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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 패관작가론(비평을 중심으로)
    서론오늘날 고전문학의 전분야에 걸쳐 연구가 활발한 가운데에서 시화(詩話)에 관한 연구 성과도 괄목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도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실정이다. 시화의 장르적 성격을 명확히 규정짓지 못함으로써 시화가 독립적 문학양식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화를 평론(評論)으로 다룬 경우도 있고{) 김진영, 문선규, 박성규, 신동욱, 장흥재, 전형대, 정병욱, 조종업, 최신호 등.수필(隨筆)로 단정한 견해도 있으며 {) 구자균, 설중환, 윤원호, 이가원, 조윤제, 최승범 등.평론과 수필로 함께 다루려는 견해와,{) 김기동, 김석하, 서수생, 이상보, 장덕순, 최운식 등.패관문학(稗官文學)으로 다루는 경우{) 김사엽, 김태준, 박성의. 신기형 등.패관(稗官)이란 옛날 중국에서 임금이 민간의 풍속이나 정사를 살피기 위하여 거리의 소문을 모아 기록시키던 벼슬 이름인데, 이 뜻이 발전하여 이야기를 짓는 사람도 패관이라 일컫게 되었다. 나중에 이들이 모아 엮은 가설항담에는 자연히 그들의 창의성(創意性)이 가미되고 윤색(潤色)됨으로써 흥미 본위로 흐름에 따라 하나의 산문적인 문학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서 패관소설·패사(稗史)·언패(諺稗) 등으로도 불리는 설화문학이 형성된 것이다. 고려 문종때 박인량의 수이전,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 보한집, 이규보 백운소설, 이제현 역옹패설, 조선 세조때 강희안 양화소록, 명종때 어숙권의 패관잡기, 선조때 유몽인의 어우야담 등을 대표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패관문학에 대한 명백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에 대한 학자의 견해도 제각기 다른 실정이다.도 있어 시화에 대한 장르 규정의 난맥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우선 평론으로 다룬 선학의 업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선규는 『파한집』은 우리 나라 최초의 평론문학서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평론문학은 성립이 되었다. 라고 하여 시화를 비평으로 단정했다. 최신호는 『백운소설』,『파한집』,『보한집』 등은 시 의식을 가지고 기술했기 때문에 그 속 벗으로 지냈다. 그는 오세재의 소개로 강좌칠현 (江左七賢)의 시회에 출입하였다. 그런데 오세재가 경주로 내려가게 되자 다른 회원이 이규보에게 그 시회의 가입을 권유하였는데 한 마디로 거절하였다. 칠현가운데 누가 씨앗에 구멍을 뚫은 사람인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벼슬을 탐내면서 겉으로만 초탈한 듯이 행세하는 위장술을 빗대며 거절하였다 한다.▷1189(명종19 )사마시에 급제, 이듬해1190 년에 문과에 급제함20세 때 이규보는 세번째 사마시에 낙방하였다. 그러나 사마시에 네번째 응시한 22세 되던 봄에야 마침내 장원에 급제하였다. 시험을 보기 전날 밤에 이규보는 꿈을 꾸었는데 규성(奎星)이 자신에게 금년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한다. 규성은 28수의 하나로 문장을 담당한다는 별이다. 그는 이름을 규성의 보답 이라는 뜻에서 규보 로 개명한 뒤 과장에 나갔다고 한다. 23세 6월에는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여 동진사(同進事)에 뽑혔다. 말과(末科)에 급제하자 자존심이 상한 그는 사퇴하려고 했으나 부친이 이를 준엄하게 꾸짖어 사양하지 못하였다.▷11914(명종21) 부친사망. 천마산에 들어가서 白雲居士라 칭하고 作詩生活을 함24세에(1191년) 부친상을 당한 이규보는 개성 북쪽의 천마산으로 들어갔다. 이때 자신의 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 라고 하였는데, 이는 백운처럼 거리낌없이 거사처럼 도를 닦고자 한다 는 뜻이었다. 호방하고 구속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에 들어맞는 호라고 할 수 있다. 천마산은 이규보에게 문학과 정신수양에 많은 도움이 된 공간이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개성과 천마산은 젊은 시절 이규보의 삶과 문학의 중심공간이라 할 것이다. 그는 이 무렵 천마산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차츰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1199(신종 2)최충헌과의 인연, 관로의 첫발을 디딤(32세)이 시기는 그가 과거에 급제 한 이후 10여년 동안 관직을 얻지 못한 채 불우하게 보내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마침내 이규보에게도 기회가 왔다. 32세 되던 해( 심하다고 생각되면 풍자문을 쓰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선 시화의 범위를 넘어선 비평의 다양한 방식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1-3. 백운소설(白雲小說)시와 문학에 대한 단상을 정리한 이규보의 글로 시화집 내지는 시평집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홍만종이 편찬한 『시화총림』(詩話叢林)에 그 책이 수록되어 있는데, 잡록에 해당하는 것은 없고 모두 시화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홍만종이 『시화총림』을 엮으면서 다른 책의 경우에도 시화만 뽑았으니, 또한 원래 순수한 시화집만이었겠는가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그뿐만 아니라 이규보가 스스로 그런 책을 지었던가 확실하지 않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내용은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여기저기 들어있는 글과 거의 중복되므로 작자가 이규보인 것이 확실하다는 주장이 많다. 소설이란 명칭은 쓰고 있지만 소설의 근대적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자잘한 이야기란 뜻이다. 당시에는 소설을 독립된 양식의 장르로서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은 수필, 시화, 설화야담, 전기 등을 폭넓게 수용하는 의미로서 쓰였다. 은 시에 대한 이규보의 사랑과 예리한 비평적 안목을 엿볼 수 있으며 어설픈 모방보다 독창성을 중시하는 이규보의 문학관도 잘 나타나 있다.2) 이인로이인로는 고려왕조 오백년 동안에 가장 내우외환이 많던 시기에 처세한 선비요 관료이다. 문종에서 인종까지 7대 80년 동안이나 국권을 장악했던 인주(仁州) 이씨의 후예이다. 자기 스스로 가문을 자랑하면서 예전이 좋았다는 마을 거듭했다. 무신란이 일어나자 승려가 되어 화를 피했다가 뒤에 환속해서는 죽림고회의 중심인물로 자처하면서도, 과거를 보아 다른 사람들은 실패를 했는데도 홀로 성공을 거두어 벼슬이 정4품인 우간의대부까지 이르렀다. 그래도 영화를 누리지못한다고 계속 불만을 품고, 좌절된 의지를 오직 문학에서 살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또 시평(時評)을 처음으로 써서 『파한집』이라는 개인문집까지 남겨 놓았다.2-1. 