화가 농민생활에 미치는 가변성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가격이 하락하거나 경제적으로 혼란한 시기에는 상품 작물에 의존한 농민들은 가혹한 결핍과 궁핍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수공업잠재실업과 반실업이 일반적인 중국 농촌에서 부업 중 가장 널리 행해졌던 것은 수공업이었다.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 중국 연구자들 중에는 외국 제품의 수업과 중국 내의 공업생산의 발전이 국내 수공업에 타격을 주어 중국의 자급 자족적인 봉건경제는 붕괴되기 시작하고, 반봉건·반식민지적인 경제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최근 공격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1930년대에 들어서서도 중국 내 수공업은 끈질기게 존속했다는 사실이다.(1933년 전통수공업은 면포 65%, 견제품 66%, 식물식용유 89%, 밀가루 95%를 담당함) 착유나 정미와 같은 전통적 수공업은 확대된 시장경제에 자극 받아 발전했고, 다른 전통적 수공업은 수출무역의 결과로 성장했다. 몇몇 경우에는 성냥, 비누, 담배 등과 같은 서양 제품의 모방품을 만드는 새로운 수공업 업종도 생겨났다.중국의 전통적 수공업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면직업의 경우, 18세기에는 외국의 강한 수요에 자극을 받아 토포는 유럽시장에서 환영받았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의 기계 면포와 경쟁할 수 없어 수출이 끊겼으나, 1890년경부터는 수직(手織) 면포의 수출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국내 시장에서도 수직 면포는 기계제 면포보다 경쟁력이 있었다.면직물 공정에서 수방적(手紡績)은 기계방과의 경쟁에서 뒤떨어져 수백만 명의 중국인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수방적은 속도가 너무 늦었지만, 그에 비해 기계방은 튼튼했고, 노동력과 시간을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점차 기계방으로 짠 면사(洋紗)를 선호하게 되었다. 또한 방직 공정에서도 양사를 이용한 신토포(新土布)가 대규모로 생산되었다. 양사는 새로운 지역으로 면방직업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면방직 붐의 결과로 1920년대부터 30년대 초에 신토포의 생산량은 양사 도입 이전보다 수배로 늘어났다. 양사가 토사를 대신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지만, 방적공 10명당 1명이 방직으로 돌아서 예전보다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고 다른 방적공들은 다른 수공업(밀짚가공, 낙농)에 종사하거나, 편물업, 레이스 제조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기계방의 발달은 원면에 대한 수요를 늘려, 원면의 생산량은 1900년부터 1920년대 초 사이에 50%가량 증가했다. 일자리를 잃은 수직 방적공의 대부분은 대체 수입원을 갖게 되었고, 수직 방적업의 몰락으로 전체적인 경제는 나아졌다는 주장까지도 가능할 것이다. 부가가치 면에서 1933년까지 중국 산업 생산량의 75%는 수공업이 차지했고 수출에서도 강세를 보였다.▶ 늘어가는 사회관계의 긴장중국의 농촌생활의 고달픔은 지역 엘리트(신사, 마을 지도자, 지주)에 의해 완화되어왔다. 유교적 도덕에 물든 지역 엘리트들은 어려운 처지의 농민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신분상의 의무로 알았고, 공동체에 지도력과 조직을 제공하며 '비공식 정부'로서 책임을 다했다. 하지만 1905년 과거제 폐지를 계기로 전통적 지역 엘리트는 '사회적 침식'을 겪게 된다. 과거제 폐지와 함께 이들을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상실했으며, 농촌 사회에는 더 이상 사회적 위계질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교육을 받은 젊은 인재의 부재로 농촌에는 교양과 책임을 겸비한 지도자가 사라지게 됨에 따라 새로운 지역 엘리트(상인, 고리대업자, 교육받지 못한 지주, 군사지도자, 토비)가 대두했다. 이들은 유교적 교양이나 사회적 책임 의식이 없어 그간 공동체를 지탱해주던 유덕한 온정주의가 사라지게 되었다. 20세기 초 중국에서 사람들은 상호착취적이었고 빈부의 격차는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