생애▷고려 의종 6공은 그 책의 내용이 넓지 않다고 나에게 보충시키라고 하여 나는 간신히 폐망한 나머지이 것 을 모아 근체 약간 연을 얻으니 혹 부도나 여자에 이르기까지 담소의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은 비록 아름답지 않더라도 아울러 기록해서 세권을 만들었다. {) 『補閑集』序서의 내용을 보면 『補閑集』의 찬술동기는 문학에 대한 재인식, 문학사 기술, 당시 문학작품보존, 파한집의 보충이라는 의미 외에 담소의 자료로 삼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補閑集』은 쇄언을 모아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한 자료일 뿐이지 성전을 찬한 것이 아니다. 라는 고백이나 유신으로서 성훈 싣기를 사양함은 부당하다고 하기에 궐연히 실었다 고 한 점은 유자로서 편수의 말이라 하겠다.또한 『파한집』이 최초에 나온 순수하고 완정한 시화집이었기는 하나, 다루어진 내용이 개인의 색채가 지나치게 짙고 편파적이어서 시화에 다루어질 만한 시나 시인이 많이 소외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오칠언의 율절만을 다룬 파한집에 나타난 평시의 취향은 재치 내지 기교의 특이성에 기울어져 있다. 그리하여 시의 풍취나 당시 시단의 총체적인 모습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처럼 최자는 파한집에서 포괄되지 못한 시 내지 시인을 다루는 태도를 『補閑集』에서는 좀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파한집이 나온 이후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이 최자의 『補閑集』출간의 주요한 목적의 하나였다고 하겠다,2『補閑集』의 주요내용『補閑集』에는 『補閑集』서1단과 상52 중46 하49의 총 148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성격상으로 구분해 볼 때 시화 73편, 시론 20편, 시평 70편, 시화 6편, 총169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내용구성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구분시화시론설화시평계서(1단)112권상(52단)36312262권중(46단)11713352권하(49단)25941553계148단73편20편6편70편169편이상과 같이 148단의 『補閑集』에는 설화, 기녀들의 시, 승시, 시론, 시평 그리 이른바 용사나 신의의 논쟁이요 그 대결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용사에 관한 언급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익재에 앞서 이인로는 그의 『파한집』에서 용사가 시가(詩家)의 일병(一病) 이라 했으면서도 용사가 더욱 묘하리라(用事益妙) 하여, 그가 매양 시를 좋게 평할 때에는 반드시 이 용사를 그 수단으로 썼으며, 자신도 시작에서 언제나 용사를 정밀하게 썼다. 한편 최자는 그의 『보한집』에서 용사를 극구 반대하여 용사는 신의보다 못하고, 신의는 형용(形容)보다 못하다 하였다. 그리고 신의에 의하여 창작하는 이규보와 용사에 의해 묘미를 얻은 이인로를 비교 평할 때에는 이인로를 이규보의 하위에 둠으로써 용사를 배척하였다. 그러면 고려 말의 대문호인 이제현은 과연 용사를 어떻게 보았는가.이제현은 어떠한 시를 내어 놓고 그 시가 인용 모방한 다른 사람의 시나 고사를 명백히 밝혀 놓고서도, 그런 시작의 방법은 시가(詩家)가 피해야 할 일이라든지, 또는 좋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가 곧 그가 가진 비평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그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떠한 시가 다른 시를 인용한 사실을 밝혀놓고도 결코 모방이나 표절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용사를 그는 점화(點化)라고 일컬었으며, 이 점화란 곧 전인(前人)의 시문의 격식을 취하여 새로운 기축을 열어서 고인의 작의보다 훌륭하게 짓는 일로 높이 평가한다는 뜻이 되겠다.그는 또한 용사를 지나치게 험벽(險僻)하게 써서 당시의 조류에 어긋났기 때문에 높은 벼슬살이를 얻어 하지 못한 선달 이담지의 이야기를 듣고 어찌 아깝지 않으라! 라고 한탄하기까지 하였다. 그가 이담지의 작품을 시법에 들어맞으면서도 뜻이 새롭고 용사가 어렵다 라고 평한 것을 보면, 익재는 최자처럼 신의와 용사를 대조적인 각도에서 보지 않고 서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본것 같다.4-5. 다양한 비평어들그의 비평에서 또 하나 들 수 있는 특징의 하나는 시평에 있어서 결코 혹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언지닌다.
    인문/어학| 2005.01.04| 20페이지| 1,500원| 조회(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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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시가론] 한국고전시가의 작자층의 분포양상
    9. 한국 고전시가의 작자층의 분포양상1. 연구 방향한국 고전시가의 작자층을 알아볼 때 각 장르별로 모든 작품을 살피고 그 작자를 조사하여 계층, 남녀등의 기준으로 분포양상을 살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과제를 행할 때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르므로 여기서는 각 장르별로 대강의 작품을 선택하여 작자를 살펴 그 분포양상을 알아보기로 한다.2. 한국 고전시가의 작자층의 분포양상(1) 시가발생과 고대가요고대가요는 '구지가', '황조가', '공무인' 등 세 편이 전한다. 구지가는 구간등이 불렀다고 하였기에 다른 작가가 있는지 구간 등이 작자인지 분명하지 않다. 황조가는 유리왕이 지었다고 하므로 유리왕이 작자이다. 공무인은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혹은 백수광부의 처가 지었다고 한다.고대가요의 작자는 이렇듯 구간 등이나 왕으로 대표되는 집권층, 높은 계층의 사람들도 지어 불렀고 여옥이든 백수광부의 아내이든 평범한 일반 백성이 지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이로 볼 때 고대가요의 작자는 평민에서 왕까지 어느 계층에 편중되지 않고 남녀에 상관없이 두루 있었다고 생각된다.(2) 鄕歌文學 時代(삼국시대--고려 숙종)삼국시대는 漢字가 전래되어 기록문학 시대가 열리기는 했으나 지배계층에게만 활용되었을 뿐이고 서민들에게는 보급되지 못했기 때문에 향가를 제외하고는 삼국시대 노래들의 구체적인 실상을 알 수 없다.고구려는 중국대륙과 직접 맞닿아 있어 이들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씩씩한 기상을 키워왔을 것이므로 웅혼한 서사시들이 많이 불려졌을 것이나 이에 관해 기록된 문헌이 거의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의 악지 삼국속악조에 고구려의 노래로 등 3편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유래만 적어 놓았기 때문에 가사는 물론이고 작자, 창작연대 등을 알 수 없다. 은 오랭캐가 귀순해 오면 이 성에 머무르게 하고 노래를 지어 기념했다고 하므로 왕의 치적을 찬양한 노래이거나 군사들의 전승가일 가능성이 많다. 은 기록으로 볼 때 신세를 한탄한 노동요 같고 는 연정을 노래한 민요라고 여 처음으로 를 지었다고 한다. 이것이 歌樂의 시초라고 했으니 이는 처음으로 제작한 공식적인 宮中歌樂으로서 악장의 성격을 가진 초기의 향가가 아닌가 생각된다.鄕歌는 신라노래를 두루 통칭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양식과 세련된 가락을 갖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진성여왕 2년(888)에 편찬되었다고 하는 三代目에는 다양한 향가들이 많이 실려 있었을 터이나 전하지 아니하여 향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으며, 따라서 현전하는 향가 작품만을 가지고 향가의 갈래나 전개과정을 논하기란 쉽지 않다.3대 유리왕 때부터 16대 訖解王 때까지는 연회시에 喜樂으로서 4구체의 짧은 향가가 주로 쓰인 것 같다. 16대 내물왕 때부터 삼국통일 전까지는 타국과의 무수한 전쟁에서 전사한 화랑이나 장군을 애도하거나 찬양하는 노래가 많이 불렸는데 대개 8구체 향가인 듯하다. 26대 진평왕때 장군 奚論이 백제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자 "모든 사람들이 애도하여 長歌를 지어 조의를 표했다"고 하고 19대 눌지왕이 왜국에 인질로 잡혀갔다 돌아온 미사흔을 맞아서 을 지었으며 24대 진흥왕대의 美實은 사랑하는 애인인 5세 풍월주 斯多含이 가야국 정벌을 위해 출정할 때 를 지어 전송하였다. 29대 무열왕때 화랑 金欽運이 백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당시 사람들이 를 지어 追悼했다고 하며 26대 진평왕때는 實兮가 관직을 빼앗기고 시골로 추방되자 長歌를 지었다고 한다. 이 노래들은 8구체 향가이거나 4구체를 반복한 연장체 향가로 볼 수 있다. 이들 노래는 향찰체로 정착되어 전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실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창작 시기가 다소 후대이기는 하지만 현전하는 8구체 향가가 추도와 찬양의 노래임을 볼 때도 이 시기 노래의 성격과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6세기 이후부터는 , 월명사의 등 향찰체로 정착된 4구체 향가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와 는 원래 민요이던 것이 향가로 불린 것이며 와 창작된 향가이다.7세기 후반, 삼국통일 이후부터는 10구체 詞腦歌가 형성되어 유행하게 되었고 고려 전기까지 지속적으로하겠다.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사뇌가는 창작되어 전기까지 이어졌다. 이 시대에는 화랑제도가 신라의 멸망과 함께 없어졌기 때문에 담당층이 승려나 왕, 신하에 이르기까지 다양화되었다. 광종 18년(967) 경에 균여대사는 사뇌가 11수를 짓고 최행귀는 이를 게송으로 번역하였다. 8대 현종은 불행히 세상을 떠난 부모를 추모하기 위하여 1021년에 현화사를 창건하고 낙성식장에서 鄕風體歌를 지었으며 신하 11명은 慶讚하는 사뇌가[慶讚詩腦歌]를 지어바쳤다.(玄化寺碑陰記) 이로 보아 당시에 향가가 널리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종은 1120년에 팔관회에서 두 개국공신을 추모하는 를 지었고 고려 의종 10년(1156) 경에 鄭敍는 을 지었는데 향찰체로 정착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10구체 사뇌가의 殘影이라 하겠다. 고려 초기에 향가의 작자층은 승려나 왕, 신하에 이르기까지 다양화 된 것이다.(3). 俗樂歌詞 時代 (고려 예종--고려말)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려가요는 궁중 속악으로 사용되었던 俗樂歌詞밖에 없다. 고려때에는 이 속악가사 외에 고려인들의 노래가 여러가지 있었을 것이다. 궁중밖의 민중들이 부른 노래들의 실상은 기록이 미비하여 자세히 알 수 없고 궁중 속악가사를 통하여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속악가사도 조선조 성종조 전후에 정착된 것이기 때문에 많은 변개가 이루어졌을 것이므로 고려가요의 참된 실상을 밝히기란 쉽지 않다.청산별곡류의 속요와 함께 경기체가인 한림별곡도 궁중속악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악장가사와 고려사 악지 속악조에 실려 있으나 서로 다른 갈래이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현전 속가 20편( 등 巫歌 7편 포함)을 가지고 고려시대 가요의 원래의 모습, 갈래 체계와 그 특징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속가의 형성과정을 통하여 어느 정도 알아 볼 수 있다. 고려 전기에는 삼국의 민요나 당시의 민요(정읍사, 사모곡, 가시리 등), 사뇌가(정과정곡)를 그대로 속악가사로 채택하여 사용한 듯하다. 등 7편은 무가인 듯하다. 이하 6편후에 安軸(1287-1348)이 과 을 지었다. 은 충숙왕 15년(1328)부터 이듬해까지 강릉의 존무사가 되어 관동지방을 순시하면서 그곳의 경치와 감흥을 9장으로 읊은 것이며 은 그가 만년에 자기의 고향 순흥이 왕의 태를 갈무리한 곳이라 찬양하고 절경을 찾아다니며 기생들과 더불어 즐겁게 노니는 자신의 모습을 5장으로 읊은 것이다. 이 두 노래에는 사대부의 자기 과시와 득의에 찬 모습, 기녀들과의 방탕한 놀음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고려때의 경기체가로는 과 안축의 노래 2편이 전부인데 이 노래들은 형식이나 내용적 측면에서 조선조에 들어서도 계속 창작된 경기체가의 전범이되었다.고려 말에는 신흥사대부들인 禹倬, 李兆年, 李存吾, 李穡 등의 시조 작품이 전하고 李芳遠의 에 대한 鄭夢周의 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短歌라고 하는 시조가 이 시대에 사대부들의 새로운 문학 갈래로 형성되었다. 이 때의 시조들은 늙음을 한탄하거나 망해가는 나라를 걱정하는 심정, 정치적인 갈등을 토로함으로써 서정시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한편, 고려 말경에 승려들에 의하여 가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懶翁和尙(1320-1376)의 등이 전하기는 하나 후대의 위작일 가능성도 지적되었지만 이두체로 기록된 가 발굴됨으로써 신빙할 수 있게 되었다. 가사가 가르치고 설득하는데 적합한 갈래이기 때문에 여말에 불교 포교용으로 가사가 발생될 수 있는 소지는 충분했다고 본다. 가사는 조선조에 접어들어 시조와 함께 전형적인 사대부 문학이 되었던 것이다.이 시대에 고려가요는 민중에서 궁중에까지 널리 작자층이 확대되었고 경기체가는 신흥사대부라는 지배계층에 국한되었다. 고려 말엽에 등장한 시조는 사대부들이 주 작자층이었으며 가사는 초기에 승려들에게만 국한된 장르였다.(4). 士大夫詩歌의 全盛 時代조선조 개국으로부터 삭대엽이 발달하기 시작한 숙종조 이전까지는 유장한 리듬의 中大葉이 유행하던 때였고 성리학이 꽃을 피운 시기였기 때문에 사대부들의 詩歌인 樂章, 景幾體歌, 時調, 歌辭가 한껏 발달하여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후기에 발생된 시가 갈래이지만 조선조 선조때까지 지속적으로 발달된 사대부 시가이다.경기체가는 불교계에도 파급되어 義相和尙은 를, 己和는 을, 末繼智 은 를 지어 포교의 수단으로 삼았다. 경기체가는 중종조 周世鵬의 과 權好文의 에 이르면 형식이 거의 파괴되어 가사체에 가까워졌을 뿐만 아니라 이시기에 이르러 경기체가는 흥기하는 정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사대부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16세기 말엽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시조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歌辭와 함께 시가문학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개국 초기에는 고려의 유신들은 懷古歌를, 신흥관료들은 송축의 노래와 호기가를 읊었다. 특히 맹사성은 를 지어 자연과의 친화와 정치생활의 즐거움을 토로하였다. 한편 書院을 처음 세운 주세붕은 를 비롯한 훈민시조를 지어 인륜도덕을 강조하였다. 李滉은 을 지어 隱求의 정신과 유학자의 溫柔敦厚한 삶의 경지를 표현하였고 李珥는 를 지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道學과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호남가단을 이끈 宋純과 鄭澈은 문인의 풍류정신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으며 각기 를 지어 유교적 생활철학과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黃眞伊, 桂娘, 洪娘 등 기녀들은 순수한 우리말을 탁월하게 구사하여 사랑과 이별의 한을 빼어난 문학적 기교로 노래함으로써 시조의 문학성을 한껏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시조의 작자층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임.병 양란이후 高應陟은 28수, 張經世는 13수, 金得硏은 49수 등 성현의 가르침이나 향촌생활의 즐거움을 연시조 형태로 읊었으며 李德一, 姜復中, 鄭勳 등은 국란후의 당파싸움이나 국정의 혼란상을 비판하는 시조를 지었다. 한편 申欽은 전원생활의 멋을 섬세한 묘사로 격조높게 토로하였다. 사대부의 시조문학은 전란후의 위기를 유교정신의 재무장으로 극복하려는 朴仁老의 도학풍 시조를 거쳐 尹善道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였다.가사는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사대부들의 기호에 적합하여 크게 유행하였다. 정극인의 에서 형식의 완성을 이룩한 가사다.
    인문/어학| 2004.01.13| 6페이지| 1,000원| 조회(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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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문학사] 신소설과 이인직 평가A좋아요
    신소설과 이인직▶ 목 차 ◀1. 신소설에 대해서...1) 신소설의 개념 2) 신소설의 특색2. 의 문학사적 의의-'신소설' 명칭 생성과 사용3. , , 에 대해서...1) 2) 3) 4. 이인직 신소설의 한계점5. 생각해 볼 문제c`f) 이인직과 에 드러난 친일의식1. 신소설에 대해서...1)신소설의 개념시간의 흐름과 문학양식 자체의 변용에 따라, 신소설도 어느덧 우리 문학에 있어서의 고전적인 영역으로 점차 편입되는 단계에 놓여지게끔 되었다. '신소설'이란 한국문학사만이 지니고 있는 문학 양식상의 독특한 명칭이며, 그 어휘는 그대로 한국 근대화 과정의 한 반영인 동시에, 그 기형적인 사회발전의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한국문학의 비정통적인 변모를 고스란히 대변하는 명칭이기도 한 것이다.한국의 신문학이 고전 유산보다 서구문학의 조류나 수법에 더 영향됨이 컸으며, 또한 그 모방 이식의 단계를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서구문학의 아류적인 파생에 불과하다는 전제를 거의 전적으로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 신문학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러한 기형적인 특수성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갑오경장을 계기로 하여 조수처럼 휩쓸려 들어온 서구사조는 이질적인 외래사조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태세를 미처 갖추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직 새로운 사조를 거부 배척하려는 계층이 훨씬 우세하였던 이 땅의 현실을 무시하고 폭주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피동적인 외래사조의 접촉은 정치ㆍ경제ㆍ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경이적인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더욱이 문학 분야에 있어서는, 전후의 순서도 없이 일시에 밀려드는 다양한 문예사조의 혼류에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흡수가 강요되었으므로, 이 같은 역사적 결과는 점차로 외래문학에 대한 경이와 찬탄을 유발하며 자기의 문학유산, 즉 재래의 문학에 대한 낡은 문학이라는 恣意的인 멸시와 비하감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로 인한 자아의 열등의식은 종국에 가서 문학면에 있어서의 현대적인 사대사상까지 잉태하게 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 결과는 기존문학에 대한 엿 넘어가는데, 저 햇빛을 붙들어매고 싶은 마음에 붙들어매지는 못하고 숨이 턱에 닿은 듯이 갈팡질팡하는 한 부인이 나이 삼십이 될락말락하고, 얼굴은 분을 따고 넣은 듯이 흰 얼굴이나 인정 없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가을 볕에 얼굴이 익어서 선앵둣빛이 되고, 걸음걸이는 허둥지둥하는데 옷은 흘러내려서 젖가슴이 다 드러나고 치맛자락은 땅에 질질 끌려서 걸음을 걷는 대로 치마가 밟히니, 그 부인은 아무리 급한 걸음걸이를 하더라도 멀리 가지도 못하고 허둥거리기만 한다. 위에 인용한 것은 고대소설의 대표작인 의 첫머리와 신소설의 최초 장편인 의 첫 대목이다. 고대소설은 대부분의 경우 "大明年間"나 "화설 중고적에" 등과 같이, 어느 때 어디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하는 식으로, 거의 천편일률적인 서두로 시작된다 앞에 보인 의 경우도 숙종대왕 즉위초에 전라도 남원부에 월매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退妓로 成哥라는양반과 세월을 보내고 운운으로, 그 예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볼 수 있다.그러나 신소설은 그러한 고대소설의 규격적인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어떤 장면에서든지 자유롭게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재래에 없던 다양한 표현방법을 시도하였음을 볼 수 있다. 위에 예로 든 의 경우도 청일전쟁의 전운이 가시지 않은 모란봉의 정경과, 그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여인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리려고 애쓴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한다.다음에 드는 몇 개의 예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소설 서두의 이 같은 파격적인 변형은 소설의 형식면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겨울 치위 저녁 기운에 푸른 하늘이 새로이 취색한 듯이 더욱 푸르렀는데, 해가 뚝 떨어지며 복새풍이 슬슬 불더니 먼 산 뒤에서 검은 구름 한 장이 올라온다. 구름 뒤에 구름이 일어나고 구름 옆에 구름이 일어나고 구름 밑에서 구름이 치받쳐 올라오더니 삽시간에 그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서 푸른 하늘은 볼 수 없고 시꺼먼 구름 천지라 (銀世界)박동 마루길에 종치는 소리가 땡땡 들리더니 반양복 입은 여학도 한 떼가 '예외적 개인'에 문학사가 관심을 쏟는 이유이기도 하다.서구의 근대의식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인간중심의 휴머니즘이다. 즉 인간의 존엄성ㆍ인권ㆍ자유ㆍ평등 등이 그 핵심이 되어 있는 만큼 개화기의 주조를 이루는 시대의식도 자연히 여기에 귀착될 수밖에 없는 동시에, 그 휴머니즘의 기초가 되는 계몽성 또한 필연적으로 수반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신소설의 주제도 이에 연관되는 자주독립ㆍ신교육ㆍ여권존중ㆍ계급타파ㆍ자유결혼ㆍ평민의식ㆍ자아각성에 의한 현실고발 등이 다루어졌다.그러나 신소설은 아직 어떤 하나의 주제를 앞에 놓고 그것만을 깊이 파고든 작품은 적으며, 앞에 열거한 여러 가지 주제가 한데 얼려 개화기의 시대의식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것이 대체의 경향으로 되어있다.이상 신소설의 특징적인 점, 즉 고대소설이 지니지 못한 새로운 특색에 대하여 언급하였지만, 신소설은 개화기를 대변하는 소설로서, 개화기 자체가 근대화의 첫 단계인 만큼 신소설 또한 근대소설로서의 하나의 시도의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문장어미의 '이라'ㆍ'더라'ㆍ'노라' 등 시제의 무자각적인 사용, 사건전개에 있어서의 꿈 장면의 부자연한 설정, 자살미수의 빈번한 삽입 등으로 사건을 진행시키려는 우발성, 고대소설의 타성인 권선징악의 부분적 형식, 등장인물의 성격을 완전히 전형화하지 못하고, 하나의 이상적 유형의 경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 등 적지 않은 결함을 내포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현대소설과 비교하는 가치 기준에서의 문제이지, 고대소설과 비교하면 월등한 진척을 보이고 있음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2. 의 문학사적 의의-'신소설' 명칭 생성과 사용의 문학사적 의의는 우선 그것이 '신소설'이란 명칭 사용의 효시임에 있다. 신소설이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쓰이던 것)《신소설》: 1902년(光緖 28) 10월에 일본에서 창간된 월간지로, 그 후 상하이[上海]로 옮겨 출간되었다. 한국문학사만이 갖는 문학 양식상의 독특한 명칭 '신소설'과는 달리 단순히 월간지에.일반적으로 신소설의 문학사적인 연대기는 이인직의 초기작품이 발표된 1900년대 초엽부터 1917년 이광수의 이 《매일신보》에 발표되기 이전까지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갑오개혁 이전의 소설인 고대소설과 서구 근대사조의 영향을 받아 이 땅의 개화기의 현실을 반영한 신소설이 그 형식 및 내용에 있어서 특색과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1900년대 초엽을 시작으로 할 것이며, 또한 아직 신소설의 경향이 남아 있으나, 미비한 대로 현대 장편소설의 효시로서 신소설과는 자연 구별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이다.3. , , 에 대해서...1) 청일전쟁을 무대로 하여 시작되는 는 현재까지 밝혀진 한에서는 이인직의 최초의 장편이며, 신소설 전반에 있어서도 효시를 이루는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는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자주의식의 자각) 김관일은 전란에 청일전쟁으로 전란에 휩싸인 민중의 고난을 단순히 청나라 병사의 말단적인 폭행에 말미암은 것으로 보지 않고 이같은 역경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군본적인 원인에 대해 개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청일전쟁으로 그 사이에 끼여서 간 곳마다 발에 밟힐 정도로 무리 죽음이 터지는 조선사람의 억울한 입장을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그것이 또한 자기 땅 안에 남의 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남의 싸움판에서 애매한 동포의 처참한 살상이 아무 의의없이 참혹하게 벌어짐을 가슴 아프게 탄식하고 있다.과 자유결혼을 비롯하여 조혼 폐지, 재가(再嫁)의 허용, 구완서를 중심으로 하는 신교육사상) 구씨(구완서)의 소청이 있으니, 그 소청인 즉 옥련이가 구씨와 같이 몇 해든지 공부를 더 힘써 하여 학문이 유여한 후에 고국에 돌아가서 결혼하자 하고, …(중략)…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 나라를 독일국 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 옥련이는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 나라 부인의 지식을 넓혀서 남자에게 압제받지 말고 남자求)에 반발하는 피지배 계층의 생활을 그려, 그 밑바닥에 현실의 반영 및 항거 의식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비록 계급에 대한 항거 의식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사상의 유입에 따른 결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굳이 갑오개혁 이후뿐만 아니라 에서도 보여지는 의식으로 특별히 두드러지는 차이점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고전 소설이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인생관이나 권선징악적 윤리관에 얽매어 결말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데 반해 이 작품은 객관적인 사건의 진행을 다루었다는 점과, 고전 소설이 대개 스토리에만 힘을 기울여 사건의 발전, 심리 묘사 등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이 작품은 하나의 사건을 시작으로 결과적 성격을 갖는 연이은 사건의 배열과 치밀한 상황묘사) "내몸 하나난 능지처참을 하더래도 우리 거북이나 사려주오." 하난 목소리가 끊어지기 전에 그 목에 칼이 푹 들어가면서 춘천집이 뻐드러졌다. 칼 끝은 춘첩집의 목에 꽂히고 칼자루난 구레나룻난 놈의 손에 있난대 그놈이 그 칼을 도로 빼여 들드니 잠들어 자난 어린아해를 내려놓고 머리에서부터 나라치니 살도 연하고 뼈도 연한세살 먹은 어린 아해라 결 좋은 장작 쪼개지듯이 머리에서부터 허리까지 칼이 내려 갔더라.등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문장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러라', '더라'식의 고대소설식 어투의 잔존에도 불구하고, 장면묘사의 경우 한글의 맛(?)을 살려 표현한 예) 너른 속것에 치마 하나만 두루고 때가 닥지닥지 앉은 까막발에 버선도 아니신고 불고 염체하고 방 한가온대로 들어온다. 새벽녘 찬바람이 방고래 빠진 곳으로 들이치드니 가난이 똑똑듯난 등피없난 석유등불이 툭 꺼졌더라.들은 눈 여겨 볼 만한 점이다.3) 는 1908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이인직의 작품 중에서 가장 주제가 강하고 뚜렷하며, 이인직 자신에 의하여 원각사에서 이 땅 최초의 新연극 작품으로 무대의 각광을 받았다. 갑오개혁 이후의 시대성을 반영하여 현실적인 주제를 취급한 작품으로 한말 양반관료의 전제와 부패성을 척결하고,다.
    인문/어학| 2004.01.13| 9페이지| 1,000원| 조회(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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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문학사] 현대문학사의 중요 문제와 개념정리. 평가A+최고예요
    1) 이식 문화론에 대해 논하시오.이식문화론은 임화(林和)가 주창한 이론으로, 우리의 신문학이 서구적인 문학 장르를 채용하면서부터 형성되고 문학사의 모든 시대가 외국 문학의 자극, 영향, 모방으로 일관되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전통의 단절'과 일맥 상통한다.) 임화의 이와 같은 이식문학론은 "新文學史 硏究는 西歐的 形態의 文學이 成立하고 發展한 歷史를 中心으로 可能"하다고 하여 서구 지향적 태도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신문학사의 대상에 대한 그의 정의에서도 그가 무언중에 근대 정신을 서유럽의 문물이 들어온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거나 내용과 형식을 분리해서 생각한다거나 등의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그러나 임화는 모두의 비판처럼 서구주의자도 아니었으며 지나치게 이식ㆍ모방을 강조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근대정신을 지향했다기보다는 근대 초극이라는 목적아래 거쳐야만 하는 근대정신의 과정을 거치자는 의미에서 근대 정신을 말했던 것이다. 또한 이식ㆍ모방에 반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화를 비판하기 위해 그의 주장을 오독하거나 의도적으로 누락시켜 서술하기도 했다. 임화는 이식문화설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결코 단순한 이식ㆍ모방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식문화는 시간이 흐르면 결국 전통에 의해 자생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으며 자생적 문학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기 때문에 외래문학의 영향을 받아 얼마든지 발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창의적인 모방, 주체적인 이식은 부정적인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임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이식ㆍ모방 했다는 데 집착하고 비판을 위해 의도적으로 임화의 그 부분 말을 누락시켰다. 임화의 이식문화론은 임화가 월북했기 때문에 제대로 그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한 이념적인 대립으로 인해 더욱 많은 오류와 감정에 치우친 연구결과가 나온 것 같다.그러나 임화의 이식문화론에도 정당한 반론과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임화가 말하는 근대적 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인서 서구라는 변수를 한국문학에 강력한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한국문학의 내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서구화를 근대화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자체내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정신을 근대의식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한 한국문학 연구는 계속 공전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근대문학의 기점은 자체 내의 모순을 언어로 표현하겠다는 언어 의식의 대두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김현, 김윤식은 이런 체계적인 노력이 바로 영ㆍ정조 시대를 시작으로 싹텄다고 주장하고 그 시기를 근대 문학의 시작으로 잡는다.그러면 근대의 시작을 영.정조 시대로 잡은 이유를 살펴보자.1 영.정조 시대에 이르면서 이조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신분제도가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소위 경영형 부농이 생겨나고, 양반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예도 생겨난다.2 상인계급이 대두하기 시작하여,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된다. 직업의식이 점차로 생겨나, 전통적 신분제도에 대한 확신을 흩어지게 만든다.(박지원의 여러 소설의 테마가 됨)3 상류계층에서는 몰락한 남인계의 양반이 주가 되어, 이조사회의 여러 문물제도를 근본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하는 소위 실사구시파가 성립된다.(사회의 제반 제도에 대한 회의를 표명)4 관영수공업이 점차 쇠퇴하고 독자적인 수공업자들이 점차 대두하여 시장경제의 형성을 가능케 한다.5 시조, 가사 등의 재래적 문학장르가 집대성되면서 점차로 판소리, 가면극, 소설 등으로 발전된다.가장 중요한 것으로 서민계급이 점차로 성장하면서 서민과 양반을 동일한 인격체로 보려는 경향이 성행해 간다.(인간평등에 대한 점차적 자각과 욕망의 노출 - 동학의 인내천사상으로 집약)이와 같이 근대 문학의 기점을 영ㆍ정조 시대로 잡는다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근대 문학의 골격이 잡힐 수 있다.① 근대의식의 성장기 (1780∼1880년에 이르는 영.정조시대)는 근대적 언어 의식과 새로운 장르의 개척이 한국적인 신성한 것의 발견에까지 이르게 하는 시기로 박지원 같은 대가가 출현한다말해 분명히 개인이되 집단적인 변화의 지점에 서서 그것을 대변하는 이를 예외적 개인이라고 부른다. 위대한 작가(혹은 예술가)는 주어진 영역 내에서 하나의 가상적이면서 체계적인 세계 또는 거의 완전하게 체계적인 세계를 가진 작품을 창조하는데 성공한 예외적인 개인이다. 또한 그 작품의 구조는 그 집단 전체가 나아가는 구조에 대응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모든 특정한 개인이 한 시대의 전형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훌륭한 작가는 예외적 개인으로 불릴 수 있다. 작가가 쓴 인물을 통해 그 시대를 알 수 있듯이 작가를 보면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외적 개인이란 그 현장에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다르게 현장의 의미를 드러내는 사람으로 사회의 특징을 읽어내는 사람이다.4) 조연현 『한국현대문학사』와 백철 『신문학사』, 김현ㆍ김윤식의 『한국문학사』를 비교ㆍ논술하시오.백철의 신문학사조사는 근대 문학에 대한 최초의 단행본 형태를 가진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 서적이다. 백철은 문학사에 대해 작품사적인 방법 대신 사조사적인 접근을 하였다. 문예사조이입사로서 문학사를 정리했기에 임화와 함께 이식문화론자이며 그로 인해 사상적 주체성의 결여, 근대 문학의 피상성, 모방성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사조에 지나치게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작품과 작가를 놓쳐버리고 사조만을 추종, 사조 없이는 작가를 규정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조연현은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문학사를 문단사 위주로 정리하였다. 문인들의 활동 무대인 문단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계급문학ㆍ순문학ㆍ국민문학ㆍ모더니즘과 전통주의의 대립 등을 살피고 문학잡지와 문단사를 긴밀히 연관시켜서 문학사를 정리하였다. 백철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미적 자율성을 중시했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발표 기관의 우열에 의해 판단하는 문학사로서 문헌적 태도를 강조함으로써 문학을 막 자른 것과 같은 현상에 도달하였다. 사회적 여건과 정신적 배경을 경시했기 때문에 그의 문학사는 잡지, 신문 등 발표기관에 지나친 강조는 단점을 가지긴 했지만, 문학과 역사를 포용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문학사를 과거의 '문학적 집적물'로서의 사적기록이라는 史에 입각한 정의로 정리하면서 과거의 사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역사와는 구별되는 문학사 자체의 특징적인 서술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문학적 집적물'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문학사에서는 단순한 개인이 아닌 한 시대의 의미를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낸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문학들을 택해 이들의 상호관계로서 이루어지는 전체를 역사와 연관해서 해석해야한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문학사 기술방법론을 도입한 이 책은 앞선 문학사처럼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비평적 작업을 하였는데 작가와 사회에 대한 비평사적 전망을 먼저 제시하였고 압도적으로 발전된 문학사 기술방법을 보여주고 있다.5) 자연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한국문학사에서 전개된 자연주의의 특징에 대해 논하시 오.-자연주의 :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생한 문예사조를 말한다.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의 전통을 이어받아 자연주의 소설에서는 현실묘사의 정신이 더욱 구체화되고 심화되었으며 다윈의 진화설의 영향으로 인간의 생태를 자연현상으로 보게 되어 인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해부하고자 했고 결정론적 인간관에 의해 인간을 환경의 피조물로서 제시하려 한다.이러한 요인들의 영향 아래에서 자연주의 소설은 인간을 둘러싼 물리적인 환경과 그 가운데 단지 '존재할' 뿐인 한 '생물체'로서의 인간, 유전적 기질과 환경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자연 과학자가 갖는 최대의 객관성을 가지고 제시하려 시도한다.자연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인 에밀졸라는 그의 『실험소설론』을 통해서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이론 체계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창작에 적용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자연주의 이론에 입각해서 씌어진 첫 작품인 「테레즈 라캥」의 서문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은 자연주의의 창작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나는 외과의사가 시체에 행하는 분석의 노고를, 다만 살아 있는 두 몸뚱이 작품 속에서 인간의 추악한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이외의 자연주의에 대한 어떤 의식적인 기법의 수용은 찾아내기는 어렵다.6) "의미망"의 개념에 대해 논하시오.의미망이란 텍스트를 다른 작품과의 관계와 맥락을 통해 살필 때 필연적으로 형성되는 의미 맥락을 말한다. 문학사를 기술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적 집적물을 부분과 부분의 상호 관계로 이루어지는 전체로 파악하는 일이다. 모든 역사적 사실에 제 나름의 무게를 준다는 생각은 지적으로는 가능한 생각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모든 사실을 등가화하여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될 뿐 비평적 관점에서 전체와의 연관성을 볼 수 없게 한다. 이런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집적물을 전체로서 파악하고, 그 전체를 이루는 부분 부분들을 관계 가치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분은 그것 자체로서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로써만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 자체로 가치 있고, 완벽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얻는 것이다. 하나의 부분이란 바둑돌과 같아서 다른 돌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동하는 가치를 얻는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바둑돌이란 아무것도 아니며 부분과 부분의 관계를 통해 일종의 의미망이 형성된다. 그 의미망은 부분과 부분에 관계 가치를 부여한 자의 몫이다. 그 의미망을 통해 문학사가와 문학사와 문학적 집적물은 삼위일체를 이룩한다. 과거의 문학적 집적물은 그때 의미망을 이루려는 기호 역할을 맡는다. 그 기호를 이해하려는 문학사가는 그것에 관계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인이 되며, 그 의미망이 문학사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문학적 집적물은 문학적 실체가 아니라 관계를 이루려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기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의미인의 의무이다. 그 의미인을 통해 기호의 유효성과 한계가 주어지며, 단위의 크기가 주어진다. 작품 가치의 판단은 그 의미망의 그물코에 달려 있다. 비평적 해석으로 인해 각각의 작품은 스
    인문/어학| 2004.01.13| 9페이지| 1,000원| 조회(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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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소설론] 고소설과 여성 평가A좋아요
    고소설과 여성1. 들어가며우리의 고소설이 융성하게 된 17세기 이래 조선조의 소설, 특히 한글 소설의 주요 독자층은 여성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양반가 여성들의 소설 애호 경향을 이용하여 그들을 교화하려는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소설을 통하여 인간으로서의 도리, 즉 삼강오륜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이 여성 독자만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외부인과의 접촉이 별로 없이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여성 독자들에게 주는 교화의 효과는 남성 독자에게 주는 그것보다 훨씬 컸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을 통하여 여성을 교화하는 것이 여러 가지 계녀서) 여성들이 지켜야 할 덕목들을 모아 놓은 책. 조신한 처신을 당부하는 일종의 계율집.예로 송시열이 딸이 시집갈 때 직접 써준 계녀서에는 '부모를 섬기는 도리, 지아비를 섬기는 도리, 시부모를 섬기는 도리, 형제간에 화목하는 도리, 친척간에 화목하는 도리, 자식을 가르치는 도리, 제사를 받드는 도리, 손님을 대접하는 도리, 투기하지 않는 도리, 말을 조심하는 도리, 재물을 절제 있게 쓰는 도리, 일을 부지런히 하는 도리, 병환을 돌보는 도리, 의복과 음식을 만드는 도리, 노비 부리는 도리, 재물을 빌려주고 되돌려 받는 도리, 팔고 사는 도리, 비손하는 도리, 종요로운 도리, 선인들의 선행' 등 20여 조로 된 내용이 들어 있다. 이들 내용은 조선시대 사대부가 부녀자들의 행동에 관한 사회적 규범을 보여주는 것으로 말이 수양서 교훈서이지 여성들의 몸과 마음을 옥죄는 대목이 많다.(戒女書)들을 통하여 교화하는 것보다 훨씬 능률적이고 효과적이었을 듯하다. 만약 작가들이 소설의 열렬한 독자들이었던 양반가의 여성들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흥미를 주면서 전범(典範)이 될 교화적인 소설을 창작하였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여성 길들이기 소설') 김연숙은『고소설의 여성주의적 연구』에서 '여성이 남성 중심적 체제에 순응하고 남성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여러 가지 제약도 감수하고 견딜 수 있도록 여성을 교뜨리고 아내로서 남편을 배반하고 심지어 자식까지 죽이는) 비록 처음에는 장주를 죽이고 그 죄를 사씨에게 씌우자는 동청의 제안을 거절하지만 나중에 동청이 혼자 일을 추진하여 장주를 죽여버리자 결국 동청의 계략에 합세한다.등 악인의 전형인 교씨) 교씨는 작품 속에 처음 서술되는 부분부터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그 여자의 성이 교(喬)씨요, 이름은 채란(採卵)이라 하며 하간부(何間부)에서 생장한 사람이라. 본디 벼슬하는 집 딸로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그 형의 집에 의탁해 있는데, 지금 나이 16세라. 제 스스로 말하기를, '가난한 선비의 아내가 되느니보다 공후(公侯) 부귀가(富貴家)의 첩이 되는 것이 좋다.' (.김만중 著 전규태 譯, 『사씨남정기 ㆍ서포만필』 , 범우사 , 2001 p.34)가 끝내는 죽음을 맞이하는 권선징악을 주제) 작품이 권신징악으로 끝날 것임을 작품 속에서 몇 번씩이나 드러낸 바 있다.두부인이 눈믈을 흘려 가로되 " 필경은 좋은 때를 만나 누명을 신설하게 되리라. 예로부터 영웅열 사와 절부열녀들이 시운을 만나지 못하면 일시 곤액을 당한지라."(위의 책 p.64)유모 등이 위로하여 가로되, " 옛날 영웅호걸과 열녀절부가 이런 곤액을 아니 당한 사람이 드무니, …(중략)…장차 검은 구름을 바람이 쓸어버리면 일월을 다시 보올 것이니(생략)"(p.92)이것은 선인의 대표 사씨가 결국은 행복한 삶을 누리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사씨처럼 사는 것이 때로는 고난과 역경을 겪을 수 있을지라도 나중에 다 보상받는다는 것을 주입시켜 그들이 원하는 여성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로 하면서 여성독자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길들인다. 교씨처럼 사회(남성 중심의 사회)가 원하는 여성상에 반하는 인물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교씨를 처벌하는 장면은 작품 내에서 가장 폭력적으로 그려지는데 규범을 위반한 여성에 대한 가혹한 징벌) 유연수가 시종에게 명령하여 그녀의 가슴을 헤치고 심통을 빼라 한다. '부심추간'(剖心抽肝. 홍계월전은 남성으로의 위장이 밝혀진 뒤 여성이 어떻게 성 차별 제도와 대결하고 있는 가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한 바 있다.(「여성영웅소설의 이야기전개방식」,『한국의 여성영웅소설』,태학사. 2000, p. 280 )부부갈등의 해결) 이인경은 이에 대해 '여기에서 초래된 남녀의 갈등은 결국 천자의 승인,남편의 애첩인 영춘의 살육, 죽음에 이른 남편의 구원을 통하여 홍계월의 철저한 승리로 귀결된다. 결국 갈등의 해소는 홍계월의 능력과 남성의 권위주의 포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기존의 남성적 권위가 무너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작가는 여성영웅의 용맹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어떠한 능력으로도 홍계월을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남성이 인정하고서야 갈등은 해소되었던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인경,「여성영웅소설의 유형성에 관한 반성적 고찰」,『한국서사문학사의 연구』,중앙문화사, 1995, p.242)또, 박상란은 '「홍계월전」은 가정이라는 영역 안에서 굴종을 강요당하던 조선조의 사회의 성 차별에 대하여 직접 반기를 들고, 이를 시정하여야 한다는 의식의 확산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위하여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방안과, 남성의 철저한 패배위에서만 남녀의 평등이 이루어질수 있다는 의식까지도 전달하고 있다'고 말한다(박상란, 「여성영웅소설의 갈래와 구조적 특징」, 석사학위논문, 동국대학원, 1991, p43)은 계월이 여성의 신분이었을 때가 아니라 남성의 신분이었을 때 가능) 남편 보국의 애첩인 영춘을 치죄하여 죽일 때도 계월은 남성의 신분으로 돌아가 군법으로 다스리고 있고, 전쟁터에서 남편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할 때도 계월은 남성의 신분이다.한데 이는 여성이 밖에서는 아무리 영웅적인 인물이라 할지라도 안에서는 아내의 역할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홍계월전」의 한계라고 지적하는 연구자가 많은데 계월이 남성 못지 않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대리인 혹은 대리남성으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이 부분은 혜와 용기를 가진 여성이다.) 김연숙, 앞의 책, p.202이에 비해 남성 인물들은 통념적인 남성상을 벗어나 있고 겁이 많고 나약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홍계월전」의 남성 인물들은 모두 다 별로 권위적이지 않으며(남편 보국은 제외) 때로는 나약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김연숙, 위의 책 p.203계월의 아버지 홍무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도적에게 잡혀 거짓 항복했다가 관군에게 잡혀 유배를 간다.) 이 부분은 목숨을 위해 융통성을 발휘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당대의 논리에 의하면 목숨을 버릴지언정 도적에게 항복하고 그 무리에 합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도 관군에게 자신은 도적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홍무에게 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상 왈,"너는 일찍 벼슬을 하였으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도적의 무리에 들리오. 죄를 의논하면 죽을 것이로되, 옛일을 생각하여 원찬(遠竄)하노라." (정병현ㆍ 이유경. 앞의 책.p.158)유배지에서 짐승처럼 털이 돋은 모습으로 고기를 주어 먹으며 굴속에서 살다가 자신을 찾아온 부인을 만나는 홍무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또 계월의 시아버지 여공은 지위가 높은 며느리에게 주눅이 들어 아내에 대해 불평하는 아들을 조심하라고 타이르고, 천자는 계월이 여성인 것을 안 후에도 직위를 거두지 않고) "평국의 행동을 누가 여자로 보았으리오. 고금에 없는 일이로다. 비록 천하 광대하나 문무겸전하고 갈충보국하여 충효상산 지재는 남자라도 미치지 못하리로다. 비록 여자나 벼슬을 어찌 거두리오." …(중략)… "짐이 어찌 여자라 허물하리오. 유지와 인신을 도로 보내나니 추호도 과념치 말고 갈충보국하여 짐을 도우라."(위의 책 pp.179∼180)나라가 위태로울 때 그녀를 원수로 임명하여 국가의 위기를 넘긴다. 남편 보국만이 계월과 동문수학하면서 이미 그녀의 능력이 자신보다 월등함을 알았음에도 결혼 후 남편이라는 이유로 계월을 제압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 항상 아버지인 여공에게 하소연한다.) 이적에 영춘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남편인 윤지경이 자신을 박대하는 것이 서러워 하소연하는 것으로 이해될 만 하지만 아무리 공주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조선시대에 아내가 인내하지 못하고 남편을 험담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2)'여성 주체적 소설'의 특징'여성 주체적 소설'은 여성영웅소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첫째, 여성의 외모는 '여성 길들이기 소설'에서 나오는 이상적인 여성처럼 매우 아름답게 그려지기도 하고 별다른 외양 묘사 없이 어려서부터 남성적 자질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장시광.「여성 영웅 소설에 나타난 여화위남의 의미」p.303「옥주호연」,「이학사전」,「방한림전」의 여주인공은 어려서부터 남성적 자질이 있는 것으로 나오고) 「옥주호연」에서 여장부의 기질을 타고난 삼주(三珠: 자주(紫珠)·벽주(碧珠)·명주(明珠))는 답답한 가사일을 못 견디고 남장(男裝)으로 집을 떠나는 것으로 그려지고, 「이학사전」의 여주인공 이형경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보이고 남자아이와 같이 출세할 뜻을 밝혀 남복을 하며, 「방한림전」의 여주인공 방관주도 여걸의 기상을 타고 난 것으로 나온다.「홍계월전」이나 「박씨전」,「정수정전」에서는 여성이 매우 아름다운 것으로 나온다. 둘째, 여성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거나 자아실현을 위해서 적극적이며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셋째, 서술자는 남성인물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선을 갖기에 남성 인물의 약점이 폭로되고 그 외의 부정적인 요소들이 많이 드러난다.4. 고소설 속 여성 새롭게 보기-'계모'를 중심으로계모는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한 시대의 문학작품이 그 시대를 형성하는 사회, 경제, 문화적 조건에 의한 문학적 관습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어떻게 고소설 작품마다 천편일률적으로 계모를 악인의 전형으로 공식화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없지 않다. 물론 한 개인의 고뇌보다 집단 善의 가치에 골몰한 고소설 작가의 도덕적 의식을 간과한 ~108
    인문/어학| 2003.10.30| 13페이지| 1,000원| 조회(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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